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2일 월요일

[라한대]플랜 C


작성 : 2013년 6월 23일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단 둘이다. 그 외에는 없다.
하나는 산이든 바다든 수영장이든 놀러가는 거다. 산의 경우 개울을 낀 경우로 한정한다. 요컨대 차갑고 시원한 물속에 몸을 담금으로서 저 가증스러운 태양과 그에 따른 열기에서 도주하는 거다. 피서라고도 하지. 이게 방법 A. 플랜 A.
다른 하나는 에어컨을 키고 방구석에 처박히는 거다. 선풍기는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아쉬운 대로 괜찮다. 방구석 안은 그래도 햇빛이 조금은 덜 들어오고, 인류 문명 최고의 이기인 에어컨이 있다면 좋다. 북극으로도 만들어버릴 수 있다. 이게 방법 B. 플랜 B.
하지만 플랜 A는 여러모로 무리다. 일단 덥다. 역설적이지만 덥다. 인간의 두뇌구조는 그 놈이 그 놈인 법이고, 인간들은 산이든 바다든 수영장이든 놀러간다. 요컨대 거길 가면 사방에 36.5도를 유지하는 생체난로들이 그득그득하다는 소리고, 체감온도는 그 이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뻐킹 리얼충들이 가는 게 피서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친구들(최소 2인 이상)끼리 가서 청춘이니 낭만이니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다. 리얼충이라는 놈들은 사람을 멋대로 제단하고 평가하는 기질이 있고, 따라서 나 같은 놈은 가면 바로 OUT이다. 훌리건이 그득그득한 경기장에서 상대팀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큼이나 OUT이다. 몸매니 패션이니 나발이니 피서랑은 전혀 관계없는 걸로 사람을 재단하는 36.5도 난로들이랑 같이 몸을 부대낄 생각은 없다. 따라서 플랜 A는 각하. 역시 플랜 B가 최고지.
그러니까,
“그딴 플랜 C는 없다고! 이 뇌가 익어버린 것아!”
내 외침에 사랑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좋은 방법 아냐?”
“이! 더운 날에! 더워서 익어버릴 날에! 더위를 피하는 방법이 운동장에 나가서 공 던지고 뛰는 거라니 무슨 미친 소리야? 정말 익었냐?”
“이 열기를 청춘의 땀방울과 기억의 메모리로 승화시키는 거야!”
정말 익었구나. 이런 애는 아니었는데. 글러브에 야구공, 배트까지 챙긴 채 내 북극 방문을 열어버린 사랑이는 그렇게 외쳤다. 손에 쥔 공까지 내밀면서.
잡았다. 창문을 열고 내던졌다. 창문을 닫았다.
“아아! 하나 밖에 없는 야구공을 던지다니!”
“자, 이제 야구공은 없다. 배트랑 글러브만으로는 야구 못해. 집으로 꺼져.”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냐! 내 공 내놔!”
“배팅 자세 취하지 마!”
글러브 낀 손으로 요령 있게도 배트를 들어 올린 채 사랑이는 말했다.
“어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야구공의 원한을 갚겠다!”
“집으로 꺼지는 길에 주워 가!”
“이 더운 땡볕에 나가라고? 미쳤어?”
“방금 야구 하자고 쳐들어온 건 너다 이년아!”
“그런 거 난 몰라! 공 내놔! 내 공 내놓으라고! 안 내놓으면 에어컨 부숴버릴 거야!”
“무단침입에 기물 파손까지 하면 볼만하겠네! 그래 어디 한 번 부숴봐라 합의금 100만원 아래로는 절대……. 진짜 부수려고 하지 마!”
젠장, 콤보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
나가서 공을 찾는다 -> 어차피 나온데다 공도 있다 -> 야구하자!
슬쩍 창밖을 내다봤다. 음영조차 없다. 강렬한 햇빛에 다 지워졌다. 나무에서는 매미 맴맴. 그 사이로 들려오는 지글지글거리는 소리는 아스팔트 익는 소리인 것 같다.
“그래! 밤에 나가서 찾아줄 테니까, 그만 집으로 좀 꺼져라? 응?”
밤이면 저 더위가 조금은 식겠지. 새벽까지 배달만 하면 되잖아.
“안 돼! 그럼 나가서 야구 못하잖아!”
“왜 꼭 이 날씨에 야구를 하려고 하는 건데? 왜 그렇게 목을 매냐고!”
“내가 요즘 만화를 보고 있는데, 느낀 게……. 역시 야구는 쪄죽을 것 같은 날씨에서 해야 할 것 같아. 마침 지금 쪄죽을 것 같은 날씨잖아? 우린 잘 될 거야, 아마.”
“너 만화 좀 끊어라. 어차피 나가서 마구니 뭐니 하면서 저 멀리 던져서 내가 신나게 복날 개처럼 뛰어다니게 만들 거잖아.”
“그리고 돌아왔을 때 에어컨이 박살난 상태면 상당히 더울 거야.”
“…….”
망할 년.

*

맴맴맴맴.
더워.
맴맴맴맴맴맴맴맴맴맴.
더워. 짜증나.
맴맴매매맴맴맴ㅁ매ㅁㅁ매맴맴맴맴매매맴매맴매매ㅐㅐ
“아 진짜, 좀 닥치라고!”
……
맴맴매매맴맴맴ㅁ매ㅁㅁ매맴맴맴매매ㅐㅐ매매맴맴맴ㅁ매ㅁㅁ매맴맴ㅁ매맴맴
“으아아아아악!”
“좀 열심히 찾아봐. 그렇게 소리만 빽빽 지르지 말고.”
“그럼 너도 와서 좀 거들던가!”
내 외침에 나무 밑에서 입으로 맴맴맴맴 소리를 내며 짜증을 돋우던 사랑이는 히쭉 웃었다.
“네가 던졌으니까 네가 찾아야지? 자, 응원해줄게. 맴맴맴맴…….”
“너 언젠가는 내 손에 죽을 거야.”
“그것도 로맨틱 하겠네. 서로를 사랑하지만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
“난 너 싫어. 진심으로 싫어.”
“내 무기는 배트로 할 테니까, 너는 손도끼로 부탁해. 그리고 준비하면 서로 바꾸자.”
“그런 매니악한 패러디를 알아듣는 나도 싫다.”
풀밭을 뒤진다.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안 보이는 게 짜증난다.
“……그냥 가서 하나 사주면…….”
“에어컨도 새로 살 수 있지?”
망할 년.
“자, 파이팅! 찾으면 내가 음료수 정도는 사줄게!”
“집에 가면 냉장고에 많아. 필요 없어.”
“그럼 응원해줄게. 맴맴맴맴…….”
“음료수도 뭐도 다 필요 없으니까 닥쳐만 주라. 응?”
한숨에 헤헤 거리고 웃는 저 얼굴이 싫다. 빨리 찾아서 던져주고 집에 가고 싶다.
햇살은 등을 찌르고, 땀이 나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가 온 몸에 달라붙는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찌른다. 짜증난다.
숙인 허리는 슬슬 아프고, 쭈그려 앉은 무릎도 쑤신다. 음영도 없을 정도로 내려쬐는 빛에 눈이 따갑다. 던지지 말 걸. 이것 보단 나았을 것 같은데.
“아, 모르겠다.”
피곤함에 일단 누워버렸다. 땅도 온돌처럼 뜨끈거린다.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빛은 살을 익혀버리는 것 같다. 눈을 감아도 시야가 하예서 팔로 눈을 가렸다.
에어컨 키고 방구석에 처박히는 플랜 B를 했으면 이런 꼴 안 봐도 되잖아.
“……응?”
뭔가 머리에 톡, 하고 굴러와 닿았다. 잡았다. 야구공이다.
“…….”
“어, 찾았어? 잘했어!”
“……하나 밖에 없는 야구공이라면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기고, 그 그림자를 만들며 나를 내려다보는 사랑이는 히쭉 웃었다.
“하나 뿐인 줄 알았어? 안 됐네! 사실은☆ 두 개였습니다!”
“…….”
내 정말 이 년을 언젠가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어쨌든, 찾은 건 찾은 거니까. 자, 약속한 선물.”
예고도 없이 떨어트린 캔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걸 어렵게 잡았다.
“너 진짜……!”
“시원하지?”
사랑이는 배시시 웃었다.
맴맴맴맴. 바람이 불었다. 풀들이 흔들리고, 땀에 젖은 몸에 그 바람이 에어컨 바람만큼 시원하게 느껴진다. 음료수 캔도,
뭐야, 시원하잖아.
“더웠다 시원할 때 진짜 시원한 거지.”
“그래. 그러니까 집에 가서 에어컨 쐬자. 응?”
“안 돼. 공 찾았으니까, 이제 야구 해야지? 밖에도 나왔고.”
내 이럴 줄 알았다. 망할 년.
이를 갈며 일어났다.



[라한대]우리는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작성 : 2013년 4월 7일



쿠로코쨩
진심 한글 못읽냐? 와 C8 유치원생하고 말하는 기분이네 매미 젖이 상했었냐?
13/03/31 22:04:32 211.37.xxx.xxx
 
애랑
이새끼 말하는 꼴좀 보소? 너 얼굴 보고도 그 말 할수 있나 보자?
13/03/31 22:05:01 76.40.xxx.xxx
 
쿠로코쨩
엌ㅋㅋㅋㅋㅋ 설마했더니 현피드립ㅋㅋㅋㅋㅋㅋㅋ 010-xxxx-xxxx로 날짜랑 시간 보내랔ㅋㅋㅋㅋㅋ
13/03/31 22:05:49 211.37.xxx.xxx
 
애랑
너 C8 이제 좆찐다 필수요소로 남을 정도로 털어줄테다
13/03/31 22:06:36 76.40.xxx.xxx
 
 
그리고 당일.
기다리는 1주일동안 나름대로 많은 경우를 상상했다. 근육질의 거한이 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큭.큭.큭. 선이 보이는군요? ㅡ죽어라’ 같은 말을 지껄이는 녀석, 아버지를 끌고 오는 경우, 깍두기 형님 등등.
그래. 그러다 보니 이것도 상상하긴 상상했었다. 상상은 했었다고. 5초 뒤에는 그럴 리가 있나 하고 목록에서 삭제했지만.
“야! 이 XXX야!”
……어머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
현피 상대가 초등학생 여자애인 일도 일어나긴 하는 거였어요.
“병1신아 쫄았냐? 응? 쫄았어?”
“…….”
안 쫄았다. 전혀 안 쫄았어. 그냥 잠깐 놀라서 움찔했을 뿐이야.
생기기는 인형처럼 귀여운데다 머리도 앙증맞게 양갈래로 묶은 주제에 입은 거칠기가 사포 수준이다. 저 주둥이로 문지르면 피나는 거 아닐까.
“온라인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는 새끼들 오프라인에서 깝치는 거 웃기다더니.”
너 지금 아주 알기 쉽게 거꾸로 말했다만.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서로 알아보기 좋게 정한 지하철 앞 입구는 사람들이 그득그득했다. 욕쟁이 할머니네 종업원으로 채용되면 인기가 좋을 것 같은 꼬맹이가 멀쩡한 젊은이에게 랩을 해대는 광경이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야 이해한다.
그리고 그 광경에 나의 불타던 분노는 짜게 식은 지 오래다. 그래. 나란 남자 마음씨 넓은 남자. 너그러이 용서하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자. 좋은 일요일에 이게 뭔 짓이야.
“입 있으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고 이 병1신아! 이 고자야!
“야!”
“히익…….”
버럭 내지른 소리에 꼬맹이가 움츠러든다.
“이 꼬맹이가 보자보자 했더니 뭐? 이 년이!”
내가 선량하고 마음씨 넓은 남자라고 태평양 같은 마음을 자랑하는 성인군자는 아니다.
그래, 애당초 현피 뜨려고 나온 거였고. 사그러가던 마음에 휘발유 같은 게 끼얹어지니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왜, 왜 욕하고 난리야!”
어쭈? 보기보다는 깡따구가 있는 모양이네. 여전히 어깨는 움츠러있고 눈가는 글썽글썽하지만, 꼬맹이는 용기를 내는 건지 주먹을 꼭 쥐면서 말했다.
“처, 처음부터 네가 인터넷에서 욕해서 그런 거잖아! 이 병1신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보니까 다리도 부들부들 떨린다. 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막 유치원생? 매미 젖?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못된 말을 하냐!”
“…….”
“사람 말은 들을 생각도 안하고! 거기에,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움츠러있던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거리고, 치켜든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눈물이요? 말할 것이 있나 뚝뚝 떨어지고 있지.
“후에에에에엥……. 엄마…….”
“…….”
주먹 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대기 시작하자, 주위의 시선이 한 순간에 찌를 듯이 날아온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꼬맹이가 무슨 말 하는지 다들 들었잖아?
“흑, 이, 이 나쁜 놈아! 배냇병1신! 고자!”
“내가 왜 고자야 이……. 만한! ……아니다.”
침착하자. 여기서 내가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일이 굉장히 커질 수도 있어.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으니까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다 가자, 응?”
여기서는 어른스럽게 달래는 방향으로 가는 거다.
울먹거리는 꼬맹이의 어깨를 슬쩍 감싸자, 주위의 시선이 양분되었다. 하나는 ‘뭐야 사랑싸움인가?’ 하는 눈빛. 다른 하나는 잠깐만요 사진 찍지 마세요 어디에 전화거시는 건가요 저 그런 남자 아닙니다 나한테는 여친도 있다고 모니터에선 안 나오지만 있단 말이야
“어,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말 좀 맞춰주면 안 되냐? 응?
꼬맹이는 재빨리 한 걸음 뛰어서 거리를 벌리더니, 우느라 쥐고 있던 주먹을 어설프게 올렸다. 눈물에 눈이 빨갛게 부어있었지만 그 눈빛의 기운은 날카로웠다. 그래, 저건 전사의 눈빛이군!
“그래! 그런 거였어! 고자 아니라고 여기서 증명하려고 하는 거지? 그렇지? 이, 이 변태! 덤벼! 어차피 너랑 싸우려고 나온 거였어! 왜, 쫄았냐 병1신아?”
“…….”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있는대로 쥐어박아주고 싶지만 뒷일이 감당이 안 되겠지.
“야, 꼬마야. 그러니까…….”
“오, 오지 마! 나, 나 합기도 50단에 검도 100단에 트, 특공무술도 배웠어! 더, 덤비면 오늘 집에 걸어서 못 간다고! 덤벼! 오, 오지 말고!”
……뭐 어쩌라고?
웅성웅성. 신기한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갈 길 바쁠텐데 움직이지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황도 모르는 여기에 끼어들기에는 다들 양심과 체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꼬맹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지원이 올 기미가 없자 결단을 내렸다.
“……익! 간다!”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지고, 그 예리한 눈빛에 지지 않을 날카로움으로 주먹과 발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4킬 1데스는 기본으로 유지하는 나의 눈은 놀랍게도 그 모든 주먹을 파악하고 있었다!
“익! 익! 죽어! 죽으라고! 이익!”
“…….”
대응할 가치도 없어서 파악만 했지만.
투닥투닥. 팔을 붕붕 휘두르고 다리를 퍽퍽 날리는 고전적인 싸움방식엔 감탄까지 나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안 아프게 때릴 수 있니?
“……후, 훗. 제법이군. 나랑 현피 뜨겠다고 나올 정도는 되겠어.”
스윽. 입가는 괜히 문지르면서 꼬맹이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었다. 너 숨소리 가쁘다 심호흡 좀 해라. 석양이 비치는 부둣가에서 날리는 느낌으로 꼬맹이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내 비장의 무기를 보여주마!”
“……그래. 보여주라.”
달려드는 꼬맹이의 이마를 붙잡고 팔을 버둥거리게 해볼까 했지만, 그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같아서 한숨을 쉬면서 팔을 벌렸다. 그래, 이거 맞고 진 셈 치고 집에 가자 이제 아무래도 좋다. 여러모로 피곤하다.
달려드는 꼬맹이의 주먹은 이번에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다른 게 아니라,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런 문답이 들려왔거든.
ㅡ안심하세요. 여긴 병원이에요.
ㅡ내가, 내가……
“크, 크흑…….”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무릎을 꿇은 후였다.
“후, 후후후, 봐, 봤지! 이게 나의 비장의 무기!”
“너, 너 이 앙증맞은 것이…….”
“이겼다! 이겼어! 와! 와! 봐라, 병1신아! 내가 더 세지? 이겼다!”
폴짝폴짝 귀엽게도 뛰어다니는구나. 주위의 시선이 여러모로 아프게 날아오지만 얼굴을 보도벽돌에 문대면서 신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어째 남성진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느낌이구만.
“헤헤……. 이거 오늘 인증 올리고 일베 가야지!”
베시시 웃으면서 핸드폰을 조작하는 꼬맹이는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엎어진 나랑 같이 나오도록 인증샷이라도 찍을 생각이겠지.
잠깐이라면 좋아. 그거면 족해. 수명을 깎아도 좋으니, 여기서는 움직여다오, 나의 몸이여!
나의 몸은 내 요청에 충실히 따라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일어났다.
“헤헤헤. 카메라 전면으로 하고……. 응? 왜 배경이 어둡지?”
“그야 어둡겠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꼬맹이는 내 얼굴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너 어떻게……?”
“원하는 대로 필수요소가 될 정도로 털어주마.”
그대로 겨드랑이에 팔을 껴서 들어올렸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꼬맹이를 그 위에 올렸다. 마스크 쓴 박쥐남에 나오는 악당마냥 척추를 꺾어버릴까 했지만 그건 너무 잔혹하다. 꼬맹이를 혼내는 데는 적절한 방법이 있으니까.
그대로 손을 엉덩이 부분에 넣고 치마랑 타이즈랑 팬티를 동시에 내려버렸다. 다리를 버둥거리던 꼬맹이가 경악에 질린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변태야! 이 고자야! 설마하니 고자 아니라고 증명을…….”
나는 싱긋 웃으며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하는 김에 네가 유치원생이라는 것도 증명해주마.”
 
경찰서 유치소는 추웠다. 무서웠다. 취조하는 경찰 아저씨들의 눈빛은 몇 배는 아팠다.
증인이 많아서 전자발찌는 차지 않았다. 하지만 오해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 탈갤할 수 밖에 없었다. 애랑인지 뭔지 하는 그 꼬맹이는 나름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합필갤에서는 엎어진 나의 사진과 엉덩이를 두드리는 나의 모습이 영상 소스로, 찰진 꼬맹이의 엉덩이가 내는 소리와 신음 비슷한 비명이 인간 관악기로 필수요소가 된 듯 했다.


[라한대]한 그릇 더 주세요


작성 : 2013년 3월 11일


“뱉어요! 당장 뱉어요!”
“욱.”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어온 공격에 입에 있는 음식을 식판에 뿜어버렸다. 반쯤 씹고 침에 버무려진 쌀알이 참……. 밤길에 꼭 한 번씩 봤던……. 아직 반 이상 남아 있었는데…….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크고 강력한 감정이 몰려나온다.
“뭐 하는 짓이야!”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당신 죽고 싶은 건가요?”
내 분노의 극에 다다른 표정에도, 그녀는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딘지 성이 난 목소리로.
“살려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예의가 아닌 건 그 쪽이지!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대체 당신 뭐야!”
내가 왜 초면인 여자한테 이런 행동을 당하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딱히 원한 살 기억도 없는데. 애당초 살려주긴 뭘 살려줘. 내 밥이나 돌려줘.
그런 내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잘 들어요. 그 쪽은 지금 혼자 밥을 먹고 있었어요.”
“그게 뭐 어때서.”
“그럼 죽어요.”
“…….”
아 씨바 할 말을 잊었습니다. 내 멍한 표정을 보고 코웃음을 치면서, 그녀는 가슴을 내밀고는 당당하게도 말했다.
“토끼만 외로우면 죽는 게 아니에요. 사람도 외로우면 죽어요. 그리고 혼자서 밥을 먹는 건 외로움의 극치고요.”
그럼 도대체 나는 몇 번이나 죽어야 하는 거냐. 불사신이냐.
나는 잠시 말을 고르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 이 대학교의 미친년은 당신인가요?”
“말이 심하시네요! 목숨을 구해줬는데!”
“…….”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고 하더니, 오늘 강적을 만났습니다 아버지. 이 이상 이런 이상한 여자랑 얽히는 것은 인생의 낭비다. 그런 생각에 식판을 들고 일어나려는 내 손을 그녀가 붙잡았다.
“어딜 가는 건가요?”
“웬 미친년 덕분에 점심 식사도 날아갔으니까 정리하고 나가서 혼자 햄버거라도 먹으려고. 따라오지 마 신고할 거야.”
“그러니까 그러면 죽는다고요! 게다가 살려준 보답도 아직 안 했잖아요?”
“오히려 내가 점심값을 받아내면 몰라도 보답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학식 밥 한 끼로 봐드릴 테니까요.”
“…….”
오늘 제대로 재수 옴 붙었네. 그냥 수업도 째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잘까.
“그러지 마시고요!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시고요, 네?”
“이게 그쪽 수법인가? 혼자 먹는 사람 등쳐먹는 게. 말 그대로 등쳐먹는 거네.”
“등쳐먹다니요! 제대로 상부상조라고요!”
“상부상조?”
“그래요. 혼자 밥을 먹는 당신이 죽지 않도록 구해줬으니, 이번에는 당신이 제가 혼자 밥 먹다가 외로워서 죽지 않도록 구해줄 차례에요.”
어딘지 당당한 태도로 그녀는 묶은 머리를 살짝 털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당신 다시 혼자서 밥 먹을 거라면서요. 그럼 우리 둘이서 먹으면 아무도 죽지 않고 오늘을 지날 수 있어요. 어때요, 상부상조 맞죠?”
“……이봐, 저길 둘러봐.”
나는 학생식당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상에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그래도 아무도 죽지 않잖아.”
“그래요.”
“봐봐. 그러니까 나 좀 내버려두고…….”
“하지만 매일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아니, 그것도 아닌데.”
“아니에요.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밥을 먹지 않는 건 당신뿐이에요.”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말했다.
“당신 말 대로 혼자 밥을 먹는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외로움이 쌓이게 돼요.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아무하고도 관계되지 않고, 그렇게 살다보면 외로움이 쌓여서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지 어떤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세상과 분리되게 되는 거예요.”
역시 이런 타입의 인물에게 이런 개똥철학이 없을 리가 없지. 내 인생의 모토는 인생 혼자 사는 거라고. 딱히 그게 문제가 될 것도 없고. 건성으로 듣는 내 반응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녀는 말을 이었다.
“밥을 먹는다는 건 생명을 이어간다는 거예요.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생명을 나눈다는 소리고요. 세상과 이어지는 거예요. 매일 같이 밥을 먹으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외로움은 힘이 되기도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어두웠다. 그리고 그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여자가 같이 밥을 먹을 상대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외로움이 이 여자의 힘이기도 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오래 이어지면 안 돼요. 만약 같이 먹을 상대가 없다면, 언제나 제가 여기 있을 테니까요. 혼자 밥을 먹으면 죽어요.”
그녀는 웃었다.
“자, 목숨을 구해준 데다가 좋은 이야기도 들려줬으니까 같이 밥 먹죠.”
“결국 내가 사는 거지?”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는 해야죠?”
“…….”
내가 어쩌다 이런 여자랑 얽히게 된 거지. 혼자 밥 먹는 게 그렇게 죄인건가. 딱히 먹을 상대가 없어서 혼자 먹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변명하고 있겠죠?”
“…….”
진짜 짜증나는 여자다, 이 여자.
한숨을 쉬며 나는 다시 식판을 들어올렸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혼자 먹으려고 하는 건가요?”
“한 그릇 더 받을 거야.”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밥은 나눠먹는 거라면서?”


[라한대]세계를 적으로 돌려도 여자 친구를 원해!


작성 : 2012년 11월 4일





# 한 번 보고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참 쪽팔리는 일이지만, 일단 고백해야겠다.
나는 평범했다. 진짜 평범했다. 평범한 가족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 와서 평범하게 공부 안하고 평범하게 놀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의 집합체 같은 놈이었다. 흔한 술 담배 한 번 해본 적 없고, 어릴 적에 껌 하나 훔쳐본 적 없는 도덕의 집합체 같은 평범한 녀석이었단 말이다. 아 물론 무단횡단이나 길거리에 쓰레기 버리는 정도는 했지만 그 면만 봐도 정말 평범하지 않은가.
평범하다고 계속 반복 강조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내가 진짜 평범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아야 한단 말이야.
지금 나는 지명수배자다.
모든 TV와 신문에서 내 범죄행위와 도주를 헤드라인으로 내보내고, 부모님이 TV에서 ‘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에요……. 정말 착한 아이였는데…….(눈물)’, ‘부모지만 우리 아들이 자수해 죄를 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들아! 듣고 있다면 자수해서 광명 찾아다오!’ 하고 외치고 계시지만, 나는 원래 이런 놈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나, 무서워…….”
옆에서 두려운 듯 훌쩍이는 리나를 살짝 끌어 안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애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범죄자가 되어주겠어.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어도.
이 사랑을 위해서라면, 청소년 연애자유 금지령을 위반한 범죄자가 되도 좋아.
 
 
시작은 별 것 없었다. 그냥 호기심이었을 뿐이니까.
왜, 나는 안 해봤지만 중고등학생인데 술 담배 하는 애들도 있잖아. 다들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호기심에 한 번 손 대보는 거잖아. 똑같은 이치였다. 그야 청소년에게 연애가 금지된 건 안다. 그런 건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서 서로를 책임질 수 있을 때, 어린 나이의 치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때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요즘 들어서 위헌이다 뭐다 하면서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TV에서는 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특별법이 없어지면 일어날 문제에 대해서 설교를 늘어놓고 있었다. 비밀리에 연애를 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인데 애를 가져서 남자는 결국 도망가고, 여자는 분유값을 벌기 위해 또다른 범죄를 저지른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정부 대변인은 ‘그러니까 아직 청소년 연애자유 금지법을 철폐하기엔 이릅니다’ 등등을 말했었고. 나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청소년의 연애는 나쁜 거야. 술 담배를 하는 불량아들이랑 다를 게 없는, 아니 서로의 인생에 크나큰 상처를 남기는 더 큰 범죄야. 하면 안 되겠지. 암.
하지만 말이야, 호기심에 살짝, 잠깐 해보기만 하는 건 별 문제 안 되지 않을까? 술 담배 한다고 잡아가는 건 아니잖아. 걸리는 게 무섭긴 하지만 연애……. 한 번 해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잖아. 학창시절의 로맨스는 로망이잖아. 들켜봤자 그냥 좀 혼나고 말겠지 뭐.
그런 마음에 고백했다. 학원을 같이 다니는, 옆 여학교의 학생이기도 했던 한리나한테.
피차 어차피 같은 학원 다니는 친구로 얼굴도 오래 봤고, 꽤 친하기도 해서 슬쩍 말을 꺼내봤던 거였다. 차이면 말고, 나중에 커서 이야깃거리 하나 생기는 거고. 되면 몰래 사귀어보는 거고. 왜, 하지 말라고 할수록 더 해보고 싶어지잖아.
그래서 옆자리에 앉은 리나와 필담을 나누는 중 쓴 ‘나랑 사귈래’ 라는 말에, 리나의 반응은 예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리나는 울었다.
처음에는 그냥 훌쩍거리던 게 5분 뒤에는 웃으면서 엉엉 울어서 당황한 내가 리나를 끌고 교실을 나갈 정도가 되었다.
손을 잡은 채 교실을 나가 문을 닫자마자 리나는 나에게 안기며 키스를 했다.
호기심에 시작된 그 결정은 그 순간 내 온 몸을 건 연애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연애의 대가로 전 세계에서 쫓기고 있다.
바로 다음날, 히히덕거리며 등교하던 나는 나를 잡으러 온 경찰과 마주쳤다. 그 싸움은 격렬했고, 또한 처절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순순히 잡혀갈 생각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도와줘! 인공아!”
“리나야?!”
저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 리나의 목소리였다.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리나는 목이 터져라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 언젠가 아버지가 말씀하셨었지.
“아들아, 평범함이라는 건 큰 힘이 될 수 있단다.”
평범함을 가장하면 가장할수록, 평범함과 멀어지게 된다.
애당초 평범함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 두루뭉술한 평균값의 집합체.
인간의 수많은 스테이터스를 평균으로 끌어오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장점은 약화시키고 단점은 강화시켜 모든 능력치를 평균으로 만드는 방법.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점과 단점을 극대화시켜 중간점을 만드는 방법.
아버지, 아버지는 그 힘을 숨기라고 하셨죠. 이 시대를 살아가려면 평범함으로 나를 꾸며야 한다고.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힘을 숨겨야 한다고. 적어도 성인이 되는 그 때까지는, 제가 절대로 지켜야 할 뭔가를 찾을 때 까지는.
죄송해요, 아버지. 저는 지금 그 힘을 쓰겠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만 쓸 수 있는 금단의 기술 - 小說主人功(소설주인공)
“아니, 이 파워는?!”
놀란 경찰들은 강했다.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인 나는 이길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이겼다. 그리고 리나를 구해냈다.
“인공아!”
“리나야,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세계를 적으로 돌려도 좋아.”
“응?”
“17년 모태솔로인 나는, 너를 구하기 위해서 이 힘을 길러왔던 거야.”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
리나는 지난 번 고백 때처럼, 눈물을 흘리며 웃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나는 평범하게 살아왔던 거야.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었던 거야. 아버지의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힘을 쓸 기회를 찾지 못했지만, 너라면 찾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멋져!”
리나의 환한 미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훈방으로 끝났을 우리에게 경찰이 찾아와 끌고 가려고 하고, 도주극에 언론까지 붙은 이유는 그 후 길고 긴 도주의 나날 중 알 수 있었다.
청소년 연애자유 금지령에 반대하는 반대파의 논리를 무너트리기 위해, 그들은 마침 걸린 우리를 본보기로 삼아 청소년 연애자유가 얼마나 무서운 지 보여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음모에 희생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도주의 나날 중 알게 된 동료들,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리나의 갑작스러운 각성, 자유연애 특공대의 조직, 그리고 솔로 사천왕의 등장과 청소년 연애자유 금지령을 내리게 된 진정한 이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세뇌된 세계를 우리의 적으로 돌리더라도, 전 세계의 모든 군대와 사람과 맞서 싸울 지라도,
나는 리나를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
“네 말은 잘 알았다, 인공…….”
그는 왕좌에서 일어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네 녀석도 여기까지다!”
“리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덤벼라, 인공! 네가 과연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남자인지, 시험해보겠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나의 용기가 리나를,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라한대]바보들의 첫사랑


작성 : 2012년 10월 23일


 “아하하,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렇게 끝났다.
“정말, 깜짝 놀랐잖아.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내가 아니면 오해한다고.”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웃으며 내 어깨를 퍽퍽 치는 첫사랑 상대 앞에서, 나는 완전히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하하, 그, 그렇지?” 하고 웃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지킬 수밖에 없었다. 짝사랑 하는 상대에게 차였다고 여기서 망쳐버리면,
“아무튼, 그런 말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바보 같이…….”
웃으면서도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는, 방금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하고 차인 나린이도 무너질 테니까.
“고마워. 나, 힘낼 테니까. 그 말, 농담이지만 기뻤어.”
그럼, 하고 나린이는 한 번 훌쩍이고는 내가 반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등만이 점점 줄어들다 건물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
이제, 됐지?
오케이? 문제없음?
좋았어.
겨우 다리에 주고 있던 힘을 쭉 빼고, 나는 주저앉았다. 그래도 힘이 없어서 그냥 길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첫사랑 짝사랑 5년, 지금 막 끝났습니다.
비라도 내려주면 좋겠는데, 그런 형편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 좀 찌질거려.”
“하지만, 히끅, 그래도 말이야……. 훌쩍,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잖아? 응?”
“이 새끼 또 콜라 먹고는 취한 척 하기는……. 이거나 좀 처먹으면서 울든가!”
가봄이는 짜증난다는 듯 떡볶이를 내 앞에 국물이 튈 정도로 확 내려놓았다. 새끼고 처먹고, 하여간 이 년은 말 진짜 험하게 한다니까…….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나는 콧물을 팽 풀고는 포크를 들었다. 가봄이가 그 행동에 더 짜증난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고백해놓고는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 식이라니! 짱 로맨틱하잖아! 완전 로맨틱하구만!”
“등신…….”
가봄이는 이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린이는 친한 친구인 나에게 좋아하는 ‘그 애’에게 고백할 거라고 나지막이 알려줬다. 중학교 졸업식이고, 학교도 갈릴 테니까 늦기 전에 고백할 거라고.
물론 오늘이었다.
나린이한테 좋아하는 애가 있다는 건 예전부터 넌지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들으니 충격이었다. 그래도 일단 응원해줬다. 물론 말 뿐이었지만. 속으로는 깨지길 응원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짝사랑 해왔는데.
첫사랑이었는데.
언젠가 분위기 잡고 좋은 상황에서 짠! 하고 고백해서 짠! 하고 사귀게 될 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뭐하는 놈인지 듣도 보도 못한 ‘그 애’한테 좋아하는 애가 고백한다는 데 진심으로 응원할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냐고.
그리고 기도가 통한 걸까, 어떻게 됐냐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물어본 나에게 나린이는 훌쩍이면서 대답했다.
“아하하, 차였어. 역시 나 같은 여자애를 좋아해줄 사람은 없는 걸까…….”
그래서 나는 다급히 외쳤다. 지금이 기회다! 완전 멋지잖아?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랑 이라면 사귀어도 좋은데.”
라고 말하는 남자, 좋잖아? 로맨틱하잖아? 당연히 “그래, 너라면 날 받아들여줄 줄 알았어! 나, 사실은 예전부터 너를……. 하지만, 나는 다른 애를 좋아해왔고…….” “쉿, 나린아. 그런 건 다 잊어도 좋아. 나는 반드시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이빨이 반짝거리는 환한 미소)” 하는 분위기로 풀리겠지?!
“그럴 리가 있냐, 밥팅아.”
가봄이는 진짜로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으흑…….
“애당초 차인 상황에서 친구인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봤자 친구의 위로밖에 안 들리지. 넌 방금 네가 직접 ‘나는 언제나 너의 친구야’ 하고 못을 박은 거라고.”
식탁을 차려줘도 3년이나 먹지도 못하더니 고작 생각해내는 게 그 따위냐. 가봄이는 다 들리도록, 아니 들으라는 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훌쩍.”
“그만 좀 질질 짜라고, 이 찌질아!”
“떡볶이가 매워서 그래!”
진짜라고! 절대 첫사랑이 끝나서 슬퍼서 콧물과 눈물을 찔찔 흘리는 게 아니야!
그보다 3년 지기 친구라면 친구의 실연에 좀 같이 슬퍼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쪼는 게 아니라!
“콧물 봐라. 자, 닦아!”
“크흥?!”
투덜댈 틈도 없이 가봄이가 휴지로 코를 막아서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가봄이는 역으로 지가 투덜대면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언제까지 내가 돌봐줘야 하는 건지 뭔…….”
“누나도 아니면서 돌봐주긴 뭘……. 아악!”
투덜거렸더니 붙잡힌 코를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아프게! 가봄이는 더럽다는 듯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며 말했다.
“누나도 아닌데 돌봐주는 거에 고마워하기나 할 것이지! 나린이랑 다리 놔달라고 부탁한 게 누군데?”
“그건, 그렇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지만 기회는 없었다. 기껏해야 같은 반의 여자애 정도였으니까. 같은 중학교, 같은 반에 왔다는 우연에 그래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역시 나랑 나린이는 운명으로 얽힌 사이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진짜로 운명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하지? 운명인 건 좋은데 그 작지만 큰 한 발자국을 어떻게 내딛지?
“사내놈이 한심하게 찾아와서는 ‘너 나린이랑 친하지? 나도 나린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어?’ 하고 물어보기나 하고.”
“아니, 하지만 친구로 시작해서 가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고…….”
“친구한테 그런 식으로 부탁할 용기가 있으면 아예 나린이한테 고백이나 할 것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도와줬잖아.
가봄이는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뭐?” 하고 되물었지만,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하고 당황하는 나를 보고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나만 믿어. 도와줄 테니까. 이제 우린 친구다?”
그렇게 안면을 튼지 단 하루만에, 나는 나린이랑 같이 급식을 먹는 사이가 됐다. 솔직히 그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었기에 꽤나 놀랐다.
가봄이는 나린이한테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야. 너도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는데, 기억 안나?’ 하고 말하며 진짜 나를 예전부터 안 것처럼 친하게 굴었다. 부탁하고 15분 만이었다. 그리고 뻘쭘한 사이인 나랑 나린이 사이를 도와줬다. 초등학교 때 나를 알았다는 설정으로 만든 가짜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상하게도 그게 내가 진짜 했던 경험들이랑 맞아 떨어져서 이야기를 맞추기도 좋았다.
그렇게 아는 애들 별로 없는 중학교의 초등학교 동창 관계로, 나랑 나린이 관계는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친구 관계긴 했지만, 어느새 나린이는 가봄이랑 같이 나를 ‘가장 친한 친구’ 취급했다. 그러다보니 학년을 올라가서는 오해하는 애들까지 있었다.
오해할 때마다 나는 좋아했지만, 나린이는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어느새 믿고 마음을 놓게 된 내가 가봄이를 찾아갈 때마다 가봄이는 ‘그냥 고백을 해, 이 멍청아!’ 하고 말했지만, 역시 고백은 좋은 분위기에서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음 기회를 노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됐고.
“역시……. 나린이한테 그냥 나는 친구였던 걸까.”
생각하다보니 완전 우울해졌다. 더 이상 찌질거리면서 위로 받고, 웃긴 척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내 목소리가 잦아들어가자, 가봄이는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올려가며 떡볶이를 먹는 자세 그대로 나를 바라봤다.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남자’로 본 적은 없는 걸까. 처음부터 그냥 연애대상 외로 봤던 걸까? 오로지 친구로만.”
그게 제일 충격이었다. 사실 끓어오르던 마음이 한 순간에 식었다.
처음부터 남자로 보이지 않았던 거다. 나를 조금이라도 남자로 봤다면, 사귈 가능성이 있는 연애대상으로 왔으면 그 고백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반응을 보였을 지도 모르지. 적어도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친구가 하는 농담처럼, 그렇게 넘겼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냥 고백하라고 했잖아.”
“진지한 이야기야.”
“나도 진지한 이야기야.”
그렇게 말하는 가봄이의 눈빛은 과연 진지했다. 그래, 그랬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인 채로 지내는 것 보다는 처음부터 ‘나는 남자다! 너를 격하게 좋아한다!’ 하고 외치는 쪽이 더 좋은 결말을 맞았을 지도 모르지. 차였을 가능성이 물론 더 많지만, 이런 식으로 차이는 것 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르고.
하아.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면서 가봄이는 말했다.
“기운 내.”
“그래, 고맙다.”
진심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차이고 연애대상도 못 됐지만 앞으로도 친구로는 남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 같은 친구도 얻었고.”
“…….”
“누나 같이 구는 건 좀 그렇지만, 돌봐줘서 고마워. 고등학교 가서도 잘 부탁한다.”
아는 친구가 같은 고등학교에 간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니까.
“그래.”
가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떡볶이를 찌르기 시작했다. 어째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 잘못 했나?
“너도 나린이도 나도 똑같이 멍청이야.”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내 물음에 가봄이는 물로 입을 헹구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말해두지만, 나는 그런 멍청한 고백은 안 할 테니까.”
“그래, 나 멍청하다…….”
꼭 여기서 이렇게 상처를 후벼 파야하냐.
“그래! 너 진짜 멍청하다고, 이 바보야! 너 때문에 내 첫사랑도 끝났잖아!”
“뭐?! 너 사실은 나린이 좋아했냐?”
“아 진짜!”

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라한대]태풍소녀주의보!

원본 : http://lightnovel.kr/one/409364
작성 : 2012년 9월 2일



“후우, 끝났다!”
마지막 테이프도 붙이고, 남은 두루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걸로 일단 집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테이프로 막아두었다.
……예산 사정 안, 에서는 말이지만.
그렇다. 돈이 없다. 까짓것 테이프 한 롤이면 집에 있는 창문 전부 붙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거 살 돈조차 없단 말이다. 입에 풀칠하는 것도 정확한 영양소와 수분 계산을 통해 정량으로 살아야 버틸 수 있는데, 테이프를 추가로 사는 사치는 할 수도 없다.
“역시 신문지라도 주워올 걸 그랬나…….”
사실 못 붙인 창문이라도 해봤자 내 침대 쪽에 난 작은 창문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흔들리는 이 상황으로 보면 아슬아슬 할 것 같다. 깨지면 물어낼 돈도 없단 말이야.
“히이이잉~”
“아, 미안해 미순아! 너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고!”
이번 달 폭염 때 과열로 인해 폭발해버린 미순이를 고치느라 남은 돈을 깼거든. 들어보니 그것보다는 합선이 더 돈이 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했지만 합선은 짐작 가는 게 없어서 억울한 이야기였다. 삐진 미순이를 달래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어떻게 하지.”
버려둔 테이프 안 두루마리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온 물에 조금씩 젖어간다. 미순이는 일단 책상 위로 대피시켜둔 상태지만, 이 태풍이 지나면 청소하는 것도 고역일 것 같다. 뒷일 생각 안하고 헌 옷으로 문틈을 급한 대로 막았는데도 스며들다니.
어릴 때가 그립다. 그때는 태풍이 오면 그냥 무작정 좋아했었지. 그냥 왠지 모르게 좋아했었다. 뒤처리도 내 일이 아니었고. 창문이 깨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다만 좋아했었지.
그리고 지금, 테이프로 붙여놨음에도 덜덜덜덜 흔들리면서 소음을 내는 창문과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보고 있자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든다.
하필이면 직격 코스로 커브를 돌아 다가오는, 꼭 우리 집을 노리고 오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올해의 태풍이 싫다. 이 이상 별 일 없이 끝나면 좋을 텐데.
똑똑.
올해의 태풍은 저렇게 문에 노크소리를 낼 정도로 강력하단 말이야. 돌이라도 날아다니는 걸까. 제발 부탁이니까 간판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저예요. 문 좀 열어보세요, 오빠.”
“……응?”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혹시나 싶어 TV를 바라봤지만 TV는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올바른 자세에 걸맞게 재해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라디오도 아니고, 미연시를 돌리고 있는 컴퓨터는 켜져 있지만 한국어로 말할 리는 없을 텐데.
“오빠? 문 좀 열어보세요. 저라니까요?”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바람과 빗소리로 가득한 문 밖에서 들려온다.
“…….”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알게 모르게 이 집에는 귀신이라도 사는 걸까. 적어도 사람이 날아갈 이 돌풍 속에 우리 집에 찾아와서 오빠 어쩌고 할 사람은 모르는데. 나의 교우관계는 좁아서요.
두려움에 말없이 불을 껐다. 아차, 여기서는 불을 키는 게 좋았으려니. 귀신은 밝은 분위기에서 보는 게 더 나을 텐데. 하지만 혹시 스토커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냥 조용히…….
“오빠, 거기 있는 거 다 알거든요?”
“…….”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동시에 방에서 전기가 통째로 나갔다.
“으아아아아악?!”
분위기가 너무 적절해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렸다. 아, 안 되는데. 이럼 안에 있다는 걸 진짜로 가르쳐주는 일이 되잖아? 하지만 이미 나온 목소리를 어떻게 해. 나는 그저 전기가 나가서 “흐에에엥…….”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무는 미순이를 끌어안고, 캄캄한 방 안에서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람이 분다. 비도 몰아친다.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 끊이지 않고 들리는 빗방울 소리. 사운드 이펙트 죽이네요. 아무 소리도 없이 오로지 그 소리만 들리다보니 더더욱 두렵다.
찰팍, 찰팍.
그리고 문 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
무서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잠깐, 잠깐만. 아무리 머리를 돌려봐도 나에게는 스토커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보는 그 귀여운 여자애는 이런 성격도 아닐뿐더러, 나랑 애당초 말 섞은 적도 없다고. 그렇다고 나를 선망의 눈으로 봤을 리도 없고. 협박편지도 연애편지도 받아보지 못한 깨끗한 몸이다.
애당초 어떤 미친 스토커가 태풍 부는 날 밤에 우리 집을 찾아오냐고! 아 그래서 스토커인가?
콩콩, 콩콩. 이번에는 테이프를 붙이지 못한 창문에서 소리가 난다. 돌아보면 안 돼, 돌아보면 안 돼, 하지만 궁금하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돌아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봐버렸다.
타이밍 좋게 내려치는 번개의 섬광과 함께, 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씩 웃고 있는 소녀.
그리고 그 손에 들린 망치가.
쨍그랑!
“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무서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존나 무서워! 레알 무서워! 뭐야 이거!
창문이 깨지자마자 미친 것 같은 바람과 빗줄기가 내 침대, 그리고 방 안으로 들이닥친다. 춥다. 바람 때문에 빗줄기가 아주 그냥 수평으로 흩날려서 나를 적신다. 아, 미순이만큼은 젖게 하면 안 돼! 돈 나간단 말이야!
미순이를 가리려 하며, 그리고 미순이를 끌어안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자, 무서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소녀는 여전히 한 손에는 망치를 쥔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말 했잖아요? 오빠 거기 있는 거 다 안다고. 자꾸 무시하면 창문 다 부술 거야☆”
“그만 둬! 창문은 깨지 마!”
내 다급한 외침에 방에 들어온 소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무섭다. 진짜 무서워서 미칠 것 같다.
망치를 든 미친 소녀가 눈앞에 있음에도 창문이 깨져 수리비를 내야하는 내 처지가 슬프다.
일단은 전기가 복구되었다. 방안에 온통 물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밝아지니 조금은 좋다. 한국전력 분들, 태풍 부는 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TV는 그대로 꺼진 상태고, 미순이만 나처럼 무서운지 “히이이잉!”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한다.
“오빠도 정말, 그러니까 부를 때 빨리 문 열면 좋잖아요? 응? 내가 일부로 오빠를 만나러 여기까지 왔는데……. 오빠는 깍쟁이☆”
소녀는 손에 든 망치를 앙증맞게 휘두르며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표정만 귀엽지 이건 무슨 전설의 고향은 아이들 자장가로 들려줄 정도로 무섭다.
짧게 자른 머리, 활발해 보이는 얼굴과 옷차림. 손에 든 망치만 빼면, 그리고 이 비바람 치는 태풍 속에 우리 집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는 사실만 잊으면 상당히 괜찮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전혀 괜찮지 않다.
“언니에게 들은 거랑은 완전 다르네요? 오빠 완전 실망이야 >_<☆”
시끄러 이것아. 내가 지금 태풍을 뚫고 와서는 우리 집 창문을 깨고 들어와서 망치 들고는 키랏 자세 잡고 있는 여자애에게 왜 그런 평가를 들어야하는 건데. 물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쳤냐. 망치로 후려칠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잠깐.
“……언니?”
나도 모르게 질문하자, 여자애는 잘 물어봤다는 듯 망치를 나에게 겨누며 웃었다. 겨누지 마! 웃지 마! 지릴 뻔 했다고! 이미 바닥에 들어온 물 때문에 바지가 축축하지만.
“그래요! 울 언니요! 지난 달 초에 왔다 갔었죠? 그때 언니가 완전 와일드하게 자기를 덮쳐서 여자를 가르쳐주려고 한 나쁜 남자라고 좋아하던데…….”
“그딴 적 없거든!”
아니, 확실히 우리 집을 찾아온 여자애를 완전 와일드하게 덮친 적은 있지만 여자를 가르쳐주려고 한 적은 없거든요? 나쁜 남자도 아니고. 그보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태풍☆입니다☆!”
“…….”
완전 상쾌하구나, 너. 과연 다 때려 부수는 게 어울리는 처자군.
“아무튼, 실망이에요! 그래서 어디 얼마나 멋진 남자인가, 태풍 부는데 나와서 ‘덤벼봐 짜샤! 넌 날 못 죽여!’ 할 정도의 패기 넘치는 남자일지 두근거리면서 왔는데 창문 틀어막고 바지나 적시는 남자라니……. 흥흥! 원래 다른 길로 가려고 하다가 오빠 보러 온 거였는데!”
“바지 안 적셨어! 이건 빗물이라고! 아무튼, 그럼 지금이라도 그러면 봐줄래?”
“아까 오는 길에 간판 하나 주워왔는데, 선물해드릴까요?”
“…….”
“뭐, 오빠 같은 치킨이 그럴 리도 없겠지만요. 흥흥! 먼걸음 헛걸음 했어요!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
뭐 임마. 니가 멋대로 커브샷 꺾어서 온 걸 날더러 뭘 어떻게 책임지라고.
“응? 그 선풍기……. 아아!”
태풍은 내가 끌어안고 있는 미순이를 보더니 이번에는 망치를 미순이에게 겨눴다. 어딜 겨누는 거야. 그보다 저 녀석, 왠지…….
“그 선풍기가 언니에게 창피를 준 그 선풍기군요! 마침 잘 만났다! 그 선풍기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 먼 걸음을 한 거예요!”
“말 바꾸지 마! 가던 길이나 조용히 가라고!”
“오? 저에게 덤비는 거예요? 창문 다 깨버릴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테이프를 붙여놨음에도 창문 하나가 박살났다. 진짜로 간판이 뚫고 들어와서 우리 집에 들어와 있잖아?!
“그보다 왜 하필 성인용품점 간판이요?!”
“문구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히쭉 웃은 다음, 태풍은 망치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한걸음씩 다가왔다. 바닥에 고인 물과, 비바람 때문에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 오빠, 저에게 도전하시는 용기는 높게 사지만 가만히 안 계시면 선풍기랑 같이 날려버릴 거예요? 얌전히 선풍기를 넘기면 오빠만큼은 안전하게 봐드릴게요.”
“…….”
“히, 히이이이잉…….”
나는 눈을 돌려 태풍 대신 품안에 안겨있는 미순이를 바라봤다. 빗물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해서 예의 미소녀로 보인다. 미순이는 울고 있었다.
“미순아…….”
“나, 난 괜찮아! 응!”
울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미순이. 미순이는 망치로 내려치는 시늉을 하며 웃는 태풍을 보며 울면서 웃었다. 엉덩이에 뿔 날 것 같다.
“어차피……. 지난번에 갔었어야 했던 로봇의 천국이었어……. 네가 안전하기 위해서 죽는다면, 지난 번 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응, 분명 나을 거야. 이번 기회에야말로, 피해보상을 받아서 새로운 선풍기랑 에어컨을 사……. 선풍기는 어떨까요?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시원한 바람. 인공의 바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풍기는…….”
“……그걸로, 넌 좋은 거야?”
“……응?”
울면서 웃지만, 강했던 미순이의 표정이 내 그 말에 흔들린다. 나는 미순이의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정말로 넌 그걸로 좋은 거야?! 날 지키려고, 그렇게 죽어서... 다시는 나랑 만날 수 없게, 바람을 만들 수 없게 돼도 좋은 거냐고!”
“나, 나는……. 그걸로…….”
“대답해! 미순아!”
“……싫어.”
결국 미순이의 강한 얼굴이, 무너졌다.
“싫어……. 싫다고……. 너랑, 계속 함께 하고 싶었어……. 그때도, 지금도! 언젠가 네 혼수물품으로도 살아남고, 네 아들딸에게 물려주고, 손자 손녀에게 물려줬다가, 네가……. 늙었을 때, 추억 삼아서 다시 돌려받으면…….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해주다 같이……. 그렇게, 떠나고 싶어……!”
“알겠다!”
나는 미순이를 살며시, 책상 위에 세운 다음 태풍을 노려봤다.
“오빠, 정말 나랑 싸울 거예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오빠 멋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선풍기 버리고 저랑 행복하게 살겠다고 하면 봐줄게요! 우리 언니랑 같이 셋이서 살아요!”
“허나 거절한다!”
나는 강인하게 외치고, 미순이를 돌아봤다. 미순이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됐지?”
“응!”
나는 버튼을 눌렀다. 미순이가 눈을 꽉 감고, 있는 힘을 다 내는 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히, 히이이이이이이이이잉!”
“응? 오빠, 잠깐만요. 이건…….”
지난 번 수리를 받을 때, 수리점 아저씨가 말씀하셨었다.
-모터 수리하는 김에, 정을 봐서 쌔끈한 놈으로 넣어줬다. 선풍기는 낡았어도 모터만 고치면 잘 돌아가니까.
-돈 더 달라고 하실 건 아니죠?
-그냥 사용하고 사용 평이나 나에게 들려줘.
-왜요? 홍보물품이에요?
-자작품이거든.
-저 그냥 갈게요.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거 너무 쎄잖…….
바람에 창문이 진동한다. 테이프로 붙여놨는데도 하나 둘 씩 깨져나간다. 미순이의 앞에 있던 모든 물품이 날아간다. 태풍은 양손으로 몸을 막으며 버티려고 했지만, 내리는 빗줄기를 다시 튕겨낼 정도의 바람에 오히려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겨우 선풍기가! 초당 풍속 53m, 중심기압 920헥토파스칼인 저보다 더 강한 바람으으으으을?! 꺄아아아아아아앙!”
외치다 못한 태풍이 날아간다. 비바람이 날아간다. 먹구름이 그치고, 새파란 하늘이 먹구름 사이에 보인다. 햇살이, 미순이와 나를 향해 비춘다.
“헤, 헤헤, 이겨버렸네…….”
“잘했어 미순아! 전부 네 덕분이야!”
나는 웃음소리를 내는 미순이를 돌아보며 웃었다.
하지만, 미순이의 상태는 이상했다.
“...미순아?”
“……미안, 나, 조금 힘을 너무 써버렸나봐…….”
이마에 손을 올린다. 이마가 뜨겁다. 아니, 온 몸이 뜨겁다. 몸에 묻어있던 빗물이 증발할 정도로.
“어떻게 된 거야! 미순아? 미순아!”
“회, 회로가 타버린 것 같아……. 헤헤, 또, 이렇게 되네…….”
“아, 안 돼! 가지 마! 안 된다고! 네가 말 했잖아! 마지막까지 함께 있자고!”
“미안해……. 나, 너무 졸려…….”
그리고, 미순이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빗물에 철퍽 소리가 난다.
외부 커버 따위는 이미 벗겨진 상태. 팬을 고정하던 고정장치도 부러지고, 팬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모터에서 연기가 뿜어져나온다.
“……미순아?”
“…….”
“미순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미순이는,
초국지적태풍이라는, 유래가 없는 현상을 일으킨 후,
눈을 감았다…….

[라한대]폭염소녀주의보!

원본 : http://lightnovel.kr/one/405555
작성 : 2012년 8월 5일



“아……. 안녕하세……. 요?”
“…….”
뭐지 이건. 문을 열자마자 든 생각은 오로지 그거였다.
때는 여름. 올해도 어김없이 그 힘을 무섭도록 발휘해주시는 빌어 처먹을 온난화 덕분에 날씨는 환장하도록 더웠다. 코스피 지수가 저렇게 매일같이 역사상 신기록을 갱신하면서 올랐다면 아마 대한민국에는 기뻐서 미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겠지. 안 됐네요. 최고기온이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태양빛은 뇌를 그대로 찜통에 넣은 고기처럼 익혀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리쬐고, 아스팔트는 지글지글 익다 못해 아예 녹아버렸다고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프라이팬 올리고 계란 탁 파 송송 하면 라면도 끓일 수 있다나 뭐라나. 시골동네인 우리 집도 이 모양이니 도시는 어떤 꼴일지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찜통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이 내 사랑, 내 소꿉친구 낡아빠진 선풍기 미순이랑 함께 사는 나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소녀는, 우물쭈물하며 내가 건넨 냉수를 받아들었다.
“저, 가, 감사하지만 더운……. 아, 아니, 뜨거운 물로 주시면 안 될까요?”
“…….”
주문이 참 많은 아가씨다. 그보다 이 더워 죽겠는, 미순이가 팬이 날아가도록 가동되고 있는 이 시점에 뜨거운 물이라고? 취향 거 독특하네.
하긴, 독특한 취향은 외견부터 묻어나온다. 뭐냐 저 옷은. 도대체 왜 저 아가씨는 이 땡볕에 검은 드레스를, 그것도 저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덥고 짜증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거지? 진짜 옆에 그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덥다. 내가 짜증난다.
끓인 물이야 대충 땡볕에 내밀었다 주면 되는 고로 나는 그렇게 했다. 그 사이에 손이 데이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아, 감……. 사합……. 아아…….”
그리고 애매한 웃는 얼굴로 내 잔을 받아들이려던 소녀는 너무 뜨거웠는지 잔을 놓쳐버렸다. 담겨있던 뜨거운 물이 내 다리를 익혀간다. 다리만 온탕, 아니 열탕에 들어온 기분이다.
눈까지 가린 긴 검은 머리(확 더워진다), 그 밑의 얼굴은 제법 예쁜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옷이랑 합쳐져서 참 둔하고 어리버리하게 느껴진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좋다, 정도로 생각할 거다. 사람마다 성격은 다른 거고, 다른 사람이 둔하고 어리버리 하다고 뭐라고 할 권리는 나에게 없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고.
짜증나잖아.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그런 생각은 일단 구덩이라도 파고 마음 깊숙한 곳에 던져뒀다. 더운 여름날에 구덩이를 파고 던져넣느라 훨씬 더워졌다. 미순이의 파워를 더 올렸다. ‘히이잉~’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팬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회전속도가 올라갔다. 힘내라, 미순아.
“저, 물 좀…….”
“…….”
이번에는 소녀가 물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잔을 아예 내려두었다. 그리고 눈빛으로 ‘엎으면 뒤진다’ 라는 사념을 보내줬다. 잔을 집으려던 소녀는 왠지 움찔하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미, 미지근한 물이라도 좋아요…….”
덥다. 더워서 미칠 것 같다. 그만 소꿉친구 미순이 말고 쭉빵한 에어컨이라도 들여놔야 할 것 같다. 이번에는 그런 사념을 담아 미순이를 바라봤더니, 기분 탓인지 ‘히이잉~’ 소리가 나면서 미순이의 회전 속도가 올라갔다.
“식으면 마셔. 아무튼 그래서, 넌 누구야?”
냉수 잔을 집으며 물었다. 그리고 물을 입에 확 들이키는 순간 고통과 함께 뿜어버렸다. 왜냐고? 한겨울에도 따뜻하게 음식을 보관해주는 우리 집 냉장고를 어르고 달래서 30시간이나 숙성시킨 내 사치품 냉수가 커피믹스라도 한 봉 부워야하지 않을까 싶은 알맞은 온도로 변했거든. 뭐지 이건? 아니,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이렇게 더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당초 미순이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잖아!
“아, 아으…….”
“아, 미안! 닦아줄게!”
하지만 그것도 뜨거운 물로 세수하고 세탁까지 마친 다음 그 옷을 여전히 입고 있는 저 여자애 좀 닦아준 다음이다. 여자애는 젖어버린 옷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 울쌍을 지으며 어버버버 하고 있었거든. 뜨겁지도 않나?
그러고 보니 정체도 듣지 못한 채 찾아왔다는 한 마디에 집으로 들인 상태에서 얼굴을 닦아주고 갈아입을 옷을 주는 건 세이프인가? EPIC FAIL 아냐? 그런 걸 고민하면서 일단 수돗물을 켰다. 행주로 닦아주는 건 좀 그렇지만 급하니 어쩔 수 없지. 화상 입겠다.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리고 뭐냐 이건? 분명 난 냉수 풀가동 했을 텐데? 아무리 우리 집 상수도가 시골의 특성상 개판 오 분 전이라고 해도 이건 온천수잖아! 손이 더운 물에 들어간 것처럼 화끈거린다. 화상까지는 안 입었겠지. 어쩔 수 없다. 나는 행주의 물기를 빼고 사치품을 조금 더 낭비하기로 했다.
행주의 물기를 짜내는 건 고통스러웠다. 두어 번 정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는 해냈다. 그리고 기껏해야 2컵 정도 남은 시원한 물의 한 컵 분량을 희생하며 재빨리 행주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좀 걸려 여자애는 얼굴의 물기는 털어버린 후였지만 이걸로 닦으면 시원이라도 해지겠지.
“자, 얼굴 내밀어봐. 시원할거야.
“아, 저, 잠깐…….”
“앗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 내 손이, 내 손이 익는 느낌이다! 뭐야 이거? 행주와 내 손 일부가 여자애의 얼굴에 닿는 순간, 행주에서는 맹렬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 손은 할 말도 없지. 손을 붙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나를 보면서 소녀는 어버버버 하고는 우물쭈물하는 모양이었다.
“저, 그게, 죄, 죄송, 해요…….”
“아으……. 뭐야 도대체…….”
눈물이 찔끔 콧물이 쬘끔. 마지막 남은 냉수를 사용할 수도 없어서 손을 미순이에게 가져다 댔다.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낫겠지.
그건 그렇고 덥다. 엄청 덥다. 여러 이벤트가 있어서 그런지 덥다.
그리고 슬슬 짜증난다. 더위에 짜증이 솟구친다.
하지만 괜찮다. 미순이가 나를 위로해주니까. 아아, 미순아. 역시 널 소꿉친구로 삼길 잘했어. 나를 진정시키는 건 언제나 너 뿐이야. 쭉빵녀따위. 앞으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자.
펑!
“미순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미순이는 모터 부분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충격 탓인지 미순이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나는 넘어지려고 하는 미순이를 받쳐 들었다. 미순이가 검은 연기를 쿨럭 거린다.
여기부터는 내 뇌내 망상이라고, 더위에 의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미순이를 안고 있었다. 약간 가냘프고, 순진한 얼굴에 커다란 안경을 쓴 미순이를. 미순이는 계속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애절하게 웃었다.
“미안……. 나, 여기까지인 것 같아…….”
“힘내! 미순아! 괜찮아! 내가 꼭 고쳐줄게! 얼마가 들든,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고쳐줄게!”
“헤헤, 기뻐……. 하지만 아니야……. 이제는 새로운 선풍기도 많이 나왔고, 에어컨도 있어……. 나한테 돈을 쓰느니, 그런 애들과 함께 시원한 나날을 보내…….”
“그럴 순 없어! 너랑, 너랑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데! 기억나지 않는 거야?! 어렸을 때 네 앞에서 외계인 놀이를 했던 것, 멱 감고 등을 말리던 것, 땀이 나서 네 머리를 셔츠랑 팬티 사이에 쑤셔 박고 즐긴 것!”
“마, 마지막은 좀 이상하지만……. 기억나…….”
“네가 너무 좋아서 코드 뽑은 너를 질질 끌고 돌아다니다가 바람 안 나온다고 운적도 있잖아! 그것들 모두 생각나지 않는 거야?!”
“나도……. 나도 다 기억나…….”
미순이는 어렵사리 웃으며,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모두 추억들이잖아……? 나는, 이렇게 낡았지만……. 너는, 미래로 나아가…….”
“그럴 순 없다고!”
“괜찮아……. 나는, 로봇들의 천국에 먼저 가 있을게……. 새로운 선풍기가 오면, 행복하게 해줘……. 선풍기는 어떨까요?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시원한 바람. 인공의 바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풍기는…….”
“미순아아아아아아아아!”
미순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나를 보며, 소녀는 이제는 정말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나를 위로하려는 듯 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에…….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 니다?”
“……누구냐, 넌.”
“……네?”
그리고 나는 미순이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소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더욱 더워졌다. 미순이가 없으니까.
덥다. 짜증난다. 그리고 그게 전부 이 녀석 탓이다. 이 녀석이 우리 집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내 짜증수치와 더위수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다.
“도대체 누구야 넌! 왜 여기 왔어! 원하는 게 뭐야! 정체는 뭐고! 미순이의 원수!”
“네?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저는…….”
“저는이고 나발이고 빨리 불……. 앗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
멱살을 잡으려다 다시 손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바닥을 구르자, 그런 나를 보고 소녀는 우물쭈물 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포, 폭염, 이라고 해요…….”
“……폭염?”
“그……. 네. 폭염.”
그렇군. 그런 건가.
모든 게 이해됐다. 이 애를 보면 왜 더운지, 왜 짜증이 나는지. 폭염이라는 건 스스로가 뜨거운 것 보다 보는 사람과 주위를 덥고 짜증나게 만드는 거였군. 폭염의 원인이 옆에 있으니 햇볕에 물 컵만 내놔도 끓고, 내 소중한 냉수도 끓고, 수돗물도 끓고, 행주도 끓고, 저 것의 몸도 끓고, 그리고…….
“…….”
나는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보다 온기가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빨라 보인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 뇌도 익어버린 것 같다. 나는 냉수 통을 꺼내, 뚜껑을 따고, 바닥에 누워서 잠들어버린 미순이의 위에 마지막 한 컵을 부워줬다.
“지금까지 수고 많았는데, 내가 널 위해 해준 건 아무것도 없어... 미안해... 이 냉수라도, 시원하게 마셔.”
미순이도 기쁜지 파직파직 하는 소리를 낸다. 미안하다.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말고는 하나 밖에 없다.
눈앞에, 미순이의 원수가 있으니까.
나는 이를 악 물고, 모든 통증을 이겨낼 준비를 하면서 왠지 모를 싸늘한 방안의 공기에 놀랐는지 두리번거리는 폭염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든 좋으니까 먼 곳으로 썩 꺼져버려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라한대]이곳은 이제 제 영토입니다

원본 : http://lightnovel.kr/one/396089
작성 : 2012년 6월 7일


-잘 생각해봐. 어차피 방학 중에는 학교는 아무도 쓰지 않잖아?
거기서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아니, 물론 사후평가긴 하지. 저런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설마 이런 일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 저 정도야 다들 농담 삼아 주고받잖아.
“따라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방학식 종료를 기점으로 본 학교는 제 지배하에 놓이게 되겠습니다!”
……저딴 소리 말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철문을 채 열기도 전에 들려온 소리에, 평소엔 잠겨있는 옥상 문을 벌컥 열면서 외쳤다. 보이는 것은 과연 여름답다고 해야 할까, 구름 하나 없는 완전한 스카이 블루, 그리고…….
“감히 누구에게 미친 소리냐고 하는 것이냐! 죽고 싶은게냐!”
돌아보면서, 채 3m도 떨어지지 않은 내 얼굴에 대고 확성기로 있는 힘껏 외치는 그 녀석.
“아악!”
일단 뭐라고 쏘아붙여주기 전에 귀를 틀어막고 비명부터 질렀다. 녀석은 그런 내 모습에 헤쭉, 하고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지은 다음 확성기를 입에서 떼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아니, 외쳤다.
“방금 내가, 아니지, 이때는 이 몸? 과인? 에이, 아무튼 내가 선언하지 않았느냐! 이 학교는 앞으로 나의 지배하에 놓인다고! 그런데 감히 본좌에게 그런 망말을 하다니!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못할까! 못할까! 못할까……. 얼얼한 귀 때문에 목소리가 에코로 들려온다. 이 이상 저 소송걸면 승소할 것 같은 소음에 노출된 채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어기적 어기적 하면서도 확성기를 빼앗은 다음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는 그 녀석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 두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긴. 말한 그 대로인데?”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둥근 눈매를 장난기로 가득 채운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옥상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에 긴 머리가 찰랑거린다.
“자, 봐봐! 저 넓은 나의 영토를!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빈 공간이잖아!”
여전히 먹먹한 귀를 문지르고 있자, 녀석은 내 손을 잡고는 옥상 끝으로 데려갔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밑을 보는 게 두렵지만 일단은 밑을 내려다봤다. 그보다 여기 난간 낮아! 떨어질 것 같아! 엄마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저 운동장도, 저 체육창고도, 저 별관도! 이 건물도! 전부 임자 없는 땅이잖아!”
아니, 그 운동장에는 지금 네 선언에 어이없어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가득 차있다만. 경찰은 다행히도 없다.
“임자 없는 땅이라니 그게 무슨. 여긴 학교라고, 학교!”
“그래. 방금 방학식이 끝난 학교지.”
녀석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런데 도대체…….”
“방학식, 끝났잖아? 그럼 임자 없는 땅 아냐?”
“……엉?”
도저히 의미를 모르겠다. 이 녀석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꽤나 예전부터 알고 있던 바지만,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인 나에게는 그 이상으로 이 녀석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말 머리 나쁘네.”
머리 나쁜 건 너다, 이 멍청아. 아니지. 나사 빠진 건 너다. 두어 개쯤 엄마 뱃속에 두고 나온 거 아냐?
“에이, 너무한다.”
우리 학교의 명물, 통칭 ‘싸이코’인 녀석은 헤헤 웃으며 바람이 기분 좋다는 듯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녀석이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싸이코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싸이코니까. 방학식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정상인으로 보이지는 않겠지.
“그런데, 넌 왜 왔어?”
“니가 맨날 이런 싸이코짓 할 때마다 내가 왜 너한테 찾아왔는지랑 일맥상통하는 이유지.”
전교의 기피대상이 되는 이 녀석과 그나마 말이 통하는 건 1학년 때부터 어울리는 나정도 밖에 없거든. 나 같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가 어쩌다 이런 싸이코랑 알고 지내게 됐는지는 꽤 기니까 생략.
“또 그 꼰대들이…….”
툴툴대면서 밑에서 웅성거리는 선생님들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녀석. 나는 한숨을 쉬면서, 늘 그렇듯 선생님들이 ‘니가 가서 좀 말려봐라’ 라고 부탁한 목적에 걸맞게 말했다.
“설명해봐.”
“정말 머리 나쁘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녀석은 말했다.
“어릴 때, 비밀기지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어?”
“……설명하라니까?”
“어릴 때의 로망 중 하나 하면 역시 비밀기지잖아. 하지만 예전이면 몰라도 요즘 도시에 비밀기지가 어디 있겠어. 버려진 오두막집 같은 것도 없고, 차고도 없고, 아파트 단지의 지하실 건물 같은 데는 벌레도 많고 쥐도 살고 영 그렇잖아.”
대화의 고삐를 죄는 건 포기했으므로, 그냥 이 녀석이 생까는 건 ‘설명의 연장’이라는 의미라는 걸로 받아들였다.
“나름대로 아빠 텐트 들고 나와서 만들어보고 했는데, 어른들이 자꾸 방해하더라고. 그리고 어두운 그런데는 왠지 무섭고. 그래서 비밀기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만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지……. 그리고 어제, 갑자기 내 두뇌를 번뜩이고 섬광이 스쳐 지나간 거야!”
녀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내지르고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학교는, 방학 때는, 아무도 쓰지 않는다!”
“…….”
“어차피 아무도 안 쓰는 장소, 그러면 방학 동안이라도 내가 비밀기지, 아니 그냥 기지로 써도 상관없는 거잖아? 그렇다면 이곳은 그 동안에는 내 영토, 나의 성! 내 마음의 고향! 원하는 시설을 마음대로 쓰고, 들여보내고 싶은 사람만 들여보내고, 그렇게 내 영토로 쓰겠어!”
아니, 방학 동안에도 선생님들은 학교에 자주 오시고, 보충수업이나 그런 것도 있고, 뭣보다 왜 학교가 방학 동안에 빈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건데?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당당하게 외쳤다.
“방학은 놀라고 있는 것! 따라서 나는, 학교에서 놀겠어! 내 영토로서!”
“…….”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은 내 뚱한 표정을 보더니 조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는 다시 나에게 밑을 내려다보게 했다. 무서워! 하지 마!
“잘 봐봐. 여기는 우리 땅이야.”
바람이 불어왔다.
5층밖에 안 되는 건물. 그다지 높지도 않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자 어차피 별 높은 빌딩은 없는 한가한 우리 동네의 경치가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운동장에는 꾸물거리는 사람들. 평소에는 그렇게 좁아보이던 학교가, 이렇게 보니 정말 손에 들어올 듯 작게, 그리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넓게…….
“학교에서 하고 싶던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책상으로 이 안에 비밀기지를 만들어도 좋고, 화학실이나 실험실에서 평소라면 못할 장난, 아니 실험들도 할 수 있고, 평소에는 잠겨있는 창고 안에는 뭐가 있나도 확인할 수 있어! 너 들어본 적 있지? 학교 밑에 로봇 있다는 소문. 그게 진짜인지도 확인할 수 있고, 7대 불가사의 탐험도 좋아!”
정말로 왕궁에서 자기 영토를 가르치듯이, 손바닥을 쫙 펼친 채 녀석은 나를 보고 웃으며 온 학교를 가리켰다.
“그 심심하던 학교를, 얼마든지 놀이터로 만들 수 있다고!”
“…….”
“지금 나를 따르면, 2인자 정도는 시켜줄게.”
“……2인자?”
곰곰이 고민하는 녀석.
“음... 왕은 나니까, 뭐가 좋을까. 내시?”
“그게 어딜 봐서 2인자야!”
“그럼 영의정 겸 좌의정 겸 우의정 겸 장군 겸 경비병 겸 어의 겸 식사담당 겸 노비 겸 내시.”
“내시는 꼭 들어가는 거냐?! 그것보다 2인자라기보다는 잡일꾼이잖아!”
“세상은 피라미드 구조야. 1인자, 왕이 있으니까 그 밑은 다 졸개잖아?”
“역시 그냥 선생님들에게 강경진압을 부탁해야겠어.”
“네 이놈! 반란이라니! 여봐라! 이놈의 목을 쳐라!”
“누가 칠 건데? 졸개는 나뿐인데.”
“스스로 치는 건?”
“꺼져!”



괴수는 사랑하면 안 되나요?

원본 : http://fangal.org/freenovel/468848
작성 : 2012년 6월 3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오로지 그 생각만이 들었다.
언젠가는 검은 봉지로 얼굴을 가려진 채 납치되는 일이 생길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결국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세상에는 별의 별 놈이 있는 법이다. 인기 없는 놈도 있고, 인기 있는 놈도 있는 법이다. 참고로 나는 후자다. 후자 중에서도 별의 별 놈이 다 있는 법이고, 인기 있는데 목석같은 놈, 입에 떠먹여줘도 못 먹는 놈도 있는 법이겠지.
나는 입을 열고 있는 대로 먹는 놈이다.
그렇다보니 울린 여자도 많고, 꽤 위험한 경험도 몇 번 해봤다. 레벨이 올라서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납치된 순간부터 내가 고민한 건 그 많은 여자들 중 누가 나를 납치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고, 나를 죽일 만큼 미워했는가 정도였다.
짐작 가는 곳이 너무 많아서 납치되는 내내 심심하지는 않았다.
“기남씨?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겨우 봉지가 풀리고, 갑자기 눈에 들어온 밝은 빛 때문에 흐릿한 시야 사이로 양복을 입은 나이 많은 남정네들이 그득그득 할 때는 솔직히 좀 놀랐다.
“당신이 꼭 반하게 해줬으면 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이 당신에게 걸려있습니다.”
“……네?”
그리고 이 말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인기남씨,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네? 어, 음, 네?”
얼이 빠진 내 대답에도 그들은 웃음도 짜증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쪽이냐 하면 엄청나게 심각해서 어설픈 농담이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처형될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제야 눈치 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상들이었다.
뉴스나 신문에서만 보던, 대통령, 장관들, 기타 등등. 그걸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온 몸이 경직됐다. 그렇잖아? 높으신 분들 앞이라고. 농담은 집어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여자 마음을 잘 알고, 잘 반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모셔오게 됐습니다. 다소 거칠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어, 음, 네.”
……농담은 집어치워둔 거다. 진짜로. 나름대로 진지했다고.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 앞에 서있던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께서는 깍지를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테이블 저 너머에서 나를 바라봤다.
“위급상황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죠. 지금 한국은 괴수와 싸우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약을 하는구나.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대통령은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기남씨는 우리가 모셔오느라고 아직 상황을 모르시는군요. 비서관.”
“네.”
대통령의 말에 비서는 들고 있던 리모컨을 조작했다. 대통령의 뒤에 펼쳐진 프로젝터 스크린에 뉴스가 흘러나왔다.
“……보시다시피 시내는 아비규환의 상황입니다. 괴수는 시내를 파괴하면서 나아가고 있으며,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어, 잠깐만요. 저거 카메라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나도 모르게 지적해버렸다. 분명 앵커 뒤에 왠 교복을 입은 미소녀가 건물을 부수면서 날뛰고 있는데, 저 크기를 보면 앵커 옆에 있는 정도의 크기란 말이야.
“괴수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괴수요? 안 보이는데요.”
저 미소녀 기운도 좋구나.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건물을 뽑아다 던지고 있어. 씩씩한 미소녀도 좋지. 난 별로 안 가리거든.
“화면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을 ‘기예수’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투명한 괴수인 모양이네요.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미소녀는 이제는 혼자서 말뚝 박기를 하고 있었다. 저런, 한강철교가 역시 좀 낡았지. 한번 달려와 뛰어 오른 순간 한강철교가 무너지면서 첨벙 하고 빠져버렸다. 그래도 개울물 정도인가보네. 하반신 정도만 잠겼어. 생각보다 한강물도 별로 안 깊구나.
“지금 막 한강철교를 부쉈군요.”
“아, 저거 녹화방송인가요? 그보다 저 뒤에 한강철교는 언제 복구했답니까. 잠깐, 저 납치되고 얼마나 지났죠? 한 5년 쯤 흘렀나요?”
미소녀는 한강철교에서 나와 여의도에서 치마를 쥐어짠 다음, 63빌딩에 올라갔다. 나무타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조금 엉기적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올라가다 63빌딩이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뚝 꺾여서, 버둥거리는 미소녀는 그대로 한강에 다시 빠져버렸다. 귀여워라.
“63빌딩도 무너졌군요.”
“다음은 국회의사당인가요?”
미소녀는 머리를 부르르 떨면서 일어나서는, 화가 난다는 듯 국회의사당의 돔을 꾹꾹 밟아버렸다. 돔이 우수수 무너지자 국회의사당이 조금은 쓸쓸해졌다. 저 돔 은근 멋있었는데.
“예지력이 좋으시군요. 다음번에는 좀 싼 건물로 부탁드립니다.”
“어, 다음번에는 남산타워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건 안 부서졌나요?”
“기대하시는 말투군요. 그것까지 무너지면 서울의 랜드 마크가 안 남아날 겁니다. 아, 경복궁 같은 문화재는 제발 안 부쉈으면 좋겠네요.”
“…….”
슬슬 농담으로 웃어넘기기 힘들어졌다.
“……그러니까, 대통령 각하 말씀은…….”
“네. 저 소녀가 괴수입니다.”
“……저 집에 갈래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보디가드 둘이 잡아 눌렀다.
“기남씨, 당신이 희망입니다.”
“이거 놔주세요! 제가 뭘 어떻게 하라고요!”
내 다급한 외침에 대통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이 나라 최고의 카사노바라고 들었습니다. 저 괴수, 아니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아주십시오.”
“……어, 음, 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서 저 괴수가 나타났습니다. 예고도 없는 출현에 피해가 막대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민간인 피해는 없는 상황입니다. 서울시민 전체가 현재 대피중이고, 대충 90% 정도 대피가 끝마쳐진 상황입니다.”
“…….”
“혼란을 노린 북한군의 도발에 대비한 전방 사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대는 현재 서울 외각에 집결중이고, 유사시에 대비 중입니다. 이미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입니다.”
“…….”
“괴수의 목적은 상세하게는 불명이지만, 아까 일단 의사소통은 성공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괴수는 스스로는 ‘기예수’라고 호칭하고 있으며,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밝혔습니다. 아마 종족번식이 목표로 보입니다.”
“…….”
“현재 괴수와 동급의 다른 동종 생명체는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어렵다는 의사를 표방하자, 괴수는 날뛰며 현재 파괴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종 생명체가 있더라도 저 파괴적인 모습을 보면, 둘을 소개해 번식행위를 하게 해서 동종을 늘리는 것은 인류에 대한 큰 위협입니다.”
“…….”
“미국과 기타 우방국은 군사작전을 요청하고 있고, 주한미군이 대기 중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 각하의 요청으로 현재 대기 중에 머물러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은 결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여자를 잘 사귄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기남씨를 모셔왔습니다. 이상입니다.”
“…….”
“다시 한 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남씨.”
대통령 각하의 말에 겨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내 표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저 괴수의 요청은 현재는 ‘연애를 해보고 싶다’ 입니다. 하지만 동종도 없고, 그에 따른 위험요소도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일단 인간과 같은 생김새를 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고로, 인간에 대해서도 연애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남씨, 당신은 여자 마음에 대해서 전문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 괴수를 당신에게 반하게 해서 파괴행위를 중지하게 해주십시오.”
“……진짜로요?”
“진짜입니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이 양반들이 단체로 약을 했던지, 아니면 원래 이 모양인지. 어느 쪽이든 이 나라를 떠나서 세계의 미녀들을 찾아서 이민을 가든지 해야겠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기남씨에게는 원하는 모든 지원과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또한 저 괴수가 반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면 뭐든지 요청하십시오. 대한민국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뭐든지 협조하겠습니다.”
“……거절할 수는 없…….”
“기한은 오늘 자정까지. 지금이 대충 아침 10시쯤이니……. 14시간 남았군요. 14시간 안에 기남씨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국군과 주한, 주일미군을 중심으로 괴수에 대한 공격이 개시될 것입니다.”
“…….”
과연 정치인이다. 선택지는 하나라 이거지. 고개를 슬쩍 돌려서 내 뒤에서 감시하고 있는 보디가드인지 뭔지를 보자, 둘 다 선글라스로 가릴 수 없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깨갱.
“해주시겠죠?”
이런 식으로 위협을 하고는 나보고 ‘해주시겠죠?’ 라고? 해줄 것 같냐? 저 대충 봐도 키가 50m는 되어 보이는 빌딩을 날리고 한강철교를 때려 부수고 63빌딩을 엎어버리고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리고 결국 지금 남산타워 꼭대기의 안테나로 이빨을 쑤시고 있는 저 괴수를 반하게 만들라고? 무슨 약 하셨기에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할게요. 해볼게요.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목숨은 소중한 거라 서요.
“믿겠습니다.”
대통령 각하와 나는 악수를 나눴다. 굳은 악수였다. 왠지 나도 비장미가 넘쳐야 할 것 같다.
 
 
태어나서 헬기를 타보는 건 처음이다. 왠지 감동까지 느껴졌다.
“지금부터 괴수에게 접근합니다!”
“잠깐만요! 저 괴수는 우리가 가는 걸 알고 있나요?”
“아뇨!”
“…….”
감동을 느낀 채 죽을 지도 모르겠구나.
공격헬기 두 대가 호위로 붙은 채로, 나를 태운 수송헬기는 방향을 선회해 남산 꼭대기에 앉아 이빨을 쑤시던 안테나를 떼어낸 채 부숴버린 남산타워로 비행기 놀이를 하는 괴수에게 다가갔다. 괴수가 이쪽을 눈치 채고, 머리 위로 부웅 거리며 가지고 놀던 남산타워를 내려놓았다. 수많은 여자들과 추억을 나눴던 남산타워가 저렇게 박살난 걸 보니 기분이 오묘하다.
“오지 마세요!”
괴수가 소리쳤다. 하마터면 고막이 터질 뻔 했다. 소리 때문에 생긴 충격파로 헬기가 다 요동친다. 조종사가 비명을 지르며 헬기를 정상으로 돌리려고 조종간을 잡아당기는 게 보였다.
“오지 마!”
괴수는 내려놓은 남산타워를 들어서 붕붕 휘저었다. 다시 충격파가 날아오고, 비틀거리는 헬기가 겨우 휘젓는 남산타워를 피해서 괴수를 한 바퀴 돌아 선회한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군인이 소리쳤다.
“원하던 남자를 데려왔다! 공격하지 마!”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이거 대화 성립 이전에 말을 나누다보면 내 고막이 터질 것 같다. 생각해보면 말이나 나눌 수 있을까? 저 괴수 입장에서는 개미가 떠드는 걸로 들릴 텐데 말이야. 군인은 겨우 생각났는지 헬기에 달린 거대 스피커로 통하는 마이크를 잡아들었다.
“원하던 대로 남자를 데려왔다! 공격을 중지하라!”
“뭐요? 진짜요?!”
아이고 귀야! 헬기 바로 옆에 달린 커다란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리자 귀가 울리고, 괴수의 대답에 다시 귀가 울린다. 아무래도 일단 이 일이 끝나면 보청기부터 받아야 할 것 같다.
다행히 괴수는 말이 통했는지 남산타워를 다시 내려놨다. 휘둘러서 내구도가 떨어졌는지 남산타워는 바닥에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위의 관람대와 밑의 기둥이 분리됐다. 관람대가 남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빌딩과 부딪힌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자연재해구만.
“어, 어어?”
그리고 남산타워를 내려놓은 괴수의 손이 헬기로 다가온다. 손 한 번 정말 크다. 나도 모르게 헬기 저 쪽으로 물러나는 순간, 옆에 타고 있던 군인이 내 등을 강하게 걷어차 밀어낸다.
“행운을 빕니다!”
“행운을 빈다면서 차지 마! 잠깐, 살려주세요! 아아! 떨어진다고! 야! 야 임마! 너, 너 이 새끼 논산 훈련소 몇 기야! 내가 전역한지 지금 몇 년……. 꺄아아악!”
어떻게든 뭐든지 잡으며 버티려고 했지만 등을 걷어차는 발길질에 밀려나 헬기 밖으로 나온 순간, 내 몸을 괴수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끝이야. 꿈도 희망도 없어. 이대로 입으로 옮겨서 잡아먹는 거 아니야? 헬기는 내가 잡히자마자 미련도 없다는 듯 저 멀리 떠나버렸다. 나는 멍한 눈으로 그 쪽을 보다가 괴수에게 얼굴을 돌렸다. 제법 예쁘게 생긴 미소녀의 얼굴이지만, 그 위에서 축구라도 해도 될 것 같은 커다란 크기가 너무나도 무섭다. 괴수는 손에 조심스럽게 쥔 나를 눈앞에 가져다 대고는 요리조리 살펴봤다.
“잘……. 생기셨네요!”
“아악!”
바로 앞에서 말하니 진짜 고막이 날아갈 것 같다.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지르자 괴수는 미안하다는 듯 표정을 바꿨다.
“미, 미안해요!”
“으아악!”
“저, 정말 미안해요! 이,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끄아악!”
제발 부탁이니까 미안하면 말을 하지 마라. 괴수는 팔을 최대한 뻗어 나를 멀리 떨어트려놨다. 그래도 귀가 아프다. 다행히도 목소리는 속삭이듯 줄여줬다. 그래봤자 내 입장에서는 소리 지르는 것과 별다른 차이도 없지만.
“당신이 내 연애 상대인가요?”
“그, 그래! 내가 대통령 각하가 직접 고른 네 연애 상대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괴수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손에 쥐고 있는 나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인간에게 있는 힘껏 외치는 개미의 심정으로 나는 목청껏 외쳤다. 아무래도 고막도 목도 나갈 것 같다.
“그래! 내가 연애 상대라고!”
“그, 그렇구나……. 헤헤헤!”
뭐가 그리 좋은지 괴수는 히히덕거리며 웃었다. 웃음소리도 괴수 급이다.
“얼굴도 잘 생기셨고……. 기뻐요!”
괴수도 일단 얼굴부터 보고 사는 거냐. 외모지상주의란. 뭐 내가 좀 잘 생기긴 했지. 못생기면 이 짓 하고 살겠냐. 괴수는 귀엽다는 듯 찍어 누르면 꽥 하고 터져죽을 것 같은 거대한 손가락으로 내 얼굴이나 몸을 쿡쿡 눌렀다. 아퍼! 힘 조절 좀 해! 그래도 괴수 입장에서는 개미가 터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느낌인 모양이다. 내 목이 떨어져나가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잘 안 들리는데…….”
그래, 일단 의사소통이 문제다. 개미랑 인간이 소통하려면 개미 목소리를 인간에게 들릴 정도로 증폭하는 게 필요하지.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려 괴수에게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괴수는 나를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지금부터 공병대가 네 귀에 스피커를 설치할거야! 앉아서 얌전히 있을 수 있어?”
“네! 기다릴게요!”
“들었죠?”
나는 옷깃에 장치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어차피 내가 말 안해도 다 들었겠지만. 귀에 낀 이어폰으로 상황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습니다. 공병대 출동!”
“지금 올 거야!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
“알겠어요. 그럼 잠깐 이렇게 귀에 대고 이야기해도 되죠?”
눈앞에 가져다 댄 괴수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고개를 돌리자 차 한 대 사람 한 명 없는 남산 밑에서 공병대의 트럭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음, 그럼 뭐부터 이야기할까~ 아, 일단 이름부터 이야기 하는 게 좋겠죠? 제 이름은 ‘기예수’에요. 그쪽은요?”
“내, 내 이름은 인기남! 기남이라고 불러!”
“기남씨라는거죠? 이름부터 멋지네요! 얼굴도 잘 생겼고! 혹시 연예인이세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래, 슬슬 임무에 착수할 시간이다. 임무라고 부르는 건 별로 안 내키지만, 지금 이건 목숨의 위기다.
이 괴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자 앞에서 ‘나는 카사노바고, 여자는 있는 대로 갈아치우고 먹어치워! 연예인은 아니지만 인기는 쩔지! 으헤헤헤!’ 라고 말하는 건 NG다. 뺨맞기 딱 좋다. 이 괴수면 먹어치울 거다. 여기서는 ‘너를 위해 준비된 단 한 명의 순정남’이라고 해두는 게 목숨 유지에 좋다.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아, 아냐. 뭐 그럴 것 같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하하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에요.
어느새 남산 위까지 올라온 공병대가 트럭에서 내린다. 괴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병대 병사들이 옷깃을 잡아 오르고, 크레인이 스피커를 들어올린다. 귓가에 뭔가를 넣는 사실이 간지러운지 괴수가 몸을 비벼서 하마터면 몇 명이 떨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다들 버텼다. 장하다, 군인. 목숨은 소중한 거다. 전역해야하는데.
“아아, 아아, 들려?”
“네! 이제 잘 들려요!”
내 말에 괴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좀 간지러운 느낌이긴 했지만, 이제 대충 의사소통은 될 것 같다.
“그러면 이제…….”
“그러면 이제 어디 놀러라도 가죠! 저 데이트는 처음이에요! 아, 긴장된다!”
제법 기쁜지 괴수는 하이텐션인 모양이었다. 근데 몸을 부비며 손을 휘저으면 내가 좀 어지럽단다. 구체적으로는 멀미나서 토하고 싶을 정도로.
“우윽…….”
“아, 죄송해요! 음……. 아! 가슴 안주머니라도 들어가실래요?”
괴수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나를 가슴에 있는 주머니로 가져다 댔다. 그러고 보니 왜 교복을 입고 있을까. 이 옷감은 어디서 난 걸까.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거대한 주머니에 푹 담겨서 온통 시야가 새카맣게 변하자 나중 일이 됐다.
“아, 너무 크네요……. 음……. 공병, 이라고 하셨죠? 공병 분들! 안주머니에 발판 좀 만들어주실래요?”
“부,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던 공병대는 한숨을 쉬면서 알았다는 듯 양팔로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천이 없어서 트럭 천을 뜯어서 안주머니 안에 내가 상체는 내밀 정도의 속주머니를 만들고 공병대는 철수했다. 괴수는 고개를 내려 내가 머리를 내놓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일어났다. 우, 우와……. 높다……. 갑자기 위로 쑥 올라가는 느낌이 들고 나자, 남산타워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서울 전경을 다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럼 이제 다 됐으니까 데이트 가요, 데이트! 저 예전부터 명동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명동 바로 이 옆이죠? 거기로 가요!”
“잠깐, 네가 가기에는 명동은 너무 작은데…….”
키 50m 괴수가 들어가기에는 명동은 무리가 있지. 이어폰으로 상황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절대 안돼요! 건물 다 무너집니다! 다른 곳으로 유도해요! 다른 곳!”
“에? 명동 못가요? 흥! 못가면 건물 다 부수면서 갈 거예요!”
50m 괴수에게 건물은 툭 치면 억 하고 무너지는 존재지. 하지만 여기서는 어떻게든 내가 리드해야한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그, 그거 말고 해보고 싶은 거 없어? 다른 걸로 말해봐! 다 들어줄게!”
연애는 전투다. 농담이나 비유가 아니라 진짜 전투다.
전투란 무엇인가. 서로 싸우는 것이다. 서로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격돌하기 때문에 전투다. 서로의 것을 점령하려고 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가 원하는 것이, 예로 들자면 호텔이 있고, 여자는 여자가 원하는 것이, 예로 들면 분위기 죽여주는 레스토랑이 있다. 서로 그 원하는 바를 두고 조율하고 주고받으며 전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투답게, 한 번 주도권이 넘어가면 다시 찾아오기는 매우 어렵다. 여자를 후리려면? 간단하다. 칼자루를 계속 이 쪽이 쥐고, 너무 강하면 전투를 포기하기 때문에 작은 부분에서 칼자루를 넘겨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칼자루를 쥐기 좋았다. 일단 내 외모도 있고, 경험으로 쌓인 여유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논외다. 저 쪽은 원하면 서울 시내를 죄다 엎어버릴 힘이 있다. 아차하면서 칼자루를 놓치면 그대로 휘둘린다. 여기서 내가 꺼낼 수 있는 칼자루는 국가의 지원이다. 세금이 이따위로 나가는 건 슬픈 일일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냐. 예산 따위!
“진짜요? 다 들어주는 거죠?”
“응! 최대한 들어줄게! 국가예산이야! 국가예산! 조 단위라고! 뭐든 말해!”
“조, 조 단위요?! 백 위의 천 위의 만 위의 억 위의 그 조?!”
이어폰으로 ‘조 단위로 들어가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최대한 줄여요!’ 라고 외치지만, 연애에서는 그런 거 없다. 돈 들어가는 게 연애라고. 거기에 이쪽은 50m 괴수라고. 돈이 한 십만 원 단위로 깨질 줄 아셨어? 박살낸 건물 다시 짓는 데만 억 단위다! 좀 힘 써! 내 목숨이 걸려있다고!
꼬르륵.
그 순간 천지를 울릴 정도의 천둥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자 괴수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윽.”
“……이, 일단 밥이라도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말해봐!”
“그, 그러고 보면 아침도 못 먹었어요…….”
“뭐든지 말해봐! 조 단위야, 조 단위!”
“음~ 저 예전부터 캐비어라는 걸 꼭 먹어보고 싶었어요!”
“그거 빼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50m 괴수가 먹을 캐비어는 한국을 통째로 찾아도 부족할 거다. 아니, 한국을 너무 무시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그건 밥으로 먹는 게 아니라고.
“그럼 스테이크요!”
“들었죠?”
“양식 조리사 자격증 있는 사람 전부 불러! 전국 농장에 전부 전화해! 육류창고나 물류센터에도 다 연락하고!”
50m 괴수가 스테이크로 배를 채우려면 소가 몇 마리나 필요할까.
 
 
수학은 약하다. 하지만 여자를 후리려면 머리 계산은 빨라야하는 법이다. 박학다식한 여자도 많으니까.
간단하게 계산해보자. 일단 외견상은 여자애니까 대충 평범한 여자애의 키는 160cm 잡고, 50m로 뻥튀기 한다면 키만 대충 30배 나온다. 3차원의 입체단위니까 면적은 세제곱. 그럼 부피는 대충 2만 7천배 늘어난다. 생각만 해도 아득해진다.
스테이크 일 인분으로 한 명 배가 차면, 이 괴수의 배를 채우려면 못해도 잠실 운동장을 가득 매우는 사람에게 스테이크를 제공할 정도의 육류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남산 일대는 고기로 가득 찼다.
대피한 시민들 중에서 양식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죄다 부르고, 육류창고와 도살장 전부에 연락해서 모인 고기가 대충 3만 명 분. 스테이크 일 인분을 600g 잡고 계산해도 고기가 1만 8천 톤이다. 도대체 소 몇 마리를 죽인 걸까. 이 괴수를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예산이 억 단위로 빠질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내 알바 아니고. 내 몫으로 제공된 스테이크를 괴수의 어깨에서 먹으며 나는 대충 그 정도로 결론을 내렸다.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식사하는 것도 신선해서 좋구만. 좀 춥지만.
“먹어도 별로 먹는 느낌이 안 나요…….”
괴수는 바닥에 쌓여있는 스테이크 조각을 대충 집어먹으면서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건 그렇겠지. 사람에게야 몇 번이나 썰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스테이크 일 인분도 이 괴수에게는 입으로 털어 넣으면 씹을 필요도 없는 부스러기 사이즈일거다. 처음에는 한 두 개씩 집어먹던 괴수도 어느 순간부터는 한 움큼 집어서 입을 가득 메우고는 질겅질겅 씹었다. 왠지 내 크기감각도 이상해질 것 같다.
“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연인이랑 스테이크를 먹으면 로맨틱할 줄 알았는데.”
연인, 이란 말이지…….
뿜을 뻔한 고급 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티를 내면서 삼켰다. 이 정도는 기본 스킬이다. 그보다 이 괴수 엄청 순진하구만. 이 정도로 순진한 여자도 요즘 보기 힘든데.
“그래? 창문도 없이 이렇게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온 나라가 지원해주는 식사를 먹는 건 충분히 로맨틱한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연인을 어깨에 앉히고 먹는 경험은 아무도 못해볼걸?”
하지만 그렇다고 반응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 내 말에 괴수는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웃으며 볼을 붉혔다.
“그, 그건 그렇죠? 헤헤헤…….”
이 정도 말에 넘어갈 정도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되지 않아? 스스로도 약간 한심스러움이 느껴져서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와인글라스를 들어서 목을 축였다. 다행히도 괴수는 ‘미성년자니까요’ 같은 되먹지도 않은 논리로 거절해서 비싼 와인이 수백 수천 병씩 깨지는 일은 없었다. 괴수가 미성년자라니.
“기남씨, 괴수의 상태에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까?”
이어폰으로 들려온 상황실의 말이 어딘지 숨기는 기색이라, 나도 괴수 귀의 스피커에 통하는 마이크를 피해 작게 속삭였다.
“아뇨,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1단계 실패!”
뭐가 실패라는 거야. 사령실의 아쉬운 것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괴수의 목소리가 들려와 신경의 집중 점을 순식간에 옮겼다.
“그보다 기남씨! 밥도 다 먹었는데 이제는 뭘 할까요?”
집에 가고 싶은데. 속마음을 완전히 묻어두고 웃으며 대답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들어줄게.”
“이럴 때는 남자가 리드해주는 게 좋은데…….”
수줍어하는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50m짜리 괴수를 뭘 어떻게 하면 리드하란 말이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연애경험은 있지만 너 같은 괴수랑 연애는 처음이라고.
“음, 나도 연애경험은 별로 없어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지 들어줄 수는 있지만.”
일단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해봤다. 괴수는 약간 삐진 듯이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기남씨는 저랑 하고 싶은 일 없어요?”
“…….”
와, 이 질문 어렵다. ‘오빠는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는 쨉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50m 괴수랑 하고 싶은 일이라. 글쎄. 같이 아파트 뽑기 놀이라도 하기는 그렇잖아.
“이, 일단 영화라도 볼까?”
말하고도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 ‘영화라도 볼까?’ 라니, 이 무슨 진짜로 연애경험도 없는 숫총각 같은 말을. 이어폰 너머 상황실에서도 ‘그 정도면 차라리 내가 하겠다’ 라는 느낌의 한숨이 울려 퍼진다. 뭘 어떻게 하라고. 댁들 50m짜리 괴수랑 연애해본 적 있어요? 없지? 그럼 어차피 날 부르나 안 부르나 똑같다고.
“영화요……. 좋아요!”
“…….”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하는 괴수를 보니까 왠지 모를 한심스러움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굴할 수는 없다.
“뭐 보고 싶은 영화 있어?”
“있어요! 요즘 개봉한 그 영화 보고 싶어요!”
“들었죠?”
“스크린과 영사기 있는 대로 구해와! 위치는 공간이 넓은 광화문 광장으로!”
“팝콘이랑 콜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팝콘기계도! 콜라 유조차에 통째로 챙겨와!”
 
 
남산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이렇게 가까울 줄 몰랐다. 50m의 커다란 키로 몇 걸음 나아가자 그대로 광화문 광장이었다. 일단 건물은 부수지 않도록 커다란 길로 돌아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작은 건물은 성큼성큼 건너뛰면서 나아갔다. 서울 중심부의 도로고 바닥이고 나발이고 전부 갈려 엎어졌으니 내일 통근시간은 진짜로 지옥일거다.
“우윽…….”
그리고 그 사이 50m짜리 괴수의 가슴팍에 매달려있는 나는 내내 위아래로 요동치는 질나쁜 놀이기구라도 탄 기분이라 진짜로 구토가 몰려 올라왔다. 즐거운 듯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를 콧노래로 부르던 괴수는 내 구역질을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괜찮으세요?”
“아, 아니……. 이건 좀……. 우욱…….”
“아……. 좀 어지러우실 지도 모르겠네요.”
좀? 좀이라고 했냐? 네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위아래로 요동쳤는지 알기는 하냐? 뭐라고 내뱉을 수도 없어서 다만 불편한 표정을 짓자, 미안한 표정의 괴수는 나를 향해 손을 옮겼다. 잠깐, 아니 특별히 불만은 없어요! 죽이지만 마세요!
“최, 최대한 안 흔들리게 갈게요.”
괴수는 나를 집어서 자신의 오른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왠만한 방 하나 크기의 손바닥 위에 내가 털썩 주저앉자, 괴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손 위에 토하지만 말아주세요.”
괴수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최대한 손을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멀미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속도도 줄어들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흔들리지도 않자,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숨이라도 돌릴 겸 주위로 고개를 돌렸다.
빌딩 숲 사이, 땅바닥에서는 보이지 않은 새로운 광경.
나도 모르게 그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괴수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사실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빌딩의 유리창으로 거대한 괴수와, 외견은 소녀인 그 괴수가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얹고 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괴수는 아까까지 TV 뉴스에서 보이듯 건물을 박살내는 대신 바닥의 자동차조차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응차……. 읏차……. 어어, 으으…….”
왕복 4차선 도로조차 괴수에게는 좁았다. 거기에 다급히 피난명령에 도망치느라 차도 곳곳에는 자동차가 그대로 버려진 채였다. 괴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밟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나를 올려둔 손바닥만큼은 그 자리에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괴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바닥을 주의 깊게 보면서 걸어가던 괴수와 눈이 마주쳤다. 괴수는 눈을 깜빡이더니, 수줍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소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아, 다 왔어요!”
건물 코너를 돌자, 넓은 광화문 광장이 눈에 띄었다. 이미 작업반이 거대한 스크린을 세우고 있었다. 빠르구만. 빈 공간에는 유조차가 몇 대씩 서있고, 그 옆에서는 화물트럭을 가득 채운 옥수수 포대가 수십 개의 팝콘기계에서 신나게 튀겨지고 있었다. 나온 팝콘은 차도 위에 덮어진 방수포대 위에 수북이 쌓인다.
“정말 저를 위해 준비해줬어요!”
“하하, 당연하지. 네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지 해준다고 했잖아?”
기뻐하는 소녀를 보면서 여유를 부리며 대답하자, 소녀는 나를 보며 웃었다.
“대단해요! 기남씨, 혹시 뭐 대단한 분이세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소녀, 아무래도 자기가 자연재해라는 점을 까먹은 모양이다. 정부가 자기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다소한의 손실은 감안하기로 했다는 건 생각이 미치지 않는 걸까?
“부탁한 영화 상영이 준비됐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앉아주기 바란다!”
광화문을 가리듯 펼쳐진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자, 밑에서 헬멧을 쓴 군인이 확성기에 대고 외친다. 소녀는 알았다는 듯 귀엽게 경례를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높으신 군인 분은 경례에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음, 낮이라 잘 안보이긴 하겠네요…….”
하긴 영화는 보통 어두운 곳에서 틀어주지.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소녀를 달랠 겸 말했다.
“그건 좀 참아줘. 뭐든지 해줄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는 힘들어서.”
“알았어요. 기남씨가 절 위해서 힘내주셨는데요. 그리고 사실 이 영화를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소녀가 고른 영화는 작년 말 개봉했던 로맨스 영화였다. 해외와 국내에서 많은 호평을 받고 인기를 얻은, 감동적인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연애를 다룬 눈물 쏙 빼는 좋은 영화다. 나도 다른 여자들이랑 못해도 5번은 본 것 같다. 그런데 이 소녀, 아니 괴수는 분명 오늘 새벽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던데, 이 영화는 어떻게 알았을까?
채 고민하기도 전에, 소녀는 나를 이번에는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광고도 없이 바로 수십 대의 영사기가 빛을 바라며 50m 소녀와 나만을 위한 상영을 개시한다.
“어?”
영화가 시작하고 몇 분쯤 흐르자,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보니까 애드벌룬과 헬기를 이용해서 거대한 천막을 햇빛을 막도록 친 모양이었다. 소녀는 놀란 듯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어깨 위에 있는 나를 바라봤다.
“이것도 기남씨가?”
“어? 응. 힘들지만 기예수 너를 위해서 힘내봤어.”
아무래도 대화를 듣고 상황실에서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소녀는 내 대답에 크게 기쁜지 웃다가, 문뜩 떠올랐는지 말했다.
“근데 ‘기예수’라니, 누구예요?”
“엉? 네 이름이라면서.”
대답하자마자 하마터면 날아갈 뻔 했다.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 젓자, 그 바람에 천막이 크게 요동친다. 공중의 헬기들이 어떻게든 위치를 고수하려고 애쓰고, 나는 날아가지 않도록 옷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뭐냐! 왜 갑자기 난동이야!
“아니에요! 김, 혜, 수! 제 이름은 김혜수예요!”
“미, 미안! 잘못했어 혜수야!”
이제야 대충 알겠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거대한 머리카락에 몇 번이고 얻어맞은 뺨을 문질렀다. 워낙 크게 외쳐서 잘 안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이름을 혼동한 모양이다. 김혜수→기몌수→기예수→괴수 인건가. 거 참. 헛웃음 밖에 안 나왔다.
“흥!”
소녀, 아니 혜수는 흥흥거리며 바닥에 수북이 쌓인 팝콘을 한 움큼 쥐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콜라가 가득 든 유조차를 들어, 뒷부분을 뜯어 열고 그대로 들이켰다. 사이즈가 저렇데 보니 콜라 캔으로 마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난 것 같은 표정은, 이윽고 영화에 집중한 듯 입을 약간 벌린 채 빠져들듯 눈을 스크린에서 떼지 못했다.
나도 그래서 별 말 없이 6번째 보는 영화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이어갔다.
나름대로 진지한 생각을 하는 사이, 이어폰을 통해 상황실의 무전이 들려왔다.
“기남씨. 지금도 괴수는 그 상태 그대로입니까?”
“네. 영화 잘 보고 있는데요. 왜요?”
바닥을 둘러보자 작업한 인부들도 대충 둘러앉아서 팝콘을 먹고 유조차에서 콜라를 빼먹으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한가하구만. 하지만 그 순간 군인들이 나서서 인부들을 말리고, 이미 먹고 마신 인부들을 재빨리 부축해서 트럭에 태운다.
“알겠습니다. 2단계 작전도 실패!”
“…….”
무슨 일인지 몰라서 끌려가면 나쁜 건가 싶었는지 인파 사이로 숨어들던 인부 하나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진다. 인부들이 깜짝 놀라며 흩어지자, 군인들이 재빨리 달려와서 먹은 걸 게워내게 한 다음 다급히 끌고 간다. 설마하니…….
나는 혜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혜수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오로지 영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꼭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역시 좋은 영화였네요! 같이 봐주셔서 감사해요!”
“어? 응. 고마워.”
“그런데 기남씨는 콜라랑 팝콘 안 드셨네요? 제가 일부로 드렸는데.”
“어, 영화 보는 데 먹고 마시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영화에 집중하는 편이거든.”
“그렇구나…….”
혜수는 대충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포장지를 벗긴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막대기는 어떻게 하려나 싶지만, 저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사이즈가 사이즈니까. 그보다 대담하구나. 얘.
“아,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어? 아니, 괜찮아. 난 여기 있으니 좀 쌀쌀해서.”
“그래요?”
이번에도 대충 납득한 듯 혜수는 고개를 돌렸다. 태양이 슬슬 한강 저 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미안하네. 놀이기구는 역시 탈만한 게 없어서.”
“괜찮아요. 그보다 기남씨는 이젠 뭐 안타세요?”
“혼자 타서 뭐하겠어. 연인은 혼자 내버려두고.”
“그, 그렇구나……. 헤헤헤.”
혜수는 기쁜지 수줍게 웃었다. 나는 롯데월드 외각 섬의 꼭대기 첨탑에 대충 앉아서, 바로 옆에 쭈그려 앉은 혜수와 함께 석양을 바라봤다.
영화를 다 본 다음에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혜수는 이번에는 놀이동산을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에버랜드를 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상황실에서 ‘서울 외각으로는 절대 내보내지 마세요!’ 하고 외쳐서 여기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혜수는 도착하고 나서야 자기가 놀이기구를 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팔푼이구만.
처음에는 일단 나라도 몇 개를 타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혜수를 봤지만 사람 하나도 없는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것도 심심해서 지금은 그냥 이렇게 같이 있다.
나는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어?”
“……기남씨, 역시 제 연인이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제 연인이라는 말에는 다시 한 번 뿜을 뻔 했지만, 역시 이겨냈다. 나는 대충 발을 퍼덕거리며 말했다.
“새벽에 갑자기 나타난 괴수면 이름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작년 말에 개봉한 영화를 알 리도 없지. 아, 괴수라고 해서 미안!”
“아니에요. 역시 괴수 맞죠 뭐. 헤헤헤.”
혜수는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어며 웃었다. 잠시 웃던 혜수는 작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
“음, 그래요. 굳이 짐작 가는 구석이라고 하면,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네. 그냥, 짜증나서요. 그런 경험 없으세요?”
혜수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돌아보며 물었다. 그리고는 호수 물을 대충 휘저으며 말했다. 그 행동에 오리배가 갑작스러운 파도에 출렁거린다.
“하하, 이런 이야기 하기는 좀 창피한데…….”
“나라도 괜찮다면 말해봐. 연인이라면서?”
“그럴까요?”
최대한 믿음직스럽게 말하자, 혜수는 역시 단순하게 기뻐하며 말했다. 하지만 다시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우리 집, 별로 잘 사는 집은 아니에요. 엄마……. 아니, 그 여자랑 단 둘이서 살고, 제가 아르바이트 해서 돈 벌어 와서 살고 그랬어요.”
“그 여자……. 라니?”
“별로 엄마 취급하기 싫어요. 죄송해요. 오리배 하나만 부술게요.”
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오리배 하나를 집어 들어서 돌 수제비 하듯이 호수 수면에 던졌다. 영문도 모르고 오리배는 호수 수면을 튕기며 날다 호수 밖으로 날아가 박살이 났다.
“절 낳게 한 남자에게 속았다나 봐요. 그래서인지 좋은 남자 낚아서 호강하겠다고, 그렇게 살더라고요. 나이도 들어서 주름살도 쭈글쭈글하면서 돈 많은 남자 낚아서 어쩌겠다나. 죄송해요. 하나만 더 부술게요.”
다시 오리배는 하늘을 날다 박살난다. 지금까지 부순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 발의 피도 아니겠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래도 전 나름대로 열심히 살겠다고, 그러고 살았는데, 돈 모아두면 그걸로 보석이다 뭐다 사서는 치장하고, 매일매일 탕진하고……. 그러다 어제 말하더라고요. 드디어 돈 많은 부잣집 남자를 후렸다고. 근데 그러고는 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애써 웃으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애 딸린 여자인거 들통 나면 안 되니까, 앞으로 남남으로 살자나 뭐라나. 편지로 그렇게 적어두고는 모아둔 돈 전부 들고 없어졌더라고요. 보고 싶은 영화도 못 보고, 스테이크나 아이스크림, 콜라, 팝콘, 몸치장, 그런 거 전혀 모르고 모아둔 돈이었는데.”
혜수는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울다 지쳐 잠들 때 생각했어요.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그리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있더라고요.”
“…….”
“그리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남자가 좋은 거면, 어디 한 번 보자고. 그래서 이런 몸이 된 김에 땡깡 좀 부려봤어요.”
땡깡의 규모로는 좀 크긴 하지만, 이것도 모르는 척 했다. 오리배 날다. 콰직.
“솔직히 별로 기대 안했어요. 그런데 기남씨는, 진짜 멋진 남자더라고요. 이런 남자라면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오리배를 던지고, 혜수는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사랑만 있으면 다 포기할 수 있는 걸까요. 아이고 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석하게 나는 오리배를 던지기에는 너무 작다. 그래서 대신 적당히 둘러보다가 첨탑 꼭대기의 떨어져 나온 기와를 하나 잡아 집어던졌다.
여자를 데리고 노는 건 전문이다. 인기가 많다는 건 좋은 거다. 하지만 그러면서 상처 준 사람도 많다.
진심으로 날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 웃으면서 다른 여자에게 갔다.
내 애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지우라면서 다른 여자에게 받은 돈다발을 쥐어줬었다.
그런 내가 또 속이고 있었다. 기와가 없어서 아쉬웠다.
“오리배 하나만 던져봐. 나는 거 보기 좋다.”
“알겠어요.”
혜수는 별 말 없이 오리배를 하나 집어서 다시 날게 했다. 역시나 콰직. 조금은 후련했다. 50m짜리 괴수가 되는 것도 이런 걸 보면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빌딩까지 박살내면 정말 통쾌하겠지.
“기남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
“그렇구나.”
혜수는 이번에는 그냥 호수 물을 휘저으며 말했다.
“사실 기남씨, 인기 좋죠?”
“응.”
“역시나.”
혜수는 뭐가 좋은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하늘이 군청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음은 어디가 좋겠어?”
“글쎄요……. 인기 좋은 기남씨가 리드하는 건 어때요?”
“좋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좋은 일을 하러 가자.”
“조, 좋은 일이요?!”
혜수는 어째서인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걸어가자 혜수는 손바닥을 내밀어 내가 올라타게 했다. 나는 혜수를 보며 말했다.
“너희 집으로 가자.”
 
 
“부숴봐.”
“네?”
“부숴보라니까.”
“아니, 하지만…….”
혜수는 자신의 집을 내려 보면서 망설이는 듯 말했다.
“왜 그래? 한 번 부숴봐. 시원해질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차피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곳이잖아. 들어가서 잘 수 있는 곳도 아니고.”
“…….”
언덕 위 달동네의 낡은 집. 이 덩치로 짓밟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하지만 혜수는 머뭇거리면서 발을 내딛지 못했다. 나는 혜수의 손바닥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발을 굴렀다.
“이렇게, 이렇게. 밟아보라니까.”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저기에는…….”
“뭐. 엄마랑 같이 산 추억이라도 있어?”
“…….”
“널 버리고 갔다면서. 다 부숴버려.”
“기남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혜수는 내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지금까지는 부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으면서 지금은 부숴버리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못 부숴.”
“…….”
“잘 들어. 네가 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돌아갈 수 있을지 어쩔지도 몰라. 하지만 어쩌면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커진 것처럼 내일이 되면 갑자기 돌아갈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부수고 싶어도 못 부순다?”
나는 손가락으로 낡은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어? 저 집에? 가면 계속 슬퍼지지 않겠어? 이 일이 끝나고 저 집에 돌아갔을 때 아무 느낌 없이 ‘아, 집에 왔다. 우리 집이다.’ 하고 기뻐할 수 있어? 엄마가 버리고 간 집에?”
“……아뇨.”
“그럼 부숴버려. 부숴버리고 싶어서 커졌다면서.”
“…….”
혜수는 발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서치라이트가 이쪽을 비추고, 확성기에서 나온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하세요, 기남씨!”
깜짝 놀란 혜수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군대가 전차와 포를 가득 펼치고는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을 겁니다. 우리가 기남씨에게 부탁한 건 저 괴수를 말려서 파괴활동을 멈추게 하는 거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부수게 부추기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끄러워!”
나는 옷깃에 달린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상황실로 연결되었어야 할 마이크에 대고 외쳤지만,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멈췄다. 나는 있는 힘껏 외쳤다.
“지금까지 있는 대로 박살냈잖아! 이 애의 낡은 집 한 채 부수는 것 정도로 생색내지 말라고! 겨우 집 한 채 박살내는 것뿐이잖아!”
“한 채고 두 채고, 파괴는 파괴입니다. 약속한 자정이 지났습니다. 지금부터 국군과 주한미군은 연합해서 괴수를 섬멸하는 작전에 돌입합니다. 기남씨는 물러나세요.”
“섬, 멸이요?”
혜수는 혼란스러운 듯 군대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는 그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약속한 자정이 지나기는 개뿔이! 너희들 아까부터 얘를 죽이려고 별 짓을 다 했잖아!”
“……네?”
혜수의 얼굴에 경악이 더욱 커진다. 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스테이크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독을 있는 대로 타놓고는! 높으신 양반들 생각이야 뻔하지! 나랑 같이 있어서 방심하는 사이 죽이려고 별 수를 다 썼던 거잖아!”
“그, 그랬던 거예요?!”
혜수는 다급히 자기 몸을 둘러봤다. 나는 다시 외쳤다.
“안됐네! 계획한 대로 안 풀려서! 독에도 반응 안 하니까 이제는 무기로 죽이려고 하는 것뿐이잖아!”
“괴수는 인류에 대한 위협입니다. 저 거대한 힘으로 건물들을 박살내는 건 봤지 않습니까. 애당초 기남씨는 괴수를 말리려고 투입된 민간인일 뿐입니다. 이 여자 저 여자 잔뜩 사귄 경험을 높게 산 것 뿐입니다. 그 경험으로 저 괴수도 낚아서 파괴행위를 말리게 하려고 했지만, 계속 부추긴다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지금 당장 사격해도 상관은 없지만, 마지막 정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확성기로 들리는 목소리에 혜수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아마 내 정체 때문에 멈춘 거겠지. 하지만 혜수는 손바닥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남씨, 가세요.”
“안 가.”
“왜요?”
혜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처음으로 웃어줬다.
“사랑만 있으면 뭐든지 버릴 수 있는 거라면서?”
“…….”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힘껏 외쳤다.
“이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적이라고 죽이려고 들면서!”
“아뇨, 기남씨 덕분에 알았습니다. 괴수는 이쪽을 봐라!”
그 말과 함께 저쪽에서 전등이 점멸한다. 혜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엄, 마…….”
“좋다. 마지막 통섭이다. 만약 파괴행위를 멈추고 우리의 요구에 따른다면, 국군은 주한미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괴수 너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행동에 나서겠다! 원한다면 이 여자를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제공하겠다!”
“……뭐라고?”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확성기에서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민간인 하나의 희생으로 괴수가 아군이 된다면 국군도 다소간의 희생을 감수하겠다! 앞으로 3분주겠다! 우리의 조건에 응할 생각이 있다면, 양 손을 바닥에 내려놓고 투항의사를 밝혀라! 그러면 이 여자를 넘겨주겠다! 마음대로 처리해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
“…….”
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든 손 말고 다른 쪽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혜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야 건물은 있는 대로 부쉈지만, 최소한 아무도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생긴 피해자는 혜수를 죽이려고 탄 독 때문에 피해를 입은 인부들 정도다.
이 애는 소녀다. 여린 소녀다. 꿋꿋이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아온 소녀다. 그런 소녀가 괴수가 되었다. 스트레스를 좀 풀려고. 히스테리 좀 부리려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고 싶어서.
나는 그래서 쥐어 준 장난감이었다. 그래서 억지에 맞춰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 소녀에게, 소녀를 이용하려고 장난감을 쥐어주고, 지금은 아무리 막장이라도 자기 엄마를 죽이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쥐어 준 장난감인 내 말에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이 소녀에게 주는 선물이, 죽이라고 주는 엄마란 말이지.
그리고 내 역할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내 억지다.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안다면, 이 괴수는 나를 죽이려고 들겠지. 이 애의 입장에서 나는 인간쓰레기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억지다. 되도 않는 억지다. 누가 들어도, 봐도,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그러나.
나는 망설이는 혜수를 보고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꺄악!”
그 순간, 폭음과 함께 혜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넘어지는 자리에 있던 건물들이 무너지면서 먼지가 피어오른다.
“누구냐! 누가 사격한 거냐!”
확성기를 통해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전투기의 모습을.
“아야야…….”
혜수는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먼지에 거대한 교복이 더럽혀져있다. 어깨에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저 멀리 선회한 전투기가 다시 기수를 돌리며 미사일을 날린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사격! 주한미군과 연합해서 괴수를 섬멸한다!”
“그만둬!”
내 외침도 무력하게, 포탄이 쏟아진다. 혜수는 비명을 지르며 양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꺄아아악!”
포탄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혜수의 양 팔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이마에 찢어진 상처로 피가 배어나온다. 나는 있는 힘껏 혜수의 귀에 연결된 스피커를 향해 외쳤다.
“괜찮아?!”
“아, 아파요……. 그만두게 해주세요……. 나, 아무 짓도 안할 테니까……. 얌전히 굴 테니까……. 엄마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울음소리에 가까운 중얼거림. 작은 목소리지만, 분명 모두에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포격은 멈추지 않는다. 전투기는 계속해서 기관총과 미사일을 날린다.
“그만해! 항복했잖아! 그만 하라고!”
“섬멸하라!”
작은 내 몸으로는 어쩔 수도 없는 폭력이, 소녀에게 가해진다.
혜수는 이제는 등을 보인 채 엎드려서 그 폭발에 얻어맞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혜수는 웃었다.
“하하, 역시, 괴수는, 괴수인 모양이네요…….”
“…….”
“고마워요. 그래도, 마지막 하루로는, 좋은 경험…….”
“혜수야.”
나는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앞으로 새사람이 될게. 진짜로 네 연인이 될게. 그리고 네가 바라는 거라면 정말로 뭐든지 들어줄게.”
“…….”
“그러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 데요……?”
나는 고개를 돌려, 포격을 가하는 군대를 바라봤다.
결국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 소녀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아무도. 겉모습에 휘둘려서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랑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짓이지만…….
여자애 하나에 코가 꿰여서 이러는 건 수많은 여자를 울린 인간 쓰레기인 나라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나답지 않은 짓이지만…….
순진한 소녀의 연인, 괴수의 연인이라면, 이 정도야.
나는 혜수에게 속삭였다.
“다 부숴버려.”
 
 
“그러니까, 몇 번이나 말했잖습니까. 시 단위로 재개발 하는 것 보다는 싸게 들 것 아닙니까. 안 그래도 무너진 건물들이랑 박살난 무기 새로 사는 데 돈 잔뜩 들 텐데, 서울시를 다시 콩밭으로 엎어버리는 것 보다야 싸게 먹힐 것 아니에요. 미국은 예산심의 끝났다는데, 고국이 이러깁니까. 네? 뭐라고요? 괴수? 이것 보세요! 그 괴수 달래는 게 쉬울 줄 알았습니까? 나 몰라요? 자꾸 이러면 다시 한 번 콩밭 재배하라고 하는 수밖에.”
내 능글맞은 목소리에, 혜수는 히히거리며 웃었다. 이마에는 커다란 반창고. 양 팔에도 반창고. 다행히 치명상은 입지 않은 덕분에 대일밴드가 광고효과 내는 대신 특대사이즈로 만든 반창고랑 후원받은 후시딘 3만개 정도로 나을 것 같았으니까.
지금 혜수는, 양 손으로 뽑아낸 건물 하나를 들고 볼링이라도 하려는 듯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이대로 굴러가면 광화문 광장을 지나서 경복궁에 스트라이크 하겠지.
나는 잘 풀려간다는 의미로 혜수에게 윙크를 해주고는, 다시 한 번 핸드폰을 향해 말했다.
“아, 몰라요. 슬슬 혜수 손에 힘 빠진다니까 나랑 볼링시합이나 하렵니다. 결혼식장인 예정인 경복궁이 부숴지는 건 안타깝지만 댁들 때문에 다친 혜수 팔이 아프다는데 뭐 어떻게 해요. 뒷일은 알아서 하세요.”
“잠깐!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전국 은행에 보관한 금괴 전부 포스코로 보내라고 해! 포스코에는 연락해서 용광로 전부 비우라고 그러고! 특대 사이즈 금반지 제작하겠습니다! 할 테니까 제발!”
“결혼식 예산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 하지만 법률적으로 혜수양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그럼 나중에 치뤄주시던지요. 어차피 혜수 몸에 맞는 웨딩드레스 만들려면 시간도 꽤 깨질텐데. 이건 예식반지라고 치고.”
대통령에게 말하며 한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내 모습에, 혜수가 기쁜 듯 웃는다. 나도 핸드폰을 잠깐 귀에서 내리고 혜수에게 말했다.
“봐봐. 내가 뭐든지 다 해준다고 했지?”
“전부 제 덕분이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혜수는 여전히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국가단위로 협박을 하는 커플도 찾기 힘들걸. 하지만 한 일이 있으니까, 이 정도 벌은 애교로 받아들이셔야지. 어디 감히 내 연인을 죽이려고 드셨어. 무슨 깡으로.
나는 손짓으로 혜수에게 빌딩을 내려놓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