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라한대]이곳은 이제 제 영토입니다

원본 : http://lightnovel.kr/one/396089
작성 : 2012년 6월 7일


-잘 생각해봐. 어차피 방학 중에는 학교는 아무도 쓰지 않잖아?
거기서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아니, 물론 사후평가긴 하지. 저런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설마 이런 일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어. 저 정도야 다들 농담 삼아 주고받잖아.
“따라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방학식 종료를 기점으로 본 학교는 제 지배하에 놓이게 되겠습니다!”
……저딴 소리 말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철문을 채 열기도 전에 들려온 소리에, 평소엔 잠겨있는 옥상 문을 벌컥 열면서 외쳤다. 보이는 것은 과연 여름답다고 해야 할까, 구름 하나 없는 완전한 스카이 블루, 그리고…….
“감히 누구에게 미친 소리냐고 하는 것이냐! 죽고 싶은게냐!”
돌아보면서, 채 3m도 떨어지지 않은 내 얼굴에 대고 확성기로 있는 힘껏 외치는 그 녀석.
“아악!”
일단 뭐라고 쏘아붙여주기 전에 귀를 틀어막고 비명부터 질렀다. 녀석은 그런 내 모습에 헤쭉, 하고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지은 다음 확성기를 입에서 떼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아니, 외쳤다.
“방금 내가, 아니지, 이때는 이 몸? 과인? 에이, 아무튼 내가 선언하지 않았느냐! 이 학교는 앞으로 나의 지배하에 놓인다고! 그런데 감히 본좌에게 그런 망말을 하다니!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못할까! 못할까! 못할까……. 얼얼한 귀 때문에 목소리가 에코로 들려온다. 이 이상 저 소송걸면 승소할 것 같은 소음에 노출된 채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어기적 어기적 하면서도 확성기를 빼앗은 다음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는 그 녀석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 두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긴. 말한 그 대로인데?”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둥근 눈매를 장난기로 가득 채운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옥상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때문에 긴 머리가 찰랑거린다.
“자, 봐봐! 저 넓은 나의 영토를!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빈 공간이잖아!”
여전히 먹먹한 귀를 문지르고 있자, 녀석은 내 손을 잡고는 옥상 끝으로 데려갔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밑을 보는 게 두렵지만 일단은 밑을 내려다봤다. 그보다 여기 난간 낮아! 떨어질 것 같아! 엄마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저 운동장도, 저 체육창고도, 저 별관도! 이 건물도! 전부 임자 없는 땅이잖아!”
아니, 그 운동장에는 지금 네 선언에 어이없어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가득 차있다만. 경찰은 다행히도 없다.
“임자 없는 땅이라니 그게 무슨. 여긴 학교라고, 학교!”
“그래. 방금 방학식이 끝난 학교지.”
녀석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런데 도대체…….”
“방학식, 끝났잖아? 그럼 임자 없는 땅 아냐?”
“……엉?”
도저히 의미를 모르겠다. 이 녀석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꽤나 예전부터 알고 있던 바지만,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인 나에게는 그 이상으로 이 녀석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말 머리 나쁘네.”
머리 나쁜 건 너다, 이 멍청아. 아니지. 나사 빠진 건 너다. 두어 개쯤 엄마 뱃속에 두고 나온 거 아냐?
“에이, 너무한다.”
우리 학교의 명물, 통칭 ‘싸이코’인 녀석은 헤헤 웃으며 바람이 기분 좋다는 듯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녀석이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싸이코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싸이코니까. 방학식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정상인으로 보이지는 않겠지.
“그런데, 넌 왜 왔어?”
“니가 맨날 이런 싸이코짓 할 때마다 내가 왜 너한테 찾아왔는지랑 일맥상통하는 이유지.”
전교의 기피대상이 되는 이 녀석과 그나마 말이 통하는 건 1학년 때부터 어울리는 나정도 밖에 없거든. 나 같은 상식과 윤리의 옹호자가 어쩌다 이런 싸이코랑 알고 지내게 됐는지는 꽤 기니까 생략.
“또 그 꼰대들이…….”
툴툴대면서 밑에서 웅성거리는 선생님들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녀석. 나는 한숨을 쉬면서, 늘 그렇듯 선생님들이 ‘니가 가서 좀 말려봐라’ 라고 부탁한 목적에 걸맞게 말했다.
“설명해봐.”
“정말 머리 나쁘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녀석은 말했다.
“어릴 때, 비밀기지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어?”
“……설명하라니까?”
“어릴 때의 로망 중 하나 하면 역시 비밀기지잖아. 하지만 예전이면 몰라도 요즘 도시에 비밀기지가 어디 있겠어. 버려진 오두막집 같은 것도 없고, 차고도 없고, 아파트 단지의 지하실 건물 같은 데는 벌레도 많고 쥐도 살고 영 그렇잖아.”
대화의 고삐를 죄는 건 포기했으므로, 그냥 이 녀석이 생까는 건 ‘설명의 연장’이라는 의미라는 걸로 받아들였다.
“나름대로 아빠 텐트 들고 나와서 만들어보고 했는데, 어른들이 자꾸 방해하더라고. 그리고 어두운 그런데는 왠지 무섭고. 그래서 비밀기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만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지……. 그리고 어제, 갑자기 내 두뇌를 번뜩이고 섬광이 스쳐 지나간 거야!”
녀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내지르고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학교는, 방학 때는, 아무도 쓰지 않는다!”
“…….”
“어차피 아무도 안 쓰는 장소, 그러면 방학 동안이라도 내가 비밀기지, 아니 그냥 기지로 써도 상관없는 거잖아? 그렇다면 이곳은 그 동안에는 내 영토, 나의 성! 내 마음의 고향! 원하는 시설을 마음대로 쓰고, 들여보내고 싶은 사람만 들여보내고, 그렇게 내 영토로 쓰겠어!”
아니, 방학 동안에도 선생님들은 학교에 자주 오시고, 보충수업이나 그런 것도 있고, 뭣보다 왜 학교가 방학 동안에 빈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건데?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당당하게 외쳤다.
“방학은 놀라고 있는 것! 따라서 나는, 학교에서 놀겠어! 내 영토로서!”
“…….”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은 내 뚱한 표정을 보더니 조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는 다시 나에게 밑을 내려다보게 했다. 무서워! 하지 마!
“잘 봐봐. 여기는 우리 땅이야.”
바람이 불어왔다.
5층밖에 안 되는 건물. 그다지 높지도 않지만, 그곳에서 내려다보자 어차피 별 높은 빌딩은 없는 한가한 우리 동네의 경치가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운동장에는 꾸물거리는 사람들. 평소에는 그렇게 좁아보이던 학교가, 이렇게 보니 정말 손에 들어올 듯 작게, 그리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넓게…….
“학교에서 하고 싶던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책상으로 이 안에 비밀기지를 만들어도 좋고, 화학실이나 실험실에서 평소라면 못할 장난, 아니 실험들도 할 수 있고, 평소에는 잠겨있는 창고 안에는 뭐가 있나도 확인할 수 있어! 너 들어본 적 있지? 학교 밑에 로봇 있다는 소문. 그게 진짜인지도 확인할 수 있고, 7대 불가사의 탐험도 좋아!”
정말로 왕궁에서 자기 영토를 가르치듯이, 손바닥을 쫙 펼친 채 녀석은 나를 보고 웃으며 온 학교를 가리켰다.
“그 심심하던 학교를, 얼마든지 놀이터로 만들 수 있다고!”
“…….”
“지금 나를 따르면, 2인자 정도는 시켜줄게.”
“……2인자?”
곰곰이 고민하는 녀석.
“음... 왕은 나니까, 뭐가 좋을까. 내시?”
“그게 어딜 봐서 2인자야!”
“그럼 영의정 겸 좌의정 겸 우의정 겸 장군 겸 경비병 겸 어의 겸 식사담당 겸 노비 겸 내시.”
“내시는 꼭 들어가는 거냐?! 그것보다 2인자라기보다는 잡일꾼이잖아!”
“세상은 피라미드 구조야. 1인자, 왕이 있으니까 그 밑은 다 졸개잖아?”
“역시 그냥 선생님들에게 강경진압을 부탁해야겠어.”
“네 이놈! 반란이라니! 여봐라! 이놈의 목을 쳐라!”
“누가 칠 건데? 졸개는 나뿐인데.”
“스스로 치는 건?”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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