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판타지갤러리 열줄 소설 대회] 모음

원본 : http://fangal.org/freenovel/461761 외
작성 : 2012년 2월 1일 ~ 6일


1. 그날의 칠판

 기억나?

 그 칠판에 적혀있던 내용 말이야.

 너는 그걸 농담이라고 넘겼었지.

 졸업식 날 성별이 다른 친구인 내가 한, 익살스러운 장난이라고.

 나도 웃으면서 넘겼었어.

 그리고 지금도 나는 웃으면서 박수를 쳐주고 있지.

 웨딩드레스를 입고 케이크를 자르면서, 눈이 마주친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너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도 지금도 말하고 싶어.

 그러면 편해질 테니까.

 그런 내가 싫어서, 그냥 좋은 친구라고 속이기 위해 나는 다시 박수를 치고 있는 걸지도 몰라.



2. 떨어진 연필

 소년은 소녀가 떨어트린 연필을 주웠다.

 “야, 연필 떨어졌어.”

 하지만 소녀는 들은 채도 하지 않았고, 소년은 그제야 소녀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떠올렸다.

 소년은 소녀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처음으로 소녀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바라봤다.

 소년은 고개를 돌리며, 연필을 홱 던졌다.

 소녀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이윽고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소년은 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소녀의 미소 외에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간 소년은 다시 연필이 떨어지지는 않을까를 기대하다가, 조금 있다 하교길에 소녀의 휠체어를 밀어주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아마 시작이었을 것이다.



3. 붕어빵 사준 아저씨

 안녕? 이 공원에서 누굴 기다리고 있니?

 뭐라도 먹으면서 기다리면 어떻겠니? 붕어빵이라도 먹을래?

 내가 사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래, 아빠를 기다리고 있구나.

 태어나서 아버지를 처음 보는 거라니, 무슨 사정이라도 있니?

 감옥에서 오늘 나와 여태껏 본 적이 없으면, 한산한 공원이긴 하다만 찾기 힘들겠구나.

 그래, 어머니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감옥에 갔으니 좋게 생각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되는구나.

 글쎄,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너를 보면 분명 사정이 있으셨을 테니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앞으로 20년쯤 뒤에는 너랑 아버지가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있을지 모르잖니?

 시간 빼앗아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래도 오지 않으실 것 같으니, 날도 추운데 그만 집으로 돌아가렴.

 붕어빵 맛있었다고?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구나.



4. 25세 동정 마법사양

 남자는 25살이 넘도록 동정을 지키면 마법사가 된다는 말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손바닥 위에 붙어있는 불은 라이터 불이 아니고, 그렇다는 것은 진짜로 나는 마법사가 되었다는 의미일게 분명한고로 나는 이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결과 기똥찬 계획을 하나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나 일단 계획을 실현하기 전에 내가 떠올린 그 능력이 가능한지 실험이 필요했던 고로 나는 이 기회에 예전부터 꿈꿔오던 다른 망상까지 실현시키기로 하고 거울 앞으로 향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거울을 바라보자 비추던 모습은 순식간에 변화하여 평범한 25세 남자(동정)였던 나는 어느새 찰랑거리는 긴 검은 생머리가 매력적인 키 크고 쭉쭉 빵빵한 미녀로 TS가 되어있었다.

 기쁨에 만족하며 일단 나는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인 ‘과연 여자가 남자보다 10배는 기분 좋은가?’를 실험해보기로 마음먹고 행동에 돌입해 손가락을 옮겼다.

 의문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아무튼 마법의 놀라운 힘을 즐긴 나는 곧바로 길거리로 향해 사냥감을 물색하며 과연 정신조작도 가능할 것인지 기쁘게 점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목표물이 탐지되었고, 물론 여자였던 상대방은 내 기대대로 여성의 몸을 한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나는 기쁨을 안고 곧장 그 여자와 호텔에 들어섰다.

 하지만 정신조작을 해 즐거운 한때를 보내려던 나는 정신을 차리자 손과 발이 침대에 묶인 채, 길고 두터운 무언가를 웃는 얼굴로 핥는 그 여자를 두렵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눈치 챈 것은, 여자는 동정이 아니라 처녀라는 사실이었다.

 그날 나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를 곳을 10번 정도 다녀왔다.



5. 사랑은 축제와도 같은 것

 그렇게 그녀는 말했다.

 “어째서? 즐거운 것 때문에?”

 그렇게 물어보는 나에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굳이 그것 때문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축제는 준비하는 동안이 제일 즐겁다는 소리 들어봤어?”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준비할 때는 다가올 축제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렇게 즐겁지만, 막상 해보면 영 실망스러운 데다가 축제에는 끝까지 있잖아?”

“하지만 준비를 제대로 해두면 즐겁지 않을까?”

“그럼 다음부터는 데이트 장소 이런 식으로 결정하지 말 것.”

 나는 찍소리도 못 내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6. 검은 볼펜

하필이면 검은 색 볼펜이 없었다.

답안으로 작성 가능한 건 검은 색 볼펜 뿐, 나는 어떻게든 필통 안을 잘그락 거리며 뒤졌지만, 나오는 거라고는 쓸데없는 샤프니 파란 색이니 빨간 색이니 하는 것들이었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에 다른 수험생들의 시선도 곱지 않게 변한다.

수시 시험장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여러모로 신경 쓰일 테니까.

“저기, 검은 색 볼펜 없으셔서 그러신 거예요?”

그 질문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안경을 낀, 아마 현역인 것 같은 귀여운 외모의 그 여자애는 조심스럽게 검은 색 볼펜을 나에게 건네고는, 싱긋 웃었다.

이윽고 감시관이 시험 시작을 알렸고, 그 여자애가 시험지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나는 지적받지 않도록 시험지를 바라봤다.

볼펜은 귀여운 팬더가 끝에 달린 촌스러운 디자인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올해는 무슨 수를 써서도 이 학교에 이 여자애와 합격하자고, 강하게 마음먹었다.



7. 차가운 입술

그럴 줄 알았어.

당신이라고 했었으니까, 당신이 맞겠지.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도 모르고 넉살 좋게 잠이나 자기는.

깨지도 않을 거면서 그렇게 잠자고 있으면 슬퍼지잖아.

이 안에서는 단 둘 밖에 없어서, 나는 하얀 천을 걷었어.

언젠가 새벽 햇살에 눈을 떠서 바라봤던 당신의 얼굴 그대로였지.

단 하나 다른 거라면, 그 볼이 너무 창백하다는 거야.

내 손으로 어루만지니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서 온기를 나눠줬어.

잠들었을 때는 벌리고 자는 주제에 지금은 굳게 닫고 있는 입술에 내 온기를 나누어줬어.

얼마나 오래 그렇게 온기를 나눠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메마른데다 차가워서 눈물이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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