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라한대]달려라 달려!

원본 : http://lightnovel.kr/one/382703
작성 : 2012년 3월 24일

그 아이가 이사를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내 꿈은 깨졌다.
졸업식도 끝난 늦은 2월. 듣자하니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어서 그 쪽에 집을 구해서 미리 이사를 간다고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이 소도시의 구석 동네에서 친구들은 하나 둘 씩 기숙사니 기숙학원이니 자취니 이사니 하면서 떠나고 있었으니까.
“야, 주문이다!”
그리고 나는 해당사항이 없다. 주인아저씨의 외침에 괜스레 떠오른 그 아이에 대한 생각 때문에 침울하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통 수타 피자집 외길 15년을 달려온, 참으로 짜장면 잘 하게 생길 것 같이 생긴 피자집 사장님. 난 아직도 중국집 하다가 망해서 피자로 바꿨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비도 주적주적 오는 날에 어떤 놈이 주문을…….”
안 그래도 이번 주말에 그 아이가 이사 간다는 것도 들었고, 거기에 감정 센티멘털하게 비까지 오는 이 날씨에 주문이라니. 비 오는 날에는 주문하지 않는 게 예의다. 나처럼 착한 사람 아니면 침이라도 뱉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사장님은 꼬운 시선으로 날 보면서 15년 장인의 손길로 피자를 척척 커팅 한다.
“손님은 왕 몰라? 안 그래도 비와서 장사 안 됐는데 잘 됐지 뭐.”
“그래도…….”
“꼬우면 때려치울래?”
물론 그럴 수는 없다. 대학교도 안 가고 이렇게 열심히 피자를 배달하고 기타 등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가난한 청년에게 이 무슨. 나는 한숨을 쉬면서 피자를 받아 배달 박스에 넣고, 주문지를 확인했다.
“……응?”
그리고 헬멧을 쓰던 손이 멈춘다.
이 주소는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의 일조권을 상당부분 침해하고 있는 고층 아파트다. 짜증나게도 비오는 날에 위험한 언덕 위 배달이다. 30분 이내 배달이라는 어디 거대 체인점을 의식한 게 다분한, 동네 피자집에 어울리지 않는 모토를 지키려면 꽤나 빡세다. 피자 나오는 데 사장님이 느릿느릿 해서 20분이나 걸렸으니까. 가는 데 거의 10분은 걸린다.
하지만 그런 것 보다,
“…….”
그 아이네 집이다.
“아, 맞다. 깜빡 잊었네. 이사 가기 전에 따님이 하도 억지를 부려서 마지막으로 먹으려고 하는 거니까, 30분 이내에 배달 못하면 취소란다. 못하면 너 월급에서 짼다.”
비맞는 게 싫은지 고개만 빼꼼 내미는 사장님의 말씀.
“그러면서 왜 이리 늦게 만들어요!”
“깜빡 했다니까. 아무튼 사고 안 나게…….”
그 이상의 말을 들을 시간은 없다. 헬멧도 못 쓰고 그대로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뒤에서 사장님이 ‘저, 저 미친놈! 누구 가게 망하는 거 보고 싶어!’ 하고 외치지만, 몰라 그런 거. 내 알바냐. 알바는 맞지만 알바는 아니다. 이거 뭔가 라임이 좋다.
액셀을 있는 힘껏 돌린다. 낡아빠진 배달용 스쿠터의 엔진이 이게 뭔 일이여 하면서 기괴한 울부짖음을 낸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갑자기 튀어나온 오토바이에 달려오던 자동차가 길고 긴 경적소리를 낸다. 뻐큐머겅 두 번 머겅. 신경도 쓰지 않고, 핸들을 꺾는다. 순간 빗물에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어 철렁했지만, 이래봬도 내 애마다. 과연 주인을 실망시키는 일 없이 미끄러지다 말고 다시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두터운 빗물이 총알처럼 헬멧도 없는 내 안면을 두들긴다. 눈 뜨기 힘들다.
“어, 우리 반 아니야?”
“응?”
터덜터덜 책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올해 같은 반이 된 여자애가 있었다. 가지런히 빗어 내린 길고 검은 생머리. 우윳빛 피부. 커다란 눈동자. 오똑한 콧날과 매끈한 입술. 정결한 교복을 입은 몸매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리고 표정에는 놀란 얼굴.
“어, 어, 으응…….”
등굣길에 같은 반 미소녀와 만났다면 가슴이 선덕 대는 게 기본이겠지만, 애석하게 그렇지 않았다. 구겨진 교복, 낡고 지저분한 배낭, 거기에 창피하게 손에는 학교 가는 길에 주워서 파는 폐휴지까지.
들켰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도망도 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멈춰서 버렸다. 그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대로 학교를 향하는 대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모른 척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이 애는 배려도 없나?
“같이 들어줄까?”
“……응?”
예상도 못한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자, 절반. 윽, 새, 생각보다 무겁네?”
“아, 아니 괜찮…….”
“괜찮아, 괜찮아. 가는 길에 있는 거기까지지? 가자!”
“으윽!”
가물가물하던 시야가 반대편 차선에서 지나가던 자동차 때문에 튀긴 물 때문에 아예 흐려진다. 나도 모르게 손이 비틀거린다. 오토바이가 넘어질 듯 비틀거린다. 안 돼, 넘어지면 안 돼! 온 힘을 다하며 핸들을 붙잡았다.
그 뒤로도 그 아이는 자주 나에게 어울렸다. 일부로 폐휴지를 모아주기도 하고, 아르바이트가 없거나 약간 여유가 있어 집으로 갈 때는 늘 같이 하교했다. 가끔 간식을 사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물론 고마웠다. 하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아서 고마움은 의혹으로 바뀌었다. 그 아이는 잘 산다. 나는 못 산다. 동정인가? 불쌍하게 여기는 건가? 그래서 나에게 이렇게 잘 해주는 건가?
지금이야 다르지만 당시는 예민했다. 예전부터 가난한 것 때문에 놀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를 멀리했다. 아침에는 일찍 등교하고, 핑계를 내서라도 먼저 사라졌다. 부잣집 아가씨는 그러면 나에게 관심을 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그 아이가 그 정도로 센스가 좋지 못하다는 건 진즉에 깨달아야 했다.
“무, 무슨 말이야?”
“시치미 떼지 마! 요즘 계속 나 피하고 있지? 뭐야! 불만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로 해!”
거의 협박조였다. 부잣집 아가씨에 대한 환상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면 머슴애였으니까. 그래서 두려움에 불어버렸다.
“……그런 이유야?”
“…….”
“그럼 뭐야. 난 널 도와줄 자격도 없다, 뭐 그런 거야? 장난해? 고작 그런 것 때문이란 말이지? 돈 많은, 손에 물도 안 묻히는 아가씨는 그럴 자격도 없다 이거지?”
그 아이는 내 멱살을 놓으며,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두고 봐.”
다음 날, 내가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에는 신입이 들어왔다.
“이이익……!”
오토바이는 결국 언덕길을 오르지 못했다. 콸콸콸 쏟아지는 빗물 때문인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았다. 이놈의 고물 오토바이! 재빨리 시계를 봤다. 남은 시간은 5분. 빨리 온 편이었지만, 아직 촉박하다. 할 수 없다. 나는 재빨리 비옷을 벗은 다음, 피자를 꺼내 옷으로 감쌌다.
그리고 들고 뛰었다.
“으랴차차차차차!”
내리는 빗발에 옷이 다 젖어서 축축하다. 경사도에 비까지 내리다 보니 미끄러질 것 같다. 하지만 가야 한다!
그렇게 그 아이는 계속 내 곁에 있었다. 반이 갈리면 찾아 왔다. 돈이 없어서 수학여행을 못 갈 뻔 했을 때는 ‘나중에 갚아. 할부로.’ 라면서 자신의 알바비를 나눠줬다. 괜찮다고 하니 ‘그럼 나도 안 가.’ 라면서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와서 어쩔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생각했다. 혹시 나를 좋아하는 건가? 하고.
물론 스스로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잖아. 혹시 모른다, 는 게 얼마나 무서운 주문인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고.
하지만 용기를 내기는 힘들었다. 일단 생활 격차도 그렇고, 나는 전교에서 기피되는 대상, 그 아이는 나랑 붙어다니는 걸 제외하면 전교의 인기인.
그래도 용기를 내서 몇 번인가 좋은 분위기로는 끌고 갔지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정말 모든 용기를 낭비하지 말고 끌어모아서 한 방에 터트리려고 했다.
졸업식 날이었다.
“……뻥이겠지…….”
‘엘리베이터는 현재 수리중입니다. 계단을 이용해주세요. 추신 : 무리하게 이삿짐 엘리베이터로 옮기지 맙시다.’
하필이면 꼭대기 층인데? 이거 20층 아파트인데? 이제 2분 남았는데? 120초. 6초에 한 층. 될 리가 있나.
될 리가 있나. 그렇게 내 용기는 모조리 박살났다. 졸업장을 받고 친한 친구들에게 둘러 쌓여 어디로 놀러 갈까, 가족들과 함께 어디 식당에서 식사할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아이를 보자마자 지금까지 긁어모았던 용기는 쑤욱 하고 사라졌다. 어차피 안 돼. 마지막 기회지만,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돌아섰다.
“이이이이이이익!”
다리가 끊어지려고 한다. 빗물에 젖어서 움직이기 불편하다. 물이 뚝뚝 떨어진다. 짜증난다. 힘들다. 20층 계단을 죽어라고 달려가는 게 이리 힘들다니.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알바비? 까짓것 피자 한 판 얼마나 한다고. 1주일 정도 점심 안 먹으면 된다. 클레임 전화? 내 알바냐. 설마 사장님이 이 정도로 자르겠어.
그렇지만,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피자집에 알바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했었다. 언젠가 배달을 시키면 그때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 정도로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도 주문은 오지 않았다. 포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으으으으으으으!”
그러다 단 한 번의 기회가 왔다. 덧붙이자면 마지막 기회다.
이사를 가겠지. 볼 일은 없을 거다. 기껏해야 몇 년 쯤 뒤에 동창회가 고작이겠지. 고백 같은 거 해봤자 민폐다. 어울리지도 않고, 나 같은 거.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 애에게 했다가는 이런 소리를 듣겠지. 아니, 거절할 확률이 높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럼 뭐야. 넌 나랑 사귈 자격도 없다, 뭐 그런 거야? 장난해? 고작 그런 것 때문이란 말이지? 돈 없는, 손에 기름때 묻은 남자애는 그럴 자격도 없다 이거지?”
하하, 웃으면서 넘어지다시피 하며 벨을 눌렀다. 딩동.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우비까지 입은 토라진 얼굴의 그 아이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늦었어.”
“죄, 죄송합니다…….”
“그때부터 기다렸더니, 안 오고. 찾으러 가려고 했잖아.”
“정말 죄송합니다……. 주문한 피자, 여기…….”
뭉개지지 않도록 소중히 끌어안은 우비속의 피자를 넘겨주자, 그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배달원을 시켰더니 피자도 오네? 좋은 가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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