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라한대]폭염소녀주의보!

원본 : http://lightnovel.kr/one/405555
작성 : 2012년 8월 5일



“아……. 안녕하세……. 요?”
“…….”
뭐지 이건. 문을 열자마자 든 생각은 오로지 그거였다.
때는 여름. 올해도 어김없이 그 힘을 무섭도록 발휘해주시는 빌어 처먹을 온난화 덕분에 날씨는 환장하도록 더웠다. 코스피 지수가 저렇게 매일같이 역사상 신기록을 갱신하면서 올랐다면 아마 대한민국에는 기뻐서 미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겠지. 안 됐네요. 최고기온이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태양빛은 뇌를 그대로 찜통에 넣은 고기처럼 익혀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리쬐고, 아스팔트는 지글지글 익다 못해 아예 녹아버렸다고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프라이팬 올리고 계란 탁 파 송송 하면 라면도 끓일 수 있다나 뭐라나. 시골동네인 우리 집도 이 모양이니 도시는 어떤 꼴일지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찜통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이 내 사랑, 내 소꿉친구 낡아빠진 선풍기 미순이랑 함께 사는 나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소녀는, 우물쭈물하며 내가 건넨 냉수를 받아들었다.
“저, 가, 감사하지만 더운……. 아, 아니, 뜨거운 물로 주시면 안 될까요?”
“…….”
주문이 참 많은 아가씨다. 그보다 이 더워 죽겠는, 미순이가 팬이 날아가도록 가동되고 있는 이 시점에 뜨거운 물이라고? 취향 거 독특하네.
하긴, 독특한 취향은 외견부터 묻어나온다. 뭐냐 저 옷은. 도대체 왜 저 아가씨는 이 땡볕에 검은 드레스를, 그것도 저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덥고 짜증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거지? 진짜 옆에 그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덥다. 내가 짜증난다.
끓인 물이야 대충 땡볕에 내밀었다 주면 되는 고로 나는 그렇게 했다. 그 사이에 손이 데이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아, 감……. 사합……. 아아…….”
그리고 애매한 웃는 얼굴로 내 잔을 받아들이려던 소녀는 너무 뜨거웠는지 잔을 놓쳐버렸다. 담겨있던 뜨거운 물이 내 다리를 익혀간다. 다리만 온탕, 아니 열탕에 들어온 기분이다.
눈까지 가린 긴 검은 머리(확 더워진다), 그 밑의 얼굴은 제법 예쁜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옷이랑 합쳐져서 참 둔하고 어리버리하게 느껴진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좋다, 정도로 생각할 거다. 사람마다 성격은 다른 거고, 다른 사람이 둔하고 어리버리 하다고 뭐라고 할 권리는 나에게 없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고.
짜증나잖아.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그런 생각은 일단 구덩이라도 파고 마음 깊숙한 곳에 던져뒀다. 더운 여름날에 구덩이를 파고 던져넣느라 훨씬 더워졌다. 미순이의 파워를 더 올렸다. ‘히이잉~’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팬이 날아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회전속도가 올라갔다. 힘내라, 미순아.
“저, 물 좀…….”
“…….”
이번에는 소녀가 물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잔을 아예 내려두었다. 그리고 눈빛으로 ‘엎으면 뒤진다’ 라는 사념을 보내줬다. 잔을 집으려던 소녀는 왠지 움찔하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미, 미지근한 물이라도 좋아요…….”
덥다. 더워서 미칠 것 같다. 그만 소꿉친구 미순이 말고 쭉빵한 에어컨이라도 들여놔야 할 것 같다. 이번에는 그런 사념을 담아 미순이를 바라봤더니, 기분 탓인지 ‘히이잉~’ 소리가 나면서 미순이의 회전 속도가 올라갔다.
“식으면 마셔. 아무튼 그래서, 넌 누구야?”
냉수 잔을 집으며 물었다. 그리고 물을 입에 확 들이키는 순간 고통과 함께 뿜어버렸다. 왜냐고? 한겨울에도 따뜻하게 음식을 보관해주는 우리 집 냉장고를 어르고 달래서 30시간이나 숙성시킨 내 사치품 냉수가 커피믹스라도 한 봉 부워야하지 않을까 싶은 알맞은 온도로 변했거든. 뭐지 이건? 아니,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이렇게 더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당초 미순이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잖아!
“아, 아으…….”
“아, 미안! 닦아줄게!”
하지만 그것도 뜨거운 물로 세수하고 세탁까지 마친 다음 그 옷을 여전히 입고 있는 저 여자애 좀 닦아준 다음이다. 여자애는 젖어버린 옷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 울쌍을 지으며 어버버버 하고 있었거든. 뜨겁지도 않나?
그러고 보니 정체도 듣지 못한 채 찾아왔다는 한 마디에 집으로 들인 상태에서 얼굴을 닦아주고 갈아입을 옷을 주는 건 세이프인가? EPIC FAIL 아냐? 그런 걸 고민하면서 일단 수돗물을 켰다. 행주로 닦아주는 건 좀 그렇지만 급하니 어쩔 수 없지. 화상 입겠다.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리고 뭐냐 이건? 분명 난 냉수 풀가동 했을 텐데? 아무리 우리 집 상수도가 시골의 특성상 개판 오 분 전이라고 해도 이건 온천수잖아! 손이 더운 물에 들어간 것처럼 화끈거린다. 화상까지는 안 입었겠지. 어쩔 수 없다. 나는 행주의 물기를 빼고 사치품을 조금 더 낭비하기로 했다.
행주의 물기를 짜내는 건 고통스러웠다. 두어 번 정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는 해냈다. 그리고 기껏해야 2컵 정도 남은 시원한 물의 한 컵 분량을 희생하며 재빨리 행주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좀 걸려 여자애는 얼굴의 물기는 털어버린 후였지만 이걸로 닦으면 시원이라도 해지겠지.
“자, 얼굴 내밀어봐. 시원할거야.
“아, 저, 잠깐…….”
“앗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 내 손이, 내 손이 익는 느낌이다! 뭐야 이거? 행주와 내 손 일부가 여자애의 얼굴에 닿는 순간, 행주에서는 맹렬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 손은 할 말도 없지. 손을 붙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나를 보면서 소녀는 어버버버 하고는 우물쭈물하는 모양이었다.
“저, 그게, 죄, 죄송, 해요…….”
“아으……. 뭐야 도대체…….”
눈물이 찔끔 콧물이 쬘끔. 마지막 남은 냉수를 사용할 수도 없어서 손을 미순이에게 가져다 댔다.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낫겠지.
그건 그렇고 덥다. 엄청 덥다. 여러 이벤트가 있어서 그런지 덥다.
그리고 슬슬 짜증난다. 더위에 짜증이 솟구친다.
하지만 괜찮다. 미순이가 나를 위로해주니까. 아아, 미순아. 역시 널 소꿉친구로 삼길 잘했어. 나를 진정시키는 건 언제나 너 뿐이야. 쭉빵녀따위. 앞으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자.
펑!
“미순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미순이는 모터 부분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쓰러졌다. 충격 탓인지 미순이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나는 넘어지려고 하는 미순이를 받쳐 들었다. 미순이가 검은 연기를 쿨럭 거린다.
여기부터는 내 뇌내 망상이라고, 더위에 의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미순이를 안고 있었다. 약간 가냘프고, 순진한 얼굴에 커다란 안경을 쓴 미순이를. 미순이는 계속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애절하게 웃었다.
“미안……. 나, 여기까지인 것 같아…….”
“힘내! 미순아! 괜찮아! 내가 꼭 고쳐줄게! 얼마가 들든,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고쳐줄게!”
“헤헤, 기뻐……. 하지만 아니야……. 이제는 새로운 선풍기도 많이 나왔고, 에어컨도 있어……. 나한테 돈을 쓰느니, 그런 애들과 함께 시원한 나날을 보내…….”
“그럴 순 없어! 너랑, 너랑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는데! 기억나지 않는 거야?! 어렸을 때 네 앞에서 외계인 놀이를 했던 것, 멱 감고 등을 말리던 것, 땀이 나서 네 머리를 셔츠랑 팬티 사이에 쑤셔 박고 즐긴 것!”
“마, 마지막은 좀 이상하지만……. 기억나…….”
“네가 너무 좋아서 코드 뽑은 너를 질질 끌고 돌아다니다가 바람 안 나온다고 운적도 있잖아! 그것들 모두 생각나지 않는 거야?!”
“나도……. 나도 다 기억나…….”
미순이는 어렵사리 웃으며,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모두 추억들이잖아……? 나는, 이렇게 낡았지만……. 너는, 미래로 나아가…….”
“그럴 순 없다고!”
“괜찮아……. 나는, 로봇들의 천국에 먼저 가 있을게……. 새로운 선풍기가 오면, 행복하게 해줘……. 선풍기는 어떨까요?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시원한 바람. 인공의 바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풍기는…….”
“미순아아아아아아아아!”
미순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나를 보며, 소녀는 이제는 정말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나를 위로하려는 듯 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에…….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 니다?”
“……누구냐, 넌.”
“……네?”
그리고 나는 미순이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소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더욱 더워졌다. 미순이가 없으니까.
덥다. 짜증난다. 그리고 그게 전부 이 녀석 탓이다. 이 녀석이 우리 집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내 짜증수치와 더위수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다.
“도대체 누구야 넌! 왜 여기 왔어! 원하는 게 뭐야! 정체는 뭐고! 미순이의 원수!”
“네?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저는…….”
“저는이고 나발이고 빨리 불……. 앗 뜨거어어어어어어어어!”
멱살을 잡으려다 다시 손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바닥을 구르자, 그런 나를 보고 소녀는 우물쭈물 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포, 폭염, 이라고 해요…….”
“……폭염?”
“그……. 네. 폭염.”
그렇군. 그런 건가.
모든 게 이해됐다. 이 애를 보면 왜 더운지, 왜 짜증이 나는지. 폭염이라는 건 스스로가 뜨거운 것 보다 보는 사람과 주위를 덥고 짜증나게 만드는 거였군. 폭염의 원인이 옆에 있으니 햇볕에 물 컵만 내놔도 끓고, 내 소중한 냉수도 끓고, 수돗물도 끓고, 행주도 끓고, 저 것의 몸도 끓고, 그리고…….
“…….”
나는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보다 온기가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빨라 보인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 뇌도 익어버린 것 같다. 나는 냉수 통을 꺼내, 뚜껑을 따고, 바닥에 누워서 잠들어버린 미순이의 위에 마지막 한 컵을 부워줬다.
“지금까지 수고 많았는데, 내가 널 위해 해준 건 아무것도 없어... 미안해... 이 냉수라도, 시원하게 마셔.”
미순이도 기쁜지 파직파직 하는 소리를 낸다. 미안하다. 해줄 수 있는 게 이것 말고는 하나 밖에 없다.
눈앞에, 미순이의 원수가 있으니까.
나는 이를 악 물고, 모든 통증을 이겨낼 준비를 하면서 왠지 모를 싸늘한 방안의 공기에 놀랐는지 두리번거리는 폭염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든 좋으니까 먼 곳으로 썩 꺼져버려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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