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4일 금요일

Juvenile Mosaic(쥬브나일 모자이크) - Sugar & Spice & You! (2)

 혼날 거라고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무지막지하게 혼났다.
 어쨌든 모범생으로 통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경고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때문인지 더 혼났다. 그래도 오후 수업은 들으러 돌아왔는데 정상참작도 안 됐고. '의자 가져오라고 보냈더니 감히 배짱도 좋게 그대로 사라졌다' 면서 선생님은 교무실에 세워놓고 그것 밖에 없는 내용을 한참동안 갈구셨다. 집에도 연락했다고 하니까 분명 집에 돌아가면 또 무지막지하게 혼나겠지. 가장 억울한 부분은 상습범인 사당이 쪽은 오히려 '니가 그러면 그렇지' 식으로 대충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이미지가 중요한 거야."
 사당이가 가슴을 쭉 내밀며 뿌듯하다는 듯, 놀리듯 재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을 때는 진심으로 욱 하고 올라왔다.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
 울컥하는 마음을 담아두고 속으로만 투덜대며 걸음을 옮기자, 내 옆을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사당이는 빙그레 웃었다. 몇 번이나 봤듯, 눈부신 미소로.
 "그래도 재미있었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솔직히,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재미있다, 는 것보다는 해방감을 느꼈다는 쪽이 훨씬 정확하겠지만.
 나는 그때, 사당이의 손을 잡고 철장을 넘었을 때를 떠올렸다.
 쿵, 하고 바닥을 내딛었다. 내 뒤를 따라 뛰어내린 사당이는 잡아준다는 내 말에도 어딘지 재는 투로 "내가 더 많이 해봤거든?" 하고 마치 초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봤지만, 역시나 엉덩방아를 콩, 하고 찧고는 아야야, 하며 인상을 찌푸린 채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 어설픔에 피식거리는 내 눈빛에 살짝 물기 어린 분함을 담아서.
 고작 철장 하나 넘었을 뿐인데, 뭔가가 바뀐 느낌이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을 때는, 묘한 쾌감이 느껴지는 법이다. 금지된 것을 하는 것은 뭐라 해야 할까, 룰을 무시했다는 정복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혼나지 않을까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느꼈다. 자포자기와는 조금 달랐다. 그래도 괜찮다, 라고 느꼈다.
 스스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모범생에 가까웠다.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입학 직후 치렀던 배치고사에서도 제법 좋은 점수를 냈다. 뭐, 그래놓고 수업도 제대로 듣는 일이 없는 사당이랑 같은 반이라는 것에서 배치고사라는 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언제나 수업을 열심히 듣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 하지 않고, 늘 말 잘 듣고 불만을 표하지 않는, 그런 착한 아이. 언제나 선생님에게 칭찬을 듣고, 정해진 길로만 걸으며 그 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해야 하는 일 외에는 하지 않는 아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생각해보면, 첫 일탈이었다.
 나쁜 아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작 이 정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묶고 있던 것들에서 풀려난 느낌이 들었다. 아니, 풀어낸 느낌이 들었다.
 "어때?"
 그리고 사당이는 마치 자신의 소중한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양 팔을 벌리며 선언하듯 외쳤다.
 "이게 바로 자유의 맛이야!"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데."
 "이래서 초보자는."
 쯧쯧, 하고 혀를 차며 사당이는 거만한 미소를 지은 채 손가락을 가로저었다. 얘에게 바보취급 받다니, 하는 억울함이 느껴졌지만 왠지 사당이는 이러는 게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이제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유를 갈망하기 마련이라고. 새장 속의 새들도 틈만 나면 탈출하려고 하잖아? 그럼 사람도 마땅히 그래야지. 지금 너는 새장에서 나온 거야. 자유롭게 날고 노래할 수 있다고."
 마치 설교하듯 사당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 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제법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작 그 10분을 본 것만으로도 사당이가 이런 말을 할 애는 아니라고 느꼈다. 분명 어디서 보고 베낀 거겠지.
 "그래서, 넌 뭘 할 생각인데?"
 그렇게 물어보자, 사당이는 고민하듯 팔짱을 낀 채 "끄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글쎄...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공원에서 산책해도 좋을 것 같고. 윈도우 쇼핑도 좋고. 뭘 해도 좋다는 건 이런 면에서는 곤란하단 말이지. 뭘 해도 좋으니까 그 중에서 뭘 해야 할지 고민해야하니까. 음..."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며 고민하던 사당이는, 나를 돌아보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웃었다.
 "그래, 오늘은 마침 파릇파릇한 신참도 있으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할까?"
 "응?"
 "너도 기왕 이렇게 땡땡이를 친 거,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 아냐. 괜찮아, 뭐든지 이 언니가 다 해줄 테니까 부담 없이 말해주렴."
 툭툭, 하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뿌듯함과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짓는 사당이. 나랑 같은 신입생인데다 나는 남자니까 굳이 따지자면 '누나' 겠지. 하지만 그런 태클을 걸기에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사당이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나는 그냥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그렇게 말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뭐어?"
 내 대답에 사당이는 눈을 깜빡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반은 진심이었다. 그야 나라고 해서 노는 일 없이 늘 공부만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 열심히 하고 숙제 하고 예습 복습 하고 시간 나면 적당히 TV나 보고 게임이나 하는 정말 평범하게 재미없는 사람이거든. 그래서인지 입학하고 시간도 꽤 지났지만 그다지 친구도 없고. 그러다보니 '학교 땡땡이를 치면 뭘 하고 싶냐' 하고 내게 물어본다면 딱히 없다.
 "애당초 뭔가 하고 싶어서 나왔다기보다는 널 따라 나온 거니까. 게다가 네 말대로라면 아직 신참인 나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거잖아. 숙련자인 네가 가르쳐주지?"
 뭐, 마지막 부분은 놀리자고 끼워넣은 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라고 평생 학교에서만 살았을 리 없으니 '뭘 해야 할지' 모르진 않는다. 글쎄, 이럴 때 땡땡이를 치면 PC방을 가거나 당구장에 간다거나 한다고 하던데. 뭐 그거야 남자애들 이야기긴 하지만, 솔직히 그렇기에 여자애들은, 특히 사당이는 과연 매일 땡땡이를 치고 뭘 하고 노는 건지 궁금했다. 이런 말에 넘어간다면 말이지만.
 "으음... 듣고 보니 확실히..."
 그리고 사당이는 역시나, 내 말에 정곡을 찔렸다는 듯 한 방 먹은 표정을 짓더니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얘 바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후후후...! 이거 어려운 문제군... 신참에게 자유의 맛을 알게 해줄 수 있는 일... 이라고 하면 역시 그것 밖에 없지!"
 고민하던 사당이는 번뜩 떠올랐다는 듯 과장되게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떠올리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도대체 사당이가 무슨 답을 내놓을지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사당이는 내게 다가왔다. 코와 코가 마주할 정도로. 한 걸음 물러나며 숨을 들이쉬었다.
 가까이에서 본 사당이의 눈은 어딘지 고양이 같은 인상을 줬다. 하지만 도도한 고양이가 아니라,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직 어린 새끼 고양이 같은. 눈썹이 무지개 같은 곡선을 그리고, 눈매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반짝인다. 매끄러운, 촉촉하게 젖어있는 입술이 뭔가를 원하듯 보였다.
 덥썩. 그리고 사당이는 내 손을 붙잡았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쿵쿵 울려대던 가슴이 크게 두근! 하고 울렸다. 사당이는 내 손을 맞잡은 채, 마치 춤추는 것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를 잡아끌며 활기차게 외쳤다.
 "우선, 움직여보는 거야!"
 그거 퍽이나 대단한 결론이네. 그렇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아무 말 하지 말라고 그런 나를 막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사당이에게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뭔가 대단한 걸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동네를 쏘아 다니며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녔을 뿐.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벤치에 앉아 즐겁게 떠드는 사당이의 이야기를 적당히 맞장구 치면서 들어주고, 이른 시간이라 동네 꼬맹이들도 없는 텅 빈 놀이터에서 사당이가 깔깔거리며 그네를 타고 철봉에 매달리는 걸 '얘는 역시 정신연령이 초등학생 수준 아닐까' 의심하며 구경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는 상점가에 가서 옷가게를 구경하는 사당이를 따라다니고, 분식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뭐 그런 식으로.
 "빨리 와!"
 어느새 내 앞을 폴짝폴짝 뛰어가다 입에 손까지 댄 채 나를 돌아보며 외치는 사당이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생각했다.
 얘는 정말 뭐든지 재미있어하는구나. 뭐든지 즐기는구나.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평소에는 하지 않는, 할 생각도 하지 않는 일들을 사당이에게 이끌려 했을 뿐. 특별한 거라고는 남들은 전부 학교에 있을 시간에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쏘아다니며 사당이가 하나 하나 사소한 것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열심히 설명해도 흥미는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당이를 바라보는 건 재미있었다.
 재미있어하고 즐기며, 무엇을 봐도, 너무나도 당연하고 흔한 것들뿐인데. 사당이 본인도 분명 늘 봐왔던 것일 텐데도 눈을 반짝거리며 행복해하는 사당이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열심히, 자신이 얼마나 그것들에서 재미를 느꼈고, 그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열심히 설명하는 사당이에게 흥미가 갔다.
 마치 데이트 같네. 피식거리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스스로의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어느새 인도 가운데의, 일렬로 늘어선 노란색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을 양 팔을 벌린 채 마치 평행봉이라도 하듯 뒤뚱거리고 있는 사당이의 등을 바라봤다.
 이제까지 살면서 데이트 같은 걸 해본 기억은 없었다. 중학교 시절 아이들이 전부 거기에 환상을 가지는 걸 보면서도 '그런 쓸데없는' 하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아마 그래서겠지. 해본 적 없는 환상을 나도 그 탓에 가지게 됐고, 듣던 거랑 비슷하다는 것에 착각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즐거운 표정으로 웃는 사당이의 옆얼굴을 보며 약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살며시 내리 눌렀다.
 분명 바보 같고 같이 있으면 한숨만 나오는 애이긴 하지만, 그런 사당이와 함께 있는 것은 이상하게도 짜증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외모 때문일까. 확실히 사당이는, 아까도 느꼈지만, 한 순간 호흡을 잊을 정도로 예쁘다. 귀여운 것에 가까운 것 같지만. 제법 예쁜 애들이 많은 우리 학교에서도 독보적이다. 그런 탓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누구든 에쁜 사람에게는 호감이 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새장 속에 사는 걸 당연히 생각하는 나니까. 그런 내게 새장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당이는 눈이 부셨다. 평생을 나가본 적 없는 집고양이 같은 나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즐기며 속박되는 것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들고양이로 보였다.
 지금까지 새장 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던 내게, 사당이는 그 사실을 알려줬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얘처럼 매일같이 학교를 빠져나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래도 좋지 않을까, 얘랑 같이 나가면 오늘처럼 즐겁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참동안 선생님에게 먼지도 안 나올 정도로 털린 끝에 돌아온 교실은 이미 청소도 끝나고 아무도 없었다. 내 자리와 사당이 자리에 가방이 하나씩 있었을 뿐. 창밖으로 봄의 늦은 석양이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가 가방을 낚아챈 사당이는, 나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고는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늘 너랑 같이 놀아서 즐거웠어! 그럼 내일 또 보자!"
 그 말에 내 가슴이 다시 한 번 둔하게 두근거렸다는 걸, 사당이는 분명 모르겠지. 저쪽은 신경도 안 쓸 테니까. 그리고 나 자신도 아직 잘 모르겠다. 이 두근거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당이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오작동인지, 아니면 내 안에서 뭔가가 싹을 트는 건지.
 그러고 보면 사당이가 누군가와 함께 땡땡이를 친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당이는 교내에서는 '전설의 탈주범', '도시전설'으로 통하는, 거의 예티나 네스 수준으로 드문 존재다. 사당이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조차 들어본 기억이 딱히 없었다. 그런 사당이가 나와 함께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다. 데이트로 착각할 정도로.
 사당이가 이러는 건 나 뿐이다ㅡ그 생각에 가슴이 다시 울렸다.
 하지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상대는 그 사당이다. 나 같은 것에게 그럴 리가 없다. 사춘기 남학생 특유의 과대망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당이의 이런 면을 아는 것도, 나 뿐이겠지. 교내에서 사당이는 그저 미스테리한 존재일 뿐이니까.
 그저 우연이었겠지만, 그래도, 처음 만났다고 같이 땡땡이를 치자고 권유하고, 같이 돌아다녔다는 건...
 어쩌면 나는 특별하다는 것 아닐까?
 "...그래, 내일 보자."
 나는 사당이가 폴짝거리며 교실을 나간 뒤에야,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일 학교에 오는 것이 기대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안녕."
 그리고 다음날. 현관에서 마주친 사당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자, 사당이는 나를 돌아봤다. 사당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 덕이려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양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누구세요?"
 "너는 조류냐."
 기억력의 유효시간이 하루 밖에 안 되다니. 그때 새장 운운 하더니 머리가 딱 새 수준이다. 특별 좋아하시네. 밤새 고민하며 그럴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타격이 꽤 클 뻔 했다. 그럼 그렇지.
 내 지적에 사당이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턱에 손을 대고 과장스럽게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마침내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말했다. 변함없이 행동 하나하나가 만화 같다.
 "아! 신참이구나!"
 "그걸로 기억하기냐."
 누가 신참이야.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내 대꾸는 신경도 안 쓰고, 사당이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반갑다는 듯 내 양 손을 맞잡고 붕붕 흔들어댔다.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미소가 역시 눈부시다. 사당이는 내 팔을 놔주고 물었다.
 "집에 들어가서 혼날 거라고 걱정하더니, 많이 혼났어?"
 "뭐, 그야 그렇지."
 그렇게 화내시는 어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봤다. 이제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손을 대시진 않았지만 어릴 때처럼 회초리로 때리실 것만 같은 분위기였고. 하지만 거기까지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지. 솔직히 좀 부끄럽기도 하고. 몸을 돌려 교실로 걸어가자, 사당이도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사당이는 나를 올려보며 물었다.
 "오늘도 같이 갈 거야?"
 "너 어제 혼나고 오늘도 땡땡이치게?"
 그야 얘가 그럼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단하네. 놀람보다는 감탄을 담아 바라보자, 사당이는 '흐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가슴을 내밀었다. 뿌듯하다는 듯. 칭찬하는 거 아니거든.
 "자유란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야.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는 것이지!"
 "그거 참 좋은 말이네."
 "그치, 그치?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이 손으로 내 자유를 쟁취하고 말 거야! 그러니까..."
 "그건 안 되겠는데."
 그 순간 들린 목소리에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동시에 정면을 바라봤다. 이상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으니까. 그녀는 마치 우리를 가로막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당당하게 서있었다.
 우리 반 반장이었다.
 박하향.
 자연스럽게 풀어둔 긴 생머리. 나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훤칠한 키에 어울리는 어른스러운 몸매. 이지적인 기색을 더욱 강하게 하는 안경과 그 밑의 날카로운 안광. 성격이 외모로도 드러나는 건지 날이 서있는 느낌이랄까,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차가운 인상 덕분에 반에서도 '미녀' 로는 뽑을지언정 '사귀고 싶다' 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손끝으로 귀 앞에서 안경을 추켜올리며 하는 하향이의 말에 움찔, 하고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표정에서 너무 드러났나.
 성적은 지극히 우수. 신입생 배치고사 만점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품행은 물론 단정. 중학생 때는 학생회와 선도부원으로 3년 내내 활동했다고 들었다. 선생님들의 부탁이나 말을 어기는 일도 전혀 없는, 말 그대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우등생이자 모범생. 나 역시 그런 걸 자처하고 있지만 하향이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하향이는 움츠러든 나는 무시하고 사당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날카로운 안광 때문인지 사당이가 움찔, 하면서 내게 팔짱을 꼈다. 그 탓에 나 역시 다시 움찔, 하고 몸을 떨었고. 볼이 빨개지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는데. 얘는 관심도 없다는 듯 까먹었으면서 왜 또 이런 착각을 하게 만드는 거야.
 "감사당. 어제도 땡땡이를 쳤으면서 오늘도 치겠다고?"
 하향이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차가움 탓인지 날카로움 탓인지 으르렁 거리는 것 같았다. 마치 도베르만이나 날카로운 인상의 사냥개처럼. 그리고 내 뒤로 몸을 숨기려는 듯 쭈뼛거리는 사당이는 개에게 쫓기는 고양이 같았다.
 "그, 자, 자유는 인간이 누려야 할..."
 "학교를 멋대로 나가는 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야."
 찌릿, 하는 안광에 내게 하던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으려던 사당이는 즉시 입을 닫았다.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가운데 끼어서 생각해보니, 생긴 것도 태도도 정 반대구만.
 단발의 사당이. 장발의 하향이. 어딘지 바보같지만 편안한 분위기의 사당이와 어른스럽고 냉철한, 그래서 날카로운 느낌의 하향이. 수업 빠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사당이와 선생님의 말을 법으로 여기며 규율에 충실한 하향이. 이 정도로 상극이다보니 오히려 재미있을 정도다.
 하향이는 나랑 사당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단호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듯 힘있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반장으로서, 나는 선생님에게 너희 둘이 다시는 수업을 빠지지 못하도록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어. 상습범인 사당이는 물론이고, 얘에게 물들어가는 다호 너도. 앞으로는 내가 너희 둘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지켜볼 거야."
 "누, 누구 맘대로..."
 "선생님 말씀이야."
 기어들어가듯 반론하려던 사당이의 말은 다시금 하향이의 선포에 가로막혔다. 하향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이 내가 지켜보는 이상, 너희들에게 더 이상 자유란 없어!"
 왜일까.
 내 본성 역시 그쪽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유 없이 울컥함이 몰려왔다.

2017년 3월 21일 화요일

Juvenile Mosaic(쥬브나일 모자이크) - 소꿉친구 누님에게 마음을 품었는데 어느 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서 곤란합니다 (2)

 소문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퍼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어쩌고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1교시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전교에서 모르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평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고 얌전하게 학교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이런 관심은 부담스러움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소문이 빨리 퍼지는 걸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저기, 라이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내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보며 행복하게 웃는 라이타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혼자 들어가고 싶은데."
 내가 가리키는 건, 입구 바로 위에 달린 '남자화장실' 이라는 표시.
 입구 바로 앞에서 멈춰선 나와, 내 바로 옆에 매달린 라이타 덕분에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오려던 인파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저 입을 살짝 벌린 상태로 나를, 정확히는 라이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말에 라이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치?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타는 보기 드물게, 오늘 들어 처음으로 살짝 상기된 볼을 한 채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중얼거리 듯 말했다.
 "부부 사이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보게 될 테고... 딱히 나는 신경 안 써."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 하는 라이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 부부 아니거든. 언젠가는 본다니 뭘 본다는 거야. 그리고 신경 쓰는 건 나랑 여기 있는 애들이라고. 저기 급해 죽겠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애 안 보여?
 그런 마음을 담아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라이타를 빤히 바라보자, 라이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하아, 하고 귀엽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너무 속박해도 안 되겠지. 나,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게."
 "어, 그, 그래. 그럼..."
 라이타가 정말 마음씨 좋은 아내처럼 웃으며 내 팔짱을 풀어주자마자, 나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듯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 행동 덕분인지 멈춰 있던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두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덕분에 얼굴이 새빨개진다. 원래 누가 보면 안 나오는 법인데, 긴장하면 안 나오는 법인데, 남자 화장실의 모두가 날 보고 있잖아. 얌마, 넌 뭘 보는 거냐.
 이렇게 '화장실로 도망가면 못 쫓아오겠지' 하는 생각도 실패하는 게 판명되었다.
 라이타는 문자 그대로 '어딜 가도' 나를 따라왔다.
 마치 다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다는 듯.
 라이타의 자리는 내 바로 옆자리, 흔히 말하는 '짝꿍'이 되었다. 원래 비어있던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타의 등장과 함께, 반 아이들은 어째서인지 라이타에게 엄청나게 호의적이었다. 우리 반이 이렇게나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곳이라는 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전혀 안 그랬지만. 게다가 어릴 때, 라이타와 함께 있을 때 라이타가 학교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떠올리면 감격까지 느껴진다.
 말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내어준 내 옆자리에 앉고, 교과서를 펼친 채, 수업시간 내내 라이타는 칠판은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그저 내 옆얼굴만을 바라봤다. 행복하다는 듯 배시시 헤실헤실 웃으며. 양 손으로 뺨을 받친다는 참으로 앙증맞고 귀여운 자세로.
 그 시선이, 음, 기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라이타는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말 운명 같을 정도였다.
 쉬는 시간에 배가 아프다는 적당한 핑계로 양호실에 갔다. 침대에 눕자 바로 옆자리에 누워서 나를 보며 웃는 라이타를 발견했다. 마침 양호실이 어디 있는지 소개 받아서 왔다는 모양이었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다른 반에 숨어있기로 했다. 다른 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마치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대화에 섞여있는 라이타를 발견했다. 마침 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다른 반도 익힐 겸 프린트를 옮겨달라고 했다는 모양이었다.
 매점에 가려고 했다. 라이타는 팔짱까지 낀 채로 마치 데이트를 나온 연인마냥 내게 이야기하며 나를 따라왔다. 그 사이 사귄 반의 여자애들과 왔다가 나를 발견했다는 모양이었다.
 우리 학교의 유명한 탈주마처럼 아예 자체휴강을 때리고 담을 넘으려 했다. 분명 오늘 전학 왔을 텐데, 라이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같이 데이트 가려는 거냐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마침 산책하던 참이었다는 모양이었다. 산책이라니, 학교에서?
 "..."
 이어지는 시선 탓인지 긴장 탓인지 소변기 앞에서 계속 서있기만 한다는 걸 깨닫고, 얌전히 물러나 대변기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부담스럽다.
 너무너무 부담스럽다.
 잘 따르는 강아지나 엄마 오리를 쫓아오는 새끼 오리, 라고 하면 귀여울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쯤 되니 무섭기까지 하다. 밤에 침대에 같이 누워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스토커냐고.
 나 역시 물론 반가웠다. 그야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미안해질 정도로 라이타와 나는 친한 사이였으니까. 그런 라이타를 다시 만난 것도 기쁜데, 재회의 기쁨에 눈물까지 흘렸다면 감격스러울 정도다. 뭐, 입맞춤이 없었어도 그것만으로도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결혼이라니, 그런 약속 기억 안 난다고.
 ...아니, 사실 기억 자체는 난다. 그래.
 어릴 때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 기억난다. 소꿉놀이를 하면서였나 그랬을 거다. 하지만 그 라이타가 얌전한 소꿉놀이를 했다는 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다른 놀이를 할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랬던 적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그건 어릴 때 이야기잖아. 코흘리개 초등학생 시절 약속이잖아.
 그야 라이타의 마음이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약속을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지키자고 해도 '어어' 하는 반응 외에는 해줄 게 없다.
 무엇보다 결혼은 만 18세 이후에,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하에 가능하단 말이다.
 아무튼.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라이타가 부담스러운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유하 선배가 있으니까.
 ...아니, 뭐. '나에게는' 하고 말할 사이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 분명 나는 라이타를 좋아했다.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 무렵까지 유하 선배, 아니 유하 누나는 동경하는, 존경하는 누나였지만 라이타는 내게 눈부신 존재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같이 놀면 즐겁고, 고운 커피색으로 활기차게 물든 그녀의 색다른 외모도 좋았다. 무엇보다 라이타는 언제나 내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고 말했고. 나 역시 그런 마음이 기뻤다. 어린 나이였기에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타를 좋아했다. 어릴 때의 약속이긴 했지만, 그 당시 '결혼하자!' 는 약속에 대한 내 마음 역시 라이타의 마음처럼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라이타에게는 미안하지만, 라이타가 없는 사이 내 마음은 변했다.
 물론 지금도 라이타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친구로서지, '연인'으로나 '아내'로서냐고 물어본다면... 정말 미안하지만, 아니다.
 나는 유하 선배가 좋다. 비록 짝사랑이지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라이타의 마음에 단호하게 대답해야겠지. 미안해, 하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고,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자, 고.
 그렇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이타의 눈빛이 너무 행복해보였으니까. 그 기대를 내 쪽에서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라이타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입장을 바꿔서, 만약 유하 선배가 내 고백에 나를 보면서 "미안하지만 나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미안해. 다래 너는 그냥 동생으로 밖에 안 보여. 우리 누나 동생으로 지내면 안 될까?" 라고 한다면...
 "끄으윽..."
 내 상상만으로도 타격에 정말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래야? 안에 있어?"
 그 순간, 라이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남자 화장실 안에 울려 퍼졌다. 다급히 외쳤다.
 "아, 안에 있어! 들어오지 마!"
 "응! 알았어!"
 내 대꾸에 라이타는 밝게 대답했다.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는 사이 라이타의 듣기 좋은 콧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겠지. 게다가 라이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 들어오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까지 들었다. 문을 열고 나와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남자애들의 사이를 지나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섰다. 라이타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내 팔짱을 꼈다.
 사실 걱정된다.
 이미 전교에 소문이 쫙 퍼졌다면, 분명 유하 선배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라이타가 다시 돌아오자마자 내게 결혼하자고 외쳤고, 하루 종일 붙어있다고. 유하 선배가 과연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 질투라도 해줬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건 내 망상일 뿐일 테고, 흐뭇하게 웃으며 '잘 됐네. 둘이서 예쁜 사랑 하렴!' 하고 어머니 같은 눈빛을 보낸다면 어떻게 하지. 솔직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고민을 하며, 라이타와 함께 오늘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당연히 해야 했던 걱정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
 방과 후. 교문에서 유하 선배와 라이타는 서로를 보자마자 동시에 말했다.
 늘 그렇듯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배와 라미.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나오는 나와 라이타. 걸음걸이는 멈추고, 웅성거리는 주위 인파의 소리도 같이 멋은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마치 서부극의 결투 현장에라도 온 것 같았다. 우연이겠지만 때마침 비닐봉지 하나가 바람에 구르며 우리의 사이를 지나갔다.
 일났다... 엿됐다...
 뒤늦은 깨달음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초등학생 시절 이 동네에는 두 파벌이 존재했다.
 유하 선배, 당시에는 유하 누나의 파벌.
 그리고 라이타의 파벌.
 당연한 수순으로, 당연한 결론으로, 유하 누나와 라이타는 앙숙이었다.
 뭐랄까,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 주먹다짐을 하며 싸운 적은 없지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둘이 같은 공간, 예로 들어 동네 문방구나 구멍가게, 놀이터 같은 곳에서 마주치면 둘 사이에 튀는 불꽃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했다.
 대결하고 있는 파벌의 지도자들끼리 사이가 좋을 리는 없으니까.
 모두가 언젠가는 둘 사이에 한 판 대결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나 역시 그 날이 오는 걸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싸움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유하 누나의 부전승이라는 결과로 끝이 났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 숙명의 라이벌은 다시금 재회했다.
 이어지는 건, 역시 리턴 매치일까.
 꿀꺽, 하고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머리로는 생각했다. 그거야 어릴 때 이야기고, 둘이 뭔가 서로를 싫어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니니 이제 와서 싸울 이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왜인지 가슴이 쿵쾅대고 있었다. 묘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설마하니, 서로 빤히 노려보면서 신경전을 벌이지는 않겠지.
 아니야, 그건 이미 하고 있잖아. 어쩌면 그 이상을 할지도 몰라.
 아, 제발. 그런 일은 없었으면.
 나는 불안에 떨며 유하 선배와 라이타를 번갈아 바라봤다.
 라미는 놀랐다는 듯 크게 떴던 눈을 가늘게 하며, 묘한 긴장감을 품어내며 내 걱정을 더욱 부추겼다. 라미는 어릴 때부터 유하 선배의 가장충실한 심복이었으니까. 내 쪽이 아니라 유하 선배와 피로 이어진 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 라미의 반응이 내게는 뭔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는 내 얼굴을 힐끔 보고는, 결심했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타는 내 팔에 끼고 있던 팔짱을 슬그머니 풀었다.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유하 선배도, 들고 있던 가방을 라미에게 내밀고 한 걸음 내딛었다.
 아아, 이제 끝장이야.
 라이타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유하 선배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한 걸음씩 내딛었다.
 그리고.
 "유하 언니...?"
 "라이타...?"
 둘은 그렇게, 마치 확인하듯 중얼거리더니.
 "유하 언니이이ㅡ!"
 "라이타아ㅡ!"
 서로의 이름을 외치며, 서로에게 달려가, 힘껏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유하 언니, 유하 언니이...!"
 "이게 몇년 만이야! 와아...! 라이타!"
 아까 내게 했던 것처럼, 유하 선배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긴 채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라이타. 그리고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라이타를 끌어안은 채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반갑게 웃는 유하 선배. 저 뒤에서는 라미가 '그럼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유하 선배와 라이타는 서로 볼을 비비고 코를 비비며 화기애애하고 감격적인 재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 돌아왔구나. 미리 찾아가서 만날 걸 그랬어."
 "으응, 아니야. 나야말로 유하 언니를 만나러 갈걸 그랬어. 나 돌아왔어, 유하 언니. 앞으로 여기서 쭉 같이 살 거야!"
 "나도 기뻐, 라이타. 10년이나 여기 없었으니까 많이 바뀌었겠지만,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자. 같이 놀기도 하고!"
 "응! 유하 언니, 만나서 기뻐!"
 "나도 네가 돌아와서 반가워, 라이타."
 마치 헤어진 단짝친구, 혹은 자매와 재회한 것 같은 감격스러운 장면에 하교하는 학생들도 전부 둘을 바라본다. 물론 둘은 그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참으로 흐뭇하게 서로를 확인하며 감동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런 둘을 말없이 바라봤다. 뭐...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언젠가는 말을 걸어야겠지만, 적어도 잠깐 동안은 둘의 재회를 방해하지 말고 따뜻하게 지켜봐야겠지.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내 걱정 따위는 모두 기우였다니 마음이 놓인다. 어릴 때의 앙금이 남아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때, 두 사람 사실은 사이가 좋았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나는 푸근한 마음으로 둘을 바라봤다. 어떻게 보면 그리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것도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그 시절로. 앞으로 라이타도 함께, 네 사람이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겠지.
 그때, 나는 아까 했던 걱정도, 유하 선배와 라이타에 대한 내 마음도 잊고,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건, 아주 오랜 뒤였다.





 "방심했다아...!"
 집으로 돌아온 직후. 평소와는 다르게 다래와 라미의 집에 가지 않고 싱긋 웃으며 인사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직행한 유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툭, 하고 떨어트리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며 그렇게 외쳤다.
 "완전히 꼬였다아...!"
 평소의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힘없는, 조금은 투박한, 꾸미지 않은 상심한 유하 본인의 목소리.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일자로 엎어져있던 유하는, 이윽고 발을 쿵쾅쿵쾅 구르고 양 손으로 묶어 올린 포니테일 머리카락을 풀고 헝클어뜨리며 조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라이타 그것에게 당했다아ㅡ!"
 예상치도 못했다.
 솔직히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아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옛날에 살던 전학생이 온다고 해서 라이타였을 줄 누가 아냐고. 말이 되냐고. 뭐냐고 이 운명의 장난. 너무하잖아. 대놓고 날 엿 먹이려는 속셈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누구든 좋으니까 이딴 계획을 세운 놈의 멱살을 잡고 신나게 흔들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유하는 쿵쾅거릴 정도로, 결국 어머니가 "시끄러워!" 하고 소리칠 정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으로 침대를 내려치고,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잡아당길 뿐이었다.
 그토록 오래 준비해왔는데.
 앞으로 반년만 있으면 다 끝났을 텐데.
 그 모든 포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다니.
 유하는 진심으로 분해했다. 여기에서는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
 유하는 어릴 때부터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점 조차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는 굵어졌다.
 일부러 어른스러움을 연출했던 것이, 벌써 6년 이상. 어릴 때와 성격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다래가 어른스러운 여자를 동경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력해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고도 가면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아침밥을 차려주고 가사를 도와주며, 미래에 아내로서 같이 지낼 때의 일을 경험하게 했다.
 늘 챙겨주면서, 언제부터인가 조금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된 다래를 성장시키며 더욱 더 멋진 남자로 만들려 했다. 그 모든 것이 유하의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믿고 의지하도록.
 몇 년 전, 다래에게만 '유하 누나' 대신 '유하 선배' 로 호칭을 바꾸게 한 것도 계획된 행동이었다. 열심히 찾아 읽던 여러 정보 중 하나에서 웨스터마크 효과라나,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온 남녀는 서로를 형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나는 너의 가족이 아니다. 아직은' 이라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 덕분에, 그 모든 계획 덕분에, 몇 년 전부터 다래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요 호감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다래는 아직 자신을 누나로 보고 있고, 스스로 연하라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런 상황을 인정하고, 혹은 성장해야 비로소 다래는 용기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한 계획도 이미 짜두었다. 앞으로 반년 안에, 그러니까 2학년 무렵에는, 3학년인 유하의 졸업을 앞둔 시기가 되면, 더 기다렸다가는 유하를 놓칠까 두려워 다래는 용기를 내면서 자신에게 고백할 것이고, 유하는 그걸 어쩔 수 없다는 척 받아들일 것이다. 그대로 해피엔딩.
 그럴 계획이었는데.
 뭐야, 갑자기. 깜빡이도 안 키고 끼어들어오기는. 거기다가 뭐야ㅡ, 그 변화. 그야 어릴 때도 귀염성은 있었지만 선머슴 같은 차림에 어느 쪽이냐 하면 남자애 같은 활발한 타입이었으면서, 그런 애교 넘치는 미소녀로 변할 줄이야.
 역시 그때, 어떻게든 했어야 했어.
 어떻게든, 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야 마주치자마자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지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래의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다래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 우리 둘의 충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보면서도 걱정을 사실로 만들 수는 없었다. 뭐, 반가움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겉으로는 재회를 반기는 마음씨 좋은 누나를 연출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상대도 분명 같은 마임이었을 거라는 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벨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유하는 손을 내밀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언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역시나 들려오는 건 라미의 목소리.
 믿을 수 있는 동생이자, 최고의 심복. 그리고 스파이.
 어느 순간부터 내 목적을 알고, 계획을 도와주고 있는 동료.
 그런 라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오빠가 다른 마음 품을 것 같진 않지만, 라이타 언니 들이대는 솜씨가 장난이 아닌데?"
 "그래... 나도 걱정돼."
 다래는 모른 척 했지만, 유하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전교에 이미 쫙 퍼진 소문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그야 유하 본인도 모른 척 했지만. 추궁할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만든 이미지에서 시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의 유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 좋고 어른스러운, 친동생 같은 다래를 걱정하는 '누님' 이었으니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유하는 고민 끝에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 현재까지는 아직도 자신이 유리하다. 그 점은 자만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한 방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키운 다래는 그런 공세에 홀랑 넘어가버리는 남자가 아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상, 한 순간에 마음이 변할 리는 없다.
 "그치만, 그렇게 여유 부리면 위험한 거 아냐?"
 마찬가지로 심각한 라미의 말에 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듣기로는 어릴 때 결혼 약속도 했다는 모양이니까. 결혼 약속이라니, 왜 그때의 난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걸까. 그것만으로도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그야 어린애의 약속일뿐이지만, 그걸 카드로 사용하는 라이타의 행동은 진심이었다. 여우 같은 기지배.
 "그렇다고 갑자기 태도를 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라미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지금까지 10년에 걸쳐 쌓아온 계획과 이미지를 한 순간에 바꾸기에는 부담이 따른다. 괜히 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
 유하의 말에 라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결국 유하 언니가 결정할 일이지만, 나는 유하 언니의 선택이라면 뭐든 응원하고 있으니까. 가능하면 유하 언니랑 정말로 가족이 되고 싶고. 언제는 나는 언니 편이야."
 "고마워 라미야."
 그리고 이쪽에는 이렇게 듬직한 지원군도 있자. 그야 한 방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전황은 유리하다. 다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괜히 서둘러 행동에 나서서 빈틈을 보이는 것보다는, 상황을 파악하며 지금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괜찮아. 나, 절대 지지 않을 거니까."
 확신을 담아, 유하는 그렇게 말했다.
 애당초, 그 싸움은ㅡ

 "후후."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라이타."
 자신도 모르게 흘린 웃음에 흐뭇하다는 듯한 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태워주는 차 뒷자리에서 집으로 향하던 라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거든요."
 "그래, 그거 잘 됐네."
 아버지는 그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입장에서 '그 친구' 는 이사를 가는 라이타를 유일하게 찾아왔던 좋은 친구 정도였으니까. 아직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가게 하지 않을 거지만. 라이타는 아버지의 그런 생각을 꿰뚫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다래 혼자 부른 것은 결코 허투루 한 일이 아니었다.
 "나다래..."
 라이타는,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지난 10년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되뇌었던 이름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치 주문을 걸듯이.
 우연이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전학 온 학교와 반에 그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부터, 라이타는 반드시 어릴 때 살던 마을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곳이 익숙하다는 핑계도 핑계였지만, 물론 목적은 하나였다.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알아보며, 그가 어느 학교 어느 반인지를 미리 파악하고.
 자연스럽달까, 노력 끝에 편입해 하필이면 그 반으로 들어가도록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재회한 순간 느낀 감정과 눈물도 계획되어 있었다. 물론, 만난 순간 그런 계획을 떠올릴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치 자연의 법칙이라는 듯 흘러나왔지만. 왜냐하면 그 감정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마하니 아직도 그 여자가 있을 줄이야. 그건 조금 에상 외였다. 뭐, 그때도 그랬듯 쉽게 포기하거나 떨어질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10년이 지난 아직도 붙어있다니. 게다가 이미지도 확 바꿔서는. 이쪽이라고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 것도 아니긴 하지만.
 뭐, 이쪽도 저쪽도 서로 선전포고도 했다.
 반갑게 재회하는 상황이었지만, 라이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ㅡ유하 언니, 앞으로 여기서 쭉 같이 살 거야!"
 해석하자면, '그때는 몰라도 앞으로는 너뿐만이 아니라 나도 여기서 쭉 같이 지내니까 긴장 타시지?'
 그리고 그 말에 유하도 대답했다.
 "ㅡ10년이나 여기 업섰으니까 많이 바뀌었겠지만,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자."
 해석하자면, '그래봤자 나는 10년이나 곁에 있었거든? 또 그때처럼 한 판 해도 상관 없는데?'
 다래의 걱정에 화목하게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았지만, 서로의 눈빛을 서로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도 그랬으니까.
 다래는 아마 영역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오해하고 있겠지만, 유하와 라이타의 대결은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하고, 그렇기에 절대 공존할 수 없으며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인 탓이었다.
 말하자면, '사랑싸움' 이었다.
 나랑 같이 노는 편이 친구도 더 많고 놀 곳도 더 많아.
 그러니까 저 애 말고 나랑 같이 놀자.
 나랑 단 둘이 같이 놀자.
 동네를 양분하던 싸움은, 그저 그런 의미.
 뭐, 다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하겠지만. 라이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작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이길 거야.
 그때도 부전패를 당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다래도 다래야. 그렇게 나서면 분명 푹 빠질 줄 알았는데, 그 여자 쪽만을 신경 쓰는 게 빤히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세뇌를 당한 건지.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어릴 때도 그랬고. 그러면서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이나 쓰고. 영악하기는.
 전황은 불리하다. 그것도 알고 있다.
 유하의 말대로 둘 사이에는 10년 동안 이어진 유대가 있다. 기억이 있다. 추억이 있다. 반면 자신의 추억은 10년이나 지난, 빛바랜 사진 같은 것. 거기에 다래는 이미 유하에게 마음이 쏠려 있다. 얌전히 어릴 때의 소꿉친구, 같은 위치에 안주했다가는 명맥한 상하관계에 있는 그 여자에게 손쓸 틈도 없이 당해버린다.
 그러니까 이쪽은 정공법뿐이다. 오로지 공격뿐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돌격할 뿐이다.
 나는 태풍 같은 아이니까.
 몇 번이고 두드리고 흔들어주겠어.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여자야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면서 에둘러 위치를 확보하느라 본인의 마음은 하나도 전하지 못했고, 주위에서 보는 둘의 관계는 그냥 '이웃 누나와 동생' 일 뿐이다. 게다가 유하는 3학년, 수험생. 남아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너무 여유를 부리셨어, 하유하. 그런 미적지근함에 기댈 생각이라면 금방 당해버릴 걸. 라이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번도 다래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자신은 전교에 소문이 자자하다.
 결혼 약속도 돌직구였던 만큼, 공개적으로 던진 만큼 큰 파괴력을 냈다.
 단 하루만에 반쯤 공인 커플 상태. 이것만으로도 커다란 교두보는 확보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옆에서, 정말 부부처럼 지내는 거야. 언제나 진심을 전하고, 다래의 곁에서 구애하는 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고.
 그래도 안 넘어가면, 태풍답게 쓰러트려버리면 된다. 언젠가 다래가 자신에게 붙여준 칭호대로.
 그런 생각을 하며, 라이타는 사랑하는 이의, 오늘 하루 종일 바라봤지만 질리지 않는, 지난 10년간을 보충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랄 지경인 옆얼굴을 떠올리고는 푸근하게 웃었다.
 다시 만나도 다래는 멋졌다.
 귀찮을 수도,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그런 기색도 보였는데, 결국 다래는 자신을 받아줬다.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나를 기억해줬다. 10년간 품어온 이 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아무 편견 없이 바라본다. 품어준다. 그 상냥함이, 친절함이, 언제나 푸근하게 받아주는 점이, 다래의 가장 멋진 점이다. 다른 누구보다 멋진 점. 언제나 그 곁에 있고 싶어지는 점.
 언제나 곁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언제라도 푸근하게 받아줄 것 같은.
 그러니까 그 점을 이용해줄 거야.
 사랑과 전쟁에서는 뭐든 허락되는 법이니까.
 내일은 어떻게 다가갈까.
 다래의 마음을 어떻게 빼앗을까.

  라이타
 그 여자에게ㅡ,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유하

 우연히도, 그 순간.
 두 연적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2017년 3월 20일 월요일

Juvenile Mosaic(쥬브나일 모자이크) - 소꿉친구 누님에게 마음을 품었는데 어느 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서 곤란합니다 (1)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희미한, 안개가 낀 것 같은, 색이 바란 낡은 필름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
 어린 나는 울면서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녀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슬픈, 느낌이었다.
 아쉬운, 안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을 느끼는, 그런 기분이었다. 아, 그랬었구나, 하는 정도의.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그 감각만은 끈적하게 눌어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인가, 소녀는 외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자 신경을 집중했다.
 뭐라고 하는 거야. 내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조금씩, 희미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
 "아, 넵!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나 역시 크게 대꾸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녹아내릴 것처럼 늘어지던 몸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내 대꾸에 선배는 쓴웃음을 지은 채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약한 한심함을 담아서 말했다.
 "정말, 몇 번을 깨워야 일어날 거야? 아무리 월요일이라도 그렇지. 너, 또 밤새면서 게임한 건 아니겠지?"
 "아, 안 했어요."
 물론 거짓말이다. 다가오는 월요일을 저주하며 일요일의 마지막까지 쥐어짜며 게임을 하는 것 외에 학생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게 있단 말인가. 내 대답에 선배는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취조하는 듯한 시선을 슬쩍 피하자 선배는 다시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튼 빨리 일어나서 씻고 나와. 서둘러 먹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모르니까."
 "아, 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스럭거리는 사이, 방문으로 향하던 선배는 어깨 너머로 나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아침이니까 건강한 건 이해하지만, 그럼 팬티 바람으로 자지 말고 뭐라도 입고 자면 어때?"
 "..."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오늘도 건강했다. 좀 노골적일 정도로.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빨개진 채 양 손으로 가리며 외쳤을 때는, 이미 선배는 웃음소리만을 남겨둔 채 방을 빠져나간 뒤였다. 으... 아침부터 이런... 아니,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던 것도 아니잖아... 가리고 있던 양 손으로 뜨거울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을 문질렀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 감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유하 선배는 옆집에 사는, 한 살 연상의 소꿉친구다.
 알고 지낸지는... 10년이 다 되었나. 넘을지도 모르겠다. 거의 유치원 때부터 알았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덕분에 아침 일찍 나가고 우리가 잠든 뒤에야 돌아오시는 일도 잦았다. 어린 우리를 돌보지 못한다는 것에 일을 그만둘까도 고민하셨지만, 다행히 그걸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
 옆집에, 한 살 차이의 딸을 둔 이웃사촌. 부모님은 우리를 자주 그 집에 부탁해 맡겼고, 다행히 이웃집 아주머니도 크게 싫어하시는 기색 없이 우리를 돌봐주셨다. 그리고 그 집의 누나 역시, 우리를 정말 동생처럼 여기며 돌봐줬다.
 뭐, 이 나이가 되도록 돌봐주는 건 어떨까 싶긴 하지만...
 유하 선배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다. 어릴 때는 동네를 주름잡는 골목대장으로 우리를 이끌어줬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이렇게 아침마다 깨우고 아침밥을 해주는 일도 생겼다. 그 덕분에 나랑 동생은 가사실력이 파탄 수준이지만. 뭐랄까, 가끔은 '누나'가 아니라 '엄마' 같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한 살 연상의 엄마라니 뭔가 이상하지만.
 "이제야 일어났어?"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고 거실로 나오자 식탁에서 먼저 아침을 먹고 있던 여동생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연년생인 내 여동생, 나라미다.
 "오빠는 언제가 되어야 철이 들래? 맨날 늦게까지 게임이나 하고, 늦게 일어나고, 성적도 그냥 그렇고, 양말은 맨날 뒤집어놓고. 정말, 유하 언니가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시끄러워. 너나 잘 해."
 "뭐야ㅡ, 사람이 기껏 걱정해주는데."
 자리에 앉으며 적당히 대꾸해주자, 라미는 더욱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여동생은... 하는 말 족족 다른 귀로 흘리며 무시하는 사이, 유하 선배도 자리에 앉았다.
 "그만. 그야 다래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좀 그렇다는 건 뭐예요, 좀 그렇다는 건."
 "다래 너도 그래. 라미가 걱정해주는데 그 태도는 아니잖아?"
 이 집에 내 편은 없는 건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라미는 그대로 수다의 총구를 유하 선배 쪽으로 돌렸다. 물론 주된 내용은 나를 까대는 거지만.
 라미는 친오빠인 나보다 유하 선배를 더 잘 따랐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쭉. 조금 제멋대로인 편인 라미와 그런 라미를 잘 받아주는 어른스러운 유하 선배다보니 조합이 잘 맞긴 하지만, 가운데 낀 입장인 내 입장은 미묘하다. 그래도 어쨌든 친오빠인데. 가끔은 얘가 오빠 취급도 안 하는 것 같다.
 "유하 언니, 물병 좀."
 "그래."
 유하 선배도 유하 선배다. 보다시피 라미에게는 어릴 때처럼 '언니' 하고 불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나에게는 몇 년 전부터 '유하 누나가 아니라 유하 선배라고 불러' 하고 딱 잘라 선포했다. 뭐 그야 어릴 때부터 늘 존댓말을 썼고 그 호칭 하나만 바뀌었으니 큰 차이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다 합께 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늘 그렇듯 다 함께 등굣길에 올랐다. 유하 선배는 3학년 나는 2학년 라미는 1학년 같은 학교니까. 뭐, '다 함께' 라고는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유하 선배와 라미가 앞장서고 나는 그 뒤에서 설렁설렁 뒤따르는 형태에 가깝지만. 둘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아침 등굣길의 인파 덕분에 잘 들리진 않지만. 보나마나 내 흠이나 잡고 있겠지.
 나는 유하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뒤로 올려 묶은 포니테일이 봄바람에 찰랑거리고, 새하얀 다리가 리듬감 있게 교차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다들 입고 있는 평범한 블레이저 너머로 연상다운, 조금 어른스러운 몸매가 옷자락이 살랑거릴 때마다 드러났다 사라진다.
 언제부터일까, 저 등을 보며 따라간 것이. 사실 언제부터라고 할 것도 없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나는 저 등을 보며 따라다녔으니까.
 말괄량이 개구쟁이 골목대장일 때 재미있는 게 있다며 반쯤 강제로 끌고 갔을 때도, 학교에 들어간 뒤로 조신한 숙녀가 되어서 앞장 설 때도, 나는 늘 그 뒤를 따라갔다. 언제나 그 등을 바라봤다. 그것이 존경에서 동경으로, 다시 동경에서 사랑으로 변화한 게 언제인지는,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뭐. 나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야 어느 순간부터 유하 선배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유하 선배 입장에서는 나야 늘 남동생, 꼬맹이, 어쩌면 아들 같은 느낌이겠지. 실제로 언제나 내게 잔소리랄까, 어른으로서 하는 교육 뿐이고.
 "한숨 쉬면 복 달아난다고 그랬어. 날씨도 좋은 아침인데, 더 밝게 가자."
 이런 식으로. 그보다 난 둘이 떠드는 말소리도 안 들리는데 내 한숨소리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어른스러움도 분명 좋긴 하지만, 유하 선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긴 하지만, 역시 나도 남자라서일까, 가끔씩 부담스럽다. 그보다는 사실 주눅이 든다는 쪽에 가깝겠지만.
 "그러고 보니까 오늘, 다래 너희 반에 전학생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선배는 마침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라미 역시 기억났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그랬지. 어떤 사람이래?"
 "야, 와야 알지 그걸 미리 어떻게 알아."
 내가 선생님이냐. 선생님이야 미리 알 수도 있겠지만. 내 대꾸에 라미는 '재미없게' 하고는 혀를 찼다. 하여간 이 싸가지는... 툴툴대는 나를 보며 유하 선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다래는 예쁜 여자애가 전학 오기를 바랄 거 아냐?"
 "딱히 그런 거 아니거든요."
 뭐ㅡ,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기왕이면 남자애보다는 예쁜 여자애면 좋겠긴 하지만. 같이 놀 수 있는 마음이 잘 맞는 녀석이어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아니지. 유하 선배의 말에 떠오르던 망상을 고개를 붕붕 젓는 것으로 지워버렸다. 물론 그 사이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났던 건지 유하 선배와 라미는 다 알겠다는 듯 나를 바라봤지만. 솔직히 라미의 한심하다는 표정보다 유하 선배의 다 이해한다는 눈빛이 더 아팠다. 나는 애써 말을 돌렸다.
 "뭐, 뭐어! 들은 건 있지만요. 듣기로는 어렸을 때는 여기 알았었데요. 그러다 멀리 이사를 갔는데, 다시 돌아오게 됐다고요. 어쩌면 반 애들 중에도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선생님이 이야기 했었어요."
 "그렇구나. 우리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겠네."
 내 말에 라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선배는 생각하듯 허공을 보며 손끝으로 입술을 톡, 톡 하고 건드리며 말했다.
 "음... 하지만 어릴 때 이사 갔던 애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솔직히 아는 사이라고 해도 잘 기억 날 것 같지는 않아."
 그것도 그렇다. 이 동네 터줏대감, 같은 우리 셋이 떠나보낸 애들만 해도 몇 명인지 기억도 안 난다. 몇 년 전에 이사를 갔다면 모를까, '어릴 때' 이사를 갔다고 하면 제대로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어릴 때 친구들이라는 게 대부분 그런 법이니까. 게다가 우리라고 이 동네에 살던 애들 전부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유하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라미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알아? 어릴 때 오빠랑 같이 놀았던 여자애가 예뻐져서 다시 나타날지. 오빠가 좋아하는 만화 보면 그런 이야기 자주 나오잖아."
 "그거야 만화 속 이야기고."
 나는 라미의 헛소리에 그렇게 대꾸했다. 옆 반의 유명한 누구라면 몰라도 나는 그 정도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진 않는다. 그런 만화 같은 일, 현실에 있을까보냐. 뭐, 친한 소꿉친구 누나가 있고 아침밥을 해주며 깨우러 와주는 것도 충분히 만화 같긴 하지만. 만약 내게 만화 같은 일이 정말 벌어진다고 해도, 나의 만화 같은 점은 그걸로도 이미 충분하다.
 무엇보다, 아무리 예쁜 여자애가 전학을 온다고 해도, 나는 그쪽에 신경을 쓸 생각이 없다.
 나는 유하 선배를 좋아한다. 그런 고로 언젠가는 유하 선배와 연인이 되고 싶다.
 하지만 선배가 나를 어린애로 보는 이상, 내가 선배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상, 언제나 선배의 등을 바라보며 뒤를 따르는 이상, 그건 무리겠지. 그 점을 어떻게든 하고 싶긴 하지만, 역시나 어떻게 해야 좀 남자답게 보일지는 알 수가 없다.
 조금 더 혈기왕성했을 무렵, 그러니까 대충 3년 전에는 이것저것 해보기도 했다. TV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벽을 쾅! 치면서 '누나는 내 여자니까' 같은 말도 해봤고, 괜스레 폼을 잡기도 했고, 뭐 이것저것 해봤다. 결과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물론 지금은 떠올리면 당장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뻥뻥 걷어차고 싶어지는 기억들이지만.
 지금은 무리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유하 선배와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유하 선배가 더 이상 단순히 뭐든 챙겨줘야 하는 동생으로 볼 수 없게 되어, 멋들어지는 고백을 하고 말 거다.
 하지만 뭐,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런 식으로 유하 선배의 등을 보며 따라가는 평화로운,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게 바랬다.

 그날, 아침 조회시간.
 "아..."
 나는 운명과, 재회했다.
 교탁 옆, 담임 선생님과 나란히 선 전학생.
 밤하늘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반짝이는 채 곱실거리며 내려오는 새카만 머리카락. 연한 커피색의 윤기 있는 피부. 그 색과 잘 어울리는 반짝이는 것 같은 갈색 눈동자. 붙임성 좋게, 환하게 짓고 있던 미소. 하지만 그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울음이 섞여있었다.
 에상치 못한, 하지만 너무나 보고 싶었던 상대를 만난 것 같은, 감격의 눈물이.
 "다래, 야...?"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르면서, 하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리며, 전학생은 내게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행동에, 선생님을 포함해 반 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예상 외의 상황일 테니까. 오늘 전학 온 애가 아무리 여기 살았다고 해도 정말 아는 사람이 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텐데, 저런 표정까지 짓고 있다면. 그리고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다. 이런 만남은 예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라이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던 그립고 익숙한 이름을, 말했다.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문뜩, 꿨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오늘 아침의 꿈을 떠올렸다.
 그 꿈속에서, 멀어지던 소녀는 울면서 내게 뭔가를 외치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리던 그 말을 그때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현실이 그 기억을 되살리게 해줬다.
 작은 트럭 창문 밖으로 몸을 내놓은 채,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며 외치던 그 말ㅡ
 "나, 잊지 마!"
 "...약속, 지켜줬어."
 그 말에, 기억과 현실이 이어졌다.
 어느새 전학생의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정말, 기억해줬어."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사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채 세 걸음도 남지 않았을 때.
 "ㅡ다래야!"
 그녀는 힘차게 외치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양 팔을 벌리며, 나를 안는 그녀를 떼어놓지 못했다. 반 아이들의 탄성은 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다래야...!"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눈물에 내 가슴팍이 젖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차마 그녀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내 가슴에 문지르는 그녀의 윤기 있는 곱슬머리에서는 향긋한 들꽃 향기가 났다.
 잠시 주저했지만, 결국 나는 벌리고 있던 양 팔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내 볼을 대며,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려주며,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푸근한 목소리로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말을 나는 하고 있었다.
 "...예뻐졌네, 라이타."
 "응...! 응...!"
 라이타는 훌쩍이며, 웃으며, 여전히 내 가슴에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라이타.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는 그런 이름의 소녀가 살았다.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인. 그녀의 아버지가 사업을 하러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어머니를 만났고, 그대로 결혼해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국적은 물론 한국. 한국어가 모국어고, 젓가락질은 물론 한국 문화에도 익숙하고,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유행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뛰어 놀기를 좋아하는 활기찬 여자애였다.
 하지만, 그런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연한 커피 빛의 피부. 눈에 띄게 이질적인 이목구비. 그것만으로도 라이타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의식도 못한 채 차별 어린 단어로 라이타를 불렀고, 당연히 라이타를 외국인으로 취급했다.
 그런 어른들의 편견을 그대로 이어받았는지, 아이들도 라이타를 멀리하고 차별했다. 놀이에서 제외시키고, 무시했으며, 놀려댔다. 선생님들은 그런 따돌림을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가끔 보여주는 선입관과 그런 배려가 오히려 라이타를 더 멀게 만들었다.
 보통 그런 상황이라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울며 하루하루를 보냈겠지.
 하지만 라이타는 보통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글쎄, 비유를 하자면 라이타는 태풍 같은 여자애였다. 말 그대로, 열대 저기압 소녀.
 라이타는 그 모든 차별과 따돌림에 단호히 저항했다. 이겨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보든 것을 부숴버렸다는 뜻이다.
 라이타를 놀리고 멀쩡한 애들은 하나도 없었다. 코피 정도로 끝나면 다행히고, 선명한 이빨자국, 듬성해진 머리카락, 뼈가 부러져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간 애들도 많았다.
 책상이 날아다니고, 의자가 춤을 췄다. 라이타는 절대 불의와 억압을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아예 라이타의 아버지가 대놓고 그녀에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널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거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책임은 전부 이 아빠가 진다." 라이타는 아버지의 말을 정확하게 이행했다.
 그렇다고 라이타가 폭력적이거나 애들을 괴롭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라이타는 정의의 수호자에 가까웠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보면 라이타는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미쳐 날뛰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하나씩 라이타를 따르기 시작했다.
 마치 영웅을 따르는 것처럼, 그들은 라이타를 중심으로 모여 놀고 즐기며 파벌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미 동네에는 골목대장이 있었다. 하유라는, 또다른 영웅이.
 한 하늘 아래에 두 대장이 있을 수 없고, 두 영웅이 있을 수는 없는 법.
 당연한 수순으로, 동네는 양분되었다. 유라 선배... 당시에는 유라 누나의 일당. 그리고 라이타의 일당.
 여기에서 내 사정이 좀 묘해진다.
 일단, 기본적으로 나는 유라 누나의 파벌 소속이었다. 그것도 그냥 일원이 아니라, 이제 와서 이런 말하면 부끄럽지만, 말하자면 서열 2위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3위는 라미. 우리는 유라 누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동생이며 심복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나는 라이타 일당의 서열 2위이기도 했다. 라이타가 이사왔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나는 처음에는 라이타의 유일한 친구였고, 그 후에는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지금이야 허여멀건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당시 나는 꼬맹이었고, TV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동경하고 있었다. 당연히 남을 따돌리는 건 옳지 않다고 믿었고, 무엇보다 라이타는 여자애였다. 그야 뭐... 아무리 그래도 반 아이들 전부와 싸우면서 '니들 그만둬!' 하고 외칠 정도로 꿈과 용기가 넘쳤던 건 아니었으니 내가 라이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짝꿍으로서 라이타의 짐정리를 도와주거나, 방과 후에 같이 문방구에 간다든가, 뭐 그 정도였지만.
 그런 사소한 일도, 라이타는 너무나도 고마워해줬다.
 라이타는 틈만 나면 나에게 '좋아해!' 라고 말했고, 뽀뽀도 꽤 당했고, '결혼하자!' 는 말도 제법 들었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내 입장은 곤란했던 거다. 유하 누나와 라이타의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영역(문방구라든가, 놀이터라든가)을 두고 하는 신경전은 이어지는 상황. 양쪽 파벌 모두의 넘버 2였던 나는 언제나 '어느 쪽이냐, 확실하게 해라!' 하는 압박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벌어졌다.
 결국 갈등이 끝에 다다라 충돌하기 직전, 라이타는 갑작스럽게 인도네시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전 성과가 있었던 라이타의 아버지가 다시 출국해야 했고, 라이타의 아버지는 가족만 두고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라이타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게 이별이 싫어서였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라이타는 유일하게 내게만 그 사실을 알려줬다. 커다란 이삿짐 트럭을 뒤에 달고, 아버지가 모는 작은 트럭 뒷자리에 앉은 라이타는 울며 창밖으로 몸을 내민 채 내게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손을 흔들었다.
 라이타의 일당들은 해체되었고, 자연스럽고 슬그머니 유하 누나의 일당으로 흡수되었다.
 끝까지 어느 쪽인지 확실히 하지 않았던 나는 미묘한 따돌림을 한동안 당해야 했으나, 보스였던 유하 누나가 있다보니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우리는 나이를 먹었고, 무엇보다 유하 누나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지며 모든 일은 추억이 되었다.
 라이타를 기억하는 애들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라이타는 다시 나타났다.
 "그럼, 약속 지켜주는 거지...?"
 내 품에 안긴 채, 라이타는 나를 올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고요한 반 안 분위기 덕분에, 그 말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아마 이 드라마 같은 상황에 모두 구경만 하는 거겠지. 담임 선생님도 팔짱 끼고 지켜보실 줄은 몰랐지만.
 "무슨 약속, 말이야?"
 나는 라이타를 내려보며 물었다. 잊지 말아달라고 한 건 기억나지만, 그 외에는 기억이 안 난다. 10년 전, 그것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인데 기억할 리가 없잖아. 내 질문에 라이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긴,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난 진심이었는걸."
 그렇게 말하고, 라이타는 행동에 나섰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놀라서도 있었지만,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으니까.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듯.
 부드러웠다. 그리고 따뜻했고, 촉촉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반 아이들이 꺅, 하고 내지르는 소리만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음..."
 살며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가까이 했던 입술을 떼며 라이타는 배시시 웃었다.
 "결혼하자고 약속했잖아, 다래야!"
 그 말에,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엉?" 하고 되묻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힘이 풀린 내 팔을 열고 한 걸음 새침하게 물러서고는, 손을 뒤로 모은 채 라이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여보!"
 "..."
 여전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단 두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운명이다. 그 꿈처럼.
 그리고.

 여전히, 라이타는 태풍 같은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