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26일 토요일

은하의 선물

 "여기는 폭스트롯 파이브. 육안으로 확인되었다."
 전초기지에서의 통신에, 두 사람은 긴 대기를 끝마치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전초기지에서 보낸, 빈 우주공간을 비추는 영상에는 희미한 점 하나가 확실히 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헤드셋 마이크를 입가로 옮기며 말했다.
 "여기는 컨트롤 센터. 확인했다. 대응에 나서라."
 "여기는 에코 식스. 수신했다. 미사일 준비중."
 "여기는 줄루 투. 2차 요격 준비중."
 그 말에 맞춰 몇 개의 기지에서 차례대로 무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터치 스크린을 조작하며 말했다.
 "휴스턴, 여기는 컨트롤 센터. 예상되는 코스를 지금 송신하겠다."
 "여기는 휴스턴. 지금 수신중이다. 예정된 메뉴얼대로 대응하라."
 "알겠다 휴스턴."
 지난 수 시간 동안의 대기가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바쁘게 각자 맡은 바 임무를 계속했다. 각 전초기지와 요격기지간의 통신은 계속됐다.
 "여기는 에코 식스. 목표가 사정거리 내에 돌입했다."
 "여기는 컨트롤 센터. 요격 개시를 승인한다."
 "알겠다 컨트롤 센터. 미사일 발사."
 수신과 동시에, 에코 식스 시점의 모니터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이 보였다. 미사일은 노즐에서 밝은 불꽃을 발하며 화면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 사이에도 통신과 준비는 계속되었다.
 "여기는 폭스트롯 파이브. 목표가 요격지점을 통과했다."
 "카피, 폭스트롯 파이브. 에코 식스가 알린다. 미사일 목표 지점까지 ETA 3H."
 "잠깐은 쉴 시간이 생겼군."
 "그동안 쉴 수 있으면 쉬어봐."
 무전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짧은 잡담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 정확히 세 시간하고도 2분이 지났다. 폭스트롯 파이브 전초기지 시점의 모니터에 밝은 광원이 생겼다 사라졌다.
 "여기는 폭스트롯 파이브. 미사일 착탄, 1차 요격 성공."
 "수신했다. 여기는 컨트롤 센터. 현재 2차 요격 지점과 목표를 확인하고 있다. 각 기지는 대기하라."
 남자의 대답과 동시에 여자는 터치 스크린 위의 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휴스턴에서 전해지는 정보와 컨트롤 센터에서 종합하는 각종 데이터를 토대로, 파편 중 무시해도 좋은 것과 2차 요격이 필요한 것을 골라낸다. 그리고 2차가 끝나고 필요하다면 3차가, 4차가 더욱 필요할 것이다. 남자는 헤드셋 마이크를 살짝 밀어내고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는 어때?"
 "말 걸지 마. 지금 바쁘니까."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여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여자는 마이크를 향해 말했다.
 "여기는 컨트롤 센터. 줄루 투, 호텔 에잇, 킬로 원은 각자 하달된 목표를 향해 2차 요격을 개시하라."
 "카피. 줄루 투, 미사일 발사한다."
 "여기는 호텔 에잇. 지금 발사한다."
 "킬로 원, 지금 발사했다."
 "다들 요격시간도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남자는 여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줄루 투, ETA 4H."
 "호텔 에잇, 2H 30min."
 "킬로 원, 3 and Half."
 "어... 미안하다. 딱히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
 줄줄이 들려온 응답에 남자는 머쓱하다는 듯 마이크를 향해 말했고, 여자는 그걸 보며 키득거렸다. 지루한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2차 요격 과정은 1차 요격보다는 두 사람 모두 할 일에 여유가 생겼다. 2시간 30분 후, 첫 번째 미사일이 착탄했다. 3차 요격은 필요 없어보였다. 다시 한 시간 조금 못 되어 두 번째 미사일이 요격했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삼십 분 정도 흘러 세 번째 미사일이 폭발했다.
 "이번에도 운이 좋나?"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네. 지구로 향하는 게 좀 있지만, 대기권에 전부 타버릴 거야. 운이 좋다면 지상의 누가 호두알만한 운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흠,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잖아?"
 "그렇다고 저만한 운석에 쏘기에는 핵미사일이 아까워. 무시해도 좋은 사이즈야. 메뉴얼에도 그렇다고 되어있다고."
 "좋아. 그렇다면야."
 남자는 여자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여기는 컨트롤 센터. 전 표적 요격 확인. 모든 기지는 통상 대비 태세로 돌아가라.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다 컨트롤 센터."
 줄줄이 이어지는 인사와 함께 모든 교신이 끊겼다. 남자는 이제야 일에서 해방됐다는 느낌에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여자는 결린 뒷목에 손을 대고 목을 꺾었다.
 "이걸로 오늘의 업무도 끝이군."
 "그래. 이제 좀 쉴 수 있겠어."
 둘은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조금씩 떠올랐다. 둘은 의자를 걷어차며 방을 지나 통로를 향했다. 무중력 공간에서의 이동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둘은 식당으로 쓰이는 방으로 들어가 보관함을 열었다. 남자는 밀봉 포장된 식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뭘로 할래?"
 "파스타로."
 "그럼 나도 그럴로 할까."
 "얼마 안 남았잖아. 다른 거 먹어. 좋아하는 거라고."
 "그 불어터진 냉동 파스타를 왜 좋아하는 거야?"
 "그러는 넌 왜 그걸 먹겠다고 하는 건데?"
 "그냥 끌렸어."
 "됐네요."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파스타 포장을 채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미트볼 포장을 꺼냈다. 둘은 테이블에 앉아 벨트를 채웠다. 포장을 뜯고 식사를 꺼냈다. 무중력 공간에서 부스러기가 튀지 않도록 끈적거리는 소스 범벅이 된 식사가 공중에 둥둥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신기해."
 "뭐가 말이야?"
 목을 빼 날아가는 미트볼을 먹으며 남자는 물었다. 여자는 포크로 파스타를 입으로 옮겨 우물거리며 말했다.
 "운석들 말이야."
 "이제 와서 뭐가 신기하다고."
 "아니, 좀 들어봐."
 여자는 포크를 휘두르며 말했다. 그 탓에 포크 끝에서 소스가 조금 튀었다. 방울지며 공중을 떠다니는 소스를 남자는 받아냈다.
 "아, 미안."
 "괜찮아. 그래서 뭘 들어보라고?"
 어차피 식사를 하며 할 일은 딱히 없다. 남자는 이야기 해보라는 듯 티슈로 손을 닦으며 재촉했다.
 "저 운석들은 매일같이 지구를 향하잖아? 벌써 30년이나."
 "뭐야, 역사 강의부터 시작하는 거야?"
 "듣는다고 했잖아."
 "계속하세요, 선생님."
 "30년 전에 처음 발견 됐을 때는 큰 일이 났었지. 지구에 정면으로 운석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전 세계는 놀랐고, 학자들과 군사 관련자들이 잔뜩 모여서 미사일을 쐈어. 요격은 다행히 성공리에 끝났지."
 여자의 말에 남자는 허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열 살 때였지. 아직도 그때가 기억나. 지구가 망한다고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은 씁쓸해했고, 이게 예언에 나온 멸망이라던 사람들은 자기들 기도 덕분에 멸망이 빗겨나갔다고 정신승리를 했고, 도대체 지구가 통째로 망한다고 하는 판국인데 어디서 뭘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재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 아, 맞다. 옆집에 살던 녀석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총각 딱지는 떼고 싶다고 맞은 편 집의 여자애랑 잤지. 제기랄, 나도 그랬어야 하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중에 멸망하지 않은 뒤에 얼마나 자랑하던지."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건 아니거든?"
 "미안. 딱히 성희롱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보다 이 정도 이야기에 흥분할 나이는 지났잖아?"
 "이야기가 끊긴 것에 짜증내는 거야. 아무튼, 네 말대로 사람들은 각자 방식대로 기뻐했고. 그런데 운석이 또 날아왔지."
 "기뻐하던 인간들은 슬퍼했고, 슬퍼하던 인간들은 기뻐했지."
 "또 요격했고, 또 성공했고, 또 날아왔지. 그리고 또, 또, 또."
 "30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연적으로 운석이 이렇게 날아올 리는 없으니까, 분명 외계에서 온 공격이라고 학자들이 발표했고."
 "사실 그렇잖아. 매일 밤마다 어떤 놈이 창문에 돌을 던지면 그건 내게 원한이 있는 어떤 빌어먹을 놈이 하는 짓이라고."
 "그래, 그 점은 동의해. 아무튼 그래서 인류는 외계에서의 공격에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고."
 "감동적이지. 물론 그냥 하는 말이야. 뭐, 한 번이라도 요격이 실패하면 전 인류가 멸망한다는데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 강대국들도 그 부담을 자기들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고 싶지도 않았고."
 "국경이나 인종 같은 문제도 서서히 사라졌지. 뭐, 완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흑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모든 흑인은 인종 이야기가 나오면 이렇게 반응해줘야 하는 법이거든."
 "웃기시네. 네가 지금 하는 그거야말로 인종 차별이야."
 "빈곤 문제도 많이 나아졌지. 전 인류가 하나로 뭉친 김에 이런 것도 해결하자고 나섰으니까."
 "말 돌리기는."
 "이렇게 우주 궤도에 기지를 만들어서 핵미사일도 보관하고 있고, 요격도 하고 있고."
 "지구에서만 쏘아올리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15년 전에 그 사건도 있었고."
 "희생자들에게 명복을."
 "덕분에 지금은 지구에 핵미사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강대국마다 수만발씩 쌓아놨던 걸 30년 동안 매일 쏴댔으니까. 계속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전부 궤도로 올려지고 있고."
 "이제는 달 기지도 있고. 지구가 멸망할 때를 대비해서 화성 기지도 건설중이고, 아예 다른 지구형 행성으로 이주할 계획도 있고.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운석을 쏴대는지 알아보겠다면서 우리의 휴스턴에서는 30년 동안 쌓인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궤도를 계산하고 있지. 그 때 처들어가거나, 아니면 운석 공격만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거라면서 우주군도 만들고 있지. 함선도 개발중이고. 그 날이 오면 화성에서 우주전함들이 출동해서는 다시는 우리 집 창문에 돌맹이를 던지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지. 말 그대로 '화성침공' 아냐."
 "그 부분 말인데, 화성 쪽은 완전히 민간 부분으로만 개발한다던데?"
 "아, 그래? 그건 몰랐네."
 남자는 딱히 놀란 투도 없이 마지막 미트볼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뭐가?"
 "신기하다면서. 뭐가 신기한 건지 모르겠어서."
 "아, 맞아. 그 이야기 중이었지."
 여자는 식량팩에 포함된 주스팩을 빨아마시고는 말했다.
 "신기하지 않아?"
 "그러니까 뭐가."
 "30년 전만 해도 국경도 있었고, 늘 전쟁이 있었고, 기아와 빈곤이 있었고, 차별 같은 문제도 있었어. 우린 모두 같은 인간이라고 말만 했을 뿐이지, 정말 그렇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잖아. 적어도 같은 지구라는 행성에 산다는 사실조차도."
 "제법 괜찮은 연설이야."
 "그런데 운석이 날아오기 시작하면서, 우린 그걸 깨달았어. 말 그대로 전 인류가 하나가 되어 뭉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그래서?"
 "어쩌면 운석은 일종의 계시나 유도 아닐까? 적어도 선물이거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그랬었잖아. 누군가 우리 집 창문에다 계속 돌을 던져대고 있다고. 아무리 콩가루 집안이라도 그런 일이 계속되면 그 어떤 놈을 잡아서 족치기 위해서 힘을 모으지 않겠어? 게다가 하는 일이 돌을 던지는 게 아니라 불을 질러대는 건데. 저 운석 중 하나라도 박으면 정말 지구가 멸망할 테니까 정말 불지르는 거네."
 "그래서 운석에게 감사라도 하자는 거야? 하나라도 떨어지면 지구가 통째로 박살날텐데? 아니면 운석을 보내는 놈들에게?"
 "글쎄. 적어도 은하 저편에서 매일 같이 지구로, 그것도 비슷한 사이즈의 운석만을 정확히 보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기술력의 소유자라는 뜻 아닐까?  그런 존재가 뭐하러 면식도 없는 지구를 박살내겠다고 그러고 있겠어?"
 "인류의 기원은 사실 외계인이었다! 같은 소리까지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뭐, 인류의 진화를 도와주고 발전을 도와주는 외계인이 있다든가. 그런 건 너무 낡았잖아. 옛날 SF에서나 나올법 하다고."
 "혹시나 싶어서 말하자면, 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 좋아해."
 "맙소사. 60년 전 영화를 좋아하다니."
 "뭐,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이유를 생각해보고 그 결과를 따져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여자는 다 먹은 식량팩을 접으며 말했다.
 "왜, 누가 운석을 우리에게 쏘아보내는지랑, 그 결과 인류가 하나로 뭉친 거 말이야."
 "흠. 인류를 멸망시킬 위기가 인류를 뭉치게 할 기회가 됐다, 라."
 팔짱을 끼며 한 애매한 남자의 대답을 무시한 채, 여자는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 배출구에 식량팩을 넣어 사출한 뒤 말했다.
 "그럼 나 먼저 샤워하고 잘게. 교대 시간에 깨워줘."
 "그래."
 여자는 샤워 부스로 들어가 분사되는 물로 간단한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수면실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묶고는 잠들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교대 시간이 되어 남자가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와 교대하고 상황실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고, 남자가 다시 상황실에 도착했다. 여자는 통로를 지나 오는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늦었잖아."
 "어차피 2시간 남았잖아. 그 때까지는 앉아서 대기하는 게 일인데, 조금 더 잘 수도 있지."
 "아."
 여자는 남자의 투덜거림에 자신의 손목시계와 모니터를 가리켰다. 남자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이런."
 "교대까지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하게?"
 남자는 여자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트를 채우고 헤드셋을 머리에 꼈다.
 "어제 네가 했던 말 있잖아."
 "뭐 말이야? 아, 운석이 왜 날아오는지랑 그게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줬는지?"
 "그래. 네가 잔 다음 나름대로 생각해봤거든."
 "그거 흥미롭네. 네 결론은 어때?"
 자신을 돌아보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의지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됐든지 우주에서 6개월씩 교대임무를 맡게 한 놈들에게 감사할 수는 없어."
 "동감이야."
 피식 웃으며 여자는 끄덕였다.
 "여기는 폭스트롯 파이브. 육안으로 확인되었다."
  전초기지에서의 통신에, 두 사람은 긴 대기를 끝마치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Broken Flower - (5)

 어른으로 살다보면, 가끔씩 엄청나게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날도 있는 법이다.
 책상 위에 놓인 반쯤 빈 위스키 병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내 행동을 정당화 시켜주리라 믿으며, 그리고 내 감정을 억눌러줄 거라고 믿으며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독한 알콜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 안과 목구멍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위스키의 향과 맛을 즐겼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가끔씩, 어쩌다 내가 군인이 되었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특별히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가끔씩 사람은 뒤를,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돌아보게 되어있는 법이니까. 그저 그 뿐이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전쟁이 났고, 국가는 싸울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적절한 나이에 있는 조금 소심한 대학생을 국가는 놓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고 납득했고,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나는 납득했다. 그렇게 나는 군인이 되었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조금 달랐다. 이전부터 그녀는 군인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시간이 꽤 지나고 그녀와 '전우' 가 되었을 때, 나는 왜 그녀가 부사관이나 장교로 지원하지 않았는지를 물었었다. 그녀는 자신은 앞에서 구르는 일을 좋아하지 뭔가를 지도하고 지휘하는 것에는 재능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지도'와 '지휘'에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던 나는 그 대답을 납득하지는 않았지만, 인정했다.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었고.
 그녀는 내 선임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악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천사에서 여신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날 전장을 헤치고, 서로의 등을 지켜주고, 맡기고, 함께 싸우는 사이에 나는 그녀와 편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새 우리는 말을 놓고 지내게 되었다. 동갑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장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였기 때문인지 우리는 다른 부대원들보다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가 부대의 여신이자 수호신,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질투할지언정 미워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이 좋았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했다. 그녀 역시 그들을 좋아했다. 그들이 사라질 때마다 슬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견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한 차례의 작전을 끝내고, 재보충과 휴식을 위해 후방지역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전방의 부대에서 결원을 급히 보충해야했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상 베테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우리 중대에서도 그 인원이 보충되기로 했고, 한 명이 파견되기로 했다. 중대장은 자원자를 받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인원은 그녀 아니면 나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 쯤에는 나 역시 한 명의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중대장은 그녀, 아니면 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고민했다. 다른 누군가가 나선다고 해도 중대장은 아마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전쟁으로 나가는 것을 원하는 인원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꺼리고 있었다. 손발이 맞는, 믿는 전우의 곁이 아니라 낯선 이들 사이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결국 나는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그녀보다는 내가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늘 그녀가 말하듯 '풋내나는 애송이'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녀가 위험한 곳에 가는 것보다는 내가 가는 편이 좋았다.
 그녀는 나만큼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중대장에게 나도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건의했다. 인원이 모자라서, 격전지라서 보충이 필요한 거라면 한 명쯤 더 가도 되지 않겠냐고. 중대장은 이미 TO는 가득 찼고, 무엇보다 중대의 핵심 인원 둘이 전부 가버리면 앞으로 부대가 어찌 될 지 모른다고 나를 말렸다. 나는 재차 건의하려 했지만 그녀는 나를 말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면서. 나는 납득했다.
 빌어먹을 '데드 오어 얼라이브' 자식. 진즉에 프래깅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틀렸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는데는 5년이 걸렸다. 돌아온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술 마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연 채, 그녀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물론 무릎으로 기듯이 낮은 곳에서. 실제로 기고 있었지만. 문 손잡이는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돌리는 대신 내려서 여는 방식으로 진즉에 바꾼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혼자 마시다니, 치사하네. 예전에는 전투식량조차 나눠먹던 사이였는데."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무릎으로 걸어 버둥거리며 내 맞은 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긴 왼팔은 탁자에, 짧은 오른팔은 편하게 늘어트렸다. 마치 바에 앉은 것처럼.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놀리는 것 같은, 장난치는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왼팔로 탁자를 두어번 툭툭 치고는 말했다.
 "바텐더, 여기도 위스키 한 잔."
 나는 그 이상 눈싸움도 말다툼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빈 잔을 가져와 호박색 액체를 따랐다. 그녀의 눈과 비슷한 색이었다. 이쪽은 반짝이는 대신, 다른 쪽은 광채조차 없는 것이 차이였지만. 그녀에게 잔을 밀자,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먹여주지 않는 거야?"
 다툼, 혹은 투닥거림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내밀고 입술을 벌렸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술을 부었다. 멈췄다. 꼴깍,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후우' 하고는 숨을 내뱉었다.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웃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그래."
 "한 모금 더."
 그녀의 말에 나는 따랐다. 이 상황임에도 그녀의 웃음이 좋았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술을 좋아했다. 전쟁 통에서도 살아돌아오면 몇 번이나 토할 정도로 마시고는 했다. 그게 그녀 나름대로의 살아있다는 실감이라는 걸 나는 배웠었다. 그리고 잊어버리고 살았다. 어쩌면 함께 지내는 사이 그녀에게 몇 번은 술을 권했어도 됐을지 모른다. 늦은 아쉬움이 따라왔다.
 나는 잔을 다시 비웠다. 그녀의 잔을 마저 비우게 했다. 술을 따랐다. 그녀의 잔에도 따랐다.
 말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왜 그랬어."
 "뭐가."
 그녀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일그러진, 비웃는 것 같은 미소. 나는 예전에 가끔씩 그녀의 웃음을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오래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그 생각을 떠올리려고 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글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왼팔로 술잔을 톡톡, 하고 두드렸다. 나는 술을 먹여줬다. 마셨다.
 "그때, 산책 할 때 말이야."
 얼마 전의 일이었다.
 2박 3일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 그녀는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마 그건 내 팔을 베고 잠든 그녀를 보며 가졌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심 쯤, 시간을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눈을 뜨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코가 맞닿을 거리에 있는 것에, 그녀가 약한 웃음을 지으면서 "안녕. 잘 잤어?"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꿈만 같았으니까. 내가 오랫동안 꾸던 꿈이었으니까.
 그녀는 조금 말수가 많아진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그 여행에, 휴가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를 신경 쓰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분명히 나는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꺼리고 있었다.
 바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를 늘 혼자 내버려둘 정도로 바빴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없는 내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변한 모습을 인식하게 되니까. 외면 뿐만 아니라 내면도. 무엇보다 사지를 잃은 그녀와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는 게 괴로웠다. 슬픈 것보다는 괴로운 것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점을 반성했다. 그러면 안 되었다.
 군인으로서의 일을 딱히 대단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도 끝났고, 5년이나 하다보면 어떤 사명감 같은 것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직업' 이라는 생각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일상의, 여가의 비중을 늘렸다.
 일찍 퇴근해서 그녀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 TV를 봤다.
 그녀를 위해 책장을 넘겨줬다.
 간지러워 하는 그녀의 등을 긁어줬다.
 전쟁 전의 이야기를 그녀와 나눴다.
 그 사이 내게 일어난 일들을 그녀에게 들려줬다.
 조금 힘을 내서 그녀가 좋아하던 먹거리로 저녁 식탁을 채웠다.
 같이 음악을 들었다.
 그녀가 가끔씩 웃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가끔씩 내 팔을 베고 잠드는 것이 좋았다.
 가끔, 여전히 그녀는 환지통에 시달리며 폭발이 일어나던 그 전투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바로 옆에서 깨어난 그녀를 달래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녀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히스테리를 부르고 자신을 안아줄 것을 요구했지만, 괜찮았다. 그녀의 이어지는 유혹도 괜찮았다. 조금씩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좋았다.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너무 방심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회복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산책을 가자."
 내 말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나는 그저 내 판단에 만족을 느꼈을 뿐이었다.
 일요일 오후, 나는 그녀를 태운 휠체어를 끌고 거리로 나왔다.
 햇볕이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가로수의 나뭇가지가 노래하고 있었다. 길가의 차들이 지나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와 그녀를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조금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거리의 가게들을 바라보면서 가끔씩 내게 평소 들리는 가게라든가, 그녀와 함께 하기 전 있었던 일들을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그 불안이 그저 내 신경증이라고 생각했다. 뿌듯함까지 느꼈다. 그녀의 상태가 호전된 것에. 그녀가 내게 마음을 연 것에.
 공원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몇 명인가가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녀 역시 무시했다. 그러던 중 그녀와 만났다.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동네에 사는 노부인이었다. 처음 이 지역으로 이사왔을 때 신세를 진 것도 있어서, 나는 그녀와 적어도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되어있었다. 그녀는 군인인 나를 정중하게 대우했다. 전쟁 중 자신들을 지켜줬다면서. 그녀는 어린 손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것으로 보였다. 아이는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러던 중 그녀를 보고는 멈춰서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쯤에서 나는 눈치 챘어야 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자만심에서 깨어났어야 했다. 그녀가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로 그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다. 멍청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요즘 좀 바빴거든요."
 "그렇군요. 이쪽 분은 누구신가요?"
 그 질문이, 아마 노부인이 내게 말을 건 이유였겠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의 그 반응이 그저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걱정한 것인지, 아니면 어째서 그런 사람이 이런 곳에 있는지를 걱정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녀는 호의로 말했던 걸까, 아니면 경계심으로 말했던 걸까.
 "옛 전우입니다."
 그런 생각도 못 한 채, 나는 그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보다시피 전쟁터에서 팔다리를 잃었죠. 그 뒤로는 역 뒤쪽의 창관 거리의 저 같은 장애인만 모아둔 창관에서 창녀로 일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 취미가 있는 이 녀석이 찾아와서는 저를 구입해서 같이 살고 있죠. 말하자면 저는 이 녀석 전용의 더치와이프라고 해야 할까요. 아, 더치와이프라는 단어를 모르시려나? 그럼 살아있는 오나홀이라는 표현은요? 창관에서 자주 들었거든요. 그럴듯하지 않아요? 팔도 다리도 없는데 구멍은 달려있으니까. 위에 하나 아래에 둘. 아, 이해 못하셨나보네. 요컨대 이 녀석이 주인이고 저는 전용 창녀죠."
 나는 차마 그녀를 말리지도 못했다. 그만 말하라고 주의를 주지도, 입을 막지도 못했다. 그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얼어버린 노부인에게 계속해서 재잘거리듯 말했다.
 "얼마나 자상한 주인님인데요. 제 잘린 팔다리도 매일 같이 관리해주고, 온 몸 구석구석 씻어주고, 잘 때 고통에 신음하면 절 안아줘서 고통을 잊게 만들어주고요. 뭐 가끔씩 창관에서 일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요. 많은 손님이 찾아오셨거든요. 팔다리가 잘린 여자애를 보고 발기하는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고요. 어쩌면 남편 분이나 아들 분도 오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노부인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더욱 강하게 하며 말했다.
 "이 붕대 밑에 있는 거, 보실래요? 손녀 분도 이렇게 될지 어떻게 알아요. 사고는 순식간이거든요. 미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창녀로서 필요한 건 뭐든 다 가르칠 테니까요."
 "닥쳐."
 그쯤에야 겨우 내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노려본 다음, 노부인을 바라봤다. 이 모든 게 그저 삐뚤어진 이 녀석이 하는 말이라고 하기 위해서. 하지만 노부인의 표정은 내가 그런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내뱉으려던 호흡을 다시 가다듬고, 멍하니 질린 머리에서 어떻게든 할 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사이, 그녀는 공원의 아이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외쳤다.
 "저는 언제든지 이 군인 아저씨 집에 있으니까, 안을 사람이 필요하거나 창녀로 전직하고 싶은 사람들은 찾아오세요ㅡ!"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은 채 휠체어를 끌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웅성거림과 욕설이 들려왔다.
 나는 도대체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녀를 방에 데려다주고 내 방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연히 소식은 부대에까지 퍼졌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쌓았던 신뢰는 그 한 순간으로 사라졌다. 부하들은 수군거리고, 일부는 대놓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나를 창관에 끌고 갔던 상관 조차 나를 져버렸다. 군사재판소로 넘겨졌다. 군명예실추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줄은 차마 몰랐다. 현역 장교가 창녀를 구입해서 동거한다는 사실이 들키면 그냥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군복이 벗겨지게 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언론에 흘러나가기 전에 재빨리 처리한 것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그 동안 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으니까.
 내가 했던 모든 것이 착각이었을 뿐이고, 그저 그녀에게 놀아났다는 걸 깨닫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랬던 거야."
 나는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 물어봤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녀는 이번에는 내게 술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잔을 왼팔로 탁자에 엎어버렸다. 위스키가 탁자 전체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걸 입을 대고, 혀로 핥아 마셨다. 입술을 핥으며 나를 바라보는, 조금 얼굴이 빨갛게 변한 그녀의 미소는 일그러졌고, 만족감이 가득했다.
 "군대에 그렇게 미련이 많았어? 그건 의외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딱히 네 천직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왜 그랬어."
 나는 재차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대단한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빈 자리를 채운다는 명분으로 전시임관을 하고, 이후 종전 이후의 혼란 상황에서 군에 남아 5년간 복무해 중대장의 지위까지 올라온 것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이어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애당초 딱히 달리 할 일을 찾지 못해서 계속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몰랐다.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해서 계속하고 있었다는 건, 계속할 수 없게 된 지금은 딱히 할 일이 없다는 뜻이 된다. 당장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남아있는 저금으로 생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연금은 사라졌다. 불명예전역자에게 그런 것은 없으니까. 참전 연금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군적이 말소된 거라면 없겠지. 어느 쪽이든, 내 앞길은 막혔다.
 "네 말을 잊고, 산책에 나가서 그런 거야?"
 나는 물었다. 몇 번이나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다른 사람들을 보고 네가 무슨 기분일지 짐작하지 못해서, 그랬던 거야?"
 그녀는 그저 탁자의 위스키를 핥았다. 흘러내린 술이 바닥을 핥는 그녀의 옷을 더럽혔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잊어버린 건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아마도, 이 집도 팔아야 할 것이다. 이 지역에서 더 살 수는 없으니까. 이미 나는 몇 번이나 대놓고 하는 항의를, 에두른 권유를 들었다. 어느 쪽이든 이곳에서 나가줬으면 한다는 말들이었다. 사람들은 장애인이 같은 동네에 사는 것만으로도 싫어한다. 그 장애인이 창녀에, 주변 사람들을 모욕하는 버릇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런 장애인 창녀를 구입해서 동거하는 변태 성욕자가 곁에 있는 것 역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그리고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새빨개진 얼굴로, 조금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그딴 이유가 아니야."
 "그럼 왜 그런 거야?"
 "내가 죽여버리고 싶은 멀쩡한 사람들 속에, 너는 포함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런 것도 모르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를 동정하고, 그래서 같이 살고, 내가 스스로는 하지 못하는 걸 해주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우월감을 느끼고, 안아주지도 않으면서 안기지도 못하게 하고,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행복하고 즐겁게, 내가 장단을 맞춰주는 것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하고 행복한 곳이라고 믿는 너를, 내가 죽여버리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는 내 반응에 킥킥거리며 웃고는, 무릎을 세워 탁자에 상체를 올렸다. 남은 위스키가 그녀의 옷을 마저 적셨다. 내 코 앞에 자신의 코를 둔 채, 탁자에 걸터 누운 그녀는 일그러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분명 후회할 거라고."
 그 때와는 다르게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틀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분명히 나는 후회했다.
 나는 그녀를 때릴까,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녀의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갈겨버릴까, 탁자에서 굴러 떨어질 그녀를 발길질 하고, 걷어 차고, 짓밟고, 머리채를 끌어올려 후려갈기고, 벽과 탁자에 내팽개치고, 던져버리고, 그 외에 모든 방식으로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애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울먹이면서 공포와 고통에 덜덜 떨며 애원하는 것이 듣고 싶었다.
 "때려도 돼."
 그녀는 말했다. 왼팔로 내 뺨을 찰싹거리며.
 "후려갈겨. 네 마음대로 해. 나는 내 말을 지키거든. 팔려올 때, 네가 창관의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분명 말했잖아? 뭐든 해주고, 뭐든 해도 좋다고. 나는 네 소유물이야. 그것도 널 미워하고, 엿먹일 기회만 노릴 소유물. 마음대로 해. 나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거야. 계속해서 널 상처줄 거고,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겁게 지켜볼 거야. 그리고 그 기회를 내가 가져오려고 노력할 거고."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한쪽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기대에. 일그러진 미소는 더 환해졌다.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살아있는 눈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로 반짝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뻗었다. 그녀는 기대감을 더욱 키웠다.
 나는 조용히 술잔을 잡고, 남은 위스키를 따랐다. 마셨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재미없어."
 그녀는 몸을 꿈틀거렸다. 의자에 무릎을 받치고 걸터 앉더니, 조금 과격한 동작으로 바닥에 내려갔다. 무릎으로 걸으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이 비었네."
 그저 그녀가 들어가고 한참 후, 텅 빈 잔과 텅 빈 병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행주와 쟁여놓은 다른 위스키병을 들고, 행주로 그녀가 흘린 술을 닦고, 병의 마개를 뽑았다. 잔에 따르고 들이켰다.
 그녀는 원래 술버릇이 안 좋았다. 내가 기억하던 그녀의 술버릇은 깔깔 웃으면서 사람을 퍽퍽 두들기는 쪽이었지만.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내 등과 어깨를 퍽퍽 때리면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깔깔거리면서 하고, 시끄럽고 박자도 음정도 안 맞는 콧노래와 가창을 즐겼다. 그대로 춤을 추는 것도 좋아했다. 손뼉을 치면서 탁자 위에 올라가서는 제멋대로의 노래를 제멋대로의 춤과 함께 불렀다. 어쩌면 술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술잔을 마저 기울였다.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술버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새로운 술버릇.
 어른으로 살다보면, 가끔씩 엄청나게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날도 있는 법이다.
 나는 잔을 채우고, 다시 기울였다.
 다음날 일찍 일어날 필요도, 출근할 필요도 없다는 건 제법 좋은 일이었다.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Broken Flower - (4)

 "이게 뭐야?"
 그녀의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사실, 그녀 역시 진지하게 물어본 것은 아니겠지만.
 "휠체어야."
 내 대답에도 그녀는 내 옆에 있는, 바퀴와 손잡이가 달린 그 의자를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조금 더 덧붙일 필요를 느꼈다. 정확히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늘 집 안에만 있는 것 같아서. 여기 오고 두 달 넘게."
 그 말에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그 시선이 다시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아서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설명을 보충했다. 물론, 이번에도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네가 직접 움직일 수 있도록 전동 휠체어로 사고 싶었지만, 그렇게 돈이 많지는 않아서."
 이 부분은 돌려대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실제로 내 예금통장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탄창의 장탄이 줄어들듯.
 5년 동안 받은 봉급의 대부분은 저축하며 살았다. 전쟁 통에 몸에 익은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깃든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덕분에 무엇을 하면서 돈을 써야 할지도 모르게 되어버렸으니까. 내 명의의 집과 자가용을 산 뒤로는 딱히 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구입' 하는데는 돈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큰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막대한 지출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뒤에도 그녀를 '유지' 하는데 역시 많은 돈이 들었다. 붕대값 정도야 처음에는 큰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처가 상처였던 덕분에 빨고 삶는 것으로도 재사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항생제 등의 치료비도 들었다. 아직 그녀를 제대로 된 병원에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은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통장에도, 그녀에게도. 식비나 생활비가 2배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내 말에 특유의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그녀의 환했던 미소보다 이쪽이 그녀의 미소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날 내 의지로는 움직일 수도 없는 휠체어에 태워서는 인형놀이를 하겠다는 거네? 그것도 밖에 자랑까지 해가면서."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그저 평이했다. 딱히 토라지거나 상처받은 건 아니다. 그녀의 말버릇이라는 것도 이제는 이해했으니까.
 "예전에 네가 말했었잖아. 사람이 가끔은 햇볕도 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너는 언제나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이나 읽었으니까."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어쩌면 군대는 그녀에게 천직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움직여야 했으니까. 휴식시간마다 조깅을 하거나 산책을 하려 텐트 밖으로 향하는 그녀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는 좋은 날씨에도 텐트 안에서 책이나 읽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가자고."
 내 말에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건 그녀 나름대로의 항복 표시라는 건, 그때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이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이를 살며시 드러내며 말했다.
 "퇴근길에 사온 정성은 인정하지만, 그보다 근무는 괜찮은 거야? 지난 두 달간 네가 하루도 쉬는 걸 못 봤는데."
 장교는 주말에도 바쁜 법이다. 그녀의 말도 사실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휴가도 받았어. 2박 3일의 짧은 휴가지만."
 "어딜 갈 생각인데?"
 "어딜 가고 싶은데?"
 그녀의 질문에 나는 되받아쳤다. 그녀는 하, 하고 웃고는 말했다.
 "네가 나가자고 했으면서 왜 내게 물어보는 거야?"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게 내 계획이었으니까."
 "나는 가고 싶은 곳 따윈 없어."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휴가 동안 하고 싶은 일은 없어?"
 "네 휴가지 내 휴가가 아니야. 난 할 일이 없거든. 겨우 구입해준 주인님은 전혀 써주지도 않고 방구석에 하루 종일 방치할 뿐이고."
 "그걸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은 건데."
 "어차피 안아주지도 않을 거잖아."
 내 대답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긍정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그녀는 멍청하지 않다. 잠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휠체어를 바라봤다. 나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를 들으며 그저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이 흐르고 그녀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했다.
 "빌어먹을."
 "정 생각이 없다면, 나름대로 생각한 건 있어."
 나는 이번에도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녀는 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불만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는 말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휴양림이 있어. 작지만 호수도 있고, 펜션도 있고. 2박 3일을 예약하려고 했는데."
 "그딴 계획을 세워뒀으면 이딴 촌극은 안 해도 되잖아."
 그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에 따르려고 했지."
 "가고 싶은 곳 따위는 없다고 했잖아!"
 그녀는 히스테리적으로 외쳤다. 방금 들은 그 말을 계획을 짤 때에 알 리가 없다는 걸,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겠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나는 그저 담담히 말했다.
 "그럼 그래도 되겠지?'
 "마음대로 해."
 그녀는 씹어 뱉듯 말했다.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휠체어를 밀고 방을 나섰다.
 늘 그렇듯 밤이 지났다. 아침이 되었다. 평소처럼 나는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역시나 짜증을 냈다.
 "이런 젠장, 휴가 받은 날 정도는 늦게 잘 수 없어?"
 "휴가를 한 순간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일어나."
 우리는 늘 그렇듯 붕대를 가느라 한바탕 씨름했다. 잠시 진정할 시간을 가진 뒤, 나는 어제와 같이 휠체어를 그녀의 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녀는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 찬 눈으로 휠체어를 바라봤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태워줘."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걸터 앉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쪽 팔을 그녀의 무릎 밑에 집어넣어 받치고, 다른 쪽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받쳤다. 그녀는, 당연하지만 무겁지 않았다. 너무 가벼울 정도였다. 정말 인형처럼. 그녀는 발버둥치지 않았다. 내 품 안에 안긴 채 그저 나를 올려볼 뿐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겨, 조심스럽게 그녀를 휠체어에 앉혔다.
 그녀의 옷은 내가 미리 준비해뒀던 외출복이었다.
 "이딴 촌티나는 옷이라니."
 "미안하게 됐네."
 그녀의 한숨 섞인 말에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는 토라진 기색이 담겨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상처 받았으니까. 나름대로 그녀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싶었던 건데 말이지.
 그녀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녀가 이 집에 들어오고, 두 달 조금 더 되는 시간만에.
 내가 사는 곳은, 조금 낡은 아파트다. 간부용으로 제공되는 숙소가 따로 있었지만, 그곳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내 명의로 된 집을 가지고 싶었던 게 제일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유가 어쨌든 감사하고 있다. 간부용 아파트에서 그녀를 데리고 살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그녀가 탄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크게 무겁지는 않았다. 그녀보다는 휠체어의 쪽이 더 무거웠다. 이 낡은 아파트의 유일한 단점은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이다. 군인이 되어 좋은 점은 체력이 붙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내내 그저 나를 올려봤다. 계단을 내려와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 밖은 아침 해가 비추고 있었다.
 아마, 그 순간 처음으로 햇살 아래에서 그녀를 봤을 거다. 기억을 뒤져봤지만 역시 그렇다는 결론이 나왔다.
 창백한 피부. 갈색으로 그을린 상처와 흉터들. 외출복은 일부러 노출이 적은 긴 팔 옷과 청바지로 사왔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기분 탓인지, 햇볕 아래에서 그녀는 더욱 작아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내가 보아온 것보다 더욱.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얇게. 한쪽 뿐인 눈이. 그녀의 표정은 그리 만족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내 기대와는 다르게. 그녀가 조금은 더 기뻐할 줄 알았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라든가, 낮의 광경이라든가, 그런 것에. 감동하는 그녀를 상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불만을 담아둘 뿐이었다. 그녀는 투덜대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빨리 가자고. 그 빌어먹을 곳이 어디든."
 "그래."
 그래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휠체어를 내 자가용 옆에 옮겨 댔다. 그녀는 내 차를 보고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올 때도 생각했지만, 지프라니. 맙소사. 못 본 사이에 뼛속까지 군인이 되셨네."
 "그냥 익숙할 뿐이야. 워낙 자주 탔으니까."
 "왜? 아예 군용 트럭을 사시지? 자주 탄 걸로는 그거에 못 미칠텐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들어올려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그녀는 그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 쪽이나 내가 하는 일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고. 나는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넣고 운전석에 앉았다.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고 클러치를 밟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오른팔을 창가에 걸친 채.
 대화는 없었다. 아침이라 도로는 크게 막히지 않았다. 그녀가 뭘 보고 있는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그리 오래 운전하지 않아 차는 휴양림에 도착했다. 비포장 도로에서 내 낡은 지프는 덜컹거렸다. 그녀가 안전벨트 밑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양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르겠는 이번 휴가 사이의 실수에 나는 한 줄을 더 적어넣었다.
 휴양림은 아름다웠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가지와 잎이 흔들리고, 그 사이로 햇빛이 부서지며 스며나왔다. 시원했다. 나무와 바람이 연주하는 합창이 듣기 좋았다. 그녀가 탄 휠체어를 밀고 펜션으로 향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그저 부서지며 스쳐가는 햇빛에 비쳐 색을 바꿔가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울고 싶을 정도로.
 그저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더, 내가 기대했던 대로 밝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괜찮지?"
 펜션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수 바로 옆에 자리한 2층짜리 펜션. 통나무로 지어진 아득한 저택이었다. 이곳의 분위기에 너무나도 적절히 어울려, 마치 그림이나 사진에 나올 것만 같을 정도로. 제법 비싼 돈을 지불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아쉽게도 그녀는 내 생각에 동의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여기에서 뭘 할 생각인데?"
 "글쎄. 그냥 이런 자연환경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날씨도 좋고, 바람도 선선하고, 경치도 아름답고..."
 "설마하니 이딴 걸 보면서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느니, 그동안 받은 상처를 치료한다느니, 우수에 찬 눈으로 경치를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지?' 같은 소리를 지껄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당장 저 호수에 빠져 뒈져버리길 추천하겠어."
 나는 당장 호수에 빠져 뒈져버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왼팔로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까지 본 동작 중 가장 자연스럽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동작이었다.
 "이래서 책만 읽는 새끼들은 안 돼."
 역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짐을 풀고, 그 동안 그래도 조금의 희망을 담아 그녀의 휠체어를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세워두고,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조리기구가 있는 펜션이란 좋은 법이다.
 어쩌면 그녀를 또다시 방치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놀림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호수 쪽에는 테라스가 있었다. 피크닉 테이블도 있었다. 다시 한 번 나는 비싼 돈을 지불한 가치가 있다고 만족했다. 그 위에 음식을 차리고, 그녀의 휠체어를 몰아갔다.
 "이것 참 대단한 서비스네."
 그녀는 늘 그렇듯 비꼬듯 말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뭘 먹고 싶어?"
 "딱히 먹고 싶은 건 없어."
 "그럼 내가 골라줘도 될까?"
 "멋대로 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호수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호수를.
 처음으로 나는 여기로 그녀를 데려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호수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으니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입만 벌리는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것을 중단하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의 다른 펜션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소리는 움직이더니 호숫가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꼬마애들과 부모의 모습이 보였다.
 "주말이라 놀러왔나보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설명이라도 해주듯이.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그들에게 옮겨진 채였다.
 친한 친구들끼리 가족을 데리고 놀러온 것으로 보였다. 두 쌍의 커플과, 네 명의 꼬마애. 나이는 이제 초등학생이 될 무렵으로 보였다. 두 명의 남자애와 두 명의 여자애는 호숫가에서 물을 뿌리며 즐거워했다. 튀어오른 물방울이 반짝였다. 호수에 파문이 퍼져나갔다. 부부들은 그들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뛰어노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는 다시 식사를 재개하려 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을 계속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무슨 소리야?"
 "저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무슨 관계로 보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 같은 건 담기지 않았다. 가끔씩 꿈을 꿀 때 외에 들은 목소리 중, 가장 그녀의 원래 목소리에 가까웠다.
 어딘지 힘없고, 바람소리에 실려 사라질 것 같다는 점만 빼고.
 "글쎄."
 어렵게 나온 말은 고작 그 정도였다.
 "사고를 당한 여자와 그 남자친구?"
 그리고 그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그녀의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창녀와 그 주인은 아니겠지."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은 움직였다. 그렇게 보였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그들이 그녀를 눈치챘다.
 우리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서로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으니까. 처음에는 아이들이 우리 쪽을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했다. 신기하다는 얼굴로. 이윽고 그들의 입이 움직이고, 부부가 우리를 눈치챘다. 그들은 잠시 우리를 바라보더니, 애들에게 다가가 눈을 가리고 손을 끌며 펜션으로 향했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애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될 걸 봤다는 듯.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너무하잖아.
 "너무하잖아."
 그리고 그 말은 내 대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그녀의 입꼬리는 확실하게 움직였다.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애들에게 상처를 줬네."
 "...미안해."
 나는 사과했다. 왜 내가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이제 알겠어?"
 그녀는 나를 돌아봤다. 어쩌면 이 펜션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나 같은 괴물이 밖에 돌아다니면 어떤지."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속으로 담아두기만 하던 말이었다.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지금 기분은 팔만 멀쩡했다면 저 빌어먹을 펜션에 로켓탄을 쏴갈기고 살아남은 것들은 모조리 묶어다 뒷마당에 무릎 꿇려놓고 처형할 기분이야. 전쟁 중에 늘 하던 대로."
 "이해해."
 "아니, 넌 절대로 이해 못 해."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인간들이 뭘 느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야. 괴물을 봤다고 생각하든 뭐든 아무 상관 없어. 나는 그저 부러운 거야."
 나는 그녀를 그저 바라봤다. 조금 더 덧붙여 달라는 듯.
 "나는 멀쩡한 인간을 보면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어."
 그녀는 말했다. 내가 기억하던 목소리로.
 "내가 하지 못하는 걸,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걸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날 집 밖으로 데려나오기 전에 생각했어야 할 건, 내가 웃고 떠들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하는 부분이었어. 그냥 밖에 나가면 대책 없이 즐거워지겠지, 기분전환이 되겠지, 아름다운 세상을 보면서 아직 세상은 살만하구나 하는 세 살 먹은 꼬맹이도 안 할 생각을 하겠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호수를 향해서. 불청객이 사라진 호수는 다시 바람에 흔들릴 뿐, 잠잠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좋아서 창관에 박혀 있던 거야."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그 말을 들었다.
 "물론 나가기 힘들었던 것도 있어. 하지만 적어도 그 안에서 같이 지내는 동료들은, 나 같은 처지거든. 찾아오는 손님들은 돈을 주고, 내 아픔을 잊게 해주고. 그야 가끔씩 죽여버리고 싶은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좁은 곳 안 만이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았어. 그리고 네가 날 끌고 나왔고. 다시 이 세상으로. 지금까지는 방 안에 처박아뒀지만."
 마지막은 덧붙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맞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날 데리고 내 불행을 자랑하게 하려는 것도 싫어. 날 동정하는 것도 싫어. 내가 불쌍하고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기시키는 것도 싫어. 동정하지 마. 난 좋아서 이딴 몸뚱이가 된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침착했다. 마치 저 호수처럼.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꿈속에서처럼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주길 원했다. 꼭 포기한 것 같았으니까. 그게 뭐든지간에.
 "그래도."
 잠시 침묵 후에, 그녀는 작은 한숨과 함께 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일그러지지 않고. 예전처럼. 지쳤지만.
 "호수를 보는 건 좋네. 이렇게 여유로운 것도 오랜만이고."
 "...그래. 다행이야."
 겨우,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호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휴가 중에, 하고 싶은 거 있어?"
 "있어."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다시 그녀를 돌아봤다.
 "전쟁 중부터, 아니 입대했을 때부터 쭉 하고 싶었던 거야."
 "뭔데?"
 "늦잠 자는 거."
 나는 그녀가 쭉 하고 싶었던 대단한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내 눈빛을, 아마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군인은 늘 정해진 시간에 깨야 하잖아. 전쟁 중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리고 창관에서도 몸단장이니 뭐니 해서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그보다는 아침에야 잠들었지만. 게다가 나를 사주신 주인님은 또 군인이라 빌어먹게도 새벽부터 날 깨워서는 난리를 치고."
 "그래."
 "그러니까, 깨어날 때까지 잠들고 싶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오늘만은 꿈을 꾸지 않기를 바랬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우리는 휴양림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는 내 팔을 베고는 잠들었다.
 깨어날 때까지, 우리는 잠들었다.

2016년 11월 17일 목요일

Broken Flower(가제) - (3)

 새삼스럽지만, 나는 가끔 그녀의 꿈을 꾸고는 했다.
 꿈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늘 달랐다. 하지만 기억에 있는 모습들이었다.
 적의 포위망이 좁혀올 때, 참호 안의 탄약은 줄어들고 전우들이 하나 둘 죽어갈 때, 그녀의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슬픔이나 애절함을 느끼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소모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달려오던 익숙한 군복과 익숙한 모습. 후방의 진지에서 챙긴 탄약을 잔뜩 짊어진 채 참호로 뛰어들어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는 그녀는, 내게 여신처럼 보였다. 전장의 여신.
 또 다른 모습도 있었다. 그 사건 덕분에 훈장을 받은 그녀는 우리들의 막사에 거하게 취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양 손에는 축하 자리에서 슬쩍 했다는 술을 잔뜩 챙겨서는. 우리는 그녀의 머리에 맥주를 붓고 떠들며 즐겼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내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한 그녀는 내게도 술을 붓고는 잔을 맞부딪히며 웃었다. 술냄새가 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제멋대로인 주정뱅이의 모습이었지만, 내게는 그것도 마치 여신처럼 보였다.
 사열을 할 때의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전날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칼 같은 각이 잡힌 자세로 그녀는 경례를 올리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우리는 그녀를 보며 박수를 쳤고, 그녀는 다시 우리에게도 경례를 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 다른 전우들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해서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온 그녀는 내게 어깨를 기대며 역시 과음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올라올 것 같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막사 뒤에서 그녀의 등을 두들겨주며 나는 이런 모습 역시 여신과 같다고 느꼈다.
 가끔 기억에 있지 않은 모습도 있었다. 아마 내 뇌가 멋대로 상상한 그녀의 이미지. 섹시한 옷을 입고 요염한 자세를 취한 그녀는 침대 옆의 빈 자리를 두드리며 나를 유혹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순간을 꿈꿨다. 그 외의 많은 것도 상상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녀가 내 옆에 누워있었으면, 내게 요리를 해줬으면, 그런 꿈도 꿨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의 여유, 혹은 자유가 생긴 나는 그녀를 찾아다녔다. 사고로 퇴역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퇴역할 정도의 사고라면 분명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가능하면 위로하고 싶었다. 곁에 있고 싶었다.
 어렵게 수소문을 해서, 다소 억지를 부려가며 찾아간 고향집에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행방을 역으로 궁금해하며 같은 부대의 전우였던 내게 눈물을 흘리며 여러 것을 물었다. 이틀 정도 머물면서 나는 그들이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들려줬고, 내가 모르는 그녀의 과거를 엿들었다. 담배를 피우며 그녀가 살아온 어릴 적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의 집을 바라봤다.
 그녀가 전출 갔던 부대는 찾을 수 없었다. 전쟁 중에 해체됐다는 말에 나는 구성원이라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결과는 없었다.
 5년이라는 세월 사이에, 그녀를 찾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주어진 책임을 다 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기도 했고, 내게도 내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기도 했고, 시간 속에 추억과 그리움과 풋내나던 첫사랑이 열화하기도 했다. 대신 그녀는 가끔씩 여전히 꿈속에서 나를 찾아왔다. 혹은 내가 찾은 걸까.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아아아아아아ㅡㅡㅡㅡ악!"
 찢어지는 것 같은 높은 비명소리에 눈을 떴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것 역시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높고 찌르는 듯한,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찬 비명에는 언제나 몸이 움찔거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더듬거리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비명의 근원지를 찾아갔다. 달빛도 없는 깊은 밤이었다. 새벽일지도 모르겠다. 시계를 볼 여유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사라진 양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그녀의 경악에 찬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불을 키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양 팔을 잡았다. 부서질 물건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하지만 힘을 줘서.
 "진정해. 괜찮아."
 "너야?"
 나는 그녀가 날 볼 수 있도록 얼굴을 가까이 했다. 공포로, 경악으로 일그러진 채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비명을 멈추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야?"
 "그래, 나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팔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그녀는 울먹거리는 채로 내게 몸을 맡겼다. 짧은 양 팔로 나를 안으려는 듯 했다. 나는 그녀를 안아줬다.
 "역시 너였구나. 날 구하러 와줄 줄 알았어. 네가 도와주러 올 줄 알았어."
 "그래, 물론이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던 목소리였다. 독기 어리지 않고, 늘 비웃거나 놀리는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우면서도 푸근한 목소리. 물론 그 안에는 떨리는 당황함과 불안이 담겨있었지만. 나는 대답했다.
 "대인유탄에 당했어. 괜찮아."
 "팔은? 내 다리는? 발 끝에 감각이 없어."
 "괜찮아."
 나는 그저 그 말을 반복했다. 나 자신에게 들려주듯.
 "왜, 더 빨리 오지 않은 거야? 네가, 네가 있었으면..."
 "미안해. 이젠 괜찮아. 괜찮아."
 잠시 그녀는 거친 호흡을 계속했다. 울먹였다. 훌쩍였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에게 들려주는지, 내게 들려주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거짓말쟁이."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독기가 담긴, 비웃는 것 같은 목소리가.
 "구하러 온 적 따위, 없잖아."
 "그래, 맞아."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녀를 놓아줬다. 그녀가 나를 밀쳐낸다고 느꼈으니까. 그녀는 여전히 눈물이 맺힌 채로 나를 바라봤다. 어쩌면 노려보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악몽인 거다.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악몽인지 모를 정도로 깊은, 악몽.
 가끔씩 그 악몽 속에서, 그녀는 그 순간을 현실로 착각하고 했다. 지금이 그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고,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나였는지, 그 자리에 있을 리도 없는 나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희망을 품고 싶었지만, 대책 없는 희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늘 내 눈 앞에 있는 존재가 가르쳐주곤 했다.
 "진정됐어?"
 나는 물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그녀는 웃었다. 늘 그렇듯, 일그러진.
 "그래, 덕분에 진정됐어. 꿈도 뭐도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도 기억해냈고, 그 사이에 있던 일도 기억해냈고."
 "그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를 악 물었다. 왼팔을 바라봤다.
 "손이 아파."
 "미안, 너무 세게 잡았나보네."
 "손이 아파."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미안해."
 "손목이 아프다고!"
 내 말에 그녀는 고함을 쳤다. 나는 그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왼쪽 손목이, 쑤시듯이 아파!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프다고!"
 그녀는 악을 썼다. 왼팔을 흔들면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듯이. 물론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왼쪽 손목은 이미 5년 전에 사라졌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니까.
 환지통, 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절단되어 사라진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증상. 없다는 걸 아는데도, 보이지 않는데도, 존재하지 않는데도, 통증은 느껴진다. 환장통, 이라는 속어는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프단 말이야...!"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손목을 움켜쥐듯 몸을 구부리며 말했다. 고함이 되고 싶었지만, 고통 탓에 쥐어짜는 것 같은 목소리가 스며나왔을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뭐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안아줘."
 잠시 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물론 그녀를 안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매단 한쪽 뿐인, 광채 없는 죽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안아달라고!"
 "안 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말하는 '안는다'는 것이, 방금 했던 것처럼 내 품 안에 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고자야?"
 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웃음까지 나왔을 거다.
 "어차피 창관까지 왔잖아. 이제와서 동정이니 뭐니 하는 것도 아닐 거 아니야!"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녀와 알고 지낼 때라면 몰라도 나도 여자를 한 번도 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돈을 내고 여자를 샀다. 몇 번이나 샀다. 내 덤덤한 대답에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그럼 도대체 왜 날 산 거야? 왜 날 찾아온 거야? 애원이라도 해줘?"
 "안 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분하다는 듯,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양 팔로 내 목을 조을 듯 달려들었다. 물론, 그녀의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고통을 주는 양 손으로는 내 목을 조를 수 없었다. 붕대에 감싸인 뭉툭한 팔뚝만이 목에 닿았을 뿐이었다.
 "왜 안 되는데!"
 "왜 내게 안기고 싶은 건데?"
 나는 물었다. 담담하게.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내 말에 다시 하, 하고는 웃었다.
 "너 따위가 아니라도 좋아. 누구라도 좋아. 안기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그걸 네가 빼앗아갔잖아! 날 사버려서!"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그녀는 팔뚝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외쳤다.
 "남에게 안기는 순간만큼은, 이 고통도 잊을 수 있단 말이야! 손목따위, 신경쓰이지 않는단 말이야! 쾌락에 몸을 맡겨버리면, 던져버리면, 그 순간만큼은 다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날 안아!"
 그녀는 명령하듯 내게 외쳤다. 나는 대답했다.
 "안 돼."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침착한 대답에, 그녀는 다시 웃었다. 일그러진 미소를 더욱 일그러트리며.
 "이런 몸이라서?"
 "그런 게 아니야."
 "네가 그리던 내가 아니라서? 네가 기억하던 내 모습이 아니라서? 팔다리도 없는 병신이라? 눈깔 한 짝이 없는 병신이라? 온 몸이 화상과 흉터 투성이에, 밤마다 피고름을 질질 흘리는 괴물이라서? 그딴 여자는 안기 싫다는 거야? 더러우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벌리고 몸을 판 창녀라서, 안을 수 없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고함을 치고 싶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라는 걸 알았기에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최대한 평범함을 가장하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이딴 몸뚱이로 할 수 있던 건 그것 뿐이었어! 이딴 괴물 같은 팔다리로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다고! 그래, 기분도 좋았어! 이 통증도 잊을 수 있었고, 누군가에게 필요가 된다는 것도 좋았고, 어쨌든 쓸모가 있는 것도 좋았어!"
 "물어보지 않았어."
 어금니를 다문 턱에 조금 힘을 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너야 작대기나 흔들면 되겠지! 날 상상하면서, 내 원래 몸뚱이를 상상하면서! 그때처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나는 그럴 수도 없어! 이딴 팔다리로는 그럴 수도 없다고! 혼자서는 기분 좋아질 수도 없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딴 것, 알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딴 팔로 뭘 할 수 있는지 알아? 뭐가 제일 미칠 것 같은지 알아? 그래, 지금처럼 이 손목이 아픈 것도 물론 미칠 것 같지! 손등이 가려운 감각을 알아? 그걸 다른 손으로 긁을 때의 쾌감을 알아? 닿지 않는 등을 어떻게든 손을 움직여 긁는 느낌은? 간지러운 귀를 손가락을 넣어서 후비는 감촉은? 그럼 간지러워 미칠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는데 도저히 닿지 않아서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붕대로 감긴 팔뚝만 허공에서 휘젓고 있는 느낌은?"
 그녀는 계속해서 외쳤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뭐가 그리운 줄 알아? 전쟁터에서, 이 전쟁이 끝나면 뭘 하려고 마음 먹었는지 알아?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산해진미를 먹는 것 따위는 상상도 안 했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싶었지. 손으로 수도꼭지를 돌리고, 선 채로 샤워기에서 흘러내리는 온수를 머리 끝부터 맞으면서 머리를 감고 싶었어. 손톱에 페티큐어도 칠하고 싶었지. 전쟁터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기분전환 삼아서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조깅하는 것도 좋았어. 책을 읽는 것도 좋지. 책장을 넘기는 것, 그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감촉이 그리웠어. 그리워! 예쁜 구두를 신는 것도 좋지. 그대로 춤을 추는 것도 좋아!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것, 발끝으로 다른 발등을 긁는 것도 좋아!"
 토해내듯, 그녀는 외쳤다. 침이 튀고, 눈물이 흩날렸다. 발목 밑이 없는 양 다리가 버둥거린다. 짧고, 뭉툭하고, 길이가 다른 양 팔이 흔들린다. 마치 버둥거리듯. 웃기다는 생각도, 귀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슬펐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부러질 정도로. 온 힘으로.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 말없이, 묵묵히, 최대한 무표정을 가장하며.
 "그러니까, 날 안아! 안으란 말이야 이 고자새끼야! 그 순간만은, 그런 걸 전부 잊을 수 있으니까! 전부 던져버릴 수 있으니까! 그 순간만은 이딴 몸뚱이든 뭐든 신경쓰이지 않으니까! 네가 빼앗았잖아! 그럼 네가 책임을 지란 말이야! 창녀를 샀으면 할 일은 하나 뿐이잖아!"
 표독스럽게 외치던 그녀는 다시 양 팔로 내 목을 움켜쥐려 했다. 그리고 그 대신 내 가슴을 두들겼다.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있는 힘껏 때리고 있을 텐데, 두드리고 있을 텐데, 부러트릴 듯이 두드리고 있을 텐데.
 나는 그때마다 그녀의 붕대가 검게 물드는 것이 더욱 아팠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만두지 않는 것이 아팠다.
 거친, 추위에 떨 때처럼 덜덜거리며 호흡을 내뿜는 턱을 애써 꽉 물었다. 대답했다.
 "안 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덕분에 날 두드리려던 그녀가 앞으로 고꾸러졌다. 나는 하지만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앞으로 넘어진, 침대를 기는 그녀를 그저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내가 첫사랑이라서?"
 왼팔로 상체를 어떻게든 일으켜세우려 하며 그녀는 말했다.
 "그런 내가, 이렇게 변해버려서? 널 유혹해서? 네 동경과는 달라서? 예전의 나와는 완전히 달라져서, 안아버리면 네가 가졌던 그 환상이 전부 깨질 것 같아서? 현실이라고 믿어버릴 것 같아서? 더 이상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완전히 깨달을 것 같아서?"
 떨리듯 내뿜은 호흡이 한 순간 멈췄다. 하지만 나는 애써 남은 호흡을 폐에서 쥐어짜냈다. 텅 비어버린 호흡기는 제멋대로 공기를 보급받는다. 나는 대답하려 입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
 그녀는 웃었다. 몸을 벌렁 뒤집어 천장을 향하며, 나를 보며, 그녀는 웃었다.
 "꿈을 꾸는 건, 내가 아니라 너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꺼져."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물었다.
 "손목은 좀 나아졌어?"
 그녀는 역시나 하, 하고 웃었다.
 "멍청아, 그딴 건 5년 전부터 없었어."
 "그래."
 그렇다면, 아프지도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렸다. 등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에 고마워하는 걸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통증을 잊도록 그녀의 화를 묵묵히 들어준 것인지, 이곳에 데려와준 건지, 그 모든 것이 그저 나의 희망일 뿐이고 그녀의 말대로 꿈인 건지. 사실은 그저 늘 그렇듯 비꼬는 말일지.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았다. 양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침대까지 걸어갈 힘도 없어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내 양 발은 내 몸을 어렵지 않게 지탱했다. 손으로 느껴지는 얼굴의 감촉이 익숙했다. 얼굴로 느껴지는 손의 감촉이 익숙했다. 무게가 실린 양 발목의 감각이 익숙했다.
 시계는 보지 않았다. 방 안은 여전히 캄캄할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두 발로 걸어, 팔을 뻗어 손으로 더듬어 침대맡에 둔 담뱃갑과 라이터를 쥐었다. 손으로 입에 물고 손으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손으로 담배를 쥐어 입에서 떨어트린 다음, 연기를 내뿜었다. 양쪽 눈으로 어두운 방 안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봤다. 다시 연기를 빨아들였다.
 네 개비 쯤 연속으로 불을 붙이자, 머리가 아팠다. 나는 다른 꽁초들처럼 그것들을 바닥에 대충 비벼 끈 다음, 한숨을 내뱉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이런 일에 울어버리기에는 풋내가 너무 빠진 걸까, 하고 생각했다.
 동이 터오를 무렵까지 문을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짧은 잠을 자던 그녀를 깨우고, 붕대를 갈아주고, 씻은 다음, 아침을 먹여주고 부대를 향했다.
 그녀도 나도, 밤 중의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모두 그저 꿈일 뿐이었으니까.
 이미 그녀도 나도 몇 번이나 꾼 꿈이니까.

2016년 11월 16일 수요일

Broken Flower(가제) - (2)

 그녀를 '구입' 하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창관에서 그녀를 '사오는' 것은 큰 무리가 없었다. 그녀는, 글쎄, 내가 예상하던 '가격' 보다 너무할 정도로 저렴했으니까. 그녀를 찾기 위해 창관에 오는 단골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제시한 가격을 들은 창관주에게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닌 듯 했다. 그는 그저 내게 마지막으로 물어봤을 뿐이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하자'가 있는 상품이지요. 뭐, 그래서 구입하려고 하시는 거라면 상관 없겠지만, 나중에 와서 딴 이야기 하셔도 곤란하답니다. 아시겠죠?"
 마음만 같아서는 제시한 가격의 돈다발 대신 애용하던 야전삽날으로 뺨을 때려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한 달. 나는 그녀의 생활에 대해 몇 가지를 배웠다.
 "일어나."
 아침. 군인의 하루는 빠르다. 나는 겨우 동이 터오를 무렵 침대에서 일어나, 옆 방의 문을 두드렸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다. 이불을 벗겼다.
 옆으로 몸을 뉘운 채 잠을 청하던 그녀는 찬 바람이 싫은지 몸을 웅크렸다. 짧은 오른쪽 팔은 베게와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조금 더 긴, 팔뚝 부분까지 남은 왼팔은 허리쯤에 놓여있었고, 발목 밑은 없는 양 다리는 배 부분까지 올라가 있었다.
 한 달 사이에, 이미 익숙해졌다. 나는 그녀의 잠버릇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떤 형태로 잠드는지. 늘 옆으로 누워 오른손을 뺨에 댄 채, 왼손은 배에, 양 다리는 교차하며 마치 태아와도 같이 몸을 웅크렸다. 언젠가 그녀는 '총을 안고 자 버릇 했거든' 이라고 그렇게 자는 이유를 설명했었다. 그렇게 인상에 남은 잠버릇이기에, 처음 그녀를 깨우러 갔을 때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팔다리를 익숙한 위치에 놓은 그녀의 모습에, 예전과 다른 그 모습에.
 하지만, 말했듯이 이제는 익숙해져버렸다. 그녀는 잠시 꿈틀거렸지만,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눈을 떴다.
 "가끔 어떻게 예전에는 이 시간에 일어났나 싶다니까."
 "일어날 때마다 나도 늘 그 생각을 해."
 "오늘 밤에도 찾아오지 않았네. 기다렸는데. 그러다 썩을 지도 몰라. 사용하지도 않을 '상품'을 도대체 왜 산 거야?"
 "어떤 용도로 어떻게 쓰는지는 내 자유야. 일어나기나 해."
 놀리는 그녀의 말에도 담담하게 되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내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뒤집었다. 조금 더 긴 왼팔을 의지해 상체를 일으키고, 배 부분으로 끌어올린 양 다리로 몸을 마저 일으켜 침대 맡에 걸터 앉았다. 그녀는 짧은 양 팔을 좌우로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오른팔로 눈가를 문지르는 그녀에게 말했다.
 "다 끝났으면 붕대부터 갈자고."
 오른팔을 뗀 그녀의 눈가는, 그녀의 피고름이 조금 묻어있었다.
 처음 그녀를 깨운 내가 그 모습에 놀랐을 때, 그녀는 말했었다.
 "워낙 상처가 깊었거든. 그리고 야전병원은, 뭐 너도 알듯이 실력도 능력도 없는 놈들이 전부고. 그 이후로 계속 이래."
 진물이 스며나와 노랗게, 혹은 빨갛게 물든 붕대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이 정도 지나면 아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매일 이런 식으로 진물이랑 피고름이 나와. 어쩌면 썩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살아있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
 "역시 겉으로 보는 것과 함께 지내는 건 다른 일이지? 그러니까 손님으로 남지 그랬어요, 주인님."
 말을 잃고 굳은 내게 그녀는 몇 번이나 지었던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하루 일과는 소독이랑 붕대를 다시 감는 걸로 시작해. 물론 몸이 이러니까 나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상품을 산 이상 유지랑 보수는 본인이 담당하셔야겠죠?"
 그녀는 마치 나를 놀리듯, 혹은 재듯이 말했다. 잠시 머뭇거렸다. 충격에서 빠져나오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벗긴다."
 그리고 한 달 째, 이렇게 일과는 이어지고 있다.
 "가능하면 살살 해주면 좋겠는데."
 먼저 그녀의 왼손을 잡은 내게 비웃듯 말하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가 이를 악 물고 있는 것도, 각오하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다.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 최대한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
 이를 악 문 그녀의 입가에서,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이 새어나온다.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흘러나와 피부와 붕대 사이에 스며들어 굳어버린 진물과 피고름은 떨어져나가며 그녀의 상처에 격한 통증을 안겨준다. 이것 역시 한 달 사이에 배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심스러운 손놀림을 조금 더 세심하게 바꾼다. 조금이라도, 그 고통이 덜하길 바라면서.
 붕대 밑의 상처는, 솔직히 말해서 보기 흉했다. 갈색을 넘어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마치 익어버린, 아니 타들어간 고깃덩어리처럼. 그것들이 제멋대로 주름을 잡으며 쭈글거리고 접히고 늘어나 있었다. 전장을 거치며 그런 광경은, 정확히는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건 자주 보아왔지만, 그럼에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아플 거야."
 "방금도, 충분히, 아팠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내 목소리에, 그녀는 불규칙적이고 거친 호흡 사이로 말을 토해냈다. 이미 붕대를 벗긴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고통이다. 이제부터 할 일은, 아마 그걸 아득하게 넘어설 고통.
 "줄까?"
 "줘."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갈아주기 위해 챙겨온 붕대를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내밀어 붕대를 물었다. 붕대를 꽉 물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어번 잡아당기고 흔들었다. 잘 고정되어 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눈으로, 두려움과 각오를 제멋대로 뒤섞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망설임 없이 소독약을 상처에 부었다.
 "ㅡㅡㅡㅡ!"
 그녀는, 비명이 되지 못한 비명을 내질렀다. 붕대를 문 입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마 있는 힘껏 물고 있는 거겠지. 발목 위로만 남은 다리가 버둥거린다. 제멋대로 움츠러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한다. 왼팔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그래도 오른팔보다는 낫다. 짧은 그녀의 오른팔은 잡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나를 때리지 못한다. 나는 소독약이 잔뜩 묻어 있는 그녀의 상처 주름 주름 사이를 거즈로 문질렀다. 말 그대로 상처를 헤집는 느낌이 들겠지. 소독약 만으로도 불타던 그 순간의 통증이 기억날 텐데, 이제는 그 사이마다 흘려넣고 있으니까.
 "그ㅡㅡㅡㅡ! 그으ㅡㅡㅡㅡㅡㅡ!"
 그만하라는 뜻이겠지. 그녀의 웅얼거리는 비명을 알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꼼꼼히, 마저 소독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놓아줬다. 한동안 그녀는 몸을 꿈틀거렸다. 물론 비명도 계속되었다. 잠시 후, 그녀는 죽은 눈을 내게 돌렸다. 한 쪽뿐인 눈에서는 눈물이 잔뜩 흘러나와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입에 손을 가져다 대, 붕대를 꺼냈다. 흘러나온 침에 붕대는 축축해져 있었다. 침이 붕대와 그녀의 입 사이에서 얇은 실을 만들어내다 끊어졌다. 그녀는 거친 숨을 헉헉대며 내쉬었다.
 나는 말했다.
 "이제 왼팔 차례야."
 그녀는 하핫, 하고 웃었다.
 한참의 씨름 끝에, 그녀의 붕대는 전부 새 것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녀의 잃어버린 한 쪽 눈도. 그 때의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워 했기에, 가장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더 이상 떠올리지 않았다. 그 밑에 있는 것을 매일 보기에 잊을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그녀의 옛 모습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녀를 볼 때마다,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제 씻겨줘."
 겨우 안정을 취한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이거 하나는, 너에게 구입되어서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역시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허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 자체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창관에서는, 붕대를 벗기고 바로 씻어버렸다니까. 소독약 보다야 물이 낫겠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겪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언젠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고 했지만.
 그녀의 잠옷을 벗겼다. 속옷도 벗겼다. 창관에서는 일에 '방해'되는 그런 것은 입히지 않았다. 다음날 내가 속옷을 사오자, 그녀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내게 어떻게 여성 속옷 가게에 들어가서, 자신의 사이즈를 알고, 이렇게 사올 수 있었는지 계속해서 물어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알몸은, 미안하지만, 더 이상 아름답지는 않았다.
 창관에서 봤을 때 예상했던 대로, 온 몸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화상과 흉터들이 있었다. 다행히도 팔과 다리의 절단면 만큼이나 상처가 심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역시 여위어 있었다. 흉부에는 갈비뼈가 화상에 쭈글거리는 가죽 너머로 마디마디 튀어나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허리는 가늘어져있었다. 한 때는 보일 듯 말 듯 새겨져 있었던 복근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는 그녀의 나체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아마 야영 도중이었을 거다. 며칠이나 이어진 작전에 씻지도 못했다면서, 숙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냇가가 있다며 나를 망보기 역할로 끌고 갔었지. 그때의 그녀의 알몸은 아름다웠다. 이미 반했음에도, 다시 반할 정도로. 매끈한 피부. 살짝씩 보이는 근육의 형태. 날렵하고 굴곡 있는 몸매. 이제와서 말하자면, 그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안할 때마다 그 때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했다.
 "역시 알몸을 보여줘야 흥분하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현실을 바라봤다. 긴 왼팔을 뒤통수에 대고, 짧은 오른팔을 옆구리에 대며, 그녀는 팔다리가 온전했다면 섹시한 포즈였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역시나 비웃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주인님, 언제까지 저를 외롭게 두실 생각이신가요? 이렇게 벗기기도 하셨으면서. 그런 창관에 가셨다는 건, 결국 욕심은 있으셨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첫 사랑인데. 이제 그만 사용해주셔도 좋은데요."
 "데워오긴 했지만, 좀 차가울 거야."
 아무리 달콤한 유혹이라도 매일같이 계속되면 그저 소리일 뿐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타올을 미리 떠온 미지근한 물에 담근 뒤 그녀의 몸을 씻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액체의 감촉이 차가운지 몸을 움찔이던 그녀였지만, 이윽고 다시 유혹을 시작했다.
 "역시 전희는 가슴부터 시작하는 거야?"
 "존재하지 않는 것에 애무할 수는 없지."
 "너무하네.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상처받았어. 그럼 지금은? 배꼽을 문지르는 것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마니악하고."
 "마니악한 취미는 없어."
 "이런 몸뚱이를 가진 창녀를 구입하는 시점에서 충분히 마니악 하다고 생각하는데."
 "시끄러워."
 "사타구니로 손을 옮기면서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떨어져."
 "가끔 왜 창관에서는 널 그냥 욕조에 집어넣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이지.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양 다리로 내 허리를 감았다. 내 상체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녀를 올려봤다. 그녀는 나를 내려봤다. 거리는 코와 코가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도 해버리거든."
 그녀는 얼굴을 내게 가까이 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이 내 입에 맞닿고, 입술이 입술을 탐하고, 혀가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이를 문 채, 그녀의 그런 유혹을 마저 거부했다. 잠시 공격을 계속하던 그녀는 입을 떼었다. 한 쪽 뿐인 광채 없는 눈으로 날 그저 바라봤다. 무감정하게.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재미없어."
 "미안하군."
 내 대답에 그녀는 다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이번에는 내 입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내 목을 향해서였다. 따끔, 하는 걸 조금 넘어선 통증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나를 바라본 그녀의 입가에서는 피가 한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혀가 요염하게 그걸 핥아서, 삼켰다.
 "이건 어때?"
 "곤란하군. 출근해야 하는데 말이야."
 "어차피 날 집에 들여놓은 건 너희 상관도 알 거 아냐?"
 그 말 대로였다. 그 날 바로 그녀를 사왔고, 상관은 나와 같이 창관에 찾아갔으니까. 다행히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부에 보고가 된다면 그냥 끝나지는 않겠지. 창녀를 말 그대로 '구입' 해서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저 그는 '제안은 자기가 했지만 그 정도로 푹 빠질 줄은 몰랐다' 라든가, '나도 그렇지만 너도 취향 정말 독특하다' 식의 발언을 가끔 단 둘 뿐일 때 했을 뿐이었다.
 "상관만 있는 건 아니니까. 부하들도 있고."
 "중대장이라고 했나? 5년 사이에 많이도 승진했네."
 "전시임관 대상으로 뽑혔으니까. 종전이 된 지금도 유지되어서 다행이지."
 내 말에 그녀는 놀리듯 웃었다.
 "그런 중대장님이 집에 이런 여자를 사와서 매일같이 끼고 산다는 걸 알면, 중대원들 반응이 볼만 하겠는데?"
 "그 녀석 같은 반응을 받겠지."
 "'데드 오어 얼라이브'?"
 "가끔 아직도 왜 그 녀석이 프래깅을 안 당했는지 궁금해. 우리 부대가 그 정도로 얌전하지도 않았는데. 역시 아군은 쏘지 않는 걸까."
 "무슨 소리야. 시도는 있었다고. 단지 실패했을 뿐이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누가 했어?"
 "내가. 주머니에 수류탄을 넣었는데, 안전핀을 뽑는 걸 깜빡 했거든."
 "너답지 않은 실수군."
 피식거리며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때처럼. 잠시라도. 비록 이렇게 된 그녀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그런 위험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이제 아침을 먹어야겠군."
 나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미 출근시간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가깝다. 나 혼자라면 분명 끼니를 거를 정도로.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침대에서 내가 일어나자, 그녀는 다시 침대에 뒹굴었다.
 아침은 가볍게 준비한다. 스크램블 에그에 소세지, 빵 몇 조각, 그리고 주스. 쟁반에 담아 다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포크를 들며 물었다.
 "뭐부터 시작할까?"
 "역시 계란부터 시작해야겠지."
 그녀의 말에 나는 포크로 스크램블 에그를 찍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입을 열고 그걸 받아 먹었다. 일부러 입술을 움직이며 혀를 뻗어 받아 먹은 것은, 분명 날 놀리기 위해서겠지.
 "다음은 소세지가 좋겠어. 하필이면 소세지를 고른 건, 역시 풋내나는 애송이 나름대로의 유사 성행위인 걸까?"
 "헛소리 하지 마."
 내 말에 그녀는 요염하게 받아먹는 것을 그만두고, 이빨로 소세지의 허리를 끊어 우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의 포크질 끝에 마지막으로 주스를 내밀었다. 액체를 먹이는 건 몇 번을 해도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조금 넘친 주스가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흘렀다. 나는 냅킨을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왼팔로 입가를 훑었다.
 "붕대에 묻잖아."
 "괜찮아."
 내 말에 그녀는 혀로 튄 주스방울을 훑으며 말했다.
 "거기까지 인형 취급 할 필요는 없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으니까. 잠에서 깨우고, 몸을 씻어주고, 밥을 먹여준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니까. 마치 인형놀이를 하듯이.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던 그녀는, 조금씩 그런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잘 모르겠다. 그녀에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필요하지 않은 걸까.
 그녀는 이 '인형놀이'를 즐기는 걸까, 아니면 질려가고 있는 걸까.
 "그보다 시간 다 됐어. 이대로는 정말 늦을 걸."
 "그러게."
 왼팔로 벽의 시계를 가리키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군복은 입고 있다. 접시는 돌아와서 치우도록 하지.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마루로 옮겨줄까? TV라도 볼 수 있게."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래."
 그녀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화기는 떨어트리면 나에게 연결되게 되어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그 정도도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래."
 벌써 한 달이나 됐는데. 몇 번이나 반복한 대화인데, 집을 나설 때마다 반복하게 된다.
 "그럼, 갔다 올게."
 "다녀오세요, 주인님."
 내 말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대답했다. 늘 그렇듯이. 이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이 집에 혼자다. 그녀가 홀로 있을 때 뭘 하는지 만큼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모르겠다. 물어본 적은 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부대를 향했다.
 그녀는 무엇을 하는 걸까.
 나는 무엇을 하는 걸까.
 그것 역시,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었다.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계모와 호박마차~ 1화(작성중)


 346 프로덕션 신관의 최상층.
 "네. 그 부분은 잘 처리되고 있습니다. 회장님."
 현재 346 프로덕션의 아이돌 부분을 책임지는 책임자-미시로 상무의 집무실은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346 프로덕션은 현재 일본 연예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대한 회사이다. 이미 해외 지부도 운영하고 있고, 커다란 실적을 내며 세계를 향해 그 활동무대를 펼쳐가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에 맞게, 개화기에 지어져 길고 유구한 346 프로덕션의 전통을 증명하는 본관, 여러 부속건물, 거대한 정원 등, 346 프로덕션 부지는 하나의 '성'과도 같다.
 "실적에 대해서는 첨부한 보고서의 표를 보시면 바로 아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미시로 상무는, 그런 자신의 집무실에서 성을 내려보는 것을 좋아했다. 잘 꾸며진 그 아름다운 광경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 안에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저 멀리 펼쳐져있는 도심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지금까지 문제가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그걸 관리하기 위해서 제가 파견된 것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아이돌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346 프로덕션 전체를 그녀가 관리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그녀의 왕국을 돌아보는 것. 미국의 높은 스카이라인을 보면서 거대해지는 자신의 왕국을 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이렇게 직접 자신의 영지를 바라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을 주는 법이었다.
 "물론입니다. 미시로의 방침에 문제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단순히 이 왕국을 이어받을 것은 아니었다. 뉴욕 지부에서도 실적을 거뒀고, 이제 만들어진지 고작 2년 밖에 안 된 346 프로덕션의 아이돌 부분을 담당하게 되어 실적을 올리고 있다. 초기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하나 둘씩 바로잡고 있었고, 이름 높은, 명망 높은 346 프로덕션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346 프로덕션을 위해 바쳐왔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럼 보고는 이걸로..."
 하지만, 몸을 돌리며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들린 목소리가 그녀의 그런 인생계획을 방해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다시 들어도 확실한 대답. 그 말에, 천하의 미시로 상무조차 당황해버렸다.
 "아, 아니, 갑자기 그런 말을 하셔도..."
 어떻게든 대화를 그만두고 싶었던 미시로였지만, 계속된 재촉에 결국 그녀는 평소의 말투도 잊고 외쳐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선을 보라니요, 아빠!"
 통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는, 346 프로덕션, 나아가 346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회장, 동시에 그녀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미시로 상무에게 한 말은, 아버지라면 딸에게 할만한 말이었다. 아니, 아버지로서 하는 말이었다.
 '이제 슬슬 너도 결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악의가 있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로서 할 만한 걱정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미시로 상무 본인도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나이는 30대에 돌입,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혼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려고 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그녀 본인도 가끔 그 문제에 대해서 자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딱 잘라 말해서, 그녀 본인은 그런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도, 아직 '상무' 라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던 오피스걸 시절에도 한 번도 남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주위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하나 둘 '남자친구' 를 만들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때도 그녀는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한 번도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상무로 통하지만 미시로 상무도 여자, 아니 한 사람의 인간. 멋진 남성과의 교제를 꿈꾸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연애가 넘쳐흐르니까. 연애만화, 연애드라마, 연애 영화, 심지어 그녀가 담당하는 아이돌들의 노래도 '연애'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저 찰나의 생각일 뿐, 한순간 해본 생각에 불과했다. 그녀에게는 꿈과 목표가 있었다. 책임지고 있는 일이 있었고, 언젠가는 이 그룹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연애 같은 것은 그녀의 길에 방해물일 뿐, 지금까지 의식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 '지금' 까지는.
 <네가 일에 열심인 것은 좋지만, 어쨌든 이 아빠는 걱정이 된단다.>
 미시로 상무의 말에, 미시로 회장은 그에 맞춰 방금 전까지의 업무로서 하는 말투가 아니라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말투로 말했다.
 <그야 요즘 세상에 독신으로 사는 여성도 드물지는 않겠지만, 네가 내 자리를 이어받듯이 언젠가는 또 미시로 그룹을 누군가 책임져야 할 거 아니겠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선을 보라는 건 너무하잖아요."
 잠시 어느 쪽 말투를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미시로 상무는 한숨과 함께 남은 동요를 뱉어낸 다음 말했다.
 "이전에 이야기 하신 적도 없었고, 이렇게 예고도 없이..."
 <내가 미리 이야기 했었다면 네가 허락할 리 없잖니?>
 자신을 너무 잘 아는 아버지의 말에, 미시로 상무의 말은 다시 멈췄다. 사실이었으니까. 만약 그랬다고 해도, 분명 본인은 뭐라도 좋으니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피했을 테니까. 그런 미시로 상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그리 나쁜 이야기도 아니다. 상대는 너랑 나이도 비슷하고, 게다가 방송 계통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다. 집안도 우리 집안에 굴하지 않을 정도로 좋고, 듣기로는 성격도 좋고 평판도...>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애당초 저는..."
 <설마하니 이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연애에 관심이 없다', '지금은 일이 좋다'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도 있단다. 지금이야 아직 젊다고 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것도 아니잖니.>
 하지만 겨우 미시로 상무가 생각해낸 변명, 아니 진심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회장의 말에 잘려나갔다.
 <네가 우리 346 그룹을 위해서 힘을 내는 것도 좋고, 346 프로덕션을 위해 일하는 것도 모두 좋단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네가 여자로서의 행복도 느꼈으면 한단다. 그것만이 사람의 행복은 아니겠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괜찮지 않겠니?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도 일하는 것에 지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행복한 일이고. 둘 다 해본 이 아버지의 말이니까 믿어도 좋단다. 그러니까...>
 회장의 이어지는 말은 하지만 미시로 상무의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스믈스믈 몰려오는 짜증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으니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참아온 것만으로도 아버지도 오랫동안 참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바쁜 시기이고, 무엇보다, 애초부터,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뭘 멋대로, 딸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이야기를 진행시킨 걸까.
 생각해보면 나이 이야기도 기분이 나쁘다. 아니, 그래 좋다. 이제 나이를 먹고 있는, 더 이상 젊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젊은 애들을 하도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도 대놓고 들어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화무십일홍은 또 뭐야? 이젠 질 때가 다 됐다는 소리인가? 그래서 그 전에 선이라도 보라고 하는 거야?
 원래 미시로 상무는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그것이 몰려오는 짜증에 그녀의 발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따르지는 않겠다는 방향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관심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둘러대봤자, 분명 아버지는 다시 다른 기회를 잡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을 방해하거나 손을 떼게 해서라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다.
 어떻게 하면 이 이야기를 없던 걸로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선을 파토낼 수 있을까. 계속해서 귓가에 홍수처럼 몰려드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미시로 상무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순간 번뜩인 발상에, 그녀의 입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요!"

 아, 사고 쳤다. 순간 미시로 상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만족감 대신 그런 문장이었다.
 하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은 되감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대답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목소리였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누그러졌으니까.
 <뭐야, 그런 거였으면 진작 이야기하면 좋았지 않냐.>
 "어, 그게, 그러니까..."
 <이거, 아빠가 너무 나서서 걱정을 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잖니. 네가 그런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하는 걸. 그렇다면 이미 교제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을 보라고 하는 건 역시 지나친 일이겠구나.>
 당황하면서 더듬거리면서도, 미시로 상무는 회장의 그 말에 안도감을 느꼈다. 일단은 선 이야기는 없어진 모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음 들린 말은 다시 미시로 상무를 멈추게 만들었다.
 <그래서, 상대는 어떤 사람이냐.>
 "어..."
 길게 늘리는 말투.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평소에 보여주는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씰룩거리며 경련하는 입가. 그 찰나의 순간 사이에 미시로 상무는 두뇌를 최대한의 출력으로 굴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업무상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보다도 더욱 필사적으로.
 "이, 일 관련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이에요. 우, 우리 회사 직원이고요."
 그리고 그런 고민의 결과 나온 답은, 일차적으로 그런 내용이었다.
 어차피 일상생활도 거의 없을 정도로 일이 바쁘다는 것은 피차 알고 있다. 그러니까 밖에서 만난 외부인이라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일 관련으로 만난다고 해도, 관계자들이라면 회장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말을 맞출 수도 없고, 들통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부하 직원을 거론하면 생길만한 문제가 있다.
 <흠, 직원이라 이거지.>
 미시로 상무의 예상대로 회장은 상무의 대답에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상무는 재빨리 덧붙였다.
 "우수한 인재입니다. 성실하고, 맡은 업무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고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회장의 대답에 상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너도 역시 사귀는 남자에 대해서는 좋게 이야기하는구나?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많이 반한 모양인데?>
 그런 농담에는 다시 짜증이 났지만.
 <아무튼, 그런 문제라면 알았다. 언젠가 그 상대 좀 소개시켜주렴. 네 눈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이 아빠의 눈으로 한 번은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으니까. 그럼 다시 연락하마.>
 마지막 공격을 끝으로, 회장은 만족했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미시로 상무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통화가 끊겨 배경화면이 표시되는 스마트폰을 든 손을 힘없이 떨군 채, 미시로 상무는 창 밖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만나는 상대 같은 거, 있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소개시켜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 아아아아아아아...!"
 그 간극에, 결국 참지 못하고 미시로 상무는 스마트폰을 떨어트린 채 주저 앉아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는 신음을 쥐어짜냈다. 그녀를 아는 사람 누가 보더라도 놀라고 말았겠지만, 다행히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미시로 상무는, 어쨌든 346 프로덕션 아이돌 부분을 담당하는 높으신 분이다. 이런 비상사태, 예상 외의 사태는 한 두 번 겪어온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넘어온 수라장의 수가 다른 것이다.
 "...후우, 좋아."
 심호흡과 함께, 미시로 상무는 재빨리 평정을 되찾고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봤다. 이미 질러버린 도박,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이 거짓말을 어쨌든 계속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적당한 자를 골라서, 이 상황이 끝날 때까지 동참하게 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적당한 자'를 고르는 부분 말이다.
 346 프로덕션 아이돌 부분에는 수많은 남성들이 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적당한 자' 를 고르는 것은 어렵다. 우선은 회장에게 말을 했던 대로 유능한 인재가 아니면 곤란하다. 거기에 어쨌든 대역을 하는 이상 나이도 비슷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 사태를 이해하고 자신을 도와주며, 비밀을 끝까지 엄수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과, 몇 번의 검산 끝에도...
 "...그 자 밖에 없나."
 미시로 상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조건을 만족하는 '적당한 자' 는, 하나 뿐이었다.
 문제라면 그 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거지만.

*

 346 프로덕션 신관, 33층.
 '프로젝트 크로네'의, 사무실.
 "...후우."
 업무 테이블에 앉은 채, 미시로 상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346 프로덕션 아이돌 부분 전체를 총괄하고 있지만, 그녀는 동시에 그녀가 자신있게 선보인 새로운 아이돌 그룹이자 프로젝트인 '크로네'를 담당하는 프로듀서로서의 업무도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뱉은 한숨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2016년 11월 15일 화요일

Broken Flower(가제) - (1)

 특이한 창관이 있다고 상관에게 끌려가서 안내받은 그 방에는, 잊을 수 없는, 사고로 퇴역했던 옛 전우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전장에서 서로의 목숨을 맡기고, 등 뒤를 지켜주던 여자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보기 흉하지? 이렇게 되어서."
 그 말 그대로였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역시나 사라진 팔과 다리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사지 모두가, 사라져 있었다. 붕대로 절단면을 가렸지만, 그 밑의 깊은 화상은 모두 가릴 수 없었는지 붕대 위로 드러나있었다. 왼쪽 어깨 위에도, 역시나 흉터와 보기 흉한 화상. 가슴에도 있는 것을 보면, 더럽혀진 원피스 밑에도 그런 상처가 몇 개는 더 있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투명했던 갈색 눈은 하나 뿐이었다. 오른쪽 눈이 있을 자리는 흉터를 가리려 했는지 붕대로 감겨있었다. 남은 눈도, 말 그대로 죽은 눈이었다. 광채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한 때는 그 눈을 보면서 마치 보석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총롱하게, 찬란하게 빛나는 호박과도 같다고. 그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역시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 내 시선에,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더욱 강하게 하며 키득거렸다. 어쩌면 내 표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지금의 일이야. 이런 몸이지만, '구멍'의 평가만은 좋다구?"
 그 말에, 내 몸이 움찔, 하고 움직였다. 마치 정신을 잃고 있다가 찬물을 맞은 것처럼. 그런 내 반응에 그녀는 놀리듯 말했다.
 "...일단 입으로 해줄까? 그 다음에는 마음대로 해. 응, 손님? 옛 인연이야. 뭐든 해도 좋구 뭐든 해줄게."
 유혹하는 듯한, 일급 창부다운 말투.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을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옛 인연'이라는 그 말.
 그 모든 것이, 눈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일깨우는 것만 같았다. 이 여자는 분명히 그녀고,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낯익은 얼굴의 본 적 없는 태도에, 나는, 나는...
 "...어떻게 된 거야?"
 그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짓누르는 느낌을 느꼈다. 찌릿한, 하지만 둔한 통증 역시 현실을 알리고 있었다.
 내 대답이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라는 듯, 그녀는 그저 하나 뿐인 죽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내 손님이라는 것 뿐이야. 날 사러 온 거잖아?"
 다시,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역시 이런 몸에는 흥분되지 않아? 이렇게 찢겨지고, 불타고 짓이겨진 남은 몸뚱이에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쳐버렸다. 외친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비웃음, 이라고 느꼈다.
 "하긴 그렇겠지. 일부러 이런 창관이라고 들어서 찾아온 거잖아?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 없어.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로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을 테니까. 뭐든 해도 좋다구."
 메마르고, 놀리는 듯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일그러진 비웃음도 함께.
 "괜찮아, 알고 있어. 예전부터 너, 날 그런 눈으로 봤었잖아? 설마하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몇 번이나 네가 밤마다 날 떠올리면서 화장실에 갔던 것도 전부 알고 있다고. 그런 풋내나는 네 기대를 지금이라면 들어줄 수 있어."
 이상하게도 부끄러움은 없었다. 충격도 없었다. 그저 굳어버린 나를 향해 그녀는 말했다. 마치 노래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때 날 상상하면서 무슨 일을 하고 싶었어? 그야 그때 네가 생각했던 내 몸은 아니겠지만, 뭐든 해줄게. 기분 좋을 거라는 건 보장할게. '구멍'의 평가는 좋다니까? 입도 그렇고. 지금까지 몇 명이나 되는 손님들이 모두 만족해서 돌아갔어. 몇 번이나 찾아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너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잖아? 예전에 날 상상하며 했던 만큼이나. 아차, 이런 이야기를 하면 풋내나는 우리 애송이는 더 어려우려나? 그러면서 창관은 어떻게 찾아왔는지 몰라."
 도발하는 거라고 느꼈다. 그녀는 발목 밑으로는 없는 양 다리를 매혹적으로 꼬면서 키득거렸다. 이런 면에서는, 그 시절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 점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돌리려 했다. 이 장소를 빠져나가려.
 "이번에도 도망치는 거야?"
 그런 내 등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역시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풋내나는 애송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네. 이렇게 대놓고 차려줘도, 뭘 해도 좋다고 허락까지 해줘도 도망치고 말이야. 그럼 뭐 때문에 여길 왔던 건데? 모르는 누군가라면 팔과 다리가 없어도 안을 수 있지만, 아는 사람인 나만큼은 안을 수 없다는 거야? 아, 그런 건가? 첫사랑이 이렇게 변해버린 걸 견딜 수 없다, 뭐 그런 거?"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첫마디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변명은 얼마든지 있었다. 상관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든가, 특이한 창관이라는 건 들었지만 이런 곳이라는 건 몰랐다든가, 그런. 하지만 아니었다. 그저, 하필이면 그녀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거다. 아마, 다른 여자였다면 아무 생각 없이 안았겠지.
 "대답해줘."
 애써 목소리를 메마르게 하려 했다.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감정적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녀가 보기에는 여전히 '풋내나는 애송이' 일지는 모르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생각해버렸다. 그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그 전쟁 이후 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손님이 아니라면 관심 없어."
 멈춰있는 내게 그녀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말했다. 놀랄 정도로 감정이 없는, 차가운 말투였다.
 "이제 와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도 없고, 서로 젊었을 때를 회상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싶지도 않아. 나는 창관의 창녀고, 그 목적으로 온 게 아니라면 다른 손님을 받게 나가줬으면 좋겠어. 내 시간을 빼앗고 있잖아."
 "이미 대금은 냈어. 뭐든 해준다고 했잖아."
 몇 초 후, 겨우 내뱉은 그 말은 내 목을 스스로 조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책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비록 쥐어짜는 것과 같은, 숨소리에 더 가까운 소리였다고 해도, 분명히 그녀의 귀에는 들렸을 테니까.
 "...하."
 잠시간의 침묵 후, 그녀는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부서진 웃음이다, 라고, 그저 멍하니 생각했다. 메마르고, 높고,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한, 부서진 웃음이었다.
 고개를 천장을 향해 치켜든 채 웃던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마치 배가 아프다는 듯. 팔다리가 없는, 몸통 뿐인 몸이 움찔거렸다. 마치 애벌레처럼. 스스로의 상상에 혐오감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는 너무 웃어서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려는 듯 팔을 움직였다. 팔꿈치 위로 밖에 남지 않은 왼팔을 움직여, 그녀는 붕대로 하나 뿐인 왼쪽 눈을 닦아냈다.
 "아... 그래, 확실히 그렇네. 어쨌든 돈은 받았으니까, 손님이지. 그리고 뭐든 해준다고 했으니까, 대답도 그거에 포함되겠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표정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일그러진 미소가 아니라, 그녀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이, 슬펐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대인유탄에 당했어."
 나는 멋대로, 그녀가 내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나를 유혹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몇 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평온하고, 당연했다.
 몇 명이나 되는 '손님'이, 들었던 걸까.
 "그때, 분명 사고로 퇴역했잖아."
 애써 그런 생각을 지우며 나는 말했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훈련 중의 사고로 퇴역했다. 그녀가 잠시 타 부대로 파견을 간 사이에 발생한 일이었기에 현장에는 없었지만, 퇴역을 할 정도니 부상이 심했을 거라는 사실은 짐작했지만, 적어도 대인유탄에 당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알기로' 라는 전제가 붙지만.
 "그렇게 알려졌지. 극비임무였거든."
 그녀는 자신의 팔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던 입 안의 텁텁함을 지우고 싶었다.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였다.
 "보통 그건 일을 치르고 피우지 않나?"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미소, 는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놀리는 웃음이었다. 조금이나마, 그 때의 기억이 날 것 같았다.
 "나도 줘."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는 자신의 양 팔을 벌렸다. 팔뚝부위 위로만 남아있는 오른팔, 팔꿈치 위로만 남아있는 왼팔을.
 나는 망설였다. 정확히는, 머뭇거렸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나도 하지 못한 것에. 언제나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담배를 피워왔으니까. 내 옆에서.
 "아무리 네가 풋내난다고 해도 이제 와서 간접키스니 뭐니 하는 걸 신경쓰지는 않겠지?"
 그녀는 내 머뭇거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은 다음, 그녀의 입에 내가 물고 있던 담배를 물려줬다. 그녀 역시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고마워. 오랜만이거든."
 다시 담배를 내 입으로 옮기는 사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 이었다. 그녀에게 감사를 듣는 것은.
 "야간에 후방으로 침투하는 임무였어."
 멍해진 나를 남겨둔 채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도중에 어떤 멍청한 자식 때문에 임무는 실패, 어떻게든 후퇴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펑ㅡ!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다음에는 진흙탕에 처박혀있더라고. 뭐, 결과는 보고 있다시피, 이렇지."
 다시 가볍게 양 팔을 벌려 자신의 몸을 보여주듯 하고, 그녀는 조금 긴 왼팔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하고 건드렸다. 그녀를 바라봐야할지 말지 고민하던 나는 그저 그녀의 입에 다시 담배를 물려줬다.
 "피를 질질 흘리면서 아, 이건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솔직히 아픈 것 때문에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났어. 팔다리는 고깃조가리가 되었지, 온 몸은 불에 그을렸지. 예전에 팔다리를 잃으면 잃어버린 걸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한다고 들었었는데, 그런 것도 없었어. 그냥, 죽을 거라면 빨리 죽고 싶었지. 그때 놈들에게 발견됐고."
 "아군?"
 "그럴 리가. 극비임무로 후방으로 침투 중이었는데. 우리를 추적하던 놈들이었지. 살려달라는 말도 안 나오고 그저 바닥에서 벌레처럼 기고 있었는데 발견됐어. 그리고, 뭐."
 내 멍청한 질문에 대답하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전쟁터에 있으면 그야 여자에 굶주렸겠지. 내 팔다리도 부상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나봐. 그대로 하더라고."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게 말해주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포, 슬픔, 절망, 그런 것은 없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아무 감정 없는 말투였다.
 "당연하지만 팔다리가 너무 아파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어. 그래도 뭐가 좋은지 계속 하더라고. 아, 딱 하나는 기억나. 날 처음 범하던 녀석이 그러더라고, 어차피 죽을 거 기분이라도 좋게 해주겠다고. 고맙기도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에게 다시 담배를 건네는 것 뿐이었다. 연기를 토해내며 그녀는 말했다.
 "뭐, 그리고 버려졌지. 어차피 피를 너무 흘려서 죽을 테니까, 가져가기도 그랬겠지. 나도 죽을 줄 알았고. 하지만 정신을 차리니까 야전병원이더라고. 어떻게 누가 찾아서 끌고 왔나봐. 그리고 당연히 부상이 이러니까 퇴역했지. 하지만 전사도 아니고 전투로 부상도 아니고 '사고'였다보니까 보상금은 쥐꼬리만했어. 할 일이라고는, 이것 뿐이었고."
 나는 이제 필터까지 타들어간 꽁초를 밟아 껐다. 잠시 후, 겨우 입을 열었다.
 "...미"
 "그딴 말 하지 마. 동정 받고 싶어서 한 이야기가 아니야."
 하지만 내 말은, 싸늘한 그녀의 말에 끊겨버렸다.
 "그저 '손님' 이 '내가 해주길 원하니까' 한 것 뿐이야. 너한테 사과받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이, 지금의 그녀와 내 거리를 딱 자르는 것만 같아서. 우리의 관계를, 완전히 정의내리는 것 같아서.
 "자, 이제 네 취향대로 즐거운 과거 이야기도 해줬어."
 그녀는 다시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돌아봤다.
 "이제 다음엔 뭘 하고 싶어? 아, 생각해보니 동정받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동정하는 마음에 온기를 나눠주겠다며 범하는 플레이, 싫어하지 않아. 그래, 그쪽이 취향이야? 아니면 상관과 부하? 그것도 찾는 사람이 많아. 나랑 같은 처지인 애들도 있고.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았거든. 원하면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왼팔로 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붕대의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시간은 간다고? 아직 용기가 부족해? 그럼 다음 번에 또 찾아주세요, 손님. 그 때도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죠. 그때까지 손님이 마음의 준비만 하고 오신다면."
 그녀의 왼팔이 내 턱을 지나, 내 뺨을 간질인다. 마치 손으로 내 얼굴을 훑는 것처럼.
 알고 있다. 그녀는 완전히 망가진 거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였다. 모르는 걸 가르쳐주는 스승이었다.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식사시간에 즐겁게 떠들 수 있는 친구였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옮기는, 전투가 끝난 석양이 지는 전장에서 서로의 담뱃불을 붙여주는 사이였다. 그래, 그녀가 말한 대로 첫 사랑이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몇 번이나 그녀를 상상하며, 그녀가 내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는 것을 꿈꾸며 욕구를 해소했다.
 그런 그녀는 더 이상 없다. 아마 그 작전과 지금, 이 순간 사이의, 그 5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죽은 것이다. 여기 있는 것은 껍데기.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도.
 "...손님이라면, 뭐든지 해주는 거야?"
 "물론이지. 나는 상품이니까."
 내 말에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돈만 준다면, 얼마든 팔 수 있어."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조금은 의아해하는 걸 느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널 사지."
 그저, 그 말과 함께 지갑을 열었다. 뒤집었다. 털어냈다. 지폐가 팔랑거리며 쏟아졌다.
 "뭐야, 연장이야?"
 몇 장인가의 지폐가 그녀 위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주울 수 없는 그녀에게 지폐를 뿌려버린 것도, 거만하게 지폐를 쏟아버린 것도, 그녀에게는 아무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프라이드가 강하던 그녀가.
 "아니. 연장이 아니야. 말 그대로, 널 살 거야. 가격을 말해."
 "..."
 내 말에, 그녀는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그리고 그녀가 죽은 뒤 처음 보는 멍한,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 미소는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아마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 사겠다고?"
 "그래. 아예. 내 전용으로."
 "이 따위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나도 전 재산을 다 들고 다니지는 않아."
 그녀가 사라지고 5년, 그 사이 나는 진급했다. 그리 높은 지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 작지만 내 집을 사고 돈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그녀의 '값'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지 못할 것도 없다.
 이 특이한 창관은, 그 특이한 취향 답게 손님이 적은지 그리 비싼 가격도 아니었으니까. 분명 그녀의 '값'도 '저렴할'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에 혐오감을 느끼는 건, 그만 뒀다.
 그녀는 그저 나를 바라봤다. 죽은 눈으로. 텅 빈, 빛이 비추지 않는 눈으로.
 "그래서 뭘 하게?"
 나도 모르겠다.
 이미 부서진 그녀를 사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동정이야?"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던 여자가, 내 전우가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몸을 파는 것에 동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첫사랑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잊고 살았지만, 그 사이 몇 번인가 그녀를 수소문했었다. 그 끝에 도달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어째서?"
 "몰라."
 나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망가진 그녀와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만의 하나, 내가 그녀를 고칠 수 있다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비슷하게라도. 조금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그런 희망을, 아마 품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손을 움직였다. 발목 밑으로는 없는 양 다리를 움직여 바닥에 내려와, 길고 짧은 양 팔을 다리와 함께 어떻게든 움직여 바닥의 지폐를 긁어모았다. 나는 그녀를 도우려 했다. 내가 흩뿌렸다는 사실도 잊고.
 "하지 마. 이제 내 돈이야."
 그리고 그 말에, 나는 멈췄다.
 돈을 다 긁어모은 그녀는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놀리는 것 같은, 동정하는 것 같은, 불쌍한 것을 보는 미소로.
 아마, 내가 그녀를 보며 지었을 미소로.
 "분명 후회할 거야. 그래도 좋아?"
 "몰라."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큰 절을 했다. 잘린 다리와 양 팔로.
 "구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마 그건, 마지막 복수였겠지.
 나는 후회했다. 그녀의 말대로, 빠르게도, 그리고 분명하게도.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 역시,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메마른 입을 어떻게든 움직여 이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