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일 토요일

Juvenile Mosaic - 그녀는 디멘션 인베이더 (3)


 한밤 중. 새로 나온 게임을 하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지..."
 모니터 화면에 나오는 건 평범한 미소녀 게임의 화면. 대화창 있고 미소녀 스탠딩 CG 있고. 하지만 문제는 전개다.
 "요즘 세상에 네토라레 전개라니..."
 쌍팔년도도 아니고 말이야. 요즘 세상에 이런 전개가 먹힐 것 같냐. 속으로 그런 투덜거림을 담아두면서도 손가락은 클릭을 계속한다. 뭐, 다음 전개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고 어쨌든 돈 낸 건데 이런 전개에 패닉에 걸려 플레이 중단하고 CD 부수고 인증샷 올리고 제작사에 보내기에는 돈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라서.
 상황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주인공이랑 알콩달콩하며 친구 이상 연인 미만으로 지내던 히로인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남자 캐릭터가 등장했고, 나름대로의 사정에 의해 히로인은 주인공과 새로운 남캐 사이에서 흔들리고, 주인공은 그 상황에서 히로인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고... 뭐 정확하게 말하면 히로인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네토라레 전개와는 다르지만, 요즘 세상에는 이정도 전개만 나와도 충분히 네토라레 전개라고 취급할 수 있지.
 과거, 그러니까 쌍팔년도나 그에 준할 정도의 옛날이라면 꽤 흔한 전개였다. 당시의 연애물이나 러브코메디에는 흔한 전개였고. 주인공이나 독자, 혹은 플레이어에게 위기감을 주면서 경쟁심도 느끼게 하는 그런 거지.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이딴 전개를 선택했다가는 위에서 내가 말했던 대로 플레이 중단하고 CD 가위로 썬 다음 제작사에 보내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작금의 오타쿠들은 이런 전개 싫어한다고. 그냥 나에게 올인해주는 히로인이 좋은 법이라고. 현실에 지쳐서 2D로 찾아온 연약한 망명자들에게 이런 괴로운 전개 가지고 오지 말란 말이다. 아, 이건 너무 우리를 무시하는 언급이었나.
 아무튼 이런 건 전개 자체도 문제지만 히로인에게도 안 좋다. 비처녀 논란까지 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게 얼마나 큰 폭풍을 불러왔던가. 뭐 난 그 세대가 아니라 나중에 듣기만 했지만. 요즘은 히로인이 주인공 두고 다른 남자랑 미묘한 관계만 흘러도 빗치 소리 듣는다고. 당장 나만 해도 이 사실만으로 히로인에 대한 호감도가 좀 떨어졌고.
 예로 들어보자고. 지금 내게 열렬히 대시하고 있는 수아가 만약 다른 남자에게도 그런다고 한다거나, 사실 따로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가 있다거나 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니, 아니지."
 왜 여기서 수아를 떠올리는 거냐. 굳이 따진다면 미미쨩을 떠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멋대로 괴상한 상상을 떠올린 뇌를 괴롭히며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래, 그거다. 차마 내 뇌는 미미쨩을 대상으로 그런 불순한 상상을 떠올릴 수 없었던 거다. 거기에 엄밀히 말하면 미미쨩은 쥰지를 좋아하면서 나를 좋아하니까 이것만으로도 이미... 아니, 그런 아픈 팩트는 필요 없고. 아무튼 그런 거다. 비교대상으로 좋았을 뿐이야, 응.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 변명을 마치고 나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클릭을 계속했다.
 하지만 어느새 대화창에 뜨는 텍스트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눈에는 들어왔지. 읽고는 있으니까. 다만 뇌 속에서 거주공간을 찾지 못한 채 자꾸 사라질 뿐이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 알게 뭐야."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내 알게 뭐야. 어차피 내 애인은 미미쨩 하나 뿐. 수아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다. 그야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왜 좋아하는지 영문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그 마음이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른 채 식는다고 해도 놀라울 것도 없고 사실 여러 남자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차피 수아는 예쁘니까 수아를 좋아하는 애가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니, 그러니까 내 알바 아니라니까 그러네."
 고개를 붕붕 내저었지만, 왜인지 모를 짜증과 불쾌함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나.
 지난 번 데이... 아니, 같이 놀러갔다 온 후로 계속 수아를 떠올리고 있다.
 수아와의 관계에 특별한 변화는 없다. 변덕으로 사준 피규어에 수아가 기뻐하고, 별 생각 없이 눈팅하고 있는 수아의 페이스노트에 피규어 사진이 올라오고, 약속했던대로 게임기와 내가 추천하는 게임 몇 개를 빌려주고, 그것들 역시 페이스노트에 글이 올라오고, 그 외에는 그냥 늘 그렇듯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다. 그 대화의 태도도 그리 큰 변화는 없고.
 그렇긴 한데...
 "아, 됐어. 짜증나. 안 해."
 결국 나는 짜증에 저장 버튼을 누른 후 게임을 꺼버렸다. 이 전개는 뭐냐고, 계속 짜증나잖아. 지금 이런 걸 유저보고 즐기라고 하는 거냐. 짜증나는 이유는 게임이 아니라 자꾸 떠오르는 생각 때문이라는 사실은 가뿐히 무시하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래. 어차피 시간도 늦었으니 학교 가기 위해서 잘 시간이 됐을 뿐이야. 밤새면서 할 정도로 갓겜인 것도 아니고.
 하지만 결국 몰려드는 생각에 제대로 잠에 들지도 못했다.
 그렇든 말든 다음날 해는 뜬다. 피곤함에 초췌한 얼굴로 등교하자, 오늘도 역시나 먼저 등교해있던 옆자리의 수아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손을 살짝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안녕, 우민아. 좋은 아침이네."
 "그래, 좋은 아침."
 자리에 앉으며 적당히 대꾸하자, 수아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얼굴이 안 좋네. 또 밤새서 게임한 거야?"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그랬는데. 몸에 안 좋아. 그야 좋아하는 것도 알고 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알지만, 그렇게 피곤하면 다음날 게임하기도 힘들잖아?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걱정되고."
 평소라면 "너랑 상관 없잖아" 같은 말로 퉁명스럽게 대꾸했겠지만, 오늘은 그 대신 수아를 바라봤다.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진심으로 좋아하는 내가 수척한 모습이 걱정된다는 듯한 눈빛. 나도 모르게 "그래, 알았어. 고마워" 하는 말이 나올 뻔 했지만 그 직전에 애써 고개를 돌렸다. 정말 왜 이러는 거냐, 나.
 "그러고 보니까 우민아."
 "왜?"
 "나 우민이 너한테 할 말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 딱히 그 말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이럴 때는 마주보는 게 예의일 테니까. 아무리 내가 늘 귀찮다는 듯 무시했다고 해도.
 "또 좋아한다거나 그런 이야기일 거 아냐."
 "아냐. 뭐... 어떤 의미로는 맞나?"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수아는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허공을 보더니 말했다.
 "나,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








 "...어, 응."
 겨우 정신줄을 붙잡았다.
 아니지, 잠깐만. 왜 내가 정신줄을 놓는 거냐. 어제도 생각했잖아 수아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순간 의식이 날아갈 정도로 충격을 받는 거냐. 아니, 그래. 이건 그거다. 어제부터 계속 고민하더니 리얼이 되어서 마치 예언이라도 한 느낌에 그러는 것뿐이야. 하지만 어제부터 애당초 나는 왜 이런 걸 고민했던 거냐고.
 정신을 차리자, 아침 조회 직전의 웅성거림으로 넘치던 반의 모두도 조용해졌다.
 처음 수아가 내게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로부터 한동안은 반 아이들도 매번 나랑 수아를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주로 '수아가 왜 저러는 걸까' 쪽으로. 하지만 그것도 꽤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냥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려 모두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뒤였다. 이제 와서 수아가 내게 말을 걸든 좋아한다고 하든 신경도 안 썼으니까. 뭐 페이스노트를 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피규어를 샀다든지 미소녀 게임을 하는 것에는 다들 걱정, 이랄까 조롱이랄까를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다들 보는 거냐.
 아무 말도 없는 정적의 살얼음을 깨듯이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역시 이제 질린 거구나. 생각보다는 오래 갔네. 하긴 우민이도 계속 무시하고 그랬으니까. 아무리 좋아한다고 그래도 식었겠지. 근데 상대는 누구지? 기타등등 기타등등.
 "우민아?"
 그런 지방방송에 신경 쓰는 사이 어느새 수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겨우 입을 움직였다.
 "아, 어, 응."
 "그래서, 너에게 조언을 좀 듣고 싶은데."
 "...조언?"
 이건 또 뭐냐.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뇌 속에 담아놓고 사는 거냐. 이 맥락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질문에 다시 한 번 의식이 날아갈 뻔 했다고. 아니, 진심으로, 지금까지 '좋아한다' 고 했던 남자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조언을 듣고 싶다' 고 말하는 의도는 뭐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어, 그,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란해진 뇌로 내가 내뱉은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누, 누구인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음... 알 것 같긴 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네."
 고민하듯 한 수아의 대답에 안 그래도 혼란하던 뇌는 그 와중에도 재빨리 한쪽 구석을 치우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 것 같은 사람? 그게 누구야. 자발형 은둔형 외톨이 아웃사이더 내가 아는 사내놈은 없는데. 학교에 친구도 없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친구는 인터넷 친구가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반 애인가? 친구는 없지만 우리 반 애들이라면 이름... 은 몰라도 얼굴... 은 대충 알 걸? 아마? 알지?
 기분 탓인지 반 아이들의 웅성거림도 다시 잦아든 느낌이 들었다. 마치 수아의 입에서 나올 대답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듯. 꿀꺽,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역시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그런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아는 대답했다.
 "쿠레나이군."
 "..."
 누구?
 오늘만 세 번째로 날아가려던 의식을 붙잡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쿠레나이군? 그게 누구야 대체. 우리 학교에 외국인도 있었어? 아 그야 옆반에 하나 있긴 했지만, 걔는 일본인은 아닌데. 쿠레나이군이라니...
 "...아."
 그 순간, 알아냈다. 나는 수아를 보며 물었다.
 "<승리의 날개>에 나오는 쿠레나이?"
 "응. 쿠레나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수아의 뻔뻔할 정도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 같은 거 아니거든. 진짜거든.
 <승리의 날개>. 내가 수아에게 소개해준 미소녀... 아니, 미소년 게임.
 미소녀 게임을 신나게 하던 수아가 어느 날 내게 '그런데 이런 게임은 여자애들이랑 사귀는 게임만 있는 거야? 남자애들이랑 사귀는 게임은 없어?' 하고 물어봤다. 뭐, 확실히 남자인 내가 미소년들 공략하는 게임 해봤자 짜증나는 거랑 비슷했던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수아에게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 그 게임을 소개해줬다. 내가 해본 적은 없으니 추천은 아니지.
 판타지 세계관의 이웃의 거대 제국에게 위협당하는 작은 왕국을 배경으로, 국왕인 아버지가 죽어 새로운 여왕 즉위를 앞에 둔 공주님을 주인공으로 앞으로 그녀를 모시게 될 어째서인지 20대 미소년만 그득그득한, 사실 호스트부가 아닐까 싶은 남자애들의 충성을 받으며 자신을 평생 지켜줄 단 하나의 수호기사를 고른다는 내용이다. 해본 적은 없지만 여자 덕후들 사이에서 평판은 꽤 좋은 모양이고, 다음 분기에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다고 들었다. 그 중에서 문제의 '쿠레나이' 는 뭐라고 해야 하지, 전형적인 쿨데레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왕실 친위대이면서도 공주를 인정하지 못하고 늘 쿨하고 퉁명스럽지만 그럼에도 기사로서의 본분에는 충실해서 모욕당하는 공주를 커버해준다든지, 암살 위기에 자신의 몸을 날려 구해준다든지, 뭐 그런 이벤트가 그득한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에 직격인 캐릭터다(라고 들었다). 실제로 제법 인기도 좋다. 거기에 BL 쪽의 인기도 좋아서 언제나 공으로... 아니, 이것까지는 됐고.
 "좋아한다는 게 게임 캐릭터 이야기였어?"
 "응, 그런데?"
 내 질문에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수아. 그 대답에 다시 한 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번에는 진짜 안도의 한숨 아니야. 아니, 아까도 아니긴 했지만.
 반 여기저기에서도 침묵을 깨는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아까 전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로 돌아간 모양이지만, 가끔씩 '뭐야, 이젠 수아도 게임 캐릭터 좋아한다고 그러는 거야?', '점점 물들어가네. 페이스노트에는 피규어랑 게임 화면까지 올리더니' 등등의 소리도 들린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뭐야, 설마하니 내가 따로 좋아하는 남자애라도 생긴 줄 알았어? 응?"
 내 한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수아는 놀리듯 웃으면서 이죽거렸다. 쳇, 하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 반응이 수아에게는 더욱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우민이 너, 질투한 거야? 응? 질투한 거 맞지?"
 "아니거든. 질투 같은 거 안 하거든. 애당초 할 위치도 아니고 자격도 없고."
 그저 그렇게 투덜거렸다. 어째서인지 이번 대답에는 수아 쪽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말과 투정이 멈춰주질 않았으니까.
 "그보다 그렇게 말하니까 오해하잖아. 게임 캐릭터 상대로 좋아한다 어쩐다 하기는..."
 "그건 우민이 너도 마찬가지잖아?"
 "..."
 그리고 그 말에, 흘러나오던 말과 투정 모두가 멈췄다. 순간 오싹, 하고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수아는 눈을 깜빡거리고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미미쨩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연적으로서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만, 역시 우민이 네 생각이 완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어서. 그럼 안 된다고 생각해서 네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했어. 게임 캐릭터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느끼고 사랑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뭐,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느끼겠다고 아무나 좋다는 식으로 찾아본 건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확실히 뭔가 느껴지긴 하더라고. <승리의 날개> 하다 보니까 쿠레나이군이 자꾸 걸린다고 해야 할까, 뭔가 가슴이 뛴다고 해야 할까... 그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 우민이 너처럼 사랑한다거나 쿠레나이군은 내 남자친구! 하고 외칠 정도는 아니지만. 우민이 널 좋아하는 마음이랑 비할 것도 아니고."
 얼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수아는 웃었다.
 "그래도, 적어도 우민이 네가 무슨 마음인지 조금은 알아냈어."
 "..."
 그 미소가, 마치, 3차원을 얕보지 말라고 했던 때와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렇지만."
 나는 퉁명스럽게, 그렇게 꾸민 목소리로 말했다. 투덜거렸다.
 잊기 위해서. 방금 내가 했던 말과 생각을 잊기 위해서. 그리고 고민하던, 담아두던 불안과 불만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너도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잖아. 어차피 나야 좋은 점도 하나도 없고, 좋아한다는 말도 언제나 늘 무시하고, 네가 좋아한다는 그 쿠레나이는 말하자면 네 이상형일텐데 그런 거랑 닮은 곳도 없고. 애당초 날 좋아하는 이유도 그냥 어쩌다보니니까, 분명 어쩌다보니 다른 애가 좋아져서 이만 안녕, 할 거잖아. 한 순간 재미로 내게 좋아한다 어쩐다 하는 거잖아. 더 취향인 애가 나타나면 금방 갈아탈 거잖아. 그러면서 내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드니 뭐니 하지 마. 지금도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결국에는 그런 일이 생길 거잖아. 그리 오래 갈 마음도 아니잖아."
 "..."
 토해내듯 쏟아낸 내 말에 수아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래, 그럼 그걸로 됐다. 그걸로 좋다.
 화가 나든 짜증이 나든 질렸든 정곡을 찔렸든 그건 그것대로 좋다. 그럼 나도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되니까. 이유조차 모를 불안에 떨 이유도 짜증을 낼 이유도 고민하며 밤을 샐 이유도 없어진다. 자, 멋대로 해.
 그렇지만 수아는 내 기대대로 하지 않았다.
 마치 한심하다는 듯, 놀리듯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는 우민이 너야말로 맨날 미미쨩 미미쨩 노래를 부르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캐릭터를 좋아하게 될 거잖아? 신작에서 더 취향에 맞는 애가 나타나면. 오타쿠들은 그런다면서. 최애캐든 앤캐든 나의 신부든 금방금방 바뀐다고. 그러면서 용케도 '미미쨩은 나의 신부' 같은 말을 하네. 솔직히 아직 그냥 취향인 애가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잖아? 게다가 바람도 피우고.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는데 왜 맨날 새로 나온 게임이라면서 다른 미연시를 하는 건데? 이상하지 않아? 그런 걸 보면 미미쨩에 대한 사랑도 금방 식겠네. 방금도 나한테는 '게임 캐릭터 상대로 좋아한다 어쩐다' 하고 말했고."
 "뭣..."
 그 말에 머리로 피가 솟구쳤다. 지금 말이 멈춘 건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말이 떠올라서, 그리고 험한 말을 토해내기에는 모두가 보는 앞이라 멈칫했기 때문이었다. 정곡을 찔리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딴 식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는 없다. 여태껏 많은 게임을 하면서 많은 히로인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미미쨩은 여전히 내 신부다. 미미쨩이 가장 내 취향이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런데 이 계집애는...!
 "그렇지만 미미쨩을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야, 솔직히 나도 영원히 널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가 좋아한다고 해도 계속 무시하지, 나한테는 관심도 없지. 아마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식고 더 좋아하는 애가 생길 지도 모르지."
 "...거봐."
 "그렇지만."
 겨우 쥐어짜듯 내뱉은 내 한 마디를 무시한 채, 수아는 싱긋 웃었다.
 "그렇지만 우민이 너를 좋아하는걸.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누구보다."
 "..."
 "우민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냐. 나는 절대..."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좋아했던 사실이 변하지는 않고. 솔직히 이 나이부터 벌써 평생을 같이 하겠다! 결혼할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어쩌고 하는 건 좀 징그럽지 않아? 너무 오버하는 느낌이라 꺼림직하고."
 내 말을 이번에도 무시한 채, 수아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나는 지금에 충실하고 싶어. 나중에는 멀어질지 모르지만, 이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뭔가가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다고 믿기보다는, 이 사랑이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 가볼래. 그래야 알 수 있잖아? 미래는 모르니까."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수아는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좋아해 우민아. 이 순간의 나는, 분명히 너를 좋아하고 있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수아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내 볼은 새빨갛게 물들었을 것이고...
 떨리는 눈가는 분명 수아에게도 보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