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9일 토요일

Broken Flower - (5)

 어른으로 살다보면, 가끔씩 엄청나게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날도 있는 법이다.
 책상 위에 놓인 반쯤 빈 위스키 병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내 행동을 정당화 시켜주리라 믿으며, 그리고 내 감정을 억눌러줄 거라고 믿으며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독한 알콜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 안과 목구멍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위스키의 향과 맛을 즐겼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가끔씩, 어쩌다 내가 군인이 되었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특별히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가끔씩 사람은 뒤를,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돌아보게 되어있는 법이니까. 그저 그 뿐이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전쟁이 났고, 국가는 싸울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적절한 나이에 있는 조금 소심한 대학생을 국가는 놓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고 납득했고,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을 나는 납득했다. 그렇게 나는 군인이 되었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조금 달랐다. 이전부터 그녀는 군인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시간이 꽤 지나고 그녀와 '전우' 가 되었을 때, 나는 왜 그녀가 부사관이나 장교로 지원하지 않았는지를 물었었다. 그녀는 자신은 앞에서 구르는 일을 좋아하지 뭔가를 지도하고 지휘하는 것에는 재능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지도'와 '지휘'에 몇 번이나 목숨을 구했던 나는 그 대답을 납득하지는 않았지만, 인정했다.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었고.
 그녀는 내 선임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악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천사에서 여신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날 전장을 헤치고, 서로의 등을 지켜주고, 맡기고, 함께 싸우는 사이에 나는 그녀와 편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새 우리는 말을 놓고 지내게 되었다. 동갑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장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였기 때문인지 우리는 다른 부대원들보다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가 부대의 여신이자 수호신,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질투할지언정 미워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이 좋았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했다. 그녀 역시 그들을 좋아했다. 그들이 사라질 때마다 슬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견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한 차례의 작전을 끝내고, 재보충과 휴식을 위해 후방지역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전방의 부대에서 결원을 급히 보충해야했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상 베테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우리 중대에서도 그 인원이 보충되기로 했고, 한 명이 파견되기로 했다. 중대장은 자원자를 받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인원은 그녀 아니면 나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 쯤에는 나 역시 한 명의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중대장은 그녀, 아니면 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고민했다. 다른 누군가가 나선다고 해도 중대장은 아마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전쟁으로 나가는 것을 원하는 인원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꺼리고 있었다. 손발이 맞는, 믿는 전우의 곁이 아니라 낯선 이들 사이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결국 나는 다음날 아침 일어났을 때 그녀보다는 내가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늘 그녀가 말하듯 '풋내나는 애송이'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녀가 위험한 곳에 가는 것보다는 내가 가는 편이 좋았다.
 그녀는 나만큼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중대장에게 나도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건의했다. 인원이 모자라서, 격전지라서 보충이 필요한 거라면 한 명쯤 더 가도 되지 않겠냐고. 중대장은 이미 TO는 가득 찼고, 무엇보다 중대의 핵심 인원 둘이 전부 가버리면 앞으로 부대가 어찌 될 지 모른다고 나를 말렸다. 나는 재차 건의하려 했지만 그녀는 나를 말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면서. 나는 납득했다.
 빌어먹을 '데드 오어 얼라이브' 자식. 진즉에 프래깅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틀렸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는데는 5년이 걸렸다. 돌아온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술 마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연 채, 그녀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물론 무릎으로 기듯이 낮은 곳에서. 실제로 기고 있었지만. 문 손잡이는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돌리는 대신 내려서 여는 방식으로 진즉에 바꾼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혼자 마시다니, 치사하네. 예전에는 전투식량조차 나눠먹던 사이였는데."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무릎으로 걸어 버둥거리며 내 맞은 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긴 왼팔은 탁자에, 짧은 오른팔은 편하게 늘어트렸다. 마치 바에 앉은 것처럼.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놀리는 것 같은, 장난치는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왼팔로 탁자를 두어번 툭툭 치고는 말했다.
 "바텐더, 여기도 위스키 한 잔."
 나는 그 이상 눈싸움도 말다툼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빈 잔을 가져와 호박색 액체를 따랐다. 그녀의 눈과 비슷한 색이었다. 이쪽은 반짝이는 대신, 다른 쪽은 광채조차 없는 것이 차이였지만. 그녀에게 잔을 밀자,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먹여주지 않는 거야?"
 다툼, 혹은 투닥거림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내밀고 입술을 벌렸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술을 부었다. 멈췄다. 꼴깍,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후우' 하고는 숨을 내뱉었다.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웃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그래."
 "한 모금 더."
 그녀의 말에 나는 따랐다. 이 상황임에도 그녀의 웃음이 좋았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술을 좋아했다. 전쟁 통에서도 살아돌아오면 몇 번이나 토할 정도로 마시고는 했다. 그게 그녀 나름대로의 살아있다는 실감이라는 걸 나는 배웠었다. 그리고 잊어버리고 살았다. 어쩌면 함께 지내는 사이 그녀에게 몇 번은 술을 권했어도 됐을지 모른다. 늦은 아쉬움이 따라왔다.
 나는 잔을 다시 비웠다. 그녀의 잔을 마저 비우게 했다. 술을 따랐다. 그녀의 잔에도 따랐다.
 말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왜 그랬어."
 "뭐가."
 그녀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일그러진, 비웃는 것 같은 미소. 나는 예전에 가끔씩 그녀의 웃음을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오래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그 생각을 떠올리려고 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글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왼팔로 술잔을 톡톡, 하고 두드렸다. 나는 술을 먹여줬다. 마셨다.
 "그때, 산책 할 때 말이야."
 얼마 전의 일이었다.
 2박 3일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 그녀는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마 그건 내 팔을 베고 잠든 그녀를 보며 가졌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심 쯤, 시간을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눈을 뜨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코가 맞닿을 거리에 있는 것에, 그녀가 약한 웃음을 지으면서 "안녕. 잘 잤어?"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꿈만 같았으니까. 내가 오랫동안 꾸던 꿈이었으니까.
 그녀는 조금 말수가 많아진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그 여행에, 휴가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를 신경 쓰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분명히 나는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꺼리고 있었다.
 바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를 늘 혼자 내버려둘 정도로 바빴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없는 내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변한 모습을 인식하게 되니까. 외면 뿐만 아니라 내면도. 무엇보다 사지를 잃은 그녀와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는 게 괴로웠다. 슬픈 것보다는 괴로운 것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점을 반성했다. 그러면 안 되었다.
 군인으로서의 일을 딱히 대단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도 끝났고, 5년이나 하다보면 어떤 사명감 같은 것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직업' 이라는 생각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일상의, 여가의 비중을 늘렸다.
 일찍 퇴근해서 그녀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 TV를 봤다.
 그녀를 위해 책장을 넘겨줬다.
 간지러워 하는 그녀의 등을 긁어줬다.
 전쟁 전의 이야기를 그녀와 나눴다.
 그 사이 내게 일어난 일들을 그녀에게 들려줬다.
 조금 힘을 내서 그녀가 좋아하던 먹거리로 저녁 식탁을 채웠다.
 같이 음악을 들었다.
 그녀가 가끔씩 웃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가끔씩 내 팔을 베고 잠드는 것이 좋았다.
 가끔, 여전히 그녀는 환지통에 시달리며 폭발이 일어나던 그 전투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바로 옆에서 깨어난 그녀를 달래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녀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히스테리를 부르고 자신을 안아줄 것을 요구했지만, 괜찮았다. 그녀의 이어지는 유혹도 괜찮았다. 조금씩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좋았다.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너무 방심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회복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산책을 가자."
 내 말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나는 그저 내 판단에 만족을 느꼈을 뿐이었다.
 일요일 오후, 나는 그녀를 태운 휠체어를 끌고 거리로 나왔다.
 햇볕이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가로수의 나뭇가지가 노래하고 있었다. 길가의 차들이 지나다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와 그녀를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조금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거리의 가게들을 바라보면서 가끔씩 내게 평소 들리는 가게라든가, 그녀와 함께 하기 전 있었던 일들을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그 불안이 그저 내 신경증이라고 생각했다. 뿌듯함까지 느꼈다. 그녀의 상태가 호전된 것에. 그녀가 내게 마음을 연 것에.
 공원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몇 명인가가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녀 역시 무시했다. 그러던 중 그녀와 만났다.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동네에 사는 노부인이었다. 처음 이 지역으로 이사왔을 때 신세를 진 것도 있어서, 나는 그녀와 적어도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되어있었다. 그녀는 군인인 나를 정중하게 대우했다. 전쟁 중 자신들을 지켜줬다면서. 그녀는 어린 손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것으로 보였다. 아이는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러던 중 그녀를 보고는 멈춰서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쯤에서 나는 눈치 챘어야 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자만심에서 깨어났어야 했다. 그녀가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로 그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다. 멍청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요즘 좀 바빴거든요."
 "그렇군요. 이쪽 분은 누구신가요?"
 그 질문이, 아마 노부인이 내게 말을 건 이유였겠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의 그 반응이 그저 심각한 부상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걱정한 것인지, 아니면 어째서 그런 사람이 이런 곳에 있는지를 걱정한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녀는 호의로 말했던 걸까, 아니면 경계심으로 말했던 걸까.
 "옛 전우입니다."
 그런 생각도 못 한 채, 나는 그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보다시피 전쟁터에서 팔다리를 잃었죠. 그 뒤로는 역 뒤쪽의 창관 거리의 저 같은 장애인만 모아둔 창관에서 창녀로 일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 취미가 있는 이 녀석이 찾아와서는 저를 구입해서 같이 살고 있죠. 말하자면 저는 이 녀석 전용의 더치와이프라고 해야 할까요. 아, 더치와이프라는 단어를 모르시려나? 그럼 살아있는 오나홀이라는 표현은요? 창관에서 자주 들었거든요. 그럴듯하지 않아요? 팔도 다리도 없는데 구멍은 달려있으니까. 위에 하나 아래에 둘. 아, 이해 못하셨나보네. 요컨대 이 녀석이 주인이고 저는 전용 창녀죠."
 나는 차마 그녀를 말리지도 못했다. 그만 말하라고 주의를 주지도, 입을 막지도 못했다. 그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얼어버린 노부인에게 계속해서 재잘거리듯 말했다.
 "얼마나 자상한 주인님인데요. 제 잘린 팔다리도 매일 같이 관리해주고, 온 몸 구석구석 씻어주고, 잘 때 고통에 신음하면 절 안아줘서 고통을 잊게 만들어주고요. 뭐 가끔씩 창관에서 일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요. 많은 손님이 찾아오셨거든요. 팔다리가 잘린 여자애를 보고 발기하는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고요. 어쩌면 남편 분이나 아들 분도 오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노부인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더욱 강하게 하며 말했다.
 "이 붕대 밑에 있는 거, 보실래요? 손녀 분도 이렇게 될지 어떻게 알아요. 사고는 순식간이거든요. 미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창녀로서 필요한 건 뭐든 다 가르칠 테니까요."
 "닥쳐."
 그쯤에야 겨우 내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노려본 다음, 노부인을 바라봤다. 이 모든 게 그저 삐뚤어진 이 녀석이 하는 말이라고 하기 위해서. 하지만 노부인의 표정은 내가 그런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내뱉으려던 호흡을 다시 가다듬고, 멍하니 질린 머리에서 어떻게든 할 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사이, 그녀는 공원의 아이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외쳤다.
 "저는 언제든지 이 군인 아저씨 집에 있으니까, 안을 사람이 필요하거나 창녀로 전직하고 싶은 사람들은 찾아오세요ㅡ!"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은 채 휠체어를 끌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웅성거림과 욕설이 들려왔다.
 나는 도대체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녀를 방에 데려다주고 내 방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연히 소식은 부대에까지 퍼졌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쌓았던 신뢰는 그 한 순간으로 사라졌다. 부하들은 수군거리고, 일부는 대놓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나를 창관에 끌고 갔던 상관 조차 나를 져버렸다. 군사재판소로 넘겨졌다. 군명예실추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줄은 차마 몰랐다. 현역 장교가 창녀를 구입해서 동거한다는 사실이 들키면 그냥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군복이 벗겨지게 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언론에 흘러나가기 전에 재빨리 처리한 것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그 동안 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으니까.
 내가 했던 모든 것이 착각이었을 뿐이고, 그저 그녀에게 놀아났다는 걸 깨닫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랬던 거야."
 나는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 물어봤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녀는 이번에는 내게 술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잔을 왼팔로 탁자에 엎어버렸다. 위스키가 탁자 전체에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걸 입을 대고, 혀로 핥아 마셨다. 입술을 핥으며 나를 바라보는, 조금 얼굴이 빨갛게 변한 그녀의 미소는 일그러졌고, 만족감이 가득했다.
 "군대에 그렇게 미련이 많았어? 그건 의외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딱히 네 천직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왜 그랬어."
 나는 재차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대단한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빈 자리를 채운다는 명분으로 전시임관을 하고, 이후 종전 이후의 혼란 상황에서 군에 남아 5년간 복무해 중대장의 지위까지 올라온 것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이어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애당초 딱히 달리 할 일을 찾지 못해서 계속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몰랐다.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해서 계속하고 있었다는 건, 계속할 수 없게 된 지금은 딱히 할 일이 없다는 뜻이 된다. 당장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남아있는 저금으로 생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연금은 사라졌다. 불명예전역자에게 그런 것은 없으니까. 참전 연금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군적이 말소된 거라면 없겠지. 어느 쪽이든, 내 앞길은 막혔다.
 "네 말을 잊고, 산책에 나가서 그런 거야?"
 나는 물었다. 몇 번이나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다른 사람들을 보고 네가 무슨 기분일지 짐작하지 못해서, 그랬던 거야?"
 그녀는 그저 탁자의 위스키를 핥았다. 흘러내린 술이 바닥을 핥는 그녀의 옷을 더럽혔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잊어버린 건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아마도, 이 집도 팔아야 할 것이다. 이 지역에서 더 살 수는 없으니까. 이미 나는 몇 번이나 대놓고 하는 항의를, 에두른 권유를 들었다. 어느 쪽이든 이곳에서 나가줬으면 한다는 말들이었다. 사람들은 장애인이 같은 동네에 사는 것만으로도 싫어한다. 그 장애인이 창녀에, 주변 사람들을 모욕하는 버릇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런 장애인 창녀를 구입해서 동거하는 변태 성욕자가 곁에 있는 것 역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그리고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더 새빨개진 얼굴로, 조금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그딴 이유가 아니야."
 "그럼 왜 그런 거야?"
 "내가 죽여버리고 싶은 멀쩡한 사람들 속에, 너는 포함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런 것도 모르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를 동정하고, 그래서 같이 살고, 내가 스스로는 하지 못하는 걸 해주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우월감을 느끼고, 안아주지도 않으면서 안기지도 못하게 하고,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행복하고 즐겁게, 내가 장단을 맞춰주는 것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하고 행복한 곳이라고 믿는 너를, 내가 죽여버리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는 내 반응에 킥킥거리며 웃고는, 무릎을 세워 탁자에 상체를 올렸다. 남은 위스키가 그녀의 옷을 마저 적셨다. 내 코 앞에 자신의 코를 둔 채, 탁자에 걸터 누운 그녀는 일그러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분명 후회할 거라고."
 그 때와는 다르게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틀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분명히 나는 후회했다.
 나는 그녀를 때릴까,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녀의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갈겨버릴까, 탁자에서 굴러 떨어질 그녀를 발길질 하고, 걷어 차고, 짓밟고, 머리채를 끌어올려 후려갈기고, 벽과 탁자에 내팽개치고, 던져버리고, 그 외에 모든 방식으로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애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울먹이면서 공포와 고통에 덜덜 떨며 애원하는 것이 듣고 싶었다.
 "때려도 돼."
 그녀는 말했다. 왼팔로 내 뺨을 찰싹거리며.
 "후려갈겨. 네 마음대로 해. 나는 내 말을 지키거든. 팔려올 때, 네가 창관의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분명 말했잖아? 뭐든 해주고, 뭐든 해도 좋다고. 나는 네 소유물이야. 그것도 널 미워하고, 엿먹일 기회만 노릴 소유물. 마음대로 해. 나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거야. 계속해서 널 상처줄 거고,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겁게 지켜볼 거야. 그리고 그 기회를 내가 가져오려고 노력할 거고."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한쪽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기대에. 일그러진 미소는 더 환해졌다.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살아있는 눈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로 반짝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뻗었다. 그녀는 기대감을 더욱 키웠다.
 나는 조용히 술잔을 잡고, 남은 위스키를 따랐다. 마셨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재미없어."
 그녀는 몸을 꿈틀거렸다. 의자에 무릎을 받치고 걸터 앉더니, 조금 과격한 동작으로 바닥에 내려갔다. 무릎으로 걸으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이 비었네."
 그저 그녀가 들어가고 한참 후, 텅 빈 잔과 텅 빈 병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행주와 쟁여놓은 다른 위스키병을 들고, 행주로 그녀가 흘린 술을 닦고, 병의 마개를 뽑았다. 잔에 따르고 들이켰다.
 그녀는 원래 술버릇이 안 좋았다. 내가 기억하던 그녀의 술버릇은 깔깔 웃으면서 사람을 퍽퍽 두들기는 쪽이었지만.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내 등과 어깨를 퍽퍽 때리면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깔깔거리면서 하고, 시끄럽고 박자도 음정도 안 맞는 콧노래와 가창을 즐겼다. 그대로 춤을 추는 것도 좋아했다. 손뼉을 치면서 탁자 위에 올라가서는 제멋대로의 노래를 제멋대로의 춤과 함께 불렀다. 어쩌면 술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술잔을 마저 기울였다.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술버릇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새로운 술버릇.
 어른으로 살다보면, 가끔씩 엄청나게 술이 마시고 싶어지는 날도 있는 법이다.
 나는 잔을 채우고, 다시 기울였다.
 다음날 일찍 일어날 필요도, 출근할 필요도 없다는 건 제법 좋은 일이었다.

댓글 3개:

  1. 매일 잘 보고 갑니다

    답글삭제
  2. 으아.. 빨려들어가는 필력에 감탄합니다

    답글삭제
  3. 더.. 더 없나요..?
    너무 찜찜해.. ㅠㅠ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