2020년 3월 8일 일요일

Broken Flower 전자책이 출간됩니다.

안녕하세요. 류호성입니다.

2020년 3월 12일부터 <브로큰 플라워>의 전자책이 리디북스, 알라딘, YES24, 교보문고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서비스될 예정입니다.

도서명은 한국어인 <브로큰 플라워>로 등록되었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Man To Man

온 몸을 꿰뚫는 듯한 전류에 파일럿은 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럽고 짜증나는 기상 방법에도 투덜대거나 멍하니 있을 틈은 없었다. 시야 전방, 모니터 전체에 붉은 글자로 ‘WARNING’ 이라는 글자가 점멸하고 있었으니까. 의식이 반응하는 것보다 몸이 반응하는 쪽이 빨랐다. 반사적으로 조종간을 뒤로 당기자, 관성에 의해 파일럿의 몸은 시트에 파묻히듯 뒤로 짓눌렸다. 갑작스러운 기동으로 블랙아웃이 일어났지만, 그 대신 방금 전까지 그의 기체가 있던 자리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피할 수 있었다. 지면에 격돌한 미사일은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고, 불과 몇 초 사이에 꽤 뒤로 물러났음에도 충격파가 기체를 뒤흔들었다. 튀어나온 파편과 돌멩이가 기체를 두드리며 깡, 깡, 하는 짧지만 강렬한 금속음을 연주했다.

“니미...”

씹어 뱉듯 튀어 나온 욕설을 마무리할 틈도 없었다. 여전히 모니터에는 록온 된 상태라는 경고가 점멸하고 있었으니까. 사이렌과 닮은 느낌의 경고음이 반복적으로 콕핏 내에 울려 퍼졌다. 파일럿은 다시금 조종간을 움직이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기체 사방에 달린 수많은 카메라는 사방 360도 전체를 감지하고, 그를 구형 콕핏 내에 설치된 모니터에 비추고 있었다.

전황은 난전 상태였다.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치고, 미사일과 로켓이 날아다니고, 지면에는 폭염이 터져나갔다. 기체를 고속으로 회피기동 하느라 모니터에 표시된 모습들은 마치 날아가듯 흐릿하게 보였다. 그 사이를 파일럿은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살펴봤다.

지면을 달리는 보병들. 포탄이 폭발하며 생긴 구덩이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들. 아군 전차 한 대가 포탄을 날린 순간, 바로 머리 위에서 내리꽂는 미사일에 꿰뚫렸다. 포탑 상부 장갑판이 충격에 움푹 들어간 것도 잠시, 내부의 폭약이 유폭했는지 포탑은 사방으로 금속 파편을 흩날리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자신의 기체와 마찬가지로 지면을 미끄러지듯 활주하던 다른 기체를 따라가던 예광탄의 줄기가 교차한 순간, 기체는 마치 경련하듯 총탄에 춤을 추며 팔다리를 휘저었다. 활주하던 그 속도 그대로 지면에 고꾸라져, 그 자리를 지나가던 보병들을 덮쳤다. 흙먼지와 피보라가 사방에 피어올랐다. 채 몇 초도 되지 않는 그 광경이 끊어질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파일럿의 신경에는 선명하게 새겨졌다.

울려 퍼지던 경고음이 순간 마치 발광하듯 빨라졌다. 파일럿의 호흡이 순간 멈췄다.

“미사일, 10시 방향.”

기계로 합성한 듯한 목소리가 경고음 사이로 울려 퍼졌다. 멈췄던 숨을 가쁘게 내쉬며 파일럿은 기체의 말을 따라 10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니터로 보이는 하늘에 작은 점이 보였다.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레이더 화면을 보자 급속도로 접근하는 점이 보였다. 파일럿은 방금 전에도 그러다 기절해, 기체가 강제로 기상시켰다는 사실을 잊은 듯 조종간을 격하게 움직였다. 가속도를 무시한 무리한 기동에 기체가 울부짖는 듯한 금속음의 비명을 내지르고, 그 비명과 비슷한 소리를 파일럿은 내지르고 싶었지만 압박감에 폐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만을 낼 수 있었다. 피가 머리로 온통 몰리며 시야가 새빨갛게 변했다. 사라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파일럿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파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기체의 등 위로 새하얀 줄기를 그리며 플레어가 천사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어느새 점에 불과했던 미사일은 거대해져 있었다.

눈을 감을 틈은 없었다. 바늘 끝보다 얇아진 시야를 붙잡으려 노력하며 파일럿은 조종간을 여전히 움직였다. 폭발음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플레어를 발사한 보람이 있는지, 열원을 쫓아 빗나간 모양이었다. 조종간을 당기는 손과 페달을 밟던 힘에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자, 붉어졌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짓눌리는 G의 압박에서 벗어난 파일럿의 몸은 부족해진 공기를 들이마시고자 크게 들이셨다. 산소마스크를 통해 산소가 공급되고, 지끈거리는 두통에 신음하며 파일럿은 가빠진 숨을 고르고자 애썼다.

“발사지점 확인, 빨리!”

파일럿은 짧고 강하게 외쳤다. ‘알겠다’ 라든가, ‘라져’ 같은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답보다 모니터에 답변을 띄우는 것이 더 빠르니까. 기체는 파일럿의 요구에 순순히 답했다. 11시 방향, 거리는 1.5클릭. 파일럿이 주시하자 모니터는 바라보는 지점을 빠르게 확대했다. 이쪽을 향한 채 갈지자로 미끄러지는 적의 기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3식 중장엽병. 배치된지 얼마 안 되는 신형이다. 파일럿은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들은 정보에 의하면 무장은 체인건과 6연장 소형 미사일 포트 하나, 대구경 중박격포 한 문, 그리고 근접병기. 대단한 신병기는 없지만 견실한 무장이다. 확대된 모니터로는 미사일 포트의 빈 구멍이 몇 개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파일럿은 방금 전, 흐릿한 의식 사이로 들었던 폭발음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폭발음은 두 번. 아까 쐈던 미사일도 저 녀석이 쐈던 거라면 총 3발을 쐈다. 얼마나 남아있을까.

“씹!”

그런 생각을 하며 기체를 무작위로 움직이던 파일럿은 다시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면을 달리던 적 기체가 상체를 살짝 숙이는 게 보였기에. 그 동작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에. 미사일 포트 반대쪽에 달려있던 긴 뭔가가 움직이더니, 섬광이 보였다. 파일럿은 급하게 왼쪽 페달을 두 번 밟았다. 각부와 등 뒤에 달려있는 긴급 부스터가 고오오, 하며 울었다. 몸이 반쯤 둥실, 하고 떠오르는 느낌은 짧았다. 콰ㅡ앙! 하는 폭음이 한 박자 느리게 들리고, 다시 파편이 기체를 두드렸다. 우측으로 비스듬하게 떠올랐던 기체는 그대로 지면에 착지했다. 충격은 격렬해 파일럿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머리를 지탱하는 목에 힘을 줬다. 충격의 순간 넋을 놓고 있으면 관성으로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

“우측 각부 피로 축적.”

기계음은 냉정하게 기체의 상태를 보고했다. 알고 있다든가, 그럴 것 같았다든가 하는 불평을 입 밖으로 낼 틈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지금까지 계속 혹사해왔다. 이런 식의 회피가 몇 번 더 이어진다면 버티는 건 무리다. 지면에 내려앉은 순간 기체의 발목이 뒤틀려 박살나며 그대로 충돌, 속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십수 톤짜리 쇳덩이가 빠른 속도로 지면에 격돌하는 거다. 온 몸이 박살날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파일럿은 적 기체를 주시한 채 왼손 조종간의 검지 부분 버튼을 눌렀다. 기체의 왼팔이 움직이며, 팔 아래에 장착된 3연장 체인건이 불을 뿜었다. 조준은 파일럿이 주시하는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발사되는 예광탄이 마치 레이저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적 기체는 발포를 확인함과 동시에 갈지자로 다가오던 기체의 방향을 반대로 바꿨다. 예광탄의 줄기가 그걸 따라가 적 기체의 왼편을 두들겼지만, 장갑에 튕겨 예광탄이 사방으로 빗발치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팔 아래 장착된 체인건은 대보병용 소구경포고, 적 기체는 신형 중장엽병이니까. 전면 방호력은 IFV보다는 높을 것이다.

“3식 중장엽병 상대로는 50mm 이상의 화기를 추천.”

무심하게 조언하는 기계음을 향해 쌓여있는 분노와 짜증을 격렬한 욕설로 토해내고 싶었지만, 파일럿은 목구멍에서 숨과 함께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 영화 같은 일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으니까. 이쪽의 남아있는 무장은 이제 3초도 남아있지 않을 좌완의 체인건과, 손에 들고 있는 60mm 단축형 단포신기관포 정도. 왼쪽 어깨의 로켓발사기는 아까 다 써버린 뒤고, 오른쪽 어깨에는 근접전에 대비한 토마호크를 달아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반동포나 중박격포를 달고 올걸. 후회는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빠르게 담아뒀다. 욕설과 마찬가지로,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이쪽은 좌우 횡기동을 하며 대응할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적 기체는 우직하게, 조준을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을 할 뿐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모니터에 표시된 거리는 이제 700m.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가는 벌집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광경을 둘러봤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소수의 보병과 차량들이 보일 뿐, 이쪽을 도와줄 만한 아군은 보이지 않았다. 위안이라면 적의 공세 역시 한 꺼풀 꺾였는지 접근하는 중장엽병 외에는 그리 치명적인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저기 있는 전차나 IFV가 이쪽을 보고 날리면 그 순간 끝이지만.’

거친 호흡을 계속하며 파일럿은 생각했다. 지금 기도할 것은 제발 다른 적들이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저 중장엽병과 1 대 1의 대결을 주선해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게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눈꼽만큼이라도 있었으니까.

“주의.”

기계음에 주위를 둘러보던 파일럿은 다시 중장엽병에게 집중했다. 거리는 500m. 충분히 좁혀졌다고 생각했는지 적 기체는 체인건을 들어올렸다. 이제 확대된 화면을 통해 적 기체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사일 포트에 남아있는 미사일은 하나. 체인건은 3연장 57mm. 표준형인 이쪽은 포화에 2초만 온전히 노출되어도 산산조각난다. 극도의 집중과 긴장에 심장은 터질 것처럼 격렬하게 두근대고, 호흡 역시 너무 가빠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방금 전이야 데드맨 스위치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이 거리에서는 잠깐 혼절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다.

중구경 체인포인 만큼, 적 중장엽병의 기체는 양 손으로 체인건을 파지했다. 가쁜 호흡으로 타이밍을 쟀다. 적 기체에서 빛이 보인 순간, 파일럿은 기체를 있는 힘껏 좌측으로, 적 기체에게 접근하는 방향으로 밀었다. 빛줄기가 자신을 잘라버릴 듯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호흡은 멈춘지 오래였다. 빠득,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를 악 물고, 미친 듯이 펌프질 해대는 심장이 뿜어대는 핏줄기에 폐에 남아있는 숨만으로 어떻게든 산소를 공급한다. 이쪽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총알보다 빠를 수는 없다. 하지만 가까이 붙어서, 적의 오른쪽으로 파고들면 상대는 조준을 위해 기체를 돌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몸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에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지만, 바깥쪽을 향하는 것에는 신체를 돌려야만 따라잡을 수 있다.

어느새 발포하는 불꽃이 보이는 것과 부우웅ㅡ하는 발포음의 시간차가 사라졌다. 거리는 음속 이하. 적 기체도 바보가 아닌지 수 초간 이어지던 체인건 사격을 그만뒀다. 그 사이 탄약을 많이 소모했기를 바라며, 파일럿은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페달을 꾹 밟아 부스터를 소비하며 기체를 뒤로 힘껏 밀었다. 시트에 파묻히는 신체. 격렬하게 꺾여 헬멧을 썼음에도 통증이 느껴지는 뒤통수. 관성에 의해 발끝으로 혈액이 모이며 시야 전체가 검게 변하는 블랙아웃. 귀에 들리는 이명과, 격렬한 드럼소리 같은 심장 소리. 몸을 뒤흔드는, 이동방향을 예측하고 날아온 중박격포의 폭발음.

붕 떠올랐던 기체가 다시 지면을 밟고, 이번에는 몸이 반대로 앞으로 튕겨나간다. 시트벨트가 갈비뼈를 부술 듯이 흉부를 압박한다. 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목을 지탱해, 앞으로 꺾여 목이 부러지는 것을 방지한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피가 몰려 시야는 붉게 변하고, 반고리관 안의 림프액이 출렁이며 깨질 것 같은 두통, 내장 전체를 토해내고 싶어지는 울렁거림을 몰고 온다. 참지 못하고 악 물었던 입을 ‘푸헉’ 하며 열자, 위액과 함께 붉은 액체가 전방 모니터에 튄다. 하지만 통증을 참을 여유는 없다. 침과 콧물, 위에서 뿜어져 나온 위액과 피로 얼굴을 물들인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적 기체를 바라보며 다시금 조종간을 움직인다. 거리는 이제 200m 안쪽. 이명 사이로 다시 사이렌이 울린다. 미사일이 내뿜는 연기가 보이는 거리.

“영격.”

기계음에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으로 미사일을 바라보자, 기체가 멋대로 왼손을 움직인다. 부우우웅, 하는 발포음이 들리며 예광탄이 미사일을 향한다. 시야 절반을 가리는 폭발. 한 순간 적 기체의 모습을 놓쳤지만, 광량 필터가 폭발의 빛을 조절해 모니터에 띄워줘 눈이 멀지는 않았다. 적 기체는 다시 이쪽을 보며 체인건을 들어올렸다. 3연장 총신이 빠르게 원을 그리는 순간, 파일럿은 오른쪽 조종간의 검지를 눌렀다. 이미 적을 조준하고 있던 오른팔의 단포신 기관포가 퉁, 퉁, 하고 폭음을 낸다.

발사속도를 종합하면 화력은 체인건 쪽이 훨씬 우수하지만, 체인건은 초탄을 발사하기 전 총열을 회전시켜야 한다. 반면 이쪽은 방아쇠만 누르면 즉각 반응. 콤마초 이하의 차이로 이쪽의 포탄이 먼저 날아갔다. 단포신이지만 이미 양쪽의 거리는 ‘초’가 붙을 정도의 지근거리다. 발포와 거의 동시에 포탄은 착탄했다.

하지만 파일럿의 기대와는 다르게, 포탄은 중장엽병을 꿰뚫지 못했다. 체인건을 향한 포탄이 폭발하기 직전, 적 기체는 체인건에서 양 손을 놔버렸다. 폭발. 충격에 체인건이 유폭하며 사방으로 빛줄기를 뿜는다. 어째서 빗나갔는가. 파일럿은 찰나와도 같은 순간 깨달았다. 적 기체가 발포하면 회피해야한다는 생각에 총구에 집중하고 있던 것이 실수다. 모니터 내부에서 파일럿의 시선을 감지하던 카메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조준선을 시선 정 가운데ㅡ적 기체의 체인건에 뒀던 거다.

유폭한 총탄이 적 기체를 두들기고, 사방으로 퍼진 총탄 중 일부는 이쪽을 향해 왔다. 적 기체는 크게 비틀거렸지만, 제대로 발사되지 않은 57mm 포탄은 중장엽병의 장갑판을 두들길 뿐, 제대로 관통시키지 못했다. 반면 파일럿 쪽으로 날아온 포탄 한 발은 우완 어깨를 관통해버렸다. 일반형의 장갑판은 57mm 포탄을 제대로 방호할 수 없었다.

“니미...”

적 기체가 비틀거린 사이 다시 거리를 좁히던 파일럿은 모니터에 표시된 피해보고를 보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눈을 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믿는 신도 없지만 버림받은 기분이었으니까. 날아온 포탄은 우측 어깨 관절을 관통, 우완 시스템 전체를 다운시켜버렸다. 이제야 겨우 자세를 바로잡는 중장엽병에게 단포신 기관포를 한 발이라도 꽂으면 끝일 텐데,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반응은 없다.

“씨발!”

파일럿은 악다구를 쓰며 기체의 조종간을 힘껏 밀었다. 발밑의 페달도 있는 힘껏 밟았다. 부스터가 연료통에 남아있던 마지막 연료를 게걸스럽게 탐하며 불꽃을 내뿜었다. 적 기체가 겨우 자세를 잡는 순간, 기체는 그대로 오른쪽 어깨로 그걸 받아버렸다. 충격에 다시 한 번 파일럿의 몸이 사방으로 튕겨나갈 듯 흔들렸다. 이제는 목에 힘을 줄 겨를도 없어 머릿통이 마치 핀볼처럼 제멋대로 흔들렸다. 몸통 박치기에 적 중장엽병은 이번엔 균형을 잃고, 뒤로 밀리며 넘어져버렸다. 부스터를 다 소모한 파일럿의 기체는 그 위를 깔아뭉개듯 짓누르며 멈춰 섰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3초의 정적. 그 사이 흙먼지가 다시금 지면에 내려앉았다.

침묵. 그리고, 찌릿.

“ㅡ씨발!”

온 몸을 꿰뚫는 전류에 파일럿의 의식이 돌아왔다. 입 안 가득한 침, 위액, 피를 토하며, 콧구멍 속에 고여 있던 콧물과 피의 범벅을 내뿜는 호흡과 함께 뿜어내며 파일럿은 있는 힘껏 욕설을 내뱉고는 조종간을 움직였다. 다리로 몸을 짓누르며, 겨우 움직이는 왼팔이 적 중장엽병의 콕핏 바로 위에 체인건을 가져다 댄다.

파일럿이 왼손 조종간의 발포버튼을 누르는 순간, 적 기체가 움찔, 하고 경련했다. 적 파일럿 역시 기체가 전류를 흘려 강제로 일으킨 것이다. 부우우웅ㅡ하고 왼팔 밑의 체인건이 불을 뿜는다. 1초. 용광로와 같은 불꽃이 장갑판에 피어났다. 아무리 소구경이라도, 이 거리에서 체인건의 연사력으로 두들긴다면 장갑판에 손상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일럿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낸 채 약한 웃음을 지었다. 2초.

하지만 그 순간, 적 기체의 오른팔이 왼팔을 움켜줬다. 파일럿은 조종간으로 억누르려 했지만, 적 중장엽병은 힘으로 움켜쥔 왼팔을 밀어버렸다. 튀어 오르는 불꽃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더니, 적 기체 옆의 바닥에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3초. 끼긱, 끼기긱, 하는 금속음과, 위이잉ㅡ... 하고 총열이 공회전을 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중장엽병이 삐걱거리는 왼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향하는 것은 그저 쥔 채, 움직이지 않는 기체의 단포신 기관포. 빼앗아 쥐어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60mm 포탄이 이미 우그러지고 구겨진 장갑판을 뚫고 콕핏 안으로 들어와, 파일럿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파일럿은 충격에 몇 개의 스크린이 깨져 상이 일그러진 화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굳어버린 석상처럼.

“경고.”

무감정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파일럿은 그저 자신의 기관포로 삐걱거리는 손을 움직이는 적 기체의 팔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기 탈취 위험, 경고.”

다시 한 번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느새 적 중장엽병의 손이 굳어버린 오른손을 비틀고 있었다.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귀에 가득한, 차분해진 심박음 사이로 기계음이 다시 들려왔다.

“자체대응.”

그 순간, 기체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왼쪽 다리가 삐걱거리며 금속음을 연주한다. 오른쪽 다리가 비명을 토해낸다. 서보 모터가 굉음을 울리며 타버릴 듯 돌아가며, 토크를 극단으로 올렸다. 적 기체에게 붙잡힌 왼팔이 삐걱거리고, 기체가 부들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애를 쓴다. 콰직, 하는 금속음과 함께 휘청, 하고 기체가 순간 주저앉아, 오른손을 비틀어대던 적 기체의 손이 충격에 빠져버렸다. 타는 냄새가 밀폐된 콕핏 안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끼기긱, 끼긱, 끼기기기긱, 하고 금속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틀린다. 왼쪽 다리가 적 기체 오른팔의 관절을 무릎으로 짓누른다. 삐걱, 삐걱, 삐이걱,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기체의 왼쪽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일그러진 모니터의 피해보고창이 하나씩 둘씩 붉게 물든다. 중장엽병이라는 칭호에 맞게 더욱 출력이 강한 적 기체의 오른손에 끝까지 왼손을 붙잡고 있었지만, 관절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결국 금속부하를 못 이겼는지 까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뜯겨나갔다.

그제야 파일럿은 정신을 차렸다. 마치 온 몸을 전류가 꿰뚫는 것 같은 감각에.

“ㅡ으아아아아아아아!”

왼손의 조종간을 움직인다. 골격 자체가 뒤틀렸는지 잘 움직이지 않는 기체의 왼팔이 삐걱삐걱 거리면서도, 그에 반응해 움직인다. 오른쪽 어깨의 웨폰랙이 철컹, 하고 전면으로 튀어나온다. 삐걱거리는 왼손이 웨폰랙에서 튀어나온 토마호크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손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뒤늦게 깨달았는지, 정신을 차린 건지, 적 중장엽병의 부스터가 고오오오, 하고 불꽃을 내뿜었다. 거체를 움직이는 부스터가 힘을 더하고, 짓눌린 상태에서 그대로 비스듬히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체의 왼팔이 힘껏 내려쳤다.

잔뜩 우그러진 중장엽병의 전면장갑이 안으로 말려들어가고, 그곳에 토마호크를 박아 넣은 채로 기체는 더 이상 미동도 없었다. 추력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중장엽병이 마치 힘이 빠진 듯, 그 부스터의 불꽃이 사그라진 채 지면으로 떨어져, 쿠웅ㅡ... 하는 무거운 금속음을 냈다.

침묵. 1초, 2초, 3초. 덜컹.

삐그덕, 삐그덕 거리며 기체의 콕핏이 열렸다. 자신의 몸을 밀어 올려야 하기에 유압식 실린더가 덜컹, 덜컹하며 마지막 힘을 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는지, 겨우 사람이 기어나올 정도의 구멍을 열고는 멈춰섰다.

침묵. 1초, 2초, 3초, 4초, 5초. 삐그덕.

그 구멍으로 손이 삐져나왔다. 우그러진 장갑판을 붙잡고 힘을 낸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파일럿은 구멍에서 무거운 몸을 끄집어냈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힘이 빠진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쥐어 짜내며 침묵한 자신의 기체 위에 올라섰다.

모래먼지가 가득한, 누런 시야. 여전히 들리는 총성과 폭발음.

“퉷.”

입에 남은 피와 위액, 침, 그리고 결국 깨진 이 조각을 뱉어내고, 파일럿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눈물이 흐른 자국이 있는 흐린 시선을 돌렸다.

파일럿의 시야 끝에 있는 것은, 이쪽을 향해 포신을 겨눈 적의 전차.

못해먹겠네. 그런 생각으로 파일럿은 가슴팍의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냈다. 역시나 갈비뼈가 부러진 건지 통증이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입에 담배를 문 뒤, 라이터를 찾아 더듬거렸다. 적 전차는 마치 기다려주는 듯 그 광경을 가만히 조준하고 있었다.

지포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이고, 파일럿은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통증에 기침을 하며 침과 피를 토해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제 됐다는 듯 적 전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 전차가 있던 자리에서, 저 하늘 끝에 다다를 것 같은 폭염이 피어올랐다.

펑, 펑, 펑. 폭염이 전장 여기저기에 피어올랐다. 고오오오ㅡ 하고 지면 전체가 울렸다. 겨우 비틀거리는 몸에 중심을 잡은 파일럿은 담배를 입에 다시 물며 하늘을 올려봤다.

구름을 뚫고, 거대한 구조물이 내려오고 있었다.

전함이었다. 우주전함이었다.

사방의 포탑이 지면을 향해 불을 뿜는다. 강습용 캡슐 투하구에서 몇 개의 강하 캡슐이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뭔가가 시야 저편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아군의 전투기가 저 멀리의 적을 향해 포화를 토해내고 있었다.

“씨발.”

파일럿은 턱끈을 풀고 무거운 헬멧을 벗어 툭, 하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통, 통, 하는 소리를 내며 헬멧은 기체에서 떨어져 지면에 두어 번 튕긴 뒤 멈췄다.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고, 파일럿은 중얼거림과 함께 토해냈다.

“이 짓거리도 더는 못해먹겠네.”

하늘을 올려보며 파일럿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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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7일 ‘장르 코드 전력'(https://twitter.com/genrewritingst1) 주제 ‘로봇’에 참가하는 글입니다.

인공지능 로봇 연구소 긴급 기자회견

기자회견장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기자회견장의 상황을 찍는 셔터 소리, 미리 기사의 앞부분을 작성하는 타자 소리로 시끄러운 가운데 연구자가 마침내 단상에 오르자, 소란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찰칵대는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는 것을 잠시 견딘 다음, 발표를 맡은 연구자는 손가락으로 마이크를 두 번 툭, 툭, 하고 쳤다. 그것을 신호로 기자회견장의 모두는 침묵에 들어섰다.

“우선, 이번 발표를 듣기 위해 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발표자는 평범한 인사치례로 말문을 열고는, 단상에 놓여있던 발표문의 표지를 넘기고는 말을 이어갔다.

“당초 예고한 대로, 이번 발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성과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지난 발표에서 밝혔던 내용을 수년이 지난 지금,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발표를 맡게 된 점에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발표자의 마지막 말은 정말 감동에 벅차 말하는지 음색이 떨렸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플래시와 셔터 소리가 기자회견장을 가득 채운 것도 잠시, 발표자는 단상 옆에서 대기하던 도우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지금까지는 빈 페이지만을 띄우던 영사기가 새로운 페이지를 띄웠다.

“우선 지난 발표의 내용을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연구진은 지금까지 우리와는 다른, 하지만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금까지 성과를 보여 왔지만, 우리가 목표로 했던 ‘생각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는 성과들이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연구진의 연구 성과를 사진으로 띄우고 있었다. 현미경을 이용해야 볼 수 있는 작은 존재로부터, 직접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존재까지. 기사를 작성하는 타자 소리 사이로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행동할 수 있는, 즉 ‘움직이는 존재’를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는 있었지만, 그것은 ‘생각하는 존재’를 만드는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어진 영상은 이전 성과물들이 직접 움직이는 영상들이었다. 처음에는 뒤뚱거리며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는 영상들이었지만, 뒤로 이어지며 그 움직임은 자연스러워졌다.

“성과 없이 이어지는 오랜 연구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이전에 발표 드린 대로 저희는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든다는 꿈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간의 확인 끝에, 우리는 이 성과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확신에 가까운 발표자의 말에 셔터 소리가 다시금 늘어났다. 박수와 환호소리를 잠시 음미하듯 즐긴 뒤, 발표자는 단상 뒤쪽을 슬그머니 바라봤다. 괜찮다는 듯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발표자는 뿌듯한,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기자회견장의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럼 소개드리겠습니다. 저희 연구진이 만들어낸, 최초의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로봇’입니다.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카메라의 플래시가 사이키델릭하게 단상을 비췄다. 회견장의 모두는 긴장한 채, 웅성거림도 멈추고 단상 뒤에서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봤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하지만 길게만 느껴지는 기다림 끝에 ‘로봇’이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로봇’의 모습은 이질적이었지만, 모두는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생김새에 놀라 순간 박수를 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우선 ‘로봇’은 아주 자연스럽게 두 발로 걷고 있었다. 비틀거리지도, 부들거리지도, 이전에 개발되었던 이족보행 로봇들처럼 불안하지도 않았다. 아니, 발걸음 자체는 긴장한 것처럼 조금 주춤거렸지만, 그것 역시 연구진이 발표한 대로 인간처럼 생각한다는 말을 믿는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현으로 느껴졌다.

‘로봇’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1m쯤 될까. 무게도 그리 나가지 않는지, 바닥을 딛는 몸놀림은 가볍게 느껴졌다. ‘로봇’은 불안한 듯 옆에 함께 나오는 연구자의 손을 붙잡고 몸을 기울이듯 한 채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걷지 못해 부리는 꼼수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아이가 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동작이었기에.

‘로봇’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게 처음인지 투명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조금은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아픈지, 깜빡이는 두 눈은 약간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그 모습에, 뒤늦게야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그를 뒤따르듯 어느새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로봇’은 깜짝 놀란 듯 움찔, 하고 몸을 떨고는 손을 붙잡은 연구자의 몸에 더욱 달라붙었다. 마치 연구자의 뒤에 숨는 것처럼. 그 모습에 연구자는 다른 손으로 ‘로봇’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뭐라고 말했다. 마치 진짜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그 소리는 박수소리와 환호성에 묻혀 회견장의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로봇’은 알아들었다는 듯 연구자를 올려보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자의 눈빛을 확인한 발표자는 마이크를 잡고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 진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환호는 감사하지만, ‘아리’가 놀라고 있습니다.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발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리’를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목소리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박수를 쳤지만, 이윽고 조금씩 그 소리는 잦아들었다. 이윽고 조금 긴 시간이 지나 하나 둘 씩 자리에 앉자, ‘아리’라고 불리운 ‘로봇’은 그제야 안심이 됐다는 듯 마음을 놓은 것 같았다.

처음의 흥분이 지나가자, 기자회견장의 모두는 새로운 ‘로봇’을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실 자연스러운 이족보행에 가슴을 두근거렸지만, 저 정도의 반응은 이전의 ‘로봇’들 역시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로봇’은 이전에 발표했던 다른 ‘로봇’들과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외견부터 그랬다. 이전의 ‘로봇’들은 사족보행이 기본이었고, 인간의 생김새와는 차이가 있었다. 표면은 털로 덮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발이나 손, 얼굴의 생김새도 인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표피는 대부분 연분홍색의, 반짝이지 않는 무광의 뭔가로 덮여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것이 얼핏 고무나 실리콘처럼 보였지만, 그것과는 어딘지 다른 재질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손과 발도 인간과 거의 동일했다. 얼굴의 생김새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아래로 기다란 머리와 살짝 돌출된, 표피와 같은 채색의 코. 치아는 조금 더 붉은 색의 표피로 덮여 있었다. 한 쌍의 귀가 머리 양쪽에 붙어 있었고, 머리 위쪽에는 기다란 털이 자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희는 이 ‘로봇’에게 ‘아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로봇’, 아니 ‘아리’를 바라보던 기자회견장의 모두는 발표자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발표자는 만면의 웃음을 지은 채, 자신과 연구자의 사이에 숨듯 서있는 ‘아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 행동에 ‘아리’는 깨달았다는 듯, 잠시 망설이더니 두 사람의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아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자연스러운 말에 기자회견장은 다시 술렁였다. 녹음된 게 아니라 본인이 하는 말이라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이전에는 말을 하는 ‘로봇’이 선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번 유사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저 인간의 말을 기억해 따라할 뿐이었다. 다시금 이어진 웅성임과 셔터 소리에 ‘아리’는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얌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발표자가 다시 발언을 이어갔다.

“그럼 우선 ‘아리’를 만들어낸 과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로봇’ 개발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물론 이족보행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로봇’ 개발에 있어서 운동능력을 구현할 수 있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요. 동시에 인공지능 개발 부분에서는 ‘로봇’의 모든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는 ‘뇌’의 클럭 성능을 높이고, 머신러닝을 통해 다양한 행동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발표자의 설명이 이어지며, 슬라이드에서는 여러 사진과 설명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 모인 기자나 관계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런 중대한 사건의 발표에는 이런 이론적인 부분이 빠질 수 없었다.

“에츄.”

기나긴 설명이 이어지던 중, ‘아리’가 갑자기 소리를 냈다.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묘한 소리를 낸 ‘아리’는 양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달은 연구자는 단상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도우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회견장의 모두는 그 행동의 의미를 궁금해 했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한 채 단상 위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바라봤다. 연구자가 잠시 단상 뒤를 향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진 뒤에 연구자는 직물로 만든 커다란 보온용 천을 들고 와, ‘아리’의 어깨에 덮어줬다. ‘아리’는 기다렸다는 듯 그 천으로 몸을 감쌌다. 연구자는 보관대에서 또 다른 천 주머니를 꺼내 ‘아리’의 발에 씌워줬다. 그 행동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발표자는 설명했다.

“아, ‘아리’는 표면이 ‘털’로 보호되지 않아 보온성능은 조금 떨어집니다. 일반적인 ‘로봇’들처럼 항온성을 유지해야하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연구 중입니다.”

발표자가 설명하는 사이, 도우미 하나가 한랭지용 보온팩을 천 주머니에 담아 ‘아리’에게 건네줬다. ‘아리’는 고맙다는 듯 도우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천에 담긴 보온팩을 몸에 두른 천 안으로 집어넣고 꼬옥 끌어안았다. 극한지역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라 온도가 높은 것을, ‘아리’의 항온성을 위해 천 주머니에 넣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뒤늦게 이해했다.

“그럼 설명을 이어가겠습니다. 이를 통해...”

잠깐의 헤프닝이 끝나자, 발표자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설명이 길어지자 ‘아리’는 어느새 긴장이 풀린 건지 지루한 건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다 휘청, 하고 몸을 한 번 넘어트릴 뻔하다 일어났다. 처음 ‘아리’와 함께 나왔던 연구자는 당황하며 다시 몸을 반듯이 하는 ‘아리’에게 웃어주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리가 그 위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렇게 처음 5개의 ‘로봇’을 만들어냈지만, 제작 과정에서 4개는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단 하나 남은 ‘아리’를 저희 연구진은 수년간의 ‘육성’ 과정을 거쳐 이렇게 여러분께 발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발표자의 말이 끝나고, 더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들은 이윽고 다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연구자의 다리에 앉아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거리던 ‘아리’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듯 몸을 한 번 떨고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럼 이제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발표자의 말에 기자들은 우루루 손을 들었다. 발표자는 그 중 가장 먼저 손을 든 기자를 가리켰다.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리코 타임즈의 A-457입니다. 그럼 현재 ‘아리’는 제작된 지 몇 년이 지난 겁니까?”

“현재 ‘아리’의 생산부터 5년이 지났습니다. 저희 연구진은 완전히 ‘육성’을 끝내고 완성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10년 정도가 필요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GBC의 HE-983입니다. ‘아리’를 개발한 과정은 잘 들었지만, 정말 ‘아리’가 인공지능을 지녔다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전의 다른 ‘로봇’들과 달리 외견이 인간을 닮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한 내용이 아닌 정말 ‘인공지능’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모두가 발표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늘 발표의 가장 중요한 점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발표자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아리’가 직접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리’, 이리 오렴.”

발표자는 앉아있는 ‘아리’를 향해 말했다.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 자리를 비켜준 발표자 대신 단상 앞에 섰다. 처음에는 조금 높이가 맞지 않았지만, 도우미가 발판을 가져오자 모두에게 잘 보이게 되었다.

“아, 아직 ‘아리’는 ‘육성’ 과정에 있으므로 너무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잘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질문해주세요.”

발표자의 말에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HE-983은 아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리’, 지금 기분이 어떻지?”

“아, 그... 조금 긴장돼요. 이렇게 많은 ‘인간’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기자의 질문에 아리는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말투는 정말 긴장한 인간과 같았다. HE-983은 다시 질문하려 했지만, 발표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HE-983이 이해했다는 듯 자리에 앉자, 다른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아리’는 명령을 내려달라는 듯 발표자를 바라봤고, 발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는 조심스럽게 기자를 가리켰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생각한다’는 게 어떤 거고, 어떻게 증명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 대답은 자신 없다는 듯, ‘아리’는 기자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발표자는 웃으며 마이크를 잡고 대신 말했다.

“하하, 말씀드렸듯이 ‘아리’는 아직 ‘육성’과정에 있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신 것 같군요.”

발표자의 말에 기자들 사이에서는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질문한 기자 역시 머쓱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다시 기자들이 손을 들고, ‘아리’는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렇게 많은 ‘인간’을 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는데, 그럼 이 자리에서 혼자 ‘로봇’인 것에 대해서는 어떤 기분입니까? 다른 ‘로봇’들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나요?”

“저 혼자 ‘로봇’인 건 늘 그래서 괜찮아요. 다른 ‘로봇’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요.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낸다는 건 어떤 뜻이죠?”

“애완용 로봇과 지내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인간을 공격하듯 ‘아리’를 공격해 부상을 입힌 적도 있지만, 온화한 ‘개’ 형이나 ‘고양이’ 형 애완용 로봇과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발표자의 대답에 기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다. ‘아리’는 가능한 내에서 대답을 하고, 잘 대답하지 못하거나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은 발표자가 대신 답하거나 ‘아리’를 돕거나 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아리’가 답변하는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발표자는 그 모습에 말했다.

“자, 아무래도 ‘아리’가 지친 모양이니 질답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 하나만 받도록 하죠.”

마지막 질문이라는 말에 기자들은 자신이 마지막을 차지하겠다는 듯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아리’는 마지막이라는 말에 고민하듯 사람들을 둘러보다 한 명을 지목했다. 뒤쪽에 앉아있던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최초의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로봇으로서, ‘아리’는 유일한 개체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간과도 다르고, 다른 ‘로봇’들과도 다른 것 같군요. 즉 세상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인데,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나요?”

‘아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발표자가 대신 대답하려 했지만, ‘아리’의 표정을 보고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리’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저 혼자라는 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연구실에 있는 많은 인간분들이 제 ‘육성’을 위해 함께 해주시고 있어서 괜찮은 것 같아요. 게다가 연구가 잘 진전되면 저랑 같은 ‘로봇’을 잔뜩 만들 거라고 하셨으니까, 외로워도 그때까지 기다릴래요.”

‘아리’의 대답에 기자는 알겠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발표자 역시 ‘아리’의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싱긋 웃어보이고는 ‘아리’를 데려온 연구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자는 ‘아리’에게 이제 됐다고 속삭였다. ‘아리’는 알겠다는 듯 자신에게 내민 연구자의 손을 잡고 단상 뒤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발표자는 마이크를 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방금 ‘아리’가 한 마지막 답변은 좋은 대답이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미리 말한 것은 아쉽지만요. 네, 우리는 ‘아리’를 통해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을 완성시키고, 제작과 육성 과정을 더 안정화시킬 예정입니다. 계획대로 진척된다면,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사회 곳곳에서 우리의 일을 대신해줄 것입니다.”

단상 너머로 사라지기 전, ‘아리’는 왜인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연구자는 그런 ‘아리’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아리’가 단상 너머로 사라지지 않은 것을 모른 채 발표자는 말을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로봇’은 자체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합니다. ‘성별’이 다른 두 개체간의 재생산 과정을 통해, 두 개체의 특성을 공유하는 ‘로봇’을 제작하지요. 물론 인간이 태어나는 것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희는 연구를 통해 그 과정을 빠르고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를 도와줄 장치 역시 연구 중이고요.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여러 화학 물질을 섭취해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고, 또 개체수가 늘어나는 만큼 장기적으로 ‘로봇’이 완성된다면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이미 ‘아리’와 짝을 이룰 다른 ‘성별’의 개체도 제작 중입니다. ‘로봇’ 연구의 앞날은 밝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자, ‘아리’.”

결국 연구자는 ‘아리’를 재촉했다.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구자를 따라 단상 뒤의 대기실로 향했다. 사람이 적어져 긴장이 풀렸는지, ‘아리’는 ‘로봇’ 특유의 불필요한 동작으로 가슴 부위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엄청 긴장했어요.”

“그래도 잘 끝냈어. 역시 ‘아리’ 넌 대단한 로봇이야.”

“그런데 저랑 같은 ‘로봇’을 만들고 있다는 건 사실인가요, 박사님?”

“물론이지. 지금은 제작 초기 단계지만, 곧 생산 자체는 완료될 거야. 물론 ‘아리’ 네게 ‘육성’ 과정이 필요했듯, 너랑 같은 ‘로봇’도 ‘육성’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네 ‘육성’이 끝날 무렵에는 그 ‘로봇’도 어느 정도 ‘육성’이 끝날 거란다.”

“기대돼요. ‘외로움’이라는 건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 저 같은 ‘로봇’은 저 하나라는 건 지금까지 생각도 못 해봤거든요.”

“그런 것도 ‘아리’ 네 ‘육성’에서 좋은 자극이 된 모양이구나. 발표가 너무 이른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잘 된 일인 것 같아. 자, 지친 모양이던데 잠시 전원을 끄고 쉬고 있으렴. 다 끝나서 연구실로 갈 때가 되면 전원을 넣어줄 테니까.”

“네, 박사님.”

연구자의 말에 ‘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에너지가 부족한 ‘로봇’들처럼 길게 ‘하품’을 했다. 연구자는 마치 애완용 로봇 같은 그 동작에 싱긋 웃고는, ‘아리’를 위해 준비된 대기실의 문을 열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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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7일 ‘장르 코드 전력'(https://twitter.com/genrewritingst1) 주제 '로봇'에 참가하는 글입니다.

저 너머의 그대에게 향기를

-정말 후각이라는 게 없다고?

-응. 그게 그렇게 이상해?

채팅창에 뜬 답변에 자연스럽게 ‘당연하지’ 라고 타자를 치려던 손이 멈춰 섰다. 나는 하려던 동작이 멈춰 허전해진 손으로 팔짱을 낀 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봤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이 채팅창이 주장하는 설명을 믿는다면.

사이트 이름은 앤서블. 읽기는 이렇게 읽지만 표기는 ‘Answer-Able’이다. 노골적으로 외국 소설가가 주장한 그 개념과 ‘이름은 달라요~’ 하고 배 째라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려는 이름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처음 사이트가 나왔을 때 그 제목과 함께 홍보한 것이 중요한 점이지.

‘다른 은하의 지적 생명체와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앤서블이 내세우는 채팅방의 캐치프레이즈다.

몇 년 전에 공개된 이 사이트는,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은하와는 다른, 멀리 떨어진 다른 은하들과 연결된 채팅방이다. 뭐 은하를 넘어서 다른 세계, 흔히 이세계라고 부르는 곳들과도 연결된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직접 그런 쪽과 연결된 적은 없기 때문에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진짜 주장대로 다른 은하와 연결되는지도 모르겠고.

사이트에서 주장하는 바로는 그들의 특수한 뭐시기 장치를 이용해 양자얽힘 어쩌구를 사용하여 다른 은하나 이세계와 통신을 할 수 있으며, 상대가 진짜 존재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을 부정하지 않고, 이론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할 수 없다나 뭐라나. 역으로 상대가 진짜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도 없지만, 일단 튜링 테스트는 통과했기 때문에 처음 공개됐을 때는 반짝 화제를 모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반짝’이라는 점이다. 초기에는 밥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거리는 것이 인생의 모든 것인 괴짜들이나 관심을 가졌지만, 이윽고 과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고, 언론에서도 나오고, 그러면서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 정부까지 끼어들어 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음’ 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앤서블은 전파를 우주로 날려 보내지 않았다. 그냥 데이터 패킷이 들어가고 나오는 서버였다. 조사에 의하면 뭔가 수상쩍은, 처음 보는 기계와 연결은 되어있었지만 기계는 내부 구조상 전혀 작동하지 않는 깡통이었고, 재질도 구조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동일하게 제작해서 사용해본 곳도 많았다. 물론 응답하지 않았고, 앤서블 사는 자체적인 채팅 프로그램을 이용해야만 같은 결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프로그래밍 언어는 자체 제작이었고, 소스는 엉겨 붙어 사흘은 퉁퉁 불어터진 것 같은 스파게티였다.

언론도 정부도 과학계도 ‘이건 사기다!’ 라고 관심을 끊었고, 일부 이용자는 사기죄로 고소까지 했지만, 법정은 ‘아니라고 증명도 할 수 없다’ 는 앤서블 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그렇게 앤서블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사라졌다.

나 같이 아직도 이용하는 몇몇 괴짜를 빼곤 말이지.

왜 이용하냐고 물어본다면, 맞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는 그 점에서 로망을 느꼈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고, 먼 은하의 다른 존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에서 과학적 탐구심과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속내는 간단했다.

학부생 시절 앤서블이 처음 나왔을 때 호기심에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중 하나였고, 그때부터 친해진 채팅 상대와의 정이 사기라며 손을 털어버리기에는 너무 깊어진 게 원인이었다.

바로 지금 채팅 상대, #202003042031과 맺은 인연이.

(채팅명은 무조건 숫자로 매겨진다. 저래보여도 16진법이라 꽤 많은 인원이 배정 가능하다.)

-그게 그렇게 이상해?

한참 생각을 하다 보니 채팅창에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답장이 없어서 보냈나 싶어 나는 팔짱을 끼고 하던 생각을 정리해 키보드를 움직였다.

-아니, 이럴 때면 진짜 다른 은하에 있는 상대와 채팅하나 싶어서.

-그러게. 난 네가 말하는 ‘후각’이라는 거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하기사, 후각이 없을 수도 있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나. 오감 외에도 감각이 있는데 인간은 감각기관이 없어 모른다든가. 비둘기는 지구 자기장을 느낀다든가, 뭐 그런 것들. 그럼 후각이 없을 수도 있겠지. 지렁이는 촉각 말고는 없댔나.

-그래서 그 후각이라는 게 뭐야?

시프(아무래도 12자리의 숫자를 죄다 치며 상대를 부르기 힘들어서 상호 양해하여 부르는 별명. 서로 고민하다 채팅명을 16진법에 넣어봤더니 끝이 ceef로 끝나서 정했다.)의 재촉에 나는 다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후각이 없는 상대에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으니까. 고민하다 움직이는 손가락은 느릿하고 의심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음... 냄새... 를 느끼는 감각인데...

-냄새는 또 뭔지 모르겠다.

-그러네.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텔레파시 설명했을 때처럼?

-그런 느낌이지.

시프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쪽 종족은 텔레파시를 쓸 수 있다는 모양인데, 내가 아는 텔레파시랑은 개념이나 감각이 완전히 상이했다. 한참 설명을 들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그 정도로 이해하기로 했던 게 떠올랐다. 뇌의 정후방 하측을 떨면서 ‘귀’를 뒤집는 감각이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아, 그래!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잽싸게 타자를 쳐 넣었다. 이럴 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으니까.

-그러니까, 화학분자를 느끼는 감각이야. 공기 중에 있는 화학분자를, 우리는 ‘코’라는 기관을 통해 느낄 수 있어.

-와! 신기하다. 투이네 종족은 그럼 그걸로 언제든 주위의 상황을 인식하겠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강렬한 ‘냄새’는 맡을 수 있지만, 농도가 옅거나 무신경하면 별로 느끼지 못하거든.

나는 냄새라는 개념이 없는 시프를 위해 따옴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자기 종족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건 경험상 모든 종족의 공통점인 모양이라, 우리는 서로를 ‘누구네 종족’ 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예의다. 투이는 말할 것도 없이 내 대화명의 약칭이고.

-그럼 네가 말한 꽃향기는 어떤 건데?

맞아. 그걸 이야기하려다 여기까지 온 거였지. 나는 창밖에 만발한 매화를 바라봤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눈을 감고 집중하자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 꽃이라는 건 단일 화학분자로 이루어진 생물이야?

-어... 그건 아닐걸.

아무래도 시프는 자신이 모르는 개념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그런 개념을 접하는 매력에 앤서블을 쓰고 있는 거니까. 나는 조금 더 설명하려 노력했다.

-‘냄새’는 보통 여러 화학분자가 결합되어 느껴지는 걸 거야. 나도 그쪽 전공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꽃마다 ‘냄새’가 다르고 음식마다 ‘냄새’가 다르거든.

-그렇구나. 화학분자의 조합에 따라 ‘냄새’가 달라진다는 건, 거의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다는 뜻이겠네. 공기 중의 화학분자에 반응하는 걸 보면 분자 농도와 양에 따라서도 바뀔 테고.

-응. 그래서 우리 종족은 ‘향수’라는 걸 쓰기도 해. 꽃 향기라든가, 그런 것들을 풍기는 액체를 뿌리는 거지. 좋은 향은 기분을 좋게 하거나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거든.

-우리 종족의 ‘kdfio’ 같은 건가보네.

-응? ‘kdfio’가 뭐야?

자동번역이 안 되는 걸 보면 시프네 종족의 개념인 모양이었지만, 반사적으로 물었다.

-너희 ‘냄새’처럼 텔레파시로 느끼는 거야. 좋은 ‘kdfio’는 주위의 기분을 차분하게 하거나, 재생산을 촉진시키는 감정을 일으키거든.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재생산’ 말고 다른 단어를 써줄래? 매력적이라거나, 뭐 그런 거.

-하하, 미안. 투이네 종족에서는 이런 걸 ‘분위기 없다’ 라고 한댔지? 응.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줘.

-시프네 종족의 ‘재생산’ 개념은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음...

-그 이야기는 늘 들었으니까 그만 해도 돼. 서로의 종족차를 인정하자고.

“뭐 하고 있어? 또 채팅이야?”

웃으며 다음 타자를 치려했지만,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대신 고개를 돌렸다. 연구실에 들어온 선배가 탓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잽싸게 타자를 쳤다.

-미안. 선배가 와서. 그만 가볼게.

-그래. 또 보자. 꽃 ‘냄새’ 이야기 재미있었어. 나도 느껴보고 싶네.

시프의 답변을 보고 채팅창을 닫았다. 내 뒤에 선 선배는 커피를 한 모금 후룩, 하고 마시더니 질렸다는 투로 말했다.

“넌 또 앤서블 가지고 놀고 있냐. 유행 지난지가 언젠데.”

“냅둬요, 남의 취미인데. 그리고 뒤에서 모니터 보지 마요. 매너 없게.”

“매너는 네가 없지.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데이터 정리는 다 했어?”

“선배도 커피 마시러 가놓고선. 제건요?”

“당당도 하다.”

코웃음을 치면서도, 선배는 내 몫의 커피를 탁, 하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따뜻한 덕분인지 선배가 들어올 때부터 느껴졌던 커피 향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선배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또 그 시프인가 하는 애랑 논 거야?”

“뭐, 그쵸.”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려놨던 창을 띄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참 대단도 해. 상대가 진짜 다른 은하의 외계인인지, 어디 AI 연구소에서 장난치는 건지, 컨셉질하는 배불뚝이 씹덕일지도 모르는데 몇 년이나 채팅하고.”

“시프는 그런 애 아니거든요. 몇 년이나 채팅했는데 그런 거면 벌써 꼬리가 드러났겠죠.”

“모르지 뭐. 원래 안 드러내고 컨셉질 하는 애가 제일 무서운 법이야.”

“선배가 친구는 인터넷 친구도 없어요 하는 인간이라고 남까지 까내리지 마요.”

“누가 친구는 인터넷 친구도 없어. 너야말로 계속 앤서블 가지고 놀다보면 그런 애들하고만 같이 놀게 된다.”

놀리듯 이죽거리는 선배의 말투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꼭 옛날 사람처럼 꼰대처럼 말하기는. 선배가 하는 말은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이랑 똑같다고요.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어떻게 알아? 직접 만나본 적도 없잖아? 야,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을 위험하게 어떻게 만나?’ 하는.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하긴, 우리 부모님도 내가 예전에 정모 나간다니까 그러시더라. 그래도 좀 다르지 않아?”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것 같더니 토를 달았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진짜 사람들이지만, 앤서블은 뭔지 알 수도 없잖아. 진짜 외계인인지 진짜 사람인지 뭔지. 설령 진짜 외계인이라고 쳐도, 다른 은하면 만나볼 수도 없고. 아님 걔네, 그 시프네 종족은 초광속 이동이라도 가능하대?”

“아뇨. 걔네도 이제 위성에 깃발 꼽는 정도인 거 같던데.”

“봐봐.”

“그렇게 따지면 인터넷 친구도 똑같죠. 선배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사실 정체를 숨긴, 그 뭐냐, 옛날 영화...”

“맨 인 블랙?”

“아, 맞아요, 그거. 그거처럼 지구에 사는 외계인인지, 지구에도 안 사는 외계인인지, 그림자 정부가 만든 AI인지, 지저에 사는 랩틸리언 외계인인지,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선배 인터넷 지인도 전부 만나본 것도 아닐 거면서.”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음모론 마인드다. 너도 지구평평단이냐? 그러면서 앤서블은 용케도 쓴다.”

“시끄러워요. 적절한 음모론은 즐거운 지적 유희거리라고요. 지난번에 앤서블에서 랜덤채팅으로 만난 종족은 진짜 평평한 지구에 산대서 서로 얼마나 싸웠는데.”

“너도 진짜 중증이다. 그래서, 오늘은 뭐 이야기 했는데?”

“냄새에 대해서요.”

“냄새?”

“네. 이쪽은 봄이라 꽃향기가 난다고 했더니, 시프네 종족은 ‘후각’ 이라는 개념이 없대요.”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커피 향이 다시금 코를 통해 느껴졌다. 이 냄새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생각하며. ‘커피향’ 외에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거 컨셉 진하네.”

“물어봐서 대답해줬더니 또 비꼬려고.”

나와 마찬가지로 커피 향을 맡으며 중얼거리는 선배에게 쏘아주자, 선배는 어울리지도 않게 눈을 감고 커피 향을 음미하는 척을 하며 말했다.

“생각해봐. 왜 동물들이 ‘냄새’를 맡는지. 왜 동물들은 특히 더 민감한지.”

“그게 생존에 유리하니까 겠죠?”

“그치. 예로 들어서 우리도 음식이 상했는지 아닌지 냄새로 알잖아. 주위에 뭐가 타면 타는 냄새로 미리 알기도 하고. 동물들은 먹이를 찾기도 하고. 시각이나 청각 못지 않게 후각이 생존에 유리하니까 그렇게 진화했겠지. 근데 걔네 종족은 뭐 어디서 살기에 냄새를 못 맡겠냐?”

“흐음.”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 뭐라고 해주려 했더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까지 시프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쪽도 생명체로서 기본 요소는 대부분 비슷하다는 걸 확인해왔고. 그래서 몇 년이나 이야기를 했는데 ‘냄새’ 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에 놀란 거고. 선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야 물속에 살거나 하면 냄새를 못 맡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또 아니라며. 그런데 ‘후각’ 이라는 개념이 없다니, 신비하게 컨셉질 하다가 대차게 미끄러졌다는 생각부터 드는데.”

“시프가 그럴 리는 없어요. 이 정도로 실수를 할 거면 이전부터 실수를 했을 테고. 아무래도 그쪽 행성에서는 후각이 없어도 생존하기에 무리가 없었나보네요.”

“그 뭐시기냐, 텔레파시 같은 걸로?”

“네. 냄새는 아니지만 뭐라더라, ‘kdfio’ 라는 비슷한 건 있는 모양이던데. 텔레파시로 느끼는.”

“크드피오?”

“발음이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채팅으로 본 거니까.”

“거 참 어지간히도 믿는구만. 걔가 은하 연대 보증 서달라면 서주겠다.”

“선배가 서달라는 것보다는 확률이 높을 걸요.”

“너무하네. 그래도 내가 더 오래 알고 지내지 않았어? 매일 직접 보기도 하고.”

“오래 알고 지낸 거랑 신뢰도는 비례하지 않거든요. 술 마실 때마다 다음에 줄 테니까 내달라고 한 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 그래. 좋아하는 상대라 이거지. 너도 참 독특하다.”

선배의 말에 발끈해 인상을 구겼다. 내 눈빛에 놀리듯 이죽거리던 선배는 실수했다는 듯 입을 닫았다. 나는 조금 더 선배를 노려봤지만, 사실을 말한 것이기에 한숨과 함께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래, 나는 시프를 좋아한다.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그리고 연인이 되고 싶다보다는 미만의 감정으로. 어차피 될 수도 없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한 번 서로의 생김새를 글로 설명한 적은 있었지만, 어차피 글을 통한 묘사니까 서로 좋을 대로 생각할 거라고 본다. 일단 시프가 묘사한 바로는 인간의 생김새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본 적은 없으니 나는 내 멋대로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다. 그 쪽이 편하니까. 아마 시프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후각’에 대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다. 일단 발성기관은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시프 말로는 자기네 종족은 그것보다는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무래도 발성기관을 통한 대화는 우리의 ‘수화’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었다. 텔레파시는 내 쪽에서는 시프에게 있어서 ‘후각’과 같은 것이기에 느낄 수 없고, 따라서 ‘들어볼(이 동사로 표현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선배가 늘 말하는 대로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아닌지도 모른다. 정말 지구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가 컨셉을 잡고 노는 걸지도 모르고, 어딘가 연구소에서 개발한 AI(왜 다른 은하에 사는 외계인이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AI일지는 모르겠지만)일지도 모른다. 설령 진짜 다른 은하의 외계인이라고 해도 만나볼 일은 없다. 피차 기껏해야 자기 모행성의 위성에 로켓을 날려서 깃발 꼽는 정도의 과학력을 가지고 있다니까. 한 번은 서로의 은하가 서로 관측됐는지 이야기도 해봤는데 그것조차 아니었다. 둘 다 전문은 아니지만 우리가 서로 교차확인한 정보가 맞다면 반경 465억 광년 내에는 없다. 이것만으로도 사실이라면 관측 가능한 우주 외의 정보를 접한 대발견이지만, 전공이 아닌 나나 시프에게는 ‘그렇구나’ 수준의 이야기다. 앤서블을 통해 확인한 정보는 과학적 발견으로 인정되지도 않고(증명이 불가능 하니까).

그렇지만 나는 시프가 좋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성격이 좋았다. 지적이고, 호기심이 많고, 이해심이 많고, 관심사는 비슷하고, 신비했으며, 자상했다. 물론 종족의 차이인지 분위기 없고, 눈치가 없을 때도 많고, 이해심은 많지만 자신감도 많아서 무시당하거나 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싸운 적도 많고, 그런 점은 싫어하지만, 원래 완벽한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건 이 은하든 다른 은하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뭔가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한 번쯤 만나보고 싶긴 하지만 서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고, 애당초 내 짝사랑일 가능성이 더 크다. 시프네 종족과 우리 종족의 연애관... 이랄까, 시프네 종족의 표현을 빌리면 ‘재생산’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은 크게 다른 모양이니까. 어쩌면 시프 역시 그런 문제로 좋아하면서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보지만, 그건 너무 희망적인 관측일 것 같고.

무엇보다 이건 이것대로 로맨틱하잖아?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존재. 서로 확인조차 불가능한 불확정적 존재. 그런 존재를 있다고 믿고, 좋아한다는 건 충분히 로맨틱하다고 생각한다.

뭐, 누구 말 맞다나 2차원의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과 뭐가 그리 다른가 싶기도 하지만.

영원히 이 마음을 간직하겠다, 만날 일은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늘 하나야, 혹은 네가 돌아봐주지 않아도 나는 영원히 너를 사랑하겠어, 아, 지고지순한 나의 순애보... 뭐 이런 개소리를 할 생각은 없다. 나도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을 좋아할지도 모르고, 시프가 어느 날 ‘재생산’에 성공했다고 할지도 모르고, 계속 채팅이 가능할지도 모르고, 어느 날 이 로맨틱한 불확정성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관계와 마음을 좋아하고 만족한다. 그래서 선배가 방금 한 것처럼 그 부분을 센스 없이 지적하면 나도 모르게 발끈하는 거고.

“야, 화 좀 풀어.”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동안 말없이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으니 불안해졌는지 선배가 말을 걸었다. 나는 그제야 아무 말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화난 거 아니에요. 그냥 일하다보니 그런 거지.”

“세 시간이나 아무 말도 없이 그러고 있으면 충분히 화난 거라고 생각하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응.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갔어.”

그 대답에 둘러보자, 과연 다른 연구실 사람들은 떠났는지 빈자리뿐이었다. 선배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네가 말없이 집중하고 있으니까 다들 말도 못 걸고... 왜 그러냐고 해서 대답했더니 다들 나만 뭐라고 하고... 가시방석이었다, 야.”

“그래서 집에 안 가고 있던 거예요?”

“응. 그러니까 슬슬 화 풀어. 내가 말 잘못 했어.”

“그러니까 화난 거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보통 화났던데.”

“계속 귀찮게 굴면 진짜 화낼 거예요.”

눈을 흘기며 그렇게 쏘아주자, 선배는 그제야 화난 거 아니라는 말을 믿었는지 하하하, 하고 마음 놓은 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는 쓸데없이 귀여워서 곤란하다.

창밖을 보니 해는 이미 진 후였다. 그럼에도 매화 향기는 여전히 코를 간질였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선배는 물었다.

“시프한테 ‘후각’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게 그렇게 신경 쓰여?”

“뭐에요. 아까는 컨셉질이라면서.”

“역시 화났네. 뭐, 솔직히 여전히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네가 신경 쓰니까.”

“절반쯤은 선배가 진화 어쩌고 하면서 쓸데없는 소리해서거든요.”

“나머지 절반은?”

“글쎄요.”

나는 창밖을 보면서 생각한 바를 말로 꺼낼까, 아니면 속에 담아둘까 고민했다. 말해서 또 놀림 당하거나, 쓰잘데 없는 소리를 듣거나, 괜히 말로 꺼냈다 그 감성이 옅어지거나, 그런 걸 고민했지만 결국 조용히 입 밖으로 꺼냈다. 불확정의 존재라 매력적인 것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내가 좋다고 생각한 건, 역시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지잖아요?”

별 대단한 건 아니다. 기껏해야 꽃향기고, 애당초 이야기를 꺼낸 건 그냥 주위에 있는 신변잡기를 이야기하다 나온 결과였고, 평소에 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꽃이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문과적 마인드가 있다면 나는 이과적 마인드 쪽이라.

그래도, 시프가 말까지 했으니까.

나도 느껴보고 싶다고.

눈을 감고, 상상 속의 시프와 함께 꽃향기를 맡는 상상을 했다.

“풋.”

그 한 소리에 바로 감성은 작살나버렸지만. 딱 좋은 타이밍에 들린 웃음소리에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봤지만, 선배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진짜 화낼 거예요.”

“아니, 보기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싶어서.”

“좋아요, 해보자 이거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선배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아니, 웃음은 반사적인 거였다니까. 너도 내가 눈 감고 그윽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건, 역시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지잖아?’ 같은 말 하면 웃을 거 아냐.”

“그 전혀 안 닮은,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서 진짜 한 번 싸워보자는 감정은 느껴지네요.”

“진정해, 진정. 감수성이 풍부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분위기에 웃은 거지 말 자체는 나도 공감해. 하긴, 이런 날씨면 좋아하는 사람하고 꽃이 만발한 곳에 피크닉 가서 꽃향기라도 맡고 싶어지니까.”

“안 어울려요.”

“봐봐, 너도 똑같이 반응하잖아.”

선배는 히쭉 웃더니, 그래도 내가 진정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냄새’를 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설명은 해줄 수 있겠지.”

“어떻게요?”

내 질문에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말해줄게. 내일 채팅에서 전해줄 수는 없겠지만, 원래 이런 건 생각났다고 바로 전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원하는 것도 넘치는 감수성의 산물이니까.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거든.”

“좋아요.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들어나 보죠.”

나는 끝까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는 선배의 옆구리를 손날로 찌르며 말했다.

며칠 뒤. 앤서블에 접속하고, 한동안 한가하게 랜덤 채팅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시프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안녕, 투이.

-안녕, 시프. 마침 잘 됐다.

-잘 됐다고?

-응. 며칠 전에 ‘냄새’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

-기억하고 있어. 그 이야기를 더 해주게?

-비슷해. 우선 이것 좀 봐줘.

나는 채팅창에 미리 복사해뒀던 글자들을 복사해 붙였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시프의 채팅이 올라왔다.

-화학분자식이네?

-맞아. 지금 내가 있는 곳에 피어있는, ‘매화’ 라는 꽃냄새의 화학식이야.

선배의 아이디어라는 건 이 정도였다. 솔직히 기대해서 손해 봤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툴툴거리자 선배가 한 말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너나 시프나 이과계잖아? 감성도 생각하는 것도.’

-시프 네가 말했듯이 조합식은 무한하니까, 이 ‘향기’의 조합식을 알려주고 싶었어.

-‘향기’?

-‘냄새’ 중에 좋은 ‘냄새’. 좋은 ‘kdfio’ 같은 거.

-아.

분자식 자체는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니 나왔다. 서로의 원자 목록, 그러니까 주기율표는 이미 예전에 교환한 이후였기에 시프가 식을 알아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는 ‘주기율표’ 자체를 교환했다기보다는 부르는, 표기하는 명칭을 교환한 거지만. 우리가 아는 원자들이나 시프네 종족이 아는 원자들이나 크게 차이가 없었거든. 관측 가능한 우주 밖에도 동일한 원자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그럴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으면 전해지는 것이 있어도, 불확정성을 파고들지 않기에 멋진 것도 있으니까.

-한 번 상상해봐. 주변에는 꽃들이 잔뜩 펴있어. 하얀색 꽃이야. 꽃잎은 다섯 개고, 타원형이야. 가운데는 노란색의 수술이 있어.

서로 색에 대한 것도 교환했다. 하지만 보는 색이 같을지는 모른다. 서로 전자기파의 주파수 영역까지 알려줬지만, 느껴지는 빛이 같을지는 모르겠다. 다른 은하의 완전히 다른 생명체일 테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알려준 것이 사실이라면.

-만발한 꽃들에서는 그런 화학분자들이 풍기고 있어. 좋은 향기, 좋은 kdfio야. 느껴지는 건 달콤한 미각에 가까워. 살짝 바람이 부니까 더욱 많이 화학분자들이 날리는지 향이 강해져.

화학분자식을 공유하는 게 과연 로맨틱하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는 멋도 뭐도 없는, 이론적인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로맨틱하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투덜거리던 선배의 의견을 듣길 잘 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 결코 만날 리 없는 다른 우주의 존재들이, 동일한 법칙을 가지고 있고, 그 법칙에 따라 무한한 조합 중에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느낄 수 없는 감각을 통해.

나 역시 느끼려고 노력했다. 시프네 종족이 가졌다는 ‘텔레파시’를 통해, 좋은 kdfio라는 것을. 정확히는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뇌의 정후방 하측을 떨면서 ‘귀’를 뒤집는 감각을 상상하려고 해봤다.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노력했다는 거다.

-햇빛은 기분 좋고, 온도도 적당해. 겨울동안 얼었던 땅이 녹아서 나는 향기도 있어. 그게 꽃향기와 섞여서 느껴져. 어딘지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야.

결국 앤서블은 상상을 요구하는 도구다. 어쩌면 믿음일지도 모르겠고.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앤서블 사가 내놓은 기계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과학 원리를 통해 진짜 양자얽힘이 어쩌구 하는 현상을 퉁퉁 불어 꼬여버린 스파게티 같은 코드를 통해 데이터 패킷을 다른 은하에 주고받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냥 나 같이 멍청한 인간들에게 정액제라는 명목으로 돈을 삥 뜯기 위해 만든 깡통일지도 모른다. 시프는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다른 은하의 멋진 존재가 아니라 지구 어딘가의 골방에서 ‘얘 봐라 뭐 하는 거야’ 하고 손가락질하며 웃는 배나온 기분 나쁜 인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확정성이란 좋을 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건 좀 이과적이지 않나?

소리도 전파도 빛도 그 무엇도 상대성 원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앤서블도 불가능해보이지만 본인들 말로는 ‘상대성 원리를 속이고 있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상대성 원리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상상만 하면 다른 은하의 존재가 내 옆에 앉아 매화꽃의 향기를 맡고 있으니까.

시프가 상상하는 광경과 내 모습은 좀 다르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나도 멋대로 시프를 인간으로 상상하며 내 옆에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프네 종족에게 ‘앉는다’ 라는 동사가 적절할지도 모른 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잠시 후 채팅창에는 시프의 메시지가 올라 왔다. 여전히 무신경하고 분위기 없게 내 등 뒤에서 커피를 든 채 모니터를 엿보는 선배가 ‘오’ 하는 소리를 내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아주 좋은 kdfio야.

시프가 웃는 게 보이는 것 같아, 들리는 것 같아, 나는 웃었다.

-너도 느껴져, 투이?

-응. 느껴져. 아주 좋은 향기야.

눈을 감고, 매화의 화학분자를 코 가득 담았다.

아주 좋은 kdfio,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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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4일 '장르 코드 전력'(https://twitter.com/genrewritingst1)에 참가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