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2일 월요일

[라한대]플랜 C


작성 : 2013년 6월 23일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단 둘이다. 그 외에는 없다.
하나는 산이든 바다든 수영장이든 놀러가는 거다. 산의 경우 개울을 낀 경우로 한정한다. 요컨대 차갑고 시원한 물속에 몸을 담금으로서 저 가증스러운 태양과 그에 따른 열기에서 도주하는 거다. 피서라고도 하지. 이게 방법 A. 플랜 A.
다른 하나는 에어컨을 키고 방구석에 처박히는 거다. 선풍기는 있으면 더 좋고 없으면 아쉬운 대로 괜찮다. 방구석 안은 그래도 햇빛이 조금은 덜 들어오고, 인류 문명 최고의 이기인 에어컨이 있다면 좋다. 북극으로도 만들어버릴 수 있다. 이게 방법 B. 플랜 B.
하지만 플랜 A는 여러모로 무리다. 일단 덥다. 역설적이지만 덥다. 인간의 두뇌구조는 그 놈이 그 놈인 법이고, 인간들은 산이든 바다든 수영장이든 놀러간다. 요컨대 거길 가면 사방에 36.5도를 유지하는 생체난로들이 그득그득하다는 소리고, 체감온도는 그 이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뻐킹 리얼충들이 가는 게 피서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친구들(최소 2인 이상)끼리 가서 청춘이니 낭만이니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다. 리얼충이라는 놈들은 사람을 멋대로 제단하고 평가하는 기질이 있고, 따라서 나 같은 놈은 가면 바로 OUT이다. 훌리건이 그득그득한 경기장에서 상대팀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큼이나 OUT이다. 몸매니 패션이니 나발이니 피서랑은 전혀 관계없는 걸로 사람을 재단하는 36.5도 난로들이랑 같이 몸을 부대낄 생각은 없다. 따라서 플랜 A는 각하. 역시 플랜 B가 최고지.
그러니까,
“그딴 플랜 C는 없다고! 이 뇌가 익어버린 것아!”
내 외침에 사랑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좋은 방법 아냐?”
“이! 더운 날에! 더워서 익어버릴 날에! 더위를 피하는 방법이 운동장에 나가서 공 던지고 뛰는 거라니 무슨 미친 소리야? 정말 익었냐?”
“이 열기를 청춘의 땀방울과 기억의 메모리로 승화시키는 거야!”
정말 익었구나. 이런 애는 아니었는데. 글러브에 야구공, 배트까지 챙긴 채 내 북극 방문을 열어버린 사랑이는 그렇게 외쳤다. 손에 쥔 공까지 내밀면서.
잡았다. 창문을 열고 내던졌다. 창문을 닫았다.
“아아! 하나 밖에 없는 야구공을 던지다니!”
“자, 이제 야구공은 없다. 배트랑 글러브만으로는 야구 못해. 집으로 꺼져.”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냐! 내 공 내놔!”
“배팅 자세 취하지 마!”
글러브 낀 손으로 요령 있게도 배트를 들어 올린 채 사랑이는 말했다.
“어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야구공의 원한을 갚겠다!”
“집으로 꺼지는 길에 주워 가!”
“이 더운 땡볕에 나가라고? 미쳤어?”
“방금 야구 하자고 쳐들어온 건 너다 이년아!”
“그런 거 난 몰라! 공 내놔! 내 공 내놓으라고! 안 내놓으면 에어컨 부숴버릴 거야!”
“무단침입에 기물 파손까지 하면 볼만하겠네! 그래 어디 한 번 부숴봐라 합의금 100만원 아래로는 절대……. 진짜 부수려고 하지 마!”
젠장, 콤보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
나가서 공을 찾는다 -> 어차피 나온데다 공도 있다 -> 야구하자!
슬쩍 창밖을 내다봤다. 음영조차 없다. 강렬한 햇빛에 다 지워졌다. 나무에서는 매미 맴맴. 그 사이로 들려오는 지글지글거리는 소리는 아스팔트 익는 소리인 것 같다.
“그래! 밤에 나가서 찾아줄 테니까, 그만 집으로 좀 꺼져라? 응?”
밤이면 저 더위가 조금은 식겠지. 새벽까지 배달만 하면 되잖아.
“안 돼! 그럼 나가서 야구 못하잖아!”
“왜 꼭 이 날씨에 야구를 하려고 하는 건데? 왜 그렇게 목을 매냐고!”
“내가 요즘 만화를 보고 있는데, 느낀 게……. 역시 야구는 쪄죽을 것 같은 날씨에서 해야 할 것 같아. 마침 지금 쪄죽을 것 같은 날씨잖아? 우린 잘 될 거야, 아마.”
“너 만화 좀 끊어라. 어차피 나가서 마구니 뭐니 하면서 저 멀리 던져서 내가 신나게 복날 개처럼 뛰어다니게 만들 거잖아.”
“그리고 돌아왔을 때 에어컨이 박살난 상태면 상당히 더울 거야.”
“…….”
망할 년.

*

맴맴맴맴.
더워.
맴맴맴맴맴맴맴맴맴맴.
더워. 짜증나.
맴맴매매맴맴맴ㅁ매ㅁㅁ매맴맴맴맴매매맴매맴매매ㅐㅐ
“아 진짜, 좀 닥치라고!”
……
맴맴매매맴맴맴ㅁ매ㅁㅁ매맴맴맴매매ㅐㅐ매매맴맴맴ㅁ매ㅁㅁ매맴맴ㅁ매맴맴
“으아아아아악!”
“좀 열심히 찾아봐. 그렇게 소리만 빽빽 지르지 말고.”
“그럼 너도 와서 좀 거들던가!”
내 외침에 나무 밑에서 입으로 맴맴맴맴 소리를 내며 짜증을 돋우던 사랑이는 히쭉 웃었다.
“네가 던졌으니까 네가 찾아야지? 자, 응원해줄게. 맴맴맴맴…….”
“너 언젠가는 내 손에 죽을 거야.”
“그것도 로맨틱 하겠네. 서로를 사랑하지만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
“난 너 싫어. 진심으로 싫어.”
“내 무기는 배트로 할 테니까, 너는 손도끼로 부탁해. 그리고 준비하면 서로 바꾸자.”
“그런 매니악한 패러디를 알아듣는 나도 싫다.”
풀밭을 뒤진다.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안 보이는 게 짜증난다.
“……그냥 가서 하나 사주면…….”
“에어컨도 새로 살 수 있지?”
망할 년.
“자, 파이팅! 찾으면 내가 음료수 정도는 사줄게!”
“집에 가면 냉장고에 많아. 필요 없어.”
“그럼 응원해줄게. 맴맴맴맴…….”
“음료수도 뭐도 다 필요 없으니까 닥쳐만 주라. 응?”
한숨에 헤헤 거리고 웃는 저 얼굴이 싫다. 빨리 찾아서 던져주고 집에 가고 싶다.
햇살은 등을 찌르고, 땀이 나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가 온 몸에 달라붙는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찌른다. 짜증난다.
숙인 허리는 슬슬 아프고, 쭈그려 앉은 무릎도 쑤신다. 음영도 없을 정도로 내려쬐는 빛에 눈이 따갑다. 던지지 말 걸. 이것 보단 나았을 것 같은데.
“아, 모르겠다.”
피곤함에 일단 누워버렸다. 땅도 온돌처럼 뜨끈거린다.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빛은 살을 익혀버리는 것 같다. 눈을 감아도 시야가 하예서 팔로 눈을 가렸다.
에어컨 키고 방구석에 처박히는 플랜 B를 했으면 이런 꼴 안 봐도 되잖아.
“……응?”
뭔가 머리에 톡, 하고 굴러와 닿았다. 잡았다. 야구공이다.
“…….”
“어, 찾았어? 잘했어!”
“……하나 밖에 없는 야구공이라면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기고, 그 그림자를 만들며 나를 내려다보는 사랑이는 히쭉 웃었다.
“하나 뿐인 줄 알았어? 안 됐네! 사실은☆ 두 개였습니다!”
“…….”
내 정말 이 년을 언젠가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어쨌든, 찾은 건 찾은 거니까. 자, 약속한 선물.”
예고도 없이 떨어트린 캔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걸 어렵게 잡았다.
“너 진짜……!”
“시원하지?”
사랑이는 배시시 웃었다.
맴맴맴맴. 바람이 불었다. 풀들이 흔들리고, 땀에 젖은 몸에 그 바람이 에어컨 바람만큼 시원하게 느껴진다. 음료수 캔도,
뭐야, 시원하잖아.
“더웠다 시원할 때 진짜 시원한 거지.”
“그래. 그러니까 집에 가서 에어컨 쐬자. 응?”
“안 돼. 공 찾았으니까, 이제 야구 해야지? 밖에도 나왔고.”
내 이럴 줄 알았다. 망할 년.
이를 갈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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