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2일 월요일

[라한대]바보들의 첫사랑


작성 : 2012년 10월 23일


 “아하하,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렇게 끝났다.
“정말, 깜짝 놀랐잖아. 장난이라도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내가 아니면 오해한다고.”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웃으며 내 어깨를 퍽퍽 치는 첫사랑 상대 앞에서, 나는 완전히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하하, 그, 그렇지?” 하고 웃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지킬 수밖에 없었다. 짝사랑 하는 상대에게 차였다고 여기서 망쳐버리면,
“아무튼, 그런 말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바보 같이…….”
웃으면서도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는, 방금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하고 차인 나린이도 무너질 테니까.
“고마워. 나, 힘낼 테니까. 그 말, 농담이지만 기뻤어.”
그럼, 하고 나린이는 한 번 훌쩍이고는 내가 반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등만이 점점 줄어들다 건물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
이제, 됐지?
오케이? 문제없음?
좋았어.
겨우 다리에 주고 있던 힘을 쭉 빼고, 나는 주저앉았다. 그래도 힘이 없어서 그냥 길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첫사랑 짝사랑 5년, 지금 막 끝났습니다.
비라도 내려주면 좋겠는데, 그런 형편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 좀 찌질거려.”
“하지만, 히끅, 그래도 말이야……. 훌쩍,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잖아? 응?”
“이 새끼 또 콜라 먹고는 취한 척 하기는……. 이거나 좀 처먹으면서 울든가!”
가봄이는 짜증난다는 듯 떡볶이를 내 앞에 국물이 튈 정도로 확 내려놓았다. 새끼고 처먹고, 하여간 이 년은 말 진짜 험하게 한다니까…….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나는 콧물을 팽 풀고는 포크를 들었다. 가봄이가 그 행동에 더 짜증난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고백해놓고는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 식이라니! 짱 로맨틱하잖아! 완전 로맨틱하구만!”
“등신…….”
가봄이는 이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린이는 친한 친구인 나에게 좋아하는 ‘그 애’에게 고백할 거라고 나지막이 알려줬다. 중학교 졸업식이고, 학교도 갈릴 테니까 늦기 전에 고백할 거라고.
물론 오늘이었다.
나린이한테 좋아하는 애가 있다는 건 예전부터 넌지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들으니 충격이었다. 그래도 일단 응원해줬다. 물론 말 뿐이었지만. 속으로는 깨지길 응원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짝사랑 해왔는데.
첫사랑이었는데.
언젠가 분위기 잡고 좋은 상황에서 짠! 하고 고백해서 짠! 하고 사귀게 될 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뭐하는 놈인지 듣도 보도 못한 ‘그 애’한테 좋아하는 애가 고백한다는 데 진심으로 응원할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냐고.
그리고 기도가 통한 걸까, 어떻게 됐냐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물어본 나에게 나린이는 훌쩍이면서 대답했다.
“아하하, 차였어. 역시 나 같은 여자애를 좋아해줄 사람은 없는 걸까…….”
그래서 나는 다급히 외쳤다. 지금이 기회다! 완전 멋지잖아?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랑 이라면 사귀어도 좋은데.”
라고 말하는 남자, 좋잖아? 로맨틱하잖아? 당연히 “그래, 너라면 날 받아들여줄 줄 알았어! 나, 사실은 예전부터 너를……. 하지만, 나는 다른 애를 좋아해왔고…….” “쉿, 나린아. 그런 건 다 잊어도 좋아. 나는 반드시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테니까(이빨이 반짝거리는 환한 미소)” 하는 분위기로 풀리겠지?!
“그럴 리가 있냐, 밥팅아.”
가봄이는 진짜로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으흑…….
“애당초 차인 상황에서 친구인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봤자 친구의 위로밖에 안 들리지. 넌 방금 네가 직접 ‘나는 언제나 너의 친구야’ 하고 못을 박은 거라고.”
식탁을 차려줘도 3년이나 먹지도 못하더니 고작 생각해내는 게 그 따위냐. 가봄이는 다 들리도록, 아니 들으라는 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훌쩍.”
“그만 좀 질질 짜라고, 이 찌질아!”
“떡볶이가 매워서 그래!”
진짜라고! 절대 첫사랑이 끝나서 슬퍼서 콧물과 눈물을 찔찔 흘리는 게 아니야!
그보다 3년 지기 친구라면 친구의 실연에 좀 같이 슬퍼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쪼는 게 아니라!
“콧물 봐라. 자, 닦아!”
“크흥?!”
투덜댈 틈도 없이 가봄이가 휴지로 코를 막아서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가봄이는 역으로 지가 투덜대면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언제까지 내가 돌봐줘야 하는 건지 뭔…….”
“누나도 아니면서 돌봐주긴 뭘……. 아악!”
투덜거렸더니 붙잡힌 코를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아프게! 가봄이는 더럽다는 듯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며 말했다.
“누나도 아닌데 돌봐주는 거에 고마워하기나 할 것이지! 나린이랑 다리 놔달라고 부탁한 게 누군데?”
“그건, 그렇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지만 기회는 없었다. 기껏해야 같은 반의 여자애 정도였으니까. 같은 중학교, 같은 반에 왔다는 우연에 그래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역시 나랑 나린이는 운명으로 얽힌 사이야!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진짜로 운명이겠지?
그런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하지? 운명인 건 좋은데 그 작지만 큰 한 발자국을 어떻게 내딛지?
“사내놈이 한심하게 찾아와서는 ‘너 나린이랑 친하지? 나도 나린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어?’ 하고 물어보기나 하고.”
“아니, 하지만 친구로 시작해서 가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고…….”
“친구한테 그런 식으로 부탁할 용기가 있으면 아예 나린이한테 고백이나 할 것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도와줬잖아.
가봄이는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뭐?” 하고 되물었지만,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하고 당황하는 나를 보고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나만 믿어. 도와줄 테니까. 이제 우린 친구다?”
그렇게 안면을 튼지 단 하루만에, 나는 나린이랑 같이 급식을 먹는 사이가 됐다. 솔직히 그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었기에 꽤나 놀랐다.
가봄이는 나린이한테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야. 너도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는데, 기억 안나?’ 하고 말하며 진짜 나를 예전부터 안 것처럼 친하게 굴었다. 부탁하고 15분 만이었다. 그리고 뻘쭘한 사이인 나랑 나린이 사이를 도와줬다. 초등학교 때 나를 알았다는 설정으로 만든 가짜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상하게도 그게 내가 진짜 했던 경험들이랑 맞아 떨어져서 이야기를 맞추기도 좋았다.
그렇게 아는 애들 별로 없는 중학교의 초등학교 동창 관계로, 나랑 나린이 관계는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친구 관계긴 했지만, 어느새 나린이는 가봄이랑 같이 나를 ‘가장 친한 친구’ 취급했다. 그러다보니 학년을 올라가서는 오해하는 애들까지 있었다.
오해할 때마다 나는 좋아했지만, 나린이는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어느새 믿고 마음을 놓게 된 내가 가봄이를 찾아갈 때마다 가봄이는 ‘그냥 고백을 해, 이 멍청아!’ 하고 말했지만, 역시 고백은 좋은 분위기에서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음 기회를 노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됐고.
“역시……. 나린이한테 그냥 나는 친구였던 걸까.”
생각하다보니 완전 우울해졌다. 더 이상 찌질거리면서 위로 받고, 웃긴 척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내 목소리가 잦아들어가자, 가봄이는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올려가며 떡볶이를 먹는 자세 그대로 나를 바라봤다.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남자’로 본 적은 없는 걸까. 처음부터 그냥 연애대상 외로 봤던 걸까? 오로지 친구로만.”
그게 제일 충격이었다. 사실 끓어오르던 마음이 한 순간에 식었다.
처음부터 남자로 보이지 않았던 거다. 나를 조금이라도 남자로 봤다면, 사귈 가능성이 있는 연애대상으로 왔으면 그 고백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반응을 보였을 지도 모르지. 적어도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친구가 하는 농담처럼, 그렇게 넘겼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냥 고백하라고 했잖아.”
“진지한 이야기야.”
“나도 진지한 이야기야.”
그렇게 말하는 가봄이의 눈빛은 과연 진지했다. 그래, 그랬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인 채로 지내는 것 보다는 처음부터 ‘나는 남자다! 너를 격하게 좋아한다!’ 하고 외치는 쪽이 더 좋은 결말을 맞았을 지도 모르지. 차였을 가능성이 물론 더 많지만, 이런 식으로 차이는 것 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르고.
하아.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면서 가봄이는 말했다.
“기운 내.”
“그래, 고맙다.”
진심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차이고 연애대상도 못 됐지만 앞으로도 친구로는 남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너 같은 친구도 얻었고.”
“…….”
“누나 같이 구는 건 좀 그렇지만, 돌봐줘서 고마워. 고등학교 가서도 잘 부탁한다.”
아는 친구가 같은 고등학교에 간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니까.
“그래.”
가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떡볶이를 찌르기 시작했다. 어째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 잘못 했나?
“너도 나린이도 나도 똑같이 멍청이야.”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내 물음에 가봄이는 물로 입을 헹구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말해두지만, 나는 그런 멍청한 고백은 안 할 테니까.”
“그래, 나 멍청하다…….”
꼭 여기서 이렇게 상처를 후벼 파야하냐.
“그래! 너 진짜 멍청하다고, 이 바보야! 너 때문에 내 첫사랑도 끝났잖아!”
“뭐?! 너 사실은 나린이 좋아했냐?”
“아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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