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라한대]영웅의 자격

원본 : http://lightnovel.kr/one/384217
작성 : 2012년 4월 15일


“…….”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도, 도와주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나의 인기척을 눈치 챈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목소리에 안에서 움찔하는 느낌이 난다.
“남자 분……. 인가요?”
나는 애써 대답을 아꼈다. 솔직히 여기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은데.
“아니, 아니에요. 도와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여자는 대답은 없지만 밖에 누군가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 꺼져가는 목소리를 냈다. 제기랄, 이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이건 좀 싫은데.
이능력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그래, 불을 막 조종하고 전기 뿜어내고 하늘 날고 그런 것들. 아니면 시간조작이니 독심술이니 뭐니. 영화나 그런 걸 보면 자주 나오지.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대로 이능력자다. 그것도 엄청나게 대단한 능력자다. 영웅이 있다면 나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영웅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시점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 그 타이밍에 나타난다.
……여기까지 들으면 멋져 보이겠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저것뿐이라니까?
이게 얼마나 빡치는 능력, 아니 저주인지는 이런 예만 들어도 견적이 나온다. 내가 송금을 하려고 히히거리며 은행에 들어가면, 인질극 중이다. 컵라면이라도 먹을까 편의점에 들어가면 손님과 직원이 싸우고 있다. 지하철을 타려고 하면 길을 모르는 사람이 꼭 있고, 시외버스라도 타려고 하면 진짜로 버스비 없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짜증난다. 처음에야 나도 선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도와줘야지 하고 살았지만, 저런 일이 계속해서 연속으로 줄줄이 사탕마냥 벌어진다고 생각해보라고.
덕분에 지금 이런 사태까지 겪고 있잖아.
“거기, 거기 있는 거 맞죠?!”
아차, 생각이 너무 길었다. 안쪽에서 여자의 절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이 조용하게 문을 열고 빠져나가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반사적으로 대답해버렸다.
“이, 있어요.”
“다행이다…….”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퍼뜩 생각났는지 말했다.
“부, 부탁드려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아니, 부탁한다고 해도…….”
“으, 으으…….”
내 대답에 여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역시 부탁하기는 힘들겠지.
“하,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있은 지도 한참 됐다고요……. 그만 나가고 싶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정말, 쥐어짜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일 까지는 안 해도 될 것이다. 아니, 내가 정말로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시점에 나타난다고 해도 내가 도와줘야할 필요는 없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버리면 되는 거다. 내 알바냐.
영웅이면 뭔가 대단한 힘 정도는 주던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인질극이 한창인 은행에 들어가거나, 연쇄 추돌사고가 일어난 도로나, 불이 치솟는 낡은 주택 안에 있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해보면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할 거라고 생각해. 늘 무력하지 뭐. 지금처럼.
“……제기랄.”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들린 그 물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모른 척 하고 지나가버리는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애당초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었겠지. 나는 못한다. 성격이 워낙에 착해 빠져서 이렇게 손해 보는 걸 알면서도 행동하게 되어 먹어서.
거기에 하필이면 꼭 내가 나타날 때는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에 손에 있단 말이야.
나는 심호흡을 하고, 벌컥 여자 화장실문을 열었다. 바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꺄악?!”
“시끄러! 도와달라며! 받아!”
나는 문이 잠긴 좌변기 위쪽으로 아까 하굣길에 받은 티슈통을 던져주었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멈춘다.
“……진짜로, 도와주러 온 거예요?”
“도와달라며! 그럼 이만! 휴지 받은 거니까 마음대로 써!”
여자 화장실에서 오래 있으면 무슨 꼴을 보겠어.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 내 등 뒤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만요! 조금만 밖에서 기다려줘요!”
“…….”
빼꼼, 하고 작게 열린 화장실 문 너머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볼을 빨갛게 물들인 미소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도, 도와준 히어로에게 답례는 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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