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0일 월요일

Juvenile Mosaic(쥬브나일 모자이크) - 소꿉친구 누님에게 마음을 품었는데 어느 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서 곤란합니다 (1)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희미한, 안개가 낀 것 같은, 색이 바란 낡은 필름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
 어린 나는 울면서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녀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슬픈, 느낌이었다.
 아쉬운, 안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을 느끼는, 그런 기분이었다. 아, 그랬었구나, 하는 정도의.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그 감각만은 끈적하게 눌어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인가, 소녀는 외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자 신경을 집중했다.
 뭐라고 하는 거야. 내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조금씩, 희미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
 "아, 넵!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나 역시 크게 대꾸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녹아내릴 것처럼 늘어지던 몸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내 대꾸에 선배는 쓴웃음을 지은 채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약한 한심함을 담아서 말했다.
 "정말, 몇 번을 깨워야 일어날 거야? 아무리 월요일이라도 그렇지. 너, 또 밤새면서 게임한 건 아니겠지?"
 "아, 안 했어요."
 물론 거짓말이다. 다가오는 월요일을 저주하며 일요일의 마지막까지 쥐어짜며 게임을 하는 것 외에 학생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게 있단 말인가. 내 대답에 선배는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취조하는 듯한 시선을 슬쩍 피하자 선배는 다시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튼 빨리 일어나서 씻고 나와. 서둘러 먹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모르니까."
 "아, 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스럭거리는 사이, 방문으로 향하던 선배는 어깨 너머로 나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아침이니까 건강한 건 이해하지만, 그럼 팬티 바람으로 자지 말고 뭐라도 입고 자면 어때?"
 "..."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오늘도 건강했다. 좀 노골적일 정도로.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빨개진 채 양 손으로 가리며 외쳤을 때는, 이미 선배는 웃음소리만을 남겨둔 채 방을 빠져나간 뒤였다. 으... 아침부터 이런... 아니,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던 것도 아니잖아... 가리고 있던 양 손으로 뜨거울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을 문질렀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 감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유하 선배는 옆집에 사는, 한 살 연상의 소꿉친구다.
 알고 지낸지는... 10년이 다 되었나. 넘을지도 모르겠다. 거의 유치원 때부터 알았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덕분에 아침 일찍 나가고 우리가 잠든 뒤에야 돌아오시는 일도 잦았다. 어린 우리를 돌보지 못한다는 것에 일을 그만둘까도 고민하셨지만, 다행히 그걸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
 옆집에, 한 살 차이의 딸을 둔 이웃사촌. 부모님은 우리를 자주 그 집에 부탁해 맡겼고, 다행히 이웃집 아주머니도 크게 싫어하시는 기색 없이 우리를 돌봐주셨다. 그리고 그 집의 누나 역시, 우리를 정말 동생처럼 여기며 돌봐줬다.
 뭐, 이 나이가 되도록 돌봐주는 건 어떨까 싶긴 하지만...
 유하 선배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다. 어릴 때는 동네를 주름잡는 골목대장으로 우리를 이끌어줬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이렇게 아침마다 깨우고 아침밥을 해주는 일도 생겼다. 그 덕분에 나랑 동생은 가사실력이 파탄 수준이지만. 뭐랄까, 가끔은 '누나'가 아니라 '엄마' 같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한 살 연상의 엄마라니 뭔가 이상하지만.
 "이제야 일어났어?"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고 거실로 나오자 식탁에서 먼저 아침을 먹고 있던 여동생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연년생인 내 여동생, 나라미다.
 "오빠는 언제가 되어야 철이 들래? 맨날 늦게까지 게임이나 하고, 늦게 일어나고, 성적도 그냥 그렇고, 양말은 맨날 뒤집어놓고. 정말, 유하 언니가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시끄러워. 너나 잘 해."
 "뭐야ㅡ, 사람이 기껏 걱정해주는데."
 자리에 앉으며 적당히 대꾸해주자, 라미는 더욱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여동생은... 하는 말 족족 다른 귀로 흘리며 무시하는 사이, 유하 선배도 자리에 앉았다.
 "그만. 그야 다래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좀 그렇다는 건 뭐예요, 좀 그렇다는 건."
 "다래 너도 그래. 라미가 걱정해주는데 그 태도는 아니잖아?"
 이 집에 내 편은 없는 건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라미는 그대로 수다의 총구를 유하 선배 쪽으로 돌렸다. 물론 주된 내용은 나를 까대는 거지만.
 라미는 친오빠인 나보다 유하 선배를 더 잘 따랐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쭉. 조금 제멋대로인 편인 라미와 그런 라미를 잘 받아주는 어른스러운 유하 선배다보니 조합이 잘 맞긴 하지만, 가운데 낀 입장인 내 입장은 미묘하다. 그래도 어쨌든 친오빠인데. 가끔은 얘가 오빠 취급도 안 하는 것 같다.
 "유하 언니, 물병 좀."
 "그래."
 유하 선배도 유하 선배다. 보다시피 라미에게는 어릴 때처럼 '언니' 하고 불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나에게는 몇 년 전부터 '유하 누나가 아니라 유하 선배라고 불러' 하고 딱 잘라 선포했다. 뭐 그야 어릴 때부터 늘 존댓말을 썼고 그 호칭 하나만 바뀌었으니 큰 차이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다 합께 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늘 그렇듯 다 함께 등굣길에 올랐다. 유하 선배는 3학년 나는 2학년 라미는 1학년 같은 학교니까. 뭐, '다 함께' 라고는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유하 선배와 라미가 앞장서고 나는 그 뒤에서 설렁설렁 뒤따르는 형태에 가깝지만. 둘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아침 등굣길의 인파 덕분에 잘 들리진 않지만. 보나마나 내 흠이나 잡고 있겠지.
 나는 유하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뒤로 올려 묶은 포니테일이 봄바람에 찰랑거리고, 새하얀 다리가 리듬감 있게 교차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다들 입고 있는 평범한 블레이저 너머로 연상다운, 조금 어른스러운 몸매가 옷자락이 살랑거릴 때마다 드러났다 사라진다.
 언제부터일까, 저 등을 보며 따라간 것이. 사실 언제부터라고 할 것도 없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저 등을 보며 따라다녔으니까.
 말괄량이 개구쟁이 골목대장일 때 재미있는 게 있다며 반쯤 강제로 끌고 갔을 때도, 학교에 들어간 뒤로 조신한 숙녀가 되어서 앞장 설 때도, 나는 늘 그 뒤를 따라갔다. 언제나 그 등을 바라봤다. 그것이 존경에서 동경으로, 다시 동경에서 사랑으로 변화한 게 언제인지는,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뭐.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어느 순간부터 유하 선배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유하 선배 입장에서는 나야 늘 남동생, 꼬맹이, 어쩌면 아들 같은 느낌이겠지. 실제로 언제나 내게 잔소리랄까, 어른으로서 하는 교육 뿐이고.
 "한숨 쉬면 복 달아난다고 그랬어. 날씨도 좋은 아침인데, 더 밝게 가자."
 이런 식으로. 그보다 난 둘이 떠드는 말소리도 안 들리는데 내 한숨소리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어른스러움도 분명 좋긴 하지만, 유하 선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긴 하지만, 역시 나도 남자라서일까, 가끔씩 부담스럽다. 그보다는 사실 주눅이 든다는 쪽에 가깝겠지만.
 "그러고 보니까 오늘, 다래 너희 반에 전학생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선배는 마침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라미 역시 기억났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그랬지. 어떤 사람이래?"
 "야, 와야 알지 그걸 미리 어떻게 알아."
 내가 선생님이냐. 선생님이야 미리 알 수도 있겠지만. 내 대꾸에 라미는 '재미없게' 하고는 혀를 찼다. 하여간 이 싸가지는... 툴툴대는 나를 보며 유하 선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다래는 예쁜 여자애가 전학 오기를 바랄 거 아냐?"
 "딱히 그런 거 아니거든요."
 뭐ㅡ,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기왕이면 남자애보다는 예쁜 여자애면 좋겠긴 하지만. 같이 놀 수 있는 마음이 잘 맞는 녀석이어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아니지. 유하 선배의 말에 떠오르던 망상을 고개를 붕붕 젓는 것으로 지워버렸다. 물론 그 사이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났던 건지 유하 선배와 라미는 다 알겠다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솔직히 라미의 한심하다는 표정보다 유하 선배의 다 이해한다는 눈빛이 더 아팠다. 나는 애써 말을 돌렸다.
 "뭐, 뭐어! 들은 건 있지만요. 듣기로는 어렸을 때는 여기 알았었데요. 그러다 멀리 이사를 갔는데, 다시 돌아오게 됐다고요. 어쩌면 반 애들 중에도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선생님이 이야기 했었어요."
 "그렇구나. 우리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겠네."
 내 말에 라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선배는 생각하듯 허공을 보며 손끝으로 입술을 톡, 톡 하고 건드리며 말했다.
 "음... 하지만 어릴 때 이사 갔던 애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솔직히 아는 사이라고 해도 잘 기억 날 것 같지는 않아."
 그것도 그렇다. 이 동네 터줏대감, 같은 우리 셋이 떠나보낸 애들만 해도 몇 명인지 기억도 안 난다. 몇 년 전에 이사를 갔다면 모를까, '어릴 때' 이사를 갔다고 하면 제대로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어릴 때 친구들이라는 게 대부분 그런 법이니까. 게다가 우리라고 이 동네에 살던 애들 전부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유하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라미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알아? 어릴 때 오빠랑 같이 놀았던 여자애가 예뻐져서 다시 나타날지. 오빠가 좋아하는 만화 보면 그런 이야기 자주 나오잖아."
 "그거야 만화 속 이야기고."
 나는 라미의 헛소리에 그렇게 대꾸했다. 옆 반의 유명한 누구라면 몰라도 나는 그 정도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진 않는다. 그런 만화 같은 일, 현실에 있을까보냐. 뭐, 친한 소꿉친구 누나가 있고 아침밥을 해주며 깨우러 와주는 것도 충분히 만화 같긴 하지만. 만약 내게 만화 같은 일이 정말 벌어진다고 해도, 나의 만화 같은 점은 그걸로도 이미 충분하다.
 무엇보다, 아무리 예쁜 여자애가 전학을 온다고 해도, 나는 그쪽에 신경을 쓸 생각이 없다.
 나는 유하 선배를 좋아한다. 그런 고로 언젠가는 유하 선배와 연인이 되고 싶다.
 하지만 선배가 나를 어린애로 보는 이상, 내가 선배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상, 언제나 선배의 등을 바라보며 뒤를 따르는 이상, 그건 무리겠지. 그 점을 어떻게든 하고 싶긴 하지만, 역시나 어떻게 해야 좀 남자답게 보일지는 알 수가 없다.
 조금 더 혈기왕성했을 무렵, 그러니까 대충 3년 전에는 이것저것 해보기도 했다. TV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벽을 쾅! 치면서 '누나는 내 여자니까' 같은 말도 해봤고, 괜스레 폼을 잡기도 했고, 뭐 이것저것 해봤다. 결과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물론 지금은 떠올리면 당장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뻥뻥 걷어차고 싶어지는 기억들이지만.
 지금은 무리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유하 선배와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유하 선배가 더 이상 단순히 뭐든 챙겨줘야 하는 동생으로 볼 수 없게 되어, 멋들어지는 고백을 하고 말 거다.
 하지만 뭐,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유하 선배의 등을 보며 따라가는 평화로운,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게 바랬다.

 그날, 아침 조회시간.
 "아..."
 나는 운명과, 재회했다.
 교탁 옆, 담임 선생님과 나란히 선 전학생.
 밤하늘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반짝이는 채 곱실거리며 내려오는 새카만 머리카락. 연한 커피색의 윤기 있는 피부. 그 색과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것 같은 갈색 눈동자. 붙임성 좋게, 환하게 짓고 있던 미소. 하지만 그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울음이 섞여있었다.
 에상치 못한, 하지만 너무나 보고 싶었던 상대를 만난 것 같은, 감격의 눈물이.
 "다래, 야...?"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르면서, 하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리며, 전학생은 내게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행동에, 선생님을 포함해 반 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예상 외의 상황일 테니까. 오늘 전학 온 애가 아무리 여기 살았다고 해도 정말 아는 사람이 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텐데, 저런 표정까지 짓고 있다면. 그리고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다. 이런 만남은 예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라이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던 그립고 익숙한 이름을, 말했다.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문뜩, 꿨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오늘 아침의 꿈을 떠올렸다.
 그 꿈속에서, 멀어지던 소녀는 울면서 내게 뭔가를 외치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리던 그 말을 그때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현실이 그 기억을 되살리게 해줬다.
 작은 트럭 창문 밖으로 몸을 내놓은 채,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며 외치던 그 말ㅡ
 "나, 잊지 마!"
 "...약속, 지켜줬어."
 그 말에, 기억과 현실이 이어졌다.
 어느새 전학생의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정말, 기억해줬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사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채 세 걸음도 남지 않았을 때.
 "ㅡ다래야!"
 그녀는 힘차게 외치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양 팔을 벌리며, 나를 안는 그녀를 떼어놓지 못했다. 반 아이들의 탄성은 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다래야...!"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눈물에 내 가슴팍이 젖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차마 그녀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내 가슴에 문지르는 그녀의 윤기 있는 곱슬머리에서는 향긋한 들꽃 향기가 났다.
 잠시 주저했지만, 결국 나는 벌리고 있던 양 팔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내 볼을 대며,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려주며,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푸근한 목소리로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말을 나는 하고 있었다.
 "...예뻐졌네, 라이타."
 "응...! 응...!"
 라이타는 훌쩍이며, 웃으며, 여전히 내 가슴에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라이타.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는 그런 이름의 소녀가 살았다.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인. 그녀의 아버지가 사업을 하러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어머니를 만났고, 그대로 결혼해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국적은 물론 한국. 한국어가 모국어고, 젓가락질은 물론 한국 문화에도 익숙하고,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유행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뛰어 놀기를 좋아하는 활기찬 여자애였다.
 하지만, 그런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연한 커피 빛의 피부. 눈에 띄게 이질적인 이목구비. 그것만으로도 라이타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의식도 못한 채 차별 어린 단어로 라이타를 불렀고, 당연히 라이타를 외국인으로 취급했다.
 그런 어른들의 편견을 그대로 이어받았는지, 아이들도 라이타를 멀리하고 차별했다. 놀이에서 제외시키고, 무시했으며, 놀려댔다. 선생님들은 그런 따돌림을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가끔 보여주는 선입관과 그런 배려가 오히려 라이타를 더 멀게 만들었다.
 보통 그런 상황이라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울며 하루하루를 보냈겠지.
 하지만 라이타는 보통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글쎄, 비유를 하자면 라이타는 태풍 같은 여자애였다. 말 그대로, 열대 저기압 소녀.
 라이타는 그 모든 차별과 따돌림에 단호히 저항했다. 이겨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보든 것을 부숴버렸다는 뜻이다.
 라이타를 놀리고 멀쩡한 애들은 하나도 없었다. 코피 정도로 끝나면 다행히고, 선명한 이빨자국, 듬성해진 머리카락, 뼈가 부러져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간 애들도 많았다.
 책상이 날아다니고, 의자가 춤을 췄다. 라이타는 절대 불의와 억압을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아예 라이타의 아버지가 대놓고 그녀에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널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거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책임은 전부 이 아빠가 진다." 라이타는 아버지의 말을 정확하게 이행했다.
 그렇다고 라이타가 폭력적이거나 애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라이타는 정의의 수호자에 가까웠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보면 라이타는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미쳐 날뛰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하나씩 라이타를 따르기 시작했다.
 마치 영웅을 따르는 것처럼, 그들은 라이타를 중심으로 모여 놀고 즐기며 파벌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미 동네에는 골목대장이 있었다. 하유라는, 또다른 영웅이.
 한 하늘 아래에 두 대장이 있을 수 없고, 두 영웅이 있을 수는 없는 법.
 당연한 수순으로, 동네는 양분되었다. 유라 선배... 당시에는 유라 누나의 일당. 그리고 라이타의 일당.
 여기에서 내 사정이 좀 묘해진다.
 일단, 기본적으로 나는 유라 누나의 파벌 소속이었다. 그것도 그냥 일원이 아니라, 이제 와서 이런 말하면 부끄럽지만, 말하자면 서열 2위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3위는 라미. 우리는 유라 누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동생이며 심복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나는 라이타 일당의 서열 2위이기도 했다. 라이타가 이사왔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나는 처음에는 라이타의 유일한 친구였고, 그 후에는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지금이야 허여멀건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당시 나는 꼬맹이었고, TV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동경하고 있었다. 당연히 남을 따돌리는 건 옳지 않다고 믿었고, 무엇보다 라이타는 여자애였다. 그야 뭐... 아무리 그래도 반 아이들 전부와 싸우면서 '니들 그만둬!' 하고 외칠 정도로 꿈과 용기가 넘쳤던 건 아니었으니 내가 라이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짝꿍으로서 라이타의 짐정리를 도와주거나, 방과 후에 같이 문방구에 간다든가, 뭐 그 정도였지만.
 그런 사소한 일도, 라이타는 너무나도 고마워해줬다.
 라이타는 틈만 나면 나에게 '좋아해!' 라고 말했고, 뽀뽀도 꽤 당했고, '결혼하자!' 는 말도 제법 들었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내 입장은 곤란했던 거다. 유하 누나와 라이타의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영역(문방구라든가, 놀이터라든가)을 두고 하는 신경전은 이어지는 상황. 양쪽 파벌 모두의 넘버 2였던 나는 언제나 '어느 쪽이냐, 확실하게 해라!' 하는 압박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벌어졌다.
 결국 갈등이 끝에 다다라 충돌하기 직전, 라이타는 갑작스럽게 인도네시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전 성과가 있었던 라이타의 아버지가 다시 출국해야 했고, 라이타의 아버지는 가족만 두고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라이타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게 이별이 싫어서였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라이타는 유일하게 내게만 그 사실을 알려줬다. 커다란 이삿짐 트럭을 뒤에 달고, 아버지가 모는 작은 트럭 뒷자리에 앉은 라이타는 울며 창밖으로 몸을 내민 채 내게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손을 흔들었다.
 라이타의 일당들은 해체되었고, 자연스럽고 슬그머니 유하 누나의 일당으로 흡수되었다.
 끝까지 어느 쪽인지 확실히 하지 않았던 나는 미묘한 따돌림을 한동안 당해야 했으나, 보스였던 유하 누나가 있다보니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우리는 나이를 먹었고, 무엇보다 유하 누나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지며 모든 일은 추억이 되었다.
 라이타를 기억하는 애들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라이타는 다시 나타났다.
 "그럼, 약속 지켜주는 거지...?"
 내 품에 안긴 채, 라이타는 나를 올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고요한 반 안 분위기 덕분에, 그 말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아마 이 드라마 같은 상황에 모두 구경만 하는 거겠지. 담임 선생님도 팔짱 끼고 지켜보실 줄은 몰랐지만.
 "무슨 약속, 말이야?"
 나는 라이타를 내려보며 물었다. 잊지 말아달라고 한 건 기억나지만, 그 외에는 기억이 안 난다. 10년 전, 그것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인데 기억할 리가 없잖아. 내 질문에 라이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긴,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난 진심이었는걸."
 그렇게 말하고, 라이타는 행동에 나섰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놀라서도 있었지만,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으니까.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듯.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뜻했고, 촉촉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반 아이들이 꺅, 하고 내지르는 소리만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음..."
 살며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가까이 했던 입술을 떼며 라이타는 배시시 웃었다.
 "결혼하자고 약속했잖아, 다래야!"
 그 말에,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엉?" 하고 되묻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힘이 풀린 내 팔을 열고 한 걸음 새침하게 물러서고는, 손을 뒤로 모은 채 라이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여보!"
 "..."
 여전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단 두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운명이다. 그 꿈처럼.
 그리고.

 여전히, 라이타는 태풍 같은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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