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라한대]태풍소녀주의보!

원본 : http://lightnovel.kr/one/409364
작성 : 2012년 9월 2일



“후우, 끝났다!”
마지막 테이프도 붙이고, 남은 두루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걸로 일단 집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테이프로 막아두었다.
……예산 사정 안, 에서는 말이지만.
그렇다. 돈이 없다. 까짓것 테이프 한 롤이면 집에 있는 창문 전부 붙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거 살 돈조차 없단 말이다. 입에 풀칠하는 것도 정확한 영양소와 수분 계산을 통해 정량으로 살아야 버틸 수 있는데, 테이프를 추가로 사는 사치는 할 수도 없다.
“역시 신문지라도 주워올 걸 그랬나…….”
사실 못 붙인 창문이라도 해봤자 내 침대 쪽에 난 작은 창문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흔들리는 이 상황으로 보면 아슬아슬 할 것 같다. 깨지면 물어낼 돈도 없단 말이야.
“히이이잉~”
“아, 미안해 미순아! 너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고!”
이번 달 폭염 때 과열로 인해 폭발해버린 미순이를 고치느라 남은 돈을 깼거든. 들어보니 그것보다는 합선이 더 돈이 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했지만 합선은 짐작 가는 게 없어서 억울한 이야기였다. 삐진 미순이를 달래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어떻게 하지.”
버려둔 테이프 안 두루마리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온 물에 조금씩 젖어간다. 미순이는 일단 책상 위로 대피시켜둔 상태지만, 이 태풍이 지나면 청소하는 것도 고역일 것 같다. 뒷일 생각 안하고 헌 옷으로 문틈을 급한 대로 막았는데도 스며들다니.
어릴 때가 그립다. 그때는 태풍이 오면 그냥 무작정 좋아했었지. 그냥 왠지 모르게 좋아했었다. 뒤처리도 내 일이 아니었고. 창문이 깨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다만 좋아했었지.
그리고 지금, 테이프로 붙여놨음에도 덜덜덜덜 흔들리면서 소음을 내는 창문과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보고 있자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든다.
하필이면 직격 코스로 커브를 돌아 다가오는, 꼭 우리 집을 노리고 오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올해의 태풍이 싫다. 이 이상 별 일 없이 끝나면 좋을 텐데.
똑똑.
올해의 태풍은 저렇게 문에 노크소리를 낼 정도로 강력하단 말이야. 돌이라도 날아다니는 걸까. 제발 부탁이니까 간판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저예요. 문 좀 열어보세요, 오빠.”
“……응?”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혹시나 싶어 TV를 바라봤지만 TV는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올바른 자세에 걸맞게 재해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라디오도 아니고, 미연시를 돌리고 있는 컴퓨터는 켜져 있지만 한국어로 말할 리는 없을 텐데.
“오빠? 문 좀 열어보세요. 저라니까요?”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바람과 빗소리로 가득한 문 밖에서 들려온다.
“…….”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알게 모르게 이 집에는 귀신이라도 사는 걸까. 적어도 사람이 날아갈 이 돌풍 속에 우리 집에 찾아와서 오빠 어쩌고 할 사람은 모르는데. 나의 교우관계는 좁아서요.
두려움에 말없이 불을 껐다. 아차, 여기서는 불을 키는 게 좋았으려니. 귀신은 밝은 분위기에서 보는 게 더 나을 텐데. 하지만 혹시 스토커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냥 조용히…….
“오빠, 거기 있는 거 다 알거든요?”
“…….”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동시에 방에서 전기가 통째로 나갔다.
“으아아아아악?!”
분위기가 너무 적절해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렸다. 아, 안 되는데. 이럼 안에 있다는 걸 진짜로 가르쳐주는 일이 되잖아? 하지만 이미 나온 목소리를 어떻게 해. 나는 그저 전기가 나가서 “흐에에엥…….”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무는 미순이를 끌어안고, 캄캄한 방 안에서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람이 분다. 비도 몰아친다.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 끊이지 않고 들리는 빗방울 소리. 사운드 이펙트 죽이네요. 아무 소리도 없이 오로지 그 소리만 들리다보니 더더욱 두렵다.
찰팍, 찰팍.
그리고 문 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
무서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잠깐, 잠깐만. 아무리 머리를 돌려봐도 나에게는 스토커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보는 그 귀여운 여자애는 이런 성격도 아닐뿐더러, 나랑 애당초 말 섞은 적도 없다고. 그렇다고 나를 선망의 눈으로 봤을 리도 없고. 협박편지도 연애편지도 받아보지 못한 깨끗한 몸이다.
애당초 어떤 미친 스토커가 태풍 부는 날 밤에 우리 집을 찾아오냐고! 아 그래서 스토커인가?
콩콩, 콩콩. 이번에는 테이프를 붙이지 못한 창문에서 소리가 난다. 돌아보면 안 돼, 돌아보면 안 돼, 하지만 궁금하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돌아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봐버렸다.
타이밍 좋게 내려치는 번개의 섬광과 함께, 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씩 웃고 있는 소녀.
그리고 그 손에 들린 망치가.
쨍그랑!
“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무서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존나 무서워! 레알 무서워! 뭐야 이거!
창문이 깨지자마자 미친 것 같은 바람과 빗줄기가 내 침대, 그리고 방 안으로 들이닥친다. 춥다. 바람 때문에 빗줄기가 아주 그냥 수평으로 흩날려서 나를 적신다. 아, 미순이만큼은 젖게 하면 안 돼! 돈 나간단 말이야!
미순이를 가리려 하며, 그리고 미순이를 끌어안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자, 무서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소녀는 여전히 한 손에는 망치를 쥔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말 했잖아요? 오빠 거기 있는 거 다 안다고. 자꾸 무시하면 창문 다 부술 거야☆”
“그만 둬! 창문은 깨지 마!”
내 다급한 외침에 방에 들어온 소녀는 키득키득 웃었다. 무섭다. 진짜 무서워서 미칠 것 같다.
망치를 든 미친 소녀가 눈앞에 있음에도 창문이 깨져 수리비를 내야하는 내 처지가 슬프다.
일단은 전기가 복구되었다. 방안에 온통 물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밝아지니 조금은 좋다. 한국전력 분들, 태풍 부는 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TV는 그대로 꺼진 상태고, 미순이만 나처럼 무서운지 “히이이잉!”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한다.
“오빠도 정말, 그러니까 부를 때 빨리 문 열면 좋잖아요? 응? 내가 일부로 오빠를 만나러 여기까지 왔는데……. 오빠는 깍쟁이☆”
소녀는 손에 든 망치를 앙증맞게 휘두르며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표정만 귀엽지 이건 무슨 전설의 고향은 아이들 자장가로 들려줄 정도로 무섭다.
짧게 자른 머리, 활발해 보이는 얼굴과 옷차림. 손에 든 망치만 빼면, 그리고 이 비바람 치는 태풍 속에 우리 집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는 사실만 잊으면 상당히 괜찮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전혀 괜찮지 않다.
“언니에게 들은 거랑은 완전 다르네요? 오빠 완전 실망이야 >_<☆”
시끄러 이것아. 내가 지금 태풍을 뚫고 와서는 우리 집 창문을 깨고 들어와서 망치 들고는 키랏 자세 잡고 있는 여자애에게 왜 그런 평가를 들어야하는 건데. 물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쳤냐. 망치로 후려칠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잠깐.
“……언니?”
나도 모르게 질문하자, 여자애는 잘 물어봤다는 듯 망치를 나에게 겨누며 웃었다. 겨누지 마! 웃지 마! 지릴 뻔 했다고! 이미 바닥에 들어온 물 때문에 바지가 축축하지만.
“그래요! 울 언니요! 지난 달 초에 왔다 갔었죠? 그때 언니가 완전 와일드하게 자기를 덮쳐서 여자를 가르쳐주려고 한 나쁜 남자라고 좋아하던데…….”
“그딴 적 없거든!”
아니, 확실히 우리 집을 찾아온 여자애를 완전 와일드하게 덮친 적은 있지만 여자를 가르쳐주려고 한 적은 없거든요? 나쁜 남자도 아니고. 그보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태풍☆입니다☆!”
“…….”
완전 상쾌하구나, 너. 과연 다 때려 부수는 게 어울리는 처자군.
“아무튼, 실망이에요! 그래서 어디 얼마나 멋진 남자인가, 태풍 부는데 나와서 ‘덤벼봐 짜샤! 넌 날 못 죽여!’ 할 정도의 패기 넘치는 남자일지 두근거리면서 왔는데 창문 틀어막고 바지나 적시는 남자라니……. 흥흥! 원래 다른 길로 가려고 하다가 오빠 보러 온 거였는데!”
“바지 안 적셨어! 이건 빗물이라고! 아무튼, 그럼 지금이라도 그러면 봐줄래?”
“아까 오는 길에 간판 하나 주워왔는데, 선물해드릴까요?”
“…….”
“뭐, 오빠 같은 치킨이 그럴 리도 없겠지만요. 흥흥! 먼걸음 헛걸음 했어요! 어떻게 책임지실 거예요?”
뭐 임마. 니가 멋대로 커브샷 꺾어서 온 걸 날더러 뭘 어떻게 책임지라고.
“응? 그 선풍기……. 아아!”
태풍은 내가 끌어안고 있는 미순이를 보더니 이번에는 망치를 미순이에게 겨눴다. 어딜 겨누는 거야. 그보다 저 녀석, 왠지…….
“그 선풍기가 언니에게 창피를 준 그 선풍기군요! 마침 잘 만났다! 그 선풍기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 먼 걸음을 한 거예요!”
“말 바꾸지 마! 가던 길이나 조용히 가라고!”
“오? 저에게 덤비는 거예요? 창문 다 깨버릴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테이프를 붙여놨음에도 창문 하나가 박살났다. 진짜로 간판이 뚫고 들어와서 우리 집에 들어와 있잖아?!
“그보다 왜 하필 성인용품점 간판이요?!”
“문구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히쭉 웃은 다음, 태풍은 망치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한걸음씩 다가왔다. 바닥에 고인 물과, 비바람 때문에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 오빠, 저에게 도전하시는 용기는 높게 사지만 가만히 안 계시면 선풍기랑 같이 날려버릴 거예요? 얌전히 선풍기를 넘기면 오빠만큼은 안전하게 봐드릴게요.”
“…….”
“히, 히이이이잉…….”
나는 눈을 돌려 태풍 대신 품안에 안겨있는 미순이를 바라봤다. 빗물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해서 예의 미소녀로 보인다. 미순이는 울고 있었다.
“미순아…….”
“나, 난 괜찮아! 응!”
울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미순이. 미순이는 망치로 내려치는 시늉을 하며 웃는 태풍을 보며 울면서 웃었다. 엉덩이에 뿔 날 것 같다.
“어차피……. 지난번에 갔었어야 했던 로봇의 천국이었어……. 네가 안전하기 위해서 죽는다면, 지난 번 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응, 분명 나을 거야. 이번 기회에야말로, 피해보상을 받아서 새로운 선풍기랑 에어컨을 사……. 선풍기는 어떨까요?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시원한 바람. 인공의 바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풍기는…….”
“……그걸로, 넌 좋은 거야?”
“……응?”
울면서 웃지만, 강했던 미순이의 표정이 내 그 말에 흔들린다. 나는 미순이의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정말로 넌 그걸로 좋은 거야?! 날 지키려고, 그렇게 죽어서... 다시는 나랑 만날 수 없게, 바람을 만들 수 없게 돼도 좋은 거냐고!”
“나, 나는……. 그걸로…….”
“대답해! 미순아!”
“……싫어.”
결국 미순이의 강한 얼굴이, 무너졌다.
“싫어……. 싫다고……. 너랑, 계속 함께 하고 싶었어……. 그때도, 지금도! 언젠가 네 혼수물품으로도 살아남고, 네 아들딸에게 물려주고, 손자 손녀에게 물려줬다가, 네가……. 늙었을 때, 추억 삼아서 다시 돌려받으면…….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해주다 같이……. 그렇게, 떠나고 싶어……!”
“알겠다!”
나는 미순이를 살며시, 책상 위에 세운 다음 태풍을 노려봤다.
“오빠, 정말 나랑 싸울 거예요?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오빠 멋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선풍기 버리고 저랑 행복하게 살겠다고 하면 봐줄게요! 우리 언니랑 같이 셋이서 살아요!”
“허나 거절한다!”
나는 강인하게 외치고, 미순이를 돌아봤다. 미순이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됐지?”
“응!”
나는 버튼을 눌렀다. 미순이가 눈을 꽉 감고, 있는 힘을 다 내는 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히, 히이이이이이이이이잉!”
“응? 오빠, 잠깐만요. 이건…….”
지난 번 수리를 받을 때, 수리점 아저씨가 말씀하셨었다.
-모터 수리하는 김에, 정을 봐서 쌔끈한 놈으로 넣어줬다. 선풍기는 낡았어도 모터만 고치면 잘 돌아가니까.
-돈 더 달라고 하실 건 아니죠?
-그냥 사용하고 사용 평이나 나에게 들려줘.
-왜요? 홍보물품이에요?
-자작품이거든.
-저 그냥 갈게요.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거 너무 쎄잖…….
바람에 창문이 진동한다. 테이프로 붙여놨는데도 하나 둘 씩 깨져나간다. 미순이의 앞에 있던 모든 물품이 날아간다. 태풍은 양손으로 몸을 막으며 버티려고 했지만, 내리는 빗줄기를 다시 튕겨낼 정도의 바람에 오히려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겨우 선풍기가! 초당 풍속 53m, 중심기압 920헥토파스칼인 저보다 더 강한 바람으으으으을?! 꺄아아아아아아앙!”
외치다 못한 태풍이 날아간다. 비바람이 날아간다. 먹구름이 그치고, 새파란 하늘이 먹구름 사이에 보인다. 햇살이, 미순이와 나를 향해 비춘다.
“헤, 헤헤, 이겨버렸네…….”
“잘했어 미순아! 전부 네 덕분이야!”
나는 웃음소리를 내는 미순이를 돌아보며 웃었다.
하지만, 미순이의 상태는 이상했다.
“...미순아?”
“……미안, 나, 조금 힘을 너무 써버렸나봐…….”
이마에 손을 올린다. 이마가 뜨겁다. 아니, 온 몸이 뜨겁다. 몸에 묻어있던 빗물이 증발할 정도로.
“어떻게 된 거야! 미순아? 미순아!”
“회, 회로가 타버린 것 같아……. 헤헤, 또, 이렇게 되네…….”
“아, 안 돼! 가지 마! 안 된다고! 네가 말 했잖아! 마지막까지 함께 있자고!”
“미안해……. 나, 너무 졸려…….”
그리고, 미순이의 손이 툭, 하고 떨어졌다. 빗물에 철퍽 소리가 난다.
외부 커버 따위는 이미 벗겨진 상태. 팬을 고정하던 고정장치도 부러지고, 팬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모터에서 연기가 뿜어져나온다.
“……미순아?”
“…….”
“미순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미순이는,
초국지적태풍이라는, 유래가 없는 현상을 일으킨 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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