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7일 수요일

벌칙시간입니다. 사기꾼은 여왕에게 키스를 하십시오.


원본 : 소실(이쪽은 2차공개본 - http://lightnovel.kr/freewrite/367901)
작성일 : 2011년 8월경.
비고 : 시드노벨 4주년 단편제 참가작, 이후 이어서 <사기꾼과 여왕님!>(현재 비공개) 연재.


“예전부터 쭉 좋아해왔습니다! 선배, 저랑 사귀어주세요!”
나의 갑작스러운 폭탄 발언에, 배구 코트 두 개짜리 체육관에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사방에서 나를 향해 태울 듯이 날아드는 시선이 느껴져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 긴장되지 않을 리가 있나. 고백이다, 고백. 태어나서 처음 하는 고백이다. 거기에 수십 명이 모여 있는 체육관에서 공개고백이라니. 심장이 두근거려서 아플 정도다.
“어, 음…….”
그리고 내 앞에 서있는 선배는, 마찬가지로 빨개진 얼굴로 나에게서 시선을 약간 피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나보다도 큰 키. 그렇다고 내 키가 작은 것도 아니지만, 눈을 마주보려면 고개를 약간 들어야 할 정도이다. 운동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 시원한 느낌이 드는 외모. 지금까지 연습을 해서인지,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 몸매를 감싸고 있는 배구복은 땀에 젖어 있었고, 몇 방울인가의 땀이 몸뿐만이 아니라 머리에서도 흘러내린다. 목에 두르고 있는 수건으로 한번 땀을 닦지만, 운동의 열기 때문에 다시 땀이 흘러내린다.
주위에서 다른 배구부원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쟤 누구야? 몰라. 연습해야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지금 선배한테 고백한 거 맞지? 으아! 당장이라도 얼굴을 가리고는 체육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선배는 여전히 애매한, 곤란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래. 분명 그렇게 되겠지. 나는 처음 체육관에 들어왔을 때부터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결심했다. 지금이다.
“저기, 실례했습니다! 잊어주세요!”
“저기,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기대에 부응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허리를 푹 숙이며 외친 나의 말 사이에, 이상한 말이 껴들어왔다.
“……네?”
나는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채로 고개만 들어올렸다. 가만히 서있을 때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보이는 선배의 얼굴. 여전히 시선은 불안하게 나를 피한 채, 눈과 입만이 움직이는 그 얼굴. 그리고 그 입에서는, 상상도 못한 말이 나왔다.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사방에서 들려오는 환호. 꺄악거리는 여자 특유의 높은 목소리. 연습에 방해가 되는지 불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코치의 얼굴이 한층 굳어진다. 선배의 얼굴은 이제는 신호등처럼 빨갛게 변해가지만, 그러면서도 선배는 내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바라보지도 않지만.
그래서, 나는, 멍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에?”


“제기랄! 내가 걸릴걸!”
“설마하니 이런 결말이 날 줄이야! 너 뭐했어? 도대체 무슨 물밑 공작을 벌인 거야!”
“당황하지 마! 이건 함정카드야! 이 놈 분명 이제 놀림감 되면서 엿 먹을게 뻔하잖아!”
“뭐 이딴 게 다 있어!”
다음날 아침. 어느새 소문을 들었는지 녀석들은 내 주변으로 다가와서 열등감과 적대감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건데 여기가 만화나 소설에 나오는 반이라면 인민재판이라도 벌여서 즉결처형이라도 시킬 것 같았다. 보아하니 내 자리 주변에 모인, 그러니까 어제 그 경쟁에 참가했던 녀석들 말고 상관없는 남학생들이나 여학생들도 내 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래, 벌써 소문이 쫙 퍼졌구나. 으하하하. 그러나 나는 기쁨에 웃음을 짓는 대신 공황감에 빠져, 헤어날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실소를 짓고 있었다.
“괜찮아. 배구부 ‘형님’이잖아. 우리가 부러워할 건 하나도 없다고.”
“그래. 이놈 사실 밝혀지면 불꽃 스파이크 날리는 따귀에 목 반대로 돌아간다.”
“아냐, 그래도 의외로 배구부 형님들 좋지 않냐? 건강한 체육소녀.”
“이놈 취향 한번 독특하네. 너도 가봐. 잘 될지 누가 아냐?”
내기에 참가한 놈들은 천천히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모양이지만, 그딴 건 어제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라고! 나는 이미 나를 내버려두고 토론인지 잡담인지에 들어간 놈들을 무시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어제 번호 교환하고 온 문자는 결국 하나. 그러나 그 문자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안 아까는 좀 당황
했었어. 나도 그런 경
험은 처음이라...;; 그
래도 나한테 좋아한다
고 말해줘서 정말 기
뻤어 ^^ 아 뭐라고 해
야할지 모르겠다>_<
앞으로 잘 부탁해^^
X/XX 8:32 pm
박가을 선배
010-3958-XXXX


“……으아아아……”
“이놈 문자까지 받았다!”
너무 신음을 크게 냈나. 한 녀석이 내 핸드폰을 단칼에 뺐어버렸다. 나는 즉시 손을 뻗으며 돌려달라고 저항해보지만, 놈들은 너무 많았다. 곧 문자의 내용을 확인한 녀석들의 탄성이 교실을 매웠다. 으악!
"내놔! 돌려줘!"
“시끄러! 같이 좀 보자고! ……이게 뭐야!”
“아으! 부럽기도 하지만 손발이…….”
“아냐! 이제 더 죽은 거야! 니들 박가을 선배 모르냐! 이놈 이제 죽은 거라고!”
“설마하니 벌칙게임 하나가 이렇게 발전할 줄이야…….”
그 중 한 놈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래. 갑작스러운 고백이 성공한 것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녀석들의 태도에는 나를 걱정하는 것도(개미 눈곱만큼은) 섞여있었다. 들키면 죽을 테니까.
어제의 고백이, 진심어린 것이 아니라 벌칙게임에 의한 것이라는 게 들키면 말이다.


어제 점심시간. 적은 급식에 불만을 토하며 몇 명의 남학생이 모여서 빵을 사서 먹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금액의 문제가 되면서, 다 같이 내기를 하기로 했다. 사실 거 몇 푼씩 모아서 사면 별 문제는 없지만, 심심한 차에 잘 됐지 뭐. 다만 문제라면 그 내기의 결과 내가 졌고, 나는 모든 녀석들에게 빵을 나눠줄 정도로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돈도 없는 주제에 왜 내기에 참가했냐는 불만 끝에, 한 녀석이 묘안을 냈다. 빵값 대신 벌칙게임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놈들이 시켜봤자 나에게 뭘 시키겠어. 그런 편한 생각으로 나는 오케이 했고, 친구 놈들은 그렇다면 나에게 무슨 벌칙을 시키는 게 가장 재밌고 나를 엿 먹일 것이냐에 대한 토론을 개시했다. 그때 한 녀석이 묘안을, 나에게는 저주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배구부. 우리 학교의 여자 배구부는 전국 강호로서 유명하다. 대학교 부설 고교인지라 대학교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코치를 붙이고 지원한 결과인지 매년 고교 배구대회에서 상위권에 입상하고, 우승도 심심치 않게 차지한다. 졸업 후 여자 프로 배구선수로 활약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그런 고로 여자 배구부의 면면들은 굉장한 스포츠 여걸들이다. 취미로, 재미로 활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프로 선수나, 혹은 추천을 받아 대학교에 가서도 배구인생을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이다. 기숙사제로 운영될 정도니까 말 다했지. 그런 각오를 하고 온 사람들인 만큼 그들은 외견부터가 장난이 아니다.
남학생을 압도하는 키.
다부진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매.
적 진영의 빈틈을 찾기 위한 매와 같은 날카로운 눈매.
운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짧게 자른 머리들.
스파이크를 날리기 위해 발달된, 그 손으로 맞으면 죽는 게 아닐까 싶은 거대한 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군 특수부대로 오인할 것 같은 하드 트레이닝과, 매일 방과 후에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기합소리, 팡팡 하고 터질듯이 바닥에 부딪치는 공 소리. 그리고 가끔씩 체육관에 들어가거나 나올 때 보이는 위압적인 모습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배구부 인원들은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형님'이라는 별칭으로 통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배구부 인원들을 연애대상으로 보는 남학생은 거의 없다. 남학생이 꿈꾸는 여자 친구 상이랑은 좀 멀리 떨어져있으니까. 물론 가끔가다 그들을 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매우 드물다. 그나마도 학교에는 배구부에게 고백했다가 나중에 깨진 남학생이 뺨을 맞고는 병원 신세를 졌다더라, 혹은 맞아서 실려 갔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전설적으로 내려온다.
놈들은 나에게 그런 배구 부원에게 고백하라는 벌칙게임을 시킨 것이다. 그중에서도 배구부 부장, 3학년 박가을 선배에게.

“저기, 박가을 선배가 부르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진짜로 호랑이가 오네. 체념에 가깝게 그렇게 생각하는 내 마음을 모르고, 반의 인원들은 남학생은 오오 하는, 여학생은 꺄악 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문 밖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반 안을 살펴보던 선배는 그런 반응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얼굴이 빨갛게 변한걸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지.
“우와, 나 실물 처음 봤어…….”
“저 사람이 박가을 선배구나…….”
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야, 여친님 오셨는데?”
“시끄러…….”
고개를 파묻으며 하는 내 말에, 친구 놈은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야, 일단 찾아오셨는데 나가 봐야하는 거 아냐?”
“그치만 나가서 날더러 뭘 어쩌라고?”
그렇다. 날더러 나가서 뭘 어쩌란 말인가. 능숙한 놈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만, 애석하게 나는 그런 잘나가는 놈이 아니다. 여자랑 인연 같은 건 안 키운다고. 다른 여자애들이나 남자애들이 내가 뭐 하는지 살펴보지만, 차마 나에게 나가라고 말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문 밖의 선배는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며 안쪽을 힐끔 쳐다보고만 있고.
“아예 정직하게 말하면 어때? 벌칙게임으로 그랬다고.”
“미쳤냐. 좋아서 남자친구인 후배 반에 아침 조회시간부터 찾아온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라고? 아니, 울리고 그러는 문제 이전에 이놈 죽어. 박가을 선배라고, 배구부 부장 박가을 선배!”
그렇다. 박가을. 3학년. 배구부 부장. 전국 최강급에 군림하는 이 고등학교 여자배구부의 최강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선배는 배구부의 카리스마 부장이라는 점이다.
배구부의 특성상 연습은 격렬하고, 때문에 군기유지도 엄격하다. 뭐 내가 배구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소문이야 어디서든 들려오니까. 그리고 박가을 선배는 호랑이 부장으로 유명하다. 훈련하기 싫다고 우는 부원을 억지로 체육관으로 끌고 간다던가, 연습이 마음에 안 들면 기합을 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도 남학생들도 질릴 것 같은 엄청난 기합을. 가끔 후배들이 반항하면 린치를 가한다는 소문까지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박가을 선배는 규율을 중시하고 강한 여성이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선도부도 하고 있는데, 별로 없지만 가끔 있는 불량 학생들을 주먹을 써서라도 진압한다는 이야기도 돌아다닌다. 그런 점 때문에 일부 여학생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라는 소문도 돌아다닌다. 뭐 이것 까진 사실이 아니겠지만 여학생들 사이에는 팬클럽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런 선배에게 “죄송합니다. 어제 고백은 벌칙게임이었어요. 전 선배 좋아하지 않아요. 어차피 배구부 인기도 없고 연애랑은 거리가 멀 것 같은데 배구 연습에 열중하세요(웃음).” 이라고 고백하라고?
“죽겠지. 이놈.”
그냥 죽는 것도 처참하게 죽을 거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무시하더라도 그건 사망 일직선 아냐?”
“아예 선배랑 진심으로 사귀는 건?”
선배에게 “선배,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저와 평생을 함께 해주세요! 애는 세 명 정도가 좋겠죠?(환한 미소)”라고 말하라는 건가. 그런 방법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시작이 벌칙게임이라는 걸 들키는 순간 죽음이지. 그래봤자.”
이쪽도 끔찍하게 죽을 거다.
“음, 어제 벌칙게임은 우리가 잘못했다.”
이제 와서 사과해도 늦었다고. 내가 생각에 빠져 어찌할까 하는 사이, 선배는 사라지고, 선생님들이 복도를 지나다닌다. 조회 예비종이 울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아이들이 자리에 가서 앉는다. 마지막 녀석이 나를 보며 어깨를 두들긴다. 녀석은,
“뭐, 잘해봐라. 일단 응원은 해줄 테니까, 안 죽게 잘 해봐.”
참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난 참 좋은 친구를 둔 것 같아.


“저기, 혹시 아까 조회에 찾아간 거, 민폐였어……?”
점심시간. 문자를 통해서 ‘점심시간에 혹시 괜찮으면 안뜰으로 나와줘.’ 라고 말한 선배 때문에, 나는 점심도 먹지 않고 안뜰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에도 안 나가면 선배는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채고 그렇게 되면 나는 사망이니까.
“아, 아뇨. 단지 깜짝 놀라서…….”
당황하며 하는 내 대답에, 선배는 눈에 띌 정도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혹시 아침부터 찾아가서 폐가 됐나 해서……. 이런 거 처음이거든. 아, 진짜로! 순진해보이려고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선배는 말을 하다 손을 휘저으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윽, 순간 좀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이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선배가 진실을 알면 어떻게 될지 걱정되어 등골이 싸해졌다. 내 그 순간적인 경직을 보지 못했는지, 선배는 새빨개진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저기, 아침에 간 건 다름이 아니라 어제 문자에 답장도 안주고 아침에도 못 봐서……. 아, 물론 나야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으니까 같이 등교한다거나 하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얼굴 정도는 보고 싶었어서. 어제 문자는 왜 답장 안 한 거였어? 혹시 문자가 안 갔었나? 다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 해볼까도 했지만, 그것도 너무 부담이 될까 해서…….”
“아뇨, 문자는 왔지만, 저도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이건 사실이다. 문자를 받고 1시간 넘게 답장을 고민했지만,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한단 말이야? 진실을 밝히는 건 시작부터 논외고,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랑 사귀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무난한 답들은 몇 개 떠올랐지만 전부 머릿속의 필터링에 막혀버렸다. 결국 답장은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역시 이건 좀 아니었나. 뭐라고라도 답장을 보내는 편이 더 나았으려나.
“그래? 너도 그랬구나…….”
왜인지 그 말에 선배는 기뻐하는 눈치였다. 뭐지? 내가 말한 것 어디에 기뻐할 구석이 있다는 거지? 새삼스럽지만 여자는 정말 알 수 없는 생물이야. 혼란에 빠진 나를 두고, 선배는 아까 왔을 때부터 신경 쓰인 보자기를 들어올렸다. 뭔가 직사각형 물체를 감싸 묶은 모양이었다. 그보다 요즘 세상에 보자기라니. 도대체 뭘 싸둔 걸까. 선배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보자기를 풀어나갔다. 그리고 그 내용물이 보이자, 나는 아까 아침 조회 때 선배가 우리 반으로 왔을 때보다 더욱 급격히 굳어갔다. 선배는 배시시 웃으며, 부끄럽지만 기쁜 기색으로 보자기를 마저 풀어냈다.
찬합이었다. 그것도 세 층짜리.
“저기, 선배, 이건…….”
“도, 도시락이야. 같이 먹으면 어떨까 싶어서 어제 기숙사 조리시설을 이용해서……. 도시락 두 개 만들어 오는 것도 생각했는데, 역시 찬합에 싸와서 같이 먹는 걸해보고 싶어서……. 급하게 학교 앞에서 사서 만들어봤어. 저기, 역시 이런 건 좀 아닐까? 사귀기 시작한지 이틀째부터…….”
그렇게 말하는 선배는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시원해 보이는, 굳이 말하자면 남자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외모의 선배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배는 조용히, 굳어진 채로 선배가 내민 찬합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에 점점 두려운 표정까지 짓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눈가에 물까지 고이는 것 같은데?
“미, 미안. 역시 이런 건 좀 아니지? 미안해……. 아, 아직 급식시간 늦지 않았으니까 아마 지금 가면 밥,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으앗, 기분 탓이 아니잖아! 눈에 띌 정도로 선배는 급속도로 위축되어갔다. 눈가는 붉어지다 못해서 진짜로 물이 맺히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손을 뻗어서 선배의 손에서 찬합을 빼앗았다. 선배가 눈을 크게 뜨는 게 느껴진다.
“아뇨! 아니에요! 새, 생각지도 못해서요! 너무 기뻐요! 와아, 선배가 싸준 도시락이라니! 자, 선배! 같이 먹죠! 점심시간은 별로 길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찬합의 뚜껑을 벗겼다. 그와 동시에 나는 다시 한 번 굳어졌다. 찬합은 총 세 층. 두 층은 밥과 기본적인 반찬이 들어있었다. 아마 나와 선배의 주식이겠지. 밥이 좀 많아 보이는 건 역시 체육부라서 일까.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찰 것 같았다. 반찬도 충분하고.
문제는 남은 한 층이었다. 뚜껑을 열기 전부터, 도대체 내용물이 뭘까 생각했지만, 뚜껑을 열자 그 충격에 나는 답을 알아낸 기쁨조차 느끼지 못했다.
색색깔의 반찬. 도시락에 사용되는 반찬 종류는 모조리 들어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계란말이, 소시지볶음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새우튀김, 베이컨 말이, 샌드위치, 김밥, 닭강정, 버섯볶음, 콩나물 무침, 감자 샐러드, 전, 생선구이, 과일종류(사과, 방울토마토, 오렌지 등등), 심지어 장어에 제육볶음까지. 이게 어떻게 이 찬합에 들어갈까 궁금할 정도였다. 아니, 이걸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그보다…….
선배는 약간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눈물을 닦아낸 눈빛은 분명히 나의 반응을 기대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일단 선배가 기대하는 반응을 보이기로 했다.
“와, 이렇게나 많이 준비해 주셨다니, 정말 기뻐요! 잘 먹을게요!”
“그, 그래? 다행이다.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었어. 난 싫어하는 줄 알고…….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자, 먹자.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이것저것 만들어봤어! 가능하면 남자가 좋아할만한 걸로. 좋아하는 게 있으면 좋겠다.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먹어!”
“네! 감사합니다, 선배! 맛있게, 먹을 게요…….”
그러나 기세 좋게 하는 내 말에 비해서, 내 심정은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복잡했다. 이걸 어떻게 다 먹냐 하는 고민이냐고? 물론 그것도 있다. 남기면 아마 안 좋아할 테니 결국 이걸 다 먹어야겠지. 그러나 그건 당면한 과제가 아니다.
먹자고 하고선 정작 자신은 도시락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선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뻗었다. 계란말이를 집어서, 입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베어 물었다. 씹어서, 삼켰다. 선배는 맛을 음미하는 내 표정을 보고는 기대감에 상체를 내밀었다. 운동하는 배구부 체육소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거대한 가슴이 그 행동에 다가오고, 초여름에 약간 풀어헤친 교복 셔츠 사이로 그 상상만 하고 있어도 행복해지는 내용물이 살짝 보였지만, 나는 그런 데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어렵게, 나는 입을 열었다.
“맛, 있네요. 정말 맛있어요, 선배.”
“그래? 다행이다…….”
선배는 다시 상체를 물러나며, 눈에 띌 정도로 안도한다. 감정 표현이 참 직선적인 사람이다. 표정이나 행동에 참 잘 묻어 나온 달까. 선배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요리는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일단 요리책에 나온 대로 만들어보긴 했는데, 맛이 있을지는 걱정이었거든. 맛있다고 해주니까 다행이다. 응.”
나는 말없이 먹을까 했지만, 그 전에 반드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화나 소설을 보면, 이런 경우 많은 여주인공들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건 바로,
“선배.”
“응?”
“혹시 만들 때 한번이라도 맛 보셨어요?”
내 말에 선배가 의아함을 느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선배는 그런 측면으로 받아들인 것 같진 않았다. 만약 선배가 나를 엿 먹이려고 만든 게 아니라면, 선배는 분명 만들 때 맛을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선배는 약간 부끄러워하는 느낌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사실, 맛은 안 봤어. 레시피 대로 만들었으니까 잘못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나보다 네가 먼저 먹어줬으면 했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는 숨을 삼켰다. 그렇군. 그런 건가.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간을 안보고 요리를 하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은 들지만, 뭐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 솔직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 용기가 있었다면 내가 여기 있을 일도 없겠지. 목이 반쯤 돌아간 채 병원 급식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나에겐 불가능하단 소리지.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고는, 눈을 떴다. 그래, 이걸 먹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선배가 무섭다. 호랑이가 잠깐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군다고 해서 호랑이를 고양이로 보다가는 당장 죽을 테니까. 그렇다면 호랑이의 비위를 맞춰 줘야한다.
나는 젓가락을 강하게 잡고는, 밥과 반찬을 향해 돌진했다. 다행히 밥은 멀쩡했다. 양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맛을 중화시키며 먹어나가면 괜찮을 것이다. 나는 반찬과 밥을 맹렬한 기세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내 생각이 잘못 된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표정이 나도 모르게 굳어지는 걸 이겨내고, 억지로 미소를 만든다. 그러나 힘들다. 그래도 일단 웃는다.
선배는 맹렬하게 도시락을 먹어치우는 내 반응에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찬합을 향해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반찬을 집어서, 즐거운 표정으로 입에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표정이 굳어진다.
선배가 나를 놀란 듯이 바라보는 게 느껴지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걸 먹어 치워야한다. 남기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뻔하잖아! 슬슬 머리가 ‘그만 먹어’라고 혀와 위장 모두를 통해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지지 않았다. 평소 먹는 분량의 두 배는 먹어치운 것 같지만, 아직 반찬은 채 반도 줄지 않았다. 이쯤 되면 맛의 문제가 아니긴 하다.
선배는 여전히 놀란 눈빛으로 찬합과, 나의 먹어치우는 광경을 바라본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풀어지고, 선배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간다. 그리고 선배는 조심스럽게 반찬을 들어올려, 나를 바라보며 입에 집어넣었다.
결국 찬합을 다 비우지는 못했다. 나는 먹다가 이 이상 먹으면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아서 선배에게 사과하고는 그만뒀다. 선배는 별로 입맛이 없다면서 조금만 먹었지만, 사실 그것도 내가 평소 먹는 양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둘이 함께 먹어서일까, 남는 양은 조금 뿐이었다.
선배가 도시락을 남긴 것에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선배는 도시락을 들고 왔을 때보다 더 즐거운 얼굴로 돌아갔다. 일단 첫 고비는 어떻게 넘긴 것 같다.


방과 후. 겨우겨우 배를 꺼트린 나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점심을 소화시키느라 두 시간 정도는 움직이는 것도 괴로웠다. 역시 안뜰은 사람이 봐서일까, 아니면 다들 급식을 먹는데 무려 찬합에 담은 도시락을 먹는 것은 눈에 띄어서일까, 나는 반에 돌아오자마자 환호성과 놀림, 그리고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내기에 참가한 녀석들은 선배의 애정공세에 오히려 나를 더욱 죽은 놈 취급하긴 했지만.
종례도 끝나고 청소당번만 남고 하나 둘 씩 하교를 시작하는 시점. 나는 가방을 챙기고, 두려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냐고? 점심시간에 요즘 세상에 도시락을 챙겨 와서 같이 먹자고 할 정도의 선배가, 과연 방과 후에는 찾아오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지! 과연 이번에는 무엇을 요구할 지 두려울 정도다.
그러나 의외로 선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선배가 나타나는 것이 두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배가 오기 전에 집으로 도망친다, 를 선택하는 것 역시 두려웠다. 왜냐고? 먼저 고백한 남자 놈이 여자 친구를 찾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쏜살같이 도망친다면 선배의 반응이 어떨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찾아가는, 어찌 보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역시 내 선택사항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선배가 찾아올 경우 따라주는 것이 나에게는 더 이득일 것 같으니까.
하지만 이쯤 기다렸지만 오지 않는 다는 것은 괜찮다는 소리겠지. 선배가 나를 기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뭐 어쩌랴. 나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자세로, 건물을 나가 교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치 챘다. 선배도 이쪽을 눈치 챈 것 같다. 그러나 선배는 나에게 다가오는 대신 나를 외면하고 가려고 했지만, 주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뭐라곤가 말을 하며 등을 떠밀었다. 보아하니 어째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아마 다들 배구 부원들이겠지. 선배는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 곤란하다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저기, 미안. 지금부터 연습이라서. 가, 같이 돌아가고 싶긴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혼자 돌아가 줄 수 있을까?”
선배는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솔직히 걱정하던 일이 해결됐다는 느낌에 웃음이 나왔지만, 차마 그럴 순 없지. 나는 풀려가는 얼굴근육을 억지로 긴장시키며 아쉽다는 느낌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오늘은 혼자 돌아갈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배구부 활동 힘든 건 알고 있으니까요.”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연습 열심히 하세요.”
내 정말 괜찮다는 태도에, 선배는 여전히 아쉬운 얼굴이지만 “그럼 이만”하고 말하고는 저쪽에서 기다리는 부원들에게 돌아갔다. 가자마자 뭐라고 말하는지 부원들이 꺅꺅거리긴 했지만. 선배는 두 번 정도 나를 돌아보며 학교 입구 옆에 있는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나는 선배가 체육관으로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나아갔다.
만일 선배가 매일 연습 때문에 바쁘다면, 나와 하교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저기, 같이 집에 갈 수 있을……까?”
바로 다음 날 방과 후. 즐겁게 하교하려던 나는 바로 교실까지 찾아온 선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굳어지는 나와는 다르게, 선배는 부끄러운지 주위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선배, 연습은……?”
“오늘은 약간 늦어진다고 말했거든. 아마 괜찮을 거야. 아, 혹시 버스 타고 등교해?”
“아뇨, 걸어 다니긴 하는데…….”
“응, 그럼 분명 괜찮을 거야.”
“저기, 선배, 혹시 저랑 같이 집에 간 다음에 다시 부활동 하러 돌아오시는 건……가요?”
“응. 사실 부활동이 아니라도 어차피 배구부원은 전원 기숙사니까.”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만 해도 절대 없으리라고 생각한 같이 하교한다는 사태에 위기감을 느끼며, 나는 선배에게 말했다.
“아니, 죄송스러워서요. 부활동도 바쁘시고, 어차피 여기로 돌아오실 건데, 저희 집까지 같이 가는 건…….”
그러나 선배는 괜찮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선배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약간 줄어든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부담……되는 거야?”
그야 물론 엄청 부담되죠. 그러나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상식적으로 고백한 놈이 같이 가자는 제안에 부담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아뇨, 전 혹시 선배에게 부담이 되나 걱정돼서요. 아무래도 연습 하셔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내가 생각해도 나이스 한 변명인데? 선배는 그러나 내 말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으응, 괜찮아. 연습이야 늘 해오고 있고, 하교 하고 나서는 밤늦게까지 하니까. 잠깐 정도는 쉬어도 괜찮을 거야. ……그, 무엇보다, 그런 것 보다 너랑 이야기 하면서 함께 걷고 싶기도 하고…….”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이래도 같이 하교 안할래? 하는 눈빛이겠지. 교실에 있는 인원들은 문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선배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몇 명씩 작은 그룹으로 모여서 뭔가를 소곤거리면서. 그제야 나는 지금 이 상황의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소문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여학생 중에는 선배를 동경하는 애들도 있다. 그리고 사실 내가 벌칙게임으로 선배에게 고백했다는 것은 우리 반에서는 비밀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선배에게 다가가 살며시 “박가을 선배, 사실 이 녀석 선배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벌칙게임이었다고요! 이 녀석은 여자의 순정을 가지고 노는 몹쓸 놈이에요!”라고 말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부, 부담이 안 되신다면 저야 좋죠. 그러면 가방만 챙겨서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응. 서두르지 말고 잊어버리는 물건 없게 잘 챙겨.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선배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에서 살짝 떨어졌다. 천천히 해도 된다고요? 감사합니다 선배. 근데 그랬다간 어떤 놈이 선배에게 진실을 밝힐지 모르잖아요? 나는 뛰듯이 자리로 돌아가 가방에 짐을 대충 쑤셔 박은 뒤 선배에게 돌아왔다. 다행히도 선배에게 다가가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배구부의 호랑이 부장님에게 감히 누가 말을 걸겠어. 선배는 예상보다 빠르게 온 내 모습에 기뻐하며, 약간 빠른 걸음의 나에게 맞춰 학교를 빠져나왔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약간 떨어진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에 있다. 걸어서 20분 정도? 하교 시간은 기본적으로 한가한 시간인지라 길가에 보이는 건 하교하는 학생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함께 하교하는 선배의 모습에 힐끔 힐끔 시선을 돌리며 관심을 표시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 학교 학생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라도 나와 함께 하교하는 선배는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평범한 남자애보다 주먹 한두 개 정도는 큰 키, 잘 짜인 근육질의 몸매, 초여름이라 약간 풀어헤친 교복까지. 사실 선배는 얼굴도 예쁜 편이다. 예쁘다기보다는 ‘멋있다’에 가깝긴 하지만, 여하튼 빼어나다는 소리다.
나는 선배와 사이에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약간 빠른 걸음을 유지한다. 선배는 내 옆에서 걷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쪽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선배와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점점 사람이 줄어드는 주택가를 걸어갔다.
“저, 저기…….”
“네?”
그때 약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선배는 약간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더, 그 쪽으로 가도 될까?”
“네, 괜찮아요.”
안 돼요. 라고 반사적인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다행히도 입은 다른 말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선배는 내 대답에 살며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 어깨가 살짝 떨어진 정도 거리로 발전했다. 선배는 계속해서 말했다.
“별로, 말이 없네?”
“기, 긴장해서요.”
이건 사실이다.
“그렇구나…….”
선배는 그 말에 다시 말수가 없어졌다. 잠시 동안의 침묵. 그 사이 나는 선배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받아줄 준비를 머릿속으로 진행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같이 하교하는 사이에 대화를 나누는 건 당연하잖아. 그리고 보통 이럴 때는 남자가 리드하겠지. 하지만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어제 봤던 드라마 이야기라도 하면 되나? 좋아. 나는 용기를 쥐어짜며 입을 열었다.
“선배, 어제 그 드라마 보셨어요?”
나는 일단 요새 화제가 되는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선배는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난 TV는 거의 안 봐서……. 훈련 때문에 바쁘거든.”
내 용기는 나타난 지 단 10초 만에 작살났다. 이거 큰일이네. 그래도 여기서 계속 말도 없이 걸어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자연스러운 태도 어쩌고 전에 긴장감 때문에 위가 아파온다고. 어디서 그런 재치가 나왔는지, 나는 일단 선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던 지, 좋아하는 영화라던 지, 취미라던 지, 그런걸 물어봤다.
“먹는 건 뭐든지 좋아해. 아, 그……. 배구부는, 아무래도 운동을 많이 하다보니까…….”
“영화는 요새 본 게 없어……. 사실 요즘은 극장에서 뭘 하는지도 몰라…….”
“취미는, 그……. 만화책 보는 걸까? 선배들이 기숙사에 두고 간 게 있거든…….”
대장님, 이건 무리입니다. 미친 짓이에요. 무슨 말을 꺼내도 대화는 채 30초를 넘기지 못했다. 이쯤 되면 나의 재치도 바닥나기 마련이다. 여자에게 인기 많은 놈들은 대단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결법을 찾아내는 거지? 어디서 그런 거 가르쳐 주는 학원 없나?
내가 정신적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사이, 선배는 이제는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나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그래, 이렇게 되면 선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이 분위기를 타파해보자. 나는 어떤 화제가 나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머리를 풀 회전 시키며 대답했다.
“네. 뭐든지 물어보세요.”
“그게……. 왜 나랑 사귀자고 했어?”
대장님, 모든 게 끝입니다. 우린 이제 다 죽었어요.
얼음물에 푹 잠기는 것 같은, 발끝부터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전율. 아, 이런 느낌을 ‘이젠 죽었다’라고 하는구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버린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선배는 그런 내 반응에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나는 배구부고, 특별히 재밌지도 않고, 예쁘거나 귀엽지도 않고, 키도 크고, 근육질에, 남자 같고…….”
그렇게 말하며 선배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갔다.
선배에 의하면, 배구부의 일원들도 자신들이 인기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선배가 말 한 것처럼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고, 매일 땀으로 범벅이 되어 큰 소리로 기합을 넣으며 훈련을 한다. 모두가 아침에 등교하는 시간에 배구부는 몇 십 바퀴나 학교 운동장을 돈다. 급식시간 이후의 오후 수업도 빼먹고 우승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한다. 여가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가 공부를 하거나 학원을 가거나 할 때, 배구 부원들은 몸을 움직인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은 근육질이 된다. S라인이니 V라인이니, 날렵한 몸매니 하는 것들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운동에는 키가 큰 쪽이 유리하다. 그래서 대부분 배구 부원들은 키가 크다. 손도 크다. 머리가 길면 운동에 방해가 되기에 남자 같은 숏컷을 한다. 보통 학생들이 예쁜 옷이니 메이크업이니 헤어스타일이니 하며 수다를 떨고 패션잡지를 볼 때, 배구 부원들은 서로의 움직임이나 팀워크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스포츠잡지를 본다.
“거기에, 나는 이런 저런 소문들도 있으니까…….”
박가을 선배는 거기에 추가로 소문 역시 있다. 배구부의 호랑이 부장. 피도 눈물도 없이, 승리를 위해 후배들을 질타하고 이끄는 선배. 불량학생들을 때려잡는 선도부의 돌격대장. 그런 소문 때문에 배구 부원 이외의 학생들은 차마 선배에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말을 걸지도 않는다. 무서우니까. 두려우니까.
그런 만큼, 선배는 남자에게 고백을 받기 힘들다. 아니, 남자에게 고백 받을 일이 없다.
“그런데, 너는 내가 좋다고 말해 주었잖아? ……사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그런데도 내가 좋다고 말해줘서 나는 정말 기뻤어. 나한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거든.”
그래서, 라고 토씨를 달며, 선배는 약간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여기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 선배는 “왜 나를 좋아하냐?”라고 물어봤다. 그 말은 “나를 좋아할 이유를 모르겠다.”라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사실 저는 선배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배구부라서 벌칙게임으로 선배에게 고백한 거예요.
말하면 어떻게 될 지 두렵긴 하다. 그러나 나는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선배는 나를 용서해 줄 것이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든지 그 여부와 상관없이, 선배는 그렇냐고 말해줄 것이다.
“선배.”
“……응.”
나는 벌을 받는 아이 같은 표정의 선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잡고 갈까요?”
선배는 내 손을 잠시 바라봤다. 놀란 게 분명한 표정이었다. 선배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응, 말해줘서 고마워.”
선배는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마치 악수하듯이. 그리고는 당황하며 손을 바꿔 쥐고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다시 빨갛게 물들였다.
선배는 내 손을 꽉 붙잡은 채, 우리 집 앞까지 와서는,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다시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이때 선배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


일요일. 학교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나는 내 복장을 바라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꾸민다고 꾸미고 왔지만, 그래봤자 조금 화려한 티셔츠에 모자, 조금 몸에 달라붙는 청바지 정도가 내가 가진 옷의 한계였다. 이걸로 괜찮을까.
사실 그게 긴장하는 이유 전부는 아니었다. 그보다 배가 아플 정도로 긴장하는 이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산까지 나가서 데이트를 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자각하니 배가 더욱 아파 온다.
어제 밤, 주말을 맞아 잠시 공부도 잊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핸드폰이 기세 좋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당연히 친구 전화라고 생각했던 나는 기대와는 다른 여자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박가을 선배는 내가 답이 없자 더욱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보세요. 들리세요?”
“네, 네! 잘 들려요 선배!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아, 일단 밤늦게 전화 걸어서 미안!”
깜짝 놀란 내 대답에 선배는 오히려 더욱 긴장한 것 같았다.
“아뇨, 괜찮아요. 무슨 일이세요?”
“저기, 혹시 내일 시간 괜찮아?”
솔직히 그쯤에서 눈치 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당황해서 그런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일이요? 네, 한가해요. 무슨 일이세요?”
“호, 혹시 내일 시간 있으면, 나랑 같이 데, 데이트 하지 않을래?”
“데, 데이트요?”
전화기 너머지만 선배가 고개를 맹렬히 흔드는 게 느껴진다.
“내일 마침 연습도 없거든. 그래서, 사귀기 시작했으니까, 같이 데이트라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안될까?”
나는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데이트? 데이트라고요? 그래, 사실 사귀기 시작한 주말에 데이트를 가지 않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내가 말이 없자 선배는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부담 될지도 모르지만, 나, 특별히 남자에게 전부 돈 내라고 하는 여자 아니니까! 제대로 더치페이 할게!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할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 데이트는 어디로 가시길 원하세요?”
“저……. 가고 싶은 곳이 있긴 한데, 내일 시간 괜찮아?”
여기까지 오면 어쩔 수 없다. 사실 어차피 일요일 내내 자거나 게임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네. 시간 괜찮아요. 어디로 가시고 싶으신데요?”
“나, 남산타워.”
“남산타워요?”
남산타워. 정식명칭은 N서울타워. 서울 남산에 위치한 방송용 수신탑 겸 전망대. 서울의 광경을 모두 내려 볼 수 있고, 시원한 산 속에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데이트의 명소. 사실 책이나 사진으로만 보고 가본 적은 없다.
“그, 예전부터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
선배는 부끄러워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풀가동 시켰다. 그래, 어차피 어딜 가나 똑같으니까.
“예, 알겠어요. 근데 저 남산타워 가본 적이 없는데…….”
“나도 가본 적 없어. 그래도 인터넷으로 조사는 많이 해봤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몇 시에 만날까요?”
그 뒤로 언제 어디서 만날지에 대한 대화. 점심을 먹기엔 약간 이른 시간에 학교에서 가까운 역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결론이 났다. 선배는 데이트 기대된다는 말을 남기고는, 잘 자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도 핸드폰을 닫았다. 내가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사이 컴퓨터 속의 내 부대는 전멸한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일요일. 약속 시간보다 약간 빨리 도착했지만, 역시 늦게 오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니까 괜찮겠지. 번화한 역이 아니기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슬슬 시간이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아.”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제 데이트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굳어버렸다.
커다란 키의, 다부진 몸매의 여성이 하얀 원피스를 입고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보다 큰 저런 키에 맞춘 원피스가 있긴 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분명히 선배가 입은 것은 하얀 원피스가 맞았다. 운동부라서인지 약간 탄 피부와 배색이 절묘했다. 짧은 머리엔 핀을 꼽아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내고 있었다. 약간 굽이 있는 베이지색 힐. 옷과는 분명 맞지만 선배가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명품 백. 박가을 선배는 급하게 달려왔는지 내 앞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꽉 끼는 가슴이 도드라져보였다.
“미, 미안. 빨리 오려고 했는데, 뭘 입고 가면 좋을지 몰라서……. 일단 부원들 조언대로 입어봤는데, 어때?”
“그, 어, 어울리네요!”
선배는 그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 다행이다……. 사실 이 옷에 어울리는 백이 없어서 후배에게 빌렸는데, 어색하지 않아? 괜찮아?”
“아, 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백이랑 옷이.
“혹시, 많이 기다렸어?”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반사적으로 말하고 내가 한 말에 내가 놀랐다. 이런 뻔한 대사라니! 선배는 그 말에 약간 웃어보였다.
“하하, 좀 기다렸나보네, 미안해.”
“아뇨……. 하하하.”
서로 잠시간의 웃음. 그리고 정적. 선배는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할 말을 찾는 모양이었지만, 별로 할 말이 없었나보다. 머리를 긁으려다 세팅해둔 머리 때문인지 손을 머쓱하게 내리며 선배는 말했다.
“그, 그럼 갈까?”
“그, 그러죠.”
우리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가 살짝 내민 손을, 나는 반사적으로 잡았다.

4호선으로 환승해서 회현역에서 내린다. 남대문시장이 바로 옆이라서 일까, 역에서 내리자마자 한가한 우리 동네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 이게 바로 ‘역 앞’이라는 분위기일까. 선배는 주위 여성들의 화려한 모습들을 보면서 주눅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 정도 키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없긴 하겠지. 선배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쳐다보기도 한다.
“여, 역시 이런 옷은 아니었을까?”
선배는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아뇨……. 괜찮다고 생각해요.”
주눅이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굳이 선배 때문이 아니더라도 옷을 좀 사두는 게 나을 것 같다. 번화가는 역시 다른 걸까? 난 나의 옷을 내려 본다. 여자랑 대화하는 방법도 그렇고 패션 센스도 그렇고, 난 절대 여자랑 친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선배는 내 시선에 나의 옷을 바라보다 말했다.
“너도 충분히 잘 어울려. 아니, 나보다 잘 어울려.”
그렇게 말하는 선배는 싱긋 웃는 얼굴이었다. 비웃음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는 미소. 이런걸 어른스러운 웃음이라고 하나? 선배는 더 이상 주위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내 손을 잡고는 길을 걸어간다.
“저기, 길은 아시는 거죠?”
“응. 인터넷으로 조사해보고 왔으니까 틀림없어. 날도 더우니까 역시 걸어가는 것 보다는 케이블카가 낫겠지?”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삼십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려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이다. 나무 사이로 나있는 산책로 비슷한 길이라 봄이나 가을에는 좋겠지만, 역시 초여름의 날씨는 조금 더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웃는 얼굴로 반걸음 정도 앞에서 저 앞에 보이는 남산을 향해 나를 끌고 간다.

케이블카에는 주말이라서인지 많은 사람이 기다리며 줄을 서있었다. 약 십분 정도 기다리자 나와 선배의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케이블카에 들어갔다. 선배는 창밖의 광경이 기대되는지 들떠서는 창가에 달싹 붙어있었다. 키가 180cm가 넘어가는 다 큰 고등학교 여학생이 그러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선배는 머쓱한지 내 웃음에 얼굴을 붉히고는, 케이블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며 창문에서 떨어졌다. 그 모습에 나는 그만 약간 소리 내어 웃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곧바로 남산타워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그 살짝 아래에 도착한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올라가면 정자와 조선시대에 사용된 봉화대가 보이고, 거기서 살짝 앞으로 가면 남산타워가 등장한다.
“우와……. 높다…….”
선배는 끝을 보려면 목을 꽤 과도하게 꺾어야하는 남산타워의 높이에 긴장한 모양이었다. 소문은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니까 꽤나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남산타워인가. 나 역시 감탄하며 저 높이 보이는 남산타워의 끝을 바라봐봤다.
케이블카에서도 느꼈지만, 남산타워에는 과연 많은 사람이 초여름의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반수 이상이 커플인 것 같은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과연 데이트 장소랄까. 좀 더운 편이었지만 날씨는 하늘도 파랗고 매우 좋은 날씨였다. 그래, 놀러가기엔 확실히 좋은 날이다. 태어나서 처음 오는 남산타워도 다 좋다.
“그런데, 이제 우리 뭐 하나요?”
내 말에 선배는 움직임을 멈췄다. 역시. 아무래도 ‘남자친구가 생기면 남산타워로 데이트를 가고 싶다’ 정도만 생각했지, ‘가서 뭘 한다’ 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일단 남산타워를 둘러보고, 바로 옆이 명동이니까 식사를 하고 구경을 할, 생각인데? 응.”
예상한 대로 남산타워에서 뭘 할 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뭐 사실 보통 이런 건 남자가 짜는 거긴 하지. 나도 사실 어제 선배가 가자고 말 한 뒤에 간단하게 조사해보긴 했다. 뭐, 태어나서 처음 하는 데이트니까. 그래도 며칠 알고 지내면서 선배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줘도 되겠지.
“관람대 위라도 가보시겠어요?”
“그, 관람대 위?”
남산타워에 왔으니 무난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전망대 가격은, 뭐,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만원 가깝다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는 낼 수 있다. 그러나 선배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저, 혹시 비용 문제라면 역시 제가 낼게요. 너무 무리해서 내실 필요는 없어요.”
실망시키는 것 보다야 그 정도 가격이면 싼 편이지. 그러나 선배는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부담 되는 것 같으니까 괜찮아. 그, 그리고……. 여기로 오자고 하고서는 웃기는 말이긴 한데, 사실 높은 데는 좀 그래서…….”
차마 이 대답은 생각도 못해봤기에 나는 잠시 얼어버렸다. 서울에서 제일 높은 남산타워를 오자고 하면서, 고소공포증이요? 이거 웃으면 되는 부분인가? 그러나 선배는 장난치는 표정이 아니라 나름대로 심각한 분위기였다. 면목 없다는 표정과 미안하다는 표정, 기타 등등이 섞인 애매한 태도로 선배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 웃기지? 남산타워까지 오자고 했으면서 고소공포증이라니……. 워, 원래는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올라가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역시 저 높이는…….”
확실히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남산타워의 높이는 좀 너무하긴 했다. 사실 실제 높이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은 것 같은데, 산 위라서 일까,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일까. 나도 올라가자고 말한 걸 한번 재고할 정도로 높게 느껴졌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근데 그럼 남산타워에서 특별히 할 게 없는데요?”
안에 뭔가 전시시설 비슷한 게 있는 모양이었지만, 별로 들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테디베어 박물관이라. 선배는 좋아할 것 같지만, 사실 내가 영 내키지가 않는다. 이것만큼은 선배가 강하게 주장해도 사양하고 싶다. 다행히도 선배는 그거라도 보자고 하는 대신 미안한 듯 안절부절 못했다.
“그, 일단 주위라도 좀 둘러보면 어떨까? 전망대는 무리지만, 저기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정도는, 음, 으응, 괜찮을 것 같으니까.”
영 괜찮지 않은 태도였지만 선배는 내가 따분해하는 것 보다야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면 괜찮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봉화대라던지 그런 데라도 둘러보죠. 저쪽 전망대는 조금 있다 가기로 하고요.”
“미안, 전망대 올라가고 싶으면, 나, 참아 볼 테니까…….”
“아뇨, 선배도 부담되는데 괜찮아요. 뭐 위에서 보나 여기에서 보나 그게 그거겠죠.”
나는 용기를 조금 내어 선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배는 여전히 미안한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을 잡았다. 뭐, 남산타워에 올라가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이건 나중에 오기로 하자.

기세 좋게 그런 말을 했지만 워낙 좁은 공간에 볼 것도 없기에 우리는 결국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아래쪽 전망대로 왔다. 봉화대는 시간에 맞추면 조선시대처럼 신호를 보내는 행사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 시간에 맞추기는 애매했으니까.
“으으…….”
“역시 높네요…….”
난간 밖을 내다보자 남산의 광경과, 좋은 날씨 덕분에 한강과 강남 지역이 한 눈에 보였다. 경치도 좋고 아래 남산도 완만한 편이지만, 전망대 바로 밖은 깎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의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난간의 높이는 높긴 하지만, 선배는 정말 높은 것이 영 아닌지 울상을 지은 채 한 손으로는 난간을,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귀엽다면 귀엽지만 영 손이 아픈데요. 으스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배, 괜찮아요. 여기 안 무너질 테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그보다 저기 보세요. 한강도 보이고, 아, 저기가 여의도인가 보네요. 63빌딩도 있고. 날씨도 좋고 강 너머까지 한 눈에 보이는데요?”
“그, 그러네…….”
두려움에 약간 떨고 있는 선배는 평소 이상으로 귀여웠다. 음. 호랑이 박가을 선배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니. 이건 꽤 큰 수확인 것 같다. 학교 내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인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기 난간은 희한하구만. 철망으로 만든 모양인데, 왠지 모르겠는데 자물쇠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뭔가 하트 모양의 이름표나 그런걸 붙여둔 것도 있고, 두 사람의 이름과 하트 무늬가 자물쇠마다 써져 있었다. 음. 도대체 무슨 용도일까.
“여, 역시 안 되겠어. 좀 안쪽으로 들어가자.”
선배는 내 손을 더욱 꽉 쥐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윽, 아무래도 이 괴롭힘 방식은 내 손에 굉장히 부담이 가는 것 같다. 나는 그 복수라도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로 선배를 조금 끌며 말했다.
“저기 망원경도 있네요.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번 보실래요?”
“으, 아니, 괜찮은데…….”
“그러지 마시고요. 자, 망원경 잡으세요.”
나는 억지로 선배의 손을 망원경에 댄 다음,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집어넣었다. 선배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인지 울상을 지었지만, 천진난만한 내 미소에 어쩔 방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이런 사악한 면이 있을 줄이야.
“으으…….”
“자, 좀 더 자세히 보이죠?”
“그, 그러게…….”
“어때요? 이렇게 멀리 보는 건 이런 데라도 오지 않으면 별로 없는 일이니까요. 저게 한강이에요. 생각보다 넓네요. 뉴스 같은 데에서 보면 헤엄쳐서 건너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대단하네요.”
“응…….”
“63빌딩이 역시 여기보다 낮네요. 전 가본 적 없는데, 선배는 있으세요? 서울 하면 63빌딩하고 남산타워인데.”
“아니, 가본 적 없어…….”
“국회의사당은 역시 안보이네요. 아, 여기가 강북이니까 저기가 강남이죠? 잘사는 동네라곤 하던데 아파트도 낮고 그냥 그러네요.”
“그래…….”
“저기가 용산인가봐요. 미군 기지인가? 저런데 본다고 잡혀가거나 하진 않겠죠?”
“아마, 그렇겠지?”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선배는 망원경을 돌리며 대답한다. 천천히 그 목소리에는 공포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선배는 이제는 망원경을 쓰고 빠져들 것처럼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 간단한 서울 투어였습니다. 어때요, 보길 잘 했죠?”
시간이 끝났는지 망원경에서 눈을 뗀 선배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까 두려움에 떨던 것 보다는 훨씬 좋은 표정이었다.
“응……. 역시 네가 말한 대로 보길 잘한 것 같아.”
나 역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원래는 놀릴 생각이었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더 이상 손이 아프지도 않고. 우리는 망원경에서 떨어져 걸어 나왔다.
“자, 그럼 남산에서 할 건 다 한 것 같은데, 내려갈까요?”
“저기, 잠깐만…….”
난 선배가 남산도 좋아하지 않겠다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선배는 뭔가 아쉬운 모양이었다. 내가 돌아보자, 선배는 약간 빨개진 얼굴로 철망을 바라봤다.
“그, 사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자물쇠, 채우면 안 될……까?”
“네? 자물쇠요?”
“여기, 남산에 커플이 자물쇠를 채우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귄다고…….”
역시 그렇게 나오시는 겁니까.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사실 어제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자물쇠에 대한 것도 봤다. 전망대에 오면서부터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무시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다.
남산타워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누가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전망대 철망에 연인이 자물쇠를 채우면 행복하게 오랫동안 사귄다는 전설이다. 이제는 남산타워를 자랑하는 명물이 되어 있었다. 아예 자물쇠를 채우기 위한 장소를 따로 마련하고, 남산타워에서 직접 판매까지 한다. 사실 난 이런 주문 같은 것에 약하다. 좋아해서 약하다는 게 아니라 싫어해서 약하다는 거다. 뭐랄까, 시쳇말로 오글거린 달까. 테디베어 박물관에 들어가는 것과 동급으로 거절했으면 좋겠지만, 대놓고 “싫습니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역시 선배 입장에서는 채우고 싶겠지. 그래서 빨리 내려가려고 한 건데. 으윽.
“자물쇠…….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그,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채웠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은 간절했다.
“사실, 자물쇠도 사왔는데…….”
거기까지 멀리 가셨습니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삼켰다. 선배는 나의 그런 반응에 주눅 드는 모습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을 기색이었다. 얼굴은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이제는 애절함에 섞여서 어떤 결의까지 보였다.
“그, 저기, 선배, 역시…….”
“…….”
눈빛에서 결의가 차지하는 부분이 강해졌다.
“그래도 역시 남산까지 왔으면 채우고 가야겠죠? 네.”
결국 선배가 준비해온 자물쇠에 선배의 이름 박가을과 내 이름을 쓰고는 철망의 빈 공간에 매달고서야 선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순간적으로 눈빛에 보였던 이상한 결의에 잠깐 쫄았던 건 비밀로 해두고 싶다.
자물쇠는 멀리서 보니 티도 나지 않았지만, 선배는 채웠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남산에서 내려오자 점심시간을 꽤나 지나있었다. 우리는 선배가 말했던 대로 가까운 명동으로 가서 밥을 먹고 간단히 구경하기로 했다. 선배가 봐둔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고(가격은 싼 편은 아니었다. 선배는 역시 이건 자신이 찾은 데니 자신이 내겠다고 했지만, 억지로 더치페이로 계산했다) 본격적으로 명동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뭐랄까, 젊음의 거리라는 별칭이 맞긴 하는지 별천지는 별천지였다. 외국에서 온 게 분명해 보이는 관광객들도 많고, 화려한 차림의 남녀가 걸어 다닌다. 남산에서는 잠시 잊었지만, 역시 체형과 안 맞는 선배의 복장은 좀 튀는 모양이었다. 선배는 옷을 좀 봐도 되냐고 물었고, 뭐, 그 정도야 데이트에서 충분히 고려한 사항이었기에 나는 선배를 따라다니며 같이 옷을 골랐다. 선배는 보아하니 체격과는 맞지 않게 귀여운 옷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사이즈에 맞는 것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직원 분은 아예 몸매에 맞는 남자 같은 차림을 권했지만, 선배는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얼마 되지도 않는 내 패션센스로 그런 선배에게 맞는, 최대한 귀엽고 여자다운 복장을 골라주었다. 선배는 꽤나 많은 옷을 샀고, 나에게도 위아래 한 벌씩을 사주었다. 명동의 옷값은 내가 평소 생각하던 동네 할인매장의 옷값과는 단위가 달랐기에 끝까지 거절했지만, 선배는 기어코 나에게 옷가방을 쥐어주었다.
선배가 다 들기에는 모양새가 영 아니었기에 나는 가능한 한 옷가방을 들어주었다. 옷을 고르고 구경하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늦어져서, 우리는 카페에서 간단하게 목을 축인 다음 돌아가기로 했다.
“오늘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줘서 정말 고마웠어. 그, 지루하진 않았어?”
“아뇨, 괜찮아요. 저도 선배랑 다녀서 즐거웠어요.”
미리 준비했던 대로 무난한 멘트를 날리자, 선배는 배시시 웃으며 빨대로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준비한 대사였긴 하지만, 오늘 내가 느낀 감정과 특별히 다르지도 않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감정 때문에 느낀 죄책감을 곱씹으면서.
선배는, 내 생각보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배구부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들의 관심에서 제외되는 게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로, 선배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야 인기 있는, 화려하고 애교 많은 여성상과는 좀 거리가 있었지만, 자신만의 매력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외견과는 다르게 귀엽고, 내 의견 하나하나를 궁금해 하며 자신을 좋다고 말해준 남자친구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한다. 뭐 어느 정도 제멋대로인 점이 없지 않다고는 못하겠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감안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그런 선배에게 거짓말로 좋아한다고 말해서, 이렇듯 헛된 기대를 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 같은 놈이 벌칙게임으로 좋아한다고 말해서 기대를 하고, 그런 나에 대해서 진심으로 대해주는 선배에 대해서,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제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제는 선배가 두려운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기대를 하는 선배에게 진실을 말해서, 선배를 실망시키는 게 옳은 걸까.
선배는 말없는 나를 보며, 단지 빙긋 웃으며 있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 하다. 진실을 말하고 싶은 마음도, 이대로 계속 거짓말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 이런 말 하면 너무 계산적일지도 모르지만, 지난번에 저한테 선배가 고민을 말해주신 적이 있잖아요.”
“응. 그랬지.”
“저도, 선배에게 고민을 말해도 괜찮을까요?”
선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얼마든지. 내가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게.”
선배는 그런 태도가 내 고민을 더욱 심하게 만든다는 걸 알까.
“사실, 제 이야기는 아니고 친구 이야기인데요. 친구는 특별히 인기 있거나 한 녀석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착각으로 고백을 받았어요. 특별히 싫지도 않아서 일단 사귀자고는 했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는 고민했어요. 고백한 상대는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거니까요. 연인으로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럴수록 친구는 상대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사귀고 있는 일이 마음에 걸리나봐요.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자니, 상대방을 실망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이대로 사귀자니 상대방을 속이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요. 그래서 친구는 저에게 상담해왔지만, 솔직히 저는 뭐라고 해줘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
“선배라면, 그 친구에게 뭐라고 해주겠어요?”
선배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선배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쩌면 선배가 내가 말하는 게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선배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래……. 친구가 고민이 많겠구나.”
잔의 테두리를 만지면서, 선배는 입을 열었다. 거기에는 내 앞에서 보여주던 소심한 모습은 없었다. 선배는 말을 더듬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말했다.
“친구의 고민은 나도 충분히 이해가 가. 그런 상황이면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할 테니까.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 건 아니지만,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이라도 나도 정말, 정말 깊게 고민할거 같아. 이렇게 하지도, 저렇게 하지도 못할 상황이니까.”
선배는 잔의 테두리를 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그래서 솔직히 나도 뭐가 옳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겠어. 분명 그 상대 분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상처를 받을 거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더라도 상처를 주겠지. 결국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
“그렇겠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한다는 건 친구가 상대에 대해서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만약 그저 고백을 받았다는 이유만이라면, 상대가 상처를 받든 어쩌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 친구는 분명 좋은 사람일거야. 비록 오해였다고는 하지만, 그런 오해 때문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으니까.”
“…….”
“그런 태도가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해.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하니까, 어떤 대답을 할 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고민하는 거잖아? 그리고 분명, 그 친구가 진지하게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이 비록 어느 쪽이든 지간에 틀린 대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답이 없는 문제는, 결국 그 답이 어떻게 나왔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
“그렇다면, 진심으로 생각해 진지하게 내놓은 답은 분명 상대방도 알아줄 거야. 분명 처음에는 상처를 받고 아파하겠지.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상대도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생각해줬는지, 어떻게 해서든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아줄 거라고, 나는 생각해. 적어도 나는, 아마 그럴 거야.”
“…….”
“하하, 결국 고민을 해결해주진 못하네……. 나를 믿고 어렵게 말해줬는데, 미안해. 그래도 내 생각은 그래. 그리고 분명 그런 고민을 하는 그 친구는, 어떤 결론이든지 더 옳은 답을 내놓을 거야.”
“그럴 거라고, 저도 생각해요…….”
“내 대답이, 조금은 도움이 됐어?”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말투는, 나를 대하는 평소처럼 조심스러웠지만, 표정만큼은 더없이 진지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언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다행이다…….”
선배는 내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연애 문제는, 나도 잘 모르겠어서…….”하고 덧붙이긴 했지만, 그 대답에 틀린 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그 친구, 한번 만나게 해줘. 나도 한번 보고 싶네.”
“네, 기회가 된다면, 꼭 그럴게요.”
선배와 나는 카페를 나와 조금 걸어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탔다. 오는 사이 선배와 대화를 나누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 역에서 내려, 학교 앞에서 헤어졌다. 내일 보자는 말을 나누고.
그때부터 집에 돌아가 잠이 들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선배가 한 말에 대해서 고민했다.


(명목상)선배와 사귀기 시작한지 이주일 정도. 그 사이에 몇 번인가 선배가 나를 찾아왔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도 선배는 그 사이 도시락을 싸오거나 하진 않았다. 급식을 먹고 비는 시간은 가급적이면 함께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게 도시락을 먹는 것보다야 낫지. 선배는 그 날 이후로 계속 연습을 미루면서 나와 하교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손을 잡고.
선배와 그래도 시간을 보내며 두려운 마음은 천천히 옅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배구부에 대한 소문만큼은 무성했기에 나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뭐 일단 적당히 귀여운 부분이 있고 여자 같은 부분이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근본적인 지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대답을 내놔야 할 순간이 올 테니까.
특히 점점 내가 벌칙게임으로 선배와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가 교내에 퍼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팬클럽은 실존하는지, 여학생들을 주축으로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친구를 통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나는 교내에서 혼자 있을 때, 혹은 선배와 함께 있을 때 나를 바라보며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여학생들을 몇 번 목격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떨었다.
때문에 방과 후, 나는 일대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배구부로 다시 찾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참고로 나의 참 좋은 친구들은 나를 진심으로 말렸다. 솔직히 이번에는 정말 진심으로 말렸고, 나 역시 모험이라고 생각했기에 고마웠지만, 그래도 역시 배구부를 찾아가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과연 정말 호랑이 카리스마 부장인지. 하교하는 학생들로 붐비는 교내를 지나, 교문 바로 옆에 있는 체육관으로 다가간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을 살핀다. 듣자하니 오늘은 다른 학교 배구부와 친선경기가 있는 날인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체육관 안에는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코트 밖에 서있거나 앉아있었다. 뭐, 많다고 해봤자 반 하나 정도긴 했지만. 두 개의 코트에서는 우리 학교의 유니폼 입은 배구 부원들과, 처음 보는 배색의 유니폼을 입은 다른 학교 배구 부원들이 연습 삼아 가볍게 서로 공을 토스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유니폼을 입은 인물들 중에는 박가을 선배도 있었다. 전국구 학교의 부장은 부장인걸까, 선배 혼자 움직임이 다른 것이 배구에 대해서는 코빼기도 모르는 나조차도 느껴졌다. 선배는 우리 학교 배구 부원들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다른 학교 배구 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느낌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배구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선배가 나를 눈치 채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배구 부원들은 연습에 몰두하여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눈치 챌 기색은 없었다. 분명 같은 체육관 안이었지만, 코트 안과 코트 밖이 완전히 다른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의 박력이었다. 잠깐, 아직 연습 경기는 시작도 안했을 텐데?
연습중인 선배는, 지금까지 내 앞에서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날카로운 눈매로, 후배들의 동작 하나 하나를 봐주면서 조언을 해준다. 폼을 교정해주고, 자신이 먼저 시범을 보인다. 그리고 후배들은 그런 선배에게 위압감을 느끼는 대신 웃는 얼굴로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교정해달라고 부탁한다. 소문에서 듣는 것처럼 선배가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라면 그런 태도는 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윽고 코치의 말에, 우리 학교 부원들과 다른 학교 부원들은 코트 옆에 있는 각자의 자리로 모인다. 아마 연습 경기가 시작될 모양이다. 코트 하나에서 경기를 하는지, 하나는 비어있다. 선배는 경기에 선발된 부원들과 둥글게 모여 서서는 진지한 얼굴로 작전 지시를 내린다. 부원들은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의견을 제시한다. 선배는 그런 부원들에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그들의 의견에 작전을 수정하거나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심판의 말에, 선배와 부원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허리를 숙이며 구호를 넣는다.
“파이팅!”
경기가 시작됐다. 아무래도 우리 학교의 선공인 모양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배구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기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설명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원들이 온 힘을 다해서 경기에 열중하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날아온 공을 동료가 패스하자, 선배는 사람 하나를 뛰어 넘을 정도로 높게 점프하며 적진을 향해 스파이크를 날린다. 상대편의 블록이 실패하고, 공이 코트 바닥에 내리꽂히자 선배를 동경하는 여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플레이를 칭찬하는 동료들에게 웃는 얼굴로 고맙다고 말한 다음, 선배는 다시 경기에 집중한다. 날아오는 공을 막아내고, 동료가 놓친 공을 몸을 날려서 살려낸다. 미안하다는 말에 대해서 괜찮다며, 웃는 얼굴로 말해준다. 실점에 후배로 보이는 부원이 고개를 숙이자,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번에 막으면 돼. 힘내!”하고 격려한다.
도대체 어떤 놈이 선배를 보고는 호랑이 부장이라고 말 한 거야?
작전 시간. 점수를 보아하니 이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선배는 플레이의 미약한 점을 지적하며, 어른스럽게 보완할 점을 알려주고 바뀐 작전을 설명한다. 잘한 플레이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경기는 우리 학교가 압승을 거두었다. 기뻐하는 부원들. 선배는 그런 부원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한다. 패배에 슬퍼하는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도, 좋은 플레이였다고, 다음번에는 더 좋은 경기를 하자고 격려한다. 매니저인지 후배인지가 가져다 준 물을 마시고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들과도 승리의 기쁨을 나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선배를 향해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인물을 보고,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학생이 아니었다. 선배에게 고백한 날 봤던 얼굴이었다. 왕년에는 유명한 남자 배구선수였다는 우리 학교 배구부 코치는 나를 보며 말했다.
“잠깐만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왠지 모를 두려움과 동시에 해방감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 좀 펴도 괜찮겠어?”
“네. 괜찮습니다.”
체육관 뒤쪽. 나와 단 둘이 선 코치는 내 대답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상식적으로 생각 할 때, 연습 시합이 끝나고 다른 학교의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부원들을 칭찬해야 할 사람이 나를 만나자고 이곳에 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집히는 구석이 있었다.
코치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뱉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가을이랑 사귀고 있는 게 너, 맞지?”
“네.”
“그래. 고백 할 때 봤으니까.”
코치는 다시 연기를 들이마셨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는지는, 대충 감이 와?”
“어느 정도는요.”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인 만큼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겠네. 가을이가 우리 배구부에 얼마나 중요한 인재인지는, 뭐, 소문도 들었고 지금 경기를 보기도 했으니까 알겠지?”
“네.”
“가을이는 우리 배구부의 보배야. 솔직히 내가 이 학교에서 몇 년 동안 코치 생활을 하면서 본 학생들 중에서 제일 뛰어나. 코치 생활을 하면서 본 애들 중에서도 한손에 꼽을 정도야. 아마 졸업 후에는 바로 프로 선수로서 활동할거야. 이미 그럴 수준은 됐고. 앞으로 몇 년 만 프로에서 활동하면 20대에 거물급 선수가 될 거야. 띄워주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는 말이야. 이미 올해 청소년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결정되어 있어.”
“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을이가 배구에 집중해줬으면 좋겠어. 재능도 있고, 스스로도 그걸 알면서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 가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지금은 중요한 시기야. 내 지도 하에 열심히 해야 하는 시기지. 이해하지?”
“네.”
“그런데 요새 가을이가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어. 원래 배구부는 오후 수업을 쉬고 연습하는데, 학교가 끝날 시간만 되면 30분 정도 사라졌다 돌아오지. 지금까지는 밤에도 혼자 연습했는데, 기숙사 부엌에서 요리를 연습하고 있어. 여유 시간에는 TV도 보고, 주말에는 연습을 빼먹고 놀러가서 옷을 한가득 사오기도 해. 근육 트레이닝도 뜸하고. 이게 언제부터인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이주일 쯤, 됐겠죠.”
“맞아. 그리고 원인도 알고 있겠지?”
코치는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밟아 끄며, 나를 쳐다봤다. 여러모로 불쾌한 말투에, 시선이다. 나는 잠시 숨을 삼키고는 말했다.
“저 때문이겠죠.”
“맞아.”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코치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가을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배구만 하면서 살라고 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시기고, 배구에 집중하는 게 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 이런 식으로 다른 데에 신경을 쓰다가는 가을이는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할 테니까.”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치는 아까보다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네가 가을이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사귀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
불쾌한 감정을 억누른다.
“소문은 들었어. 벌칙게임이라고 하던데.”
“…….”
“특별히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나도 어릴 때야 그런 장난도 치고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너도 사실 진짜로 가을이가 좋다고 할 줄은 몰랐을 테고. 배구부야 다들 알다시피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으니까. 피차간에 안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해.”
“…….”
코치는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뱉으며 말했다.
“길게 말 안할게. 가을이가 사실을 알고 너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두려운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잘 말해서 막아줄 테니까. 너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사귀면서 힘들었을 거 아니야.”
“…….”
“가을이를, 그만 만나줘. 만약 조금이라도 네가 가을이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코치는 담배를 피면서, 재촉하지 않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바랬던 적도 있다. 비록 이 사람이 나에게 말하는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불쾌한 말투지만, 그 속에는 코치가 얼마나 선배를 생각하는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코치가 지금까지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정론이다.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나는 마음속 한 구석의 망설임을 지우고,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이에게는 내가 잘 말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그래. 시간 뺏어서 미안했어. 돌아가 봐. 연습을 보느라 시간도 늦어졌는데.”
“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코치가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안도의 한숨인지, 무슨 한숨인지는 모르겠다.
이걸로 잘 된 일이지. 아까 선배의 경기를 보면서 뛰었던 가슴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뒤틀리는 것 같은 속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선배와 같이 가던 길을 혼자 걸어 돌아갔다.

“잠깐만요, 가을언니! 조금만 기다려요!”
“가을 선배, 잠깐만요!”
“얘들아, 부장님 막아! 말려!”
다음 날 아침시간, 평소보다 일찍 교실에 와서 기다리자, 복도에서부터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우리 반 교실로 다가왔다. 반 친구들이 놀라는 게 보인다. 그러나 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뒷문이 열리고, 배구복을 입은 여학생 몇 명이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니, 뛰어 들어왔다기보다는 한명에게 끌려 들어왔다. 당황한 얼굴로 박가을 선배를 말리던 배구 부원들은, 그러나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보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눈빛을 날카롭게 바꿨다. 평상시였다면 공포에 질려서 얼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눈빛보다 더욱 바라봐야 할 것이 있다.
“거짓, 하아, 하아, 말이지? 응?”
박가을 선배의 표정은, 솔직하게 말해서 가관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과, 울 것 같은 표정을 반반으로 섞으면 그런 표정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구 부원들은 선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선배는 나를 향해서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선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코치가, 하아, 오늘 아침에 이상한 소리를 해서, 하아, 하아, 말이야, 말도, 안 되는, 하아,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너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어.”
“…….”
“코치는, 내가 요새 연습을 자꾸 빼먹어서, 쉬어서, 나한테 실망했을 테니까, 불만일 테니까, 분명 그러니까 그런 말을 했을 거야. 응, 분명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했을 거야. 앞으로 연습 열심히 할 테니까, 코치가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열심히 할 테니까, 그러니까 대답해줘. 거짓말이라고.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냥 벌칙게임으로 나한테 고백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대답해줘!”
선배는 그렇게 말을 토해내고는 거친 숨을 다시 내뱉었다. 나는 말없이, 그런 선배를 바라봤다. 지금의 내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잘 모르겠다.
“응? 거짓말이지? 왜냐하면 넌 그때, 하굣길에 왜 나에게 고백했냐는 말에 손을 잡아줬잖아. 얼버무린 건 알아! 그야 부끄러울 테니까! 나도 말하고 나서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그래서 대답 못한 거잖아? 응? 아니라면 왜 손을 잡아줬겠어. 그렇지? 왜 그날 그렇게 맛없는 도시락을 맛있다고 하면서 열심히 먹어줬겠어. 그치? 거짓말이지?”
“…….”
선배는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대답해줘!”
“선배, 그건 진짜에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간다. 같은 반의 여학생 하나가,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말한다.
“전 똑똑히 들었어요. 애들이 벌칙게임이었는데 진짜로 사귀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냐고 하는걸요. 전부 진짜에요.”
두려운 공포의 대상인 박가을 선배에게 말해서인지 떨면서도,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끝까지 말했다. 선배는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외쳤다.
“아냐!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진짜에요, 선배.”
그 말에 다시 한 번 시선이 집중된다. 그러나 이번엔 그 여학생도,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내가 한 말이었으니까. 거칠게 고개를 젓던 선배가 급격하게 굳어간다. 나는 다시 한 번 각오한다.
“……뭐?”
“진짜에요. 그건 벌칙게임이었어요. 점심시간에 빵값으로 했던 내기였지요. 배구부 부장 박가을 선배에게 고백하고 오는 게 벌이었어요. 분명 선배가 거절할 테니까, 한두 대 맞고 놀림당하면서 돌아오면 되는 거였어요. 쪽팔려 게임 비슷한 거였죠. 설마 진짜로 오케이 하실 줄은 몰랐어요.”
“왜…….”
“선배는 무서우니까요. 분명 거짓말인 게 들통 나면 곱게는 안 끝날 테니까, 어떻게든 안 들키려고 열심이었어요. 결국 들켰네요.”
“그럼, 도시락을 먹어준 건?”
“안 먹으면 좋아한다고 한 남자가 도시락도 안 먹어주니까 이상하겠죠. 애당초 선배는 무섭기로 소문났으니까, 맛없다고 하거나 남기기만 해도 큰일 날 줄 알았어요.”
“데이트에서, 망원경을 보여주면서 설명해준건?”
“고소공포증이라니까 놀리려고 그랬죠. 설마 선배가 고소공포증이라니, 생각지도 못해서요. 놀리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철망에, 자물쇠를 채웠던 건?”
“선배가 채우자고 했으니까요. 안 채우면 거기서 난간 밖으로 던져질지 누가 알아요.”
“카페에서, 고민이라고 상담했던 건?”
“제 이야기랑 선배 이야기를 적당히 섞었는데, 끝까지 눈치를 못 채시더라고요.”
“아침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방과 후에 찾아올 때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눈 건?”
“그래야 안 들키죠. 설마 그렇게 자주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럼, 그럼……. 손을 잡아준 건?”
“그건…….”
나는 그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선배가 마지막 기대를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기세 좋게 외쳤다.
“이야, 그래도 설마 거기서 들킬 줄은 몰랐네요! 나름대로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주일이나 됐는데 선배는 소문도 못 들으시기에 이대로 안 들키고 갈 줄 알았거든요. 아, 곤란하네요. 하하하!” “넌……!”
선배가 손을 들어올린다. 맞으면 죽을 것 같은, 공이 터질 것 같은 스파이크를 날리던 그 손바닥이, 있는 힘껏 뒤로 젖혀진다. 맞는다. 그러나 나는 피하거나 막을 생각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내 뺨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선배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얼굴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트리면서도, 선배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뒤로 뻗은 손은 휘둘러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선배는 주먹을 꽉 쥐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낮은, 짓눌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줘.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절대로.”
선배는 그 말만 마치고는, 눈물을 닦으며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반에서 나갔다. 배구 부원들이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공포에 질리지 않았다. 그들은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다, 박가을 선배를 따라 교실에서 나갔다. 반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내기에 참가했던 놈들이 뒤늦게 나에게 다가온다.
“그, 미안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 그래도 다행이잖아? 맞지도 않고 끝났으니까…….”
“그래. 그나마 잘 끝났다고 생각해.”
“미안해. 좀 혼자 있고 싶다. 나 좀 내버려둬 줘.”
자리에 앉으며 하는 내 말에, 친구들은 알았다며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며 저 멀리 떨어졌다. 나는 책상에 이마를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박고는, 주변이 보이지 않도록 잠들 때처럼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내 머릿속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정말 이걸로 된 걸까.


그로부터 며칠인가의 시간이 흘렀다.
그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은 전교에 소문이 파다했고, 나는 전교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악명 쪽으로. 설마하니 선생님들 까지도 나에게 뭐라 하실 줄은 몰랐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교내의 유명한 치정사건이다. 그것도 가해자가 명백한. 선생님들에게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다.
코치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들은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된다’ 정도로 관대하게 넘어가셨다. 사실 그런 건 사소한 문제고, 코치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학생들 사이의 소문은 내가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복도를 지나거나, 학교의 어디를 가도 나를 손가락질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는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괴롭힘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선배가 말하신 대로, 나는 그 이후 일체 선배에게 연락을 하거나 찾아가지 않았다. 사실상 관심을 끊었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사실 내가 선배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문제는 더 커질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로 선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건 아니다. 선배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한 부탁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래도 역시 사건의 당사자라서일까,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내 귀에도 흘러들어왔다. 그다지 좋지 못한 소식들뿐이었다. 그 날 훈련도 빼먹고는 밤새도록 울었다더라, 식음을 전폐한다더라, 남성불신증에 걸렸다더라, 예전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잦은 실수를 연발한다더라. 모두 다 선배의 성격을 감안 할 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뭐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모두들 부분부분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배구부는 전국대회에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야 연습경기 때도 봤지만 그 정도 실력이면 못나가는 게 이상하겠지. 예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끝나버렸고, 학교에 소식이 퍼진 건 본선 경기가 시작된 이후였다.
8강인가쯤부터 학교에서는 응원단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뭐 매년 있었던 일이니까. 연례행사 비슷한 것이었다. 수업을 정당하게 빼먹고 놀 수 있는 지라 많은 학생들이 신청했다. 물론 나는 신청하지 않았다. 후환이 두려운 건 둘째다.
경기에 다녀온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선배는 이제는 후보 선수 정도의 움직임도 보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 움직임도 느리다. 소문으로만 듣던 호랑이 부장으로서의, 멋진 모습 같은 건 없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애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당연히 비난의 화살은 천하의 몹쓸 놈인 나에게 집중되었다. 특별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괴롭힘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이것도 내가 저지른 일 때문이지 뭐.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어느 새 4강 경기까지 끝나고, 결승전이 바로 다음날이었다. 선배가 없어서 위태위태하긴 한 모양이었지만, 원체 강한 팀이었기에 결승전 까지는 올라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승전은 질 거라는 게 주된 의견이었다.
솔직히, 이제는 나도 한계였다. 육체적으로보다는 심리적으로.


“저기, 배구부에서 찾아왔는데…….”
결승전이 있을 날, 방과 후. 경기는 방과 후에 있는지라, 이번에는 꽤나 많은 학생들이 결승전 관람에 참가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결승전에 올라갔던 다른 해에 비해 올해는 전교생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박가을 선배 때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배구부에서……?”
결승전날에 배구부에서 나에게? 나는 소식을 전해준 여자애의 시선을 따라 뒷문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고백할 때도, 경기 날에도, 그리고 그 날에도, 선배의 바로 옆에 있었던 부원이었다. 나는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뒷문으로 나갔다.
“저기, 무슨 일로…….”
“잠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단 둘이서 봤으면 좋겠는데, 잠깐 따라 와주겠어?”
교복의 명찰을 보니 선배와 마찬가지로 3학년인 모양이었다. 그 선배는 나를 이끌고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까지 갔다. 확실히 여기라면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나는 아무 감정도 가지지 못한 채, 그 선배와 마주봤다.
“난 배구부 부부장이야. 너랑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박가을, 선배에 대한 건가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부장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가을이를 만나줬으면 좋겠어.”
“그건 안 돼요.”
나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부부장 선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저보고 두 번 다시 선배의 앞에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저는 그 말을 지키고 싶어요. 그러니까, 선배를 보는 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가 가을이를 만났으면 좋겠어.”
나는 약간 눈매를 날카롭게 하며 부부장 선배를 노려봤다.
“제가 선배를 만나서,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죠? 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사과라도 할까요?”
“뭐,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긴 하지만 그걸 원하는 건 아니야.”
선배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시간이 촉박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말할게. 넌, 가을이가 너와 사귀고 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고백한 그날, 가을이는 제대로 연습하지도 못했어. 후배들이 축하한다고 말할 때는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연습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들뜬 마음을 감출 생각도 없었어. 너도 알겠지만, 배구부는 인기가 없어.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모양이야. 지금까지 가을이에게 연애는 순정만화 속에나 나오는 일이었으니까.”
“…….”
“가을이는 들떠서는 그나마 가장 친한 나에게 물어봤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그 애가 나를 싫어하지 않게 될까? 순정만화에 본 대로 하면 될까? 들떠서는 기숙사에 있는 요리책을 보고는 지금까지 만든 적도 없는 요리를 신이 나서 만들었지. 간도 안보고 말이야. 사실 걱정돼서 살짝 맛을 봤지. 솔직히 끔찍하더라. 실망할까봐 말은 안했지만, 다음날에 갑자기 요리를 열심히 연습하기에 그럴 줄 알았지. 그렇게 잔뜩 만들었는데, 나는 태반은, 아니 거의 다 버릴 줄 알았어. 하지만 찬합은 거의 비어있었지. 나는 물어봤어. ‘그걸 다 먹었어?’ 가을이는 내가 눈치 챘다는 걸 아는지 실망하는 눈치더라고. 그래도 가을이는 기뻐보였어. 자신이 먹기에도 맛없는 그 도시락을, 남자애는 맛있다고 하면서 열심히 먹어줬다고. 너무 기쁘다고. 다음번에는 반드시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그 뒤에도 신나서 연습했지.”
“…….”
“가을이야 학교에서는 무서워하니까 소문을 듣지 못했지만, 사실 배구 부원들은 얼마 안 있어서 전부 소문을 들었어. 니가 벌칙게임으로 가을이한테 고백했다는 걸. 그래도 가을이가 실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모두 모른 척 했어. 나도 나중에 가을이가 실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하게 말해도 분명 상처 입을 테니까 모른 척 하면서 말했지. 너무 들뜨지 말라고. 너는 그 애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그래도 가을이는 기뻐했어. 너와 하교 한 날, 나한테 와서 신이 나서 말했지. 여자답지도 않은데 좋아한다고 해서 물어봤지만, 너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잡아줬다고. 그게 너무나도 기뻤다고. 진심으로 그 애를 좋아하게 됐다고.”
“윽…….”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해서, 배구 부원들이 모두 머리를 써서 아이디어를 냈어. 남산에 가라고 부추긴 것도 우리야. 옷을 골라준 것도 우리고. 비록 니가 벌칙게임으로 가을이와 사귀게 됐다고 해도, 가을이가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가을이는 이 옷이 예쁠까, 뭘 입어야 그 애가 좋아할까 진심으로 고민했어. 잠도 못 잤지. 그리고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돌아왔어. 그래서 우리도 생각했지. 우리만 모른 체하면 괜찮을 거라고. 이주동안, 가을이는 그렇게 열심이던 연습도 소홀이 하면서 어떻게 하면 네가 좋아해줄까, 어떻게 하면 너랑 조금 더 깊은 사이가 될까 고민했어. 그러다 그 날 그런 일이 터졌지. 코치가 아침 연습 중에 가을이에게 말한 거야. 코치가 한 일은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지만, 그 마음은 이해가 돼. 우리 모두 가을이를 보면서 생각했거든. 가을이는, 적어도 가을이는, 분명 성공할 거라고, 우리 모두 그렇게 되지 못해도 유명한 선수가 되어서 꿈을 이룰 거라고. 코치에게 말을 듣고도 가을이는 믿지 않았어. 너에게 답을 듣겠다고 뛰쳐나갔지. 우린 모두 이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말리려고 했지만, 잘 안됐지. 그래도 너에게 희망을 걸었어. 네가 사실을 말하지 않기를, 그냥 그건 헛소문이라고 하기를. 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사실을 말했어.”
“그랬, 었죠…….”
“솔직하게 말한 너를 처음에 우리는 용서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생각이 달라. 나는 네가 가을이를 생각했기에,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하니까. 가을이는 그 뒤에 사람이 바뀌었어. 코치는 가을이가 너랑 만나지 않으면 다시 연습에 열중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알다시피 잘 안됐지. 지금 가을이는 평상시의 가을이가 아니야.”
“그래서, 저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죠……?”
내 말에, 부부장 선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정해야한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속에 있던 말을 쥐어짜냈다.
“전 가을 선배를 속였어요. 거짓말을 하면서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들었죠. 처음에 솔직하게 말했으면, 그랬으면 차라리 나을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헛된 기대만 하게 만들었어요. 박가을 선배의, 선배의 상처를 더 벌려놓기만 했어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그건 알아요! 그러니까 이 이상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아요! 비록 지금은, 지금은 저 때문에 힘들어하고 상처에 아파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예요. 제가 아파하면,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논 나쁜 놈이 되면 선배는 분명 언젠가 깨달을 거예요. 아, 내가 저런 놈을 좋아했었구나. 그래, 그 일은 잊자. 그냥 잊어버리자 하고! 그러면 그걸로 된 거예요. 저는, 더 이상, 선배를 볼 수 없어요……. 보면 안돼요.”
“한 가지만 물어볼게.”
“뭐죠...?”
“그럼 도대체 왜 울고 있는 거지?”
나는 그 말에 눈치 챘다. 어느새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고 생각했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려 교복을 적시고 있었다. 나는 옷깃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부부장 선배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니가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할 말은 없어. 그것도 분명 한 가지 방법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넌 분명, 시간이 지나면 가을이의 상처가 아물 거라고 생각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
“선배는 단지, 결승전에서 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닌가요?”
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있는 힘껏 선배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부부장 선배는 그런 내 눈빛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
“니가 그렇게 본다고 해도 난 할 말은 없어. 그렇게도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해줘. 나는 손을 잡았다고 기뻐하거나, 도시락을 먹어줬다고 기뻐하거나, 너와 데이트를 다녀와서 기뻐하거나, 하다못해 오늘은 니가 무슨 말을 했다고 기뻐하는 가을이의 모습을 봐왔어. 그리고 나는 분명히, 너도 그런 가을이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야. 사실 나도 늦어서, 이 이상 시간을 쓸 수가 없거든. 지금 출발해도 전반전은 못 뛸 테고. 선택은 네 몫이야. 그러니까, 니가 생각하는 옳은 행동을 해주길 바래.”
“제가, 생각하는 옳은 행동……이요?”
“뭐, 더 멋지게 말하면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이건 경기장 주소야. 그럼, 이만.”
부부장 선배는 나에게 종이쪽지를 넘겨주고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코너를 돌기 전, 나를 올려다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네가 어떤 대답을 내놓든, 이 말은 해둬야겠어. 비록 니가 벌칙게임으로 한 행동이긴 하지만, 가을이가 한 순간이라도 기뻐하게 해줘서 고마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부부장 선배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단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나는 힘이 빠져, 계단에 걸터앉았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머리는 터질 것 같다.
선배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는 선배를 이 이상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나를 좋아해준 사람이니까. 내 반응 하나하나에 부끄러워하고, 내가 싫어하지는 않나 두려워하고, 내 기쁜 듯한 반응에 웃어준 사람이니까.
그 웃음에, 나도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더욱 선배를 봐서는 안 된다. 선배를 좋아하니까, 선배가 이 이상 고통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배가 나 같은 놈보다 더 좋은, 선배가 아깝지 않을 사람을 언젠가 만나줬으면 좋겠다. 벌칙게임으로 하는 고백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고백을 들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좋아해주는 사람의 도시락을 먹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고, 그 사람이 선배의 진짜 모습을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이 바로 나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나쁜, 아주 나쁜 놈이니까. 벌칙게임으로 고백을 하고, 맛없는 도시락을 억지로 먹어치우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손을 잡고, 데이트에서 선배를 상대로 거짓말 한 부담을 덜려고 상담을 하고, 선배의 진짜 모습을 본 남자니까.
선배는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고민해서 내린 답이라면, 분명 그건 틀리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틀리지 않았다. 나는 옳은 결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는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나쁜 놈이다. 이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나쁜 놈이 되어 주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남자가 되겠다. 선배가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기회 같은 건 박살내주겠다. 선배가 상처 입는 일은 신경 쓰지 않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그 동안 선배를 보지 못하면서 느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넘어질 것 같은 기세로 계단을 내려간다. 복도를 달려간다. 학교에 남아있는 몇몇 학생들이 나를 돌아본다. 선생님이 뭐라곤가 외치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러나 달려 나간다. 학교 앞 길목에서 마침 타이밍도 좋게 다가오는 택시를 붙잡고, 부부장 선배가 건네준 쪽지를 보여준다. 이걸로 이번 달 용돈은 박살이다. 그러나 그런 건 사소한 문제다.
“아저씨, 빨리요!”
택시는 내 다급한 외침에, 제한 속도보다 좀 빠른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경기는 잘 풀리고 있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선배의 공백이 큰 모양이었다. 점수는 크게 뒤지고 있었다. 작전시간인지 벤치에 모여서 부원들이 뭔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박가을 선배는 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체구가 줄어든 것 같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사이니까 진짜로 그럴 리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선배는 이전보다 작아져있었다. 분위기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난 나의 모습에, 관객석의 학생들이 전부 돌아본다. 경기장 안의 우리 학교 부원이나 다른 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부부장 선배의 웃는 얼굴이, 박가을 선배의 놀라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선배는 그러나 이를 악 물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성큼 성큼 선배를 향해 다가간다.
“잠깐, 일반 관객은 위층입니다! 여기는 경기장이에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진행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제지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밀치고 걸어간다. 그렇다. 나는 코트가 있는 1층의 문을 열어젖히고 코트로 들어온 것이다. 경기장 전체가 소란스러워진다. 나를 붙잡으려고 진행위원들이 다가오지만, 나는 그런 그들이 붙잡고 당기는데도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앞으로 나아갔다(나중에 듣기로는 꼴사납게 질질 끌려 나가는 것에 가까웠다고 한다).
“선배! 박가을 선배!”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선배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말한다. 코치가 다가와, 진행위원들을 말린다. 그 사이, 나는 선배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선배는 더욱 눈에 띄게 고개를 돌린다.
“선배! 선배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난, 듣고 싶은 말, 없어…….”
“부탁이에요, 선배! 잠깐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줘요! 날 봐줘요!”
선배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이윽고 나를 바라봤다.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다.
“선배, 분명히 그 날 선배에게 고백한 건 벌칙게임의 일환이었어요. 전 선배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좋아한다고, 지금까지 좋아해왔다고 했어요. 하지만, 거짓말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또, 나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지?”
정말로, 정말로 학교의 호랑이 부장인 것처럼, 당장이라도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기세로, 부장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그 날, 선배가 마지막으로 저를 찾아온 날, 저는 말했어요. 그 모든 게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그러나 그것도 거짓말이었어요.”
“…….”
“선배가 도시락을 싸줘서 정말 기뻤어요. 맛은, 솔직히 없었지만, 열심히 만들어 준게 너무 기뻤어요. 데이트를 신청해줘서, 기뻤어요. 망원경을 보면서, 선배에게 설명해주면서 즐거웠어요. 자물쇠를 채우면서, 저랑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고 말해줘서 기뻤어요. 제 고민에 진지하게 대답해줘서 기뻤어요. 함께 학교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배에 대해 알아가서 기뻤어요. 처음 등교를 한 날부터, 손을 잡을 때마다 너무나도 두근거렸어요. 그래서 더 많이 손을 잡고 싶었어요.”
“…….”
“분명 전 선배에게 거짓으로 고백했어요. 지금까지 좋아해왔다고.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제대로 말할게요. 그때부터 좋아해왔어요! 제 고백에, 웃기지도 않는 고백에 기뻐하고, 저를 위해서 신경써줘서 기뻤어요!”
“…….”
“정말 좋아합니다, 선배! 그때부터 쭉 좋아해왔습니다! 선배, 저랑 사귀어주세요!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라고요!”
“…….”
경기장 전체에 물을 뿌린 것 같은 정적. 선배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말없이, 그런 선배를 바라봤다. 지금의 내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선배의 표정은 잘 알 수 있었다. 저건 울기 직전의 표정이다.
선배는 그대로 내 가슴에 안겨왔다. 울면서. 소리를 내고 울며. 나보다 키가 큰 선배에게 안겨졌기에, 그 광경은 꽤 웃겼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선배를 마주 안아줬다. 선배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문대면서 말했다.
“왜, 왜 그때 거짓말을 한 거야!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잖아!”
“미안해요.”
“그 뒤로 얼마나 내가 마음 아파했는지 알아?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게 됐는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걸 들었을 때, 내가 어땠는지 아냐고!”
“정말 미안해요, 선배. 앞으로는 절대, 선배에게 거짓말 하지 않을게요. 맹세해요.”
“나쁜 놈……. 나쁜 놈……!”
나는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여 선배의 머리에 얼굴을 댔다. 시큼한 땀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더럽다고? 당장 나와라.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성이 열심히 흘린 땀 냄새를 모욕하다니, 용서하지 않을 테다.
선배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들어 올린 얼굴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 뒤의 일은 별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싶지 않다.
경기장을 가득 매우는 환호성. 마치 연애드라마 같은 결말. 그러나 사실 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경기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진행위원들에게 질질 끌려가서, 체육직에 종사하는 그분들에게 무서워서 눈물이 날 정도로 설교를 들었다. 근육질의 남녀가 의자에 앉혀두고 말로 공격하는 것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뒤에도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반성문을 작성했다. 거기서도, 학교에 돌아와서도. 그때 잡힌 굳은살이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끌려가서 그런 고문을 당하는 사이, 경기장 안에서는 계속해서 드라마가 찍혀지고 있었나보다. 부활한 선배와, 그런 선배의 지휘 하에서 안 그래도 우수한 우리 학교는 불리한 점수를 뒤집고 그림 같은 역전을 거두었다. 그래도 선배도 나중에는 꽤나 설교를 들은 모양이다. 나에게 이야기 하며, 선배는 약간 부끄러운 눈치였다. 역시 소설은 그쯤에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치는 내가 선배와 사귀는 게 역시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만, 억지로 갈라놓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모양이다. 사실 그 뒤에도 여자 부원들의 보이콧에 꽤나 곤혹을 치른 모양이었다. 부부장 선배가 나에게 살짝 알려주었다. 부원들은 아무래도 일단 나와 선배를 응원하는 모양이었다.
그 후 학교에서는 어땠냐 하면, 아니, 사실 말하기 싫다. 학교에서의 그 치정싸움에, 마치 드라마 같은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씬. 선배와 나는 아주 학교 공인 커플이 되어 있었다. 소문이 눈덩이 커지듯 불어나는 내용은 차마 말 못하겠다. 아마 몇 년이 지나도록 학교에 길이길이 전설으로 남을 것 같다 정도로 요약하겠다.
선배와 내 관계는 어떻냐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지하철역 앞에 앉아서 선배를 기다리고 있다. 연습 때문에 선배는 점심시간이든 방과 후든 약속시간에 칼같이 맞춰 오는 경우가 없었다. 이게 다 코치 탓이다. 어떻게든 나와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시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부모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선배를 기다리는 일 정도에 마음을 굽히지 않는다. 아예 30분 전부터 기다리는 것에 습관을 들였거든.
“미안! 오래 기다렸어?”
“한 40분 쯤 기다렸네요. 어서 오세요.”
“그럴 때는 ‘저도 방금 전에 왔어요’ 하고 말해주지…….”
그러나 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특별히 불만인 눈치는 아니다. 싱글싱글 웃고 있으니까. 오늘은 시원할 것 같은 파란색 민소매 원피스다. 약간 주름이 있고, 프릴이 달려있다. 통도 좀 크게 풍성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귀여운 디자인이다. 선배는 약간 기대하는 눈치로 물어본다.
“어때? 어울려?”
“아뇨, 별로.”
나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그럴 때는 ‘정말 어울려요, 선배’ 하고 말해주지…….”
“그때 약속했잖아요. 선배 앞에서는 절대 거짓말 하지 않겠다고.”
“정말로 사귀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덜 상냥해진 것 같아…….”
“본성을 드러내는 거죠. 나쁜 남자를 고르셨네요, 선배.”
선배는 약간 토라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 표정에 오히려 웃음 짓는다. 역시 선배는 몸은 커다랗고 인상은 날카로워도 귀엽다. 놀려먹으면 그 귀여움이 배가 된다.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버릇이 될 것 같다.
“흥, 됐다 뭐. 그때 결승전에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고백해서 차이면 불쌍하니까 사귀는 거다 뭐.”
“그럼 그만 만날까요?”
“화낸다?”
“……죄송합니다.”
선배는 고개를 90˚에 가깝게 숙이는 내 자세에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일요일. 결승 이후 국제대회 연습으로 바빴던 선배가 오랜만에 낸 휴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두 번째 데이트 날이다. 날은 좀 더 더워졌지만, 날은 그보다 쨍쨍하니 특별히 손해 본 것 같지는 않다. 지난번에 남산타워를 갔으니, 오늘은 또 다른 서울의 상징, 63빌딩에 가보기로 했다. 뭔가 데이트 코스가 이상한 것 같긴 하지만, 뭐, 선배가 좋다니까 아무래도 좋겠지. 근데 고소공포증 있다고 안했었나.
“그럼, 갈까요?”
“63빌딩에는 자물쇠 채우는 곳 없을까?”
“하나면 됐지 뭘 몇 개나 채우려고 그러세요.”
“지난번에는 거짓말으로 고백하고 채운 거잖아. 이번에는 제대로 고백했으니까, 하나 더 채워야지.”
“뭘 그런걸 따지세요.”
“싫어. 따질 건 확실하게 따져야 하는 법이야.”
하아. 한숨을 쉬고는 나는 선배에게 말한다.
“알겠어요. 자물쇠 하나 더 채워드리죠. 잠깐만요.”
내가 귓속말을 할 것처럼 다가오자, 선배는 고개를 돌리려고 한다. 그 빈틈을 노려, 선배와 얼굴을 더욱 가까이 한다.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 감았던 눈을 뜨자, 선배는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경악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얼굴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빨간 것 같다.
“어때요. 이번 자물쇠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 너무 나빠졌어.”
“하고 싶은 건 하고 솔직하게 살기로 했거든요.”
선배는 여전히 불만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뒤에 숨은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선배에게 손을 내민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갈까요?”
선배는 잠시 내 손을 바라보다가, 결국 포기한 듯이 웃어 보이며 손을 내민다.
“알았어. 이 자물쇠, 절대 안 풀릴 거니까 각오해!”
손을 맞잡은 채, 우리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간다. 자물쇠를 채운 것 때문인지, 가슴의 두근거림이 멎지를 않는다.
이대로 영원히 멎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아! 아파요! 손 꽉 잡지 말아요!”
“선배를 놀리면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전교생의 공포의 대상 소리를 듣는……. 아아아! 진짜 아파요! 항복! 항복!”


~Fin~

댓글 2개:

  1. 퍄퍄; 오지는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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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와...보느라 정말 다 떨려서... 정말 재밋게 봤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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