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7일 수요일

그녀는 노래방에서 언제나 소리를 질러댄다.


원본 : 소실(이쪽은 2차공개본 - http://lightnovel.kr/freewrite/367911)
작성일 : 2011년 8월경.
비고 : 시드노벨 4주년 단편제 참가작.


“아, 노래 잘 불렀다! 후련~하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약간 작은 입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훤칠한 키와 또렷한 눈매, 약간 탄 피부. 이마를 내보이며 높게 묶은 긴 포니테일 머리가 그 동작에 찰랑거린다. 나는 먹먹해진 귀를 문지르며 말했다. 하도 옆에서 소리를 질러대니 귀가 버틸 리가 있나.
“넌 목도 안 아프냐?”
“응? 노래하는데 목이 왜 아파?”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정말 음악에 있어서는 기인이라니까. 나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마시다 남은 물병 속의 물을 죄다 털어 넣었다. 나는 기인이 아니니까 목이 아프다고. 그녀는 내가 따라오지 않는 것에 고개를 돌린다.
“뭐해? 얼른 가자.”
나는 나를 돌아보는 그녀와 함께, 석양이 내리고 어두컴컴해진 번화가를 함께 걸어간다.
노래방에서 3시간 중 2시간 이상을 노래 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 녀석은 윤화린. 내 여자 친구다. 잠깐, 여기서 여자 친구라는 말은 ‘여자인 친구’ 라는 뜻이다. 사는데 특별히 도움이 되는 친구는 아니지만…….
화린이와 알게 된지는 올해로 대강 3년쯤. 중학교 때 같은 반이 되어 알고 지내게 된 뒤에,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 한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다. 뭐, 어차피 대학 부속학교인 중학교랑 고등학교니 같은 중학교를 나오지 않은 녀석 찾기가 더 힘들지만. 일단은 성별은 여자지만, 생긴 거랑 몸매 외의 모든 것은 사실상 남자라서 서로 두근거리는 일이라든지 그런 건 없다. 혹시 환상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트렁크 팬티와 런닝셔츠를 입고 지낸 이 녀석을 봤어야한다. 여자의 옷차림이나 그런 거에 뭐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많이 깼다고.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야?”
내 질문에, 화린이는 눈을 껌뻑이며 나를 돌아본다.
“무슨 일이라니?”
“니가 노래방 가자고 하는 일이 늘 있긴 하지만, 안 좋은 일이 있을 때가 더 많으니까.”
“응? 그랬나?”
화린이는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봐라, 이런 여자다) 말했다.
“아니, 조금 있으면 연주회가 있으니까. 기분 전환 삼아서.”
“아, 그러고 보니 슬슬 그런 시즌이구나.”
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화린이는 음악에 크게 재능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바이올린. 어릴 때부터 그쪽 바닥에서는 꽤나 유명했던 모양이다. 콩쿠르에서 상을 탄 것도 여러 번, 지금은 무려 연주회도 하고, 음악 잡지에서 인터뷰를 하거나 심지어는 방송에 소개된 적도 있다. 뭐 내 입장에서는 늘 보여주는 이미지하고 갭이 너무 커서 믿음이 안가지만. 중학생 때 한번 연주회 티켓을 줘서 보러 간적이 있었는데,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고풍스럽게 말아 올린 채 심각한 얼굴을 한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웃어버려서 아플 정도로 눈살을 받고, 실제로 공연 끝나고 화린이에게 아프게 맞은 적이 있다. 그래도 그건 너무 웃겼단 말이야.
“왜, 준비가 잘 안 돼?”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말을 얼버무린다. 뭐, 긴장감이라던가 그런 거겠지. 나도 대충은 압니다. 화린이는 이야기를 돌리려는 듯 말했다.
“됐어. 그 이야기는. 그보다 어때? 오랜만에 오락실이라도 안 들릴래?”
“오? 도전이야? 오늘도 연패기록을 갱신하시게?”
“네가 맨날 질것 같으면 얍삽한 꼼수 쓰니까 그런 거잖아!”
“얍삽한 꼼수라니! 그것도 엄연한 기술이라고! 내가 앉아서 약손만 쓰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
“지난번에 썼잖아!”
“흥, 약한 주제에……. 좋아, 도전 받아주지! 몇판 몇선승제?”
화린이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세보며 말한다.
“음……. 돈이 별로 없으니까 오늘은 3판 2선승제. 어때?”
“좋았어. 내기는 그대로지?”
“진 쪽이 내일 간식 쏘기.”
“오케이.”
화린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손가락을 우득우득 소리 나게 풀면서 외친다.
“좋아! 오늘이야말로 찍소리 못하게 밟아주지!”
“할 수 있으면 해봐!”


“여, 화린양. 주문한 대로 잘 사오셨나요?”
능글맞은 내 목소리에, 화린이의 얼굴이 팍 구겨진다. 손에는 빵과 주스가 한 가득이다. 화린이는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책상 위에 그걸 우두두 떨어트린다.
“햄버거, 단팥빵, 쿠키랑 비틀즈, 주스……. 오케이, 잘 사왔어요. 우리 화린이 어린이 착하다.”
“으으……. 이 굴욕……. 그렇게 말하고는 꼼수를 또 쓰다니…….”
“꼬우면 너도 쓰면 되지 뭘.”
“난 너랑 달라서 진지하게 승부에 임한다고!”
그렇게 말하며 자기 몫의 햄버거 포장을 뜯는다. 서로 급식을 먹기는 했지만, 그걸 로는 성장기 청소년의 배를 채울 수 없다. 뭐, 여자애들은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사실상 남자니까 청소년에 포함시켜도 되겠지.
“너 지금 뭔가 실례되는 생각 했지?”
“니가 남자라는 당연한 생각을 했을 뿐인데?”
얼굴로 주먹이 날아온다.
“누가 남자라는 거야!”
“지금 이게 남자라는 거야! 넌 어째 말보다 주먹이 늘 먼저 나오냐!”
“선수필승!”
그게 남자라니까. 내가 아픈 얼굴을 문지르는 사이, 화린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 몫의 햄버거를 먹어치우고는 내 빵에 손을 뻗어서는 입에 집어넣는다.
“임마! 그거 내꺼야!”
“승자의 전리품이야. 뭣하면 덤벼볼래?”
파이팅포즈를 잡고 잽을 날린다. 말을 말아야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때 친구 녀석, 민석이가 다가왔다. 아, 이 녀석은 그냥 남자다.
“여, 오늘도 둘이서 뜨거운 시간 보내고 계시나?”
“넌 맨날 아니라는 소리 듣고도 질리지도 않는다.”
빵을 먹으며 하는 화린이의 말에, 민석이는 어깨를 으쓱한다.
“미안하지만 내기는 아직 진행 중이라고. 솔직히 내 쪽에 건 놈이 더 많은 걸?”
“남의 인간관계 가지고 내기 하지 마라…….”
“에이, 별 상관없잖아. 우리 반 일동은 따땃한 시선으로 너희 둘을 지켜보기로 했으니까.”
“그것 참 도움 되네요.”
내 투덜거림에 민석이는 피식피식 웃는다. 역시 주위에서는 나와 화린이의 관계를 친구 이상 연인 미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확실히 남자랑 여자가 이렇게 허물없이 지내는 건 오해받기 쉽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니까. 화린이도 나를 남자로 보는 일 같은 건 없고.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반 아이들 눈에는, 뭐,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 이 녀석은 알면서 단순히 나를 놀리는 거지만. 이놈도 예의 트렁크 팬티와 런닝셔츠 사건 때 내 옆에 있었다고.
“화린아, 이런 녀석 버리고 나랑은 어때? 오늘 밤 재우지 않을 거라고?”
“야동 좀 그만 봐. 밤마다 작대기 잡고 흔드는 거 질리지도 않냐?”
민석이는 낄낄대며 웃는다. 이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여자는 찾아보기 드물 것 같다. 작대기 잡고 흔든다니. 말 좀 가려서 하란 말이야. 어쨌든 좋은 나이의 여자면 말이야. 녀석은 슬쩍 옆자리의 의자를 끌고 와서 같이 앉는다.
“그보다 화린이 너 그건 아냐? 이번에 그 밴드 신곡 앨범 낸다는데?”
“진짜?”
화린이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민석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한다.
“다음 달쯤에 앨범 나온데. 싱글 말고 정규 앨범.”
“오랜만에 나오네. 이번 싱글곡도 좋았는데. 나오면 바로 사야징♬”
“‘징♬’은 뭐야…….”
내 태클에 신경도 안 쓰고 화린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CD플레이어를 꺼내 귀에 꼽는다. 요즘 세상에도 이 녀석은 CD플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음악인의 자존심이라나 뭐라나.
노래방에서 늘 소리 지르는 노래만 부르는 것도 그렇지만, 화린이는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클래식 연주자의 이미지로는 영 보이지 않는다. 잡지나 그런 데에는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지만, 굳이 어느 쪽이냐고 하면 락커(Rocker) 쪽에 더 어울린다고 할까. 스스로도 인터뷰 같은 거 할 때 ‘취미는 커피에요’ 라던가 하는 대답을 할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말하기도 하고. 화린이의 방에는 지휘자의 사진 대신 해외 유명 밴드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클래식 연주회를 가는 대신 밴드 공연에 나가서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팔을 흔들기도 하고, 스스로 밴드도 하고 있다. 실제로 일렉트릭 기타도 바이올린 못지않게 치고. 뭐랄까, 음악의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일까. 재능이 많다는 건 좀 샘난다.
“다음번엔 이 곡 연습하고 싶은데.”
“그러시던지.”
“뭐야, 진지하게 대답하라고. 너도 상관있으니까.”
그리고 화린이가 리더를 맡고 있는 그 밴드 멤버에는 나도 들어가 있다. 사실 특별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녀석이 하도 자기가 가르쳐줄테니 하자고 졸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1년 정도 하고 있다 보니 어느 정도 익긴 했지만.
“아, 맞다. 공연 하니까 생각났다. 우리 여기 안나가볼래?”
화린이는 마침 생각났는지 주머니에서 구깃구깃 구겨진 종이를 책상에 펼쳐놓았다. 나와 민석이는 뭔가 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참고로 이 녀석도 어쩌다보니 멤버에 끼어있다.
“아마추어 밴드 연주대회?”
화린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참가자 전원한테 심사위원들이 평가도 해주고, 수상하면 앨범도 내준대. 어때, 좋지 않아?”
나와 민석이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다. 화린이는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이 불만인지, 눈을 얇게 뜬다.
“뭐야, 별 관심 없어?”
“아니, 관심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실력에?”
우리 밴드는 화린이 한명만 믿고 가는 밴드니까, 솔직히 나나 민석이의 실력은 보잘 것 없다. 나나 이 녀석은 음악의 신이랑은 영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프린트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역시 이런 대회라면 어느 정도 유명한 인디밴드들도 나올 거 아니야. 우리가 나가기엔 좀 이른 것 같은데.”
“세상 모든 일은 도전이라고. 나가기만 하면 평가도 해준다니까, 도움이 될 거 아니야.”
“으음…….”
화린이는 확답이 아닌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지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됐어. 아직 신청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일단 오늘 방과 후에 오랜만에 연습 좀 하자. 그건 괜찮지?”
“그거라면 괜찮지.”
“좋아! 밴드 대회를 목표로 힘내자!”
“아직 나간다고 안정했거든?!”
“쳇.”

“1, 2, 1 2 3!”
민석이 녀석이 스틱을 부딪치며 구호를 넣는 것과 동시에, 화린이의 일렉트릭 기타가 화려한 스타트를 끊는다. 뒤따라서 나의 어설픈 손가락도 열심히 코드를 잡으며 화린이의 기타 음을 따라간다. 베이스를 맡은 화린이의 친구, 수정이는 여유 있게 소리의 중심을 잡아간다. 전주가 끝날 무렵, 화린이는 앞에 있는 마이크에 입을 살짝 갔다대고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파워풀한 성량으로 시원스럽게 노래하는 사이에도, 손가락은 흔들림 없이 다음 가닥을 찾아 움직인다. 나름대로 처음보다는 실력이 올라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이 녀석의 재능을 따라가기에는 힘들다. 노래는 클라이막스로 다가가고, 모두가 열심히 손을 움직인다. 그리고 화린이의 화려한 피니시로, 노래가 끝난다. 화린이는 한번 숨을 고른 다음, 구형 오디오로 다가가 정지 버튼을 누른다. 나와 민석이와 수정이가 물을 마시는 사이, 화린이는 빠르게 녹음 된 노래를 들어본다. 이 녀석은 정말 힘들지도 않나.
“응, 잘 된 것 같아. 들어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화린이는 이어폰의 잭을 뽑고는, 테이프를 맨 앞으로 돌린 다음 재생 버튼을 누른다.
“괜찮은데?”
“아, 이 부분 실수한 것 같았는데 역시 좀 안 좋네.”
“여기서는 조금 더 오버해도 괜찮겠는데?”
우리는 서로 감상을 말하며 오디오 주변으로 모인다. 곡이 끝나고, 화린이는 정지 버튼을 누른다. 얼굴을 보니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음, 역시 좋아. 이 정도면 대회 나가도 쓸 만하지 않을까?”
어지간히도 대회에 집착하는구만. 화린이의 민석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대회? 무슨 소리야?”
“아, 너한테는 아직 말 안했구나? 이거 말이야.”
화린이는 프린트를 꺼내서 보여준다. 안경을 낀 수정이는 약간 눈을 찌푸리며 프린트를 읽어나간다. 화린이는 잠시 보여주다가, 프린트를 다시 챙긴다. 수정이는 화린이를 올려다보며 물어봤다.
“여기 나가자고?”
“나가고 싶은데, 여기 쓸모없는 남자들은 우리는 아직 이르다네?”
“쓸모없는 남자라니, 말이 심하잖아 이것아.”
화린이는 완벽하게 무시했다.
“어때, 한번 나가보고 싶지 않아?”
“음……. 한번쯤 나가봐도 괜찮겠네.”
“그치?”
“잠깐만, 우리가 나가기엔 아직 이르지 않을까?”
내 질문에 수정이는 대답했다.
“뭐, 나가서 상을 타거나 하는 건 분명 무리겠지만,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맨날 연습만 하는 것도 심심하고. 이런 기회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연습도 좀 더 될 것 같고.”
사실 밴드를 만든 지는 벌써 1년 정도 되어가지만, 우리 밴드는 연습만 할 뿐 공연을 한다던가 한 적은 없다. 실력에 자신이 없는 것도 있지만, 특별히 나갈만한 기회도 없었던 것도 있긴 하다.
“나도 사람들 앞에서 공연 한번 정도는 해보고 싶고.”
수정이의 말에 화린이는 눈을 빛내고, 나는 민석이 녀석과 시선을 교환했다. 사실 이끌려서든 어쨌든 밴드도 하고 있겠다, 공연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처음부터 대회라니, 압박이 너무 큰데.
“봐봐. 한번 정도 큰 맘 먹고 나가자니까? 설마 우리가 제일 못하겠어? 애당초 그냥 나가보는 거에 의의가 있으니까, 쪽팔릴 일도 없잖아.”
화린이는 당당하게 말한다. 이 녀석, 보아하니 연습 하자고 한 것도 이럴 의도였던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나도 욕심이 안 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역시 무서운 건 무서운 거란 말이야. 연습에서도 실수하고 있고.
“그래도 역시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
“정말, 남자라면 기세를 좀 보여 봐!”
“너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요?”
내 대답에 화린이는 볼을 부풀렸다. 이 녀석, 가끔가다가 여자애 같은 반응을 보이기는.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보자고. 보자마자 결정하는 건 좀 이르잖아. 네 말대로 아직 신청까지는 시간도 충분히 있고.”
“그래도…….”
화린이는 영 불만인 모양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대회에 집착하는 거야? 이 녀석이 뭔가에 이렇게 집착 하는 건 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하다. 나는 일단 화린이를 말리려 말한다.
“오늘 내가 떡볶이 살 테니까, 응?”
“콜.”
좀 사양이라는 걸 해봐라.


“자, 간다!”
화린이는 그렇게 외치고는, 파란색 지정 체육복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나는 배트를 뒤로 당기고, 시선을 집중한다. 화린이는 그대로 멋진 폼으로 공을 던진다. 오옷, 이 녀석, 그 사이에 속도가 더 올랐잖아! 하지만,
“질까보냐!”
공을 끝까지 보고,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두른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은 저 멀리 떠오른다. 오, 느낌 좋다! 나는 배트를 그대로 놓고는 1루를 향해서 달려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떨어진 공은 잠깐 구르더니 멋지게 잡혀서, 1루를 향해 빨랫줄처럼 날아왔다. 에잇, 잡힐까보냐! 나는 한층 더 속도를 올린다. 그리고 내가 1루를 밟는 것과 거의 동시에, 민석이 녀석이 송구를 받아서 내 몸에 댄다.
“아차~!”
“오케이! 1루 확보!”
화린이는 그 모습에 머리를 감싼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V자를 화린이에게 보인다. 이를 갈며 화린이는 감자바위로 대꾸한다. 흥.
“에이, 졌네. 오늘은 이길 줄 알았는데.”
“화린아, 조금 더 힘내봐! 매일 지면서 질리지도 않냐!”
“니들 닥쳐!”
남자아이들의 야유에, 화린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번에는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다. 남자애들은 그 모습에 웃으며, 서로 천 원짜리를 나눠가진다. 나는 화린이에게 외친다.
“이걸로 올해 전적 18전 6홈런 7안타 5플라이아웃 0삼진 되겠습니다! 넌 아직 나한테 안 된다니까!”
“시끄러!”
체육시간. 이제는 일과가 된 야구 대결은 오늘도 나의 연승이 이어졌다. 플라이아웃도 패배일 것 같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화린이는 삼진아웃만 카운트 한다고 선언했다. 내가 불쌍하다고 플라이아웃도 끼워준다고 한 적이 있지만, 두들겨 맞은 다음에는 맘대로 하기로 했다. 나야 간식값 아끼고 좋지 뭐.
보통 축구를 하겠지만, 왠지 우리반 아이들은 야구를 더욱 좋아한다. 그리고 여자애들은 당연히 피구를 좋아하고. 화린이는 야구파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남자애들과 함께 야구를 하게 되었다. 사실 피구 쪽에 가면 대항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퇴출된 것도 있지만. 운동신경이나 그런 것도 남자 급이라, 이쪽에 와도 별 문제는 없었다.
“아, 체육시간 끝났다.”
체육 선생님의 호각에, 우리는 대강대강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간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화린이는 남자애들 그룹에 껴서 수다를 떨며 걸어간다.
“그러니까, 너는 너무 정직하다니까. 삼진 대결이니까 너무 정 가운데로 던지지 말고 볼도 던지고 유도구도 던지라니까. 너 컨트롤은 되잖아.”
“하지만 저 녀석에게 꼼수 쓰는 건 내키지 않는단 말이야. 내 자존심이 허락 못한다고.”
“그래놓고는 매일 지잖아.”
“다음번에는 이길 거니까 괜찮아!”
나는 슬쩍 화린이의 옆으로 다가가서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여, 윤화린양, 오늘도 간식 감사함다?”
“으윽…….”
화린이는 인상을 팍 구긴다. 그 꼴에 남자애들이 모두 웃는다. 화린이는 “뭘 웃는 거야!” 하고 외치며 남자애들을 쫓아낸 다음, 내 옆에 서서 같이 걸어간다.
“웃는 것도 지금 뿐이야! 앞으로 너한테 진 거, 전부 돌려받을 거니까!”
“그래 그래.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토끼 머리에 뿔 날 무렵?”
“정말……!”
주먹을 들어 올리는 화린이를 보며, 나는 막는 척을 하며 낄낄댄다. 화린이는 투덜대면서 모래 운동장의 돌을 걷어찬다. 그리고 그러다가 미끄러졌는지, 바닥에 호쾌하게 엎어진다. 나는 푸하하 하고 웃는다.
“하하하! 바보야, 그걸 또 넘어지냐!”
“으윽…….”
화린이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옷을 턴다. 이 녀석, 운동신경도 좋으면서. 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화린이를 일으킨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화린이는, 그러나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아야…….”
“응? 너 팔 까졌잖아?”
그 말에 화린이는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바라본다. 모래 바닥에 쓸렸는지, 피부가 찢어져 피가 살짝 나오고 있었다. 화린이는 아픈지 인상을 찌푸린다.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정말, 괜찮아?”
“아파.”
“양호실 갈 수 있겠어?”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괜찮아.”
화린이는 그렇게 말하고 걸으려다가, 걸음을 비틀한다. 얼굴이 더욱 찡그려진다. 아무래도 발목도 삔 모양이다.
“뭐야, 발목도 삐었어?”
“아파…….”
평소에는 보기 힘든 약한 목소리로 칭얼댄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무슨 일 있냐?”
화린이는 얼굴을 붉힌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평소와는 다른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잠깐, 화린이 너 정말 괜찮아?”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영 괜찮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끈질기게 물어봤다.
“몸 안 좋은 거야?”
“……야.”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화린이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댄다.
“응? 뭐라고?”
“……라고! 한 달에 한번 오는 거! 눈치 좀 있어라 좀!”
화린이는 완전히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그렇게 외쳤다. 그 말에 이제야 눈치 채고, 나도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윽, 그렇구나. 화린이도 여자아이긴 하다. 지금까지 지내면서 이런 걸 몇 번 보긴 했다. 자기 말로는 자기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다고는 했지만, 은근하게 컨디션이 나빠지긴 했다. 그래, 내가 눈치 없긴 하지. 그래도,
“그럼 쉬었어야지! 오늘 체육은 왜 한 건데?”
그것도 그렇게 열심히. 화린이는 여전히 빨간 얼굴로 기어들어가듯 중얼거린다.
“자유체육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야.”
“정말…….”
나는 한숨을 쉬었다. 화린이는 고개를 돌리고는 절뚝절뚝 걸어 나갔다.
“됐어. 양호실 갈 거야.”
“야, 발도 뼜는데 괜찮아?”
“괜찮아! 너같이 델리케이트가 결여된 녀석하고 같이 가기 싫……. 아야!”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는지, 몸을 급하게 숙인다. 팔이 쓸린 것도 따가울 것이다. 거기에, 그것도 있고.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구만. 나는 한숨을 쉬고, 화린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야. 저리 가.”
“너 혼자 양호실을 어떻게 보내. 업혀.”
“뭐?”
화린이가 놀란 얼굴로 묻는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돌아보며 외쳤다.
“업히라고! 양호실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돼, 됐어! 창피하게…….”
“너랑 나 사이에 이제 와서 창피할 게 어디 있냐. 됐어. 업혀.”
“차라리 어깨를 빌려줘! 업히는 것 보다 나으니까!”
“됐다니까 그러네! 방금 눈치 없게 물어봤으니까, 이 정도는 해줄게. 이런 거 평소에는 안하니까. 특별 서비스라고.”
“그래도…….”
“안 업히면 나 그냥 간다?”
화린이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며 잠시 생각하다가, 내 등에 올라탔다. 가슴이 등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방금 들었던 말이 떠올라,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오른다. 진정하자. 화린이야. 한 달에 한번 마법에 걸리긴 하지만 내면은 남자애라고. 나는 무게가 실린 것을 느끼자, 다리를 폈다. 그렇게 먹는 게 어딜 갔는지, 화린이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간다?”
“으, 응.”

“선생님? 선생님? 안 계시는 모양인데?”
양호실 문을 열고 양호 선생님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어디 나가신 모양이다. 양호 선생님이면 양호실에서 대기하고 계셔야지, 어딜 가신거야? 나는 투덜대며 양호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제 됐어. 내려줘.”
“잠깐만. 소파 가서 내려줄게.”
창피한지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대답하고, 나는 조금 더 걸어가 양호실 소파 위에 화린이를 앉혔다. 화린이는 여전히 얼굴이 붉혀진 상태였다. 야, 그러지 마. 괜히 의식하게 되잖아. 나는 양호실 안을 둘러보다가, 양호 선생님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잠시 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웁니다. 알아서 꺼내서 치료하세요. 양호 선생님.’
“직업의식이 없으시구만.”
나는 한숨을 쉰다.
“뭐라고 적혀있어?”
“알아서 치료하래.”
“내가 알아서 치료할게. 그만 교실로 돌아가.”
“됐어. 어차피 수업도 시작했을 시간인데. 그리고 그 발목이랑 팔로 알아서 치료하긴 뭘 해? 잠깐만 있어봐. 파스는 이 서랍이고, 스프레이 파스밖에 없네, 소독 솜이……. 아, 진통제도…….”
“돼, 됐다니까 그러네.”
화린이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양호 선생님의 서랍을 열어서 약을 찾아 소파로 가져왔다. 화린이는 손사래를 치지만, 난 억지로 까진 팔을 붙잡았다.
“어허, 가만히 있어! 소독 할 테니까, 따가워도 참아라?”
소독 솜을 꺼내서, 핀셋으로 잡고 팔에 문지른다. 따가운지 화린이가 움찔움찔 움직인다.
“앗 따거! 좀 부드럽게…….”
“그야 따갑지. 자업자득이지 뭐. 누가 무리해서 체육 하래? 이제 약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됐어, 팔은 끝. 자, 발목 내밀어.”
“내가 한다니까…….”
“발목.”
강한 어투로 말하자, 화린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육복 바지를 걷어 올린다. 천천히, 종아리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려한 곡선라인의 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검은 스타킹이 맨 살이 드러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스타킹 벗긴다.”
“무, 무슨 말 하는 거야!”
퍽, 하고 반대쪽 발이 내 얼굴을 걷어찬다. 아프잖아!
“임마! 그럼 스타킹 신은 채로 파스 붙일래? 벗겨야지 뿌릴 거 아니야!”
“뿌, 뿌려?! 뭘 뿌려?!”
“파, 스, 말이다 파! 스! 그거 말고 뭘 발에 뿌려!”
“그, 그렇네…….”
“……변태. 야동 좀 그만 봐라.”
“배, 백주 대낮에 스타킹 벗긴다는 녀석에게 그딴 말 듣기 싫거든?!”
화린이는 그대로 타오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빨간 얼굴로 외친다. 한숨을 쉬며, 나는 스타킹을 잡아서 쭉쭉 당기며 대꾸한다. 괜히 이 녀석이 이렇게 말하니까 나까지 의식되잖아.
“알았어, 알았어. 벗긴다?”
하지만 아무리 당겨도 스타킹은 늘어날 뿐 벗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느낌이 이상한데? 위에서 걸리는 느낌이랄까……. 반사적으로 체육복을 조금 더 걷어 올리려는 순간, 다시 다른 쪽 발이 얼굴로 날아온다. 퍽! 윽, 이번에는 꽤나 아프다. 나는 통증에 코를 감싸 쥐었다.
“어, 코피.”
“뭐? 코피?”
그 말에 손을 떼고 바라보자, 끈적끈적한 빨간 액체가 묻어나온다. 피, 피다! 코피다!
“코, 코피까지 흘리다니! 이 변태!”
“장난 하냐! 니가 걷어차서 그렇잖아!”
농담할 기운도 안 나네. 나는 코를 막고 휴지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지, 휴지는 어딨지? 화린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어, 어쩔 수 없잖아! 이거 팬티스타킹이란 말이야!”
“윽.”
“너, 너 이상한 거 생각했지! 죽여 버린다!”
“안했거든?! 시끄럽고 나 코 막는 사이에 벗어!”
“이 변태야! 돌아보면 진짜 죽일 거야!”
화린이는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조심스럽게 옷을 벗는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사락사락 하는 자극적인 소리가 들리니까. 이 녀석,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벗으면서 갑자기 왜이래. 그래도 왠지 지금 상황에 고개를 돌리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시리 나도 신경 쓰이잖아! 아냐, 기억해내라. 중학교 수학여행 때 트렁크 팬티와 런닝셔츠를 입고 있던 이 녀석의 모습을. 그 광경을 떠올리자 진정될 것 같았지만, 동시에 왠지 코피가 더욱 나오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잠시 후, 화린이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벗었어…….”
“으, 응.”
고개를 돌리자, 빨개진 얼굴로 내 쪽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화린이가 보였다. 소파 옆에는 벗어둔 팬티스타킹이 대충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뿜어져 나오는 코피를 막으려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 체육복을 다시 안 입고, 벗고 있는 건데?
그렇다. 화린이는 벗어둔 체육복 하의를 다시 입는 대신, 그걸로 하반신만 가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끄러운, 연한 커피색 피부의 화린이의 양 발이 부끄럽다는 듯 살짝 굽어져 소파 위에 올려 있었다.
“너, 너 왜 바지 안 입는 거야?!”
코를 틀어막은 휴지를 새것으로 갈면서 외쳤다. 화린이는 여전히 새빨간 얼굴로 눈을 크게 뜨며 마주 외친다.
“나, 나중에 스타킹 다시 입을 때 어차피 벗어야 하잖아!”
“너 말이야……. 됐어!”
뭐라곤가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래, 어차피 우리 사이가 남녀사이는 아니긴 하지.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 그런 말을 들어서 쓸데없이 서로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이 녀석은, 나를 한 번도 남자로 본 적이 없으니까.
“발, 이리 줘.”
나는 화린이의 옆에 앉아, 발을 무릎 위에 올렸다. 화린이는 체육복으로 하반신을 꾹 눌러 가리면서, 약간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스프레이 파스를 흔든 다음, 화린이의 삔 발목에 넓게 뿌린다.
“차, 차가워…….”
시원한 느낌 때문인지, 화린이의 발이 움찔움찔하고 움직인다. 가만히 좀 있어라. 나는 억지로 그걸 억누르고, 마저 스프레이를 골고루 뿌린다. 화린이는 그동안 움찔거리긴 했지만, 말없이 내 동작을 다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볼은 발갛게 물든 채로. 치익 거리는 스프레이 소리만이 양호실을 가득 메운다. 흉터 하나 없이, 잔털 하나 없이 완벽한 각선미. 그 광경에 왠지 나도 말없이, 오묘한 분위기로 들어간다. 아냐, 나는 일부로 화린이의 발목을 철썩 때리면서 쾌활하게 외쳤다.
“다 됐다! 치료 끝!”
“아야! 삔 데를 때리냐! 아프잖아!”
“찰지구나!”
“밥팅…….”
화린이는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이 정도 장난으로도 양호실에 가득하던 오묘한 공기는 크게 약해졌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양호실 문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럼 치료도 끝났겠다, 난 교실로 가볼게. 진통제 거기 꺼내놨으니까 먹고 푹 자라.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해 줄 테니까.”
수업은 벌써 한참 진행 중이겠지만, 빼먹기도 곤란하니까. 화린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어쩐지 조용한 화린이를 보며 씩 웃는다.
“팬티스타킹 꼭 입고 바지 입어라?”
“닥쳐 변태!”
마지막으로 농을 걸고 양호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화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응?”
화린이는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 주위를 둘러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고마워.”
“뭘, 너랑 나 사이인데 이 정도로. 몸조리나 잘 하셔요.”
그 말만 남기고, 나는 양호실 문을 닫고 나갔다. 안에서는 화린이가 다시 옷을 입는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이 있으니, 화린이가 여자이긴 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다가왔지만, 그럼 뭐해. 나는 중학생 때부터의 일들을 생각하며,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결국 나는 계속된 화린이의 재촉에, 대회 참가 찬성파가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 화장실 앞까지 따라오지 말라고. 주변을 안보고 활동하는 것 역시 남자답다. 지난 번 일로 좀 여자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 녀석이 정말 여자가 아니거나, 아예 나는 남자로 안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마 둘 다겠지만.
내가 찬성하자, 결국 민석이 녀석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밴드는 아마추어 대회 참가를 목표로 열심히 연습해나가게 되었다. 화린이는 연주회 연습과 병행되는 것도 부담되지 않는지, 매일 모여서 연습하는 것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괜찮나 이 녀석.
하지만 대회 신청서를 제출하고 나자 또 다른 문제점이 생겼다. 화린이도 우리도 프린트를 보면서 모두 놓친 부분이었다.
“자작곡을 만들어야한다고?”
“응. 그걸 못 봤더라고. 바보같이.”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화린이의 표정은 조금도 자책하는 기운이 없었다. 조금은 책임감을 느껴봐라. 민석이 녀석은 심심한지 드럼을 대강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 시간까지 맞춰서 자작곡 만들고 연습할 수 있겠어?”
취미로 하는 일이다보니, 아직까지 우리는 자작곡을 만든다던지 한 적이 없다. 늘 다른 유명한 곡들을 연주해볼 뿐. 그렇다보니 자작곡을 만드는 방법도 모르고, 설령 만든다고 해도 거기에 연습까지 할 시간이 나올지 여부도 모른다. 이미 신청까지 해놨으니, 되돌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할 거야, 화린아?”
수정이가 물어본다. 나도 물어보고 싶다. 어쨌든 리더 비슷한 것으로 이건 꽤나 심각한 실수인 것 같은데. 그러나 화린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응? 자작곡 쓰면 되잖아.”
“……뭐?”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잖아. 혹은 목마르면 물마시면 되잖아. 같은 느낌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대답. 아니, 뭐 자작곡이 없으니 문제니 쓰면 되는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간단하게 쓸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화린이는 내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말했다.
“나 작곡도 가능하긴 하거든. 안 그래도 요즘 기분전환으로 쓰고 있는 것도 있었고.”
“…….”
역시 신이라는 게 있다면 영 불공평한 존재일 것 같다. 특별히 음악의 신에게 관심은 없지만, 얘한테는 역시 너무 많이 준 것 같다. 화린이의 대답에 우리 일동은 전부 입을 벌리고 화린이를 바라봤다. 화린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왜, 너무 멋있어서 다시 반했어?”
“응. 니가 입만 안 열었으면 그랬을지도 몰라.”
내 대답에 화린이는 이를 드러낸다.
“연습시간은 어떻게 해?”
“곧 완성 될 테니까 지금처럼 모여서 연습하면 괜찮을 거야. 쉽고 익숙한 코드로 작곡하고 있으니까.”
화린이는 민석이 녀석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일단 화린이를 믿고 곡의 완성을 기다리기로 했다. 잡담 겸 회의가 끝나고, 일단 하던 대로 곡을 연습한다. 그러나 연습을 하다, 나는 문뜩 의구심이 들었다.
밴드를 만들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우리에게 작곡을 할 수 있다는 걸 밝히지 않은 화린이가, 마침 지금 기분전환으로 작곡을 하고 있다고?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나?
화린이는 프린트를 받고 우리에게 대회에 나가자고 엄청나게 졸라댔다. 프린트도 늘 가지고 다녔다. 우리야 화린이가 잠깐 보여준 것만 봤지만, 그런 화린이가 자작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그 두 가지가 얽혀서 내 머릿속에는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 떠올랐지만, 나는 이내 지워버렸다. 에이, 화린이는 그렇게 머리가 좋고 섬세한 녀석이 아니야. 그냥 자기 말대로, 이렇게 타이밍 좋은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뿐이겠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이내 연습에 집중했다.


“잠깐만 나 좀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어느 날 연습 후, 화린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왜, 노래방 가자고?”
늘 있는 노래방으로 놀러가자는 제안인 줄 알았지만, 화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좋지만,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같이 가줬으면 좋겠는데. 너 혹시 양복이나 정장 있어?”
“양복? 그건 갑자기 왜?”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기억을 뒤져봤다. 양복? 정장? 나한테?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내가 한 벌 빌려줄게. 옷 사이즈는 알지?”
“잠깐, 잠깐!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야기의 맥락을 알 수가 없어 급하게 물어본다. 왠지 화린이는 평소보다 급한 느낌이었다. 아까 연습 중에 전화를 받은 다음부터 그런 것 같은데. 화린이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게, 저녁 같이 먹으면 안 될까, 해서.”
저녁? 갑자기 왜? 그것도 양복까지 입고?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
“사실 오늘 저녁 연주회 전에 관계자 분들하고 저녁 만찬이 있거든. 근데 한명 정도는 아는 사람이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서…….”
예전에 화린이가 말한 적이 있다. 음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화린이의 집안은 원래 음악 쪽으로 꽤나 유명한 모양이다. 즉 이 녀석 하는 짓으로 봐서는 전혀 짐작이 안 가지만, 나름대로 화린이는 부잣집 아가씨다. 하긴 생각해보면 연주회마다 드레스를 입으려고만 해도 돈이 왕창 깨지겠지.
“오늘은 스폰서 분들이나, 그런 분들도 오셔서 빠질 수가 없거든. 부모님도 해외에 계셔서 못 오시고. 그래서…….”
“그래서, 나보고 같이 가달라고?”
화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이는?”
“오늘은 학원이 있다고 안 된다고 하더라고. 넌 한가하지?”
“대놓고 한가한 백수 취급 하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한가하지?”
“……응.”
화린이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건 부담된단 말이야. 내 머릿속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그런 성대한 만찬이 떠올랐다. 내가 그런 데에 정장을 입고 서있는 다고? 화린이가 드레스를 입고 부잣집 아가씨 느낌을 내는 것만큼이나 상상이 안 가는데.
“부탁이야. 응?”
화린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애절하게 부탁했다. 아무래도 혼자서 가는 것만큼은 죽어도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잠시 생각하던 나는 결국 같이 가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이런 때가 아니면 그런 데를 어떻게 가겠어.
“알았어.”
“정말? 고마워!”
화린이는 눈에 뜨게 기뻐하며, 내 양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역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다. 만찬이 있어서 아가씨 모드를 킨 걸까. 나는 화린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정장은 꼭 입어야 하는 거야?”
화린이는 약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 입고 가면 후회할 걸?”

정말 그랬다.
몸에 맞지 않는 세련된 정장을 입은 것도 부담스러운데, 차에서 내린 순간 그런 정장조차 안 입었으면 도대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짐작도 안 갔다.
만찬은 대학교 한편에서 열리고 있었다. 몇 번 놀러간 적이 있지만 그래도 화린이의 이미지와는 안 맞는 고풍스러운 화린이네 집에서 화린이가 빌려준 정장으로 갈아입고, 어느새 모시러 나온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기사 딸린 벤츠가 모시러 나오는 경험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차가 데려간 곳도 별천지였다. 대학교 부속 고등학교니까 대학교도 다 돌아다녀봤지만, 여기는 처음 와본다. 아니, 정확히는 여기가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척 봐도 귀티가 흐르는 아저씨며 아줌마며 할아버지며 할머니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젊은 사람도 꽤 보였지만, 모두 양복이며 드레스를 입은 멋진 모습들이었다. 교복 입고 여기 왔거나, 늘 하던 대로 청바지에 셔츠 대강 입고 왔으면 참 눈에 띌 뻔 했다.
“야, 아가씨와 같이 왔으면 제대로 에스코트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기사분이 열어준 문을 통해 화린이가, 정확히는 화린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빨간 드레스. 원래 키도 훤칠하고 몸매도 좋은 편이라, 약간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만드는 라인이 참 아름다웠다. 평소에는 높은 포니테일로 묶는 머리를 오늘은 땋은 다음 둥글게 뒤쪽으로 말아 올렸다. 귀에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보석 귀걸이가 달려있고, 목에는 얇은 줄에 몇 개인가 보석이 달린 목걸이도 차고 있었다. 평소에는 운동화를 신던 녀석이었지만, 지금 신은 높은 힐의 구두에도 별다른 불편함이 없어보였다.
살면서 파운데이션 하나도 안 바르던, 말 그대로 생얼굴 만을 고수하던 화린이의 약간 까만 피부는, 오늘은 각종 화장으로 칠해져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니라, 평소와는 다른 아가씨의 얼굴이었다. 약간 하얀 피부의 볼 부분은 연한 홍조가 새겨져 있었고, 원래도 매끄러운 연분홍색의 입술에는 오늘은 체리 빛의 립스틱이 얇게 발라져 있었다. 아이라이너가 원래 선명한 눈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 선명한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
내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화린이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허리와 엉덩이를 강조하는 섹시한 포즈를 잡으며 말했다.
“왜 그래? 평소와 다른 이 몸의 매력에 헤롱헤롱 하는 거야?”
“어? 응.”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에, 화린이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파!”
기뻐하는 건 줄 알았더니, 그러면서 정강이를 걷어찬다. 나는 얻어맞은 다리 부분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 그래도 이제야 화린이 같네.”
“지금까지는 나 같지 않았다는 거야?”
“넌 아니지. 누군진 몰라도 윤화린은.”
화린이는 화가 난 듯이 씩씩대며 말한다.
“흥, 이런 모습도 있다고. 여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법이니까!”
“넌 여자 아니잖아.”
“진짜 함 죽어볼래?”
“죄송함다…….”
눈빛이 진심이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화린이는 피식 웃고는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응? 뭐? 악수라도 하자고?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 이 윤화린양의 에스코트를 허락해주지. 자, 안내해주시죠 모자란 신사분?”
“‘모자란’ 이 뭐야, ‘모자란’ 이.”
투덜대면서도, 나는 화린이가 내민 손을 왼손으로 잡았다. 뭐, 장소가 장소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화린이는 손을 풀더니, 내 팔에 팔짱을 끼고는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자, 가자고. 오늘의 주연이 왔으니까, 빨리 가야지?”
“어휴…….”
나는 팔짱을 낀 채로, 화린이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오늘의 주연이 화린이긴 한가보다.
화린이가 홀 안에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울려 퍼진다. 화린이는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느낌으로, 여기 저기 자신을 알아보는 시선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윽, 적응 안 된다. 화린이를 바라보는 시선 중의 몇 명은 감히 오늘 주연의 팔짱을 끼고 에스코트를 하는, 양복이 영 안 어울리는 소년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 나 말이다 나. 아무래도 내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를 재는 것 같았다. 윽, 부담된다. 화린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주위에 인사를 하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괜찮아.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해.”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그렇다고 여기서 다른 데에서 하는 것처럼 넋빠진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갈 수는 없잖아? 나는 필사적으로 굳고 믿음직스러운 얼굴을 하고, 허리와 어깨를 가능한 편 채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연단 앞쪽에 도착하자 화린이는 팔짱을 풀었다.
“잠깐 저쪽에 가서 앉아있어. 금방 시작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린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서 대강 앉았다. 사람들이 자리에 착석하고, 화린이는 연단으로 올라가 그 위에 서있던 왠 할아버지와 나란히 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이사장인 모양이었다.
그 뒤에는 뭐 오늘 만찬과 곧 있을 화린이의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 화린이가 유명하긴 한지, 회장 안에는 외국인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사장은 젊은 유망주라느니, 떠오르는 바이올린계의 샛별이라느니, 뭐 그런 말을 질리지도 않고 이어나갔다. 화린이는 생긋생긋 웃으며, 보기에는 정말로 젊은 유망주나 떠오르는 바이올린계의 샛별 같은 태도를 이어나갔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근엄한 자세를 유지했다. 옛날처럼 뿜고 웃어젖혔다간 곤란하니까.
이사장의 연설이 끝나고, 화린이는 오늘 모인 분들을 위해 한 곡을 연주하겠다며, 누군가 가져다 준 바이올린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활을 켜나갔다.
바이올린은 모르겠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음색이라는 생각 하나는 확실하게 들었다. 곡명은 잘 모르겠지만, 나도 들어는 본 적 있는 곡이었다. 초대됐던 연주회에서도 들었지만, 확실히 화린이는 사람들이 젊은 유망주나 떠오르는 바이올린계의 샛별이라고 부를만한 자질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눈에는 방과 후에 기타를 치며 연습하는 것 보다는 어딘가 부족해보였다. 연주하는 태도에 재미가 없달까. 이런 말 하니까 내가 뭔가 음악에 대단한 조예가 있는 것 같아서 낯부끄럽지만.
구슬픈 음색으로 이어가던 바이올린 음이 천천히 끊기자, 사방에서 박수세례가 이어졌다. 화린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천천히 자리를 내려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만찬이 시작된 모양인지, 웨이터들이 식사를 가지고 오기 시작했다. 화린이는 사람들의 주의가 식사를 가져오는 것에 쏠린 사이, 내 옆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호쾌하게 앉았다.
“아, 힘들다. 얼굴 근육이 굳은 것 같아.”
“너 정말 위에 있을 때랑 사람 다르다.”
화린이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내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드레스 가슴 부분 열고 부채질 하지 말라니까. 좀 행동에 일관성이라는 걸 보여 봐라. 내가 속으로 투덜대는 사이, 교과서에서나 본 순서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화린이와 서로 놀리면서 식사를 했다. 여기저기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놀랍게도, 화린이는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얌전한 태도로 조금씩, 조용하고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정말 아가씨처럼.
“오늘 속이라도 안 좋냐?”
하지만 내 지적에 화린이는 인상을 팍 구기며, 입에 넣으려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평소에는 예의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자리니까 상관없지만, 이런 데에서는 이런 쓸데없는 사소한 걸로도 욕먹는다고. 난 할 때는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화린이는 내 식사를 보고는, 비웃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야말로, 테이블 매너가 그게 뭐야?”
“윽, 내가 이런 식사를 해본 적이 있어야 뭘 제대로 하던가 하지! 난 풀코스 요리도 이게 처음이라고.”
화린이는 작게 소리 내며 웃은 다음, 손을 뻗어 포크와 나이프를 집은 내 손을 잡는다.
“포크와 나이프는 바깥쪽부터 차례대로. 왼손엔 포크 오른손엔 나이프. 11자로 잡지 말고 약간 눕혀서 잡고, 식기 부딪히는 소리는 내지 말 것. 음식은 크게 자르지 말고 한 입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잘라 먹고, 물을 마신 다음에는 입 닿은 부분을 살짝 닦을 것. 입 안에 음식을 넣은 채 말하지 말고, 소리내서 먹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화린이는 내 손을 천천히 움직여 음식을 썬 다음, 입 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힘을 풀고, 화린이가 움직이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어때요, 참 쉽죠?”
“그래. 퍽이나 쉽네.”
내 투덜대는 대답에 화린이는 다시 한 번 소리 내서 웃는다. 음식은 입으로만 들어가면 되는 법인데. 나는 그래도 화린이가 시킨 대로 손을 움직여 다시 식사를 계속한다. 그러다 문뜩, 주위의 시선을 눈치 챘다. 몇 명인가의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위에서 보기에는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이다. 나는 화린이를 바라보며, 작게 말한다.
“……야, 윤화린, 괜찮은 거야?”
“응? 뭐가?”
화린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꾸한다. 나는 눈짓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리켰다. 화린이는 웃고 있었지만, 그 태도는 애매해보였다.
“뭐, 괜찮을 거야. 친구끼리 이럴 수도 있는 거지.”
“네가 괜찮다면 다행인데…….”
솔직히 내가 다 부담된다. 어쩌면 오늘 여기 오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내가 와도 되는 거야?”
“응? 왜 안 돼?”
“아니, 난 별로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럼, 난 어울려?”
화린이의 대답 겸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또 아니지. 화린이는 미묘하게 불만인지 윗입술을 좀 내밀었지만, 다시 말했다.
“괜찮아. 사실 오늘 네가 온다고 해서 다행이야. 그리고 언젠가, 너한테는 내가 어떤 면도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화린이의 표정은, 화린이를 오랫동안 알아온 나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쁜 것 같기도, 부끄러운 것 같기도, 두려운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화린이는 그러나 이윽고 표정을 바꾸며, 쾌활하게 말했다.
“뭐, 일단 먹자! 이거 비싼 거니까.”
“얼마나 비싼데?”
“음, 우리 학교 급식비 1년 분?”
“무지막지하게 비싸잖아!”
“그렇지. 어때, 땡잡았지?”
“왜 미리 말 안했어! 그럼 조금 더 맛을 음미하면서 먹었을 텐데……! 집에 들러서 락앤락 가져 와서 싸 갈 텐데……! 접시까지 핥아먹었을 텐데……!”
“……그러지 마라.”
화린이는 질린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때,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익숙한 솜씨로 손에 들고 있는 와인 병에서, 화린이의 잔과 내 잔에 붉은 와인을 따르고는 가버렸다. 잠깐, 우리 미성년자인뎁쇼?
“잠깐만요, 우린…….”
돌아가는 웨이터에게 내가 말하려는 순간, 화린이가 내 어깨를 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원래 이럴 때는 와인이랑 같이 먹는 거야.”
“……너, 완전 막나간다?”
내 말에, 화린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런 만찬에는 와인이 당연히 나오는 거야. 식사에 나오는 음료 같은 거라고.”
“미성년자가 술 같은 거 마시면 안 돼.”
“안 어울리게 고지식하기는. 외국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도 마신다고.”
화린이의 당당한 태도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나도 그런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뭐랄까. 내가 바른 생활 사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꺼림직 하다고. 화린이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잔을 들어 올려 나에게 살짝 내밀었다.
“뭐, 한잔만 하는 건 괜찮지 않겠어?”
“……한잔만이다?”
마지못해 나도 잔을 들어 올리자, 화린이는 씩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짤랑, 하는 소리가 나고, 화린이는 익숙한 손길로 입에 가져다 댄 와인 잔을 살짝 기울였다. 나도 화린이가 하는 것을 따라서, 와인 잔을 기울였다. 뭐, 괜찮겠지. 사실 술 한번 마셔보고 싶기도 했고. 헤헤. 하지만 입 안에 느껴지는 떨떠름한 맛에, 나는 금방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이거. 원래 와인은 이런 거야?”
“그럼 어떨 줄 알았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잔을 내려놓으며 화린이가 물었다.
“아니, 만화책을 보면 눈앞에 이베리아의 여인, 그 여인이 탱고를 추는 광경이 펼쳐진다고 하잖아. 솔직히 기대했다고. 그런데 이 떫은맛은…….”
화린이는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바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만화 좀 적당히 봐.”
“실망이야.”
나는 찡그린 표정으로,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홀을 정리한다며 잠시 사람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홀에 들어서자 의자가 치워지고, 홀 가운데 부분을 비워둔 채 홀 외각에 테이블 몇 개만이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서서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나누라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연단 위에는 클래식 악기를 든 사람들이 앉아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건 뭐야?”
내 질문에, 화린이는 대답했다.
“식사도 끝났으니까, 이야기도 나누고 춤도 추라는 거지.”
“춤?”
화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같은데 보면 홀 가운데에서 춤도 추고 하잖아. 무도회 그런 거야.”
“……여기는 무슨 18세기 유럽인가요?”
어깨를 으쓱하며 화린이는 말했다.
“뭐, 돈 많고 높으신 분들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봐봐, 하나 둘 씩 나오잖아.”
자기도 돈 많고 높으신 분들 편에 속하면서. 말로 하지는 않고 화린이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과연 음악에 맞춰서, 한 명 두 명씩 홀 가운데의 빈 공간으로 나와서, 영화에서나 보던 느릿한 춤을 추고 있었다. 저걸 왈츠라고 하던가.
“어때, 나가서 한번 춰 볼래?”
“나 출줄 몰라.”
내 대답에, 화린이는 씩 하고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윽, 예감이 안 좋다. 그리고 예상대로, 화린이는 내 손을 잡고 끌면서 말했다.
“에이,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춤 같은 거 춰 보겠어? 가자!”
“나 진짜 출 줄 모른다니까!”
오늘따라 이 처자가 왜 이래? 아니, 원래 기분파긴 했지. 와인이 과했나? 화린이는 억지로 내 손을 끌면서 나갔다.
“싫다니까 그러네!”
“나가자!”
“싫어!”
하지만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어느새 춤추는 홀 가운데에 거의 다다랐다. 윽, 홀 외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이쪽을 보는 게 느껴진다. 화린이는 내 손을 잡은 다음, 어깨에 작게 속삭였다.
“여기까지 나온 이상, 안한다고 빼진 않겠지?”
“으윽……. 진짜 출 줄 모르는데…….”
“괜찮아. 내가 하는 대로만 따라하면 돼. 자, 왼손은 잡고, 오른손은 내 등에…….”
화린이는 내 손을 끌어서, 억지로 자세를 만든다. 자기도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어 보인다. 그리고 리듬에 맞춰서, 천천히 발을 좌우로 움직인다.
“자, 하나, 둘, 하나, 둘, 체육시간에 체조 하는 거랑 똑같아. 박자에 맞춰서 하나, 둘, 하나, 둘…….”
어쩔 수 없이 나도 조금씩 박자를 맞춰서 발을 움직인다. 몸을 흔들면서, 발을 움직인다. 으악, 내가 제대로 추고 있을 리가 없는데. 쪽팔려! 하지만 화린이는 웃는 얼굴로 말한다.
“뭐야, 못 춘다더니 잘 하네! 그래, 그렇게만 해.”
화린이의 동작이 조금씩 커져간다. 야, 갑자기 박자 바꾸지 마! 당황하며, 나는 동작에 따라간다. 화린이와 동작을 맞추며 춤을 추는 사이, 외각에서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부끄럽다……! 나도 아는 은은한 음악이 조금씩 화려하게 바뀌어가고, 그에 맞춰서 모두의 동작도 조금 더 화려하게 바뀌어간다. 나도 슬슬 움직임이 익어가기 시작했다. 음, 주변 사람들은 허리를 꺾거나 하는데, 우리도 저렇게 해볼까. 내 시선을 읽었는지, 화린이가 속삭인다.
“저런 거, 해보고 싶어?”
“……해볼까?”
“뭐?”
놀리려던 화린이가 역으로 놀라며 말한다. 에이, 무대 체질은 아니지만, 기왕 추는 거 한번 오버 해보자! 나는 화린이의 등에 댔던 손을 허리로 옮기며, 동작을 화려하게 바꿔본다.
“어, 야……!”
깜짝 놀란 모양이었지만, 화린이도 당황하며 동작에 따라준다. 화려한 조명, 신나는 음악, 그리고 나와 춤추는, 평소에는 생각도 못 할 화린이의 모습. 그 모든 것에 취해, 나는 주위의 시선도 잊고 춤을 계속한다. 나도 와인이 과했나? 화린이는 내 표정을 보며 웃고는, 마찬가지로 즐겁게 춤을 춰나간다.
예전에 오래된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그런 장면.
마지막 음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화린이는 허리를 뒤로 꺾고, 나는 허리를 숙여 그런 화린이가 쓰러지지 않도록 바치는 자세를 취한다. 잠시 조용함이 찾아 온 다음, 주위에서 박수갈채가 울려 퍼진다. 우리는 주위에 손을 흔들고, 서로 손을 맞잡은 채 홀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음 곡이 시작되고, 다른 사람들이 홀에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거친 숨을 내쉬며, 화린이는 놓여있던 와인 잔을 기울인다.
“후우, 역시 힘드네. 춤 못 춘다더니?”
열기 때문인지 와인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화린이가 웃어 보인다. 그 시선을 외면하면서, 나도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네가 나오라고 했잖아. 나름대로 열심히 췄다고.”
“마지막에 그건 좀 오버 아니야?”
“너도 따라왔잖아!”
화린이의 놀림에 나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화린이도 웃음을 짓는다. 후, 익숙하지 않은 춤에 땀이 다 난다.
“멋진 춤인데요? 윤화린양.”
그 때 들려온 목소리에, 나와 화린이는 고개를 돌렸다.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가와 말을 걸고 있었다. 목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아무래도 기자나 그런 거인 모양이다. 화린이는 나와 장난치던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살짝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익숙하지 않았는데, 그만 자리에 취해서 춰봤네요. 보기 흉하지 않았나요?”
“아뇨,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기자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린다.
“이쪽 신사 분은, 혹시 남자친구?”
어울리지 않는 호칭(둘 다)에 내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나 화린이는 한 순간 숨을 멈추고는,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부드럽게 말했다.
“아뇨, 그냥 친구에요. 이번에는 아는 친구를 초대하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그래요? 바이올린의 스타 윤화린양의 남자친구면 좋은 기사가 될 텐데, 아쉽군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기자는 나를 훑어본다. 품평하는 것 같은 시선이 별로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화린이는 익숙한 지 약간 미소를 지어 보인다. 기자는 말을 이었다.
“뭐, 한국에서 있는 마지막 행사니까, 친구 분을 초대하고 싶으셨나보군요.”
그리고 그 말에, 화린이의 미소가 굳어진다. 잠깐, 한국에서 있는 마지막 행사?
“저, 그 이야기는 별로 지금 하고 싶지 않은데요.”
화린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 기색은 아까까지 보이던 여유 있는 자세와는 달랐다. 기자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음, 그 문제 때문에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 왔는데,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춰 왔나보군요.”
약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기자가 말한다.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찾지 못하고 말했다.
“잠깐만요, 한국에서 있는 마지막 행사라고 하셨죠?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내 말에 화린이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한다. 그 표정은 여태까지 본 화린이의 표정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당황해 보였다. 기자는 잠시 질문을 이해 못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정말 놀랐다는 듯 말했다.
“아, 아직 친구 분은 모르셨나보군요. 그래서……. 실례했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 해주실 수 있으세요?”
“잠깐…….”
화린이가 급하게 내 말을 막으려고 했지만, 난 손으로 제제했다. 화린이에게 사과하던 기자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화린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에, 윤화린양은 이번 연주회를 끝으로 국내 활동을 접고 해외로 유학을 간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쪽의 유명한 음대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요.”
화린이의 눈이 날카로워진 것을 보자, 기자는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저, 하지만 제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실례했습니다. 화린양, 친구 분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 말만 남기고 기자는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갔다. 왈츠 음악이 여전히 홀에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내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서있는 화린이를 바라보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봤다.
“외국으로 간다니, 무슨 소리야? 처음 듣는 소리인데?”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나중에 이야기 해줄 테니까.”
화린이는 시선을 피하며 와인을 마셨다. 나는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 대답해줘.”
“나중에 이야기 해준다니까.”
“윤화린!”
내 큰 목소리에, 주위에서 몇 명인가가 이쪽을 쳐다본다. 그 시선에 내가 잠시 손을 놓자, 화린이는 잔을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다음 다른 사람들로 향한다. 차마 내가 말리지도 못하는 사이, 화린이는 몇 명인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에, 화린양은 밤이 깊어서 먼저 들어간다고 하는군요. 윤화린양의 이번 연주회에 많은 성원을 표하는 의미로, 박수로 배웅합시다.”
이사장 할아버지의 말에, 잠시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화린이는 박수에 인사한 다음, 빠른 걸음으로 홀을 나갔다. 나도 재빨리 화린이를 따라 홀을 나섰다. 화린이는 내가 따라오는 걸 아는지 모르는 지, 건물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향한다. 나는 달려가서, 화린이의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윤화린!”
“…….”
화린이는 여전히 내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화린이의 양 어깨를 잡은 채로, 화린이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 후, 화린이는 내 눈을 마주봤다.
“맞아. 이번 연주회가 끝나면 유럽으로 유학을 가. 그쪽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음대로 진학할거야. 이미 이야기가 전부 끝났어.”
화린이는 묶은 머리를 풀며 대답한다. 땋은 머리가 풀어져, 긴 머리가 찰랑인다. 화린이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나중에 천천히 말해주려고 했는데, 들켰네.”
“진짜야?”
“아, 대회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연주회는 그 다음이니까.”
“…….”
화린이는, 아니라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확실하게 대답하는 성격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화린이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맞다는 의미이다. 나는 화린이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화린이는 내 표정을 본 다음,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에이,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건 미안해. 그래도 미리 말해두면, 앞으로 지내는 데에 신경 쓸 거잖아? 그래서…….”
“그래도, 미리 말 해줬어야지!”
아무래도 술이 좀 들어간 모양이다. 갑자기 온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져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어깨를 치던 화린이의 손을 잡고는 계속해서 외쳤다.
“적어도, 적어도 나한테는 미리 말해줘야지! 난 네 가장 친한 친구 아니야? 그 정도에 내가 바뀔 거라고 생각해?!”
“그럼 이건 뭔데?”
화린이는 약간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지금 말하기 싫었던 거야.”
“너 말이야……!”
열기와 함께 짜증이 폭발한다. 나는 화린이의 드레스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이게 무슨 태도야!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나중에 갑작스럽게 ‘나 유럽으로 유학 가’라고 말하고 모든 걸 끝낼 생각이었던 거야?! 지금 내가 화내는 건 그거잖아! 친구라면, 내가 무슨 마음인지 알잖아!”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조각이 맞아 떨어졌다.
이 녀석이 연주회 연습이 잘 되냐는 질문에 내키지 않는다는 대답을 한 것? 연주회를 끝내면 유럽으로 유학을 가니까!
갑자기 대회에 나가자고 조른 것?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대회에 나가서 다 같이 공연을 하겠다는, 시덥지 않은 생각을 했으니까!
그 날, 몸이 좋지 않은데도 나와 야구 대결을 했던 것?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한번이라도 나를 이기고 싶었으니까!
자작곡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이제 와서 자신이 곡을 쓰겠다고 한 것? 가기 전에 자신이 쓴 곡을 같이 연주하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
그리고 오늘, 이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나를 꼬드긴 것? 화린이의 말 대로, 이제 기회가 없으니까!
“결국, 넌 니 생각밖에 안했을 뿐이잖아! 우리한테 이야기 해주고, 친구로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하는 대신, 자기 하고 싶은 걸 말없이 하고는 대충 얼버무린 다음 훌쩍 사라질 생각이었던 거잖아!”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서, 가슴이 살짝 파인 드레스를 쥐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너 말이야, 그런 식으로 한 다음 친구라고 말할 생각이었어?! 정말 친구라면, 이야기 했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다 사라지는 대신,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친구라면, 내가 어떤 마음일지 정도는 알아채야 하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짝, 하고 얼굴에 강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 기세에, 얼굴이 돌아가면서 손에 들어간 힘이 풀어진다. 내 따귀를 있는 힘껏 후려친 화린이는, 그대로 내 멱살을 잡고는 마주 외친다.
“친구, 친구, 시끄러워! 너야말로 내가 무슨 마음인지, 무슨 생각인지 조금도 모르고 있잖아!”
화린이는 눈물이 일렁거리는 얼굴로, 화가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눈가에 칠한 아이라이너가 번진다. 또르륵, 하고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에, 모처럼 칠한 화장이 더러워진다. 검은 눈물이 마치 피눈물 같다.
“정말로, 내가 무슨 생각으로 말하지 않은 건지 모르는 거야? 누군 즐거워서 말하지 않고 있었던 줄 알아? 내가 곧 사라진다고 말하면, 너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하잖아! 너, 정말로 곧 있으면 내가 유럽으로 간다고 미리 말했다고, 지금까지 나한테 하던 것처럼 갈 때까지 지낼 수 있어? 내가 곧 없어지는데도, 평소와 같이 즐겁게 지낼 수 있냐고!”
화린이는 울면서, 소리를 지르듯이 외친다.
“나라고 해서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야! 여기서 너희들과 지내고 싶다고! 하지만 그렇게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잖아! 곧 여기서 떠날 수밖에 없는데, 미리 말해서 너희들이 평소와는 다른 태도로 대하는 게 더욱 싫어! 내가 떠난다는 걸 알면, 지금 이런 즐거운 관계도 끝이잖아!”
“멋대로 말하지 마! 결국 넌 그 다음에 남겨진 우리가 어떤 마음일지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잖아!”
“그래! 생각 안했다! 그게 나빠? 그러는 너도, 내 마음이 어떨지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잖아!”
서로 멱살을 잡고, 우리는 소리를 지른다.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닌데.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일 텐데. 하지만 술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있었던 흥분 때문인지, 짜증과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니 마음이 어떻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남겨지는 우리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 같은 거, 관심 없어!”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외치면서, 화린이는 멱살을 잡은 팔을 당겨 얼굴을 가까이 한다.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 화린이는 화장이 더럽혀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 필사적인 기운에, 숨이 멎는다.
“너, 정말로 내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거야?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야?”
“뭐라고?”
“대답해!”
화린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1초, 2초, 3초……. 말없이 시간만이 흘러간다.
화린이는 웃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래, 결국 아무것도 몰랐던 거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어. 그냥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친구’였던 거네. 그 모든 게, 그저 친구로서 한 거였네.”
화린이는 손에 힘을 놓았다. 그리고 내 가슴을 밀쳤다. 힘이 빠진 손이, 풀린다. 화린이와의 거리가 멀어진다.
화린이는 팔로 얼굴의 눈물을 닦는다. 맨 팔에, 더러워진 화장이 묻는다. 얼굴의 화장은 그 행동에 더 번져서,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으로 변했다. 화린이는 귀걸이를 풀어, 땅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런 거였어. 네가 내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도, 조금도 말리지 않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오로지 화만 낸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친구’가 말없이 떠나가니까. 그거에 화난 것뿐이었어. 하하하하하하!”
“무슨, 뜻이야?”
목소리가 떨린다. 흥분이 식은 온 몸이, 너무나도 차갑다. 화린이는 나에게 다가오려다가, 높은 힐 때문인지 비틀거린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이 바보야!”
목걸이를 풀어, 나에게 내던진다. 목걸이는 내 가슴에 맞아, 튕겨나간다. 화린이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한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 생각해줘……. 안 그러면, 너무 우스운 꼴이 되잖아……. 내가, 너무 바보 같아지잖아…….”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린다. 하지만 나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화린이의 훌쩍이는 소리만이, 소리가 없는 밤거리에 구슬픈 음악처럼 흐른다.
“됐어. 이제 알았지? 내가 떠난다는 거. 그럼 된 거 아니야?”
“……너, 말이야…….”
“오지 마!”
화린이에게 다가가려던 발걸음이, 그 말에 멈춘다. 화린이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오늘,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저, 너랑 둘이서, 마지막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정말 바보…….”
화린이가 전등 빛이 비추지 않는 어둠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나는 그 발걸음을, 차마 막지 못하고…….
“옷은, 돌려주지 않아도 돼. 교복은, 집으로 보내줄 테니까. 그럴 테니까…….”
화린이는 그 말만 마치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탁, 탁, 하는, 비틀거리는지 규칙적이지 않은 발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말만이 머리에 맴도는 채로, 나는 튕겨나간 목걸이를 주었다. 흙이 묻은 보석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자, 교복이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교복 호주머니에는, 민석이 녀석에게서 온 문자만이 도착한 핸드폰이 들어있었다.
문자는 예정되었던 대회 장소에 문제가 생겨 아마추어 밴드 대회가 미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내가 들은 화린이의 연주회 날짜와 겹쳐있었다.


“화린이가 오늘 퇴학계를 제출했다던 데, 무슨 일이야?”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민석이 녀석이 나에게 물어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석이는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어제 갑자기 유럽으로 곧 유학을 간다는 문자만 오고, 문자를 보내도 전화를 걸어도 대답이 없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연주회가 끝나면, 유럽으로 유학을 간대. 그쪽에서 대학교도 다니는 모양이야.”
나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내 대답에 민석이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다.
“뭐라고? 그럼, 급하게 결정된 게 아니라는 거야?”
“그런가봐.”
“넌 알고 있었어?”
“아니, 어제 처음 들었어.”
민석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적어도 너한테는 미리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그래서 더 이야기 안했었나…….”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냐니……. 무슨 뜻인지 몰라?”
민석이는 내 대답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민석이는 잠시 내 대답을 기다리다가, 내가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민석이는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앉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
“별 일 없었어.”
“거짓말 하지 마. 수정이에게 다 들었어. 어제 만찬에 초대됐다면서.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 일 없었다니까. ……잠깐, 수정이가 내가 만찬에 초대된 걸 알았었다고?”
침울하게 대답하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민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제 만찬이 있어서 자기가 초대 받았는데, 너랑 가라고 거절했다고 하더라고. 화린이도 기뻐했고.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잠시 멈췄던 숨을 다시 쉬며, 어제 있었던 일을 대강 말했다. 민석이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넌 아무 말 없이 화린이를 보내줬고?”
“그 상황에서, 날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나는 말을 고르며 천천히 말했다.
“화린이한테는, 유럽으로 유학 가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텐데. 그리고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데, 내가 말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러니까…….”
“에라이 이 등신아!”
민석이의 손이 날아와, 내 뒤통수에 강하게 박힌다. 고통에 나는 뒷머리를 감싸며 쓰러졌다. 무슨 짓이야 이 녀석!
“너 임마,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할 말이다! 너, 정말 등신이냐? 야, 이런 놈을 내가 친구라고 불렀다니 창피하다.”
“그게 무슨 뜻인데!”
“됐어 임마. 내가 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 그냥 친구로 지내겠다고 하더니, 그렇게 눈치도 없어졌냐? 맘대로 해!”
민석이는 정말로 화가 났는지, 자리를 떠나 자신의 자리로 향한다. 나는 뭐라고 하려다,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책상에 박았다.
사실 알고 있다. 어제 화린이가 했던 말도, 지금 이 녀석이 한 말도. 모두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내가 가장 바라던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웠다고.


중학교 시절, 화린이와 처음 만났던 것은 2학년에 올라가서였다. 당시에도 화린이에 대한 이야기는 꽤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화린이가 유명한 음악인이라는 사실이었지, 화린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게 아니었다.
유명한 학생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떤 녀석일까. 화린이에 대한 내 첫 관심은 단지 그 정도였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고, 말을 섞다보니, 내가 생각하던 고풍스럽고 우아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괄괄하고 시원시원한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화린이와 나는 성별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외면뿐이었지,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정과는 다른 감정을 갖게 되었다.
마치 남자아이와도 같은 괄괄한 모습. 그런 태도에 마음이 편했다. 친한 친구로서 곁에 있으면서도, 마음속에는 다른 감정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나와 화린이의 관계는, 흔히 말하는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린이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언젠가, 친구를 넘어서 연인의 관계가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
중학교 3학년의 수학여행에서,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함부로 고백을 했다가는,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고, 내 마음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수학여행이었고, 많은 커플이 생겨난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그리고 그때, 방에 초대해서 진실게임을 하면서 슬쩍 떠본다는, 어줍지 않은 계획을 짠 나는 민석이와 함께 화린이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화린이의 그 차림, 런닝셔츠에 사각팬티를 입은 광경을 보았다.
내가 마음을 접은 것은, 그런 화린이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화린이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속옷만 입은 모습을 보인 것에 화내는 대신,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너무나도 편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그때 깨달았다. 화린이는 지금까지 한번도, 나를 남자로 본 적이 없다고. 저 녀석 속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였을 뿐이라고. 그래서 욕심을 버렸다. 화린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단순한 친구로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지내면서도,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녀석은 한 번도 나를 남자로 보지 않았을 줄 알았다. 늘 단 둘이서 노래방을 가는 것도 단순히 편한 친구라서, 밴드를 같이 하자고 한 것도 자신의 취미인 밴드를 친구와 같이 하고 싶어서, 가끔 두근거리는 일이 있어도, 그것 모두 단순히 화린이에게는 나는 성별만 남자인 친구라서 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정리했다.
화린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정리된 마음에서도, 가끔가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회가 있으면 잡고 싶었다. 하지만 새삼스러운 두려움이 다시 떠올랐다. 한 걸음 내딛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관계가 되는 두려움.
그래서 지금의 관계로 만족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 이제 와서 사실 화린이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나에게 발을 내딛었으면 뭔가 변했을 가능성이 있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제 곧 화린이는,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나버릴 테니까.


얼마 뒤, 수정이로부터 화린이가 작곡한 곡이 도착했다. 대회에는 나갈 수 없을 것이지만, 작곡은 끝났다며 보낸 것이었다. 자신이 없어도, 대회에는 나가야 할 테니 곡을 써서 보낸다고 말했다고 수정이는 전했다.
곡은, 지금까지 화린이가 좋아하던 곡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약간 슬픈 곡이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으로 지내던 사람에게 차마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떠나는 가사. 마음이 시큰거렸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자, 연습하자.”
나는 악보를 악보대에 꼽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기타를 들어올렸다. 민석이와 수정이, 두명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너,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민석이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내젓고는 자신의 악보를 들고는 드럼 앞에 앉았다. 수정이는 악보를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이런 곡을 보낸다는 건, 너한테…….”
“그건 이제 됐어.”
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수정이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코드를 잡으며 말했다.
“그건 이제 됐어. 화린이는 같이 연주하지 못하지만, 이게 화린이가 하고 싶었던 노래니까. 같이 열심히 연주하자. 그걸로 됐어.”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됐지만…….”
수정이는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악보를 악보대에 꼽았다. 그래, 이걸로 됐어. 화린이가 없이 우리 세 명은, 화린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은 곡을 연습했다. 화린이의 실력으로 나가는 우리 밴드였기에, 그리고 마음속에 화린이가 계속 남았기에, 연습은 잘 되지 않았다.


“꿀꺽, 꿀꺽, 꿀꺽, 푸하!”
아픈 목을 다잡으려, 나는 생수통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혼자서 몇 시간이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소리를 지르는 노래로만. 목이 완전히 쉬어버렸으니, 내일은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오락실에서 꼼수로 연승행진을 이어나갔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욕을 하며 자리를 떠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상대할 사람이 없어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상대로 게임을 계속했다. 컴퓨터한테는 얍삽한 꼼수가 통하지 않는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져버렸다.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연주회와 공연, 두 가지가 모두 겹치는 날짜는 바로 다음날이었다. 마지막 연습을 끝내고,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일찍 해산했다. 내일 목이 쉰 채로 나타나면 욕을 좀 먹겠지만, 어차피 곡도 엉망진창이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마시던 캔을 구겨서 내던졌다.
연주회를 보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겹쳤다. 거리도 어느 정도 있어서, 둘을 모두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회 예선은 화린이가 참가했던 연습으로 보내서 무난하게 통과했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개판인 연주를 보여줄 예정이었다. 연습은 결국 끝까지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화린이가 없자 본 실력을 드러내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연습은, 언제나 화려한 화린이를 따라잡는 꼴이었으니까. 본선에서 우리가 몇 번째에 연주하는지는 당일 현장에서 알려준다는 모양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화린이를 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유럽으로 떠나는 날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수정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말없이 떠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마중을 나가는 일도 없으니, 유럽으로 떠나고 나면 앞으로 두 번 다시 화린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본다면, 언젠가 음악 잡지나 뉴스 등지에서 보는 게 끝이겠지. 그때 내가 한때는 윤화린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말한다면, 모두 그럴 리가 있나 하고 비웃으려나.
나와 화린이가 어쩌면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관계라고 한다면, 모두 대폭소 하겠지. 나중에 개그로 꼭 써먹어야겠다. 화린이가 뉴스에 나오는 일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
번화가 건물에 기대서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고 있었다. 담배가 있으면 그림이 좀 됐을 텐데. 애석하게 모범생인 나는 그런 거 없었다.
대학교 앞이기에, 번화가는 꽤 길고 넓었다. 수업이 끝난 주말을 만끽하며, 대학생들이 지나다닌다. 밤새 웃고 술을 마시고 떠들려고 하겠지. 눈꼴사나운 즐거운 모습의 커플들이 보이자, 기분이 더욱 더러워진다.
“저기요, 죄송한데, 담배 있으세요?”
결국 무슨 생각인지 나는 옆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대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대학생은 정신 나간 녀석을 보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너, 고등학생 아니야? 우리 부속 고등학교.”
“맞아요.”
“담배를 달라고?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주기 싫으시면 관두세요.”
“어쭈?”
대학생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나는 퀭한,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런 대학생을 바라봤다. 대학생은 잠시 말이 없다, 담뱃갑에서 한 개피를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대학생이 붙여주는 불에 담배를 대고 들이마셨다.
“쿨럭, 쿨럭! 쿠헤엑! 우억!”
그리고 있는 힘껏 기침을 했다. 대학생이 어이없어하다, 낄낄대며 나를 바라본다.
“뭐야, 담배 피는 거 처음이냐?”
“콜록! 콜록! 그런데요.”
“피지 마라.”
나는 대답 없이 계속 기침을 해대면서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완전 불량학생이구만. 바로 옆에 대학교 번화가가 있어서, 학생 지도반 선생님들이 주말에는 순찰을 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 알바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될 대로 되라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보지?”
“그런 셈이죠.”
대학생은 사람 좋은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주로 담배의 해학성에 대해서. 알면 자기는 왜 피는데? 나는 대꾸 없이 대학생의 별 시답지 않은 충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계속 피고 있었다. 이것 역시 술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분명 그 일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문뜩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시선에 눈치 챘는지, 행인 중 한명이 고개를 돌린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건 도대체 무슨 장난일까.
화린이었다.
화린이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이윽고 굳은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며 빠른 걸음으로 거리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차갑게 가라앉던 마음에 불이 붙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삼류 소설도 아니고. 하지만 내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내 몸은 제멋대로 반쯤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내던지며 화린이의 뒷모습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윤화린!”
화린이는 따라오는 내 모습을 보고는, 달려 나간다.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막힘없이 달려 나간다. 그 뒤를 따라가며, 나도 거리를 질주한다. 도망가는 소녀와, 이름을 부르며 쫓아가는 소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려간다.
그리고 늘 가던 노래방 앞에서, 화린이를 따라잡았다.
“윤화린!”
“…….”
화린이는, 나한테서 몸을 돌린 채로 멈춰 선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며 나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야.”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있었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화린이의 목소리였다.
“아니, 그게…….”
“볼일 없으면, 나 그만 가볼게.”
달려오면서 생각한 할 말은 가득했지만, 막상 화린이를 만나자 입은 아무것도 내뱉지 못했다. 화린이는 망설임 없이 다시 몸을 돌렸다. 차가운 얼굴이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줘. 할 말이…….”
“싫어. 난 할 말 같은 거 없어.”
화린이는 날카롭게 말했다. 얇게 뜬 눈, 굳게 닫힌 입가. 지금까지는 생각조차도 못했던, 너무나도 차가운 태도. 그 태도에, 다시 말문이 막힌다. 화린이는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화린이를 붙잡지 못하고, 그저…….
만약 정말로 할 말이 없다면, 어째서 멈춰선 거지?
“기다려!”
내 목소리에, 다시 화린이의 발걸음이 멈춘다. 멈춰주었다.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려줘.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진 건,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줘. 이렇게 헤어져서, 다시는 못 보는 건 싫어. 어쩌면 지금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
어떻게든, 화린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면 되지? 도대체 무슨 말을……. 그러던 중, 나는 우리가 멈춰선 자리를 알아차렸다. 나는 급하게 말했다.
“시간 있어? 오랜만에 노래방이라도 같이 가자. 응?”
“내일, 연주회야. 쉬고 싶어.”
“친구의 마지막 부탁도 못 들어주는 거야?”
“마지막까지, 친구구나.”
화린이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노려봤다. 눈빛이 날카롭다. 베일 것 같은 눈빛. 그 눈동자는 약간 떨리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단호했다. 하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 여기서 보내면, 그걸로 끝이다.
“마지막이니까,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야. 지금 이 순간만, 다시 친구로 지내자. 지금만이라도, 늘 하듯이, 늘 했듯이, 친구로서 지내자. 응?”
“……마지막이야.”
화린이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린이는 잠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침묵. 그리고 화린이는 크게 심호흡 한 다음, 나를 돌아보며 쾌활하게 말했다. 늘 듣던 목소리로.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기분전환이라도 해볼까? 이번엔 점수 대결이라도 해보는 게 어때?”
웃는 얼굴. 늘 듣던 목소리.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억지로 참아내고, 나도 같이 쾌활하게, 늘 대하던 대로 말한다.
“좋아, 노래방에서는 늘 졌지만, 오늘은 안 질 거야!”
“흥, 리벤지 매치라는 건가? 오늘은 내가 유리하다고?”
화린이는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마저 목이 쉬어버릴 것 같다.

노래방에서 화린이는 언제나 소리를 질러댄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들뜬 모습으로, 나도 함께 소리를 지르는 노래를 부른다. 목이 갈라지지만, 억지로 소리를 쥐어짰다. 화린이는 찢어지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 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노래방이 끝나고 나왔지만, 나는 화린이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노래방에서 진 것은 목 상태가 안 좋아서였다고 변명하며, 오락실로 가자고 꼬드겼다. 화린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늘 그렇듯이 씨익 웃으며 따라주었다.
“오늘은 얍삽한 꼼수 쓰면 두들겨 팰 거다?”
“그런 거 안 써도 너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오락실로 걸어가며, 우리는 수다를 나눈다. 연주회니, 대회니, 지난번 있었던 일이느니 하는 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평소에 하던 대로, 나와 화린이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간다.
“도대체 아까 담배는 왜 핀 거야? 너 담배 폈냐?”
“그냥 한번 펴봤어. 너 때문에 술도 마셨으니까.”
“아주 막 나가시는구만?”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술 마시라고 꼬드겼던 너 때문이다?”
“어, 책임전가 하는 거야? 너 혹시 술도 마시고 다니냐?”
“내가 그럴 놈이냐?”
“하긴 니가 그럴 베짱이 있는 놈은 아니지. 그거 떼버려라. 아깝게 시리.”
“넌 제발 말 좀 골라서 써라!”
오락실에서 차례를 기다려서 자리에 앉는다. 서로 익숙한 캐릭터를 고르고, 대결을 시작한다.
“야, 꼼수 쓰지 말랬지!”
“하하하! 그 말을 믿었냐! 꼬우면 너도 하라니까!”
“끝나고 두고 보자!”
떠들면서, 게임을 한다. 늘 있던 광경.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보지 못할 광경. 그 광경을 가능하면 길게 끌고 싶어서, 일부로 시간을 끈다. 마음이 심란하다.
“아차!”
그리고 그러던 중, 조작을 실수한다. 내 캐릭터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술을 그만두더니, 생뚱맞게 허공에 헛발질을 날린다. 화린이는 기회를 놓이지 않고, 공격을 시작한다. 그 화려한 공격에 게임 속의 내 캐릭터가 쓰러지고, 화면에 내가 졌다는 문장이 표시된다. 화린이가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며 기뻐한다.
“하하하! 드디어 이겼다! 역시 꼼수만 아니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크윽, 분하다! 마지막에 그런 실수를!”
“하하하하!”
화린이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 내어 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오락실을 나섰다. 늘 하던 코스가, 끝났다.
“아, 후련하다! 드디어 이겼네!”
화린이는 여전히 기쁜지 그렇게 말한다. 늘 보던 모습이다.
그러나 조금씩 그 태도가 수그러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린이는 잠시 말없이 그렇게 서 있다가, 나를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됐어?”
방금까지와는 다른, 다시 차가운 반응. 그 반응의 차이에, 나는 숨을 멈춘다. 화린이는 나를 돌아보며, 약간 슬픈 미소를 짓는다.
“내가, 왜 너랑 그렇게 대결에 집착했는지 알아?”
“…….”
“한번이라도, 한번이라도 너한테 이기면, 원래 그때 말하려고 했어. 결국 순서가 반대가 됐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이렇게 됐고.”
화린이는 허탈한 듯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본다. 여전히 입가는 슬픈 웃음을 띄고 있다.
“이제 친구는, 끝이지?”
“…….”
화린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런 일이 있고 여전히 친구로 지내자고 하는 건, 욕심이겠지. 이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윤화린…….”
“하지 마.”
내 쥐어짜낸 말에, 화린이는 차갑게 말한다.
“말했잖아. 이걸로 마지막이라고. 나도,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어차피 곧 떠나면, 이제 볼 일도 없잖아.”
“이걸로, 넌 괜찮은 거야?”
내 떨리는 목소리에, 화린이는 말을 멈춘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린다.
“안녕, 지금까지 즐거웠어. 내일 대회, 잘 되길 바래.”
그 말만 남기고, 화린이는 다시 떠나간다. 그날처럼. 나는 급하게 말한다.
“만약, 만약 내가 친구 이상을 원한다면, 어떻게 할래?!”
“……만약, 그렇다면…….”
화린이는 천천히 나를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싱긋 웃음 지으면서.
“그렇다면, 정말 좋겠지.”
“그럼…….”
나는 급하게 외친다.
“하지만.”
화린이는 말했다.
“난 곧 떠나니까. 어차피 우린 잘 안될 관계였나 봐. 그렇게 많은 기회가 지났는데도, 이렇게 된 걸 보면.”
화린이는 잠시 눈길을 돌렸다가, 나를 보며 씩 웃어보인다.
“너랑 지내보면서 알았어. 내가 없으면, 뭐, 너 같은 둔하지만 좋은 남자에게는 더 좋은 사람이 나오겠지. 넌 지내면 즐거운 녀석이니까, 분명 그렇게 될 거야. 그럼 내가 있으면, 너한테 부담이 될 거잖아?”
“…….”
“그리고, 너한테 나는 그저 ‘친구’잖아? ‘여자인 친구’.”
나는 외치려고 했지만, 화린이는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슬프지만 여기까지.”
화린이는 걸어가다, 문뜩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만약, 내가 더 빨리 이야기를 꺼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내가 더 빨리, 이야기를 꺼냈다면?”
“……역시 ‘만약’은 별로 안 좋구나.”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화린이는 정말로 가버렸다. 안녕이라는 말은, 이미 했으니까.
그날처럼 혼자 남겨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쭈그려 앉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이렇게 되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애써 정리했던 마음이 다시 어지럽혀져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 만났을 때, 친구로서 시작한 게 잘못일까.
그날, 혼자서 실망한 게 잘못일까.
같이 지내온 그 시간에, 그 많은 기회를 한 번도 잡지 못한 게 잘못일까.
그 밤에,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한 게 잘못일까.
너무나도 생각나는 가능성이 많아서,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정말 등신이구나, 나는. 한숨을 쉬며,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다. 물론 될 리가 있나.
이렇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걸까.
긴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나는 화린이가 없는 나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걸까. 잡지 못한 기회를 후회하며, 있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미련을 가지고.
만약, 한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한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이제는 기회가 없다. 마지막 기회도, 이렇게 날아갔다.
“……아니지.”
나는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아직, 딱 한번,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었다.


윤화린은, 머리를 묶어 올렸다.
어제 그런 일이 있어서 진정할 수 없었지만, 연주회를 위해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조금 일찍 무리할 뿐이다. 화린은 거울을 보면서 심호흡했다. 그날 밤에도 입은, 아끼는 드레스는 역시 가슴 부분이 약간 늘어나있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은 이 옷이 제일 좋았다. 녀석이 웃었던 중학생 때의 그 연주회 때도, 이 옷을 입었었다. 녀석은 비웃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예뻤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아직도 그 옷을 무리해서 수선해가며 가지고 있었다.
오늘 공연이 끝나면, 이젠 버릴까.
처음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남녀관계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건 여자애다운, 얌전하고 조신한 아이들에게만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괄괄한 성격에, 남자애들과 어울렸지만, 한 번도 가슴 뛰는 관계를 겪지 못했다.
그 녀석과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좋은 친구.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마음 편한 친구. 곁에 있으면 즐거웠다. 편안했다. 같이 장난을 치고, 수다를 떨고, 놀러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화린의 첫 사랑은, 그리고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늘 자신의 곁에 있던, 허물없던 남자아이. 너무나도 남자같이 허물없는 자신의 모습에 결국 남자아이들은 늘 실망하고, 어딘가 거리를 두었지만, 그 아이는 달랐다. 그 아이만큼은 끝까지, 자신의 곁에 있어줄 것 같았다. 언제 만나도 편안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이미 친구로서 너무나도 사이가 좋았다. 이제 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면, 오히려 관계가 깨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날도, 부끄러운데도 억지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사실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좋아하던 아이에게 자신의 맨 몸을 보인 것이, 부끄러웠다. 다른 여자아이 같은 모습도 아니라, 편하다는 이유로 그런 옷을 입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거기서 소리를 지르면, 부끄러워하면, 지금까지처럼 곁에서 편안하게 지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할 테니까. 이제 와서 서로가 남자와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더 이상 그런 편한 관계로 지내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 거리 안에서, 최대한 용기를 냈다. 언젠가 하고 싶었던 밴드를 같이 하자고 조르고, 가능하면 단 둘이서 친구로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언젠가는 그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스스로 결심했다. 자신이 유리한 음악 말고, 단 하나라도 녀석을 이기면, 그때는 내가 용기를 내보자고. 한 걸음을 내딛어보자고.
결국 그런 일은 없었지만.
“윤화린양, 시간이에요.”
“알겠습니다.”
진행요원의 말에, 화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버린 귀걸이는 나중에 누군가 찾아주었지만, 목걸이만큼은 찾지 못했다. 다른 목걸이라도 할까 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아 비워둔 상태였다. 뭐, 상관없겠지. 이제 그 녀석은 곁에 없다. 일부로 그 날, 예쁘다고 말해줬던 유일한 그 모습을 지킬 필요는 없다. 화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익숙한 바이올린을 들고 대기실을 나섰다.

“너 지금 어디야!”
민석이의 외침에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거 소리 지르는 거 하고는. 안 그래도 들린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다시 귓가에 가져다 댄 다음 말했다.
“미안, 약간 늦어질 것 같아. 혹시 우리 차례 앞이냐?”
“다행히도 약간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일찍 와야지! 잠깐,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어제 노래방에서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야 이 멍청아!”
다시 소리를 지른다. 귀 아파라.
“너, 당장 튀어와! 안 그래도 화린이도 빠져서 기타 하나 모자란데, 너 없으면 드럼이랑 베이스로 연주하라고? 어디야! 택시 타고라도 당장 튀어와!”
“금방 갈 거니까 그만 소리 좀 질러! 지금 일생일대의 중대사 중이니까!”
내 대답에, 민석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너 도대체 뭐 하려는 거야?”
“혹시 잡혀가면, 그때는 미안하다.”
“뭐? 잡혀가? 야, 너 무슨 생각이야! 야! 야!”
뚝. 핸드폰을 접고, 나는 심호흡했다. 됐어. 진정됐다. 사실 그럴 리가 없었다. 가슴은 아무리 진정해도 아플 정도로 뛰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일생일대의 중대사 중이니까.
그때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약간 늦춰둔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진다.
진짜로 잡혀갈지도 모른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다.
이 기회를 놓이면, 다시 그때처럼 놓쳐버린 기회를 안타까워하며, 혼자서 멋대로 실망한 채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건 싫다.
잘 안 될지도 모른다. 아니, 잘 안 될 것이다. 그래도 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하고 후회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믿고 싶다. 언젠가 그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을, 끝없이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연주회장의 문으로 다가갔다.
“손님, 연주회는 벌써 시작되어서 들어가실 수 없는데요.”
진행위원 누님이 내 앞을 막는다. 나는 간절한 투로 말한다.
“죄송해요! 좀 늦어서요. 어떻게 안 될까요? 아직 연주를 시작한 건 아니잖아요?”
“……원래는 안 되는데, 특별히 봐드릴게요. 표 보여주세요.”
잠시 생각하던 안내위원 누님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자, 진짜 문제는 여기다. 나는 더욱 간절한 얼굴로 말한다.
“사실 제가 화린이 친구거든요? 표는 없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안내위원 누님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뀐다. 당연히 그렇겠지.
“표가 없으시면 들어가실 수 없는데요.”
“어떻게 좀 부탁드릴게요. 네?”
“그건 정말 안돼요. 친구 분인지 확인할 수도 없고요. 친구 분이라면, 조금 기다렸다가 공연이 끝나면 만나세요.”
누님의 얼굴이 조금 엄해진다. 나는 애절하게 말한다.
“제발이요? 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돌아가세요. 자꾸 이러면 직원 부를 거예요?”
“부탁드려요. 아, 화린이 아버지!”
“네?”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외치는 내 모습에, 안내위원 누님의 고개가 내 시선 쪽으로 향한다. 지금이다! 나는 문을 재빠르게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잠깐, 야! 이쪽으로 사람 보내주세요!”
안내위원 누님이 나를 막으려고 달려 들어오며 귀에 낀 통신기에 말한다. 나는 문을 못 열게 준비한 막대기를 손잡이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연주회장 가운데 복도를 달려 나간다. 그 소란스러움에, 곧 시작될 연주를 기다리던 관객들이 웅성대며 내 쪽을 바라본다. 정면에서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막 현을 키려던 화린이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화린이의 표정에 경악이 차오른다.
“너……! 니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대회는 어쩌고!”
연주회 도중인 것도 잊었는지, 화린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외친다. 나는 단상 위로 뛰어올라, 화린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검은 옷의 직원들이 문을 열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인다. 당황한 화린이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다급하게 외친다.
“윤화린!”
“뭐, 뭐야…….”
화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입을 입술로 틀어막았으니까. 관객들의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귓가에 들리고, 두 눈을 크게 뜬 화린이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입술을 뗐다.
“무, 무슨 짓이야!”
“가지 마!”
화린이의 말이 멎는다. 나는 재빨리 계속해서 외친다.
“가지 말라고! 유럽에 유학 가는 것 따위, 때려치워! 나랑 같이 여기 있어줘!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어! 네가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게, 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말할게! 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지금까지는 친구로 만족했지만, 사실 나도 그 이상을 원했다고!”
“무슨…….”
“니가 나빠!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로 본 적도 없으면서,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도 당황한단 말이야!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기뻤어! 사실 내가 말하고 싶었다고! 내 맘대로 포기하고 있었었단 말이야! 이젠 포기 안할래! 내 곁에 있어줘! 내 여자 친구가 되어줘! ‘여자인 친구’ 말고, 말 그대로 여자 친구, 애인 말이야!”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내밀며 외친다. 그날, 화린이가 버렸던 그 목걸이다. 언젠가, 화린이가 연주회에 초대했던 날 차고 있었던, 그 목걸이다.
관객들이 보기에는 왠 미친놈이 튀어 나와서는 난리를 치는 걸로 보이겠지. 하지만 난 진지하다. 진심이다. 여기서 잡혀서 끌려간다고 해도, 그게 두려워도,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이다. 여기서 안 된다면, 그때야 말로 정말로 포기하겠다. 하지만 말도 못하고, 이렇게 끝내는 건 싫다.
화장을 했음에도, 타오를 것 같이 붉게 달아오르는 화린이의 볼이 보인다. 뒤에서 직원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다. 화린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 끝인가.
그러나 곧 화린이는 바이올린과 현을 버리고는, 내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관객들의 탄성이, 환호에 가깝게 들린다.
“바보야!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나는 귓가에 외치는 화린이의 외침에, 화린이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탄성이 더욱 강해진다.
“알았어……. 네 곁에 있을게. 네 여자 친구가 되어줄게……! 다시는, 다시는 놓지 않을 거야!”
화린이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싸구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 같은 광경.
하지만 즉시, 화린이를 몸에서 떨어트렸다. 화린이가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놀라는 게 느껴진다.
“잠깐! 아직 끝이 아니야! 가자!”
“가, 가긴 어딜 가?”
당황해서 외치는 화린이에게, 나는 그 손을 잡고 외친다.
“밴드 대회 회장이지 어디긴 어디야! 지금 가면 늦지 않을 거야! 따라와!”
“자, 잠깐! 아직 연주회 중이라고!”
“그런 거 내가 튀어 들어올 때 벌써 끝났어! 가자!”
나는 화린이의 손을 잡고, 억지로 끌어당긴다. 어느새 단상 아래까지 다가온 직원들이 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다. 나는 그 손을 어떻게든 피하며, 입구로 달려간다. 드레스를 입은 화린이가, 어렵게 따라온다. 그 급한 발걸음에, 구두가 벗겨진다.
역시 어른 남자의 속도에는 따라갈 수 없어, 직원들이 바로 뒤에 달려온다. 그 중 한명에 나에게 손을 뻗는다.
“잠깐, 이 녀석, 어딜 도망쳐!”
하지만 이쪽으로 달려오려던 직원들이, 관객들에 막혀 제제 당한다. 직원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다.
“거, 젊은 남녀가 사랑의 도피 한다는 데, 좀 놔둡시다.”
“맞아요! 이런 게 진짜 볼거리지!”
당신들, 돈 내고 들어왔는데 그래도 되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계속해서 입구로 달려 나간다. 나와 나한테 끌려오는 화린이를 보고,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당연히 화를 내며 우리를 방해할 줄 알았는데.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화린이의 팬이다. 그리고 그들은, 화린이의 편이었다.
화린이는 당황했지만, 이윽고 활짝 웃으며 관객들을 돌아보고는 외쳤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연주회는 이걸로 마칠게요! 참석하신 분들 모두, 다음번 연주회 때 초대하겠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기대할게요!”
관객들이 마지막으로 외친다.
입구를 박차고, 공연장을 달려 나간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뜬다. 따라오는 다른 직원들보다 조금 앞서가며, 공연장 입구를 나서 차도로 나간다. 화린이가 바로 뒤에 따라오는 직원들을 보며 당황하며 외친다. 이대로라면 금방 잡힌다.
“잠깐,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하게?! 택시라도 잡게?!”
“벌써 준비 해놨어! 봐봐!”
내 손가락질에, 화린이가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깜짝 놀란다. 젊은 퀵서비스 기사도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며 외쳤다.
“잠깐! 두 사람은 못 태워요!”
“어떻게든 해주세요! 자, 먼저 타! 헬멧 쓰고!”
“이거 100% 잡히는데!”
“일단 태워주시고 생각하세요! 출발!”
“안되면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게요! 출발해주세요!”
“에이씨, 사고가 나든 뭐가 어떻게 되든 난 몰라요? 오늘 재수 옴 붙었네!”
나와 화린이의 외침에, 퀵서비스 기사는 핸들을 돌린다. 오토바이가 큰 소리를 내며,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윽, 떨어질 것 같다! 나는 화린이를 꽉 안았다. 뒤따라오던 직원들이 큰소리를 내는 게 느껴진다.
“어때, 내 행동력 죽이지! 반할 것 같지?”
“바보야! 생각이라는 걸 좀 해봐라!”
화린이는 성이 난 듯 외쳤다. 하지만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너 왜 이제야……. 화린아!”
나를 보고 큰 소리로 화를 내려고 하던 민석이는, 내 뒤에 따라온 화린이의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수정이도 내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다, 화린이의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달려가 안긴다.
“화린아! 여기는 어떻게 왔어?”
“이 바보가 연주회를 엉망으로 만들면서 데리러 왔어! 우리 차례는 얼마나 남았어?”
“앞으로 4팀 뒤야! 잠깐, 니들 모습이 왜 그 모양이냐?”
민석이가 우리의 머리를 가리키며 외친다. 하긴, 화린이야 헬멧을 썼다고 해도, 바람에 휘날린 내 머리는 바람에 휘날려 가관일 것이다. 화린이도 구두도 벗겨지고 맨발에, 드레스도 강한 바람에 여기저기 찢어져있고. 화린이는 자신의 드레스를 보더니, 나를 노려본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아끼는 드레스란 말……. 푸하하!”
머리가 가관이긴 한가보군. 화린이는 내 머리를 손가락질하며 웃는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누르며 외친다.
“미안, 드레스는 나중에 사줄 테니까!”
“네 용돈으로는 못 살 텐데?”
“어, 어떻게든 사줄 테니까!”
화린이는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나에게 안기며, 이번에는 자신이 강하게 내 입술에 입을 맞춘다. 민석이의 휘파람소리와, 수정이의 탄성이 들려온다.
“됐어! 이번 건 없는 걸로 쳐줄게!”
“어, 응.”
약간 얼떨떨한 채로, 나는 말했다. 그때 수정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근데 옷 어떻게 하지? 그 드레스로 연주하는 건 무리잖아?”
“괜찮아! 이렇게 하면……!”
그리고 화린이는 씩 웃더니 망설임 없이, 드레스의 아랫부분을 잡고 뜯어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긴 드레스 치마는 미니스커트에 가까울 정도로 뜯어졌다. 화린이는 찢어낸 드레스 치마를 망설임 없이 던져버린 다음, 드레스를 부분부분 찢는다. 그러고 나자, 펑크락이나 하드락 밴드의 의상 같은 느낌이 날 정도로 파격적인 옷이 되었다.
“너, 정말 괜찮겠어?”
“여차하면 네가 사준다며!”
“없던 걸로 친다며! 나 사실 돈 없어!”
“몸으로 갚던가!”
화린이는 씩 웃어 보인다.
“앞의 팀 끝났다! 이제 3팀 남았어!”
무대 쪽을 바라보고는 민석이 녀석이 다급히 외친다. 화린이는 생각났다는 듯이, 우리를 모이게 한 다음 말했다.
“미안, 좀 무리한 부탁인데 부탁이 하나 있어! 곡을 좀 바꿔도 될까?”
“뭐?!”
좀 무리한 부탁 정도가 아니라 완전 불가능한 부탁이다. 화린이는 그러나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코드가 약간 바뀌고, 리듬이 좀 바뀌었을 뿐이지 같은 곡이야! 내가 지난번에 작곡했던 곡을 연습했다면, 분명 칠 수 있을 거야! 혹시 모르니까, 지금 빨리 연습하자!”
“잠깐, 괜찮겠어? 이제 3팀 남았다고?”
내 질문에 화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 곡은 연주할 필요가 없어졌는걸!”
“……알았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화린이는 우리의 대답에, 눈물이 흐르는 눈을 닦고는 말했다.
“정말,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야, 화장 더러워지잖아! 이거 수습이 안 되겠네……. 이걸로 닦아!”
“이럴 때는 그런 말 하지 마! 분위기 못 맞추기는……!”
화린이는 약간 불만인지 내 말에 대꾸하며, 내가 건넨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그리고 하나 더!”
“이번엔 또 뭐야?”
“이거.”
나는 화린이의 목에, 아까부터 쥐고 있던 목걸이를 채워준다. 아까는 바빠서 채워주지 못했으니까.
“기왕 그때의 예쁜 모습으로 꾸몄는데, 이게 빠지면 섭섭하지.”
“너……! 알고 있었어?”
“그야 모를 리가 있나.”
화린이의, 가장 예쁜 모습이었는데. 화린이가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입을…….
“거기 두 분, 뜨거운 건 좋은데 이제 2팀 남았거든요? 끝나고 하시죠?”
“화린아, 기쁜 건 알겠는데 연습할 시간 없어!”
“정말, 너희 둘도 분위기 좀 맞춰봐!”
민석이와 수정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는다.
그래, 우리는 이런 느낌이다.
아무리 급하고, 여유가 없어도, 이렇게 장난을 치고 놀리는, 그런 긴장감 없는 느낌. 역시 이 느낌이, 너무나도 편하다.
화린이는 멋진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좋아! 그럼, 해보자!”

“1, 2, 1 2 3!”
민석이 녀석이 스틱을 부딪치며 구호를 넣는 것과 동시에, 화린이의 일렉트릭 기타가 화려한 스타트를 끊는다. 원곡과는 전혀 다른, 신나는 멜로디. 뒤따라서 나의 어설픈 손가락도 열심히 코드를 잡으며 화린이의 기타 음을 따라간다. 분위기가 완전히 변해서 따라가는 게 힘들다. 퀵서비스를 타고 오면서 화린이를 너무 꽉 끌어안아서 손가락에 힘도 없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 나는 온 힘을 다해 기타 줄을 튕긴다. 수정이의 베이스는 바뀐 음에도 여유 있게 소리의 중심을 잡아간다.
기록할만한, 우리 밴드의 첫 데뷔 무대.
전주가 끝날 무렵, 화린이는 앞에 있는 마이크에 입을 살짝 갔다대고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찢어진 드레스가 그 동작에 팔랑거린다.
친구에서 시작한 남자와 여자가,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 하기로 한다는, 참으로 닭살 돋는 가사. 하지만 그 내용에, 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파워풀한 성량으로 시원스럽게 노래하는 사이에도, 화린이의 손가락은 흔들림 없이 다음 가닥을 찾아 움직인다. 나도 보조를 맞추어, 화린이의 음을 열심히 보충한다.
지금까지 화린이가 없이 연습할 때의 그 형편없는 실력은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모두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솜씨로 방금 연습한 노래를 따라한다. 화린이의 곡은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그 슬픈 음의 노래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
부끄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노랫말. 그러나 화린이는 정말 기쁜 듯 노래한다. 듣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와 화린이, 그리고 우리만큼은 아는, 우리의 이야기. 화린이는 노래를 하다 문뜩 나를 바라보고 웃어 보인다. 그 빛나는 미소에, 나도 함께 미소를 짓는다. 민석이와 수정이도 웃어 보인다.
“……!”
노래는 클라이막스로 다가가고, 모두가 열심히 손을 움직인다. 그리고 화린이의 화려한 피니시로, 노래가 끝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수상은 실패했다.
심사위원들은 파워풀한 메인기타와 리드보컬에는 큰 점수를 준 모양이었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대상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했다. 사실 오글거리는 노랫말이 한 몫 했다고 생각하지만, 말했다가는 맞아 죽을 테니 관두자.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결과, 특별상은 받았다. 찢어진 드레스를 하고 특별상 트로피를 받아 올린 화린이의 모습은 다양한 참가팀들 사이에서도 꽤나 화제가 되었다.
사실 그보다 화제가 된 것은 역시 연주회의 사건이었다. 워낙 유명했는지, 무려 TV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다. 그 정도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기에, 얼굴이 화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해외 토픽에도 실렸다는 이야기는 차마 꺼내기도 싫다.
화린이는 스폰서들 사이에서 꽤나 욕을 먹은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광고는 확실하게 된 모양이었다. 인기는 오히려 더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회의 일도 있어서, 서로 시너지 파급효과를 낸 모양이었다.
화린이는 결국 유럽 유학을 포기했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었지만, 죽어도 안 간다고 뻐팅긴 덕분에 이야기는 없던 걸로 되었다. 화린이는 며칠 후 학교에 복학해서,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와 화린이가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됐는지도 차마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화린이 집안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화린이의 유학길을 막아버린, 천하의 죽일 놈으로 찍힌 모양이었다. 사실 최종 가족회의 때에 불려가기까지 했다. 나를 죽이려는 눈빛의 어르신들 사이에 서있는 것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래도, 본인의 희망 때문인지, 나는 화린이와 결국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에서, 연인 관계로 인정받았다. 모두에게.
그리고 시간이 꽤 흘렀다.


“내 여권 못 봤어?”
“그 정도로 자주 쓰면 좀 미리미리 챙겨라, 좀! 어떻게 만날 내가 가져다줘야 하냐!”
“아, 고마워.”
툴툴대며, 나는 급하게 서랍장을 뒤지는 화린이에게 여권을 건네준다. 짧게 자른 머리를 찰랑거리며, 화린이는 나에게 입을 맞추고는 웃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 오는 거야?”
화린이는 비행용 가방에 급하게 짐을 던져 넣으며 대답한다.
“음, 유럽에서 여기 저기 공연할 테니까, 아마 한 달 정도?”
“너무 길다. 1주일로 줄이자. 아니다, 역시 3박 4일로 줄이자.”
“무리한 소리 하지 마.”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준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었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절대로 놓지 않을 거라고 했으면서……!”
화린이는 한숨을 쉬고는, 나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나도 그 몸을, 강하게 안는다. 우리 둘 다, 웃는 얼굴로.
“하여간, 언제까지나 어린애라니까.”
“흥, 언제까지나 마음만큼은 청춘이라고.”
그로부터 수년.
화린이는 정말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언젠가 했던 생각처럼 젊은 천재로서, 신문이나 TV에도 이름을 비추고 이렇게 자주 집을 비우고는 연주다 뭐다 세계를 누빈다. 솔직히 그런 점이 약간 불만이긴 하지만, 그게 화린이의 일이니까, 화린이를 기다리는 게 내 일이겠지.
“엄마 또 어디 나가?”
우리의 말소리가 시끄러웠는지, 딸아이가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고 나온다. 나는 딸아이를 안아 올리며 말한다.
“우리 공주님, 엄마 또 해외로 나가신대. 우리 가지 말자고 부탁하자.”
“엄마, 금방 와야 해?”
“아빠보다 애가 더 어른스럽네.”
윽. 화린이는 웃으면서, 나에게 딸아이를 받아 안아들며 볼에 입을 맞춘다.
아직도 화린이네 집안에서는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그때의 그 놈팽이랑 결혼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화린이가 좋아 죽겠다고 하니까 차마 반대는 안하셨지만, 화린이는 모르는 일이지만 결혼식 전날 어르신들이랑 술 마시다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 했다. 딸이 태어난 뒤로는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하시진 않지만, 요즘도 술이 들어가면 집안사람들이 모두 다 나를 포위하고는 ‘화린이를 울리면 살려두지 않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가만두지 않겠다’ 하고는 협박을 하신다. 그게 모두 화린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그저 웃어 보인다.
“몇 밤이나 있다 와?”
“음, 두 손으로 세 번.”
“너무 길다. 내일 오면 안 돼?”
“봐봐. 우리 공주님도 너무 길다고 하시잖아. 역시 1주일로 줄이자.”
“우리 공주님도 아빠도, 이 엄마가 그렇게 좋아?”
화린이는 웃으면서 다가와, 나에게 입을 맞추고는 딸의 볼에도 다시 키스를 한다. 나는 화린이에게서 딸을 다시 받아든다.
“밴드 공연도 가까우니까, 빨리 돌아와. 응?”
“정말, 아직 두 달이나 남았잖아.”
아직도 우리의 밴드는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취미로 하는 밴드지만, 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윤화린이 리드로 있는 밴드라는 점 때문에 꽤나 유명하긴 하다. 민석이와 수정이 부부도 나름대로 바쁘지만, 그래도 더 바쁜 화린이의 사정을 봐주며 가끔 공연을 하거나 하며 지낸다. 얼마 전 민석이가 자신의 아들이 크면 우리 딸이랑 결혼시키자는 소리를 했지만, 우리 딸을 감히 어디서 노려! 우리 딸은 언제까지나 이 아빠와 살 거야! 그렇게 말하자 화린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놓고 바보 취급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 가장의 권위는 없는 것 같다.
“그럼, 엄마 금방 다녀올 테니까. 선물 사올 테니까 아빠랑 잘 지내고 있어?”
“역시 어머니가 자주 집을 비우는 건 우리 딸 교육에 안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이제 그만 좀 해. 일찍 올 테니까.”
화린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나의 애절한 눈빛에, 약한 한숨을 지으며 다가와서,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다.
“사랑해.”
“나도. 잘 다녀와.”
화린이는 약간 부끄러운지 웃으며,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음, 아무래도 어쨌든 우리의 관계는 아직 뜨거운 것 같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딸을 바라보며 말한다.
“자, 그러면 엄마 금방 오시길 바라면서, 공주님 다시 잘까? 밤이 깊었어요.”
졸린 지 눈을 비비는 딸을 침대에 다시 눕히고, 나도 그 옆에 같이 눕는다.
친구, 그리고 친구 이상 연인 미만, 그리고 연인을 지나서 부부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관계는 변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겠지. 나는 눈을 감고 그렇게 생각했다. 화린이는 언제나 내 곁에 있고, 나도 언제나 화린이의 곁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부부보다는 친구의 느낌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편한 느낌이다.
이 모든 게, 그때의 마지막 기회를 놓이지 않은 덕분이다.
눈을 감으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날의 그 두근거리던 마음. 뛰던 가슴이. 지금도 이 가슴은, 그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두근거린다.
그녀는 노래방에서 언제나 소리를 질러댄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그녀의 곁에서 나는 함께 소리를 질러댄다. 서로를 보고 웃음 지으며.
이 이상 가는 행복이 어디 있을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화린이는 정말로 1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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