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7일 금요일

우발적 사고

아스토리아 궤도에서 벌어진 함대전은 마침내 자전 45회간의 기나긴 전투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토르 제국과 볼라니 연합의 갈등은 이미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최초의, 외교관 끼리의 가벼운 말다툼조차 탄소-14의 반감기 만큼 전에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 갈등 사이에도 몇 번이나 전쟁은 벌어졌고, 이번 5차 전쟁 역시 그러한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전개 역시, 이전과 비슷했다.
아스토리아는 볼라니 연합의 거점이자 일종의 성채와도 같았다. 볼라니 6 연합함대의 거점이기도 한 이곳은 수많은 행성방위병기 뿐만이 아니라 항성방위병기 역시 설치되어있어 베토르 제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점령해야 하는 지점이었고, 지금까지의 4차례의 전쟁에서도 결국 함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베토르 제국은 이번에야말로 소코계를 점령하겠다는 듯 함대를 아스토리아로 몰아붙였고, 양동작전에 속은 볼라니 6 연합함대의 주력부대가 소코계 8행성에서 3행성, 아스토리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스토리아 공략전의 자전 34회째를 맞이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있는대로 쏟아부워!"
함장의 외침에, 볼라니 6 연합함대 소속 순양함 '요단세르의 복수'는 이미 궤도를 점거하고 있는 베토르 순양함에게 가능한 모든 포화를 쏟아붓고 있었다. 이는 아스토리아 궤도에 있는 수천 척의 함선 모두에게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궤도는 함선들과, 그들의 잔해들과, 쏟아낸 포화로 인해 포화상태였다. 모든 함선은 궤도를 일주하며 서로를 향하여 공격을 가한다. 그리고 그 포격도, 남아있는 파편들도 궤도를 따라 아스토리아 궤도를 채울 것이었다. 이 전투가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한동안 아스토리아 궤도는 수많은 데브리로 항해가 불가능하겠지만, 그 일을 지금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요단세르의 복수 옆에서 지원사격을 하던 구축함 '엘리 5'는 그 사이 눈먼 파편에 브릿지를 맞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명령체계와 조타력을 잃은 '엘리 5'는 그대로 실과 같이 얇은 안전궤도를 벗어나, 더 많은 파편과 포화에 노출되어 그대로 폭발했다. 사방으로 튀어나간 수많은 파편, 그리고 승무원들은 또 다른 부수적인 피해를 만들 것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함선들 외에도, 지상에도.
아스토리아 표면에는 벌써 45일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불과 철의 비가. 밤낮도 없이 내린 그 비가 어디 떨어질지, 전투 초기에는 예측할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행성방위시스템이 그 파편들을 막아줘야 할 터였지만, 이미 그 시스템은 파편을 더욱 늘리기 위해서 불을 뿜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가기 위해 겨우 살아있는 예측 시스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시스템이 포화상태에 이른 지금은 그저 행성을 불태우는 그 비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엘리 5의 파편은 요단세르의 복수를 향해서도 날아갔다. 다행히도 파편들은 35m에 달하는 복합장갑을 뚫지는 못했다. 충격을 통해 전해지는 소리만이 브릿지에 뭔가가 장갑판을 두드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경고음에 묻혀 금방 사라졌다. 요단세르의 복수를 향해 5발의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었다. 베토르 제국이 자랑하는 요호로 미사일로서 35m의 복합장갑 정도는 쉽게 뚫고 들어와 요단세르의 복수 역시 데브리 중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들이었다. PDS가 미친듯이 불을 뿜어댔다. 네 발은 그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편으로 변했지만, A19-56-91 한 발은 계속해서 요단세르의 복수를 향하고 있었다.
"좌현 전타!"
함장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승조원을 위해 브릿지에 남아있던 공기는 그 외침의 파장을 조타수의 귀로 옮겼다. 조타수의 신경회로는 채 의식하기도 전에 몸에 익은 동작을 행했다. 안전궤도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중 문제였다. 요단세르의 복수는 그들이 보기에 좌측으로 급격하게 몸을 돌렸다. 엔진이 불을 뿜고, 전기신호를 받은 RCS가 25km에 달하는 거대한 함체를 돌리기 위해 분사와 휴식을 반복했다. A19-56-91 한 발이 요단세르의 복수를 향하는 발걸음은 그 덕분에 빗나가버렸다. 경고음이 꺼진 것에 요단세르의 복수는 그대로 선체를 돌려 방금 미사일을 날린 베토르 제국의 순양함을 향해 매스 드라이버의 불을 뿜었다. 이미 빗나간 A19-56-91 미사일을 신경쓰는 이는 아스토리아 궤도에 아무도 없었다.
A19-56-91은 짧지만 긴, 그 평생의 연소를 마쳤다. 하지만 그것이 요호로 미사일의 여행을 끝낸 것은 아니었다.
모든 투사체가 그렇듯, A19-56-91 미사일은 그만의 궤도를 그려나갔다. 아스토리아 외우주는 수도 없는 파편과 함선으로 붐비고 있었지만, 그들의 궤도가 일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호로 미사일은 행성 궤도 전투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주에서의 함대전은 심하면 행성간 거리를 두고 벌어질 때도 있었으니까. A19-56-91 미사일의 속도는 이미 아스토리아의 중력권을 벗어날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A19-56-91 미사일은 그렇게 아스토리아 궤도의 전투를 뒤로 하고, 심우주로 뻗어나갔다.
칼리포르늄-252의 반감기만큼이 지난 뒤, 소코계 밖을 향하던 A19-56-91 미사일은 소코계 5 행성, 토스디아의 중력에 붙잡혀 그 궤도를 바꿨다. 하지만 토스디아의 중력이 잡아당기는 만큼, A19-56-91 미사일의 속도는 가속되었다. 그 속도를 바탕으로 A19-56-91 미사일은 새로운 궤도를 얻어 토스디아의 중력권을 뻗어나갔다. 스윙바이라고 불리우는 우주항해 기법이었지만,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A19-56-91 미사일은 소코계의 밖을 향해 더욱 힘차게 뻗어나갔다.
다시 세슘-137의 반감기만큼 시간이 지났다. A19-56-91 미사일은 소코계의 자기 고속도로를 벗어나, 진정한 의미로 소코계를 벗어났다.
A19-56-91 미사일은 우주의 텅 빈 공간을 떠돌았다.
탄소-14의 반감기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듬성한 성간물질과의 충돌 외에는 그 누구도 A19-56-91 미사일의 여행을 방해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
발사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A19-56-91 미사일은 우주를 떠돌았다.
우주의 대부분은, 아니 절대 다수는 공허한 텅 빈 공간이었다.
우라늄-235의 반감기가 지날 무렵, 그런 A19-56-91 미사일의 여행에 이변이 발생했다.
우주는 빅뱅 이후로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공간 그 자체의 팽창에 의해, A19-56-91 미사일을 누군가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 힘에 A19-56-91 미사일은 조금씩, 하지만 천천히 속도를 올리며 궤도를 바꿔나갔다.
A19-56-91 미사일이 그 미약한 힘에 궤도를 곡선으로 바꾸는데, 또다시 아메리시움-241의 반감기가 걸렸다.
요호로 미사일의 길이는 티끌과도 차이 없는, 고작 200m에 불과했다.
천천히 자신을 끌어가는 힘에 몸을 맡긴 채, A19-56-91 미사일이 그 항성계로 들어온지 세시움-137의 반감기만큼 시간이 지난 시기, 날아가는 A19-56-91 미사일의 앞에 한 행성계가 들어왔다.
본디, 그런 식으로 떠도는 혜성이나 운석은 대부분 위성의 중력에 의해 궤도를 잃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A19-56-91 미사일의 작은 체구 때문에, 그 궤도는 제대로 바뀌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경우가 나빴다. 원래대로라면 스쳐 지나갈 A19-56-91 미사일의 궤도가 행성의 궤도로 향하게 되었으니까.
고작 200m에 불과한 A19-56-91 미사일을 발견하기에는, 지구의 기술력은 그렇게까지 좋지 못했다.
일반적인 운석이었다면 어려움을 겪더라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호로 미사일은 베토르 제국이 자랑하는 미사일이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예상되는 주적인 볼라니 연합의 감지망을 따돌릴 수 있는 스텔스성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지구의 기술력은, 볼라니 연합의 기술력에 비하면 청동기에 불과했다.
"어... 휴스턴. 잠깐 주목하라."
그렇기에, 그 발견 역시 그저 우연의 일치에 불과했다.
"무슨 일인가?"
"저쪽... 지금 시점으로 러시아 방향 상공에 정체불명의 물체가 보인다. 확인할 수 있나?"
ISS에 탑승하고 있던 승무원의 말에, 보고를 받은 휴스턴의 상황실에서는 각종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무전사는 그 결과를 확인하고 말했다.
"확인되지 않는다. 파악되지 않는 데브리일 가능성이 있다. 그쪽에서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나?"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전을 받으며 승무원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창문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빛도 제대로 반사하지 않는 그 물체는 점점 접근하며, 본인이 예상하던 것보다 거대하다는 사실을 승무원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자연체는 아니다. 인공체로 보인다. 하지만 데브리라고 보기에는... 거대하다! 휴스턴! 거대한 미사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실에, 승무원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ISS 승무원들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건 휴스턴에서 그 순간 일어난 혼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A19-56-91 미사일은 지구 궤도에 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짙은 대기가 미사일과 만나 미사일을 소멸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정도로는 요격을 막기 위해 두텁게 가로막은 장갑판을 녹일 수 없었다.
A19-56-91 미사일은 북아메리카 대륙 동부를 향해 날아갔다.
요격미사일이 미국 전국에서 발사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것도 요호로 미사일의 교란시스템을 이겨내지 못했다. 지근거리의 폭발로는 A19-56-91 미사일의 궤도를 조금 더 바꾸는 것 뿐이었다.
A19-56-91 미사일은 워싱턴 D.C에 착탄했다.
최대 50m의 복합장갑판을 뚫고, 50km에 달하는 전함조차 격침시킬 수 있는 미사일이었다.
ISS에서도 볼 수 있는 강한 섬광과 함께, 약 7억년 전의 목표물 대신 A19-56-91 미사일은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 미 대륙 동부 반경 500km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뒤따른 것은 수많은 작은 미사일이 하늘을 메우는 광경이었다. 상호확증파괴의 시작이었다.
지구가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리는데는 고작 다리움-201의 반감기가 걸렸다.
그로부터 다시 라리움-226의 반감기가 흘렀다. 비록 그를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도 아인슈타인은 옳았다.
베토르-볼라니 연방의 신호망에, 약 1600광년 떨어진 위치에서 발신한 신호가 수신되었다. 미약한 원시신호를 찾는 과정에서 수신된 신호였다. 발전된 베토르-볼라니 연방의 기술력으로도 그 원시적이디 원시적인 신호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데는 산소-15의 반감기가 소요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7억년 전, 신화와도 같은 시절 벌어진 전투에 쓰였던 베토르 제국의 요호로 미사일 A19-56-91 가 보내온 신호이며, 무슨 결과를 불러왔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지구를 조사한 뒤, 미개종족의 소멸에 대한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질지에 대해 성토하는 국부 은하군 연합회에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불가능한 확률에 의한 우발적 사고임.'

국부 은하군 연합회는 베토르-볼라니 연방의 무죄를 선포했다.

2016년 10월 2일 일요일

Memorial of Museum.

오래 전의 일이다.
늘 주문하는 칵테일 한 잔을 앞에 둔 채, 그녀는 옆자리의 동료를 향해 물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야?"
마찬가지로 자신이 늘 주문하던 칵테일 잔을 들어올리며, 질문을 받은 여성은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도 아직 퇴역은 이르지. 계속해서 복무할 거야."
"그럼 그 다음에는?"
하지만 그 대답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그녀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잔을 입에 댄 채 고민하던 것도 한참. 마침내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싱글거리는 얼굴에 물었다.
"그러는 너는,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지?"
고민하던 그녀와는 다르게, 여성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

오랫동안 아끼고 마음을 담은 물건에는 혼이 깃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목숨을 맡기고 지켜주기를 바란 물건에 혼이 깃들지 않을 리가 없다.
하물며 한 사람조차 아니라, 수천 명이 그 마음을 다 한 물건이라면, 얼마나 강한 혼이 깃드는 걸까.

*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서있는 이 함선이 바로 태평양 전쟁이 끝난 장소, USS 미주리입니다."
금발 여성의 부드러우면서 정중한 인사와는 다르게 9월의 진주만은 찌르는 듯한 햇볕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갑판 위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새카만 선글라스와 야구모자, 반팔 티셔츠로도 부족한지 관광객들은 쉴새 없이 손이며 들고 있는 팜플렛으로 그들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바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과는 상관 없다는 듯, 여성은 정장 차림으로 덥지도 않다는 듯 그저 싱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훤칠한 키, 마치 옛 이야기 속 귀족과도 같은 아름다운 외견. 귀에는 눈에 띄는 별 모양 귀걸이가 햇빛에 반짝였다.. 허리쯤까지 오는 긴 금발은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며 흘러내렸다. 그녀가 이 USS 미주리 박물관의 큐레이터이자 안내인이다.
인사를 마친 그녀는 관광객들이 여운을 즐겼다고 생각했는지 갑판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미주리 호의 나무갑판 위에서 울려퍼졌다. 뒤따라오는 관광객들을 돌아보면서 그녀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USS 미주리는 아이오와급 전함의 2번함으로 건조되어, 1945년 전쟁 말기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3연장 16인치 함포 3문으로 무장한 아이오와급 전함은 순양전함의 완성이라고도 불리며, 2차대전 이후로도 미 해군이 참가한 모든 전쟁에서 그 역할을 다 해왔습니다."
관광객들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배를 둘러봤다. 전함은 말하자면 떠다니는 거대한 성과 같다. 차이라면 그 모든 것이 돌이 아니라 강철로 이루어졌다는 것일까. 높게 솟아오른 첨탑, 적의 포탄을 막아내기 위한 두터운 철벽, 그리고 다른 성을 파괴하기 위한 거대하디 거대한 주포. 함 측면에서 이어진 느긋한 발걸음은 꽤 이어진 뒤에야 함수 부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때는 이렇게 느긋하지 않았지. 파도소리 사이의 저벅거리는 발걸음을 들으며 그녀는 문뜩 떠올렸다.
거친 파도소리,그 사이로 울리는 사이렌.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는 다급한 발걸음들. 고함소리. 낮게, 하지만 몸을 울리는 것 같이 울리는 화약음.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억 사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ㅡ
"지금 보시는 이 거대한 상자들이 바로 3연장 16인치 함포입니다."
고개를 들어올려 포탑을 바라보는 그녀의 행동에 관광객들도 같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매니아로 보이는 몇 명은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관광객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바로 지구에 침공해오던 외계인을 물리친 그 대포죠."
그녀의 유머에 영화를 본 몇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머는 딱딱한 설명을 관광객들이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게 해주니까. 그리고 그녀 역시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줬다.
주포의 발포음은 부포나 대공포의 소리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몸이 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을 정도의 굉음. 거대한 포탑이 바람을 가르는, 아니 찢어바르는 공기음. 착탄음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솟아오르는 물기둥만이 시야 끄트머리에서 작게 움직였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지우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지만, 그녀 자신도 벌써부터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자신의 설명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큐레이터로서 그녀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는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 함수 끝으로 다가가 멈춰섰다.
"그리고 이 앞에 보이는 기념패가, 바로 이 자리에서 2차대전이 끝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1945년의 9월 2일 있었던 일이지요."
그래, 바로 이 무렵.
그녀의 바로 앞, 갑판 위에 있는 둥그런 명패. 그곳에는 그녀의 설명대로 이 자리에서 일본 대표가 항복 서명을 했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명패를 보려고 뒷사람들이 기웃거리는 것을 본 그녀는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함수를 돌아다니면서 이 미주리를 구경하시는 걸로 하죠. 궁금하신 점이나 더 알고 싶으신 점이 있는 분은 언제든 제게 와서 말해주세요."
그녀의 말을 계기로 관광객들은 흩어져 넓은 미주리호의 함수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함포를 구경하는 이, 갑판 너머로 펼쳐진 진주만의 푸른 바다와 항구를 보는 이, 높은 브릿지를 올려보는 이, 뒤늦게 명패를 지켜보는 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미주리를 구경하는 사이, 몇 명의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왔다.
큐레이터의 일 중에는 관광객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 역시 포함된다. 그녀는 미주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을 어제 오늘 해온 것도 아닌 만큼, 실례되는 질문도 익숙하다.
"미주리의 2차대전은 어땠나요? 전쟁 말기에 참전했으면 실전은 그리 치르지 못했을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미주리는 해전을 치르기보다는 지상 공격을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었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그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전함이 아이오와급 맞나요?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은 야마토고."
"네. 그렇습니다."
때마침 들려온 그 말에,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양산을 든, 전형적인 일본 아가씨였지. 비록 먼 발치에서 본 것 뿐이지만, 그녀는 그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세계 최대 최강의 전함. 비록 공적 하나 없는, 증명되지 않은 무관의 여왕이었음에도 그녀는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과 품격이 있었다. 그렇기에 긴장과, 동시에 흥분으로 끓어오르는 기대를 느끼며 그녀 역시 첫 싸움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숙녀와 차마 마주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모습 역시,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 속을 항해하는 사이에도 질문은 이어졌다.
"아이오와급이 일본의 공고급의 대항마라는 건 사실인가요?"
"아니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망설임 없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어가는 사이, 그녀는 그녀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설픈 영어를 쓰던 소녀, 그 소녀를 따르던 활발한 소녀,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던 소녀, 그리고 안경을 쓴, 이지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무투파였던 소녀.
사우스다코타가 들려줬었지, 싸웠던 이야기를.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 중, 은빛 머리카락과 안경의 반짝임만이 달빛을 비추는 그 싸움을.
유일한 전함과 전함의 싸움을.
그녀에게만 들은 것이 아니다. 그녀들에게, 수많은 전우들에게 들었다. 그때의 일들을 전해들었다.
선배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당했던 비겁한 그 날의 일을.
최초로 맞서 싸웠던, 그리고 졌던, 또다른 '그녀들'이 강력하다는 걸 배웠던 싸움을.
태평양의 한 가운데에서 벌어졌던, 전황을, 그리고 앞으로의 해전을 바꾼 그 싸움을.
마리아나의 하늘에서 벌어졌던 '칠면조 사냥'을.
레이테에서 이루어진 역사상 최대의 해전을.
하지만 그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그저 이야기를 들었을 뿐.
"어째서 수훈함도 아닌 미주리에서 항복조약식이 열린 건가요?"
"그건..."
그렇기에, 막힘 없이 흘러나오던 답변도 그 질문에는 멈췄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답을 내놓지 못한,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해왔던 질문이었으니까.
그녀라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니까. 바다를 울리는 폭음. 길게 솟아오르는 물과 불의 기둥. 동료들과 함께 다급히 하늘을 향해서 모든 불을 뿜은 일, 그럼에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불타는 전투기. 두터운 갑옷으로 막아냈지만 두근거리던 일. 자신도 그 자리에는 있었다.
변명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늦었을 뿐이다.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늘 바래왔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그 이유였으니까.
관광객들이 돌아가고, 다음 관광객들을 맞이해 설명하고, 이윽고 태양이 진주만 밑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

사라토가 애비뉴를 지난다. 조금 퉁명스러운 소녀였지. 하지만 미 해군의 실질적인 첫 정규항공모함이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평양을 지탱한 최고의 수훈함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다른 이들과 함께 비키니 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가면 안 됐는데.
선배인 워싱턴도 조인식을 하기에 충분했다. 사우스다코타와 싸우던 그녀를 과달카날에서 가라앉힌 것도 선배였지. 하지만 선배는 더 이상 없다. 노스 캐롤라이나도 그럴 자격이 충분했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박물관이 된 것 자체에 불만은 없다. 태평양 전쟁이, 2차대전이 끝난 장소라는 명예도 마음에 든다.
비록 그 전쟁에서는 싸우지 못했어도, 그 뒤의 전쟁들에서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한국을 지켜내기 위해 불을 뿜었다.
잠시 휴식을 취했지만, 노구를 이끌고 걸프전에서는 새로운 무기를 경험했다. 적을 찾아 알아서 날아가는 그 화살을 보면서, 그녀는 과거에 이런 것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한 사랑을 받는다. 영화에 출현한 것은 재미있었다. 뮤직비디오 때도 재미있었지만.
하지만...
배에는 영혼이 깃든다.
와인병을 깨는 그 순간부터, 그녀들은 눈을 뜬다. 그리고 배가 숨을 거둘 때까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들 역시 숨을 내뱉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리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진주만의 자주 찾는 바의 문을 열었다. 2차대전 때부터 수많은 해병들이, 그리고 그녀들이 찾던 가게.
"늘 마시던 걸로요."
간단한 그녀의 주문을, 초로한 바텐더는 당연하다는 듯 만들어 바에 올려놓는다. 어린 아이였던 때가 아직도 기억나건만, 그는 그녀의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을 이해한다는 듯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 배려가 고마웠다.
"그리고, 맨하튼도 한 잔."
평소와는 다른 그 한 마디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노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힘든 하루셨나보군요."
"이건 제가 마실 게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바텐더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솜씨 좋게 만든 맨하튼 한 잔을 내놓았다.
맨하튼. 칵테일의 여왕.
태평양의 여왕, 2차대전의 여왕인 '그녀'에 걸맞는, '그녀'가 늘 시키던 잔이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바 안에서, '미주리'는 자신의 앞으로 나온 뉴욕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은 너한테 어울렸단 말이지. 어쩔 수 없었지만."
오래 전, 딱 한 번의 술자리.
붕대로 가린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부러진 뼈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는 바에 나타났었다. 이런 날에는 마셔야 한다면서, 몰래 빠져나왔다면서. 처음에는 존경과 그 유명한 영웅과 함께 한다는 긴장도 잔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편하게 말을 놓고 대화할 정도로 사라져버렸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사라진 자매들. 다시 태어난,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전혀 다른,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던 자매들. 수많은 싸움. 가라앉은 그녀들.
"그러고 보니, 항복조인식을 했다면서? 축하해. 대단한 영광인데."
"부끄러울 뿐이야. 그런 건 너한테 더 어울릴텐데."
다 마신 잔을 내밀고, 다음 잔을 받아들며 미주리는 옆자리의 영웅을 바라봤다.
"태평양을 지킨 회색 유령, 빅 E. 엔터프라이즈에게."
"어쩔 수 없잖아. 몸이 이런 상황인데. 그리고 그런 건 전함에게 더 어울려."
엔터프라이즈는 아쉬움도 없다는 듯 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전함이라..."
그 말에, 미주리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엔터프라이즈는 그 반응이 예상 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그래?"
"제대로 된 함대전도 치른 적 없는데, 전함(戰艦)이라니 부끄러워서. 조인식도 그렇고."
"역시 싸우고 싶었나보네."
"그렇게 태어난 배잖아, 나는."
딱히 전쟁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싸움을 위해 태어난 배였다. 두터운 장갑도 강력한 주포도 그를 위해 존재했다. 적과 마주하고, 성과 성이 싸운다는 바다의 공성전을 치르기 위해.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너무 늦게 태어난 것 뿐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태어나기 전부터 그 기회를 모두 빼앗겼다는 생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야 자신이 싸우지 않은 것은 그만큼 수많은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아니 바쳐서 싸운 결과다. 기뻐해야 하리라. 그렇지만...
"가능하면..."
"맨하튼 한 잔."
마치 미주리의 말을 끊듯이, 엔터프라이즈는 자신의 앞으로 새 잔을 주문했다. 자신의 앞에 잔이 놓이자, 엔터프라이즈는 미주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야?"
그래. 이제 그 생각을 해야겠지. 미주리는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도 아직 퇴역은 이르지. 계속해서 복무할 거야."
그것은 자신의 숭고한 임무. 전쟁은 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렇게나 큰 피해가 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조국을 위협하는 일은 계속해서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은 국가를 지킬 것이다.
"그럼 그 다음에는?"
하지만 그 대답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 말에, 미주리는 잔을 입에 댄 채 생각했다. 알고 있다. 영원히 복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퇴역되어, 이 숨이 끝날 때가 오리라.
고민하던 것도 한참. 마침내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싱글거리는 얼굴에 물었다.
"그러는 너는,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지?"
대답을 찾지 못했으니까.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고민하던 그녀와는 다르게, 엔터프라이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박물관이 되고 싶네."
"박물관?"
생각도 못 하던 답변에 미주리는 되물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성한 손으로 칵테일 잔을 들어올려 모양 좋게 흔들며 리듬감 있게 대답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계속 기억될 거 아니야.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누가 사라졌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싸웠는지. 뭘 위해서 싸웠는지."
흔들던 잔을 한 모금 기울이고 엔터프라이즈는 웃었다.
"그걸 기억하게 하고 싶어.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살아있었다고.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고."
"거창하네."
그 대답에 미주리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지금도 거창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보다 수십 배는 오래 살았고, 싸워온 지금도.
그렇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역할은 너한테 더 어울렸는데..."
박물관이 된 것에 불만은 없다.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녀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미주리는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이 진주만에, 당당히 서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그 때부터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사라졌다. 영웅에 걸맞지 않게. 자신보다 더 한, 위대한 영웅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녀들' 이 찾아왔다. 모두 영웅이었다.
하지만 미주리는 그리워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사라진 영웅들을.
태평양에서 사라진 수많은 선배, 아니 전우들을.
"건배."
미주리는 자신의 잔을, 바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이 자리에 없는 그녀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맨하튼. 칵테일의 여왕. 그녀에게 어울리는 칵테일.
그리고 자신의 잔은, 뉴욕.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맨하튼의 색을 닮은, 하지만 전혀 다른 칵테일.
남은 술을, 그녀는 입안에 털어넣었다.
내일이면 또 다시 박물관에 관광객이 몰려들 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모레도 그렇듯이.
그들에게 들려주자. 자신의 영웅담을, 그녀들의 영웅담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는 것을 들려주자.
이제 그것이, 싸우는 배가 아니게 된 그녀의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