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1일 화요일

Juvenile Mosaic(쥬브나일 모자이크) - 소꿉친구 누님에게 마음을 품었는데 어느 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서 곤란합니다 (2)

 소문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퍼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어쩌고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1교시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전교에서 모르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평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얌전하게 학교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이런 관심은 부담스러움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소문이 빨리 퍼지는 걸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저기, 라이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내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보며 행복하게 웃는 라이타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혼자 들어가고 싶은데."
 내가 가리키는 건, 입구 바로 위에 달린 '남자화장실' 이라는 표시.
 입구 바로 앞에서 멈춰선 나와, 내 바로 옆에 매달린 라이타 덕분에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오려던 인파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저 입을 살짝 벌린 상태로 나를, 정확히는 라이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말에 라이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치?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타는 보기 드물게, 오늘 들어 처음으로 살짝 상기된 볼을 한 채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중얼거리 듯 말했다.
 "부부 사이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보게 될 테고... 딱히 나는 신경 안 써."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하는 라이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 부부 아니거든. 언젠가는 본다니 뭘 본다는 거야. 그리고 신경 쓰는 건 나랑 여기 있는 애들이라고. 저기 급해 죽겠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애 안 보여?
 그런 마음을 담아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라이타를 빤히 바라보자, 라이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하아, 하고 귀엽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너무 속박해도 안 되겠지. 나,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게."
 "어, 그, 그래. 그럼..."
 라이타가 정말 마음씨 좋은 아내처럼 웃으며 내 팔짱을 풀어주자마자, 나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듯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 행동 덕분인지 멈춰 있던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두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덕분에 얼굴이 새빨개진다. 원래 누가 보면 안 나오는 법인데, 긴장하면 안 나오는 법인데, 남자 화장실의 모두가 날 보고 있잖아. 얌마, 넌 뭘 보는 거냐.
 이렇게 '화장실로 도망가면 못 쫓아오겠지' 하는 생각도 실패하는 게 판명되었다.
 라이타는 문자 그대로 '어딜 가도' 나를 따라왔다.
 마치 다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는 듯.
 라이타의 자리는 내 바로 옆자리, 흔히 말하는 '짝꿍'이 되었다. 원래 비어있던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타의 등장과 함께, 반 아이들은 어째서인지 라이타에게 엄청나게 호의적이었다. 우리 반이 이렇게나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곳이라는 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전혀 안 그랬지만. 게다가 어릴 때, 라이타와 함께 있을 때 라이타가 학교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떠올리면 감격까지 느껴진다.
 말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내어준 내 옆자리에 앉고, 교과서를 펼친 채, 수업시간 내내 라이타는 칠판은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그저 내 옆얼굴만을 바라봤다. 행복하다는 듯 배시시 헤실헤실 웃으며. 양 손으로 뺨을 받친다는 참으로 앙증맞고 귀여운 자세로.
 그 시선이, 음, 기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라이타는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말 운명 같을 정도였다.
 쉬는 시간에 배가 아프다는 적당한 핑계로 양호실에 갔다. 침대에 눕자 바로 옆자리에 누워서 나를 보며 웃는 라이타를 발견했다. 마침 양호실이 어디 있는지 소개 받아서 왔다는 모양이었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다른 반에 숨어있기로 했다. 다른 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마치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대화에 섞여있는 라이타를 발견했다. 마침 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다른 반도 익힐 겸 프린트를 옮겨달라고 했다는 모양이었다.
 매점에 가려고 했다. 라이타는 팔짱까지 낀 채로 마치 데이트를 나온 연인마냥 내게 이야기하며 나를 따라왔다. 그 사이 사귄 반의 여자애들과 왔다가 나를 발견했다는 모양이었다.
 우리 학교의 유명한 탈주마처럼 아예 자체휴강을 때리고 담을 넘으려 했다. 분명 오늘 전학 왔을 텐데, 라이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같이 데이트 가려는 거냐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마침 산책하던 참이었다는 모양이었다. 산책이라니, 학교에서?
 "..."
 이어지는 시선 탓인지 긴장 탓인지 소변기 앞에서 계속 서있기만 한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물러나 대변기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부담스럽다.
 너무너무 부담스럽다.
 잘 따르는 강아지나 엄마 오리를 쫓아오는 새끼 오리, 라고 하면 귀여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쯤 되니 무섭기까지 하다. 밤에 침대에 같이 누워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스토커냐고.
 나 역시 물론 반가웠다. 그야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미안해질 정도로 라이타와 나는 친한 사이였으니까. 그런 라이타를 다시 만난 것도 기쁜데, 재회의 기쁨에 눈물까지 흘렸다면 감격스러울 정도다. 뭐, 입맞춤이 없었어도 그것만으로도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결혼이라니, 그런 약속 기억 안 난다고.
 ...아니, 사실 기억 자체는 난다. 그래.
 어릴 때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 기억난다. 소꿉놀이를 하면서였나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 라이타가 얌전한 소꿉놀이를 했다는 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다른 놀이를 할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랬던 적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그건 어릴 때 이야기잖아. 코흘리개 초등학생 시절 약속이잖아.
 그야 라이타의 마음이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약속을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지키자고 해도 '어어' 하는 반응 외에는 해줄 게 없다.
 무엇보다 결혼은 만 18세 이후에,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하에 가능하단 말이다.
 아무튼.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라이타가 부담스러운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유하 선배가 있으니까.
 ...아니, 뭐. '나에게는' 하고 말할 사이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 분명 나는 라이타를 좋아했다.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 무렵까지 유하 선배, 아니 유하 누나는 동경하는, 존경하는 누나였지만 라이타는 내게 눈부신 존재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같이 놀면 즐겁고, 고운 커피색으로 활기차게 물든 그녀의 색다른 외모도 좋았다. 무엇보다 라이타는 언제나 내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고 말했고. 나 역시 그런 마음이 기뻤다. 어린 나이였기에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타를 좋아했다. 어릴 때의 약속이긴 했지만, 그 당시 '결혼하자!' 는 약속에 대한 내 마음 역시 라이타의 마음처럼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라이타가 없는 사이 내 마음은 변했다.
 물론 지금도 라이타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친구로서지, '연인'으로나 '아내'로서냐고 물어본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아니다.
 나는 유하 선배가 좋다. 비록 짝사랑이지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라이타의 마음에 단호하게 대답해야겠지. 미안해, 하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고,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자, 고.
 그렇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이타의 눈빛이 너무 행복해보였으니까. 그 기대를 내 쪽에서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라이타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입장을 바꿔서, 만약 유하 선배가 내 고백에 나를 보면서 "미안하지만 나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미안해. 다래 너는 그냥 동생으로 밖에 안 보여. 우리 누나 동생으로 지내면 안 될까?" 라고 한다면...
 "끄으윽..."
 내 상상만으로도 타격에 정말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래야? 안에 있어?"
 그 순간, 라이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남자 화장실 안에 울려 퍼졌다. 다급히 외쳤다.
 "아, 안에 있어! 들어오지 마!"
 "응! 알았어!"
 내 대꾸에 라이타는 밝게 대답했다.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는 사이 라이타의 듣기 좋은 콧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겠지. 게다가 라이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 들어오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까지 들었다. 문을 열고 나와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남자애들의 사이를 지나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섰다. 라이타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내 팔짱을 꼈다.
 사실 걱정된다.
 이미 전교에 소문이 쫙 퍼졌다면, 분명 유하 선배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라이타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내게 결혼하자고 외쳤고, 하루 종일 붙어있다고. 유하 선배가 과연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 질투라도 해줬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건 내 망상일 뿐일 테고, 흐뭇하게 웃으며 '잘 됐네. 둘이서 예쁜 사랑 하렴!' 하고 어머니 같은 눈빛을 보낸다면 어떻게 하지. 솔직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고민을 하며, 라이타와 함께 오늘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당연히 해야 했던 걱정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
 방과 후. 교문에서 유하 선배와 라이타는 서로를 보자마자 동시에 말했다.
 늘 그렇듯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배와 라미.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나오는 나와 라이타. 걸음걸이는 멈추고, 웅성거리는 주위 인파의 소리도 같이 멋은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마치 서부극의 결투 현장에라도 온 것 같았다. 우연이겠지만 때마침 비닐봉지 하나가 바람에 구르며 우리의 사이를 지나갔다.
 일났다... 엿됐다...
 뒤늦은 깨달음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초등학생 시절 이 동네에는 두 파벌이 존재했다.
 유하 선배, 당시에는 유하 누나의 파벌.
 그리고 라이타의 파벌.
 당연한 수순으로, 당연한 결론으로, 유하 누나와 라이타는 앙숙이었다.
 뭐랄까,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 주먹다짐을 하며 싸운 적은 없지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둘이 같은 공간, 예로 들어 동네 문방구나 구멍가게, 놀이터 같은 곳에서 마주치면 둘 사이에 튀는 불꽃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
 대결하고 있는 파벌의 지도자들끼리 사이가 좋을 리는 없으니까.
 모두가 언젠가는 둘 사이에 한 판 대결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나 역시 그 날이 오는 걸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싸움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유하 누나의 부전승이라는 결과로 끝이 났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 숙명의 라이벌은 다시금 재회했다.
 이어지는 건, 역시 리턴 매치일까.
 꿀꺽, 하고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머리로는 생각했다. 그거야 어릴 때 이야기고, 둘이 뭔가 서로를 싫어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니니 이제 와서 싸울 이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왜인지 가슴이 쿵쾅대고 있었다. 묘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설마하니, 서로 빤히 노려보면서 신경전을 벌이지는 않겠지.
 아니야, 그건 이미 하고 있잖아. 어쩌면 그 이상을 할지도 몰라.
 아, 제발. 그런 일은 없었으면.
 나는 불안에 떨며 유하 선배와 라이타를 번갈아 바라봤다.
 라미는 놀랐다는 듯 크게 떴던 눈을 가늘게 하며, 묘한 긴장감을 품어내며 내 걱정을 더욱 부추겼다. 라미는 어릴 때부터 유하 선배의 가장충실한 심복이었으니까. 내 쪽이 아니라 유하 선배와 피로 이어진 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 라미의 반응이 내게는 뭔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는 내 얼굴을 힐끔 보고는, 결심했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타는 내 팔에 끼고 있던 팔짱을 슬그머니 풀었다.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유하 선배도, 들고 있던 가방을 라미에게 내밀고 한 걸음 내딛었다.
 아아, 이제 끝장이야.
 라이타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유하 선배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한 걸음씩 내딛었다.
 그리고.
 "유하 언니...?"
 "라이타...?"
 둘은 그렇게, 마치 확인하듯 중얼거리더니.
 "유하 언니이이ㅡ!"
 "라이타아ㅡ!"
 서로의 이름을 외치며, 서로에게 달려가, 힘껏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유하 언니, 유하 언니이...!"
 "이게 몇년 만이야! 와아...! 라이타!"
 아까 내게 했던 것처럼, 유하 선배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긴 채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라이타. 그리고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라이타를 끌어안은 채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반갑게 웃는 유하 선배. 저 뒤에서는 라미가 '그럼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유하 선배와 라이타는 서로 볼을 비비고 코를 비비며 화기애애하고 감격적인 재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 돌아왔구나. 미리 찾아가서 만날 걸 그랬어."
 "으응, 아니야. 나야말로 유하 언니를 만나러 갈걸 그랬어. 나 돌아왔어, 유하 언니. 앞으로 여기서 쭉 같이 살 거야!"
 "나도 기뻐, 라이타. 10년이나 여기 없었으니까 많이 바뀌었겠지만,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자. 같이 놀기도 하고!"
 "응! 유하 언니, 만나서 기뻐!"
 "나도 네가 돌아와서 반가워, 라이타."
 마치 헤어진 단짝친구, 혹은 자매와 재회한 것 같은 감격스러운 장면에 하교하는 학생들도 전부 둘을 바라본다. 물론 둘은 그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참으로 흐뭇하게 서로를 확인하며 감동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런 둘을 말없이 바라봤다. 뭐...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언젠가는 말을 걸어야겠지만, 적어도 잠깐 동안은 둘의 재회를 방해하지 말고 따뜻하게 지켜봐야겠지.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내 걱정 따위는 모두 기우였다니 마음이 놓인다. 어릴 때의 앙금이 남아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때, 두 사람 사실은 사이가 좋았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나는 푸근한 마음으로 둘을 바라봤다. 어떻게 보면 그리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것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그 시절로. 앞으로 라이타도 함께, 네 사람이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겠지.
 그때, 나는 아까 했던 걱정도, 유하 선배와 라이타에 대한 내 마음도 잊고,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건, 아주 오랜 뒤였다.





 "방심했다아...!"
 집으로 돌아온 직후. 평소와는 다르게 다래와 라미의 집에 가지 않고 싱긋 웃으며 인사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직행한 유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툭, 하고 떨어트리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며 그렇게 외쳤다.
 "완전히 꼬였다아...!"
 평소의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힘없는, 조금은 투박한, 꾸미지 않은 상심한 유하 본인의 목소리.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일자로 엎어져있던 유하는, 이윽고 발을 쿵쾅쿵쾅 구르고 양 손으로 묶어 올린 포니테일 머리카락을 풀고 헝클어뜨리며 조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라이타 그것에게 당했다아ㅡ!"
 예상치도 못했다.
 솔직히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아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옛날에 살던 전학생이 온다고 해서 라이타였을 줄 누가 아냐고. 말이 되냐고. 뭐냐고 이 운명의 장난. 너무하잖아. 대놓고 날 엿 먹이려는 속셈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누구든 좋으니까 이딴 계획을 세운 놈의 멱살을 잡고 신나게 흔들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유하는 쿵쾅거릴 정도로, 결국 어머니가 "시끄러워!" 하고 소리칠 정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으로 침대를 내려치고,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잡아당길 뿐이었다.
 그토록 오래 준비해왔는데.
 앞으로 반년만 있으면 다 끝났을 텐데.
 그 모든 포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다니.
 유하는 진심으로 분해했다. 여기에서는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
 유하는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점 조차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는 굵어졌다.
 일부러 어른스러움을 연출했던 것이, 벌써 6년 이상. 어릴 때와 성격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다래가 어른스러운 여자를 동경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력해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고도 가면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아침밥을 차려주고 가사를 도와주며, 미래에 아내로서 같이 지낼 때의 일을 경험하게 했다.
 늘 챙겨주면서, 언제부터인가 조금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된 다래를 성장시키며 더욱 더 멋진 남자로 만들려 했다. 그 모든 것이 유하의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믿고 의지하도록.
 몇 년 전, 다래에게만 '유하 누나' 대신 '유하 선배' 로 호칭을 바꾸게 한 것도 계획된 행동이었다. 열심히 찾아 읽던 여러 정보 중 하나에서 웨스터마크 효과라나,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온 남녀는 서로를 형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나는 너의 가족이 아니다. 아직은' 이라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 덕분에, 그 모든 계획 덕분에, 몇 년 전부터 다래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요 호감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다래는 아직 자신을 누나로 보고 있고, 스스로 연하라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런 상황을 인정하고, 혹은 성장해야 비로소 다래는 용기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한 계획도 이미 짜두었다. 앞으로 반년 안에, 그러니까 2학년 무렵에는, 3학년인 유하의 졸업을 앞둔 시기가 되면, 더 기다렸다가는 유하를 놓칠까 두려워 다래는 용기를 내면서 자신에게 고백할 것이고, 유하는 그걸 어쩔 수 없다는 척 받아들일 것이다. 그대로 해피엔딩.
 그럴 계획이었는데.
 뭐야, 갑자기. 깜빡이도 안 키고 끼어들어오기는. 거기다가 뭐야ㅡ, 그 변화. 그야 어릴 때도 귀염성은 있었지만 선머슴 같은 차림에 어느 쪽이냐 하면 남자애 같은 활발한 타입이었으면서, 그런 애교 넘치는 미소녀로 변할 줄이야.
 역시 그때, 어떻게든 했어야 했어.
 어떻게든, 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야 마주치자마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지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래의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다래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 우리 둘의 충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보면서도 걱정을 사실로 만들 수는 없었다. 뭐, 반가움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겉으로는 재회를 반기는 마음씨 좋은 누나를 연출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상대도 분명 같은 마임이었을 거라는 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벨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유하는 손을 내밀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언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역시나 들려오는 건 라미의 목소리.
 믿을 수 있는 동생이자, 최고의 심복. 그리고 스파이.
 어느 순간부터 내 목적을 알고, 계획을 도와주고 있는 동료.
 그런 라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오빠가 다른 마음 품을 것 같진 않지만, 라이타 언니 들이대는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그래... 나도 걱정돼."
 다래는 모른 척 했지만, 유하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전교에 이미 쫙 퍼진 소문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그야 유하 본인도 모른 척 했지만. 추궁할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만든 이미지에서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의 유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 좋고 어른스러운, 친동생 같은 다래를 걱정하는 '누님' 이었으니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유하는 고민 끝에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 현재까지는 아직도 자신이 유리하다. 그 점은 자만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한 방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키운 다래는 그런 공세에 홀랑 넘어가버리는 남자가 아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상, 한 순간에 마음이 변할 리는 없다.
 "그치만, 그렇게 여유 부리면 위험한 거 아냐?"
 마찬가지로 심각한 라미의 말에 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듣기로는 어릴 때 결혼 약속도 했다는 모양이니까. 결혼 약속이라니, 왜 그때의 난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걸까. 그것만으로도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그야 어린애의 약속일뿐이지만, 그걸 카드로 사용하는 라이타의 행동은 진심이었다. 여우 같은 기지배.
 "그렇다고 갑자기 태도를 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라미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지금까지 10년에 걸쳐 쌓아온 계획과 이미지를 한 순간에 바꾸기에는 부담이 따른다. 괜히 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
 유하의 말에 라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결국 유하 언니가 결정할 일이지만, 나는 유하 언니의 선택이라면 뭐든 응원하고 있으니까. 가능하면 유하 언니랑 정말로 가족이 되고 싶고. 언제는 나는 언니 편이야."
 "고마워 라미야."
 그리고 이쪽에는 이렇게 듬직한 지원군도 있자. 그야 한 방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전황은 유리하다. 다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괜히 서둘러 행동에 나서서 빈틈을 보이는 것보다는, 상황을 파악하며 지금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괜찮아. 나, 절대 지지 않을 거니까."
 확신을 담아, 유하는 그렇게 말했다.
 애당초, 그 싸움은ㅡ

 "후후."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라이타."
 자신도 모르게 흘린 웃음에 흐뭇하다는 듯한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태워주는 차 뒷자리에서 집으로 향하던 라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거든요."
 "그래, 그거 잘 됐네."
 아버지는 그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입장에서 '그 친구' 는 이사를 가는 라이타를 유일하게 찾아왔던 좋은 친구 정도였으니까. 아직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가게 하지 않을 거지만. 라이타는 아버지의 그런 생각을 꿰뚫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다래 혼자 부른 것은 결코 허투루 한 일이 아니었다.
 "나다래..."
 라이타는,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지난 10년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되뇌었던 이름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치 주문을 걸듯이.
 우연이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전학 온 학교와 반에 그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부터, 라이타는 반드시 어릴 때 살던 마을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곳이 익숙하다는 핑계도 핑계였지만, 물론 목적은 하나였다.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알아보며, 그가 어느 학교 어느 반인지를 미리 파악하고.
 자연스럽달까, 노력 끝에 편입해 하필이면 그 반으로 들어가도록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재회한 순간 느낀 감정과 눈물도 계획되어 있었다. 물론, 만난 순간 그런 계획을 떠올릴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치 자연의 법칙이라는 듯 흘러나왔지만. 왜냐하면 그 감정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마하니 아직도 그 여자가 있을 줄이야. 그건 조금 에상 외였다. 뭐, 그때도 그랬듯 쉽게 포기하거나 떨어질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10년이 지난 아직도 붙어있다니. 게다가 이미지도 확 바꿔서는. 이쪽이라고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도 아니긴 하지만.
 뭐, 이쪽도 저쪽도 서로 선전포고도 했다.
 반갑게 재회하는 상황이었지만, 라이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ㅡ유하 언니, 앞으로 여기서 쭉 같이 살 거야!"
 해석하자면, '그때는 몰라도 앞으로는 너뿐만이 아니라 나도 여기서 쭉 같이 지내니까 긴장 타시지?'
 그리고 그 말에 유하도 대답했다.
 "ㅡ10년이나 여기 업섰으니까 많이 바뀌었겠지만,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자."
 해석하자면, '그래봤자 나는 10년이나 곁에 있었거든? 또 그때처럼 한 판 해도 상관 없는데?'
 다래의 걱정에 화목하게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았지만, 서로의 눈빛을 서로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도 그랬으니까.
 다래는 아마 영역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오해하고 있겠지만, 유하와 라이타의 대결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그렇기에 절대 공존할 수 없으며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인 탓이었다.
 말하자면, '사랑싸움' 이었다.
 나랑 같이 노는 편이 친구도 더 많고 놀 곳도 더 많아.
 그러니까 저 애 말고 나랑 같이 놀자.
 나랑 단 둘이 같이 놀자.
 동네를 양분하던 싸움은, 그저 그런 의미.
 뭐, 다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하겠지만. 라이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작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이길 거야.
 그때도 부전패를 당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다래도 다래야. 그렇게 나서면 분명 푹 빠질 줄 알았는데, 그 여자 쪽만을 신경 쓰는 게 빤히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세뇌를 당한 건지.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어릴 때도 그랬고. 그러면서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이나 쓰고. 영악하기는.
 전황은 불리하다. 그것도 알고 있다.
 유하의 말대로 둘 사이에는 10년 동안 이어진 유대가 있다. 기억이 있다. 추억이 있다. 반면 자신의 추억은 10년이나 지난, 빛바랜 사진 같은 것. 거기에 다래는 이미 유하에게 마음이 쏠려 있다. 얌전히 어릴 때의 소꿉친구, 같은 위치에 안주했다가는 명맥한 상하관계에 있는 그 여자에게 손쓸 틈도 없이 당해버린다.
 그러니까 이쪽은 정공법뿐이다. 오로지 공격뿐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돌격할 뿐이다.
 나는 태풍 같은 아이니까.
 몇 번이고 두드리고 흔들어주겠어.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여자야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면서 에둘러 위치를 확보하느라 본인의 마음은 하나도 전하지 못했고, 주위에서 보는 둘의 관계는 그냥 '이웃 누나와 동생' 일 뿐이다. 게다가 유하는 3학년, 수험생. 남아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너무 여유를 부리셨어, 하유하. 그런 미적지근함에 기댈 생각이라면 금방 당해버릴 걸. 라이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번도 다래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자신은 전교에 소문이 자자하다.
 결혼 약속도 돌직구였던 만큼, 공개적으로 던진 만큼 큰 파괴력을 냈다.
 단 하루만에 반쯤 공인 커플 상태. 이것만으로도 커다란 교두보는 확보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옆에서, 정말 부부처럼 지내는 거야. 언제나 진심을 전하고, 다래의 곁에서 구애하는 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고.
 그래도 안 넘어가면, 태풍답게 쓰러트려버리면 된다. 언젠가 다래가 자신에게 붙여준 칭호대로.
 그런 생각을 하며, 라이타는 사랑하는 이의, 오늘 하루 종일 바라봤지만 질리지 않는, 지난 10년간을 보충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랄 지경인 옆얼굴을 떠올리고는 푸근하게 웃었다.
 다시 만나도 다래는 멋졌다.
 귀찮을 수도,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그런 기색도 보였는데, 결국 다래는 자신을 받아줬다.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나를 기억해줬다. 10년간 품어온 이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아무 편견 없이 바라본다. 품어준다. 그 상냥함이, 친절함이, 언제나 푸근하게 받아주는 점이, 다래의 가장 멋진 점이다. 다른 누구보다 멋진 점. 언제나 그 곁에 있고 싶어지는 점.
 언제나 곁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언제라도 푸근하게 받아줄 것 같은.
 그러니까 그 점을 이용해줄 거야.
 사랑과 전쟁에서는 뭐든 허락되는 법이니까.
 내일은 어떻게 다가갈까.
 다래의 마음을 어떻게 빼앗을까.

  라이타
 그 여자에게ㅡ,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유하

 우연히도, 그 순간.
 두 연적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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