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7일 수요일

[라한대]그 아이와 아침 등교 버스.


작성일 : 2011년 9월 7일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예로 들자면, 오늘 아침 우연히 늦잠을 잔 것도, 달려가서 우연히 지각하지 않을 마지막 버스를 탄 것도, 그 버스 안에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타고 있던 것도 우연이니까.
하지만 하느님, 이런 우연 까지는 필요 없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된 이상, 공항으로 간다!”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지르며 현실도피를 하는 사이에도, 눈앞의 광경은 바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복면을 쓴 강도가, 권총을 흔들면서, 기사를 위협하고 있는 광경은.
이런 일이 진짜로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차마 뭐라고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아하하하.
아침 출근, 혹은 등교시간, 또는 다른 이유로 버스에 탄 손님들은 각자의 방법대로 걱정에 떨고 있었다. 시간대에 비해서 버스 안은 생각보다 한산한 편이었다. 나는 기대에 차서 옆에 앉은 그 애를 바라봤다. 미묘한 기대를 걸고. 마음에 든 남자애가 벌떡 일어나서 강도를 때려눕히고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를 구해준다……. 얼마나 멋있겠어!
“저기요.”
그리고 그 순간, 진짜로 그 아이는 일어섰다. 내 눈이 크게 떠진다. 잠깐, 분명 그런 걸 기대하긴 했지만 진짜로 할 필요는 없어! 위험하다고! 나는 바지 끝을 살짝 붙잡았다. 하지만 일어난 그 아이의 태도는 당당함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뭐야?!”
신경이 날카로운 걸까. 칼슘을 섭취하면 좋을 텐데. 혼란해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을 하는 날 내버려두고, 복면강도는 안광을 빛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뚜벅, 뚜벅. 저기요, 권총, 권총이요! 강도는 그 아이를 바라보는데 너무 열중해서는 총구를 나를 향하고는 걸어오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것 좀 치워주세요!
총구를 피하려고 몸을 비트는 나와, 똑바로 서서는 어느새 강도와 이마를 맞부딪힌 그 아이에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저, 저기, 그게 말이에요.”
떨리는 목소리.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밀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강도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돌아가는 시선. 아, 그게 평범한 남자아이의 반응이겠지만, 그러지 않아줬으면 했는데……. 복면강도는 턱을 추켜올리고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앙?!”
“그게, 저…….”
꿀꺽. 모두가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입을 열었다.
“학교, 지각할 것 같은데, 내려주시면, 안될까요?”
“…….”
다시 한 번 물을 끼얹은 것 같은 침묵. 안녕, 내 청춘. 안녕, 내 사랑. 15분 전만 해도 나를 가득 채웠던 좋아하는 남학생과 앉았다는 기쁨은, 이제는 이런 팔푼이를 보고 가슴을 두근거렸다는 사실에 슬픔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 슬프다.
“안 돼! 오늘은 학교 쉬어! 선생님도 별 말씀 안할 테니까!”
“그, 그런가요…….”
친절하게 조언까지 해주는 강도. 남학생(이제는 그 아이라는 호칭도 아깝다)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정확히는 앉으려고 했다.
“여자 친구와 등교라니, 부러운 청춘이구만. 한발 쏴주고 싶지만 예쁜 여자 친구 얼굴을 봐서 봐준다.”
“네?”
얼빠진 내 대답. 강도는 나를 힐끔 보더니 한쪽 눈을 찔끔, 하고 감으며 윙크를 날린다.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열기가 끓어올라 얼굴이 붉어진다. 강도는 그 의미를 오해했는지 푸하하하 하며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린다.
아, 참자. 참아. 사는 게 우선이야. 그렇지. 들이 마시고, 내쉬고, 들이 마시고…….
“그, 그렇죠? 저도 이런 예쁜 아이가 제 여자 친구라서 기뻐요. 하하하하!”
빠직, 하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회로가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남학생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내 팔에 슬쩍 팔을 낀다. 그리고 얼이 빠져 풀어진 주먹에, 깍지를 껴가며 손을 맞잡는다.
“…….”
“차, 참아. 응? 그, 이런 기회로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쁘니까…….”
“…….”
남학생이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한다. 얼굴 전체가 사라진 느낌. 머리 뚜껑이 열리고, 증기가 분출되고 있었다. 심장은 최고출력.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하지. 버스인질극에 들어온 것도 우연이고, 하필이면 이 남학생과 앉은 것도 우연이고, 진실을 안 것도 우연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참 정겨운 커플이구만! 안 그래요, 여러분?”
“그, 그러게요…….”
“예, 예쁜 사랑 하세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권총을 휘두르는 강도에, 버스 안 사람들이 약간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에 섞인 감정은, 진짜로 훈훈한 커플을 보는 느낌. 이 녀석이, 옆자리의 남학생이, 여자 친구를 구해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보는 그런 느낌.
못참겠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
주의성 없이 날 겨누며 내려온 권총을 잡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강도를 밀어젖힌다. 당황하지만, 나는 빨리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탕! 탕! 탕! 연속해서 들려오는 총소리. 예전에 영화에서 봤다고! 총알이 없으면 총을 못 쏘니까, 총알을 다 쓰게 해버리라고!
“나, 얘랑, 커플, 아니거든요?!”
그리고는 손을 앙 물어버렸다. 이빨에는 힘을 줘서, 꽉. 강도는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버스 기사 아저씨가 브레이크를 밟아서, 강도는 뒤로 넘어졌다. 쿠당! 뒤통수부터 찧었으니까 아프겠지……. 앞통수는 나랑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권총에 박았다.
“오, 와아아아!”
버스 안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저 여고생 봤어? 대단하다! 등등.
“시끄러워!”
내 외침에, 모두가 조용해진다. 나는 강도의 주머니를 뒤져, 탄창을 꺼낸 다음, 총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버스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에, 모두 내려주세요. 거기 너, 너 빼고.”
지적받은 남학생이 주위를 둘러보지만, 내 살기 넘치는 시선에 나머지 사람들은 재빨리 내린다. 버스 문은 닫기고, 나는 버스 기사에게 다가가서는, 조용히 말했다.
“출발시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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