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라한대]죄수의 딜레마

원본 : http://lightnovel.kr/one/382156
작성 : 2012년 3월 18일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다는 거예요!”
등 뒤에서 후광까지 비추고 있는 여신의 재촉에도,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게 좀…….”
“무슨 소리에요! 당신이 되돌리고 한 마디만 한다면 이 세상은 오늘 멸망하지 않는다고요!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말해왔잖아! 말 하라고! 되돌리겠다고!”
여신님은 한시가 급하다는 듯 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아니 잡고는 외쳤다.
잠시 여기서 상황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자정, 그러니까 오후 12시가 지나면 세계는 멸망한다. 오래된 결정사항이다.
글쎄, 이유를 물어본다면 꽤나 복잡하다. 일단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높은 확률로 오늘 밤을 기점으로 대규모 지각활동의 결과로 화산과 기타 등등이 온 지구를 휩쓸고, NASA는 운석이 궤도를 틀어서는 지구로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으며, 계산대로라면 오늘 자정 언저리에 하필이면 한국, 정확히는 우리 동네 인근에 처박아서 지구를 날려주신단다. 그 외에 교황청 지하에서 발견된 고대 예언서나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예언서, 고대 마야 비문, 피라미드 석판의 상형문자를 모두 해석해도 오늘 새벽이 고비라고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나다.
며칠 전에 나는 삶에 굉장히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빌었다. 이딴 세상 멸망해버려라. 그랬더니 뿔과 날개와 꼬리가 달린 굉장히 로리로리해보이는 귀여운 악마가 튀어나와서는 “어 님 레알? 그럼 멸망시켜드릴까여? 마침 지옥에서도 ‘아 매번 수명 된 인간들 잡으러 수고하기 귀찮은데 걍 싸그리 죽이죠?’ 하는 의견 나오거든요.” 하고 물어보더라고? 난 OK 했지. 중요한 결정인데 그런 식으로 처리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다음날에 갑자기 저런 일들이 터졌다. 인과율이 어떻다나 하는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그런 건 나한테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중요한건 세상이 멸망한다는 사실이다.
“부탁이에요, 당신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요, 지금 당신이 ‘되돌리겠습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지금 이 지구멸망을 없던 일로 하는 대신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드릴게요!”
여신보다는 샐러리걸이 아닐까 싶다. 여신은 계속해서 말했다.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돈이라면 얼마든지, 여자친구? 하렘 좋아요? 좋아하겠죠, 남자니까! 원하는 스타일로 얼마든지 꼬이게 해드릴게요! 원하면 주문생산! 모니터에서 안 나오는 그녀를 이 자리에 이렇게 소환!”
펑, 소리와 함께 여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소에 한 명의 여자애가 서있었다. 멍하니 듣고 있던 나도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 했다.
“리, 린코쨔응!”
잠시 설명, 제 ‘내가 제일 핥고 빨고 하악하악하고 싶은 건 바로 너’ 순위 4년째 1위를 지키고 있는 모니터에서 나오지 않는 제 여자 친구입니다. 린코쨔응(쨔응이 중요하다)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호성군……. 만나고 싶었어……. 이렇게 만나서 너무 기뻐…….”
“으, 으윽…….”
버틸 수가 없다! 배를 버려라! 여신은 내 행복함과 당혹감이 있는 대로 버물어진 표정을 보면서 즐거운 듯 말했다.
“자, 어때요? 이 외에도 원하는 게 있다면 천계에서 뭐든지 서비스, 서비스!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지구멸망은 필요 없습니다. 되돌리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세요!”
린코쨔응도 지원사격을 한다. 그러고보니 일본게임이니 분명 일본어를 써야할 텐데 자연스럽게 그 목소리 그대로 한국어로 말한다. 좋다.
“그래, 호성군. 앞으로는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건 취소해. 응?”
하지만,
나의 손은 그런 린코쨔응을 슬쩍 밀어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여신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물론 린코쨔응도.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어째서……. 아, 혹시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드신 건가요? 그럼…….”
“그만둬! 내 눈앞에서 린코쨔응을 없애지 마!”
“그럼 어째서 거절하는 거죠? 인생 치트키라고요! 멸망해서 다 죽는 것 보다 훨씬 낫지 않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죽을 때까지 가이드 해줄게요! 그래, 죽은 뒤에도 원하면 천국으로 거둬드리죠! 훨씬 낫잖아요!”
물론 좋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왠지 모르겠지만 울먹거리는 표정의 린코쨔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나는 여신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만난 사람이 있거든.”
세계가 멸망하게 된, 그러니까 제한시간이 줄어들던 그 때에, 나는 그 애를 만났다.
나랑 마찬가지로 세상에 의욕이 없던, 죽고 싶어 하던 그 아이.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이제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세상을 내가 부수게 됐는데 뭐가 두려워!
그래서 그 아이의 힘이 되어줬다. 얼마 안남은 시간을 충실하게 보냈다. 그러다보니 세상이 멸망한다는 게 오히려 아쉬워질 정도가 되었다. 후회했다.
“그럼 더더욱 이해가 안 되잖아요!”
여신의 외침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그 애는 세계가 멸망하는 게 더 좋다고 했거든.”
‘저기, 호성군…….’
‘응?’
‘호성군과 있으면 역시 즐거워……. 그러니까 더더욱, 함께 하고싶어. 영원히 헤어지지 않도록.’
‘……응. 알았어.’
“그래서, 모두에게 미안하고 린코쨔응에게도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빌 수가 없어.”
“당신이란 사람은…….”
린코쨔응도, 여신도,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세상을 모두 파괴해도 좋아. 다 죽어도 좋아. 멸망해도 좋아. 나까지 죽어도 좋아. 하지만 그 애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 오오, 이것은 사랑.
나는 드르륵 하고 창문을 열었다. 세계를 향해서 선전포고라도 하도록. 어차피 오늘 밤이면 모든 게 끝나니까!
심호흡을 하고, 외치는 대신 다시 숨을 내뱉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으니까. 세계 멸망의 날에 눈이라니, 로맨틱하다.
“……아쉽네요. 그렇게 됐다니.”
등 뒤에서 여신의 진심으로 아쉽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아쉽다. 차라리 좀 더 일찍 그 애랑 만났다면 그 애의 어둠을 지워줬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입김을 내뱉으며,
하늘을 보았다.
운석이 없었다.
하늘에 보일, 여기로 향하는 거대한 운석이 없었다.
“……어라?”
“호성군, 전화 왔어.”
린코쨔응의 말에 나도 모르게 진동모드로 부르르 떨리고 있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시선은 하늘에 고정된 상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마자 목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애의 목소리였다.
“무, 무슨 일이야?”
“어떻게 해! 완전 대박이야! 진짜 대박 레알 대박! 꺄악! 꺄아악!”
음, 뉘양스가 잘 전달이 안 되어서 설명 좀 하자면, 꺄아아악 이라고 한 건 비명보다는 환희의 절정에서 내는 웃음소리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서 더더욱 놀라웠다. 그 아이가 이렇게 웃는 건 본 기억이 없다. 들은 기억은 물론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
“인피니트……. 인피니트 오빠들이! 지금! 전부 내 앞에서 고, 고고고, 고고고고고, 고백을……! 꺄아아악!”
“여보세요?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전부랑 사귀기로 했지! 다들 좋아하더라고! 아, 정말 대박이야! 아, 안 믿을지도 모르는데 꽃미남 신이 나타나서는 앞으로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하더라고! 나한테 이런 기회가 오다니! 세상은 너무 멋져! 계속 이대로 살고 싶어!”
“어, 응? 잠깐, 그럼…….”
“예전에 이야기 한 세계멸망 이야기, 들려줘서 정말 고마워! 하지만 너도 행복하게 사는 편이 나을 거야! 그럼 이만! 오빠들이 불러서! 연락 뜸해져도 이해해! 안녕!”
뚝. 멋대로 끊겼다. 겨우, 정말 힘들여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고르지 그랬어.”
여신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아냐, 구름사탕이야.”
“어, 어떻게…….”
“이래봬도 신이거든? 사람 마음 읽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자유의사 존중 때문에 강제는 못하지만, 읽자마자 여자애한테도 보내놓길 잘 했네.”
“어, 잠깐…….”
“마침 그 쪽도 같은 소원을 빈 상태였고, 같이 접수됐었나봐. 니들 약속인지 뭔지 때문에 멸망의 날이 오늘이었는데, 한 쪽이 포기해서 더블계약은 취소. 세계는 평화로워졌습니다. 박수. 짝짝짝.”
여신은 담배(아니 구름사탕)을 입에 문 채로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 말인즉슨…….
“응. 멸망 안 해.”
“…….”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 열심히 살아봐. 린코, 가자.”
“네.”
“자, 잠깐만! 알았어! 되돌릴게! 지구멸망따위 필요 없다고!”
“버스 떠났어요. 그러니까 빨리 했었어야지. 죄수의 딜레마라고 아니?”
“리, 린코쨔응!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가지 마!”
“아까는 나보다 그 아이가 소중하다면서? 흥! 바보!”
“아, 안 돼! 잠깐만, 잠깐만 좀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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