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9일 일요일

Juvenile Mosaic - 그녀는 디멘션 인베이더 (2)

 잠깐 내 사랑 아마다 미미쨩이 나오는 게임 이야기를 해보자.
 3년 전에, <너와의 거리> 라는 갓명작 미연시가 발매되었다.
 제목 그대로 '너와의 거리' 라는 테마를 가지고, 사람과 사람의 거리, 청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미려한 음악과 매력적인 캐릭터, 화려한 일러스트와 예술적인 스토리를 통해 풀어낸 문자 그대로 이 시대에 길이 남을 명작 게임이었다. 그 흥행과 명성에 힘입어 다른 플랫폼으로 이식되는 것을 넘어 만화책은 물론 TV용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고(애석하게 원작을 살리지 못한 무리수 전개와 뭉개지는 작화에 평가는 높지 않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웃고 울었고 일부는 그 끓어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같은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놀림거리가 될 정도였다. 빌어먹을 놈들 사람이 감동을 받아 울었다는데 뭐에 울었는지가 뭐가 중요해 중2병이 뭐 어쩌고 저째 감정이 메말라서 뭘 봐도 울지도 못하는 감정도 팔아먹은 로봇 같은 놈들 나는 진지했단 말이다 그 감동을 모두와 나누고 전파해주고 싶었단 말이다 사람의 온정과 친절을 비웃다니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무튼. 흥분을 가라앉히고.
 '너와의 거리' 라는 테마 덕분인지 히로인들도 전부 거리 단위를 토대로 이름을 지은 것도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다. 우선 내가 사랑하는 미미(mm)쨩 외에도 세미(cm)쨩, 미타(m)쨩, 키미(km)쨩, 이게 거리단위가 맞나 싶긴 하지만 호시(광년)쨩까지. 거기에 팬디스크 추가 히로인으로 나온 나미쨩(nm), 린쨩(inch), 밀레(mile)쨩 등 모두 매력이 넘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지만 작품의 메인히로인이자 가장 눈물 넘치게 만드는 스토리는 제목(너와의 거리-일본어로는 '키미'토노 쿄리)에 나온 그대로 키미쨩이지만, 내 신부는 미미쨩이니까 미미쨩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미미쨩은 이름에서 나오듯 키가 작은 로리 캐릭터다. 그 사실에 대해서 대단히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우민이라고 부르면서 개무시하는 일견 좋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외형은 금발 트윈테일에 츤데레라는 모범적이고 정석적인 조합을 가지고 있지. 조금 너무할 정도로 흔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또 본인의 이름과 잘 맞는다. 사실 누구보다 주인공에 대한 마음은 가깝지만(mm),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츤데레의 정석이니까. 시작부터 사실은 공략 완료 상태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미미쨩이 조금씩 주인공 준지군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둘 사이의 거리를 인식해가며 변화하는 모습과 끝의 엔딩과 클라이막스가 참으로 감동적이다. 부끄럽지만 울었습니다. 농담 아니라 진짜 동서남북으로 절하며 광광 울었다. 뭐 후반부에 가면 솔직해진 덕분에 '우민' 대신 제대로 이름으로 부르는 점이 못내 아쉬웠지만. 꼭 날 부르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내게 있어서 미미쨩은, 뭐랄까, 구원 같은 존재였다.
 첫 만남까지만 해도, 나는 흔히 말하는 오타쿠는 아니었다. 아니 흔한 변명이 아니라 진짜야. 뭐 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려 읽거나 하는 일은 있었어도 스스로 '덕후'를 자칭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터넷 친구의 짜증날 정도로 계속된 추천(혹은 포교)에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다.
 부끄럽지만 울었습니다. 아니 진짜로.
 뭐랄까, 덕후라서는 아니었지만 당시부터 사람과 거리를 두고(중2병 탓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나이는 중2 맞았지만) 그러면서도 온정을 바라던 나에게 미미쨩은 내가 바라던 온기를 느끼게 해줬다. 그야 처음에는 사람을 막 대하고 무시하는 것에서 츤데레라는 것도 알 리 없는 나는 '뭐야 이 애는. 이런 게 히로인이라고 나오다니 이거 망겜이네' 하고 생각했지만, 조금씩 미미쨩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고, 비록 게임 속이었지만 처음으로 내 쪽에서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함께 있고 싶다고. 너를 더 알고 싶다고. 너의 곁으로 조금씩이라도 다가가고 싶다고. 너와의 거리를 줄이고 싶다고.
 미미쨩과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도 알게 되었다. 이 빌어먹을 망겜 쿠소게 현실과는 다른 멋진 세계를.
 현실의 나야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아니 덕후쪽 의미 말고. 아니, 그보다 더 나쁘겠지. 머리도 나쁘고 몸매도 별로에 운동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투명한 존재.
 그렇지만 게임 속의 나는 달랐다. 그야 그녀들이 좋아하는 건 나 본인이 아니라 각 게임의 주인공들이었지만, 그들이 누리는 일상이라는 건 얼마나 멋지냔 말이다. 예쁘고 상냥한데다 나를 무시하지 않고 언제나 나를 찾아내고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여자애들이 떼거지로 나와 일상을 즐긴다.
 굳이 미연시 뿐만이 아니다. RPG를 하면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하는 멋진 영웅이 될 수 있고, 액션 게임을 하면 멋지고 화려한 기술들로 적들을 쓸어버리는 용사가 될 수 있다. 전략게임은 나라를 구하는 지도자가, SF 게임이면 우주를 구해내는 전설이.
 이딴 현실보다 그곳에 빠져드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미미쨩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줬다. 내게 새로운 감정을 알게 해줬다.
 그렇기에 그 후로 수많은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며 다른 여자애들을 공략하고 호감을 느껴도, 미미쨩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서 나의 연인이자 신부로 굳건히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미미쨩을 다시 보고 싶을 때마다 반복해서 게임을 깼고. 그렇게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하며 영원히 이대로 행복한 나날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의 세계와, 아름답고 행복한 2차원을 습격하기 전까지는.

 "왜 그래?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그럼 좋게 생겼냐."
 내 퉁명스러운 대꾸에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수아는 싱글거리며 웃었다.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도 싱글벙글 웃다니, 이래서 리얼 여자는 안 돼. 칫, 하고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오랜만에 홀로 느긋하게 게임도 사고, 피규어도 구경하려고 했는데 왜 따라오는 거야."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 영웅은 공부 따위 안 하니까 물론 안 했지만 그래도 시험이 끝났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국내 오타쿠들의 성지 세계 전자센터를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분명 말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금요일, 시험이 끝나고 돌아가려 짐을 싸고 있는 내게 수아는 다가와서 말했다.
 "주말에 놀러갈 거지?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엉?"
 위에도 말했지만, 분명 말한 적도 없는데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것에 너무 놀라 그런 어벙한 소리만을 내버렸다. 수아는 책상 옆에 풀썩 쪼그려 앉은 채, 책상을 붙잡은 양 손 위에 턱을 올려놓고 나를 올려본다는 모범적으로 귀엽고 요망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시험도 끝났으니까, 분명 우민이 너도 놀러갈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 혼자 집에서 게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시험기간에도 계속 했을 테고, 주말이니까 쇼핑이라도 가지 않을까 싶어서."
 "...아닌데. 집에서 게임할 건데. 미미쨩 27번째 공략할 건데."
 수아의 말에 일단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나 스스로도 알 정도로 수아의 말에 움찔거린데다 대답까지 시간이 걸려버렸다. 결정타로 왠지 찔리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시선도 돌려버렸고. 수아는 내 대답에 입술을 살짝 삐쭉 내밀며 손등에 볼을 댔다.
 "나랑 어디 가는 게 그렇게 싫어?"
 "윽..."
 나도 모르게 그렇게 신음 소리를 낼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어차피 집에서 혼자 게임한다고 하고는 나 떼어놓고 혼자 가고 싶은 거잖아?"
 수아는 정말 삐졌다는 듯 삐쭉 내민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솔직히 수아가 저러는 건 삐진 척이고, 수아가 한 말이 사실이기도 하고, 더 까놓고 말해서 수아가 삐지든 말든 어차피 내 알 바도 아니건만.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어차피 내가 가서 할 일이라고 해봤자 새로 나온 게임 알아보고, 미소녀 피규어나 찾아보고, 프라모델 구경하고, 뭐 그런 것 밖에 없단 말이야. 수아 네가 같이 가봤자 재미있을 일도 하나도 없고. 같이 가서 지루해하는 것보다 나 혼자 가는 편이..."
 그리고 그런 내 말을 끊으며, 수아는 싱긋 웃고는 말했다.
 "나는 우민이 너랑 같이 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
 그러니까 이 3D 빗치계 여자는... 왜 이런 부끄러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냔 말이다. 화면 속에서 스피커를 통해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 말들을...
 "그래도 안 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수아는 반대쪽 뺨을 손등에 대며(즉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기대를 담아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 상황에서도 '안 돼' 하고 말할 정도로 모질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보다시피, 수아와의 관계는 여전하다.
 고백을 승낙한 기억은 없다. 당연하지 내 신부는 이하 생략. 오히려 어느 쪽이냐 하면 대놓고 찼다고 생각하는데, 수아는 전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여전히 나에게 다가온다. 마치 3차원의 무서움을 몸서 보여주겠다는 듯. 거기에 이런 식으로 대놓고 내 취미를 함께 공유하고 이해하겠다는 척을 하는 점이 또 질이 나쁘다. 속으로는 놀리고 있을 거면서.
 뭐... 그때 말했듯이, 진심으로 미미쨩과 다투려는 생각일지도, 아니면 내가 좋아한다니까 알아보려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냐. 그럴 리 없지. 나는 고개를 붕붕 가로저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이 리얼충이 그럴 리가 없다. 애당초 그 증거로...
 "게다가 뭐야, 그 복장은."
 "응? 내 옷이 뭐 어때서?"
 안경을 고쳐쓰며 한 말에, 수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고는 자기 옷차림을 내려봤다. 조금 굽이 높은 하이힐에 커피색 팬티 스타킹. 차분한 색의 치마에 몸에 딱 붙는 폴라티와 마찬가지로 딱 붙는 검은 자켓. 뭐랄까, 세련된 도시 미녀라고 해야 할까 게임에서 튀어나온 히로인이나 할 복장이라고 해야 할까. 수아는 자신의 옷을 찬찬히 내려보더니, 자켓을 팔랑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기왕 놀러가는 거니까 열심히 차려입어봤는데, 마음에 안 들어? 역시 미미쨩처럼 귀여운 계통의 옷을 입을 걸 그랬나?"
 아니, 수아가 입는다면 이쪽이 훨씬 어울리긴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아랑 하늘하늘한 프릴이 잔뜩 달린 옷이라든지, 로리 계통의 패션은 잘 매치가 안 되지. 이대로 충분히 매력적이랄까 섹시하달...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날려보내고 내 옷을 내려보며 말했다.
 "내가 입은 꼴을 봐라."
 신발은 싸구려 운동화. 바지는 청바지. 상의는 예전에 구입한 미미쨩이 그려져있는 캐릭터 티셔츠에 체크무늬 남방. 물론 큼직한 백팩도 빼먹지 않았다. 머리띠는 이젠 유행이랑 너무 멀지, 아무리 그래도.
 수아는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손을 턱에 댄 채 차분히 감상하듯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잘 어울리는데?"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건 놀리는 거 맞지? 이 차람이 잘 어울리는 진성 덕후라는 뜻이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자 수아는 내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데다 방심하고 있어서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밀어버릴 수도 없었고.
 "옷차림도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입으면 되는 거잖아? 그야 장소와 격식에 어울리는 복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으면 된다고 생각해. 우민이 네가 좋아서 그렇게 입었다면 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어, 으응..."
 봄인데도 느껴지는 열기에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지... 자기가 좋아서 입는 거다. 내가 부끄럽게 여길 필요는 전혀 없지. 이 티셔츠도 미미쨩에 대한 내 사랑을 증명하고자 입은 거고. 주눅들 필요는... 잠깐.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네 옷차림이었다만? 내 옷차림이 부끄럽다고 한 게 아니라?"
 "에이, 뭐 어때. 이렇게 입었다고 잡아가는 것도 아닐테고."
 내 지적에 수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고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하여간 이 요망한...
 "게다가 이건 이것 나름대로 뭔가 코스프레 같지 않아? 호시 옷차림을 따라해본 건데. 뭐, 같은 옷은 없으니까 어디까지나 비슷하게지만."
 확실히,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쿨데레인 호시쨩은 저런 쿨한 느낌의 사복을 입고 다녔지.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 할 정도의 느낌이긴 하지만.
 "내가 좋아서 입은 거기도 하지만, 옷이라는 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잖아?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도 좋고. 이런 여자가 같이 따라다니면 우민이 너도 좋을 거 아냐?"
 "남들 보여주기 위해서 입고 다니는 취미는 없을 뿐더러 자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취미도 없다."
 3D 빗치계 답게 남의 눈이나 신경 쓰기는. 안경을 고쳐쓰며 그렇게 말하자, 수아는 어째서인지 조금 푸근한 느낌으로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또 뭐야 이 여자는. 수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런 점, 좋아해."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조금 얼굴이 빨개진 건 무시하며 수아를 빤히 바라봤지만, 수아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웃으면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세계전자센터, 는 사실 전자제품 종합상가다. 대부분은 가전제품이나 핸드폰, PC 같은 상품을 팔지.
 그렇지만 그것들을 지나 9층에 도달하면, 마법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래, 2D와 3D의 중간, 2.5차원의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둘을 이어주는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와... 신기한 곳이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며 바로 옆에서 그렇게 탄성을 내는 수아의 말에, 이유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메인은 게임 판매 매장이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각종 미소녀 피규어를 파는 가게가 여기저기 있고, 프라모델을 파는 가게도 있다. 뭐 일본의 아키하바라 같은 화려함은 없고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도 없긴 하지만(그런 고로 언젠가는 반드시 성지에 가보겠다는 욕망을 늘 품고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리얼충 일반인에게는 꽤 색다른 공간이겠지. 나는 그런 수아의 탄성을 무시하며 턱, 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수아는 당연하다는 듯 꾹, 하고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어이."
 "뭐야, 같이 놀러 왔는데 버리고 가려는 거야?"
 돌아보며 살짝 주의를 주자, 수아는 오히려 나를 살짝 올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제법 파괴력이 있다는 것은 겪었기에 알고 있지만 어리석은 녀석, 성투사에게는 같은 기술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거냐.
 "버리고 가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앞서 가려는 것뿐이잖아. 팔짱까지 낄 필요는 없고. 그리고 너도 네 관심사가 있을 테니까, 너 혼자 둘러보면 되고. 그리 넓은 것도 아니고..."
 "내가 너 이외의 관심사가 있어서 여기 왔을 것 같아?"
 "..."
 분명 성투사에게 같은 기술은 통하지 않을 텐데, 왜 이 기술에는 매번 이렇게 말이 턱 막히는 걸까. 볼을 살짝 부풀리고 입술을 삐쭉 내민 채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수아의 공격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맘대로 하든가."
 결국 내 쪽에서 포기하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릴 정도로. 내 대답에 수아는 만족했다는 듯 "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수아의 하이힐 소리가 주위에 울려퍼진다. 그리고 그 소리 때문인지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뺨이 빨개진다.
 그래, 니들의 그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아.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그럴 거야. 이런 여자애가 이런 차림으로 여기에 오는 것도 드문 일인데, 몸매도 이렇고 생긴 것도 이런데다가 미미쨩 캐릭터 티셔츠 입은 놈 옆에 팔짱을 끼고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으면 그렇겠지. 믿기 힘든 광경이라는 것도 알고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 하는 시선도 이해하고 '저 자식 무슨 재벌인가?' 하는 시선도 이해해. 그렇지만 다른 곳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솔직히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힘듭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다르게, 수아는 시선을 받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저 만족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웃으면 정말 나랑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걸로 오해하게 된다만. 그보다 뭐랄까, 오히려 얘 쪽이 자랑하고 보여주려고 하는 걸로까지 보인다.
 수아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솔직히 그때까지 수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움찔, 하고 놀랐다.
 "그래서 어디부터 볼 거야? 게임?"
 "어? 으, 응. 우선 신작 게임이라든지, 하고 싶었던 타이틀 중고로 나온 거 있나 보고..."
 "그렇구나. 그럼 그러자."
 수아는 눈까지 감으며 싱긋 웃고는 두리번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수아를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며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하다, 고 해야 할까 의외라고 해야 할까. 점원조차 나랑 같이 온 수아를 보고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니, 뭐 그야 드문 건 이해하겠지만 아예 없던 일도 아닐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 시선은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나도 모를 울컥함을 느끼며 점원에게 신작 가격을 물어보고, 중고 타이틀이 있는지 물어보며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 수아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 진열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안 사게?"
 대충 대화가 종료되자 수아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용돈이 부족해서."
 "그렇구나."
 수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요즘 들어서 게임 타이틀 가격은 상승세니까. 학생 입장에서 쉽게 구입하기는 부담스럽다. 몸을 돌리려고 하자 무게감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팔짱을 낀 수아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우민아, 기왕 온 김에 나한테도 게임 추천 좀 해주지 않을래?"
 "게임을?"
 내 되물음에 수아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이건 콘솔이라 게임기가 필요한데..."
 "그럼 좀 빌려줘."
 이 여자,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부탁을 하시는구만... 너무 당당한데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눈치라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게임 추천이라면 나한테보다 저기 점원분에게 부탁하는 게 더 좋을 텐데."
 초보자를 위한 게임도 잘 추천해주고 부담 없이 하겠지. 내 말에 점원은 조금 긴장하는 모양이었지만, 당황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머릿속으로 추천 라인업을 짜는 게 보인달까. 하지만 내 말에 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아니. 나는 우민이 네가 추천하는 게임을 하고 싶은 거야. 널 이해하고 가까워지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고."
 "..."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나도 타격을 받았고, 점원은 손끝을 접기 시작했다. 아냐. 연인 아냐. 그야 오그라드는 건 이해하지만...
 "가능하면 네가 하는 미연시면 좋겠어. 뭐, 기왕이면 재미있고 예쁘고 귀여운 애들이 나오면 좋겠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부끄럽군. 수아는 천진난만하게 물어봤고, 덕분에 점원은 이제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보세요,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부터 딱 티가 나잖아.
 "일본어라 너 이해 못 해."
 "나 일본어 할 줄 알아."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싱글거리는 수아를 빤히 바라봤다.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얘의 이 말이 거짓말인지 진담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너 때문에 배웠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어차피 게임기도 내꺼 빌리는 거, 게임도 같이 빌려줄게. 타이틀은 나중에 네가 마음에 들면 그때 사."
 "응, 고마워."
 수아는 내 대답에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왠지 등이 근질거려 고개를 돌려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와아, 이게 다 피규어야?"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피규어 매점. 사실 오늘의 나들이는 이곳이 본편이었지. 수아는 신기하다는 듯 진열장을 요리보고 죠리보며 탄성을 내고 있었다. 확실히 게임 매점보다 이쪽이 그냥 구경하기에도 좋지. 어쨌든 뭔가 볼 수 있으니까.
 "그림을 그대로 입체로 옮기면 이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어색하지 않게 잘 만들었네. 게다가 화려하고, 예쁘고. 장식삼아서 하나 가지고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수아는 진심으로 관심이 있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왠지 뿌듯함이 느껴지는 건 왤까. 역시 인정받았다는 마음 때문일까.
 그때도 느꼈지만,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다.
 적어도 수아는 나를 비웃지 않는다. 지금까지 동지들 외에는 만나는 이들 모두가 그랬는데.
 아직도 얘가 날 왜 좋아하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나 잔뜩 공격을 당하는 지금도 그냥 놀리는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은 사라질 생각을 모르고. 그렇지만... 비웃지 않고 나를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수아에게 큰 빚을 지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수아는 아, 하는 탄성을 내고는 진열장 안의 피규어를 손가락질 하면서 말했다.
 "이거 그거잖아! 세일러스타! 나 어릴 때 봤었어!"
 "아직도 팬이 있으니까. 복고 열풍으로 신작도 나왔고."
 "그렇구나... 아, 이쪽도 알아! 와아... 어릴 때 이런 곳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환하게 웃으며 구경하던 수아는 왠지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이제는 그런 거 부끄러워서 못 사니까?"
 "아니. 어릴 때 부모님이 이런 거 절대 안 사주셨거든. 나도 마법소녀 변신세트 같은 장난감 가지고 싶었는데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수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뭐, 나는 결국 어떻게 해서는 끝내 받아내는 타입이었달까, 원래 친구가 없다보니 결국에는 못 이기시는 척 사주셨달까 그랬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빤히 진열장을 바라보던 수아는 뭔가 고민하는 듯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했어."
 "응?"
 뭘 결심해? 하고 물어보기도 전에 수아는 당당하게 계산대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방금까지 보던 진열대 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고 있었다. 아, 이 뒤의 전개가 대충 보인다. 예상대로 수아는 입을 쩍 벌리더니 말했다.
 "비싸!"
 일반인이 많이 하는 착각 중 하나는, 피규어가 싸다는 거다. 실제로는 보통 몇만 원은 우습게 하고 십만 원을 넘어가는 일도 매우 흔하다. 뭐, 수아가 방금 고른 건 가동형이라 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수아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는 팔짱을 낀 채 중얼거리며 신음했다. 이러는 건 또 처음 보네. 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수아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세요. 계산할게요."
 "어?"
 지갑을 열며 한 한 내 말에 수아는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말했다.
 "아, 그럴 필요 없어 우민아. 게다가 너 아까 돈 모자라서 게임도 못 산다고..."
 "뭐... 그렇긴 한데."
 나는 뒷목을 문지르며 어떻게든 변명을 고민했다. 솔직히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런 일을 하는 거라기보다는,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오늘 같이 놀러 오기도 했고, 고참으로서 관심이 생긴 뉴비는 챙겨줘야 하는 대상이지, 응. 게임에서도 뉴비에게 쩔해주는 거고."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 듣겠어..."
 그치? 나도 솔직히 그래. 수아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부담스러운 거 필요 없어. 이런 거 받고 싶어서 따라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원래 내가 멋대로 따라온 거니까 우민이 네가 뭔가 해줄 필요도 없고, 좋아하는 건 내 쪽이니까..."
 "아, 시끄러워. 그냥 사주고 싶으니까 사주는 거야."
 나는 수아의 말을 무시하고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건넸다. 그리고 내 말에 수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점원은 상품을 포장해 내게 건넸다. 나는 당연히 수아에게 건넸고. 여전히 수아는 멍한 상태였지만.
 "자, 받아."
 그리고 그 표정에,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응..."
 수아는 잠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봉투를 받아들고 바라보더니, 이윽고 환하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뭐, 그래."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볼을 긁으면서.
 나 스스로도 왜 이런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돈으로 차라리 내가 사고 싶은 피규어를 지르지.
 하지만... 정말, 그냥 주고 싶었는걸. 나를 좋아하니까 준다거나 따라왔으니까 준다거나 하는 건 전부 핑계고, 나 역시 수아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으니까.
 이건 절대 바람이 아니다. 응. 미미쨩에게 들인 돈에 비하면 새발의 피야. 절대 바람이 아니라고. 찔리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렇지만...
 "소중히 할게!"
 정말 행복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박스를 요리보고 죠리보고 돌려보며 만족하는 수아를 보자, 나도 웃음이 나왔다.

 그건 그렇고 점원씨, 저도 그 마음 이해는 합니다만 '리얼충 폭발해라(퇫)'은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다 들렸거든?

댓글 2개:

  1. 그래서 여주가 남주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이유가 있기는 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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