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일 일요일

Memorial of Museum.

오래 전의 일이다.
늘 주문하는 칵테일 한 잔을 앞에 둔 채, 그녀는 옆자리의 동료를 향해 물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야?"
마찬가지로 자신이 늘 주문하던 칵테일 잔을 들어올리며, 질문을 받은 여성은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도 아직 퇴역은 이르지. 계속해서 복무할 거야."
"그럼 그 다음에는?"
하지만 그 대답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그녀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잔을 입에 댄 채 고민하던 것도 한참. 마침내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싱글거리는 얼굴에 물었다.
"그러는 너는,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지?"
고민하던 그녀와는 다르게, 여성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

오랫동안 아끼고 마음을 담은 물건에는 혼이 깃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목숨을 맡기고 지켜주기를 바란 물건에 혼이 깃들지 않을 리가 없다.
하물며 한 사람조차 아니라, 수천 명이 그 마음을 다 한 물건이라면, 얼마나 강한 혼이 깃드는 걸까.

*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서있는 이 함선이 바로 태평양 전쟁이 끝난 장소, USS 미주리입니다."
금발 여성의 부드러우면서 정중한 인사와는 다르게 9월의 진주만은 찌르는 듯한 햇볕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갑판 위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새카만 선글라스와 야구모자, 반팔 티셔츠로도 부족한지 관광객들은 쉴새 없이 손이며 들고 있는 팜플렛으로 그들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바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과는 상관 없다는 듯, 여성은 정장 차림으로 덥지도 않다는 듯 그저 싱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훤칠한 키, 마치 옛 이야기 속 귀족과도 같은 아름다운 외견. 귀에는 눈에 띄는 별 모양 귀걸이가 햇빛에 반짝였다.. 허리쯤까지 오는 긴 금발은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며 흘러내렸다. 그녀가 이 USS 미주리 박물관의 큐레이터이자 안내인이다.
인사를 마친 그녀는 관광객들이 여운을 즐겼다고 생각했는지 갑판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미주리 호의 나무갑판 위에서 울려퍼졌다. 뒤따라오는 관광객들을 돌아보면서 그녀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USS 미주리는 아이오와급 전함의 2번함으로 건조되어, 1945년 전쟁 말기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3연장 16인치 함포 3문으로 무장한 아이오와급 전함은 순양전함의 완성이라고도 불리며, 2차대전 이후로도 미 해군이 참가한 모든 전쟁에서 그 역할을 다 해왔습니다."
관광객들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배를 둘러봤다. 전함은 말하자면 떠다니는 거대한 성과 같다. 차이라면 그 모든 것이 돌이 아니라 강철로 이루어졌다는 것일까. 높게 솟아오른 첨탑, 적의 포탄을 막아내기 위한 두터운 철벽, 그리고 다른 성을 파괴하기 위한 거대하디 거대한 주포. 함 측면에서 이어진 느긋한 발걸음은 꽤 이어진 뒤에야 함수 부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때는 이렇게 느긋하지 않았지. 파도소리 사이의 저벅거리는 발걸음을 들으며 그녀는 문뜩 떠올렸다.
거친 파도소리,그 사이로 울리는 사이렌.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는 다급한 발걸음들. 고함소리. 낮게, 하지만 몸을 울리는 것 같이 울리는 화약음.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억 사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ㅡ
"지금 보시는 이 거대한 상자들이 바로 3연장 16인치 함포입니다."
고개를 들어올려 포탑을 바라보는 그녀의 행동에 관광객들도 같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매니아로 보이는 몇 명은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관광객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바로 지구에 침공해오던 외계인을 물리친 그 대포죠."
그녀의 유머에 영화를 본 몇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머는 딱딱한 설명을 관광객들이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게 해주니까. 그리고 그녀 역시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줬다.
주포의 발포음은 부포나 대공포의 소리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몸이 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을 정도의 굉음. 거대한 포탑이 바람을 가르는, 아니 찢어바르는 공기음. 착탄음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솟아오르는 물기둥만이 시야 끄트머리에서 작게 움직였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녀는 기억을 지우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지만, 그녀 자신도 벌써부터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자신의 설명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큐레이터로서 그녀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는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 함수 끝으로 다가가 멈춰섰다.
"그리고 이 앞에 보이는 기념패가, 바로 이 자리에서 2차대전이 끝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1945년의 9월 2일 있었던 일이지요."
그래, 바로 이 무렵.
그녀의 바로 앞, 갑판 위에 있는 둥그런 명패. 그곳에는 그녀의 설명대로 이 자리에서 일본 대표가 항복 서명을 했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명패를 보려고 뒷사람들이 기웃거리는 것을 본 그녀는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함수를 돌아다니면서 이 미주리를 구경하시는 걸로 하죠. 궁금하신 점이나 더 알고 싶으신 점이 있는 분은 언제든 제게 와서 말해주세요."
그녀의 말을 계기로 관광객들은 흩어져 넓은 미주리호의 함수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함포를 구경하는 이, 갑판 너머로 펼쳐진 진주만의 푸른 바다와 항구를 보는 이, 높은 브릿지를 올려보는 이, 뒤늦게 명패를 지켜보는 이.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미주리를 구경하는 사이, 몇 명의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왔다.
큐레이터의 일 중에는 관광객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 역시 포함된다. 그녀는 미주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을 어제 오늘 해온 것도 아닌 만큼, 실례되는 질문도 익숙하다.
"미주리의 2차대전은 어땠나요? 전쟁 말기에 참전했으면 실전은 그리 치르지 못했을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미주리는 해전을 치르기보다는 지상 공격을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었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그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전함이 아이오와급 맞나요?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은 야마토고."
"네. 그렇습니다."
때마침 들려온 그 말에,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양산을 든, 전형적인 일본 아가씨였지. 비록 먼 발치에서 본 것 뿐이지만, 그녀는 그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세계 최대 최강의 전함. 비록 공적 하나 없는, 증명되지 않은 무관의 여왕이었음에도 그녀는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과 품격이 있었다. 그렇기에 긴장과, 동시에 흥분으로 끓어오르는 기대를 느끼며 그녀 역시 첫 싸움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숙녀와 차마 마주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모습 역시,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 속을 항해하는 사이에도 질문은 이어졌다.
"아이오와급이 일본의 공고급의 대항마라는 건 사실인가요?"
"아니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망설임 없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어가는 사이, 그녀는 그녀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설픈 영어를 쓰던 소녀, 그 소녀를 따르던 활발한 소녀,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던 소녀, 그리고 안경을 쓴, 이지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무투파였던 소녀.
사우스다코타가 들려줬었지, 싸웠던 이야기를.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 중, 은빛 머리카락과 안경의 반짝임만이 달빛을 비추는 그 싸움을.
유일한 전함과 전함의 싸움을.
그녀에게만 들은 것이 아니다. 그녀들에게, 수많은 전우들에게 들었다. 그때의 일들을 전해들었다.
선배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당했던 비겁한 그 날의 일을.
최초로 맞서 싸웠던, 그리고 졌던, 또다른 '그녀들'이 강력하다는 걸 배웠던 싸움을.
태평양의 한 가운데에서 벌어졌던, 전황을, 그리고 앞으로의 해전을 바꾼 그 싸움을.
마리아나의 하늘에서 벌어졌던 '칠면조 사냥'을.
레이테에서 이루어진 역사상 최대의 해전을.
하지만 그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그저 이야기를 들었을 뿐.
"어째서 수훈함도 아닌 미주리에서 항복조약식이 열린 건가요?"
"그건..."
그렇기에, 막힘 없이 흘러나오던 답변도 그 질문에는 멈췄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답을 내놓지 못한,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해왔던 질문이었으니까.
그녀라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니까. 바다를 울리는 폭음. 길게 솟아오르는 물과 불의 기둥. 동료들과 함께 다급히 하늘을 향해서 모든 불을 뿜은 일, 그럼에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불타는 전투기. 두터운 갑옷으로 막아냈지만 두근거리던 일. 자신도 그 자리에는 있었다.
변명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늦었을 뿐이다.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늘 바래왔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그 이유였으니까.
관광객들이 돌아가고, 다음 관광객들을 맞이해 설명하고, 이윽고 태양이 진주만 밑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

사라토가 애비뉴를 지난다. 조금 퉁명스러운 소녀였지. 하지만 미 해군의 실질적인 첫 정규항공모함이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평양을 지탱한 최고의 수훈함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다른 이들과 함께 비키니 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가면 안 됐는데.
선배인 워싱턴도 조인식을 하기에 충분했다. 사우스다코타와 싸우던 그녀를 과달카날에서 가라앉힌 것도 선배였지. 하지만 선배는 더 이상 없다. 노스 캐롤라이나도 그럴 자격이 충분했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박물관이 된 것 자체에 불만은 없다. 태평양 전쟁이, 2차대전이 끝난 장소라는 명예도 마음에 든다.
비록 그 전쟁에서는 싸우지 못했어도, 그 뒤의 전쟁들에서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한국을 지켜내기 위해 불을 뿜었다.
잠시 휴식을 취했지만, 노구를 이끌고 걸프전에서는 새로운 무기를 경험했다. 적을 찾아 알아서 날아가는 그 화살을 보면서, 그녀는 과거에 이런 것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한 사랑을 받는다. 영화에 출현한 것은 재미있었다. 뮤직비디오 때도 재미있었지만.
하지만...
배에는 영혼이 깃든다.
와인병을 깨는 그 순간부터, 그녀들은 눈을 뜬다. 그리고 배가 숨을 거둘 때까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들 역시 숨을 내뱉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리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진주만의 자주 찾는 바의 문을 열었다. 2차대전 때부터 수많은 해병들이, 그리고 그녀들이 찾던 가게.
"늘 마시던 걸로요."
간단한 그녀의 주문을, 초로한 바텐더는 당연하다는 듯 만들어 바에 올려놓는다. 어린 아이였던 때가 아직도 기억나건만, 그는 그녀의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을 이해한다는 듯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 배려가 고마웠다.
"그리고, 맨하튼도 한 잔."
평소와는 다른 그 한 마디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노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힘든 하루셨나보군요."
"이건 제가 마실 게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바텐더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솜씨 좋게 만든 맨하튼 한 잔을 내놓았다.
맨하튼. 칵테일의 여왕.
태평양의 여왕, 2차대전의 여왕인 '그녀'에 걸맞는, '그녀'가 늘 시키던 잔이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바 안에서, '미주리'는 자신의 앞으로 나온 뉴욕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은 너한테 어울렸단 말이지. 어쩔 수 없었지만."
오래 전, 딱 한 번의 술자리.
붕대로 가린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부러진 뼈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모습으로 그녀는 바에 나타났었다. 이런 날에는 마셔야 한다면서, 몰래 빠져나왔다면서. 처음에는 존경과 그 유명한 영웅과 함께 한다는 긴장도 잔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편하게 말을 놓고 대화할 정도로 사라져버렸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사라진 자매들. 다시 태어난,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전혀 다른,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던 자매들. 수많은 싸움. 가라앉은 그녀들.
"그러고 보니, 항복조인식을 했다면서? 축하해. 대단한 영광인데."
"부끄러울 뿐이야. 그런 건 너한테 더 어울릴텐데."
다 마신 잔을 내밀고, 다음 잔을 받아들며 미주리는 옆자리의 영웅을 바라봤다.
"태평양을 지킨 회색 유령, 빅 E. 엔터프라이즈에게."
"어쩔 수 없잖아. 몸이 이런 상황인데. 그리고 그런 건 전함에게 더 어울려."
엔터프라이즈는 아쉬움도 없다는 듯 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전함이라..."
그 말에, 미주리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엔터프라이즈는 그 반응이 예상 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그래?"
"제대로 된 함대전도 치른 적 없는데, 전함(戰艦)이라니 부끄러워서. 조인식도 그렇고."
"역시 싸우고 싶었나보네."
"그렇게 태어난 배잖아, 나는."
딱히 전쟁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싸움을 위해 태어난 배였다. 두터운 장갑도 강력한 주포도 그를 위해 존재했다. 적과 마주하고, 성과 성이 싸운다는 바다의 공성전을 치르기 위해.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너무 늦게 태어난 것 뿐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태어나기 전부터 그 기회를 모두 빼앗겼다는 생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야 자신이 싸우지 않은 것은 그만큼 수많은 '그녀들'이 목숨을 걸고, 아니 바쳐서 싸운 결과다. 기뻐해야 하리라. 그렇지만...
"가능하면..."
"맨하튼 한 잔."
마치 미주리의 말을 끊듯이, 엔터프라이즈는 자신의 앞으로 새 잔을 주문했다. 자신의 앞에 잔이 놓이자, 엔터프라이즈는 미주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야?"
그래. 이제 그 생각을 해야겠지. 미주리는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전쟁이 끝나도 아직 퇴역은 이르지. 계속해서 복무할 거야."
그것은 자신의 숭고한 임무. 전쟁은 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렇게나 큰 피해가 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조국을 위협하는 일은 계속해서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은 국가를 지킬 것이다.
"그럼 그 다음에는?"
하지만 그 대답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 말에, 미주리는 잔을 입에 댄 채 생각했다. 알고 있다. 영원히 복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퇴역되어, 이 숨이 끝날 때가 오리라.
고민하던 것도 한참. 마침내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싱글거리는 얼굴에 물었다.
"그러는 너는,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지?"
대답을 찾지 못했으니까.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고민하던 그녀와는 다르게, 엔터프라이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박물관이 되고 싶네."
"박물관?"
생각도 못 하던 답변에 미주리는 되물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성한 손으로 칵테일 잔을 들어올려 모양 좋게 흔들며 리듬감 있게 대답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계속 기억될 거 아니야.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누가 사라졌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싸웠는지. 뭘 위해서 싸웠는지."
흔들던 잔을 한 모금 기울이고 엔터프라이즈는 웃었다.
"그걸 기억하게 하고 싶어.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살아있었다고.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고."
"거창하네."
그 대답에 미주리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지금도 거창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보다 수십 배는 오래 살았고, 싸워온 지금도.
그렇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역할은 너한테 더 어울렸는데..."
박물관이 된 것에 불만은 없다.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녀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미주리는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이 진주만에, 당당히 서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그 때부터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사라졌다. 영웅에 걸맞지 않게. 자신보다 더 한, 위대한 영웅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물려받은 '그녀들' 이 찾아왔다. 모두 영웅이었다.
하지만 미주리는 그리워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사라진 영웅들을.
태평양에서 사라진 수많은 선배, 아니 전우들을.
"건배."
미주리는 자신의 잔을, 바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이 자리에 없는 그녀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맨하튼. 칵테일의 여왕. 그녀에게 어울리는 칵테일.
그리고 자신의 잔은, 뉴욕.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맨하튼의 색을 닮은, 하지만 전혀 다른 칵테일.
남은 술을, 그녀는 입안에 털어넣었다.
내일이면 또 다시 박물관에 관광객이 몰려들 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모레도 그렇듯이.
그들에게 들려주자. 자신의 영웅담을, 그녀들의 영웅담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는 것을 들려주자.
이제 그것이, 싸우는 배가 아니게 된 그녀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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