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1일 수요일

Wild Flower - (1)(파일럿 에피소드)

 "좋은 아침이야."
 아침이 오면 잠에서 깨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굳이 아침이 아니라도 괜찮겠지. 잠에서 깨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그걸 살아있다고 부른다. 그리고 매일 하는 일을 계속하는 걸 일상이라고 부르고.
 "오늘도 날씨가 좋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날이 쌀쌀하더니, 오늘은 아침임에도 그럭저럭 날이 따뜻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봄이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지평선을 넘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이제 곧 또 밀알을 심어야겠지."
 봄이 찾아왔다는 건, 다시 올해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몇 년 사이에 밭도 많이 넓어졌다. 작년 구입한 트랙터가 없으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홀로 일하는 것은 힘들지만, 할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긴 겨울동안에는 장작을 패는 것 정도 외에는 할 일이 없었으니까. 벌써 몸이 조금은 불은 것이 느껴진다.
 글쎄,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다지 말재주가 없는 나에게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지는 언제나 고민되는 일이었다. 특히 그게 매일 보는 상대라면. 한때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새삼스럽지만 그때의 나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수염이 자란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 이야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마지막으로 사람을 본 게 언제였나 기억도 잘 안 나서."
 이제부터는 농사를 지어야 할테니 나아지겠지만,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는 이 지역의 특성상 집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다. 읍내에 가서 생필품을 살 때 정도를 제외하면.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 외딴 오두막집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이번 겨울에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성격이 아니다.
 "외롭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아."
 원래부터 딱히 외로움을 타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혼자 있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외톨이도 아니지만. 사람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울적해지거나 하진 않는다. 홀로 사는 건 그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는 법이니까.
 나는 다시 말을 골랐다. 이번에는 턱을 문지르는 대신 신발로 흙을 툭툭 걷어찼다. 군화는 아니었다. 그건 버린지 오래니까.
 "뭐, 가끔 외롭다고 생각하긴 해."
 홀로 있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다. 문제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는 점이지. 그것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법이다. 결국 기억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거다. 한 때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외롭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누군가가 더는 없다는 사실이. 외로움이란 학습이다.
 "봄이니까 곧 또 꽃이 피겠네."
 나는 흙을 걷어차는 것을 그만두고 중얼거렸다. 발끝에 싹이 겨우 터오르려 하는 것을 발견했으니까. 짓밟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그것이 이름 없는 잡초에 불과하다고 해도.
 오늘은 달리 청소해줄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묘비를 한 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보고 싶어."
 물론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마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죽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났다.
 결혼하고 2년째 되던 겨울. 그녀는 감기에 걸렸다. 의사는 걱정했고, 나 역시 걱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늘 그렇듯 독기 어린 말로 짜증을 내며 약 먹고 조금 자면 괜찮아질 거라고 우겼다. 걱정은 했지만, 나 역시 동의했다. 감기란 그런 법이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낫지 않았다. 기침은 심해졌다. 그녀는 독감 따위에 걸렸다고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열이 높아졌다. 가래가 끓었다. 나는 뒤늦게라도 그녀를 입원시키려 했다. 그녀는 듣지 않았다. 약국에서 지어온 약은 그녀에게 그다지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기침은 폐렴을 불러왔다. 의사는 절대 입원하지 않겠다는 그녀를 억지로 입원시키려다 실패하고, 그 대신 매일 같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치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는 집 앞에 묻혔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한 번 올려봤을 뿐이었다. 애석하게 이번에는 비도 내려주지 않았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그리 많은 이들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결혼식에 왔던 사람들보다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에 찾아온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고향에 데려가 묻고 싶어했다. 나는 반대했다. 우리는 아마 처음으로 싸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우리 집의 얼마 없는 집기를 내던져 깨버렸고, 과연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내가 납득할 정도로 내게 메서운 욕설들을 날렸다. 그 마음을 나는 이해했다. 좋은 집을 버려두고 무너져가는 오두막에 그녀를 데려오고, 그것도 모자라서 제대로 치료도 받게 하지 못해 3년만에 그녀를 죽였으니까.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 싸움 끝에 그녀의 부모님은 포기했다. 그녀를 포기했는지, 나를 포기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결과는 같으니까 아무래도 좋다고 느꼈다.
 그녀는 집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묻혔다. 개새끼가, 내 야전삽이 묻힌 곳이었다. 매장은 나홀로 했다. 그저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삽으로 땅을 파고 또 팠다. 이미 묻혀있는 오랜 친구가 그리웠다. 그녀가 들어간 나무 관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덜컹거렸으니 "이것도 똑바로 못하냐 이 빌어먹을 개새끼야" 같은 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편안해보였다. 그렇게나 기침을 하고, 피가래를 토하고, 피리 소리 같은 숨소리를 냈으면서. 한겨울에 땀이 뻘뻘 날 정도로 고열에 시달렸는데. 먹는 것마다 토해냈으면서. 그럼에도. 그저 언젠가처럼 편안하게 잠든 것 같았다.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잠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그 모든 것에서, 그녀의 불편한 사지와 사라진 한쪽 눈동자에서도, 울부짖으며 깨어나야 할 악몽에서, 피와 살과 철과 불로 가득찬 과거에서, 눈꼽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게서 해방됐다는 듯.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렇지만 차마 그녀를 따라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언젠가, 아직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생각했었다. 아마 그녀가 죽으면 나 역시 죽을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그녀가 편해지는 모습을 본 뒤에는,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잊었다.
 어차피 살다보면 서두르지 않아도 그녀의 곁에 갈 것이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결혼할 때 했던 말을 철저할 정도로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나와 결혼한 이유는, 그게 내 남은 인생동안 나를 괴롭힐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좋은 괴롭힘을 나는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묻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함께 살며 매일 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없었을 뿐.
 아침에 눈을 뜬다. 가벼운 아침을 먹는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커피를 한 잔 하거나 술을 한 잔 한다. 그녀와 함께. TV를 보거나 소일거리를 잠깐 한 뒤, 그녀와 결혼하고 1년째에 구입했던 트윈베드에 눕는다. 그녀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한다. 눈을 감는다. 아침에 일어난다.
 그렇게 살아왔다.
 3년 동안.
 그리고 이제는 그만 그녀를 만나러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외로움이라는 것은 함께 있을 때를 기억하면서 찾아오는 것이니까.
 오후즈음이었다.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 넓은 밭을 갈아엎고 있을 때였다.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그냥 그러고 싶다는 이유로 트랙터를 사용하지 않고 쟁기를 들고 집 가까운 곳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불발탄이라도 찾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싶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농사를 지은 자리에 그딴 게 묻혀있을 리도 없건만.
 저 멀리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향해. 우리 집을 향해.
 여전히 싸늘한 날씨에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팔뚝으로 닦아내며 바라봤다.
 비포장의 흙길을 그 누군가는 걷고 있었다. 모래연기는 그다지 생기지 않았다.
 그 길을 따라 도달하는 곳은 우리 집 뿐이다. 그리고 방문자는 길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나를 찾아 우리 집에 올 사람은 없다.
 굳이 따지면, 의사 정도. 하지만 그녀가 죽은 뒤로 의사는 우리 집을 그다지 찾지 않았다. 내가 가끔 읍내에 나갈 때, 생각이 난다면 정도의 빈도로 의사를 찾아갈 뿐. 그조차도 의사는 가끔씩 피하는 일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마 의사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자신이 그녀를 억지로라도 입원시켰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으면.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그런 고민들. 나는 의사에게 그런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말이 없고 홀로 있는 걸 좋아해서 그렇지 사람이다. 의사가 어떤 식으로 나를 보는지는 알 수 있다.
 찾아온다면 찾아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문자는 의사가 아니었다.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나는 방문자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키는, 작았다. 내 키가 큰 편이긴 하지만, 아마 기껏해야 내 가슴 정도에 올 것이다.
 여자였다. 그리고 어린애였다. 기껏해야 중학생쯤 되었을까.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채, 제멋대로 자란 듯한 긴 검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
 나는 쟁기 끝을 바닥에 내려두고 손잡이를 받친 채,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녀가 내 앞에 다가올 때까지.
 그 사이 해는 저물고 있었다. 저 지평선 너머로 붉은 석양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마침내 소녀가 멈춰섰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살짝 멀지만, 여차할 때 도망칠 수 있을 거리였다. 나는 소녀의 판단을 존중했다.
 "무슨 일이지?"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녀와 늘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은 오랜만이기에 긴장 아닌 긴장이 됐다. 다행히 목소리는 크게 갈라진 것 같진 않았다. 소녀는 언덕을 올라와서 그런지 거칠어진 숨을 잠시 고른 뒤, 손에 들고 있는 뭔가를 꺼내 저물어가는 석양에 비춰보며 말했다.
 "...의 집이 여기가 맞나요?"
 소녀는 낯선 이름을 말하듯, 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 써진 글자를 그저 읽을 뿐이라는 억양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나도 모르게 수염을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나도 모르게 한숨, 보다는 떨리는 숨이 새어나왔다.
 "그래, 맞아."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 있었다.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투로 나를 보던 소녀의 눈빛이 조금 이채로운 빛을 띄었다.
 "여기가 맞다고요?"
 "그래."
 "당신은 누구죠?"
 어디 있죠, 부터 물어보지 않는군. 아무래도 좋지만 소녀의 질문에 생각했다.
 아마 대답을 고민했어야 했을 것이다. 소녀가 누군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그걸 물어본다는 점에서. 하지만 내 입은 멋대로 대답했다. 그녀와 나의 관계라면, 이제는 그것이니까.
 "남편이야."
 전우였고, 주인이었으며, 동거인이었고, 원수였지만.
 그럼에도, 그녀와 나의 관계는 그랬으니까.
 나는 영원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영원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로 서로 맹세했으니까. 우리는 둘 다 그 맹세를 지키고 있었고,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부부였다.
 "그렇군요."
 내 대답에 잠시 말이 없던 소녀는, 이윽고 천천히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종이를 입고 있는 크고 지저분하며 추워보이는 싸구려 코트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이쪽이야."
 나는 몸을 돌렸다. 뒤에서 소녀가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거리는 발걸음. 신고 있는 낡아 빠진 부츠가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둔한 코트 주머니 속의 무언가가 사그락거리는 소리. 커나란 침낭과 배낭 속에서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신경 쓰이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멈춰섰다. 나무로 만든 묘비 앞에 멈춰서, 다시 소녀를 돌아봤다.
 "여기."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에 그녀의 묘비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나머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퉷."
 소녀는 묘비에 침을 뱉었다.
 다음 순간, 나는 턱을 문지르던 손으로 소녀의 코트 목깃을 잡아 비틀어, 그대로 소녀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소녀의 양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고, 그 발끝이 천천히 버둥거렸다. 소녀는 마치 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소녀는 숨이 막힌다는 듯 콜록거렸지만,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에는 공포나 두려움은 없었다.
 누군가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래."
 침착하려 애썼고, 스스로는 침착하다고 생각했지만, 내 목소리는 듣는 내가 거슬릴 정도로 갈라져있었으며, 감정이 가득 차있었다. 미간의 핏줄이 아플 정도로 두근대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애써 느릿하게 호흡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이유로 이딴 짓거리를 했는지 듣고 싶은데."
 "그래, 남편이라고 했지."
 소녀는 콜록거리면서도, 표정에 숨이 막히는 괴로움을 가득 담았으면서도, 나를 향한 비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편해진 말투는 덤과 같았다. 소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내 얼굴에도 침을 뱉고 싶다는 듯.
 "무슨 이유로 이딴 짓거리를 하는지보다, 내가 누군지를 대답해야할 것 같은데. 물어봐줄 수 있겠어?"
 그 말에, 손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나는 소녀를 바닥에 내려놨다. 두 발이 땅에 닿자 소녀는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입가를 문질렀다. 바닥에 침을 뱉었다.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답 같은 건 듣지 않아도.
 그럼에도 나는 물었다. 그녀에게 늘 그랬듯이.
 "그녀랑 무슨 관계지?"
 소녀는 콜록거림을 멈추고 웃었다. 이를 드러내는, 어딘지 모를 일그러짐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저년 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내 침묵을 설명을 더 요구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턱으로 그녀의 묘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창년이 창관에서 일할 때 싸지른 딸."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렇기에 충격은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없었다.
 그럼에도 정정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소녀 쪽이 더 빨랐다.
 "그리고 당신이 저년이랑 결혼했다면, 당신 딸이 될수도 있겠네. 아빠."
 그 한마디로, 나는 완전히 납득했다.
 과연 그녀였다.
 그녀는 정말로 나를 영원토록 괴롭히는 것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조차 이러니까.
 석양이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검보라색의 별하늘이 머리 위에 걸친 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묘비 옆에 피어난 이름 없는 잡초 하나가, 밤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2017년 5월 6일 토요일

악마와 소녀 - (1)

 옛날 옛적, 한 옛날, 어딘가에.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마을의 옆에는 숲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숲속의 오두막에는, 한 악마가 살고 있었답니다.
 후미카라는 이름의 악마는 홀로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오두막에 가득한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있었어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후미카는 책들을 읽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비록 그 책에 쓰여진 것 모두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이라고 해도, 그것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풀어냈고 자신의 생각을 남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숲에는 악마가 살고 있으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늘 이르곤 했답니다.
 비록 후미카가 아이들의 심장을 빼어먹거나 갓난아기를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지만, 마을 바로 옆의 숲에 악마가 산다는 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은 불안했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후미카를 두려워하며, 마치 그 숲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살아갔답니다.
 그런 마을에, 호기심이 아주 많은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소녀의 이름은 아리스였습니다.
 아리스는 모든 것이 궁금했어요. 날아가는 저 새의 이름도, 숲속의 나무의 이름도, 길가에 피어있는 꽃의 이름도 궁금했어요.
 그것만이 궁금한 게 아니었어요. 저 새는 어디에서 왔을까도, 저 나무는 이야기로만 들은 머나먼 바다 너머의 나라에서도 자라는지도 궁금했어요. 아리스는 머나먼 바다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어요. 밤하늘의 별들은 왜 반짝이는지도 궁금했어요. 어째서 달은 조금씩 커지고 작아지고를 반복하는지도 궁금했어요. 아리스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답니다.
 어릴 때부터 아리스는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봤어요. 하지만 시골 마을의 사람들은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대로 내놓을 수 없었답니다. 그들이 대답을 해줄 때마다 아리스의 의문은 줄어들기는 커녕 계속 커지기만 할 뿐이었어요. 겨우 납득할만한 대답을 들었으면 또다른 의문이 생겨났죠. 결국 마을 사람들은 점점 그런 아리스를 귀찮아하고 질려해갔어요.
 마을에 한 명뿐인 신부님의 대답도 아리스에게는 제대로 된 대답이 되지 않았어요. 하느님의 은총으로 별이 빛난다면 어째서죠? 어째서 하느님은 달을 그렇게 만드신 거죠? 신부님은 계속되는 질문에 견디다 못해 계속 그렇게 질문을 해대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경고까지 했지만, 아리스에게는 그것 역시 새로운 의문일 뿐이었답니다.
 아리스는 크지 않은 마을 안에 있는 책이란 책은 이미 모두 읽었어요. 새로운 책을 구하려고 해도 아리스의 집은 그럴 돈은 없었답니다. 가끔 마을에 들리는 상인들에게 부탁했지만, 그걸로는 아리스의 호기심을 채울 수 없었어요. 거대한 호수의 물을 티스푼으로 퍼낼 뿐이었죠. 얼마 안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아리스는 목이 마르기에 바닷물을 마시는 기분만을 느꼈어요. 비록 바다를 본 적도 없었지만. 그러고 보면 어째서 바다는 짠 걸까요? 그 소금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매일같이 계속되는 의문과 질문 속에 아리스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답니다. 너무나도 답답해서 잠도 잘 수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리스는 숲속의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답니다.
 숲속의 악마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대.
 어른들은 늘 악마에 대해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악마는 신과 대적하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시작으로, 아이의 심장을 산채로 뽑아 먹는다는 잠자리에서 들려줄 이야기까지요.
 아리스는 그 모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지 않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어요. 아리스는 두려워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그 악마가 무섭고 두렵다고 해도 이 터질 것 같은 의문의 괴로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아리스는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리스는 사람들 몰래 마을을 벗어났어요.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하게 나 흔적만 남은 길을 따라 숲으로 향했어요.
 자신의 키보다 몇 배나 큰 나무들을 수도 없이 지나 헤맨 끝에, 아리스의 눈앞에 오두막이 나타났어요.
 소문은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꿀꺽, 하고 아리스는 침을 삼켰어요.
 악마 같은 건 없어. 아리스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오두막에 사는 사람은,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아리스는 오두막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똑. 귀여운 노크 소리였어요.
 계세요?
 아리스는 불안을 숨기려 하며 말했습니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리스는 다시 한 번 문을 노크하며 말했습니다.
 안에 누구 계세요?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습니다. 아리스는 실망했습니다.
 그저 소문이었던 걸까. 그저 여기는 버려진 오두막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오두막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어요. 또각, 또각. 나막신이 나무바닥을 차는 소리였어요.
 끼이익.
 오랫동안 열리지 않아서인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면서 문이 조금 열렸습니다.
 그 사이로는 젊은 여성이 서있었어요.
 누구세요?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였습니다. 눈높이에 아무도 없어 두리번 거리던 후미카는 시선을 낮췄어요.
 당신이 숲속의 악마인가요?
 아리스는 당당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어요. 아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어렵게 구한 자신의 노트를 끌어안았어요. 후미카는 아리스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지만, 이윽고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어요.
 네. 제가 숲속의 악마랍니다. 사람이 저를 찾아온 건 오랜만이네요. 무슨 일이신가요?
 당신이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그렇답니다.
 아리스의 질문에 후미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용기를 낸 아리스의 부탁에 후미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습니다.
 무엇을 알려주길 바라나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요.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요.
 아리스는 후미카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에게 대답해주지 못했던 질문들을 쏟아냈습니다.
 저 새의 이름은 뭔가요? 이 나무의 이름은 뭔가요? 어째서 밤하늘의 별들은 빛나고 달은 크기가 변하나요? 하늘은 어째서 파랗죠? 바다는 어째서 그렇게나 물이 많고 짠 거죠? 그 소금은 어디서 나온 거죠?
 아리스의 질문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답니다. 그 말에 후미카는 조용히 문을 닫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어요. 질문을 계속해서 토해내던 아리스는 그 행동에 말을 멈췄습니다.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순식간에 차가운 분노만이 차올랐어요.
 결국 소문이었을 뿐이야.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기는 무슨. 이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 그딴 걸 궁금해한다고 하는 거야.
 실망감에 아리스는 몸을 돌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문이 열렸습니다. 돌아본 아리스에게, 문을 열며 후미카는 말했어요.
 미안해요. 집 안이 지저분했거든요. 손님은 오랜만이라서요. 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예상 외의 대답에 당황하면서도, 아리스는 기대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어요. 그리고 오두막 안의 광경에 아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답니다.
 우와.
 책, 책. 어딜 봐도 책이었어요. 밖에서 볼 때는 그저 작은, 무너져가는 오두막일 뿐이었는데 안이 이렇게 큰 것도 놀라웠지만, 아리스에게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공간을 모조리 책으로 메우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벽마다 있는 천장까지 닿는 책장에도 책이 가득하고, 거기 들어가다 못해서 바닥을 모두 책이 탑을 쌓고 있었어요. 오두막 안의 빈 공간보다 책이 차지하는 공간이 더 많아보일 정도였답니다.
 그 끝, 창문 쪽에 가까운 곳에는 테이블이 있었어요. 후미카의 안내에 아리스는 자리에 앉았답니다. 후미카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찻주전자와 컵을 가져와 아리스에게 따라주며 말했어요.
 지저분하죠? 제가 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니에요. 정말 멋있어요.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아리스는 오두막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저 온 사방의 책들만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리스가 지금까지 그리 길지는 않지만 평생동안 탐욕스럽게 읽어온 마을 내의 모든 책도, 후미카의 오두막에서는 바닥에 쌓인 작은 탑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였어요. 눈을 반짝이며 사방을 둘러보는 아리스에게 후미카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답니다.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뭐든 가져가서 읽어도 좋아요.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아리스는 차마 대답하지도 못했어요.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 후미카를 바라볼 뿐. 후미카는 그런 아리스를 보며 웃었어요.
 여기 있는 것들은 이미 다 읽은 책들이니까요. 그야 가끔 다시 보고 싶은 책들도 있지만, 저보다는 당신이 더 보고싶어할 것 같네요.
 정말이에요?
 정말이랍니다. 악마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후미카의 대답에 아리스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럼, 언니는 진짜 악마인 거예요?
 네. 후미카라고 한답니다.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당연하다는 듯 순순히 하는 후미카의 대답에 겁을 먹으면서도, 아리스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리스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리스. 제 집에 온 걸 환영해요.
 후미카는 아리스의 말에 그저 웃으며 손을 내밀었어요. 아리스는 그 손을 불안하다는 듯 바라봤지만, 결국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어요. 아리스의 걱정과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자, 저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찾아왔다고 했죠?
 악수를 마치고 찻잔을 들어올리며 후미카는 말했어요.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이 세상에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해요. 너무나도 궁금한 것이 많은데 답을 몰라 답답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필요하다면 제 영혼도 드릴게요.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용기를 쥐어짜서 한 아리스의 말에 후미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답니다.
 영혼은 소중한 거예요. 이런 걸로 남에게 준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답니다.
 그렇지만 후미카 언니는 악마라고 했잖아요. 악마는 영혼을 원한다고 들었어요. 영혼을 대가로 한 계약은 어길 수 없다고요.
 그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영혼이 필요 없답니다. 이렇게 제 오두막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거든요.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양 손으로 치면서 벌떡 일어난 아리스의 모습에 후미카는 찻잔을 내려놓고 아리스를 빤히 바라봤습니다.
 저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정말 후미카 언니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면 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물론이에요.
 후미카의 순순한 대답에 아리스는 눈을 깜빡였습니다. 후미카는 그저 빙긋 웃으며 말했답니다.
 아리스가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알려줄게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요. 그렇지만 영혼은 필요없답니다. 사실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그저 제 오두막에 찾아만 와주세요.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요?
 굳이 말하면 친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리스의 말에 후미카는 웃으며 대답했답니다.
 제 친구가 되어줄래요, 아리스?
 하지만 저는 한참 어리고... 게다가 후미카 언니는 악마잖아요. 그럼 저보다 엄청나게 오래 살았을 거잖아요.
 친구가 되는 것에 나이는 필요 없답니다.
 후미카의 대답에 아리스는 생각했습니다.
 마을에서는 누구도 아리스의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또래 아이들은 모두 세상 모든 것을 궁금해하는 아리스를 귀찮아했어요. 아리스 역시, 이 세상에 모르는 것과 신기한 것과 알고 싶은 것이 그렇게 많은데 기껏해야 소꿉놀이나 해대는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답니다.
 그렇지만 후미카는 그런 아이들과 달라보였어요. 자신과 말이 통할 것만 같았어요.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친구가 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답니다.
 좋아요. 후미카 언니의 친구가 될게요.
 정말인가요? 기쁘네요. 친구는 오랫만이에요.
 아리스의 대답에 후미카는 환하게 웃었답니다. 아리스도 기뻐질 정도로요. 하지만 아리스는 찾아온 이유를 잊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렇다면 제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세요. 제가 궁금한 것들을 대답해주세요.
 알겠어요. 음... 그럼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후미카는 즐겁게 웃으며 책을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아리스는 그런 후미카의 모습을 보면서, 후미카가 건네준 찻잔을 들어올렸어요. 난생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났어요. 그 향에 신기해하며 아리스는 찻잔을 입으로 옮겼어요. 맛도 처음 보는 맛이었어요.
 이 차는 무슨 차인가요?
 아리스의 질문에, 후미카는 싱긋 웃으며 말했어요.
 그럼 그것부터 시작할까요? 그 차의 품종은 실론이라고 해요.
 처음 들어봐요.
 이곳에서 아주 먼 나라에서 나는 차거든요.
 어디에 있는 나라인데요?
 지도를 보면서 설명드릴게요. 지도가 어디 있더라...
 그렇게, 그 날.
 숲속의 악마와 마을의 소녀는 서로를 만났답니다.

2017년 4월 1일 토요일

Juvenile Mosaic - 그녀는 디멘션 인베이더 (3)


 한밤 중. 새로 나온 게임을 하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지..."
 모니터 화면에 나오는 건 평범한 미소녀 게임의 화면. 대화창 있고 미소녀 스탠딩 CG 있고. 하지만 문제는 전개다.
 "요즘 세상에 네토라레 전개라니..."
 쌍팔년도도 아니고 말이야. 요즘 세상에 이런 전개가 먹힐 것 같냐. 속으로 그런 투덜거림을 담아두면서도 손가락은 클릭을 계속한다. 뭐, 다음 전개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고 어쨌든 돈 낸 건데 이런 전개에 패닉에 걸려 플레이 중단하고 CD 부수고 인증샷 올리고 제작사에 보내기에는 돈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라서.
 상황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주인공이랑 알콩달콩하며 친구 이상 연인 미만으로 지내던 히로인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남자 캐릭터가 등장했고, 나름대로의 사정에 의해 히로인은 주인공과 새로운 남캐 사이에서 흔들리고, 주인공은 그 상황에서 히로인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고... 뭐 정확하게 말하면 히로인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네토라레 전개와는 다르지만, 요즘 세상에는 이정도 전개만 나와도 충분히 네토라레 전개라고 취급할 수 있지.
 과거, 그러니까 쌍팔년도나 그에 준할 정도의 옛날이라면 꽤 흔한 전개였다. 당시의 연애물이나 러브코메디에는 흔한 전개였고. 주인공이나 독자, 혹은 플레이어에게 위기감을 주면서 경쟁심도 느끼게 하는 그런 거지.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이딴 전개를 선택했다가는 위에서 내가 말했던 대로 플레이 중단하고 CD 가위로 썬 다음 제작사에 보내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작금의 오타쿠들은 이런 전개 싫어한다고. 그냥 나에게 올인해주는 히로인이 좋은 법이라고. 현실에 지쳐서 2D로 찾아온 연약한 망명자들에게 이런 괴로운 전개 가지고 오지 말란 말이다. 아, 이건 너무 우리를 무시하는 언급이었나.
 아무튼 이런 건 전개 자체도 문제지만 히로인에게도 안 좋다. 비처녀 논란까지 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게 얼마나 큰 폭풍을 불러왔던가. 뭐 난 그 세대가 아니라 나중에 듣기만 했지만. 요즘은 히로인이 주인공 두고 다른 남자랑 미묘한 관계만 흘러도 빗치 소리 듣는다고. 당장 나만 해도 이 사실만으로 히로인에 대한 호감도가 좀 떨어졌고.
 예로 들어보자고. 지금 내게 열렬히 대시하고 있는 수아가 만약 다른 남자에게도 그런다고 한다거나, 사실 따로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가 있다거나 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니, 아니지."
 왜 여기서 수아를 떠올리는 거냐. 굳이 따진다면 미미쨩을 떠올려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멋대로 괴상한 상상을 떠올린 뇌를 괴롭히며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래, 그거다. 차마 내 뇌는 미미쨩을 대상으로 그런 불순한 상상을 떠올릴 수 없었던 거다. 거기에 엄밀히 말하면 미미쨩은 쥰지를 좋아하면서 나를 좋아하니까 이것만으로도 이미... 아니, 그런 아픈 팩트는 필요 없고. 아무튼 그런 거다. 비교대상으로 좋았을 뿐이야, 응.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 변명을 마치고 나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클릭을 계속했다.
 하지만 어느새 대화창에 뜨는 텍스트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눈에는 들어왔지. 읽고는 있으니까. 다만 뇌 속에서 거주공간을 찾지 못한 채 자꾸 사라질 뿐이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 알게 뭐야."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내 알게 뭐야. 어차피 내 애인은 미미쨩 하나 뿐. 수아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다. 그야 나를 좋아한다는 말이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왜 좋아하는지 영문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그 마음이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른 채 식는다고 해도 놀라울 것도 없고 사실 여러 남자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차피 수아는 예쁘니까 수아를 좋아하는 애가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니, 그러니까 내 알바 아니라니까 그러네."
 고개를 붕붕 내저었지만, 왜인지 모를 짜증과 불쾌함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나.
 지난 번 데이... 아니, 같이 놀러갔다 온 후로 계속 수아를 떠올리고 있다.
 수아와의 관계에 특별한 변화는 없다. 변덕으로 사준 피규어에 수아가 기뻐하고, 별 생각 없이 눈팅하고 있는 수아의 페이스노트에 피규어 사진이 올라오고, 약속했던대로 게임기와 내가 추천하는 게임 몇 개를 빌려주고, 그것들 역시 페이스노트에 글이 올라오고, 그 외에는 그냥 늘 그렇듯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다. 그 대화의 태도도 그리 큰 변화는 없고.
 그렇긴 한데...
 "아, 됐어. 짜증나. 안 해."
 결국 나는 짜증에 저장 버튼을 누른 후 게임을 꺼버렸다. 이 전개는 뭐냐고, 계속 짜증나잖아. 지금 이런 걸 유저보고 즐기라고 하는 거냐. 짜증나는 이유는 게임이 아니라 자꾸 떠오르는 생각 때문이라는 사실은 가뿐히 무시하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래. 어차피 시간도 늦었으니 학교 가기 위해서 잘 시간이 됐을 뿐이야. 밤새면서 할 정도로 갓겜인 것도 아니고.
 하지만 결국 몰려드는 생각에 제대로 잠에 들지도 못했다.
 그렇든 말든 다음날 해는 뜬다. 피곤함에 초췌한 얼굴로 등교하자, 오늘도 역시나 먼저 등교해있던 옆자리의 수아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손을 살짝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안녕, 우민아. 좋은 아침이네."
 "그래, 좋은 아침."
 자리에 앉으며 적당히 대꾸하자, 수아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얼굴이 안 좋네. 또 밤새서 게임한 거야?"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그랬는데. 몸에 안 좋아. 그야 좋아하는 것도 알고 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알지만, 그렇게 피곤하면 다음날 게임하기도 힘들잖아?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걱정되고."
 평소라면 "너랑 상관 없잖아" 같은 말로 퉁명스럽게 대꾸했겠지만, 오늘은 그 대신 수아를 바라봤다.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진심으로 좋아하는 내가 수척한 모습이 걱정된다는 듯한 눈빛. 나도 모르게 "그래, 알았어. 고마워" 하는 말이 나올 뻔 했지만 그 직전에 애써 고개를 돌렸다. 정말 왜 이러는 거냐, 나.
 "그러고 보니까 우민아."
 "왜?"
 "나 우민이 너한테 할 말 있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 딱히 그 말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이럴 때는 마주보는 게 예의일 테니까. 아무리 내가 늘 귀찮다는 듯 무시했다고 해도.
 "또 좋아한다거나 그런 이야기일 거 아냐."
 "아냐. 뭐... 어떤 의미로는 맞나?"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수아는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잠시 허공을 보더니 말했다.
 "나,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








 "...어, 응."
 겨우 정신줄을 붙잡았다.
 아니지, 잠깐만. 왜 내가 정신줄을 놓는 거냐. 어제도 생각했잖아 수아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순간 의식이 날아갈 정도로 충격을 받는 거냐. 아니, 그래. 이건 그거다. 어제부터 계속 고민하더니 리얼이 되어서 마치 예언이라도 한 느낌에 그러는 것뿐이야. 하지만 어제부터 애당초 나는 왜 이런 걸 고민했던 거냐고.
 정신을 차리자, 아침 조회 직전의 웅성거림으로 넘치던 반의 모두도 조용해졌다.
 처음 수아가 내게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로부터 한동안은 반 아이들도 매번 나랑 수아를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주로 '수아가 왜 저러는 걸까' 쪽으로. 하지만 그것도 꽤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냥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려 모두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뒤였다. 이제 와서 수아가 내게 말을 걸든 좋아한다고 하든 신경도 안 썼으니까. 뭐 페이스노트를 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피규어를 샀다든지 미소녀 게임을 하는 것에는 다들 걱정, 이랄까 조롱이랄까를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다들 보는 거냐.
 아무 말도 없는 정적의 살얼음을 깨듯이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역시 이제 질린 거구나. 생각보다는 오래 갔네. 하긴 우민이도 계속 무시하고 그랬으니까. 아무리 좋아한다고 그래도 식었겠지. 근데 상대는 누구지? 기타등등 기타등등.
 "우민아?"
 그런 지방방송에 신경 쓰는 사이 어느새 수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겨우 입을 움직였다.
 "아, 어, 응."
 "그래서, 너에게 조언을 좀 듣고 싶은데."
 "...조언?"
 이건 또 뭐냐.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을 뇌 속에 담아놓고 사는 거냐. 이 맥락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질문에 다시 한 번 의식이 날아갈 뻔 했다고. 아니, 진심으로, 지금까지 '좋아한다' 고 했던 남자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조언을 듣고 싶다' 고 말하는 의도는 뭐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어, 그,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란해진 뇌로 내가 내뱉은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누, 누구인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음... 알 것 같긴 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네."
 고민하듯 한 수아의 대답에 안 그래도 혼란하던 뇌는 그 와중에도 재빨리 한쪽 구석을 치우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 것 같은 사람? 그게 누구야. 자발형 은둔형 외톨이 아웃사이더 내가 아는 사내놈은 없는데. 학교에 친구도 없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친구는 인터넷 친구가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반 애인가? 친구는 없지만 우리 반 애들이라면 이름... 은 몰라도 얼굴... 은 대충 알 걸? 아마? 알지?
 기분 탓인지 반 아이들의 웅성거림도 다시 잦아든 느낌이 들었다. 마치 수아의 입에서 나올 대답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듯. 꿀꺽,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역시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그런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아는 대답했다.
 "쿠레나이군."
 "..."
 누구?
 오늘만 세 번째로 날아가려던 의식을 붙잡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잘못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쿠레나이군? 그게 누구야 대체. 우리 학교에 외국인도 있었어? 아 그야 옆반에 하나 있긴 했지만, 걔는 일본인은 아닌데. 쿠레나이군이라니...
 "...아."
 그 순간, 알아냈다. 나는 수아를 보며 물었다.
 "<승리의 날개>에 나오는 쿠레나이?"
 "응. 쿠레나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수아의 뻔뻔할 정도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 같은 거 아니거든. 진짜거든.
 <승리의 날개>. 내가 수아에게 소개해준 미소녀... 아니, 미소년 게임.
 미소녀 게임을 신나게 하던 수아가 어느 날 내게 '그런데 이런 게임은 여자애들이랑 사귀는 게임만 있는 거야? 남자애들이랑 사귀는 게임은 없어?' 하고 물어봤다. 뭐, 확실히 남자인 내가 미소년들 공략하는 게임 해봤자 짜증나는 거랑 비슷했던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수아에게 이름은 들어본 적 있는 그 게임을 소개해줬다. 내가 해본 적은 없으니 추천은 아니지.
 판타지 세계관의 이웃의 거대 제국에게 위협당하는 작은 왕국을 배경으로, 국왕인 아버지가 죽어 새로운 여왕 즉위를 앞에 둔 공주님을 주인공으로 앞으로 그녀를 모시게 될 어째서인지 20대 미소년만 그득그득한, 사실 호스트부가 아닐까 싶은 남자애들의 충성을 받으며 자신을 평생 지켜줄 단 하나의 수호기사를 고른다는 내용이다. 해본 적은 없지만 여자 덕후들 사이에서 평판은 꽤 좋은 모양이고, 다음 분기에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다고 들었다. 그 중에서 문제의 '쿠레나이' 는 뭐라고 해야 하지, 전형적인 쿨데레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왕실 친위대이면서도 공주를 인정하지 못하고 늘 쿨하고 퉁명스럽지만 그럼에도 기사로서의 본분에는 충실해서 모욕당하는 공주를 커버해준다든지, 암살 위기에 자신의 몸을 날려 구해준다든지, 뭐 그런 이벤트가 그득한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에 직격인 캐릭터다(라고 들었다). 실제로 제법 인기도 좋다. 거기에 BL 쪽의 인기도 좋아서 언제나 공으로... 아니, 이것까지는 됐고.
 "좋아한다는 게 게임 캐릭터 이야기였어?"
 "응, 그런데?"
 내 질문에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수아. 그 대답에 다시 한 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번에는 진짜 안도의 한숨 아니야. 아니, 아까도 아니긴 했지만.
 반 여기저기에서도 침묵을 깨는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아까 전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로 돌아간 모양이지만, 가끔씩 '뭐야, 이젠 수아도 게임 캐릭터 좋아한다고 그러는 거야?', '점점 물들어가네. 페이스노트에는 피규어랑 게임 화면까지 올리더니' 등등의 소리도 들린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뭐야, 설마하니 내가 따로 좋아하는 남자애라도 생긴 줄 알았어? 응?"
 내 한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수아는 놀리듯 웃으면서 이죽거렸다. 쳇, 하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 반응이 수아에게는 더욱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우민이 너, 질투한 거야? 응? 질투한 거 맞지?"
 "아니거든. 질투 같은 거 안 하거든. 애당초 할 위치도 아니고 자격도 없고."
 그저 그렇게 투덜거렸다. 어째서인지 이번 대답에는 수아 쪽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말과 투정이 멈춰주질 않았으니까.
 "그보다 그렇게 말하니까 오해하잖아. 게임 캐릭터 상대로 좋아한다 어쩐다 하기는..."
 "그건 우민이 너도 마찬가지잖아?"
 "..."
 그리고 그 말에, 흘러나오던 말과 투정 모두가 멈췄다. 순간 오싹, 하고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수아는 눈을 깜빡거리고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미미쨩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연적으로서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만, 역시 우민이 네 생각이 완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어서. 그럼 안 된다고 생각해서 네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했어. 게임 캐릭터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느끼고 사랑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뭐,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느끼겠다고 아무나 좋다는 식으로 찾아본 건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확실히 뭔가 느껴지긴 하더라고. <승리의 날개> 하다 보니까 쿠레나이군이 자꾸 걸린다고 해야 할까, 뭔가 가슴이 뛴다고 해야 할까... 그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 우민이 너처럼 사랑한다거나 쿠레나이군은 내 남자친구! 하고 외칠 정도는 아니지만. 우민이 널 좋아하는 마음이랑 비할 것도 아니고."
 얼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수아는 웃었다.
 "그래도, 적어도 우민이 네가 무슨 마음인지 조금은 알아냈어."
 "..."
 그 미소가, 마치, 3차원을 얕보지 말라고 했던 때와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렇지만."
 나는 퉁명스럽게, 그렇게 꾸민 목소리로 말했다. 투덜거렸다.
 잊기 위해서. 방금 내가 했던 말과 생각을 잊기 위해서. 그리고 고민하던, 담아두던 불안과 불만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너도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잖아. 어차피 나야 좋은 점도 하나도 없고, 좋아한다는 말도 언제나 늘 무시하고, 네가 좋아한다는 그 쿠레나이는 말하자면 네 이상형일텐데 그런 거랑 닮은 곳도 없고. 애당초 날 좋아하는 이유도 그냥 어쩌다보니니까, 분명 어쩌다보니 다른 애가 좋아져서 이만 안녕, 할 거잖아. 한 순간 재미로 내게 좋아한다 어쩐다 하는 거잖아. 더 취향인 애가 나타나면 금방 갈아탈 거잖아. 그러면서 내 마음을 이해하려 한다드니 뭐니 하지 마. 지금도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결국에는 그런 일이 생길 거잖아. 그리 오래 갈 마음도 아니잖아."
 "..."
 토해내듯 쏟아낸 내 말에 수아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래, 그럼 그걸로 됐다. 그걸로 좋다.
 화가 나든 짜증이 나든 질렸든 정곡을 찔렸든 그건 그것대로 좋다. 그럼 나도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되니까. 이유조차 모를 불안에 떨 이유도 짜증을 낼 이유도 고민하며 밤을 샐 이유도 없어진다. 자, 멋대로 해.
 그렇지만 수아는 내 기대대로 하지 않았다.
 마치 한심하다는 듯, 놀리듯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는 우민이 너야말로 맨날 미미쨩 미미쨩 노래를 부르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캐릭터를 좋아하게 될 거잖아? 신작에서 더 취향에 맞는 애가 나타나면. 오타쿠들은 그런다면서. 최애캐든 앤캐든 나의 신부든 금방금방 바뀐다고. 그러면서 용케도 '미미쨩은 나의 신부' 같은 말을 하네. 솔직히 아직 그냥 취향인 애가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잖아? 게다가 바람도 피우고.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는데 왜 맨날 새로 나온 게임이라면서 다른 미연시를 하는 건데? 이상하지 않아? 그런 걸 보면 미미쨩에 대한 사랑도 금방 식겠네. 방금도 나한테는 '게임 캐릭터 상대로 좋아한다 어쩐다' 하고 말했고."
 "뭣..."
 그 말에 머리로 피가 솟구쳤다. 지금 말이 멈춘 건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말이 떠올라서, 그리고 험한 말을 토해내기에는 모두가 보는 앞이라 멈칫했기 때문이었다. 정곡을 찔리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딴 식의 이야기를 들을 이유는 없다. 여태껏 많은 게임을 하면서 많은 히로인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미미쨩은 여전히 내 신부다. 미미쨩이 가장 내 취향이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런데 이 계집애는...!
 "그렇지만 미미쨩을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야, 솔직히 나도 영원히 널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가 좋아한다고 해도 계속 무시하지, 나한테는 관심도 없지. 아마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식고 더 좋아하는 애가 생길 지도 모르지."
 "...거봐."
 "그렇지만."
 겨우 쥐어짜듯 내뱉은 내 한 마디를 무시한 채, 수아는 싱긋 웃었다.
 "그렇지만 우민이 너를 좋아하는걸.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누구보다."
 "..."
 "우민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냐. 나는 절대..."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좋아했던 사실이 변하지는 않고. 솔직히 이 나이부터 벌써 평생을 같이 하겠다! 결혼할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어쩌고 하는 건 좀 징그럽지 않아? 너무 오버하는 느낌이라 꺼림직하고."
 내 말을 이번에도 무시한 채, 수아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나는 지금에 충실하고 싶어. 나중에는 멀어질지 모르지만, 이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뭔가가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다고 믿기보다는, 이 사랑이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 가볼래. 그래야 알 수 있잖아? 미래는 모르니까."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수아는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좋아해 우민아. 이 순간의 나는, 분명히 너를 좋아하고 있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수아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내 볼은 새빨갛게 물들었을 것이고...
 떨리는 눈가는 분명 수아에게도 보일 거라고.

2017년 3월 24일 금요일

Juvenile Mosaic(쥬브나일 모자이크) - Sugar & Spice & You! (2)

 혼날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무지막지하게 혼났다.
 어쨌든 모범생으로 통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경고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때문인지 더 혼났다. 그래도 오후 수업은 들으러 돌아왔는데 정상참작도 안 됐고. '의자 가져오라고 보냈더니 감히 배짱도 좋게 그대로 사라졌다' 면서 선생님은 교무실에 세워놓고 그것 밖에 없는 내용을 한참동안 갈구셨다. 집에도 연락했다고 하니까 분명 집에 돌아가면 또 무지막지하게 혼나겠지. 가장 억울한 부분은 상습범인 사당이 쪽은 오히려 '니가 그러면 그렇지' 식으로 대충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이미지가 중요한 거야."
 사당이가 가슴을 쭉 내밀며 뿌듯하다는 듯, 놀리듯 재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을 때는 진심으로 욱 하고 올라왔다.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울컥하는 마음을 담아두고 속으로만 투덜대며 걸음을 옮기자, 내 옆을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사당이는 빙그레 웃었다. 몇 번이나 봤듯, 눈부신 미소로.
 "그래도 재미있었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솔직히,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재미있다, 는 것보다는 해방감을 느꼈다는 쪽이 훨씬 정확하겠지만.
 나는 그때, 사당이의 손을 잡고 철장을 넘었을 때를 떠올렸다.
 쿵, 하고 바닥을 내딛었다. 내 뒤를 따라 뛰어내린 사당이는 잡아준다는 내 말에도 어딘지 재는 투로 "내가 더 많이 해봤거든?" 하고 마치 초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봤지만, 역시나 엉덩방아를 콩, 하고 찧고는 아야야, 하며 인상을 찌푸린 채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 어설픔에 피식거리는 내 눈빛에 살짝 물기 어린 분함을 담아서.
 고작 철장 하나 넘었을 뿐인데, 뭔가가 바뀐 느낌이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을 때는,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법이다. 금지된 것을 하는 것은 뭐라 해야 할까, 룰을 무시했다는 정복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혼나지 않을까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느꼈다. 자포자기와는 조금 달랐다. 그래도 괜찮다, 라고 느꼈다.
 스스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모범생에 가까웠다.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입학 직후 치렀던 배치고사에서도 제법 좋은 점수를 냈다. 뭐, 그래놓고 수업도 제대로 듣는 일이 없는 사당이랑 같은 반이라는 것에서 배치고사라는 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언제나 수업을 열심히 듣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 하지 않고, 늘 말 잘 듣고 불만을 표하지 않는, 그런 착한 아이. 언제나 선생님에게 칭찬을 듣고, 정해진 길로만 걸으며 그 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해야 하는 일 외에는 하지 않는 아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생각해보면, 첫 일탈이었다.
 나쁜 아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작 이 정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묶고 있던 것들에서 풀려난 느낌이 들었다. 아니, 풀어낸 느낌이 들었다.
 "어때?"
 그리고 사당이는 마치 자신의 소중한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양 팔을 벌리며 선언하듯 외쳤다.
 "이게 바로 자유의 맛이야!"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데."
 "이래서 초보자는."
 쯧쯧, 하고 혀를 차며 사당이는 거만한 미소를 지은 채 손가락을 가로저었다. 얘에게 바보취급 받다니, 하는 억울함이 느껴졌지만 왠지 사당이는 이러는 게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이제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유를 갈망하기 마련이라고. 새장 속의 새들도 틈만 나면 탈출하려고 하잖아? 그럼 사람도 마땅히 그래야지. 지금 너는 새장에서 나온 거야. 자유롭게 날고 노래할 수 있다고."
 마치 설교하듯 사당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 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제법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작 그 10분을 본 것만으로도 사당이가 이런 말을 할 애는 아니라고 느꼈다. 분명 어디서 보고 베낀 거겠지.
 "그래서, 넌 뭘 할 생각인데?"
 그렇게 물어보자, 사당이는 고민하듯 팔짱을 낀 채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글쎄...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공원에서 산책해도 좋을 것 같고. 윈도우 쇼핑도 좋고. 뭘 해도 좋다는 건 이런 면에서는 곤란하단 말이지. 뭘 해도 좋으니까 그 중에서 뭘 해야 할지 고민해야하니까. 음..."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며 고민하던 사당이는, 나를 돌아보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웃었다.
 "그래, 오늘은 마침 파릇파릇한 신참도 있으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할까?"
 "응?"
 "너도 기왕 이렇게 땡땡이를 친 거,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 아냐. 괜찮아, 뭐든지 이 언니가 다 해줄 테니까 부담 없이 말해주렴."
 툭툭, 하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뿌듯함과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짓는 사당이. 나랑 같은 신입생인데다 나는 남자니까 굳이 따지자면 '누나' 겠지. 하지만 그런 태클을 걸기에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사당이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나는 그냥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그렇게 말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뭐어?"
 내 대답에 사당이는 눈을 깜빡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반은 진심이었다. 그야 나라고 해서 노는 일 없이 늘 공부만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 열심히 하고 숙제 하고 예습 복습 하고 시간 나면 적당히 TV나 보고 게임이나 하는 정말 평범하게 재미없는 사람이거든. 그래서인지 입학하고 시간도 꽤 지났지만 그다지 친구도 없고. 그러다보니 '학교 땡땡이를 치면 뭘 하고 싶냐' 하고 내게 물어본다면 딱히 없다.
 "애당초 뭔가 하고 싶어서 나왔다기보다는 널 따라 나온 거니까. 게다가 네 말대로라면 아직 신참인 나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거잖아. 숙련자인 네가 가르쳐주지?"
 뭐, 마지막 부분은 놀리자고 끼워넣은 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라고 평생 학교에서만 살았을 리 없으니 '뭘 해야 할지' 모르진 않는다. 글쎄, 이럴 때 땡땡이를 치면 PC방을 가거나 당구장에 간다거나 한다고 하던데. 뭐 그거야 남자애들 이야기긴 하지만, 솔직히 그렇기에 여자애들은, 특히 사당이는 과연 매일 땡땡이를 치고 뭘 하고 노는 건지 궁금했다. 이런 말에 넘어간다면 말이지만.
 "으음... 듣고 보니 확실히..."
 그리고 사당이는 역시나, 내 말에 정곡을 찔렸다는 듯 한 방 먹은 표정을 짓더니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얘 바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후후후...! 이거 어려운 문제군... 신참에게 자유의 맛을 알게 해줄 수 있는 일... 이라고 하면 역시 그것 밖에 없지!"
 고민하던 사당이는 번뜩 떠올랐다는 듯 과장되게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떠올리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도대체 사당이가 무슨 답을 내놓을지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사당이는 내게 다가왔다. 코와 코가 마주할 정도로. 한 걸음 물러나며 숨을 들이쉬었다.
 가까이에서 본 사당이의 눈은 어딘지 고양이 같은 인상을 줬다. 하지만 도도한 고양이가 아니라,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직 어린 새끼 고양이 같은. 눈썹이 무지개 같은 곡선을 그리고, 눈매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반짝인다. 매끄러운, 촉촉하게 젖어있는 입술이 뭔가를 원하듯 보였다.
 덥썩. 그리고 사당이는 내 손을 붙잡았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쿵쿵 울려대던 가슴이 크게 두근! 하고 울렸다. 사당이는 내 손을 맞잡은 채, 마치 춤추는 것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를 잡아끌며 활기차게 외쳤다.
 "우선, 움직여보는 거야!"
 그거 퍽이나 대단한 결론이네. 그렇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아무 말 하지 말라고 그런 나를 막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사당이에게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뭔가 대단한 걸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동네를 쏘아 다니며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녔을 뿐.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벤치에 앉아 즐겁게 떠드는 사당이의 이야기를 적당히 맞장구 치면서 들어주고, 이른 시간이라 동네 꼬맹이들도 없는 텅 빈 놀이터에서 사당이가 깔깔거리며 그네를 타고 철봉에 매달리는 걸 '얘는 역시 정신연령이 초등학생 수준 아닐까' 의심하며 구경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는 상점가에 가서 옷가게를 구경하는 사당이를 따라다니고, 분식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뭐 그런 식으로.
 "빨리 와!"
 어느새 내 앞을 폴짝폴짝 뛰어가다 입에 손까지 댄 채 나를 돌아보며 외치는 사당이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했다.
 얘는 정말 뭐든지 재미있어하는구나. 뭐든지 즐기는구나.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평소에는 하지 않는, 할 생각도 하지 않는 일들을 사당이에게 이끌려 했을 뿐. 특별한 거라고는 남들은 전부 학교에 있을 시간에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쏘아다니며 사당이가 하나 하나 사소한 것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열심히 설명해도 흥미는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당이를 바라보는 건 재미있었다.
 재미있어하고 즐기며, 무엇을 봐도, 너무나도 당연하고 흔한 것들뿐인데. 사당이 본인도 분명 늘 봐왔던 것일 텐데도 눈을 반짝거리며 행복해하는 사당이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열심히, 자신이 얼마나 그것들에서 재미를 느꼈고, 그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열심히 설명하는 사당이에게 흥미가 갔다.
 마치 데이트 같네. 피식거리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스스로의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어느새 인도 가운데의, 일렬로 늘어선 노란색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을 양 팔을 벌린 채 마치 평행봉이라도 하듯 뒤뚱거리고 있는 사당이의 등을 바라봤다.
 이제까지 살면서 데이트 같은 걸 해본 기억은 없었다. 중학교 시절 아이들이 전부 거기에 환상을 가지는 걸 보면서도 '그런 쓸데없는' 하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아마 그래서겠지. 해본 적 없는 환상을 나도 그 탓에 가지게 됐고, 듣던 거랑 비슷하다는 것에 착각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즐거운 표정으로 웃는 사당이의 옆얼굴을 보며 약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살며시 내리 눌렀다.
 분명 바보 같고 같이 있으면 한숨만 나오는 애이긴 하지만, 그런 사당이와 함께 있는 것은 이상하게도 짜증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외모 때문일까. 확실히 사당이는, 아까도 느꼈지만, 한 순간 호흡을 잊을 정도로 예쁘다. 귀여운 것에 가까운 것 같지만. 제법 예쁜 애들이 많은 우리 학교에서도 독보적이다. 그런 탓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누구든 에쁜 사람에게는 호감이 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새장 속에 사는 걸 당연히 생각하는 나니까. 그런 내게 새장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당이는 눈이 부셨다. 평생을 나가본 적 없는 집고양이 같은 나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즐기며 속박되는 것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들고양이로 보였다.
 지금까지 새장 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던 내게, 사당이는 그 사실을 알려줬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얘처럼 매일같이 학교를 빠져나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래도 좋지 않을까, 얘랑 같이 나가면 오늘처럼 즐겁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참동안 선생님에게 먼지도 안 나올 정도로 털린 끝에 돌아온 교실은 이미 청소도 끝나고 아무도 없었다. 내 자리와 사당이 자리에 가방이 하나씩 있었을 뿐. 창밖으로 봄의 늦은 석양이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가 가방을 낚아챈 사당이는, 나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고는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늘 너랑 같이 놀아서 즐거웠어! 그럼 내일 또 보자!"
 그 말에 내 가슴이 다시 한 번 둔하게 두근거렸다는 걸, 사당이는 분명 모르겠지. 저쪽은 신경도 안 쓸 테니까. 그리고 나 자신도 아직 잘 모르겠다. 이 두근거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당이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오작동인지, 아니면 내 안에서 뭔가가 싹을 트는 건지.
 그러고 보면 사당이가 누군가와 함께 땡땡이를 친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당이는 교내에서는 '전설의 탈주범', '도시전설'으로 통하는, 거의 예티나 네스 수준으로 드문 존재다. 사당이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조차 들어본 기억이 딱히 없었다. 그런 사당이가 나와 함께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다. 데이트로 착각할 정도로.
 사당이가 이러는 건 나 뿐이다ㅡ그 생각에 가슴이 다시 울렸다.
 하지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상대는 그 사당이다. 나 같은 것에게 그럴 리가 없다. 사춘기 남학생 특유의 과대망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당이의 이런 면을 아는 것도, 나 뿐이겠지. 교내에서 사당이는 그저 미스테리한 존재일 뿐이니까.
 그저 우연이었겠지만, 그래도, 처음 만났다고 같이 땡땡이를 치자고 권유하고, 같이 돌아다녔다는 건...
 어쩌면 나는 특별하다는 것 아닐까?
 "...그래, 내일 보자."
 나는 사당이가 폴짝거리며 교실을 나간 뒤에야,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일 학교에 오는 것이 기대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안녕."
 그리고 다음날. 현관에서 마주친 사당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자, 사당이는 나를 돌아봤다. 사당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 덕이려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양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누구세요?"
 "너는 조류냐."
 기억력의 유효시간이 하루 밖에 안 되다니. 그때 새장 운운 하더니 머리가 딱 새 수준이다. 특별 좋아하시네. 밤새 고민하며 그럴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타격이 꽤 클 뻔 했다. 그럼 그렇지.
 내 지적에 사당이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턱에 손을 대고 과장스럽게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마침내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말했다. 변함없이 행동 하나하나가 만화 같다.
 "아! 신참이구나!"
 "그걸로 기억하기냐."
 누가 신참이야.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내 대꾸는 신경도 안 쓰고, 사당이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반갑다는 듯 내 양 손을 맞잡고 붕붕 흔들어댔다.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미소가 역시 눈부시다. 사당이는 내 팔을 놔주고 물었다.
 "집에 들어가서 혼날 거라고 걱정하더니, 많이 혼났어?"
 "뭐, 그야 그렇지."
 그렇게 화내시는 어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봤다. 이제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손을 대시진 않았지만 어릴 때처럼 회초리로 때리실 것만 같은 분위기였고. 하지만 거기까지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지. 솔직히 좀 부끄럽기도 하고. 몸을 돌려 교실로 걸어가자, 사당이도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사당이는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오늘도 같이 갈 거야?"
 "너 어제 혼나고 오늘도 땡땡이치게?"
 그야 얘가 그럼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단하네. 놀람보다는 감탄을 담아 바라보자, 사당이는 '흐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가슴을 내밀었다. 뿌듯하다는 듯. 칭찬하는 거 아니거든.
 "자유란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야.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는 것이지!"
 "그거 참 좋은 말이네."
 "그치, 그치?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이 손으로 내 자유를 쟁취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그건 안 되겠는데."
 그 순간 들린 목소리에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동시에 정면을 바라봤다. 이상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으니까. 그녀는 마치 우리를 가로막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당당하게 서있었다.
 우리 반 반장이었다.
 박하향.
 자연스럽게 풀어둔 긴 생머리. 나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어른스러운 몸매. 이지적인 기색을 더욱 강하게 하는 안경과 그 밑의 날카로운 안광. 성격이 외모로도 드러나는 건지 날이 서있는 느낌이랄까,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차가운 인상 덕분에 반에서도 '미녀' 로는 뽑을지언정 '사귀고 싶다' 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손끝으로 귀 앞에서 안경을 추켜올리며 하는 하향이의 말에 움찔, 하고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표정에서 너무 드러났나.
 성적은 지극히 우수. 신입생 배치고사 만점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품행은 물론 단정. 중학생 때는 학생회와 선도부원으로 3년 내내 활동했다고 들었다. 선생님들의 부탁이나 말을 어기는 일도 전혀 없는, 말 그대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우등생이자 모범생. 나 역시 그런 걸 자처하고 있지만 하향이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하향이는 움츠러든 나는 무시하고 사당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날카로운 안광 때문인지 사당이가 움찔, 하면서 내게 팔짱을 꼈다. 그 탓에 나 역시 다시 움찔, 하고 몸을 떨었고. 볼이 빨개지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는데. 얘는 관심도 없다는 듯 까먹었으면서 왜 또 이런 착각을 하게 만드는 거야.
 "감사당. 어제도 땡땡이를 쳤으면서 오늘도 치겠다고?"
 하향이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차가움 탓인지 날카로움 탓인지 으르렁 거리는 것 같았다. 마치 도베르만이나 날카로운 인상의 사냥개처럼. 그리고 내 뒤로 몸을 숨기려는 듯 쭈뼛거리는 사당이는 개에게 쫓기는 고양이 같았다.
 "그, 자, 자유는 인간이 누려야 할..."
 "학교를 멋대로 나가는 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야."
 찌릿, 하는 안광에 내게 하던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으려던 사당이는 즉시 입을 닫았다.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가운데 끼어서 생각해보니, 생긴 것도 태도도 정 반대구만.
 단발의 사당이. 장발의 하향이. 어딘지 바보같지만 편안한 분위기의 사당이와 어른스럽고 냉철한, 그래서 날카로운 느낌의 하향이. 수업 빠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사당이와 선생님의 말을 법으로 여기며 규율에 충실한 하향이. 이 정도로 상극이다보니 오히려 재미있을 정도다.
 하향이는 나랑 사당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단호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듯 힘있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반장으로서, 나는 선생님에게 너희 둘이 다시는 수업을 빠지지 못하도록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상습범인 사당이는 물론이고, 얘에게 물들어가는 다호 너도. 앞으로는 내가 너희 둘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지켜볼 거야."
 "누, 누구 맘대로..."
 "선생님 말씀이야."
 기어들어가듯 반론하려던 사당이의 말은 다시금 하향이의 선포에 가로막혔다. 하향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이 내가 지켜보는 이상, 너희들에게 더 이상 자유란 없어!"
 왜일까.
 내 본성 역시 그쪽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유 없이 울컥함이 몰려왔다.

2017년 3월 21일 화요일

Juvenile Mosaic(쥬브나일 모자이크) - 소꿉친구 누님에게 마음을 품었는데 어느 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서 곤란합니다 (2)

 소문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퍼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어쩌고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1교시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전교에서 모르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평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얌전하게 학교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이런 관심은 부담스러움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소문이 빨리 퍼지는 걸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저기, 라이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내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보며 행복하게 웃는 라이타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혼자 들어가고 싶은데."
 내가 가리키는 건, 입구 바로 위에 달린 '남자화장실' 이라는 표시.
 입구 바로 앞에서 멈춰선 나와, 내 바로 옆에 매달린 라이타 덕분에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오려던 인파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저 입을 살짝 벌린 상태로 나를, 정확히는 라이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말에 라이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치?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타는 보기 드물게, 오늘 들어 처음으로 살짝 상기된 볼을 한 채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중얼거리 듯 말했다.
 "부부 사이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보게 될 테고... 딱히 나는 신경 안 써."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하는 라이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 부부 아니거든. 언젠가는 본다니 뭘 본다는 거야. 그리고 신경 쓰는 건 나랑 여기 있는 애들이라고. 저기 급해 죽겠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애 안 보여?
 그런 마음을 담아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라이타를 빤히 바라보자, 라이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하아, 하고 귀엽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너무 속박해도 안 되겠지. 나,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게."
 "어, 그, 그래. 그럼..."
 라이타가 정말 마음씨 좋은 아내처럼 웃으며 내 팔짱을 풀어주자마자, 나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듯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 행동 덕분인지 멈춰 있던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두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덕분에 얼굴이 새빨개진다. 원래 누가 보면 안 나오는 법인데, 긴장하면 안 나오는 법인데, 남자 화장실의 모두가 날 보고 있잖아. 얌마, 넌 뭘 보는 거냐.
 이렇게 '화장실로 도망가면 못 쫓아오겠지' 하는 생각도 실패하는 게 판명되었다.
 라이타는 문자 그대로 '어딜 가도' 나를 따라왔다.
 마치 다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는 듯.
 라이타의 자리는 내 바로 옆자리, 흔히 말하는 '짝꿍'이 되었다. 원래 비어있던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타의 등장과 함께, 반 아이들은 어째서인지 라이타에게 엄청나게 호의적이었다. 우리 반이 이렇게나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곳이라는 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전혀 안 그랬지만. 게다가 어릴 때, 라이타와 함께 있을 때 라이타가 학교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떠올리면 감격까지 느껴진다.
 말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내어준 내 옆자리에 앉고, 교과서를 펼친 채, 수업시간 내내 라이타는 칠판은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그저 내 옆얼굴만을 바라봤다. 행복하다는 듯 배시시 헤실헤실 웃으며. 양 손으로 뺨을 받친다는 참으로 앙증맞고 귀여운 자세로.
 그 시선이, 음, 기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라이타는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말 운명 같을 정도였다.
 쉬는 시간에 배가 아프다는 적당한 핑계로 양호실에 갔다. 침대에 눕자 바로 옆자리에 누워서 나를 보며 웃는 라이타를 발견했다. 마침 양호실이 어디 있는지 소개 받아서 왔다는 모양이었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다른 반에 숨어있기로 했다. 다른 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마치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대화에 섞여있는 라이타를 발견했다. 마침 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다른 반도 익힐 겸 프린트를 옮겨달라고 했다는 모양이었다.
 매점에 가려고 했다. 라이타는 팔짱까지 낀 채로 마치 데이트를 나온 연인마냥 내게 이야기하며 나를 따라왔다. 그 사이 사귄 반의 여자애들과 왔다가 나를 발견했다는 모양이었다.
 우리 학교의 유명한 탈주마처럼 아예 자체휴강을 때리고 담을 넘으려 했다. 분명 오늘 전학 왔을 텐데, 라이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같이 데이트 가려는 거냐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마침 산책하던 참이었다는 모양이었다. 산책이라니, 학교에서?
 "..."
 이어지는 시선 탓인지 긴장 탓인지 소변기 앞에서 계속 서있기만 한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물러나 대변기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부담스럽다.
 너무너무 부담스럽다.
 잘 따르는 강아지나 엄마 오리를 쫓아오는 새끼 오리, 라고 하면 귀여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쯤 되니 무섭기까지 하다. 밤에 침대에 같이 누워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스토커냐고.
 나 역시 물론 반가웠다. 그야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미안해질 정도로 라이타와 나는 친한 사이였으니까. 그런 라이타를 다시 만난 것도 기쁜데, 재회의 기쁨에 눈물까지 흘렸다면 감격스러울 정도다. 뭐, 입맞춤이 없었어도 그것만으로도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결혼이라니, 그런 약속 기억 안 난다고.
 ...아니, 사실 기억 자체는 난다. 그래.
 어릴 때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 기억난다. 소꿉놀이를 하면서였나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 라이타가 얌전한 소꿉놀이를 했다는 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다른 놀이를 할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랬던 적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그건 어릴 때 이야기잖아. 코흘리개 초등학생 시절 약속이잖아.
 그야 라이타의 마음이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약속을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지키자고 해도 '어어' 하는 반응 외에는 해줄 게 없다.
 무엇보다 결혼은 만 18세 이후에,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하에 가능하단 말이다.
 아무튼.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라이타가 부담스러운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유하 선배가 있으니까.
 ...아니, 뭐. '나에게는' 하고 말할 사이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 분명 나는 라이타를 좋아했다.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 무렵까지 유하 선배, 아니 유하 누나는 동경하는, 존경하는 누나였지만 라이타는 내게 눈부신 존재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같이 놀면 즐겁고, 고운 커피색으로 활기차게 물든 그녀의 색다른 외모도 좋았다. 무엇보다 라이타는 언제나 내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고 말했고. 나 역시 그런 마음이 기뻤다. 어린 나이였기에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타를 좋아했다. 어릴 때의 약속이긴 했지만, 그 당시 '결혼하자!' 는 약속에 대한 내 마음 역시 라이타의 마음처럼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라이타가 없는 사이 내 마음은 변했다.
 물론 지금도 라이타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친구로서지, '연인'으로나 '아내'로서냐고 물어본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아니다.
 나는 유하 선배가 좋다. 비록 짝사랑이지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라이타의 마음에 단호하게 대답해야겠지. 미안해, 하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고,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자, 고.
 그렇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이타의 눈빛이 너무 행복해보였으니까. 그 기대를 내 쪽에서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라이타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입장을 바꿔서, 만약 유하 선배가 내 고백에 나를 보면서 "미안하지만 나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미안해. 다래 너는 그냥 동생으로 밖에 안 보여. 우리 누나 동생으로 지내면 안 될까?" 라고 한다면...
 "끄으윽..."
 내 상상만으로도 타격에 정말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래야? 안에 있어?"
 그 순간, 라이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남자 화장실 안에 울려 퍼졌다. 다급히 외쳤다.
 "아, 안에 있어! 들어오지 마!"
 "응! 알았어!"
 내 대꾸에 라이타는 밝게 대답했다.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는 사이 라이타의 듣기 좋은 콧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겠지. 게다가 라이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 들어오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까지 들었다. 문을 열고 나와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남자애들의 사이를 지나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섰다. 라이타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내 팔짱을 꼈다.
 사실 걱정된다.
 이미 전교에 소문이 쫙 퍼졌다면, 분명 유하 선배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라이타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내게 결혼하자고 외쳤고, 하루 종일 붙어있다고. 유하 선배가 과연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 질투라도 해줬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건 내 망상일 뿐일 테고, 흐뭇하게 웃으며 '잘 됐네. 둘이서 예쁜 사랑 하렴!' 하고 어머니 같은 눈빛을 보낸다면 어떻게 하지. 솔직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고민을 하며, 라이타와 함께 오늘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당연히 해야 했던 걱정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
 방과 후. 교문에서 유하 선배와 라이타는 서로를 보자마자 동시에 말했다.
 늘 그렇듯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배와 라미.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나오는 나와 라이타. 걸음걸이는 멈추고, 웅성거리는 주위 인파의 소리도 같이 멋은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마치 서부극의 결투 현장에라도 온 것 같았다. 우연이겠지만 때마침 비닐봉지 하나가 바람에 구르며 우리의 사이를 지나갔다.
 일났다... 엿됐다...
 뒤늦은 깨달음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초등학생 시절 이 동네에는 두 파벌이 존재했다.
 유하 선배, 당시에는 유하 누나의 파벌.
 그리고 라이타의 파벌.
 당연한 수순으로, 당연한 결론으로, 유하 누나와 라이타는 앙숙이었다.
 뭐랄까,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 주먹다짐을 하며 싸운 적은 없지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둘이 같은 공간, 예로 들어 동네 문방구나 구멍가게, 놀이터 같은 곳에서 마주치면 둘 사이에 튀는 불꽃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
 대결하고 있는 파벌의 지도자들끼리 사이가 좋을 리는 없으니까.
 모두가 언젠가는 둘 사이에 한 판 대결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나 역시 그 날이 오는 걸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싸움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유하 누나의 부전승이라는 결과로 끝이 났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 숙명의 라이벌은 다시금 재회했다.
 이어지는 건, 역시 리턴 매치일까.
 꿀꺽, 하고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머리로는 생각했다. 그거야 어릴 때 이야기고, 둘이 뭔가 서로를 싫어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니니 이제 와서 싸울 이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왜인지 가슴이 쿵쾅대고 있었다. 묘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설마하니, 서로 빤히 노려보면서 신경전을 벌이지는 않겠지.
 아니야, 그건 이미 하고 있잖아. 어쩌면 그 이상을 할지도 몰라.
 아, 제발. 그런 일은 없었으면.
 나는 불안에 떨며 유하 선배와 라이타를 번갈아 바라봤다.
 라미는 놀랐다는 듯 크게 떴던 눈을 가늘게 하며, 묘한 긴장감을 품어내며 내 걱정을 더욱 부추겼다. 라미는 어릴 때부터 유하 선배의 가장충실한 심복이었으니까. 내 쪽이 아니라 유하 선배와 피로 이어진 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 라미의 반응이 내게는 뭔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는 내 얼굴을 힐끔 보고는, 결심했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타는 내 팔에 끼고 있던 팔짱을 슬그머니 풀었다.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유하 선배도, 들고 있던 가방을 라미에게 내밀고 한 걸음 내딛었다.
 아아, 이제 끝장이야.
 라이타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유하 선배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한 걸음씩 내딛었다.
 그리고.
 "유하 언니...?"
 "라이타...?"
 둘은 그렇게, 마치 확인하듯 중얼거리더니.
 "유하 언니이이ㅡ!"
 "라이타아ㅡ!"
 서로의 이름을 외치며, 서로에게 달려가, 힘껏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유하 언니, 유하 언니이...!"
 "이게 몇년 만이야! 와아...! 라이타!"
 아까 내게 했던 것처럼, 유하 선배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긴 채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라이타. 그리고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라이타를 끌어안은 채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반갑게 웃는 유하 선배. 저 뒤에서는 라미가 '그럼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유하 선배와 라이타는 서로 볼을 비비고 코를 비비며 화기애애하고 감격적인 재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 돌아왔구나. 미리 찾아가서 만날 걸 그랬어."
 "으응, 아니야. 나야말로 유하 언니를 만나러 갈걸 그랬어. 나 돌아왔어, 유하 언니. 앞으로 여기서 쭉 같이 살 거야!"
 "나도 기뻐, 라이타. 10년이나 여기 없었으니까 많이 바뀌었겠지만,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자. 같이 놀기도 하고!"
 "응! 유하 언니, 만나서 기뻐!"
 "나도 네가 돌아와서 반가워, 라이타."
 마치 헤어진 단짝친구, 혹은 자매와 재회한 것 같은 감격스러운 장면에 하교하는 학생들도 전부 둘을 바라본다. 물론 둘은 그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참으로 흐뭇하게 서로를 확인하며 감동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런 둘을 말없이 바라봤다. 뭐...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언젠가는 말을 걸어야겠지만, 적어도 잠깐 동안은 둘의 재회를 방해하지 말고 따뜻하게 지켜봐야겠지.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내 걱정 따위는 모두 기우였다니 마음이 놓인다. 어릴 때의 앙금이 남아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때, 두 사람 사실은 사이가 좋았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나는 푸근한 마음으로 둘을 바라봤다. 어떻게 보면 그리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것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그 시절로. 앞으로 라이타도 함께, 네 사람이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겠지.
 그때, 나는 아까 했던 걱정도, 유하 선배와 라이타에 대한 내 마음도 잊고,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건, 아주 오랜 뒤였다.





 "방심했다아...!"
 집으로 돌아온 직후. 평소와는 다르게 다래와 라미의 집에 가지 않고 싱긋 웃으며 인사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직행한 유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툭, 하고 떨어트리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며 그렇게 외쳤다.
 "완전히 꼬였다아...!"
 평소의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힘없는, 조금은 투박한, 꾸미지 않은 상심한 유하 본인의 목소리.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일자로 엎어져있던 유하는, 이윽고 발을 쿵쾅쿵쾅 구르고 양 손으로 묶어 올린 포니테일 머리카락을 풀고 헝클어뜨리며 조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라이타 그것에게 당했다아ㅡ!"
 예상치도 못했다.
 솔직히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아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옛날에 살던 전학생이 온다고 해서 라이타였을 줄 누가 아냐고. 말이 되냐고. 뭐냐고 이 운명의 장난. 너무하잖아. 대놓고 날 엿 먹이려는 속셈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누구든 좋으니까 이딴 계획을 세운 놈의 멱살을 잡고 신나게 흔들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유하는 쿵쾅거릴 정도로, 결국 어머니가 "시끄러워!" 하고 소리칠 정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으로 침대를 내려치고,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잡아당길 뿐이었다.
 그토록 오래 준비해왔는데.
 앞으로 반년만 있으면 다 끝났을 텐데.
 그 모든 포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다니.
 유하는 진심으로 분해했다. 여기에서는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
 유하는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점 조차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는 굵어졌다.
 일부러 어른스러움을 연출했던 것이, 벌써 6년 이상. 어릴 때와 성격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다래가 어른스러운 여자를 동경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력해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고도 가면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아침밥을 차려주고 가사를 도와주며, 미래에 아내로서 같이 지낼 때의 일을 경험하게 했다.
 늘 챙겨주면서, 언제부터인가 조금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된 다래를 성장시키며 더욱 더 멋진 남자로 만들려 했다. 그 모든 것이 유하의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믿고 의지하도록.
 몇 년 전, 다래에게만 '유하 누나' 대신 '유하 선배' 로 호칭을 바꾸게 한 것도 계획된 행동이었다. 열심히 찾아 읽던 여러 정보 중 하나에서 웨스터마크 효과라나,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온 남녀는 서로를 형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나는 너의 가족이 아니다. 아직은' 이라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 덕분에, 그 모든 계획 덕분에, 몇 년 전부터 다래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요 호감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다래는 아직 자신을 누나로 보고 있고, 스스로 연하라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런 상황을 인정하고, 혹은 성장해야 비로소 다래는 용기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한 계획도 이미 짜두었다. 앞으로 반년 안에, 그러니까 2학년 무렵에는, 3학년인 유하의 졸업을 앞둔 시기가 되면, 더 기다렸다가는 유하를 놓칠까 두려워 다래는 용기를 내면서 자신에게 고백할 것이고, 유하는 그걸 어쩔 수 없다는 척 받아들일 것이다. 그대로 해피엔딩.
 그럴 계획이었는데.
 뭐야, 갑자기. 깜빡이도 안 키고 끼어들어오기는. 거기다가 뭐야ㅡ, 그 변화. 그야 어릴 때도 귀염성은 있었지만 선머슴 같은 차림에 어느 쪽이냐 하면 남자애 같은 활발한 타입이었으면서, 그런 애교 넘치는 미소녀로 변할 줄이야.
 역시 그때, 어떻게든 했어야 했어.
 어떻게든, 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야 마주치자마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지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래의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다래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 우리 둘의 충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보면서도 걱정을 사실로 만들 수는 없었다. 뭐, 반가움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겉으로는 재회를 반기는 마음씨 좋은 누나를 연출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상대도 분명 같은 마임이었을 거라는 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벨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유하는 손을 내밀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언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역시나 들려오는 건 라미의 목소리.
 믿을 수 있는 동생이자, 최고의 심복. 그리고 스파이.
 어느 순간부터 내 목적을 알고, 계획을 도와주고 있는 동료.
 그런 라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오빠가 다른 마음 품을 것 같진 않지만, 라이타 언니 들이대는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그래... 나도 걱정돼."
 다래는 모른 척 했지만, 유하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전교에 이미 쫙 퍼진 소문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그야 유하 본인도 모른 척 했지만. 추궁할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만든 이미지에서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의 유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 좋고 어른스러운, 친동생 같은 다래를 걱정하는 '누님' 이었으니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유하는 고민 끝에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 현재까지는 아직도 자신이 유리하다. 그 점은 자만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한 방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키운 다래는 그런 공세에 홀랑 넘어가버리는 남자가 아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상, 한 순간에 마음이 변할 리는 없다.
 "그치만, 그렇게 여유 부리면 위험한 거 아냐?"
 마찬가지로 심각한 라미의 말에 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듣기로는 어릴 때 결혼 약속도 했다는 모양이니까. 결혼 약속이라니, 왜 그때의 난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걸까. 그것만으로도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그야 어린애의 약속일뿐이지만, 그걸 카드로 사용하는 라이타의 행동은 진심이었다. 여우 같은 기지배.
 "그렇다고 갑자기 태도를 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라미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지금까지 10년에 걸쳐 쌓아온 계획과 이미지를 한 순간에 바꾸기에는 부담이 따른다. 괜히 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
 유하의 말에 라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결국 유하 언니가 결정할 일이지만, 나는 유하 언니의 선택이라면 뭐든 응원하고 있으니까. 가능하면 유하 언니랑 정말로 가족이 되고 싶고. 언제는 나는 언니 편이야."
 "고마워 라미야."
 그리고 이쪽에는 이렇게 듬직한 지원군도 있자. 그야 한 방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전황은 유리하다. 다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괜히 서둘러 행동에 나서서 빈틈을 보이는 것보다는, 상황을 파악하며 지금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괜찮아. 나, 절대 지지 않을 거니까."
 확신을 담아, 유하는 그렇게 말했다.
 애당초, 그 싸움은ㅡ

 "후후."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라이타."
 자신도 모르게 흘린 웃음에 흐뭇하다는 듯한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태워주는 차 뒷자리에서 집으로 향하던 라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거든요."
 "그래, 그거 잘 됐네."
 아버지는 그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입장에서 '그 친구' 는 이사를 가는 라이타를 유일하게 찾아왔던 좋은 친구 정도였으니까. 아직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가게 하지 않을 거지만. 라이타는 아버지의 그런 생각을 꿰뚫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다래 혼자 부른 것은 결코 허투루 한 일이 아니었다.
 "나다래..."
 라이타는,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지난 10년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되뇌었던 이름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치 주문을 걸듯이.
 우연이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전학 온 학교와 반에 그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부터, 라이타는 반드시 어릴 때 살던 마을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곳이 익숙하다는 핑계도 핑계였지만, 물론 목적은 하나였다.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알아보며, 그가 어느 학교 어느 반인지를 미리 파악하고.
 자연스럽달까, 노력 끝에 편입해 하필이면 그 반으로 들어가도록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재회한 순간 느낀 감정과 눈물도 계획되어 있었다. 물론, 만난 순간 그런 계획을 떠올릴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치 자연의 법칙이라는 듯 흘러나왔지만. 왜냐하면 그 감정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마하니 아직도 그 여자가 있을 줄이야. 그건 조금 에상 외였다. 뭐, 그때도 그랬듯 쉽게 포기하거나 떨어질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10년이 지난 아직도 붙어있다니. 게다가 이미지도 확 바꿔서는. 이쪽이라고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도 아니긴 하지만.
 뭐, 이쪽도 저쪽도 서로 선전포고도 했다.
 반갑게 재회하는 상황이었지만, 라이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ㅡ유하 언니, 앞으로 여기서 쭉 같이 살 거야!"
 해석하자면, '그때는 몰라도 앞으로는 너뿐만이 아니라 나도 여기서 쭉 같이 지내니까 긴장 타시지?'
 그리고 그 말에 유하도 대답했다.
 "ㅡ10년이나 여기 업섰으니까 많이 바뀌었겠지만,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자."
 해석하자면, '그래봤자 나는 10년이나 곁에 있었거든? 또 그때처럼 한 판 해도 상관 없는데?'
 다래의 걱정에 화목하게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았지만, 서로의 눈빛을 서로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도 그랬으니까.
 다래는 아마 영역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오해하고 있겠지만, 유하와 라이타의 대결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그렇기에 절대 공존할 수 없으며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인 탓이었다.
 말하자면, '사랑싸움' 이었다.
 나랑 같이 노는 편이 친구도 더 많고 놀 곳도 더 많아.
 그러니까 저 애 말고 나랑 같이 놀자.
 나랑 단 둘이 같이 놀자.
 동네를 양분하던 싸움은, 그저 그런 의미.
 뭐, 다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하겠지만. 라이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작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이길 거야.
 그때도 부전패를 당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다래도 다래야. 그렇게 나서면 분명 푹 빠질 줄 알았는데, 그 여자 쪽만을 신경 쓰는 게 빤히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세뇌를 당한 건지.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어릴 때도 그랬고. 그러면서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이나 쓰고. 영악하기는.
 전황은 불리하다. 그것도 알고 있다.
 유하의 말대로 둘 사이에는 10년 동안 이어진 유대가 있다. 기억이 있다. 추억이 있다. 반면 자신의 추억은 10년이나 지난, 빛바랜 사진 같은 것. 거기에 다래는 이미 유하에게 마음이 쏠려 있다. 얌전히 어릴 때의 소꿉친구, 같은 위치에 안주했다가는 명맥한 상하관계에 있는 그 여자에게 손쓸 틈도 없이 당해버린다.
 그러니까 이쪽은 정공법뿐이다. 오로지 공격뿐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돌격할 뿐이다.
 나는 태풍 같은 아이니까.
 몇 번이고 두드리고 흔들어주겠어.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여자야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면서 에둘러 위치를 확보하느라 본인의 마음은 하나도 전하지 못했고, 주위에서 보는 둘의 관계는 그냥 '이웃 누나와 동생' 일 뿐이다. 게다가 유하는 3학년, 수험생. 남아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너무 여유를 부리셨어, 하유하. 그런 미적지근함에 기댈 생각이라면 금방 당해버릴 걸. 라이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번도 다래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자신은 전교에 소문이 자자하다.
 결혼 약속도 돌직구였던 만큼, 공개적으로 던진 만큼 큰 파괴력을 냈다.
 단 하루만에 반쯤 공인 커플 상태. 이것만으로도 커다란 교두보는 확보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옆에서, 정말 부부처럼 지내는 거야. 언제나 진심을 전하고, 다래의 곁에서 구애하는 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고.
 그래도 안 넘어가면, 태풍답게 쓰러트려버리면 된다. 언젠가 다래가 자신에게 붙여준 칭호대로.
 그런 생각을 하며, 라이타는 사랑하는 이의, 오늘 하루 종일 바라봤지만 질리지 않는, 지난 10년간을 보충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랄 지경인 옆얼굴을 떠올리고는 푸근하게 웃었다.
 다시 만나도 다래는 멋졌다.
 귀찮을 수도,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그런 기색도 보였는데, 결국 다래는 자신을 받아줬다.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나를 기억해줬다. 10년간 품어온 이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아무 편견 없이 바라본다. 품어준다. 그 상냥함이, 친절함이, 언제나 푸근하게 받아주는 점이, 다래의 가장 멋진 점이다. 다른 누구보다 멋진 점. 언제나 그 곁에 있고 싶어지는 점.
 언제나 곁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언제라도 푸근하게 받아줄 것 같은.
 그러니까 그 점을 이용해줄 거야.
 사랑과 전쟁에서는 뭐든 허락되는 법이니까.
 내일은 어떻게 다가갈까.
 다래의 마음을 어떻게 빼앗을까.

  라이타
 그 여자에게ㅡ,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유하

 우연히도, 그 순간.
 두 연적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