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9일 금요일

마왕과 공주와 용사의 사정

작성 : 2012년 1월 29일



“후후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군, 용사여…….”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로 마왕은 비웃었다. 검은 기운을 온 몸에서 일렁거리며, 계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마왕. 과연 마왕다운 패기가 넘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질 수는 없다. 나는 애써 이를 보이며 웃고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 여유가 있는 웃음도 오늘까지다, 마왕.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결판을 짓도록 하자.”
“그래. 의견이 일치하는군. 나도 마침 긴 싸움에 지친 차다. 오늘에야말로 용사인 네 녀석을 쓰러트리고, 진정한 마왕의 힘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마왕은 검은 기운을 더욱 강하게 한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온 몸을 하얀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이 싸움만큼은, 질 수 없다. 지금까지 이어진 수많은 싸움. 그리고 계속되어 왔던 패배. 얼마나 많은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슬프게 지켜봤단 말인가. 그 굴욕의 날을 오늘에야말로 끝내도록 하겠다!
“간다, 마왕!”
“와라! 용사여!”
외침과 동시에, 나는 검을 휘두르며 마왕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857회 저녁 메뉴 결정 대전에서, 나는 마왕에게 패배했다…….
 
“약속대로, 오늘 저녁도 제대로 야채도 챙겨 먹는 거다?”
쓰러진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교복 차림의 마왕은 손을 내밀었다. 전투가 끝났다는 의미로 검은 기운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차마 잡지 못하고 땅을 후려치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크흑……. 미안해, 저녁상에 올라올 예정이었던,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되기 위해 쓰러진 돼지야……. 소야……. 닭이야……. 이 모든 게 내가 모자란 탓이야……. 모두, 나를 비웃어줘…….”
“또 오버한다. 정말, 언제쯤 돼야 철들래?”
내 중얼거림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마왕이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있던 앞치마를 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저녁이 나와야지 내가 기운이 난다는 걸 아니까.
“야채도 잘 챙겨먹어야 건강해지지. 너는 용사잖아? 몸을 신경 써.”
“흥. 용사는 무슨.”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사람들의 희망을 짊어진 게 용사라고 아저씨도 늘 말했잖아?”
“그 양반이 그렇게 말해봤자…….”
계속되는 내 투덜거림에 돌아보며 웃어주고는, 마왕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꺼내 식칼을 들고 저녁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부엌일을 도와준다고 해도 시켜주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나는 투덜대며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TV소리에 섞여서 마왕이가 검은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게 들려온다.
내 이름은 김용사. 참으로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인류의 희망과 미래를 책임 진 진짜 용사. 그리고 저 녀석은 이마왕. 역시나 참으로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인류의 절망과 멸망을 가져올 진짜 마왕이다.
그리고 덧붙여 내 소꿉친구이자,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에 올라온 지금까지 같은 반에 다니고 있는 친구이기도 하다.
참 기묘한 조합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 세상은 절망과 비탄에 빠져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왕과 마족들. 무슨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 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실제로 마계에서 나타나 세계정복을 외치며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 앞에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흉악한 마족과 그들을 통솔하는 극악무도한 마왕은 총이고 탱크고 전투기고 미사일이고 나발이고 온갖 첨단무기를 퍼부어도 쓰러질 생각을 못했고, 인류는 마왕의 지배를 받아들이기 직전이었다. 말 그대로 세계정복이 지천이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검을 들고 일어섰다. 총 아니다 검이다. 선택받은 용사만이 들 수 있다는 검을 들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마왕의 독재와 억압에 저항하는 동료들과 기나긴 싸움에 나선 것은……. 뭐 다들 짐작하겠지. 울 아버지다.
절망에 빠져있던 인류는 아버지의 활약에 다시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세력을 재편하고, 기운을 내 절망에 이기기 위해 마왕과 마족에게 다시 한 번 저항을 시작했다. 장편 소설이도 열 몇 권은 나올 것 같은 기나긴 싸움 중에 용사인 아버지와 마왕은 몇 번이나 검격을 교환했고, 마침내 최후의 싸움에서 결판을 지었다.
그 결판이 참으로 가관이다.
아버지와 싸우면서,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인류를 보면서 마왕은 인류의 가능성을 엿봤고, 나름대로 정이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용사인 아버지와 사람들은 마족들과 싸우면서 그들이 마계에서 나온 이유, 그리고 그들도 알고 보면 아예 극악한 악마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 마지막 싸움에서 용사와 마왕은 화해했다. 인류와 마족은 마침내 손을 잡은 것이다.
감동적인 장면을 끝으로, 사회는 빠르게 재편되어갔다. 전화는 힘을 합친 두 존재에 의해서 금방 사라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절친이 된 마왕은, 일가를 데리고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래. 마왕이의 아버지는 마왕이다.
싸움을 끝내고 은퇴한 두 분이었지만, 세상에는 용사와 마왕이 필요했다. 화해의 의미이기도 하고, 뭔가 시스템적인 요인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그 결과 자식인 나와 마왕이가 각자 2대 용사, 2대 마왕으로 취임했다.
“저녁 다 됐어~ 자, 자리에 앉으세요.”
웃으면서 말하는 마왕이는, 외견상으로는 별달리 마왕답지도 않다. 외형적인 특징이라고 해봤자 앙 쪽 관자놀이에 난 앙증맞은 뿔하고, 교복 치마 사이로 달랑거리는 꼬리 정도가 다다. 어릴 때 같이 목욕하면서 봤던 바에 따르면 날개도 있었는데, 눈에 안 띄는 걸 보면 별로 크지 않은 것 같다. 한 때 그거 이야기 했다가 그날 싸움에서 정말 개 패듯이 얻어맞았기 때문에 다시는 꺼내지 않지만. 그 점만 빼면 마왕이는 평범한 여자애랑 다를 게 없다. 뭐, 나이에 비해서 키랑 가슴은 작지만…….
휙, 하고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내 눈 앞으로 식칼이 스쳐지나갔다.
“또 뭔가, 실례되는 생각 했지?”
“……그럴 리가.”
분한 듯 눈을 부라리는 마왕이에게 아니라는 의미로 손을 휘저어주자, 마왕이는 흥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정말로 알고 있겠지만. 까탈스럽긴. 아무래도 저 뿔은 일종의 안테나인지 가끔 이런 날카로운 공격을 날려 온다.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는데. 나야 용사니까 괜찮다고 해도 일반인은 즉사라고.
자리에 앉자, 예상외랄까, 예상대로랄까의 광경이 보였다.
“오, 고기도 있네?”
“너 고기 없으면 밥 안 먹잖아.”
놀라는 내 목소리에, 마왕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과연 소꿉친구, 내 식성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러면 기분이 팍 풀릴 거라는 것도.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날렸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
마왕이도 웃으며 식사를 시작한다. 잠시 후 고기만을 입으로 옮겨 우걱거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마왕이는 한숨을 쉰다.
“정말. 약속했지? 야채도 제대로 먹는 거다?”
“소는 풀을 먹고, 나는 소를 먹으면 내가 풀을 먹을 필요는 없잖아.”
“그런 궤변 하지 말랬지?”
찌릿 하는 눈빛을 날리는 마왕이. 그 눈빛에 쫄아서 나는 결국 이기지 못하고 샐러드도 입에 넣는다. 화난 눈빛이 누그러든다.
“참 잘했어요.”
“니가 내 누나냐.”
“누나는 누나지. 두 달 먼저 태어난걸.”
어째서인지 가슴을 펴면서 대답하는 마왕이. 그래봤자 그 빨래판 같은 가슴이 더 도드라질 뿐인…….
“끄악! 내 눈!”
“흥이다! 일부로 아까는 봐줬더니!”
날아온 젓가락이 눈에 박혔다. 임마! 내가 용사가 아니었다면 이거 실명이야 실명! 얼마나 끔찍한 광경일지 생각이나 해봤냐! 떠올리면 밥맛이 싹 사라진다고! 힐링 주문으로 겨우 눈을 회복시키자, 마왕이는 토라져서는 흥흥 거리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계속한다. 두고 보자.
“그런데, 아저씨는 언제 돌아오신대?”
내 분노를 읽었는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물어보는 마왕이에게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UN 총회랑 아직 싸움을 계속하는 지역을 순방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앞으로도 한달은 걸리지 않을까?”
“그럼 우리 아빠랑 대충 비슷하게 돌아오시겠구나.”
“너희 아버지도 어디 가셨어?”
마왕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마계에서 이민 오는 사람들 심사랑 그쪽 일 좀 보고 오신다고 하셨거든.”
용사와 마왕 자리는 나와 마왕이가 받았지만, 아직 미성년자인 고로 대리로서 부모님들이 아직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부모님은 자리를 비우시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우리 집 저녁 식사는 마왕이가 계속 책임지고 있고.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는 늘 그래왔듯 내가 해결하고, 마왕이는 가방을 챙겼다.
“그럼 나 가볼게. 숙제 잘 해와? 내일도 깨우러 오겠지만, 너무 늦게 자지 말고.”
“네이 네이.”
TV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 마왕이는 풋 하고 웃는다.
“그럼, 내일 보자.”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그래봤자 옆집이지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늘 그렇듯, 매일 하는 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온 일.
이런 매일이 계속될 거라고, 이때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용사야,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선생님 오셨어.”
“냅둬……. 어제 게임 하느라 못 잤단 말이야…….”
“정말, 그러니까 일찍 자라고 했잖아. 아침에 깨우는 데도 고생했더니…….”
“아 몰라……. 어차피 아침 조회에 하는 말이야 뻔하잖아……. 조금만 자게 해줘…….”
그래. 아침 조회 때 하는 말이야 뭐 뻔하지 뭐. 들을 필요도 없다. 차라리 잠을 5분 더 자겠다. 뭐 수업시간에도 자겠지만, 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아……. 소리가……. 멀어진다…….
“에, 오늘은 전학생을 소개하겠다.”
선생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랑 마찬가지로 아침 조회 시간의 꿀 같은 단잠을 만끽하던 아이들이 우루루 고개를 든다. 마왕이가 ‘내가 깨울 때는 미동도 안하더니…….’ 하고 투덜댔지만 거기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전학생? 들은 기억도 없는데?
“음, 알다시피 우리 반에는 용사와 마왕이 있다. 그에 맞추어서 세 번째 중요한 사람이 전학 왔다. 높으신 분이니까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나랑 마왕이를 힐끗 보고는 저게 중요한 놈이냐는 듯 코웃음을 친다. 뭐 이것들아. 내가 용사라서 불만 있냐. 그보다 중요한 인물이 전학이라니 무슨. 예의에 벗어난다니 무슨. 별 관심 없다. 애당초 전학생에 대한 중요한 데이터가 빠졌잖아. 남학생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든다.
“뭐냐.”
“여잡니까?”
“여자다.”
이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환호하는 나를 기점으로 반 절반 가까운 남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여학생들의 눈빛이 아프지만 상관없어! 하지만 아직 중요한 데이터 하나가 빠졌다. 그 순간 다른 남학생 하나가 다시 손을 든다.
“예쁩니까?”
“예쁘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다른 남학생들도 나름대로 기쁨을 표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주먹을 부딪치며 기쁨을 나눴다. 전학생! 여자! 예쁘다! 이걸로 끝 아냐? 아, 올해는 성공이야. 우리는 이겼어. 히히덕거리는 나를 마왕이가 눈에서 빔이라고 내뿜을 기세로 노려봤지만, 반에서 쐈다가는 오발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자제하는 모양이었다. 저녁메뉴가 부실해지겠군. 풀만 나올지도 몰라. 하지만 괜찮아! 예쁜 전학생이 왔으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견딜 수 있다. 안되면 마왕이 돌아가면 라면이라도 끓여먹지 뭐.
“다들 진정해라. 그럼, 들어오세요.”
어째서인지 존댓말로 전학생을 부르는 선생님. 그 목소리에 맞춰서 교실 앞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
그리고 검은 양복의 우락부락한 사내 두 명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
반의 환호하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시베리아로라도 옮겨진 것처럼 싸하게 식었다. 뭐지 이건. 신종 조크인가. 전혀 웃기지 않은데.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환호하던 우리의 자세가 그대로 굳는다. 검은 양복 사내들은 그 웃긴 자세에 한 번 웃어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표정하게 교단 양쪽에 서있었다. 마왕이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 쳐다본다.
“저기, 선생님. 이게 어찌 된…….”
용사로서, 반의 남학생 대표로서, 인류의 대표로서 경악과 분노를 담아 물어보는 순간, 열린 교실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금발의 미녀였다.
그걸로 모든 것이 설명될 것 같은, 그런 여학생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세상에는 길게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그 원래의 느낌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있다. 저 여학생이 그런 대표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하는 것만으로도 백과사전 급으로 두터운 책을 두 권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괜히 그러면 오히려 저 압도적인 외모를 깎아먹을 것 같다.
그냥 말 그대로,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그려오던 미소녀 그 자체였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흔해 빠진, 아무 특징도 없는 교복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드레스처럼 보이는 그 여학생은 치마 스커트를 기품 있게 살짝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목소리도 무슨 천상의 목소리의 현실화 같다.
“오늘부터 이 학교에 다니게 된 최공주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이름에도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뭐랄까, 보통 이름이 깨면 사람도 깨 보이기 마련인데, 저 여학생은 사람이 워낙 말도 안 나오게 생겨서 그 이름까지 아름답게 느껴졌다.
“최공주양은 인류를 대표하는 공주님으로 선택받은 학생이다. 용사랑 마왕과도 앞으로 볼 일이 많으니 일부로 전학 왔다고 한다. 예의에 어긋남이 없게 행동해라.”
나는 지금 남학생들이 잡고 있는 자세가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랐다. 녀석들은 방금 전 나와 함께 잡은 바보 같은 자세들을 모두 풀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신사인 것처럼 단정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래, 실물로 보니 하도 압도적인 외모라서 잊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도 있었지.
마왕이 인류와 평화 협정을 맺으며 내세운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인류를 대표하는 왕족의 선택이었다. 들어보니 그것도 용사, 마왕처럼 시스템의 일부로서 상징적인 의미로서 꼭 필요하다나 뭐라나. 아무래도 마왕 아저씨가 살던 마계라는 곳은 꽤나 전근대적인 장소인 모양이었다.
문제는 현대 사회는 보편적인 인류 평등을 구현했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일가 하나를 선택해서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왕족으로 삼으라니, 누구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용사인 아버지와 인류를 대표하시는 높으신 분들은 묘안을 내놓았다. 사람들 중에서 특별한 몇 명을 뽑아서, 그들을 ‘상징적인’ 왕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굳이 일가일 필요는 없다. 요컨대 왕과 왕비, 왕자나 공주만 있으면 문제는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결과로 선발된 공주는 정말로 압도적이었다. 선발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이 ‘아, 이 애는 인류를 대표하는 공주로서 손색이 없다.’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나. 가끔 TV나 그런 데에서 나올 때 마다 ‘와, 정말 예쁘구나.’ 하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벌어진 턱이 닫히지를 않는다.
“그런데 선생님, 그 용사라는 분과 마왕이라는 분은 어떤 분들인가요?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아, 그래. 그걸 깜빡했구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선생님이 갑자기 존경스러워 보인다. 저런 여자애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니. 앞으로 말 잘 들어야겠다. 선생님은 손가락을 들어 나와 마왕이를 가리켰다.
“에, 저기서 입을 흉할 정도로 벌리고 괴상한 포즈를 잡고 있는 게 용사인 김용사고, 그런 용사를 노려보고 있는 뿔난 여자애가 마왕인 이마왕이야. 마왕아, 앞으로 좀 나와라. 용사 너도 그만 그 바보 같은 자세 풀고 앞으로 나오고.”
“네? 네.”
마왕이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게 들킨 게 창피한지 움찔 하고는 교단으로 나갔다. 나도 겨우 경직에서 풀려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지나가는 사이에 친구들이 ‘이런 놈이 용사라고…….’ ‘좋겠다. 부럽다…….’ 등등의 말을 하는 게 들려왔지만, 내 시선은 공주에게 고정되어서 반응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나가는 사이, 이미 공주와 마왕이는 먼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당신이 마왕이시군요. 앞으로도 인류와 마족의 평화를 위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요.”
“네? 네……. 자, 잘 부탁드려요. 아, 아니, 한다.”
마왕이는 손을 내미는 공주에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흠, 아무래도 마왕으로서 존댓말은 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공주가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자, 마왕이는 더욱 당황했다. 아무래도 여자애들이 보기에도 외모가 좀 심하게 압도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왕이와 악수가 끝나고, 공주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우와,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압도적이다. 주눅이 들 정도다. 등 뒤에서 후광이 비추는 것 같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가정하며, 용사다운 멋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가슴을 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용사인 김용사야. 앞으로 잘 부탁…….”
“용사님!”
그리고 공주는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
으헉?! 믿기지 않을 정도의 행복감에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심장은 전력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파열할 것 같은 기세로. 보드라운 몸의 느낌. 꽃다발을 코에 바로 가져다 댄 것 같은 향기로운 냄새. 겨우 안긴 것뿐인데 무슨 천국에라도 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의식이 혼미해질 것 같다. 나는 손을 부들거리며 이걸 공주의 등에 올려야 할지,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야 할 지 엄청나게 고민했다. 슈퍼컴퓨터 정도로.
“…….”
그 순간 어째서인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마왕이랑 눈이 마주쳤다. 에, 그게, 눈에 빛이 점점 고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 정말로 눈에서 빔을 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공주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냈다(엄청나게 힘들었다. 천국을 스스로 밀어내는 격이었으니까). 공주가 왜 그러는지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봤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이대로 다시 꽉 끌어안고 싶어지잖아!
“에, 그러니까……. 공주……님?”
일단은 존칭으로 불러봤다.
“어째서, 갑자기 저에게는 포옹을……?”
“……용사님,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몰라요……!”
공주는 어째서인지 내 물음에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안기려고 했다. 잠깐! 스톱! 이대로 평생도록 안아줬으면 좋겠긴 하지만, 오발사고 나면 끔찍한 꼴을 본다고! 마왕이 너도 눈에서 빔 안 끄냐! 나는 다시 애써 공주를 밀치며 말했다.
“아니, 일단 저희는 초면이고…….”
“제가 이 날을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데요!”
공주는 눈물을 흩뿌리며 결국 다시 나에게 안겼다. 반 아이들이 모두 입을 떡 벌리고 이쪽을 집중한다. 나는 이제 임계치를 돌파해서 내 머리를 향해 빔을 발사하려고 하는 마왕이를 말리려 격렬히 양 손을 흔들었다. 그 사이 공주는 작지만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약혼자인 당신을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데요…….”
“약혼자?”
“약혼자요?”
“약혼자라고?”
반 전체가 그 한마디를 되물었다. 일단 마왕이가 놀라서 눈에서 빔 모드를 취소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꺼내서, 저장된 번호를 꾹 누른다. 잠시 기다리자, 뚜르르 거리던 통화음이 귀를 찌르는 듯한 듣기 싫고 복잡한 암호 코드로 바뀐다.
“Hello?(여보세요)”
“저에요!”
“You need to get permission to connect this hotline. May I check your admission code?(이 핫라인으로 연결하려면 허가가 필요합니다. 승인 코드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다 필요 없고 당장 아빠 바꿔!”
내 외침에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여자의 꼬부랑말이 끊기고, 다시 암호 코드가 들려온다. 잠시 기다리자 전화가 연결됐다.
“이 회선으로 연결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빠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시끄러워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말해요! 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주랑 약혼 같은 게 되어있는 건데요?”
귀찮다는 듯 대답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잠시 침묵.
“아, 오늘이었구나, 공주님 전학이.”
“역시 알고 있었구만!”
내 외침에 아버지는 귀가 아프다는 듯 말했다.
“아직 귀 안 먹었다. 솔직히 너도 싫지는 않을 거 아냐?”
“그야 저렇게 예쁜 여신님이랑 약혼이 되어있으니 땡큐 베리 감사…….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어 있냐고요!”
아차, 순간 얼굴이 풀어졌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공주랑 약혼 되어있는 건 용사의 기본 아니냐?”
“기본이고 자시고…….”
내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아버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사는 인류의 희망과 미래의 대표. 그리고 공주는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나와 공주는 인류 전체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비밀리에,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나와 공주의 결혼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인류의 희망의 대표와, 인류를 상징하는 사람. 둘이 결혼함으로서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생긴다는데 날 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그래도 내 의견 정도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너도 내 아들이니까 좋아할 줄 알았지.”
“…….”
“싫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됐잖아.”
그런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그 순간 전화기 너머로 뭔가 꼬부랑말이 들려왔다.
“아무튼, 아빠 일하는 중이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럼 끊는다.”
뚝. 통화가 끊겼다.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바라봤다. 솔직히 복잡하니까. 세계 제일의 미소녀가 나랑 만나서 기쁘다면서 포옹까지 해오고, 약혼자라고 하는 데 싫어할 놈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냐. 나도 물론 좋다.
하지만 한 마디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잖아. 솔직히 갑작스럽다고.
“에휴.”
아무튼, 일단은 교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화장실을 나와 교실로 향하자, 이미 복도 전체가 인파로 만원이었다. 다들 우리 교실이 목표인 모양이었다. 그 유명한 공주가 전학 왔다는 것에 전교생이 구경 온 모양이었다. 귀찮기는. 어차피 앞으로 매일 볼 텐데. 한숨을 쉬며 인파로 다가가는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저기 있다!”
“용사다!”
누구, 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파 쪽을 바라보자, 어째서인지 남학생들의 살기어린 시선이…….
“죽여라!”
그리고 분노한 군중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세상은 결국 노력, 우정, 승리가 아니라 혈맥 빨이라 이거냐!”
“뭐? 공주랑 약혼자? 저 세계 제일의 미소녀로 소문난 공주랑?”
“나……. 전학 왔다는 소리 듣고 꿈에 부풀었는데……. 이럴 때는 평범한 남학생인 나도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런데…….”
“우리의 꿈을 시작부터 클라이막스로 몰고 가 산산조각 내다니!”
“태어나면서부터 약속된 승리의 인생이라 이거지!”
“오늘 네놈의 인생을 패배로 끝마쳐주겠다!”
혼에서부터 느껴지는 비통한 외침을 날리며 달려오는 남학생들. 가만히 있었다가는 정말 교내에서 오체분시라도 당할 것 같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용사가 도망간다!”
“매복조 투입!”
그리고 외침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교실 문이 열리며, 대걸레나 빗자루, 심지어 의자를 든 남학생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적이 나타났다!
“죽어라아아아아아!”
“젠장! 이래봬도 용사! 네놈들 쫄따구 따위에게 당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대화로 교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재빨리 몸에 하얀 기운을 두르며 전투모드로 들어갔다. 손에 용사의 검이 나타나 잡히자마자 머리로 날아오는 대걸레를 막고 검을 휘둘렀다. 남학생 A는 255의 데미지를 입었다!
“크악!”
“친구들에게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다니! 그러고도 용사냐!”
“분하다……. 솔로로 태어나, 솔로로 죽는구나……. 약혼자도 있는 용사 따위에게!”
“안 죽였거든?! 힘 다 빼고 휘둘렀거든?! 검신으로 쳤거든?!”
“철수의 원수!”
외치는 사이 남학생 B는 빗자루를 휘둘렀다! 용사는 5의 데미지를 받았다! 5라고 쳐도 이거 꽤나 아프다. 있는 힘껏 휘두르는 빗자루에 맞아봐라. 구체적으로는 칼을 잘못 장비해서 칼날을 쥔 거랑 동급으로 아프다. 에이씨!
“저리 비켜!”
용사는 충격파를 날렸다! 눈앞에서 길을 막던 남학생의 무리가 튕겨나간다. 열린 길을 통해 도주를 계속하지만, 남학생들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아무래도 오늘 레벨 업 좀 제대로 할 것 같다.
“솔로의 원한을 받아라!”
“파이어 볼!”
“약혼자 있어서 좋냐!”
“라이트닝 볼트!”
“소꿉친구도 있는 주제에!”
“아이스 볼트!”
“이 녀석! 복도에서 달리지 마! 그러고 보니 용사 너, 영어 점수가 이게 뭐…….”
“메테오 스트라이크!”
폭연과 날아가는 선생님을 뒤로 하고, 눈물을 흩뿌리며 도주를 계속한다. 아, 슬프다. 어째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쓰러트리면서 나아가야만 하는 걸까. 이것이 바로 용사의 길인 걸까. 세상을 모두 적으로 돌리면서도 정의와 용기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걸까. 아, 이 저주 받은 운명이여…….
“…….”
그리고 길이 막혔다. 복도 끝. 창문을 열고 도망치는 방법 외에는 선택지가 없지만, 슬쩍 밖을 내다보자 이미 밑에서 몇몇이 대기하고 있다. 저벅거리는 발걸음에 고개를 돌렸다.
“계획대로 궁지에 몰렸군, 용사……. 이 함정을 파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어왔던가…….”
“지금까지 쓰러져간 모든 솔로 동지들을 위해서라도, 오늘 반드시 네놈의 숨통을 끊어주고 말겠다!”
“잠깐 기다려! 이건 모두 오해다! 우리 교육받은 문명인답게 대화로 상황을 해결하자!”
복도를 가득 매운 남학생들을 향해 외쳤지만, 분노로 가득한 놈들은 아무래도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동료가 쓰러졌다는 분노에 비통함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수많은 우리 동료들을 거리낌 없이 쓰러트려놓고, 이제 와서 대화라고?”
“네놈이 어떻게 인류의 희망과 미래의 상징이냐! 절망의 상징 같으니라고!”
“인생은 혈통 빨이 아니라는 걸 오늘 이 자리에서 증명해주마!”
저벅저벅. 각종 무기를 들고 한 걸음씩 다가오는 녀석들의 무리.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아무래도 강행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은 별로 좋지 않은데……. 너무 많은데다 다들 흥분 상태라 힘 조절을 제대로 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오체분시라도 당할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자세를 잡았다.
“다들 멈춰!”
그 순간 들려온 외침에, 모두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리고 홍해의 기적처럼 열리는 인파를 뚫고 걸어오는 건…….
“마왕님!”
“마왕님이시다!”
“마왕아!”
놀라는 아이들의 외침과, 반가운 나의 외침. 그래, 이 녀석이 왔다! 전교 최강, 아니 세계 최강의 마왕님이 나타났다! 나는 안도의 마음에 검을 내렸지만, 어째서인지 저 녀석,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
“……용사야?”
“네, 넵?”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해버렸다. 마왕이는 검은 기운을 두른 채로 나에게 낮게 말했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알 수 있게 설명 좀 해줄 수 있을까?”
“…….”
아무래도 화난 것 같다. 왜 화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노한 남학생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무래도 저 놈들의 히든카드였던 모양이다.
“저기, 그러니까, 그게…….”
“그게?”
용사로서의 날카로운 본능이 속삭인다. 구라 까면 진짜로 죽는다고. 그래서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애써 마왕이를 진정시키려 하며 말했다.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
잠시 침묵. 아무래도 이쪽도 대화로 교섭하기는 그른 것 같다. 왜 화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패배는 기정사실이지만, 용사로서 마왕에게 검을 내릴 수는 없으니까.
“하아.”
하지만 마왕이는 저벅저벅 걸어와, 내 옆에 나란히 서 아이들을 마주봤다.
“마왕님?!”
“어째서?!”
놀라는 아이들의 외침. 나도 놀라서 마왕이를 바라봤다. 마왕이는 한숨을 쉬고는 늘 그렇듯 누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거지? 나중에 들어줄게.”
“……고마워.”
나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마왕이는 내 미소에 싱긋 웃었다.
“빨리 애들 진정시키고, 같이 도시락 먹자.”
마왕이는 용사인 내 건강을 챙긴다면서 급식도 못 먹게 하고 매일 도시락을 싸주거든.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앞의 아이들을 바라봤다.
“대, 대장님! 어떻게 하죠?! 마왕님께서도 등을 돌린 이상, 승산은…….”
“…….”
아무래도 대장인 것 같은 우리 반 반장이,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마주본다. 걱정과 절망을 담은 표정들. 반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오늘이 솔로로서의 마지막 날이로군 하고 생각하며 잠에서 깨진 않아. 하지만 난 그것이 저주라기보다는 사치라고 생각해. 언젠가는 커플이 될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은 일종의 자유니까. 짐을 챙기기…… 딱 좋은 때지. 화력으로, 능력적으로 열세다. 미친 짓이지. 자살이나 다름없는 싸움이야. 하지만 여기서 수십 년이나 솔로들을 지켜본 학교 기둥과 벽들은, 이 일로서 우리를 기억할 거다. 왜냐하면 수많은 악몽들 중에서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악몽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대지가 내뱉은 숨과 같이 앞으로 나아갈 거다. 마음에는 용기를 품고, 눈앞의 단 하나의 목표를 보며……. 우리는, 그를, 죽인다.”
“…….”
“누가 나와 함께하겠나!”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싸우자! 죽이자! 우리는 무적의 솔로부대다!”
“인생의 승리자에게 정의의 철퇴를 날리자!”
아무래도 연설 한 방에 사기 충전한 것 같다. 나와 마왕이는 자세를 잡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때 들려온 천상의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돌렸다. 인파 뒤쪽에서부터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들리면서, 인파가 반으로 쪼개진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싸움을 그만 두세요!”
공주와 두 명의 검은 양복의 보디가드.
“고, 공주님…….”
“공주님이시다…….”
후광이 나오는 것 같은 외모에 물러서는 아이들. 공주는 그런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폭력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합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공주의 위엄 넘치는 표정과 태도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확실히, 용사님은 제 약혼자입니다. 하지만 아마 용사님은 오늘 그 사실을 아셨을 거예요. 이건 지금가지 비밀로 해왔던 사항이니까요. 그러니까 용사님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말 그대로 사실을 고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문다. 아니 사실 맞지만. 나를 바라보는 마왕이. 나는 사실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등장에 표정이 굳었던 마왕이의 표정이 약간은 누그러진다. 하지만 잠시 후, 반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공주님. 그렇다고 해서 저 녀석이 공주님의 약혼자인건……. 고, 공주님은 저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녀석도 제법이다. 이 상황에서 말할 수 있다니. 녀석의 중얼거림에 웅성거림이 다시 커진다.
“그래요! 약혼자는 맞다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사실은 공주님도 저 녀석이 싫으신 거죠?”
“약혼은 파혼이죠?”
“대답해주세요, 공주님!”
“그……. 그게 말입니다.”
공주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볼을 붉게 물들이며.
“저, 저는……. 연모하고 있습니다만……. 용사님이 어떠신 지는…….”
“…….”
잠시 동안의 침묵. 그리고…….
“죽여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뼛조각 하나도 남기지 마라아아아아아아아!”
분노에 찬 외침이 더욱 강해졌다. 몇 명인가 선발대가 공주를 뚫고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공주의 말에 얼어붙어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굳어졌다. 마왕이가 내 앞으로 나아가며 싸울 준비를 한다.
“그, 그만 두세요!”
공주의 외침에도, 아이들은 계속해서 달려온다.
“그, 그만 두시지 않으면, 저, 울어버릴 거예요…….”
절그럭, 절그럭. 녀석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다.
“고, 공주님. 울지 마세요.”
“저희가 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누구냐! 공주님이 연모하는 용사를 죽이자고 했던 녀석! 나와라! 자아 비판해라!”
“저는 공주님의 반역자입니다. 인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무릎을 꿇는 반장. 그를 시작으로 모두가 공주를 향해 무릎을 꿇는다. 마왕이는 상황이 제대로 판단되지 않는지 고개를 바쁘게 움직이며 아이들과, 공주와,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배어나온 눈물을 훔쳐내며, 공주는 반장을 향해 다가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위해 분노해주시는 마음 잘 알았어요. 앞으로 용사님과 친하게 지내주세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공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용서라니요. 이제 저희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잖아요?”
“공주님…….”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반장. 그를 시작으로 아이들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공주는 그들을 향해 웃어주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 용사님?”
“네, 네?”
또 나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해버렸다. 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는…….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만……. 용사님의 대답은 어떠신가요?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울고 있던 전원이 나를 노려본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수준의 분노가 아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진짜로 죽는다. 그것만큼은 사실로 느껴졌다.
“저, 저는…….”
나를 노려보는 마왕이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좋아합니다.”
“그, 그럼, 저랑 교제를 허락해주시는 건가요?!”
놀라며 기쁜 목소리로 말하는 공주. 그 목소리와 표정에 두근 하고 심장이 터질듯이 울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공주님.”
“저, 정말이시죠?”
양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먹이기 시작하는 공주.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은 채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니, 오글거린다 어쩐다 할 상황이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인다니까? 공주는 내 행동에 와락 안겨오며 말했다.
“저는, 저는 기뻐서…….”
“풍악! 풍악을 울려라!”
“"왜 이리 풍악 소리가 작은 게냐! 오늘은 즐거운 날이 아니더냐! 풍악! 풍악을 울려라!”
방금까지의 분노를 잊은 것 같이 환호하는 모두들. 나는 나도 모르게 공주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살짝 두드려주었다. 그 행동이 기쁜지 공주는 더더욱 내 목에 안겼다.
“…….”
어째서인지 마왕이 만이, 그 혼란 속에서도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랑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헤헤!”
“…….”
하굣길. 웃으면서 휘파람까지 불면서 날아갈 듯 뛰어가자, 마왕이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세계 제일의 미소녀랑 데이트인데!”
그 뒤. 공주는 이번 주말 자신과 데이트를 해달라고 제안했고, 나는 당연히 OK 했다. 내일 모래, 일요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자고 기뻐하며 물어보는 그 얼굴에 거절할 수 있는 놈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라. 마왕이는 입을 내밀며 말했다.
“아까는 약혼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더니…….”
“그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혼이 되어있다고 하면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좋아?”
“그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세계 제일의 미소녀랑 약혼이 되어있고, 나도 좋아해준다고 하는데 안 좋을 리가 있냐! 아까는 깜짝 놀라긴 했지만, 이제는 기뻐 죽겠어! 아, 드디어 나에게도 봄날이 오는 구나. 지금까지 용사면서 여자 친구도 없냐고 맨날 놀림만 당했는데, 드디어……. 드디어! 나에게도 쨍 하고 해 뜰 날이 왔다고! 이야호!”
저 저물어가는 석양이라도 잡을 듯이 높게 점프를 하며 환호했다. 그래. 아까는 그야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좋은 일이야! 용사라서 귀찮은 일만 그득했는데. 이런 특전 요소가 붙어 나올 줄이야! 용사 일도 하고 볼 일이야. 히히덕 거리는 나를 향해 마왕이가 투덜댄다.
“바보.”
“내가 왜 바보야? 아니지, 지금까지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게 바보지! 하하하! 지금까지 여자 친구 사귀지 않기를 잘했어! 그래, 이때를 위해서 나는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은 거지, 절대로 사귈 수 없어서 사귀지 않은 게 아니라고!”
“…….”
나는 왜인지 침울해하는 마왕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줬다.
“마왕이 너도 어쩌면 마계의 꽃미남이나 그런 놈들이 약혼자라고 나타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 너도 그야 공주에 비하면 좀 딸리긴 하지만 충분이 예쁘니까! 아, 주말 정말 기대된다!”
“…….”
“그래! 오늘은 진수성찬으로 준비해줘! 소꿉친구가 여자 친구가 생긴 날이니 충분히 축하해줄 만하지? 오늘은 그놈의 풀 말고 고기로 좀 잔뜩 먹자! 아니, 아예 외식을 할까? 너도 저녁 준비하기 귀찮지? 어때? 내가 쏠 테니까!”
“……됐어.”
“에이, 그러지 말고! 얼마든지 내가 사줄 테니까!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잖아? 솔직히 너도 저녁 준비 매일 해주느라 귀찮을 거 아냐.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도 돼. 그래, 데이트에서 나의 매력을 전부 내보인 다음, 매일 저녁을 차려달라고 하는 거야! 약혼자니까 그 정도는 해주겠지?”
“…….”
“아예 도시락도 싸달라고 할까? 나를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는 세계 제일의 미소녀라니! 아, 너무나도 행복하다! 마왕이 너도 이제 귀찮은 일 없이 네 것만 준비하면 돼!”
“…….”
그 순간, 마왕이가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뿌리쳤다. 예상치도 못한 행동에, 나는 멈춰 서서 물어봤다.
“……마왕아?”
“……오늘은,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으니까 먼저 들어갈게. 저녁은 알아서 챙겨먹어.”
그 말만 남기고, 마왕이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차마 따라 달려가지도 못하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다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뭐, 저 녀석도 몸이 안 좋은 날 정도는 있겠지. 어쩔 수 없다. 오늘은 혼자 외식이라도 거창하게 하면서 기쁨을 느껴볼까! 나는 양 팔을 벌리고 소리 없는 환호를 올리며 생각했다.
그래서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왕이는 마왕이다. 잔병치레 같은 걸 할 일도 없고, 몸 상태가 나빠질 일도 없다.
그리고,
마왕이의 뿔이 조금 커졌다는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용사님! 여기에요! 여기!”
“하하, 하…….”
주말. 약속장소에 나가자 공주가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반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약하게 손을 흔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왜 데이트까지 보디가드가 동행하는 건데? 이거 뭐야.
일단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어제 밤새도록 시뮬레이션 한 대로 대사를 읊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뇨. 용사님을 기다린다면 설령 그것이 몇 년의 기다림이라도 마치 순간과 같답니다.”
아으으으으……. 소, 손발이! 이 대답은 차마 예상도 못했기 때문에 정신력이 달았다. 하지만 진심인 듯 웃고 있는 공주의 웃음에 실망시키는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환하게 웃어줬다. 솔직히 꽤나 힘들다, 이거.
“저 어떤가요? 잘 어울리나요?”
들떠서 재촉하듯 말하며 공주는 옷을 팔랑거리며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드레스 같은 느낌의 화사한 하얀 원피스가 그 행동에 나풀거린다. 으어, 이거 좀 세다. 많이 세다. 순간 의식이 흐릿해질 뻔 했지만, 용사의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텼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잘 어울려요, 공주님. 공주님은 뭘 입으셔도 아름다울 거예요.”
준비한 대사이기 때문에 오글거림을 버텨냈다. 내 대답에 공주는 부끄러운지 붉어지는 볼을 양 손으로 감추며 말했다.
“그, 그런가요? 정말 기뻐요…….”
진짜 반칙이다. 공주, 이거 치트캐다. 이 옆에 세상 어떤 연예인이나 미소녀를 데려와도 이 표정에는 순식간에 오징어랑 동급으로 될 것 같아. 양민학살도 정도가 있다. 운영자 패치 안하나요? 밸붕이요.
“그럼 갈까요? 용사님! 빨리 데이트 하러 가죠!”
공주는 웃으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곤란하다는 듯 공주를 향해 물었다.
“저, 공주님? 이 분들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힐끔 바라봐도 보디가드 두 명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뒷짐을 선 채로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람이 아니라 기계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공주는 내 시선에 눈치 챘는지, 아차 하는 느낌으로 보디가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저, 여러분? 제 신상을 염려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오늘은 데이트니까 그만 돌아가셔도 좋아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주님.”
보디가드 한 명이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말은 할 수 있는 모양이다. 다른 보디가드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은 인류의 상징과도 같은 분, 언제 어느 때라도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마족도 같이 사는 이상, 누군가 전쟁을 원하며 공주님을 노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 그거구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말했다시피 20년 전에는 인류와 마족은 싸우는 사이였다. 지금도 아직 세계 정부의 명령이나 마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마족들도 있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지구는 우리의 것이다! 애당초 침략해온 마족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냐!’ 라고 주장하고, 마족들은 마족들대로 ‘지구는 우리의 것이다! 인류는 침략대상일 뿐!’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전쟁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으니 아직 마족들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지. 아마 이 보디가드들은 그런 의견인 모양이다.
뭐, 마왕네 옆집에서 사는 나로서는 그런 건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 날 헤어진 다음부터 마왕이는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깨우러 오지도 않고, 도시락을 싸오지도, 저녁을 만들어주러 오지도 않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공주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랑 데이트를 하시는 분은 용사님입니다.”
공주는 보디가드 두 사람을 바라보며, 기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이 강하신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용사님에 비할 바는 아닐 거예요. 용사님이 곁에 계시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만큼은, 인류의 상징인 공주가 아니라 평범한 소녀로 있게 해주세요.”
“공주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겠습니다.”
“그 정도는 허가해주십시오.”
“알겠어요. 윤허(允許)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십시오.”
일단 사람이긴 한 모양이다. 말은 통하는구나. 하긴 저 표정과 저 태도에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나도 숨통이 좀 트였다. 감시당하는 건 무슨 벌칙게임인가 싶지만, 상대가 상대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근데 나도 인류의 희망과 미래의 상징인데, 왜 나는 보디가드 없나요? 있어도 곤란하지만 왠지 차별받는 것 같잖아.
“잊지 마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
영문을 모르겠는 문답을 끝으로, 보디가드 두 사람은 발걸음을 맞춰서 사라졌다. 잊지 말라고? 무슨 뜻이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공주가 다시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럼 용사님, 빨리 가죠! 기다리고 기다리던 용사님과의 데이트, 일 분 일 초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환하게, 정말로 행복한 듯 말하는 그 표정에, 딱히 토를 달수도 없었다.
 
 
걸어서, 버스를 타서, 지하철을 타서 가는 길에서, 나랑 공주는 수도 없을 정도의 시선을 받았다. 솔직히 나는 용사라는 타이틀을 달긴 했지만 마빡에 새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디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 그냥 평범하게 생겼거든. 그래서 유명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은데…….
공주는 다르다. TV에서도 자주 나오는 유명인, 거기에 후광이 비추는 것 같은, 똑바로 5초 이상 바라보면 눈이 머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압도적인 외모. 그런 사람이 자신들과 같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는 건 엄청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힐끔거리는 시선과는 정 반대로 나와 공주 반경 10m는 무슨 결계라도 쳐진 것처럼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노, 놀이동산입니까?”
“네! 놀이동산이어요!”
당황한 내 물음과는 다르게, 공주는 환한 미소로 말했다. 공주는 내 손을 잡고 걸어가며(어느 순간 은근 슬쩍 잡혔다. 행복에 졸도할 뻔 했다) 기쁜 듯 말했다.
“사실 놀이동산에 오는 건 처음이에요.”
“……처음, 이라고요?”
내 물음에, 공주는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그, 인류의 상징인 공주라고, 늘 바빴거든요……. 그리고, 인파가 많은 곳은 위험 때문에 가지 못하게 했고요. 그래서 놀이동산은 책이나 TV로 본 게 전부에요……. 여, 역시 이상한가요?”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는 공주에게 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주는 그 행동이 기쁜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착한 놀이동산 입구는 왠지 모르겠지만 폭동 상태였다.
“왜 오늘은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예매도 했는데! 환불해!”
“책임자 나와!” “저, 아무래도 오늘은 운영하지 않는 모양인데요……?”
공주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모양이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을 달래고 있었다. 뭔가 안전문제라도 생겼나?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공주는 쿡 하고 웃은 다음 말했다.
“괜찮아요, 용사님. 자, 가죠!”
“네? 아니, 하지만…….”
차마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공주에게 이끌려 인파 사이로 향했다. 불만에 가득해있던 사람들이 공주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다시 10m 밖으로 물러났다. 인파의 끝에 도달하자, 담당자가 말리려는 듯 다가오다 놀랐는지 멈춰 섰다. 하긴, 이런 외모의 상대에게 오늘은 못 들어간다고 하기는 그렇겠지…….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담당자는 경례까지 붙여가며 말했다.
“고, 공주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싱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망설임 없이 입구로 다가가는 공주.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불만이 가득하던 인파도 공주가 들어간다는 것에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사람 하나 없는, 하지만 운영 중인 놀이동산 안에 들어가고야 나는 물어볼 수 있었다.
“저, 공주님? 이게 무슨…….”
공주는 내 물음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하루 놀이동산을 통째로 빌렸어요. 다행히 높으신 분들도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놀이기구를 타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허락해주셔서요.”
“…….”
“괜찮아요. 오늘 예매하신 분들에게는 제대로 정부 차원에서 보상해주고, 대여비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 오늘은 저희 둘이서 신나게 즐기도록 하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가려는 공주. 하지만 공주는 손을 잡아당김에도 움직임이 없는 내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봤다.
“……용사님?”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공주의 손을 놓고는 다시 입구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공주가 깜짝 놀라며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온다.
“용사님?”
“공주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특권을 이용해서 이러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단축키를 눌렀다. 역시 그 꼬부랑말을 쓰는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아빠 바꿔줘요.”
입구에 도착하자, 담당자가 깜짝 놀라며 나와 공주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저희 행동에 뭔가 문제가…….”
“용사입니다. 전화 받으시죠.”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핸드폰을 넘겼다. 담당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전화를 받았다.
“무슨……. ?! 아니, 아, 네. 죄송합니다. 네. 네. 네? 아니,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그, 하지만……. 네?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감사합니다. 저도 토끼 같은 아내와 딸이……. 아, 네! 알겠습니다!”
담당자는 핸드폰을 다시 나에게 넘기고는, 인파를 향해 말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바로 입장하시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오기 시작하는 인파 사이로, 빠른 걸음 때문에 뒤쳐졌던 공주가 다가온다.
“용사님? 이게 무슨…….”
“아버지에게 부탁했습니다. 역시 저희만 즐기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모두들 들어와서 같이 즐기도록 하죠. 놀이동산의 묘미는 다른 사람도 같이 있는 거니까요.”
“…….”
싱긋 웃으면서 대답하자, 공주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공주님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더 즐겁지 않을까요?”
“……확실히, 다른 사람과 함께 한 경험은 없습니다만…….”
공주는 어딘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바로 가도록 하죠. 인파가 들어온 이상 재밌는 놀이기구에는 줄이 설 테니까요.”
“……일부로 불편을 감수하면서 이러신 건가요?”
걸어가며 물어보는 공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공주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 같이 사는 세상이잖아요.”
“……그건 특권을 이용하는 저를 탓하시는 건가요?”
표정이 어두워지는 공주를 향해 손을 휘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공주님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한 경험이 없으시다면,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
“마음을 써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공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결국 용사님도, 특권을 이용하신 거 아닌가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모두를 들어오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생각도 못해봤네. 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포기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죠.”
“그렇다면…….”
“하지만 저는 용사니까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공주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용사님은……. 정말로 용사님이군요.”
환하게 웃어주는 그 표정에 뿌듯함이 느껴졌지만, 그 뒤에 순간적으로 얼굴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못 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롤러코스터.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이킹.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자이언트 스윙.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다시 롤러코스터.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령의 집.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인파가 들어와서 혼잡해지기는 했지만, 과연 공주랑 용사라서인지 우리는 기다리지도 않고 줄에 서자마자 모시다시피 해서 놀이기구를 탔다. 아까 멋지게 말하고 이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몇 시간동안 줄을 서게 하는 것도 뭐하다고 생각했기에 이건 받아들였다. 다행히도 공주의 압도적인 외모 탓인지 줄을 서있는 사람들도 뭐라 불만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놀이동산은 정말 처음인지, 공주는 눈을 반짝이며 놀이기구를 탈 때마다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타고 나서는 늘 표정이 두려움에 질려있었다. 음, 아무래도 초심자에게는 자극이 컸나? 마왕이랑 같이 오면 좋아하던데. 데이트 경험이라고는 없다보니 배려가 부족했나보다. 나는 유령의 집에서 나와 새하야진 얼굴로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는 공주를 보며 말했다.
“그,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 혼자 들떴나보네요.”
“아, 아닙니다……. 이런 게, 놀이동산이군요……. 다, 단 둘이 오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단 둘이 왔으면 기품 있는 모습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의미인 것 같다. 하긴, 유령의 집에서는 나도 행복의 절정을 맛봤다. 간단한 놀래킴에도 내 팔에 안기고 가슴에 안기고 했거든. 가능하다면 유령의 집만 하루 종일 돌았으면 좋겠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공주님도 즐길 수 있는 걸로 타죠.”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 회전목마요…….”
공주는 어쩐지 맥이 빠진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흠, 좋아할 줄 알았는데. 공주랑 딱이니까. 나는 공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역시 이건 싫으신가요?”
“아, 아뇨. 싫은 건 아닙니다만…….”
주저하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공주. 하지만 그 순간 표정을 읽어버렸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군. 예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만 있는 줄 알았더니. 공주는 내 웃는 얼굴에 일순간의 기대감을 읽혔다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자, 타시죠, 공주님.”
나는 마차의 문을 열며 말했다. 공주는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기대감을 읽힌 김에 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을 살짝 잡아서 공주를 마차 위로 태우고는 문을 닫았다.
“요, 용사님은 같이 타시지 않으시나요?”
“용사는 달리 탈게 있거든요.”
나는 옆에 있는 백마 위에 올라타며 웃었다. 솔직히 시뮬레이션은 했지만 손발이 접힌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 둘이서 마차에 타면 더 쪽팔릴 것 같으니까. 내가 올라타자마자, 회전목마는 참으로 맥 빠지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보면 환상적인 광경에 입을 벌리고 우리를 바라본다.
마차에 탄 공주.
백마에 탄 용사.
딱이잖아?
나는 마차 안에서 웃는 공주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공주도 마주 웃었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애써 용사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가슴을 펴고 당당한 자세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백마 위에서 자세를 잡았다. 솔직히 웃기지 않았을까 싶다. 겨우 회전목마 위에 올라타서는 자세를 잡는 용사라니.
그래서 또 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웃는 공주가 바라보는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 웃음에 비웃음이 섞여있다는 것을.
 
 
 
마차에서 내 손을 잡고 내리면서 공주는 웃었다.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점. 지금부터 돌아가야 제 시간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자고 내가 말하기 전에, 공주는 입을 열었다.
“그, 돌아가기 전에 타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뭐든지 말하세요.”
웃으며 대답하는 나를 보고, 공주는 손가락으로 놀이기구 하나를 가리켰다.
“놀이동산에 오면, 저걸 꼭 타고 싶었거든요.”
관람차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관람차에 올라타자 문이 닫혔다. 관람차가 조금씩 높이 올라가자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사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압도적인 외모지만,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관람차, 지는 석양, 단 둘. 여기서 도출될 할 말은 하나뿐이지. 두 번째 고백인가. 나는 기대감을 억누르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공주가 하는 말은 예상 외였다.
“용사님은 마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마……. 족이요?”
어라, 이건 시뮬레이션에도 없던 말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공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사님은 마족과 싸우는 존재잖아요? 그런데 숙적일 마왕과도 친하게 지내시고……. 그런 게 궁금해서요.”
“음…….”
아무래도 진지한 물음인 것 같았다. 하긴, 흔히 생각하기에 마왕과 친하게 지내는 용사는 규격 외겠지. 아무리 그 화해 이후로 평화 무드가 조성되었어도, 상징적으로라도 대칭하는 존재니까.
인류의 희망과 미래의 상징, 용사.
인류의 절망과 멸망의 상징, 마왕.
저울의 양쪽 끝에 걸린 대칭점.
하지만…….
“뭐, 녀석은 제 소꿉친구니까요.”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많이들 편견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랑 마왕 아저씨를 봐도 굳이 그렇게 싸워야 되나 싶고요.”
20년 전에는 숙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제는 꽤나 친하다. 평범한 아저씨가 된 우리 아버지랑,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도 근육질이 우락부락한, 황소 뿔보다 멋진 커다란 뿔을 가지고 거대한 날개를 달고 묵직한 꼬리를 가진 마왕 아저씨는 지금도 매일 같이 같이 앉아서는 술을 마시면서 지난날의 싸움을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서로의 동료가 수없이 쓰러졌음에도.
한때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검격을 교환했던 사이임에도.
지금 보면 쾌활한 친구일 뿐이다.
“그야, 그때 죽어간 사람들도 많고, 지금도 싸우는 사람들이 남아있지만, 두 사람을 보면 결국 다 잘 될 것 같아요. 아버지랑 마왕 아저씨가 우리를 용사와 마왕으로 결정하고도 소꿉친구로 지내게 한 것도 화해의 제스처라고 했고.”
“하지만 그건 옳은 걸까요?”
웃으며 말하던 내 목소리는, 공주의 투명한 목소리에 막혔다.
“그때 죽어간 사람들이, 과연 두 사람을 보면 웃어줄까요? 멸망을 계획하고 인류를 지배하려고 했던 마왕인데, 마족인데. 그런 사람들이 웃으면서 지낸다는 건 뭔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애당초 마족들이 정말로 우리와 평화를 원할까요? 아직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거 아닐까요?”
“…….”
“인류와 마족은 결국 싸워야 할 상대 아닐까요? 용사님과 마왕님은, 결국 적 아닐까요? 지금 웃으면서 지낸다는 건, 쓰러졌던 사람들에 대한 기만 아닐까요?”
“저기, 공주님……?”
내 목소리에, 공주는 실언을 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즐거운 데이트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죠?”
쑥스러운 듯 웃는 그 얼굴은, 하지만 방금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요.”
웃으며 진심으로 즐거웠다는 듯 말하는 공주를 보디가드에게 보내준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에도, 공주의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그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화해 무드가 조성될 때에도 많은 말이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쳐들어온 침략자, 마왕과 마족과 웃으며 지내도 되는 것인가. 그들을 막으려 죽어간 사람들, 갑작스러운 습격에 죽어간 사람들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그들은 사실 나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운 나쁜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런 걸로 끝날 리가 없다. 끝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용사와 마왕이 옆집에 살면서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것에도 몇 년이나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씩 우리 집 앞에는 당시의 피해자들이 와서 시위를 벌인다. 용사라면 마왕을 쓰러트려라, 죽어간 사람들의 복수를 해라, 하고.
마왕이에게 계란이 던져진 적도 수도 없이 많다. 어릴 때는 괴롭힘도 당했다.
그럴 때마다 마왕이는 웃으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하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마왕이랑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어떤 애인지 아니까.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건 모조리 기만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마족의 수령, 인류 침략의 선두에 섰고 지도부였던 마왕과 그 딸이 웃으면서, 인류를 대변해서 그들을 막아왔던 용사의 집안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불쾌한 이야기 아니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나는 잠을 청했다.
다음날, 마왕이는 공주를 납치했다.
 
 
“……그래. 그러기로 했구나.”
마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으로 이어진 핫라인으로 들려오는 메시지에, 마왕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를 납치하는 건, 마왕이 해야 할 일이니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알아서 하렴, 내 딸, 마왕아. 이제 마족의 대표는 너다. 네가 결정한 바에, 나는 그저 따르마.”
통신을 끊으며, 마왕은 다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는, 산산조각 나 깨진 봉인이 있었다.
새로운 마왕의 도래였다.
 
 
“야! 이마왕! 당장 나와!”
쾅쾅쾅. 대답은 없다.
“당장 나오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다시 한 번 쾅쾅쾅. 여전히 대답은 없다. 아예 안에서 인기척 자체가 없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문을 두드리던 나는, 손을 내렸다.
아침에 등교하자 마왕이는 오지 않았다. 공주도 없었다. 대신 나에게 핫라인을 통해 온 소식은 놀라운 내용이었다.
마왕이 공주를 납치했다.
사정을 물어보는 아이들을 뿌리치고, 바로 조퇴를 해서 마왕이의 집으로 달려왔지만 역시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나는 용사다. 마음만 먹으면 이딴 문,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박살낼 수 있다.
하지만, 박살내고 들어간다고 뭐가 달라지지?
과연 안에 마왕이가 있기는 한 걸까?
핸드폰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핫라인을 통해, 전 세계의 높으신 분들이 총출동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계속해서 나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용사로서, 마왕을 쓰러트리고 공주를 구출하라고?
지금까지 장난처럼 해온 용사와 마왕의 대결이, 이번에는 진짜라고?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에 다만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서 고속으로 날아왔다.
“?!”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등 뒤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충격파에 날아간 나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일어났다.
“차탄 장전! 발사!”
“그만둬!”
내 외침과는 상관없다는 듯, 전차가 발사한 포탄은 다시 마왕이의 집을 강타했다. 다시 한 번 폭발이 일어나고, 2층 건물이던 마왕이의 집은 두 번이나 이어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뿌옇게 일고, 파편이 사방으로 날린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잖아.
나는 전차 위로 상체를 내밀고 있던 군인을 향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용사님입니까. 대 마족 전 대책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지금 막 마왕의 집을 파괴했습니다.”
40대는 되어 보이는 아저씨 군인은 담담히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경례는 개뿔. 나는 단걸음에 전차 위로 올라타 그 멱살을 붙잡았다. 나보다 어른이라고? 웃기지 마. 나는 군인을 향해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군인은 내 행동에도 주저함이 없이 말했다.
“소식은 들으셨을 텐데요. 금일 10시를 기준으로 인류는 마족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 시작으로서 마왕의 집을 파괴했습니다.”
“그 무슨…….”
전쟁? 인류와 마족의 전쟁?
어이가 없어서 아무 표정도 짓지 못하는 나를 향해, 군인은 웃음을 지었다.
“20년 전의 설욕을, 이번에야말로 할 때입니다.”
“…….”
그 표정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그때,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이다.
마족에 대한 분노는, 식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군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차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군인은 다시 나와 나를 향해 말했다.
“마침 잘 됐군요. 마왕의 근거지가 확인됐습니다. 이대로 같이 행동하시죠.”
“……윽!”
나는 그 말을 듣지도 않고, 혼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용사님이 오셨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주십시오.”
헉헉대며 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계급장이나 훈장을 단 사람들도, TV에서 본 사람들도 있다.
세계를 움직이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전시다. 인류와 마족의 전쟁. 그리고 그 첨두에 선 존재는 누구냐?
물론 용사다.
이제 이 사람들은, 정식으로 나를 용사로 취급하고 있는 거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빠!”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대답을 해줄 것 같은 사람을 향해 외쳤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소식은 다 들었잖아. 마왕이 공주를 납치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지?”
“…….”
‘마왕이’가 아니다. ‘마왕’이다.
그리고 그 호칭의 변화가 무슨 의미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외쳤다.
“화해한다고 했잖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평화로웠잖아요!”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용사님.”
꼬부랑말에 누군가가 한국어로 통역을 했다. TV에서 본 얼굴이다. 미국 대통령이었던가? 미국 대통령은 나를 바라보며 뭐라고 꼬부랑말을 했다. 곧이어 통역을 맡은 사람이 말했다.
“알다시피, 공주는 인류를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마왕’이 공주를 납치했다는 건, 일종의 선전포고입니다. 이건 사람 하나를 납치한 게 아닙니다. 인류 전체에 대한 기만입니다.”
“아직 아무도 피해를 본 건 없잖아요! 그냥 데려간 것뿐이라고요!”
“확실히, 아직 마족이 공격하는 일은 없습니다만…….”
다른 사람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저 사람은 내 기억이 맞다면 러시아 대통령이다.
“지금 막 마족이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무력 충돌은 없습니다만, 현재 대치중입니다. 우리는 인류를 대표해서 이런 사태를 가만 둘 수 없습니다.”
“…….”
무슨 짓이야, 마왕아.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다시 사람들은 대화를 시작했다. 꼬부랑말은 모르지만, 몇가지 단편적인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군대, 공격, 전쟁, 승리 등등.
“잠깐만요!”
그래서 외쳤다.
“아직 그러기에는 이릅니다! 제가 갈게요!”
“……용사님이요?”
미국 대통령의 말을 받아 통역이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갈게요. 인류의 히든카드잖아요? 제가 가서 마왕이랑 이야기를 해볼게요.”
“그건 안 됩니다.”
또 누군가 꼬부랑말을 하며 일어났다. 미국 국방부 장관이던가?
“말씀하신 대로, 용사님은 인류의 히든카드입니다. 만약 용사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마왕은 지금까지 20년 동안 우리를 기만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주가 다가오자마자 납치했고요. 용사님이 가도 말로 속이다가 공격해올지도 모릅니다.”
“마왕이가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다급히 외쳤다. 그래, 마왕이가 그럴 리가 없다. 그야 납치도 생각지도 못하긴 했지만, 마왕이가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내 외침에도 모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갈게요! 보내주세요!”
“……용사님도 회의에 참가하게 해드려야겠지만, 아직 어리셔서인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 같군요. 경비병, 용사님을 숙소로 안내하도록.”
“Yes, Sir!”
입구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 두 명이, 내 양 팔을 붙잡는다. 그리고는 입구 밖으로 나를 끌어내려고 한다.
두 명은 그대로 튕겨나갔다. 내가 전투 모드를 켰으니까. 손에 검이 쥐어지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보디가드들이 즉시 총을 꺼내 나를 겨눈다.
“……멍청한 짓 하지 마십시오, 용사님. 지금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집어 치워요. 제가 마왕이에게 갑니다.”
“용사님, 말을 들으세…….”
“내가 마음먹고 여러분을 공격할 때, 모두 쓰러트릴 때까지 몇 초나 걸릴 것 같나요?”
“…….”
내 협박에, 달래려는 말이 멈춘다. 모두들 알고 있다. 나는 인류의 희망, 히든카드인 용사. 마왕과 단신으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스스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전력을 다하는 나를 막으려면 1개 군단은 끌고 와야 한다. 농담 하는 거 아니다. 모두들 핵폭탄과 같은 방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쯤 해둬라.”
전직 용사인 울 아빠 빼고.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는 미국 대통령을 향해 말했다.
“대통령, 당신이 졌습니다.”
“하지만…….”
“분명 조약에 있을 텐데요? 본격적인 전쟁 전에는 용사가 마왕과 교섭에 나선다고. 저 녀석이 하는 말은 그 조약에 따른 행동입니다. 문제는 없어요.”
“그렇지만, 마왕이 그 조약을 노리고 공격에 나서면…….”
“괜찮습니다. 현직 마왕은 이 녀석과 친구니까요. 저랑 전직 마왕이 그렇듯. 대화 정도는 가능할겁니다. 그리고 아직 마족 군대는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선제 타격 전에 대화 정도는 나눠 봐도 되겠죠. 상징성은 있지만, 저 녀석 말대로 아직까지는 사람 하나 데려간 정도니까요.”
“…….”
“어쩌시겠습니까? 저도 저 녀석에게 용사 자리를 넘겨서 기운이 많이 빠졌습니다. 현직 용사가 마음을 먹고 난동을 부리면 말릴 자신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들 내키지는 않는 분위기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나를 보며 말했다.
“용사님, 하지만 유사시에는 모든 책임을 지실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포함해서요.”
나는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Fuck you.”
가운뎃손가락을 펴면서. 미국 대통령의 미간이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겁니까?”
미국 대통령은 한숨을 쉬며 전직 용사를 바라봤다. 전직 용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 큰 대로 키웠죠.”
“……안 그래도 당신 젊었을 때 만났던 게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국방부 장관이었죠?”
“당신에게 한 대 맞았었죠. 저 소리도 듣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때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세요.”
미국 대통령의 핀잔에, 전직 용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마왕! 아니, ‘마왕’! 용사가 왔다! 문을 열어라!”
나는 거대한 철문을 향해 외쳤다. 20년 전 전쟁 때 건설된,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마왕성. 당시 전쟁의 최종장이 벌어졌던 혈전의 장소이자,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마왕의 본거지 겸 마계와 통하는 입구. 까마득하게 높은 철문은 내 외침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이.
“당장 안 열면 너 세 살 때 같이 목욕하다가 내꺼 보고는 가짜 아니냐, 인간은 죄다 저거 달려있냐고 유치원 선생님에게 물어봤던 거 학교에다 다 불어버린다.”
끼이익. 철문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열리기 시작하자마자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틈은 생겼다. 나는 다 열리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열리기 시작하던 문은 다시 닫혔다. 거 참을 성 없기는.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마왕성이지만, 기억에 의존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왕 아저씨가 자주 데리고 놀러왔거든. 그리고, 사실 기억 따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로 2km만 전진하면 마왕의 옥좌가 나오거든.
“여, 이마왕. 오랜만이다.”
“……무슨 일인가, 용사여.”
어둠 속에서 마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은 게 토라졌다는 증거다.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나오지 마. 이야기 하자고 온 거니까.”
“용사로서 찾아온 것이 아니더냐. 마왕으로서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거 딱딱하긴. 뭐 됐다. 나는 ‘용사’로서 ‘마왕이’에게 이야기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게 있다.
“거 불 좀 키고, 공주는 어디 있냐?”
“…….”
순간 침묵이 온 다음, 양 옆에서 횃불이 켜진다. 마왕성답게 분위기 있는, 마력으로 켜지는 파란 횃불이다. 복도가 파랗게 물들었다.
“…….”
“용사님…….”
그리고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공주는 왕좌 바로 옆에 있었다. 새장을 크게 한 것 같은 거대한 감옥에 갖혀있는 상태였다. 옷이 잠옷인 걸 보면 납치는 어제 밤에 했나보다. 다행히 외상은 없다. 하긴, 마왕이가 그런 일을 할 리는 없지만. 공주는 불이 켜지자 내 모습을 알아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다 철장을 잡았다.
하지만 할 말을 잃은 건 공주 때문이 아니었다.
마왕이의 모습 때문이었다.
교복 차림이 아닌, 위풍 넘치는 마왕의 옷을 입은 마왕이의 모습은 지금까지 봐오던 모습과는 달랐다.
앙증맞던 뿔은 마왕 아저씨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보이지도 않던 날개는 지금은 망토처럼 왕좌에 앉은 마왕이를 두르고 있었다. 그 뒤로는 거대한 꼬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었구나, 마왕이 된 건.
“……그래서, 무슨 볼일이냐.”
마왕이는 나를 내려 보며 말했다. 검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하지만 나는 달리 기운을 뿜어내지 않고, 적당히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너?”
“……무슨 생각이냐고 묻는다면?”
“너, 분명히 말했었지. 너를 욕하는 사람들의 계란세례를 받으면서도 웃으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절대로 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
그래, 마왕이는 말했었다. 비록 자신이 마왕이지만, 예전 같은 일은 없게 하겠다고. 사람들이 슬퍼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제대로 차대 마왕으로서 평화를 지켜내겠다고.
“그렇게 말한 주제에, 공주를 납치해?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나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나한테 거짓말 한 거냐? 사실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냐? 너 그런 녀석이었냐? 아니잖아! 제대로 대답해봐! 왜 그랬어!”
나는 내가 걸어온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 군대를 동원해? 제정신이냐? 또 전쟁 한판 벌이자고? 지금 너희 집 개박살 난건 아냐?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니까! 대답해!”
“그냥…….”
마왕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나는 마왕이고, 너는 용사고……. 그걸 깨달았을 뿐이야.”
“…….”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공주가 했었던 말이 떠올랐거든. 마왕이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느 새 ‘마왕’다운 말투는 포기한 채였다.
“아무리 소꿉친구라고 해도, 결국 너는 사람이고, 나는 마족이야. 너는 용사고, 나는 마왕이고. 지금까지는 친구니까, 소꿉친구니까 하고 그냥 그렇게 지냈지만, 공주를 보면서 깨달았어. 너는 역시 인류의 희망과 미래를 상징하는 용사고, 나는 인류의 절망과 멸망을 상징하는 마왕이라는 걸…….”
“…….”
“역시 용사는, 공주랑 같이 있어야해. 공주랑 이어져야해. 마왕하고, 적인 마왕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희망의 상징과 절망의 상징이 친하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용사는 마왕하고 싸우기 위한 존재야. 그리고 마왕은 그런 용사와 싸우는 존재고. 지금까지는 그걸 잊고 있었지만……. 이제는 깨달았어.”
마왕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자, 그러니 덤벼라, 용사여.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오늘에야말로 네놈을 쓰러트리고, 이 세상을 마족의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
그렇게 말하는 마왕이의 말투는 다시 마왕의 말투였다. 말 자체는 지금까지 나와 저녁 메뉴를 놓고 싸우던 말투 그대로였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약속된 단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말이었다.
“……좋다, 마왕.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용사’로서, 네 녀석을 쓰러트리겠다.”
나도 말투를 고치고, 하얀 기운을 몸에 둘렀다. 손에 용사의 검이 잡힌다.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마왕이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님…….”
공주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는 검을 들어올려 ‘마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네 녀석을 쓰러트리고, 공주를 구출하고, 이 싸움을 끝내도록 하겠다.”
“좋다, 용사여. 오늘 여기서 진정으로 결말을 짓자.”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날개를 펼쳤다.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고, 마왕의 손에는 검은 마왕의 검이 들렸다. 나는 자세를 잡으며 외쳤다.
“간다, 마왕!”
“와라! 용사여!”
그 외침을 신호로 나와 마왕은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중간에서 마주치자마자, 나는 검을 휘둘렀다. 마왕은 어렵지 않게 그 검을 한 손에 든 검으로 막고, 다른 손을 내 가슴을 향해 뻗으며 외쳤다.
“헬 파이어!”
손에서 새파란 마력의 불꽃이 뿜어진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마력으로 방어막을 쳤지만, 화력이 너무 강했다. 잠시 견디지 못하고 방어막이 깨지고, 충격에 나는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교복이 좀 그슬렸다.
“냉한지옥!”
마왕은 내가 자세를 고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쳤다. 거대한 얼음 기둥이 주변에서 생기고,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몸을 감싼다. 나는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파이어 월!”
내 주변으로 불꽃의 장막이 생겨 냉기를 막아낸다. 그 순간 마왕은 날개를 펼치며 날아와 내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재빨리 검을 휘둘러 튕겨내자, 마왕은 그대로 공중으로 떠오르며 공격을 계속했다.
“얼음 송곳!”
“파이어 볼!”
공중에서 마왕의 얼음 송곳과 불꽃의 공이 부딪혀 폭발한다. 비산하는 파편에 긁히면서도 나는 바닥으로 내려앉는 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받아라!”
“무르군!”
마왕이 검을 휘둘러 막아낸다. 하지만 나는 주문을 외치지 못하게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섬광을 만들어낸다. 이윽고 검과 검이 눈앞에서 마주친다. 불꽃을 튀기며 나와 마왕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플래시!”
“크윽!”
그리고 내 외침에 검신이 빛을 발한다. 나에게는 눈부시지 않지만, 마왕에게는 한 순간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이 보였을 것이다. 비틀거리는 마왕을 향해 검을 내리친다.
“이야아아아아압!”
하지만 그 순간, 내 검은 마왕의 날개에 막혔다. 예상치도 못한 방어에 주춤하는 사이, 시력이 회복된 나를 향해 마왕의 손이 뻗혀진다.
“암흑의 창!”
“크악!”
푹,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이 창날이 되어 내 팔을 꿰뚫는다. 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고, 선혈이 튀긴다. 얼굴을 향해 튀기는 피에 마왕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윽고 이를 악 물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친다.
“어두운 거절!”
검은 기운이 나를 멀찍히 밀어낸다. 검은 창날이 팔에서 뽑히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날아가 쓰러진 나를 향해 마왕이 날개를 펴고 날아온다.
“이걸로 끝인가, 용사여. 너 답지 않구나.”
“누가 이걸로 끝이래!”
용사의 치유력과, 힐링 주문으로 재빨리 상처를 치료하고 날아오는 마왕을 향해 다시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마왕은 그 검을 튕겨낸다. 튕겨나가 도는 몸을 이용해서 마왕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먹였다. 마왕이 비틀거린다.
“크흑!”
“여자라고 못 팰 줄 알았냐!”
지금은 여자가 아니라 마왕이다. 나는 걷어 찬 발을 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검격에 마왕의 옷이 찢어지며 가슴에서 선혈이 뿜어진다. 나는 다시 발로 그 배를 걷어찼다. 충격에 마왕은 바닥을 갈아엎으며 뒤로 밀려났다. 이를 악 물며 나를 노려보는 마왕의 배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사의 검에 베인 상처는 아무리 마왕이라도 쉽게 낫지 않는다. 나는 그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
그 주문에 맞추어서, 마왕성의 지붕을 뚫고 마력의 유도를 받은 운석이 떨어졌다. 마왕은 전력을 다해 대기권에도 타버리지 않은 운석을 받아냈다. 지난 번 학교에서 썼던 것과는 크기 자체가 다르다. 바닥을 딛고 있는 마왕의 발에 바닥이 깨진다. 충격에 꽉 깨문 마왕의 입에서 피가 한 줄기 배어나온다. 뜨거운 열기에 마왕의 살이 타오른다. 하지만 마왕은 마침내 그 충격을 이겨냈다. 마왕은 힘이 다한 듯 운석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운석이 바닥에 파고 든 순간, 마왕은 주문을 외쳤다.
“용의 불꽃!”
순간 반응이 늦었다. 날아오는 화염이 용의 모양이 되어서 내 몸을 감싼다. 쇠를 녹여버릴 정도의 열기에 보호막으로 보호됨에도 교복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이번에는 내 살을 구워버리는 냄새가 난다. 이를 악 물고 정신을 놓지 않으며 외쳤다.
“아이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내 몸을 스스로 얼림으로서 화염을 잠시나마 견딘다. 화염에 얼음이 녹아가지만, 내 주문에 의해서 다시 얼어붙는다. 마왕의 화염이 끝나고, 동시에 내 주문도 끝이 난다. 겨우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그 정도인가, 용사!”
“아직이다! 마왕!”
그렇게 다시 싸움이 계속된다.
타오르고, 얼어붙고, 찢기고, 때리고, 맞고, 서로를 죽일 듯이 공격은 계속된다.
몇 번이나 정신이 아득해지고, 몇 번이나 다시 상처를 회복한다. 싸움은 계속된다.
그리고 조약에 나와 있듯이, 이 모습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보일 것이다.
나의 마력과 마왕의 마력에 동조해서, 전 세계를 향해 이 싸움이 중계된다.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이니까. 세계에 살아가는 모두가 그 목격자다.
“이걸로 끝이다!”
“우오오오오오!”
그리고 드디어 싸움의 끝이 다가왔다.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세상의 시스템에 의해 중계를 위해 소모되는 마력 외에는 모두 소모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검에 의한 싸움. 마법이 없는, 진정한 마지막 대결. 오래 전 아버지와 마왕 아저씨에게 들었던, 용사와 마왕의 싸움의 종장.
검을 튕겨내고, 휘두르고, 막아내고, 찌르고, 찔리고, 베고, 베인다.
무수한 상처가 마왕과 내 몸에 새겨진다. 너덜너덜해진 교복. 너덜너덜 해진 마왕의 옷. 찢어진 마왕의 날개, 피를 흘리는 서로의 몸.
“김용사아아아아아아아아!”
“이마와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그 외침을 끝으로, 서로의 온 힘을 다한 검이 서로의 몸을 꿰뚫는다.
“……쿨럭.”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서로의 검이 꿰뚫은 것은…….
나의 교복자락과,
마왕의 몸.
“이, 이번에는 졌네…….”
입에서 피를 흘리며, 마왕이가 웃는다.
“……너, 너……!”
내 말은 신경 쓰지도 않고, 마왕이는 중얼거렸다.
“이걸로……. 858전 857승 1패인가? 전승 기록이, 깨졌네…….”
내 옆구리를 스친 마왕의 검이, 마왕이의 마지막 마력까지 소모되면서 사라진다. 나도 재빨리 검을 없애고, 힘이 빠져 쓰러지는 마왕이의 몸을 받아냈다.
“이 멍청이! 왜 마지막 순간에 일부로 맞은 거야!”
마지막 순간, 나는 패배를 예감했다. 치료를 했음에도 마왕의 검은 기운 때문에 떨리던 팔 때문에 내 검은 마왕이의 몸을 빗겨나가고 있었고, 반대로 마왕이의 검은 내 복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왕이는 정확히 반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빗나가야 할 내 검은 마왕이의 몸을 꿰뚫고, 맞았어야 할 마왕이의 검은 내 옷자락을 스쳤다.
“……하하, 왜냐니…….”
입에서 피를 뿜어내면서도 마왕이는 웃었다. 마왕이는 잦아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용사가 이기는 게, 정답이잖아…….”
“정신 차려, 임마!”
몸을 흔들며 외치는 내 목소리에, 마왕이가 고개를 젓는다.
“무리야……. 정말 온 힘을 다 써버렸어……. 치료도 안 돼……. 여기까지인가 봐.”
“멍청아……. 그러니까 왜 그랬어!”
울음을 애써 참으며, 마왕이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마왕이는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너랑 공주가 같이 있는 게, 보기 싫었어……. 내가, 더 오래 알고 지냈는데…….”
“…….”
“그렇게 기뻐하면, 화를 낼 수도 없잖아…….”
“……역시, 그거였구나.”
“알면서……. 그랬으면……. 더 화나는데…….”
마왕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내 볼을 쓰다듬었다. 손이 급격하게 차가워진다.
“……이걸로,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지?”
“……그럼, 물론이지. 그러니까 정신 차려!”
“잘 됐다……. 적어도 마지막에는, 소꿉친구로 있고 싶었는데…….”
마왕이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아니, 소꿉친구 말고, 다른 게 좋은데…….”
눈물을 흘리며, 마왕이는 웃었다.
내 볼을 쓸어내리던 손이 마지막 힘을 잃고, 천천히, 떨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 잡았다.
“누가 멋대로 이런 식으로 죽으래?”
손에 힘을 주고, 이를 악 물었다. 사라졌을 터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터인 하얀 기운을 애써 끌어 모은다.
“애석하게, 아직은 소꿉친구 이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온 힘을 모아서, 온 기운을 다 끌어내서,
이제 더 이상 용사의 힘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니까 말이야!”
마왕이에게 힘을 보낸다.
용사라고? 마왕과 싸우는 인류의 대표라고? 마왕은 쓰러트려야 할 적이라고?
세상을 유지하는 시스템? 정해진 운명?
미국 대통령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주지. 엿이나 먹어라.
아버지가 예전에 말했었다. 용사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은 게 생길 거라고.
“내 경우에는 어머니였지만…….”
부끄러운 듯 웃음에도, 아버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지키고 싶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용사라면 이거 하나는 꼭 기억해라.”
용사가 어떤 순간에도 처음으로 버려야 하는 것,
그것은 포기.
“그리고 용사가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될 것,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도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될 것은…….”
희망.
인류의 희망과 미래의 상징이, 희망과 미래를 버려서 뭘 어떻게 하라고!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압!”
온 힘을 다해서, 마왕이의 상처를 치료한다.
아무리 마왕이가 마왕이고 마족이라도, 배에 검이 꽂힌 채로 낫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용사라면, 용사의 힘이라면…….
“……불가능은 없지.”
나는 힘이 다해 털썩 쓰러졌다. 바닥에 드러누워,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내 호흡소리와 함께, 작은 호흡소리가 들린다. 이 상황에서 팔자 좋게 잠들기는.
“돌아가면 장난 아닐걸?”
일단 박살난 집부터 고쳐야 할 테니까.
힘이 빠진 나는, 무거워지는 눈을, 감았…….
 
 
“뭐하는 거야!”
그 순간 들려온 외침에, 눈을 번쩍 떴다. 찢어지는 것 같은 그 외침은…….
“당장 숨통을 끊어! 마왕을 해치우라고!”
“……공주님?”
어느새 철장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공주였다.
“마지막까지 모든 게 잘 됐는데! 겨우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는데! 무슨 짓이야!”
하지만 그 말투는, 공주의 말투가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말투, 기품 있는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공주는 소리를 지르며 나와 마왕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공주……. 님?”
“그래, 공주님이야. 인류의 공주님.”
그렇게 말하는 공주의 말투는, 안하무인에 가까웠다.
“정말, 설마하니 이런 결말이 될 줄은 몰랐어. 치고 박을 때는 계획대로 모든 게 다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분 나쁜 말투를 하며, 공주는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나는 영문을 몰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계획이라니, 그게 무슨…….”
“계획이 마족을 전부 쓸어버릴 계획 외에 따로 있겠어?”
공주는 머리를 풀어헤치며 말했다. 저벅거리는 발걸음만이 들려왔다.
“마왕과 용사가 옆집에서 친하게 지내?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마족이, 웃으면서 지내? 웃기지 마!”
평화 협정이 이루어졌음에도, 고위층에서는 평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인류를 정복하려고 했던 마족과 손을 잡는다는 건, 그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족이 인류 사이에 끼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해나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용사와 마왕은 화해했고, 세계는 평화 무드로 들어갔다. 그렇기에 그들은 장기적인 계획은 세웠다. 용사와 마왕이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 자리를 넘겨줬을때, 그들은 언젠가 그들이 성장했을 때의 계획을 세웠다.
용사와 마왕의 계획이 그들에게는 뻔하게 보였다. 자식들을 친하게 키워, 언젠가 혼인시킨다. 인류와 마족의 대표, 상징간의 결혼. 그를 기점으로 제대로 된 평화를 이룩한다는 계획이겠지. 그렇기에 그들은 마왕이 내세운 공주를 이용하기로 했다.
인류의 희망의 상징과 인류의 대표를 약혼시키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용사는 결국 마왕의 딸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약혼이 인류의 히든카드였다. 친한 사이, 소꿉친구 사이로 성장해온 용사와 마왕은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세계의 첩보망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둘을 살폈고, 계획대로 되어 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왕의 딸은 용사의 아들에게 마음을 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용사의 아들은 그걸 눈치 채지도 못하고 있다. 이 사이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혹할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가진, 완벽한 공주님을 용사와 연결 지어 용사의 마음을 흔든다. 그리고 마왕 딸을 프로파일링 한 결과, 마왕의 딸은 틀림없이 질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왕의 딸은 다시 마왕으로 각성할 것이고, 약속된 수순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주를 납치할 것이다. 용사는 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마왕과 싸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느 쪽이든 좋다.
용사가 이기면 그걸로 좋다. 마왕은 쓰러지고 우두머리를 잃은 마족은 패배한다.
마왕이 이겨도 그걸로 좋다. 힘이 빠진 마왕과 마족을 인류가 모든 힘을 다해 쓰러트린다.
“그런데 마지막에 와서 이런 결말이라고? 웃기지 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말도 안 되는 계획, 억지로 가득한 계획, 가정에 가정을 거듭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랄 정도로, 그들의 증오는 깊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 정도로, 그들의 증오는 깊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공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뭐라고 중얼거렸다.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의해 뚫린 천장. 그제야 나는 기억해냈다. 분명 최첨단 군사위성은, 우주에서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해상도가 높다고 했다.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바, 마왕성의 위치도 모두가 알고 있는 바, 군사위성이 이 위를 지나고 있을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공주의 입모양을 읽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다, 끝, 났, 어, 요.
그리고 아마, 저걸 신호로 마왕성에는 수많은 공격이…….
“그만 둬! 공주 너도 죽는다고!”
나는 다급히 외쳤다. 분명 공격은 마왕이 아직 힘을 보존하고 있을 것을 가정하고 계획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왕성을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의 규모일 테고, 보통 사람일 뿐인 공주는 조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건 자살이다.
“어쩔 수 없어.”
내 말에, 공주는 방금까지 보여줬던 독기 어린 표정과는 다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기 위해 태어나서 만들어지고 교육받고 살아온걸. 이렇게 압도적일 정도로 아름답게 ‘태어날’ 리가 없잖아. 만인의 공주로서 어울릴 정도로 기품 있게 ‘태어날’ 리가 없잖아.”
“그게 무슨…….”
“이 며칠 동안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란 말이야.”
공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네가 이겼다면, 그대로 너를 위한 ‘공주’로서 살아가라고 들었지만, 여기가 끝이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주가 그때 그렇게 말했고, 방금 그렇게 말한 건, 마지막 살아남기 위한 희망이었나.
배신당한 분노보다, 마왕이를 죽이라고 외쳤던 분노보다 먼저 마음속에 감정이 떠올랐다.
구해주고 싶다.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용사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저런 여자아이를 죽으라고 내버려둘 수는 없지.
하지만, 정말 모든 힘을 다 했다. 마왕이를 살리기 위해 모든 힘을 다 했다.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다. 여기가 끝이다. 용사의 모험담은 여기까지다.
날아오는 순항 미사일과 비행기의 소리가 멀리서 웅웅대듯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 너는 용사잖아?”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게 용사의 일이라면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 거라면서?”
눈을 떴다. 마왕이었다. 웃는 얼굴로, 마왕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용사는 살아야지?”
“잠깐, 너…….”
말도 안 된다. 아직 움직이고 힘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을 리가 없다. 만일 힘을 쓴다면, 지금 겨우 막아놓은 상처가, 생명의 불꽃이…….
“괜찮아.”
마왕이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폭격기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나는 마왕이니까. 인류의 절망과 멸망의 상징이니까.”
“너……!”
“그러니까, 사라지는 게 옳은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사라졌다.
 
 
다행히 이후 교전은 없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까지 내가 깜빡하고 전투 모드를 끄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왕이도 전투 모드를 끌 겨를이 없었기에 모조리 세상을 향해서 중계되었고, 사정을 안 인류와 마족은 다시 화해했다. 뭐, 더러운 계획을 짰던 일부 높으신 분들 덕분에 난리가 나고, 아버지가 회의석에서 사정을 알고는 다 뒤엎어버려서 다시 난리가 나고, 돌아온 마왕 아저씨도 열이 머리끝까지 받쳐서 이번에는 내가 다 개박살 내버리겠다고 날뛰는 일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다들 잘 해결됐다.
아직도 서로 증오를 전부 버리지는 못했지만, 분명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나는 인류의 희망과 미래의 상징이니까.
“……뭘 잘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해탈 한 것 같은 내 표정에 공주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를 위한 공주로 살 거면, 옛날 그게 좋은데.”
“됐어. 다 들켰는데 뭘. 이제 와서 그런 모습 보이는 것도 귀찮고.”
공주는 그 일로 높으신 분들이 죄다 갈아엎어진 덕분에 자신의 삶을 살게 됐다. 당시 모습이 중계되었기 때문에 한동안 또 난리가 났지만, 아예 당당하게 저런 모습을 보이니까 역으로 아무도 할 말이 없어졌다. 태도야 저래도 인간이라면 모두 혹할, 후광이 나오는 외모니까. 외모지상주의 무서워요. 내면은 저런데.
“그래서, 저녁식사는 뭐가 좋아. 또 고기?”
“응. 또 고기.”
“하여간 고기는 더럽게 밝혀요.”
“뭐. 고기는 인류의 친구라고. 인류는 육식동물이란 말이야.”
“네, 네. 잘 알겠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우리 집에 사는 김에, 저녁 식사도 이 녀석이 책임진다. 다행히 내 취향에 맞게 맞춰져서인지 요리는 또 잘한다. 툴툴대면서도 결국 나를 위해주는 게 또 나름대로 좋다. 아무래도 일단은 생명의 은인에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용사님’ 취급은 해주는 것 같다.
“……서운해?”
“……뭐, 서운하지.”
그리고 나에게 맞춰져서인지, 마음을 잘 엿본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꿉친구가 사라졌는데 말이야.”
“…….”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이게 전부 그 녀석이 선물해준 내일이지. 절망과 멸망의 상징, 내 소꿉친구는, 그렇게 사라졌다.
기적과 화해의 상징이 되어서.
“……흑.”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고개를 숙이자, 공주가 어깨를 두드려준다.
“괜찮아. 분명 그 사람도, 우리의 곁에 있을 거니까…….”
“그래……. 기운 내야지. 녀석은 우리의 곁에 있을 테니까…….”
“자, 잠깐 기다려~”
“……분위기도 못 읽으면서 말이야.”
“그러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랑 공주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리자 소꿉친구에서 연인 후보로 한 단계 랭크 업 한 마왕이가, 헐레벌떡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조, 좀 깨워주지 그랬어!”
“몸도 혹사했으니까 푹 쉬라고 배려해 준거야.”
“공주 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용사를 독차지 하려고 한 거지?”
“……쳇.”
“정말! 생명의 은인에게 그게 뭐야?”
공주의 반응에, 마왕이는 볼을 부풀렸다.
여전히 앙증맞은 뿔과 꼬리다. 날개는 다시 없어졌다.
공격의 그 순간, 마왕이는 마왕으로서의 마지막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마력이었다. 쏟아져 내린 폭격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왕이의 방어막은 뚫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공격이 끝나고 나자, 마왕이는 마왕의 힘을 잃었다. 정확히는 자격 박탈이라나 뭐라나.
“완전히 용사에게 지면 힘이 사라지나봐. 헤헤헤.”
나중에 병원에서 녀석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나도 그 싸움의 결과 힘을 다 쏟아 부운데다 상대할 마왕이 사라져서인지 힘을 잃었다. 덕분에 돌아오자마자 미국 대통령 각하께서 안경을 벗으면서 ‘그래, 용사군. 아까는 나에게 감히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단 말이지. 미국의 국방력을 한 번 보여줄까?’ 하고 협박 받았다. 뭐, 웃으면서 한 말인 걸 보면 놀리신 것 같지만.
뭐, 아무튼 잘 끝났으니까 결과 올라잇.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튼, 그럼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공주가 내 팔에 매달린다.
“언제까지 소꿉친구로 볼 건데?”
마왕이가 반대쪽 팔에 매달린다.
“…….”
그리고 나는 침묵을 지켰다. 우유부단 하다고 욕하려면 욕해라. 하지만 행복은 길게 만끽하고 싶다. 언젠가는 인류의 상징을 선택하느냐, 마족의 상징을 선택하느냐 기로에 놓이겠지만, 일단 지금은…….
“일단 학교에서 살아남는 걸 목표로 하자.”
용사의 힘도 잃어서, 전교 남학생 공공의 적으로서 살아남는 것만 해도 벅차거든.
한숨을 쉬는 내 마음도 모르는지, 공주와 마왕은 내 팔에 매달리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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