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7일 수요일

사랑에 유효화력이 있다면 전략핵폭탄으로 하겠어요.

원본 : 소실(이쪽은 2차공개본 - http://lightnovel.kr/freewrite/367908)
작성일 : 2011년 8월경.
비고 : 시드노벨 4주년 단편제 참가작.



“역시 현대 개인화기의 최고봉이라면 아말라이트 계열이라고 생각해요. 작은 반동, 정확성도 그렇고, 간단하게 다룰 수 있는 점도 그렇죠. 세계에서 칼라시니코프 계열과 개인화기 시장을 양분하고 있으니까 그 영향력도 확실하고요. 하지만 저는 솔직히 칼라시니코프 계열 소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뭐 그야 신뢰성은 높고 별다른 훈련 없이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는 점은 그렇지만, 사실 그건 아말라이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상대적으로 오염에 취약하다던지, 일부 부품의 내구도가 의문시된다던지 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실전을 많이 치루는 부대 중 하나인 영국 특수부대 SAS는 실제로 아말라이트의 가장 오래된 단골이기도 하고요. 즉 실전에서 검증된 거죠.”
개인적으로 요리의 최고봉은 라면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은 단순히 인스턴트식품으로 폄하하지만, 라면의 진정한 맛은 다른 인스턴트와는 다르다. 인스턴트식품이 보통 조리법에 관계없이 일정한 맛을 내는 것에 비해, 라면은 섬세하다. 물의 양, 불의 세기, 면과 공기의 접촉 시간, 그 모든 것에 의해서 미묘하지만 확실한 맛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람마다 끓이는 라면의 맛이 다르다는 점부터, 라면은 인스턴트식품이 아니라 요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제가 칼라시니코프보다 아말라이트를 좋아하는 건 그 외견도 있어요. 물론 목재를 사용하고 투박한 칼라시니코프의 매력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말라이트의 스마트한 외관을 따라오지는 못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처음에 등장했을 때는 구식 볼트액션 라이플에 익숙한 병사들이 장난감 같다고 놀린 모양이지만, 시대를 뛰어 넘은 획기적인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기능적으로 보이는 총열덮개, 센스있는 리시버, 유곡선의 개머리판……. 나온지 50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봐요. 칼라시니코프는, 투박한 맛이지 그런 세련됨은 없잖아요?”
특히 라면이 요리 중의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간편함 때문이다. 요리는, 아무리 그것이 단순한 것이라고 해도, 재료와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라면은 그런 것이 필요 없다. 물을 끓이고, 면과 스프를 몽땅 집어넣고, 끓이면 완성. 물론 재료를 추가하면 훨씬 좋겠지만, 필수는 아니다. 그저 냄비와 물, 불, 그리고 라면 한 봉지만 있으면 귀찮게 씻고 썰고 할 필요 없이 포장만 뜯어서 넣고 저으면 된다. 이 얼마나 간편한 요리인가.
“저기, 선배. 듣고 계세요?”
“응? 아, 응. 물론 듣고 있지. 그, 뭐시기냐, 라말시니코프 이야기였지?”
“아이 참, 선배! 잘 들어주세요!”
신나게 이야기하던 내 후배, 1학년 강하늘은 내 대답에 뺨을 부풀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면서도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서 이렇게 알지도 못할 군사잡학에 대해서 강의를 들어야 하는 건가, 하고.


강하늘, 내가 알고 지내는 얼마 안 되는 여자애이자, 나를 잘 따르는 아끼는 후배.
작은 강아지 같은 인상의 외모와 아담한 사이즈의 체구, 땋은 머리를 리본으로 묶은 모습 모두 귀엽고, 실제로 성격 자체도 느긋하면서 애교가 있는 게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아이다. 뭐, 현실은 좀 다르지만…….
그렇다. 그녀는 중증의 밀리터리 매니아였다.
여자와 별다른 인연이 없는 내가 그런 하늘이와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로부터 몇 년. 그날의 오해 이후 아무래도 하늘이는 나 역시 그쪽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게임을 하면서 들은 내용을 가지고 장단을 맞춰준 게 잘못이었을까. 뭐, 귀여운 후배와 알게 된 건 소득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이런 내용이어선 설레는 마음도 사라진다.
“정말, 선배는 왜 그렇게 맨날 제가 말하면 제대로 들어주시지 않는 거예요?”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데 오늘은 상담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알고 지내다 보니 이렇게 슬쩍 넘기는 방법도 능숙해졌다. 토라진 얼굴로 툴툴대던 하늘이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어요! 이번 달 잡지에 아말라이트랑 칼라시니코프에 대한 비교기사가 나와서요. 흥분해서 잊고 있었네요. 죄송해요, 선배.”
하늘이는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사실 이야기를 안 듣던 나도 충분히 미안하지만, 여기서 누가 누가 더 미안한지 경쟁을 할 때가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다시 원래 궤도로 돌려놓는다.
“아냐 아냐. 그보다, 상담이 뭐야? 상담할 게 있다고 나를 찾아온 건 처음 아니야?”
“그게, 선배. 선배는 지금 부활동 하시는 거 없죠?”
하늘이는 몸을 가까이 하며 물어봤다. 일단은 명목상으로는 아무거나 고르는 특활부에 들어있지만, 애정이 있거나 한 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특별히 하는 건 없는데? 왜?”
“저, ‘군사연구부’를 만들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구, 군사연구부?”
“네. 군사연구부요.”
그렇게 말하는 하늘이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모두들, 국가의 명운이 지금 이 순간에 걸려있다. 너희들의 목숨을 나에게 다오!’하고 외쳐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외견이야 귀여운 소녀였지만. 나는 일단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기, 왜 갑자기 군사연구부를……?”
“역시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고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요즘 들어 그런 걸 절감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찾아봤지만, 학교에 그런 동아리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없으면 직접 만들려고 해요.”
“…….”
“그런데 저는 1학년이라서……. 만약 만든다고 해도 부장이 필요해요! 그리고 역시 선배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부탁드려요, 선배. 저랑 같이 군사연구부를 만들어주세요!”
하늘이는 내 손을 양손으로 꽉 잡으며 열정적으로 외쳤다. 그 말에 저쪽에서 도서실 사서 학생이 곱지 못한 눈으로 보자, 하늘이는 일단 내 손을 놓았다.
“역시, 안될까요……?”
하늘이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일단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군사연구부라니, 도대체 세상 어느 고등학교에 그런 부서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생각부터 든다. 애당초 선생님들이 과연 허락해주실까. 영 어려울 것 같은데.
“음……. 군사연구부라…….”
“굳이 잘 아는 사람이 와서 같이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즐길 수 있는 부서만 되면 좋겠어요. 부원 문제라던지 그런 건 제가 해결해볼게요. 만약 선배가 생각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부서가 생겼을 때 부장직을 맡아주세요. 그냥 맡아만 주셔도 되요. 부장이 해야 할 일은 제가 다 할 테니까요.”
마침 지금은 학기 초, 곧 있으면 신입생들과 재학생들이 특활부서를 결정할 시기이긴 하다. 확실히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부장이라니, 그것도 군사연구부라니. 사실 난 무기나 밀리터리에 영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늘이를 처음 만난 그 날, 점심을 먹고 나는 특별한 할 일이 없어서 도서실을 찾아갔었다. 지금 다니는 우리 학교 도서실도 그렇지만, 중학교 때 도서실도 상당한 장서량을 자랑했다. 뭐 내가 그렇다고 그런 장서량에 기뻐하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보니 만화책이라던지, 유명한 판타지 소설 같은 것도 있기 때문에 시간 때우기로 자주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날도 책을 뒤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내 시선에 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가한 도서실의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귀여운 외모의 소녀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별로 내가 작업을 걸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그 아이가 뭘 보는지 관심이 갔다. 차분하게, 조용하게 세상과는 동떨어져서 책을 읽는 귀여운 소녀. 왠지 깊이 있는 문학작품을 보거나, 연애소설에 순수한 눈물을 쏟고 있겠지. 나는 지나가면서 소녀가 읽고 있는 책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멈춰서버렸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소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알록달록한 군복을 입고, 각종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소총을 들고 산과 바다를 누비는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이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총의 사진이 나온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속품과 내용물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놓은 것 같다. 나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공황에 빠져서는, 이제는 소녀보다는 책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전투기, 전차, 훈련하는 모습 등등. 소녀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내 시선과, 잡지를 바라보더니, 환한 얼굴로 물어봤다.
“혹시, 밀리터리에 관심 있으세요?”

그 날 이후, 일단 하늘이와 알게 되면서 주워들은 견문은 생겨났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건 아니다. 그저 하늘이와 알고 지내고 대화를 하려면, 오로지 이쪽으로만 일직선으로 직진하는 하늘이를 이해해야했다. 나에게 무기에 대한 정보라면 온라인 게임에서 데미지랑 그런 것에 불과하다. 분명 하늘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겠지. 그렇다고 딱 잘라서 안 된다고 말하기에는 나는 사람이 너무 좋다. 하늘이는 생각에 빠진 내 모습을 보면서, 일단 달래는 느낌으로 이야기했다.
“죄송해요. 역시 너무 갑작스러웠죠? 지금 즉시 대답하시지 않아도 좋아요. 생각해보시고 대답해주세요.”
이 정도면 하늘이 입장에서도 충분히 양보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 생각은 해볼게.”
“고마워요, 선배. 그럼 전 먼저 일어나볼게요.”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책을 챙겨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빌리는 책인 모양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 신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 도서실에는 군사 관련 잡지나 서적도 꽤 된다. 하늘이는 입학한지 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하루 대여 제한 2권을 이용해서 매일매일 그런 책들을 읽어나가고 있었다.
“아, 선배. 이 책 한번 봐보세요. 선배가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지난번에 읽어봤는데 쉽고 재미있게 잘 써졌더라고요.”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책 더미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내 나에게 건네준다. 하늘이는 자신이 읽은 책 중에서 나에게 추천할만한 책들은 이렇게 추천하며 빌려보기를 권장한다. 나는 그 두 권을 챙겼다. 사실 제대로 읽은 건 손에 꼽을 정도지만, 안 읽으면 화내니까.
“그럼 선배, 다음번에 봬요.”
하늘이는 살짝 웃으며 인사하곤 도서실을 나갔다. 나 역시 책을 챙겨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이 없으면 특별히 도서실에 있는 이유가 없으니까.


“또 도서실 갔다 왔냐?”
친구의 질문에 나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곧 있으면 수업이 시작되기에, 책을 서랍장에 꽂아 넣고 교과서를 꺼낸다. 그러나 그 사이 친구의 손이 책을 낚아챈다.
“뭐야, 이건. ‘전차전’? 또 강하늘이야?”
“뭐, 그렇지.”
책을 펼쳐서 대강대강 페이지를 넘기며, 친구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한다.
“걔도 생긴 건 참 귀여운데 아깝지. 이런 것만 아니면 내가 한번 도전해볼 텐데.”
“내 소중한 후배에게 검은 손을 뻗지 마라!”
나는 책을 확 낚아챈다. 친구는 여전히 놀리는 표정으로 히죽거린다.
“아니, 사실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무기랑 군인 좋아하는 여자애는, 음, 좀 그렇잖아? 1학년 여자애들 중에 가장 귀여운데, 역시 그 점이 문제란 말이지.”
“잠깐, 그건 네놈 혼자만의 의견이냐, 아니면 모두의 의견이냐?”
“아, 일단 나는 찬성.”
옆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친구 놈이 손을 들어올린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반 여기저기에서 남학생들이 우루루루 손을 들어올린다. 잠깐, 분명 쟤는 여자애인데?
“그 애가 귀엽긴 하지만, 역시 여자애가 그런 책을 들고 다니는 건 좀…….”
“그거 들었어? 내 친구가 만화 같은 거 좋아하는데, 그런 행사에 캐릭터 옷을 입고 참가하는 행사가 있대. 근데 거기서 걔가 군복 입고 돌아다니는 걸 봤다던데?”
“그런 귀여운 애가 군복? 그건 좀 아니다…….”
“내가 그런 외모라면 하늘하늘한 원피스라도 입고 다닐 텐데…….”
반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하늘이를 둘러 싼 수다. 대체적으로 역시 그 취미가 문제인 모양이었다. 하늘이와 친한 나는 그걸 빼버린 하늘이는 이제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아니, 그것보다, 걔가 이렇게 유명인이었어?
“야, 너 분명 그 강하늘이라는 애랑 친했지? 너도 그런거 좋아하는거야?”
여자애 하나가 나에게 다가오며 묻는다, 윽, 갑자기 공격의 목표가 바뀌었잖아?
“아냐, 나는 별로…….”
“에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 책은 뭐야?”
나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본다. 전차전. 리차드 E. 심프킨 저. 도응조 역. 표지에는 다양한 전차의 사진과 왠 코쟁이 아저씨의 사진이 새겨져 있다. 나는 재빨리 책을 서랍장에 집어넣는다.
“이, 이건 걔가 읽어보라고 추천한 거라서 빌려온 것뿐이야! 트, 특별히 내가 이런 걸 좋아하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착각하지 마!”
“그렇게 말해도 사실은 좋아하는 거 아니야? 추천한다고 빌려오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여자애는 웃는다. 평범한 웃음인 것 같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비웃는 웃음으로도 보인다. 그 생각에 나는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래, 겉에서 볼 때 분명 나도 군사나 무기에 관심 있는 소년으로 보일 것이다. 매일매일 밀리터리 매니아 소녀와 도서실에서 대담을 나누고, 대화 내용도 현대 무기의 트렌드라던지, 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의 창의적인 전술들이라던지, 좋아하는 전투기나 전차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옆에서 듣기만 해도 다분히 전문적이어 보인다. 그리곤 며칠에 한 번씩 하늘이가 추천해온 군사 서적을 들고는 교실로 돌아온다. 이쯤 되면 오해가 아니라 기정사실이다.
“뭐, 취향이니까 존중해줘야지(웃음).”
“그건 그렇지(웃음).”
윽, 그 웃음이 신경 쓰입니다만. 그 사이 수업 벨이 울리자,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체면과, 하늘이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한 가득이었다. 생각해보면 하늘이가 나 이외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본적이 없다. 그리고 같은 반 아이들의 말을 들어볼 때도,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에 비추어 봐도, 역시 하늘이의 취미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업 내용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며 생각해봤다. 밀리터리를 포기한 하늘이의 모습을. 귀여운, 나의 소중한 후배는 밀리터리 잡지 대신 연애소설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웃는다. 친구들과 요새 유행하는 가수의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에게 추천해주는 것도 요즘 유행하는 순정만화나 가수의 앨범이다. 나는 그런 걸 가지고 교실로 돌아온다. 아, 이 얼마나 평화로운 광경인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하늘이가 아까 도서실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군사연구부. 그 위력에 머릿속의 상상이 그대로 작살이 난다. 그래, 그건 그렇지. 강하늘, 내 후배가 밀리터리를 포기하는 건 단순한 백일몽이었을 뿐이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쉰다. 하긴, 부서까지 만들어버리면 하늘이는 더욱 중증으로…….
머릿속 구석에서 전등이 밝혀졌다.
그래, 그랬어. 만약 하늘이를 도와서 부서를 만들면, 하늘이는 동류들과 모여서 회복할 수 없는 지점까지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하늘이를 도우는 척 하면서 계획을 박살낸다면? 하늘이가 밀리터리 취미를 그만 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선배, 역시 밀리터리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나만 관심이 있었던 걸까요? 저도 보통 여자아이가 되겠어요…….’
‘그래, 하늘아. 아무래도 우리는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이야. 자, 밝은 세계로 나아가자!’
‘알겠어요, 선배! 저 무기를 버리겠어요!’
‘잘 생각했다, 하늘아! 우리 이제는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자!’
“으흐흐흐…….”
내 사악한 웃음소리에 선생님이 고개를 돌린다. 나는 천진한 얼굴로 선생님을 마주 바라본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칠판을 바라보며 설명을 계속하신다. 미소를 지으며, 나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군사연구부 계획을 처절하게 박살 낼 수 있을까 하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완전 작살내듯이 말이다.
이런, 나도 중증인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맡아주시는 거예요, 선배?”
“그럼! 소중한 후배가 나를 믿고 맡겼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하늘이는 내 대답에 정말 기쁜 듯이 웃어보였다. 윽, 이런 시선을 받으면 양심에 가책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한다.
“그럼, 일단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뭔가 생각한 모집 방법 있어?”
하늘이는 신이 나서 폴더를 꺼냈다. 저 폴더는 하늘이가 늘 들고 다니는 폴더로, 각종 중요한 정보가 채워져 있는 모양이다. 사실 내용물은 본 적 없지만. 몇 장의 서류를 꺼내며, 하늘이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제가 몇 가지 생각해봤는데요, 역시 교내에 있는 매니아들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일단 대자보를 좀 만들고, 관심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찾아보게요. 부를 만들려면 적어도 5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일단 선배랑 제가 있으니까, 세 명 정도만 찾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세 명이라…….”
세 명. 이 넓은 고등학교에서 찾으면 충분히 나올 수도 있는 크기이다. 아니, 사실 난 하늘이 외에는 본 적 없지만, 내 몇 안 되는 지인 중에도 있는데. 그 정도 인원은 나오겠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문제는 두 가지. 첫 번째는 그 세 명을 찾을 수 있겠는가, 둘째, 찾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벽보 디자인은 대강 생각해봤거든요? 한 번 봐주실래요?”
“어? 그래. 보여줘 봐.”
하늘이는 종이 몇 장을 꺼내서 나에게 건네줬다. 나는 그림과 글이 써진 종이를 받아 읽어본다.
첫 장. 2차 대전의 가장 유명한 전차, 독일군의 티거와 거기에 올라탄 전차병이 그려져 있다. 격파된 걸로 보이는 불타는 T-34를 배경으로, 전차병이 외치고 있다. ‘우리는 당신을 원하고 있다! 군사연구부에 지원해라!’ 2차 대전 독일군 모병 포스터로 딱 일 것 같다.
두 번째 장. 미군의 현용 비행기 F-15가 날고 있다. 저 멀리에서 적기가 불을 뿜으며 떨어지고 있다. 넓은 하늘을 바탕으로 글씨가 써져있다. ‘이 학교를 제패할 자는 누구인가, 당신도 가능하다! 군사연구부!’ 미 공군이 탐낼 것 같다.
세 번째 장. 미군의 특수부대 병사가 자세를 잡고 서있다. 글씨가 플랜카드인지 현수막인지를 들고. ‘누가 최강인가? 우리가 그렇다! 당신도 가능하다, 군사연구부!’ 솔직히 좀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는 깊은 신음을 내면서 인상을 구겼다. 하늘이는 예상한 것과 다른 내 반응이 충격인 모양이었다.
“저, 저는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좀 아닌가요……?”
“아니, 멋지긴 한데…….”
너무나도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줘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 것 같았다. 뭐, 이쪽 취미를 가진 아이들이라면 관심을 가져줄 것 같지만, 그 외의 인원에게는 다른 의미로 강렬한 인상을 줄 것 같다. 나는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그, 역시 너무 직접적이지 않을까? 네가 말 한 대로 잘 모르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오고 싶다면, 오히려 너무 분명해서 거부감을 갖게 될 것 같아. 조금 더 얌전한 포스터로 해보는 건 어떨까?”
“으으……. 역시 그럴까요…….”
하늘이는 명백하게 실망한 눈치였지만, 미안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만일 일이 안 풀려서 내가 정말 군사연구부의 부장을 맡을 때가 걱정되거든.
“발상을 좀 전환해보면 어떨까? 너무 전문가를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그냥 흥미가 있는 사람도 부담 없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어차피 관심이 있는 애들은 그 정도에도 찾아올 테니까 말이야.”
“음……. 역시 선배 말이 맞는 것 같네요. 고마워요, 선배. 역시 선배에게 상담하길 잘했어요.”
웃는 얼굴로 대답하는 하늘이. 아쉬운 기운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일단 납득은 해준 것 같다. 근데 왜 난 정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준 거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적당히 관심을 가질 정도면…….”
“역시 남자애들을 노리는 게 좋지 않을까? 남자애들은 게임 같은 거 좋아하고, 총게임을 많이 하니까, 어느 정도 주워들은 게 있을 테니까, 그런 점을 어필하면 괜찮을 것 같아.”
“온라인 FPS에 나오는 총이나 그런 걸로 관심을 갖게 만든다는 거죠? 그거 좋네요, 선배!”
내 의견에 하늘이는 바로 빈 종이를 꺼내 뭔가를 그리고 적기 시작했다. 아차, 실수했다. 아예 도와주는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역시 그건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기에, 나는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으로 하늘이가 그리는 포스터를 보고 있었다.
“다 됐어요, 선배. 한번 봐주시겠어요?”
하늘이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그려 나에게 건네주었다. 여전히 특수부대원이 그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예전보다는 자세하지 않았다. 시간 때문일까, 일부로일까? ‘당신이 게임에서 사용하던 그 총,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지 않으세요? 군사연구부로 오세요!’ 아까보다 훨씬 무난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로 이걸 오케이하면 안 된다.
나는 속으로는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겉으로는 아쉬운 느낌으로 말했다.
“음, 좋아지긴 했는데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조금만 더 자세히 써보면 어떨까? 이러면 게임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니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광고 만드는 건 어렵군요…….”
하늘이는 역시 약간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다시 포스터를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도와주는 척 하면서 훼방 놓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구나. 나도 모르게 귀여운 후배를 도와줘야겠다, 라는 생각에 진짜로 좋은 의견을 내놓고 있었어.
“이번 건 어때요?”
‘쏘고 맞추기만 하는 게임에서 벗어나세요. 당신이 사용하는 그 총에 대해서, 전술에 대해서, 실전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군사연구부로 오세요!’
적당히 무난한가, 이정도면. 게임에 나오는 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아이는 있어도, 전술까지 알고 싶어 하는 아이는 별로 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
“정말요?”
하늘이는 눈에 띌 정도로 기뻐하고 있다. 윽,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이걸 복사해서 일단 붙여볼까요?”
“너,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닐까?”
“무슨 말이에요, 선배. 부활동 선택은 다음 주까지 라고요. 빨리 만들어서 돌려야 그때까지 관심을 갖고 찾아오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겠지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선배. 같이 오늘 방과 후까지 교실에 이 포스터를 붙이죠!”
하늘이는 놀라울 정도의 행동력으로 외쳤다. 아니, 부를 직접 만들겠다고 하는 것부터 행동력은 뛰어난 걸까? 나는 일단 하늘이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하늘이는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하늘이는 포스터를 각 교실마다 붙이기 위해서 한 무더기를 복사해왔다. 그리고는 그걸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가죠 선배. 점심시간부터 붙여야 다 돌릴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그 한 무더기의 포스터를 바라봤다.


그 한 무더기의 포스터를 든 채, 나와 하늘이는 교무실에 앉아있었다. 선생님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니들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 하지만 이런 건 사전에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야.”
하늘이는 이미 입이 한참은 나와 있었다.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부서 신청을 해둔 뒤에, 인원 모집허가가 나와야 너희들이 포스터를 붙이거나 방송 할 수 있단 말이야. 이렇게 마음대로 하면 곤란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잘 알겠습니다.”
나는 토라져있는 하늘이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 후 시간을 이용해서 포스터를 교실마다 붙이던 우리는 선생님들에게 붙잡혀 여기까지 끌려왔다. 곧 있으면 특별활동 부서를 결정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무허가로 이런 걸 붙이면 안 된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먼저 부서를 담당해줄 고문 선생님을 구한 뒤에 현재 인원수를 확인하고, 그게 5명이 넘어야 비로소 부서를 홍보해도 좋다는 허가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하늘이 역시 ‘5명이 넘으면 부서 허가가 나온다’ 정도만 알았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곤란하다는 듯이 포스터 한 장을 들어 올려 바라봤다.
“거기에, 역시 이런 부서는 조금…….”
“이런, 부서라뇨?”
윽, 하늘이가 토라지다 못해 화났다. 하늘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늘이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나는 탁자 아래로 하늘이의 허벅지를 툭 치면서 대신 말했다.
“저기, 선생님, 이런 부서라는 말씀은…….”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역시, 군사연구부는 조금, 허가를 내리기 곤란한데.”
선생님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 선생님이 특활부서를 담당하는 선생님인 모양이다. 나는 군사연구부에 당혹해하는 선생님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됐지만, 아무래도 하늘이는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다.
“군사연구부가 뭐가 어때서요?”
하늘이는 완전히 따지는 말투였다. 선생님은 그런 심정을 이해하는 듯 했지만, 그래도 잘 타이르듯 말했다.
“에, 하늘아. 아무래도 고등학교에서 군사연구부를 허가하는 건 좀 그렇단다. 무기나 군대나 그런 걸 연구하는 부서를 학교 내에서 인정하는 건, 조금…….”
“무기나 군대를 연구하는 부서가 왜요?”
하늘이는 더욱 성이 났는지 거칠게 말했다. 좀 진정하지. 내가 탁자 아래로 툭툭 치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하늘이는 탁자라도 엎을 기세였다. 난 하늘이가 이 이상 화를 내기 전에 말리기 위해 말했다.
“선생님, 저희도 그런 점은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나름대로 이쪽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깊이 공부해보기 위해서 부서를 만들려고 한 겁니다. 그런 부분도 조금만 이해를 해주시면…….”
“그래, 너희가 열정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을 모아서 부서를 만들려고 하는 건 알아. 그리고 선생님으로서 너희를 응원해줘야 하는 점도 알고. 하지만 역시 무기나 군대에 대해서 연구하는 건, 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구나. 결국 무기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전쟁을 연구하는 거 아니니? 전쟁을 좋아하는 걸로 다른 선생님들이 오해하실 수도 있어.”
“그건……!”
나는 하늘이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말을 끊는다.
“저기, 선생님, 그건 아닙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다만 다른 선생님들이나 학생들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둘째로 교육적인 측면이 그래. 알다시피 다른 부서, 서예부라던지, 문예부라던지, 만화부라던지, 합창부라던지, 영화감상부까지 누가 보기에도 학생들의 교육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잖아? 그런데 솔직히, 미안한 소리지만 군사연구부는 앞에서 말했듯이 다르게 보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야. 그런 이상 미안하지만, 군사연구부는 부서로서 인정하기 힘들단다. 지금 인원도 나오지 않고.”
하늘이는 여전히 부글부글 끓는 모양이지만, 나는 억지로 말렸다. 사실 여기서 하늘이가 한바탕 난리를 벌이게 하고 군사연구부 같은 건 저 멀리로 내던지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런 건 별로 바라지 않는다. 하늘이에게도 악영향이고.
“선생님, 그 부분은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런 오해는 저희가 활동 하면서 충분히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원수도 홍보를 통해서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보고요.”
“나 역시 하고 싶다는 의욕 있는 학생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내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자,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겠다. 그렇게 진심이라면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겠지. 일단 인원은 모자라지만 임시부서로 등록시켜줄게. 선생님은 너희들이 알아보고. 하지만 인원수가 미달되면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거다? 그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봐라. 기분은 복잡하지만, 잘되길 바라마.”
나는 포스터 뭉치를 들어 올리며 일어났다. 하늘이는 여전히 화가 난 모양이었지만, 내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일어났다.
하늘이는 교무실을 나가자마자 쌓였던 분노를 털어놓았다.
“군사연구부가 뭐가 어떻다고 그래요! 전쟁을 좋아한다니, 그런 저 같은 밀리터리 매니아를 전면으로 무시하는……. 아아! 한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진심으로 화를 낸다. 하늘이가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건 처음 본다. 그런 취급을 받은 게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다. 나는 일단 하늘이를 진정시키며 말한다.
“뭐, 잘 풀렸잖아? 그럴 때는 잘 넘어가는 게 최선이야. 덕분에 선생님도 이해해 주셨잖아?”
“그야 그렇지만, 선배는 분하지도 않으세요?”
나야 분할 게 없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처지니까, 나도 안타깝다는 체를 하며 말한다.
“분하기야 하지만, 이런 때도 있는 거야. 선생님의 의견이나 처지도 이해해드려야지.”
“흥, 전 이해 못해요!”
아이 같은 면은 여전하구나. 나는 볼을 부풀리고 입을 삐쭉삐쭉 내미는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너, 너무 애 취급 하지 말아주세요!”
“하하, 알았어. 어쨌든 허락도 받았으니, 포스터나 돌리러 가자.”
하늘이는 빨개진 얼굴로 여전히 툴툴대며 나보다 두 걸음 정도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분명 난 부서를 박살 낼 생각이었는데. 보는 사람도 없지만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팔자일까. 나는 하늘이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포스터는 나와 하늘이가 모든 교실에 빠짐없이 붙였다. 붙일 때마다 아이들은 1학년 후배와 2학년 남학생이 들어와서 뭔가 이상한 걸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이는 모습과, 그 포스터의 내용에 관심을 가졌다. 일단 하늘이를 돕기 위해서 부서를 박살낸다는 초기의 목표를 포기하고 진심으로 돕기로 했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아이들의 뜨거운 수준의 관심이 영 거북했다.
학교에서 만든 부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만든 부서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겠다며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어느새 교실마다 뒤편의 게시판은 만화동아리며, 체육부며, 밴드부며, 기타 등등 부서들의 포스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순회공연을 돌면서 홍보를 하기도 했다.
“역시 우리도 저런 걸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선배.”
나를 찾아온 후배는 그런 열정이 아무래도 부러운 모양이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부담되기에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우리는 인원도 두 명 밖에 안 되니까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두 명’ 뿐이니까 더더욱 해서 인원을 늘려야죠! 신생부서인 만큼 더욱 노력해야한다고요!”
솔직히 나는 땀 흘리는 청춘이라던가 목표에 매진하는 노력이라던가, 그런 뜨끈뜨끈한 단어랑은 체질 상 안 맞는 인간인데……. 주목받는 일은 아무리 해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자, 저기 지나가는 농구부를 봐라. 경기용으로 맞춘 유니폼을 다 같이 입고, 샌드위치 표지판을 걸치고 플랜카드를 든 채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외친다. “청춘의 땀방울을 우리 농구부에서 함께 흘립시다!” “거기 자네, 농구 싫어하나? 슬램덩크 한 번 해보고 싶지 않아?” “못한다고? 에이 괜찮아 우리가 가르쳐줄게! 이름하고 반만 알려줘! 자, 여기에다가 적어줘. 그렇지…….” 저것들은 도대체 어디의 청춘만화에서 걸어 나온 거야? 주위에서는 학생들이 그 소란에 관심을 가지고 고개를 기웃거린다. 음, 확실히 광고는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역시…….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려본다. 군복을 입고 군장을 맨 나와 하늘이가 플랜카드를 들고 교내를 행진하며 외친다. “군사연구부는 당신을 환영한다! 대한민국 남아라면 언젠가 가야하는 그곳! 자,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 없는가?” “군사연구부로 오세요! 전차, 비행기, 총기, 전쟁사, 가리지 않습니다! 밀리터리에 대한 당신의 지식을 보여주세요!” “자, 거기 학생! 역시 건장한 남자라면 무기라던 지에 관심 있지 않은가? 우리 군사연구부는 그런 자네를 환영한다! 자, 여기 서명해주게. 지금이라면 특별히…….” 분명 같은 홍보인데 이미지가 엄청 다르다. 뭐랄까, 자칫 서류 내용을 확인 안하고 서명하면 외인부대에라도 끌려갈 것 같은, 그런…….
“저기, 하늘아, 역시 이건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으, 선배는 왜 그렇게 제 의견에 반대만 하시는 거예요?”
하늘이는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뭐라 할 말은 없는데 말이지……. 그래도 그게 좀…….
“그럼 선배, 부장답게 다른 대안을 제시해주세요!”
“대, 대안?”
대안이라, 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린다. 대안……. 홍보가 되는 대안……. 팔짱을 끼고는 골똘히 생각해본다. 역시 군사연구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요소는 과연 아이들이 여기가 뭐하는 부서이고 뭘 할 수 있을지 궁금증을 풀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역시 저런 홍보가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좀 그렇단 말이야……. 그렇다고 책상을 빌려서 안내코너를 만들면, 내가 우려하는 모습이 더욱 강하게 나타날 것 같으니까 제외하자. (“어이, 거기 지나가는 학생, 자네 군사에 관심이 많을 것 같군. 군사연구부에 관심 없나? 여기 모병지원서……. 아니지, 가입서에 서명을…….”) 그렇다면 그 외엔 뭐가 좋을까…….
“설명회, 는 어떨까?”
“설명회요?”
하늘이는 갸웃하면서 되묻는다. 리본으로 묶은 머리가 살짝 흔들린다.
“역시 군사연구부가 뭐 하는 곳인지, 왜 우리가 밀리터리를 연구하려고 하는지 설명하는 게 제일 필요할 것 같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교실을 빌려서, 날짜와 시간을 정한 다음에 설명회를 해서 이해를 돕는 게 어떨까?”
실제로 많은 부서들이 이런 식으로 설명회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서를 결정하는 아이들은 많은 부서 중에서 어떤 부서가 재밌을지 고민하는 법이니까. 이 부서는 무엇을 하는 부서고, 왜 다른 부서가 아니라 여기에 들어와야 하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뭐 대부분은 뻥치기지만. 작년에 낚였다.
“설명회라……. 역시 선배에요!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하늘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방법인 것 같다. 하늘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결정 됐으면 빨리 교실을 빌리고 설명회를 홍보하죠!”
“잠깐만, 어째서 너는 그렇게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바로 흥분하는 거야!”
“원래 모든 일은 기회가 왔을 때 해야 하는 법이에요! 쿠르스크에서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독일군이 진거 모르세요? 생각 난 지금이 바로 기회에요!”
“아니, 그래도 조금만 진정하는 게…….”
“저는 설명회 홍보용지를 만들고 설명회 준비를 할게요! 선배는 교실을 잡아주세요! 장소랑 시간이 결정되면 바로 붙이게 즉시 알려주시고요! 조금 있다 보죠 선배!”
하늘이는 내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아, 저 애는 어째서 저렇게 한 번 꽂히면 망설이지도 않고 직진하는 걸까? 나는 한편으로는 걱정하며, 한편으로는 감탄하며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교실이라도 알아보러 가야겠다. 후배, 하늘이가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도와줘야겠지. 적어도 하늘이가 열심히 만들어왔는데 교실이 없다는 것 때문에 실망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방과 후 시간을 노려서 교실 하나를 빌리기로 결정이 났다. 하늘이는 즉시 다시 교실을 돌면서 포스터를 갱신하고, 설명회를 위해 준비하겠다고 열심인 모양이었다. 이번 기회에 밀리터리 취미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열의에 불타고 있다. 그 때문인지 그 이후로 며칠 되지도 않긴 했지만,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정말 어지간히 열심이구만.
“여어, 부서 만들기는 잘되어 가냐?”
“나름대로 열심히는 하고 있지.”
그리고 설명회 당일 아침.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의 친구 놈이 말을 건다. 첫날 하늘이를 노리던 그놈이다.
“생각보다 열심이구나. 역시 너도 그쪽에 취미 있는 거야?”
“소중한 후배가 열심히 노력하는데, 선배로서 최대한 도와줘야지.”
“나도 하늘이도 있는데 관심 가져볼까…….”
“내 소중한 후배에게 검은 손을 뻗지 마라!”
녀석은 히쭉 웃어 보인다. 윽, 왠지 내가 진 느낌이다. 그러나 친구는 이윽고 웃음을 지우며 말한다.
“근데, 분명 너희 설명회 오늘 오후였지?”
“오지 마!”
“아니, 진지한 말이야. 적어도 너한테는 좀 들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농담인 줄 알고 흘려 넘기려고 했지만, 녀석의 표정은 묘하게 진지했다.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본다.
“‘나한테는 들려준다’고? 뭔가 문제라도 있어?”
“음, 나도 지나가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친구는 의자를 내 쪽으로 가까이 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하늘이를 노리는 시답잖은 놈이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그런 면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긴장하면서 녀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소문이긴 한데, 아무래도 학교의 질 나쁜 놈들이 너희들에게 관심을 가졌나봐. 왜, 만화동아리를 괴롭히던 놈들 있잖아?”
“아아, 그러고 보니…….”
나는 인상을 찌푸린다. 고등학교라면 늘 그렇겠지만, 이 학교에도 날라리 같은 놈들은 있다. 놈들은 가끔가다가 동아리나 부서를 괴롭히곤 했다. 작년 만화동아리도 그 피해자였다. 다행히 큰 문제는 되지 않고 결국 좋게 좋게 끝나긴 했지만.
“왜, 취미 같은 거에 깊게 몰두하는 애들은 주위에서 좋게 안보잖아. 특히 인도어 취미는. 작년에 만화동아리도 그래서 공격받았던 거고. 아무래도 그런 놈들이 이번엔 너희에게 관심을 가졌나봐. 군사연구부 포스터를 찢고 다닌 놈들도 그 놈들인 거 같아.”
순간 전율이 느껴진다. 나는 급하게 몸을 기울이며 묻는다.
“잠깐,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포스터를 찢어?”
“뭐야, 너 몰랐어? 매일매일 포스터가 새것으로 바뀌기에, 당연히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니, 난 처음 듣는…….”
몸에 소름이 돋는다. 녀석도 비슷하게 눈치 챈 모양이지만,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여하튼, 그래서 후배나 친구들에게 군사연구부 설명회에 가지 말라고 하고 다니는 모양이야. 여러 가지 안 좋은 소문까지 퍼트리면서.”
“뭐? 아니, 우리가 뭐 한 것도 아닌데 왜……?”
“낸들 아냐. 그보다 난 아는 줄 알았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어?”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은 걱정과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버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그럼 알아두는 게 좋겠다. 사실 다른 애들도 군사연구부를 별로 좋게 보고 있지 않아. 너희가 뭔가를 했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곱게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야.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도 그런 면을 알고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걸 내켜하지 않는 모양이고.”
“…….”
“나도 뭐, 도와주곤 싶지만 그런 건 역시 좀 그래서……. 힘이 못돼서 미안하다. 미안한 소리지만, 군사연구부는 잘 안 풀릴 가능성이 높아.”
뭐라고 목소리가 안 나온다. 예상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래, 내가 왜 하늘이가 취미를 그만두기를 바랐던가. 분명 하늘이는 그 때문에 고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하늘이가 더 이상 오해받거나 좋지 않은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서 후배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역으로 안에서 방해를 넣으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서를 만들려고 홍보를 하다 보면, 오히려 더욱 눈에 띄게 된다. 나는 그 점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스스로의 멍청함에 혀라도 깨물고 싶다. 나는 공황상태에 빠져 생각했다. 그래, 일단 하늘이를 만나야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선배…….”
그리고 나는 그 광경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졌다. 하늘이가 있던 곳은 자신의 반이 아니었다. 하늘이는, 낙서가 된 포스터를 떼어내고 새로운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다. 낙서는, 장난기 어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적의가 보이는, 그런 낙서. 하늘이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면서 옆머리를 만졌다.
“헤헤, 선배가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결국 들켜버렸네요. 역시 전 물밑공작 같은 건 안어울리나 봐요.”
“농담 할 때가 아니잖……!”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뻔하다, 이쪽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애써 목소리를 줄인다. 그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단순히 큰 소리 때문은 아닌 것 같다. 하늘이는 여전히 헤헤 웃으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분명 오늘 설명회를 하면,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와줄 거예요! 그럼 분명 부서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선배.”
하지만 그 표정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려주고 있었다. 하늘이는 거짓말 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않다.
“그래서, 한동안 안보였던 거야?”
“굳이 이것 때문은 아니에요. 정말로 설명회 준비 때문이었어요. 선생님 말대로 다들 좋지 않게 보더라도, 설명회에서 제대로 설명한다면 다들 알아줄 테니까요.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하늘이는 애써 기운차게 웃어보였다. 나는 그런 하늘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종이 울렸다. 아침조례 예비 종이었다.
“아, 벌써 종이 울렸네요. 다른 반은 쉬는 시간에 가야겠어요. 선배, 그럼 조금 있다 방과 후에 보죠. 괜찮아요, 설명회에서 제대로 알아줄 수 있게 열심히 노력했으니까요.”
나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건 단지 소문일 뿐이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설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설득했다.
불안은 마음속에서 눈덩이 불어나듯 커져가고 있었다.


방과 후. 하필이면 청소당번이 튀어버렸기에 다음 날 담당이던 내가 대타를 맡게 되었다. 급해 죽겠는데. 나는 청소당번에게 맹렬한 적의를 느끼며 급하게 반을 청소했다. 수업이 끝나고 바로 설명회가 있기에, 지금 하늘이는 혼자서 설명회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그런 점을 말했지만, 선생님은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얼마 전 교무실에서 들은 이야기까지 떠올라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아냈다. 나 스스로도 이 정도로 불안한 적은, 걱정된 적은 여태까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하아, 하아…….”
겨우 청소를 끝내자, 이미 설명회가 시작한 지 10분이나 지나있었다. 나는 온힘을 다해 설명회로 쓰이는 교실로 뛰어왔다. 괜찮다. 애써 심호흡하며 나는 생각했다. 그럴 일은 없다. 분명 안에서는 하늘이가 아이들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생각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불안이 제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겨우 숨을 고르고, 나는 문을 열었다. 그래, 잘 될 거야. 분명 아무 일 없을 거야.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보기 좋게 부서졌다.
교탁에 서있는 하늘이.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켜둔 영사기의 소리만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늘이는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더욱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아, 선배, 오셨어요?”
“이건…….”
“헤헤, 다들 늦는 모양이에요.”
하늘이는 텅 빈 교실을 바라본다. 웃음은 짓고 있지만, 텅 빈 것 같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아직, 아무도, 안 왔어요.”
“…….”
참을 수 없는 무력감에, 다리에 힘이 풀린다. 결국 현실이 된 불안이 마음속에서 제 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나는 애써 말을 쥐어짰다. 뭐라고라도 말해야한다.
“그, 그러게. 나처럼 청소당번이라도 걸렸나? 하하, 시간은 좀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그러죠…….”
그렇게 말하는 하늘이의 표정은, 그러나 밝지 못했다.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 영사기의 소리와 함께, 시계의 초침소리가 공백을 메운다. 째깍, 째깍. 초침이 돌고, 분침이 움직인다. 제발, 한 명이라도 와줘.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시계를 바라봤다. 늦어도 좋아. 누구라도 좋아. 제발 한 명이라도 와줘. 그러나 시계는 용서 없이 움직인다. 5분, 10분…….
결국 30분이 다 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기 시작하는 석양빛이, 커튼 너머로 오렌지색 빛을 내뿜는다. 하늘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러면, 설명회는, 이걸로…….”
“잠깐, 잠깐만 기다려!”
나는 외친다. 하늘이가 나를 바라본다. 얼굴에 떠오른 감정 때문에, 내가 다 미칠 것 같았다.
“여기, 한 명 왔어. 부장인 나에게라도, 설명해줘, 군사연구부의 활동을. 우리가 뭘 할지를 말이야.”
하늘이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컴퓨터를 조작한다.
“알겠어요. 그러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군사연구부는, 밀리터리, 즉 무기라던지, 군대라던지, 그런 과거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역사의 한 부분을 연구하는 부서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쉽게 생각하시듯이, 이러한 취미는 그다지 좋지 못한 시선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봤을 때 전쟁이나 군대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저희 군사연구부는 이런 점에 집중해서, 그렇다면 그런 과정 아래에서 무기나 군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계속해줘.”
“이러한 연구는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폭력적인 면이 있지만, 역사의 비극이지만, 전쟁, 무기, 군대는 지금까지 쭉 내려져왔어요. 그리고 단순히 남의 것을 빼앗고, 억압하는 역할 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 군대와 무기의 본질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 격언에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전쟁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재난, 예를 들자면 화재나, 홍수, 지진 같은 자연재해에 대비하듯이,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폭력을 사용해서 우리를 위협할 때 그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
“무기나 군대에 대한 취미를 흔히 밀리터리 취미라고 해요. 물론 그 중에는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밀리터리 취미는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 문제점을 오히려 더 자각하고 있어요.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인지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런 만큼,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알아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점을 잘 알수록, 그에 대해 알아갈 수록, 그를 예방하고 이겨낼 방법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계속, 해줘…….”
“그런 만큼, 저희 군사연구부는 그런 측면에 집중해서, 비록 미약하나마 전쟁과 군대, 무기에 대해 알아가고, 흑, 그것이, 으윽, 어떻게……."
천천히, 하늘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계속, 해…….”
“흐윽, 우윽, 으으……. 으아아아앙…….”
결국 하늘이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하늘이는 조용히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뭐라 말 할수 없는 씁쓸함을 억지로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이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렇게, 흐윽,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와주면, 와서 설명을 들어주면, 훌쩍, 분명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아. 알고 있어…….”
하늘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하늘이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내 품 안에 안긴다. 나는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나와 하늘이는, 한참을 그렇게 빈 교실에 서있었다.


하늘이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군인이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그 위의 아버지도, 아버지도……. 예전부터 그런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 쪽도 마찬가지이다. 애당초 두 분 모두 군대에서 만나셨다고 했다. 그런 두 집안인 만큼, 아예 집안 모임은 군인 모임 비슷한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서일까, 하늘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군대나 그쪽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무리도 아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그러셨으니까. 유치원에서 장래희망을 적을 때, 모두가 대통령이니 가수니 화가니 하는 꿈을 말할 때 하늘이는 군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 모양이다. 그런 서적을 보고 자라며, 클수록 더욱 관심은 커져갔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이 ‘다르다’지 ‘틀리다’로 받아들여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릴 때야 오히려 남자애들과 어울리면서 병정놀이니 하는 것을 한 모양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남자와 여자로 갈리자 하늘이의 특별한 점은 더욱 두드러졌다. 여자애 그룹에 끼지도, 그렇다고 남자애 그룹에 끼지도 못한 하늘이는 혼자서 지내왔다. 몇 안 되는 친구들도 하늘이의 그런 점에 대해서 지적했지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하늘이에게 그것은 괜한 참견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나마 선배를 만나면서, 선배가 제 이야기를 들어줘서 기뻤어요. 하지만, 역시 이런 건 이상하겠죠? 고등학교에 와서 부서를 만들면, 나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서 지내면 나아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역시 잘 안되네요…….”
하늘이는 빨개진 코를 문지르며 웃어보였다. 같이 운동장 벤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하늘이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마지막으로 해볼 생각이었어요. 정말로 내가 틀린 건지, 아니면 지금까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건지, 그걸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설마 했더니 역시나, 랄까요. 헤헤.”
“…….”
하늘이는 가뿐한 몸놀림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역시 이런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보통 아이답게 되겠어요.”
“…….”
주먹을 꽉 쥐는 그 자세는 힘이 넘쳤지만, 하늘이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작아보였다.
“그래도 선배는 저를 이해해줘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쑥스러워.”
“헤헤.”
나는 일어났어도 여전히 만지기 좋은 높이에 있는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지 눈을 얇게 하며 하늘이는 웃어보였다.
“그럼 선배,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요. 앞으로는, 책을 추천한다던지, 그러지 않을게요. 원래 선배도, 별로 그쪽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러나 하늘이의 목소리는 별로 어둡지 않았다. 하늘이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앙증맞은 가방을 메고는 말했다.
“내일 봬요, 선배. 정말 고마웠어요.”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교문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말없이 그런 하늘이를 바라보다, 교문 밖으로 나간 것을 보고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하아. 폐 속이 텅 비어버릴 정도로 깊게 한숨을 내쉰다. 몸을 뒤로 젖히고 위를 바라보자, 군청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질문, 이 중에서 가장 나쁜 놈은 누구일까요. 일번. 특별한 취미를 가졌던 후배. 이번. 그런 아이를 이해해주지 않은 아이들. 삼번. 후배를 이해해주는 척 했지만, 사실은 그런 후배를 맘대로 재단하고 한 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선배.
“누가 봐도 내가 제일 죽일 놈이네…….”
있는 힘껏 혀를 깨문다. 아프다. 그 아픔에 힘을 푼다. 결국 난 그런 놈이니까.
좌절감에 몸이 저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결국 네 기대대로 됐다. 강하늘, 소중한 후배는 이제 그런 취미를 버리고 네가 원한 대로 귀여운 보통의 여자아이가 되기로 했다. 기쁘냐? 나는 몸을 비틀다 벤치에 쓰러져버렸다. 털썩.
“아아…….”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다. 하늘이가 군사 전문서적 대신 패션잡지를 들고 다니고, 해외의 군가를 듣는 대신 유행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들으면 기쁠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하늘이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좋아하는 아이를 이해하는 대신 나는 내 취향에 맞게 하늘이를 마음대로 오려 붙이려고 했다. 구멍이 있다면 쥐구멍이 아니라 개미굴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왜 나는 한 번도 하늘이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내 멋대로 하늘이가 보통 아이들과 같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결국 목표는 달성했다. 이대로 하늘이를 내버려두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하늘이는 아이들과도 친해지고, 흔히 보이는 소녀가 되겠지. 하늘이는 귀엽고, 예쁘니까. 아이들 사이에서 금방 인기도 좋아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대한 대로 그런 하늘이의 가까운 선배가 되겠지. 오랫동안 바라던 대로 특별한 관계가 될 지도 모른다.
이 가슴 속에 날아와 박힌, 내 모든 마음을 박살낸 전략핵폭탄만 아니었다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다른 아이들과 웃으며 수다를 떨고,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하늘이. 그리고 그 옆의 내 모습. 분명 보기 좋다. 나는 그 상상에 한 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다음, 구겨서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이미 늦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속죄를 해야겠다.
병 주고 약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야 나는 하늘이를 위해서, 정말로 하늘이를 위해서 뭔가를 해주고 싶어졌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이런 일을 해봤자 괜한 참견일지도 모른다. 기만일지도 모른다. 위선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지막에 교문을 향해 뛰어가던 하늘이가 눈을 한번 훑은 건, 결코 눈에 뭐가 들어가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나를 웃기는 놈이라고 욕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해야 할 때다.
설욕전의 시간이다.


“약속대로, 군사연구부는 허락할 수 없구나.”
선생님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굽힌 허리의 각도를 더욱 낮춘다.
“부탁합니다, 선생님.”
“안 되는 건 안 돼. 지난번에 분명히 말했잖아. 인원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허락할 수 없다고. 어제 설명회 이야기는 들었다. 하늘이가 아까 왔다 갔어. 결국 아무도 안 왔다고. 군사연구부는 포기하겠다고. 왜 두 명이 하는 이야기가 다른 거니?”
“아뇨, 이젠 하늘이와는 관계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선생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모양인지, 고개를 내젓는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럼 더욱 안 되지. 인원이 한 명뿐이잖아. 애당초 오늘로 부활동 등록이 끝나는데, 이제 와서 네가 4명을 더 구할 수 있어? 이미 끝났어.”
“아뇨, 아직 아닙니다. 방송이 있잖아요?”
선생님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마주보며, 나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렇다. 오늘로 부활동 결정이 모두 끝난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는 그 전에 한 가지 홍보가 가능하다. 홈룸 시간에 모두가 부활동을 결정할 때, 각 부서가 방송을 통해 짧은 멘트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뭐 길이는 각 부서마다 채 5분도 되지 않고, 어차피 대부분의 학생은 마음을 굳혔을 테니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도 없지만, 분명히 부서들이 할 수 있는 홍보긴 하다.
“임시부서라도, 방송할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그야 그렇다만…….”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저희도 방송을 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책임자였던 하늘이가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아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 부장은 접니다. 제가 군사연구부 초대부장입니다.”
나는 강하게 말한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포기하는 느낌으로 말했다.
“뭐, 미안한 소리지만 어차피 부원들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구나. 좋다. 방송은 허가하지만, 인원이 안모이면 그걸로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는 거다? 이 뒤에도 뭐라고 꼬리를 붙이면, 혼을 낼 테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이는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친한 친구에게 빌린, 요즘 소녀 취향의 잡지였다. 처음 보는 내용과 주제였기에, 어제부터 읽고 있었지만 영 무슨 내용인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하늘이는 고개를 홱홱 젓고는 다시 잡지를 읽어 내려갔다. 올 봄 당신을 위한 코디. 별자리점. 소녀들을 유혹하는 맛집. 남자친구와 함께 찾아볼 데이트 스포트.
“윽…….”
그 기사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진다. 어제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선배의 가슴에 안겨서 울다니, 달아오르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다. 취미는 독특하지만, 하늘이도 10대 소녀이다. 신경 쓰이는 선배의 가슴에 안겨서 우는 일에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신도 모르게, 선배가 쓰다듬어준 머리를 만져본다.
내가 보통 아이처럼 되면, 선배도 나를 좋아해줄까.
그를 위해서는, 이 잡지를 완벽하게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하늘이는 망상으로 차오르는 머리를 내젓고는, 잡지로 눈을 돌린다. 방송으로는 부서들이 각자 마지막으로 짧은 소개를 하고 있었다. 결국 무슨 부서를 할지는 망설였지만, 평범하게 음악감상부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무난할 거야. 하늘이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군사연구부의 소개가 있겠습니다.”
그 순간 들려온 말에, 하늘이는 눈을 크게 뜨며 방송이 나오는 교실 앞의 TV를 바라본다. 조그마한 TV에는, 분명히 선배가 나오고 있었다.
“어라?”
놀란 가슴이 두근거린다. 선배는 손에 든 원고를 보다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TV를 바라보던 하늘이를 바라보듯이.
“에, 저희는 군사연구부입니다. 어제 설명회에도 아무도 참가해주시지 않아서, 아마 이번 방송이 저희를 소개할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희 부서를 좋지 않게 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군사연구부라니, 전쟁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임으로 보일지도 모르죠. 그 점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하여 풀어내고 싶지만, 아무래도 여러분도 안 좋아하실 것 같고 선생님들 눈치가 보이니까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웃음이 교실에 인다. 그러나 하늘은 웃지도 못한 채 빠져들듯이 TV를 바라보았다.
“사실 저는 이쪽 취미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습니다. 후배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 자리에 서있죠. 후배는, 이쪽 취미에 정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흥미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취미를 가지는 이유까지 있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배는 그런 취미 때문에 좋지 못한 반응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도 늘 생각했습니다. 평범한 아이처럼, 평범한 취미를 가지면 어떨까, 하고요. 그 후배는 그런 점만 빼면, 귀엽고, 예쁜, 사랑스러운 후배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야 전 깨달았습니다. 그 점이 바로, 제 소중한 후배를 그렇게 귀엽게 보도록 했다는 사실을요. 그런 특별한 점이 없는 제 후배는, 그저 수많은 여자아이중의 한명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특별합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여자아이입니다. 전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실겁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그러한 면이 바로 그 후배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는 걸요.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저는 후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정말로 후배를 이해할 기분이 듭니다. 그뿐입니다.
혹시 관심이 있는 분은 저나, 1학년 강하늘 후배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반에서 웅성거림이 커진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하늘은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잡지를 들어올려 감추었다.


뒤지게 혼났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 뒤지게 혼났다. 방송 하이재킹이 이 정도로 큰 여파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요즘 세상에 엉덩이를 맞을 줄도 몰랐다. 체벌 금지인 요즘 사회에서 선생님이 차마 몽둥이를 꺼내 올 정도로 큰 일이 될 줄이야. 교육부에 찌르려다가 관뒀다. 왜냐하면 속은 시원했으니까.
결과야 다들 예상하는 바겠지만, 결국 군사연구부는 박살이 났다. 인원이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정족수를 채웠어도 연대책임으로 내 행동 때문에 박살이 났을 것 같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대신 군사연구부는 밀리터리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의외로 그 뒤에 몇 명인가, 나나 하늘이와는 관계없는 인물들이 부서를 만들겠다고 한 모양이다. 왜 이제 와서야 양지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덕분에 선생님들은 골머리를 썩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도장을 찍어준 모양이다.
나와 하늘이는 당연하게도 밀리터리 동아리에 들었다. 나도 하늘이를 진심으로 이해해보기 위해서, 주워들은 잡학이 아니라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늘이는 결국 보통 여자아이가 되는 길은 포기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쪽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몇 명인가 친구도 생긴 모양이고.
“선배, 듣고 계세요?”
“엉?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도대체 왜 맨날 그렇게 딴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하늘이는 입을 삐쭉 내민다. 나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하늘이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됐다는 몸짓을 보인다. 하늘이는 그 몸짓에 헤헤 웃어보인다.
“선배, 잠깐 주말에 영화라도 같이 보시지 않겠어요?”
“영화?”
“네. 요즘 나온 전쟁영화가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작품성도 있고. 혼자 보는 것도 심심하니까 같이 보려고요.”
“음, 뭐 나야 좋지. 근데 그럼 동아리 애들도 부르는 건?”
“싫어요. 저 같이 어여쁜 여자애가 남자애들을 우루루루 몰고 다니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뭐 별 생각 안할 것 같은데.
“선배랑 단 둘이서 보고 싶어요.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그래,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 대답에, 왠지 하늘이는 볼을 빨갛게 물들인다. 윽, 귀엽잖아. 나도 모르게 머릿속 망상 스위치가 들어간다. 선배, 저 사실은 선배를 좋아했어요. 저를 알아주는 사람은 선배뿐이에요! 그래, 나도 좋아한다 하늘아!
그런 일은 없겠지.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한숨을 내쉰다. 하늘이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헤헤 웃으며 잡지를 본다. 아무리 그래도 밀리터리 잡지랑 음악 잡지를 한 번에 보는 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 영화가 어지간히 기대되는지 얼굴이 풀어진다. 그런 하늘이를 보고 있자, 나까지 웃음이 나온다.
뭐, 지금 급할 필요는 없지.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라고 나는 믿는다. 주말의 영화가 나도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하늘이가 추천해준 군사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밀리터리 잡지를 보는 여자와 군사서적을 읽는 남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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