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괴수는 사랑하면 안 되나요?

원본 : http://fangal.org/freenovel/468848
작성 : 2012년 6월 3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오로지 그 생각만이 들었다.
언젠가는 검은 봉지로 얼굴을 가려진 채 납치되는 일이 생길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결국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세상에는 별의 별 놈이 있는 법이다. 인기 없는 놈도 있고, 인기 있는 놈도 있는 법이다. 참고로 나는 후자다. 후자 중에서도 별의 별 놈이 다 있는 법이고, 인기 있는데 목석같은 놈, 입에 떠먹여줘도 못 먹는 놈도 있는 법이겠지.
나는 입을 열고 있는 대로 먹는 놈이다.
그렇다보니 울린 여자도 많고, 꽤 위험한 경험도 몇 번 해봤다. 레벨이 올라서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납치된 순간부터 내가 고민한 건 그 많은 여자들 중 누가 나를 납치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고, 나를 죽일 만큼 미워했는가 정도였다.
짐작 가는 곳이 너무 많아서 납치되는 내내 심심하지는 않았다.
“기남씨?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겨우 봉지가 풀리고, 갑자기 눈에 들어온 밝은 빛 때문에 흐릿한 시야 사이로 양복을 입은 나이 많은 남정네들이 그득그득 할 때는 솔직히 좀 놀랐다.
“당신이 꼭 반하게 해줬으면 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이 당신에게 걸려있습니다.”
“……네?”
그리고 이 말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인기남씨,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네? 어, 음, 네?”
얼이 빠진 내 대답에도 그들은 웃음도 짜증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쪽이냐 하면 엄청나게 심각해서 어설픈 농담이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처형될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제야 눈치 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상들이었다.
뉴스나 신문에서만 보던, 대통령, 장관들, 기타 등등. 그걸 깨달은 순간 나도 모르게 온 몸이 경직됐다. 그렇잖아? 높으신 분들 앞이라고. 농담은 집어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여자 마음을 잘 알고, 잘 반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모셔오게 됐습니다. 다소 거칠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어, 음, 네.”
……농담은 집어치워둔 거다. 진짜로. 나름대로 진지했다고.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 앞에 서있던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께서는 깍지를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테이블 저 너머에서 나를 바라봤다.
“위급상황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죠. 지금 한국은 괴수와 싸우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약을 하는구나.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대통령은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기남씨는 우리가 모셔오느라고 아직 상황을 모르시는군요. 비서관.”
“네.”
대통령의 말에 비서는 들고 있던 리모컨을 조작했다. 대통령의 뒤에 펼쳐진 프로젝터 스크린에 뉴스가 흘러나왔다.
“……보시다시피 시내는 아비규환의 상황입니다. 괴수는 시내를 파괴하면서 나아가고 있으며,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어, 잠깐만요. 저거 카메라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나도 모르게 지적해버렸다. 분명 앵커 뒤에 왠 교복을 입은 미소녀가 건물을 부수면서 날뛰고 있는데, 저 크기를 보면 앵커 옆에 있는 정도의 크기란 말이야.
“괴수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괴수요? 안 보이는데요.”
저 미소녀 기운도 좋구나.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건물을 뽑아다 던지고 있어. 씩씩한 미소녀도 좋지. 난 별로 안 가리거든.
“화면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을 ‘기예수’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투명한 괴수인 모양이네요.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미소녀는 이제는 혼자서 말뚝 박기를 하고 있었다. 저런, 한강철교가 역시 좀 낡았지. 한번 달려와 뛰어 오른 순간 한강철교가 무너지면서 첨벙 하고 빠져버렸다. 그래도 개울물 정도인가보네. 하반신 정도만 잠겼어. 생각보다 한강물도 별로 안 깊구나.
“지금 막 한강철교를 부쉈군요.”
“아, 저거 녹화방송인가요? 그보다 저 뒤에 한강철교는 언제 복구했답니까. 잠깐, 저 납치되고 얼마나 지났죠? 한 5년 쯤 흘렀나요?”
미소녀는 한강철교에서 나와 여의도에서 치마를 쥐어짠 다음, 63빌딩에 올라갔다. 나무타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조금 엉기적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올라가다 63빌딩이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뚝 꺾여서, 버둥거리는 미소녀는 그대로 한강에 다시 빠져버렸다. 귀여워라.
“63빌딩도 무너졌군요.”
“다음은 국회의사당인가요?”
미소녀는 머리를 부르르 떨면서 일어나서는, 화가 난다는 듯 국회의사당의 돔을 꾹꾹 밟아버렸다. 돔이 우수수 무너지자 국회의사당이 조금은 쓸쓸해졌다. 저 돔 은근 멋있었는데.
“예지력이 좋으시군요. 다음번에는 좀 싼 건물로 부탁드립니다.”
“어, 다음번에는 남산타워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건 안 부서졌나요?”
“기대하시는 말투군요. 그것까지 무너지면 서울의 랜드 마크가 안 남아날 겁니다. 아, 경복궁 같은 문화재는 제발 안 부쉈으면 좋겠네요.”
“…….”
슬슬 농담으로 웃어넘기기 힘들어졌다.
“……그러니까, 대통령 각하 말씀은…….”
“네. 저 소녀가 괴수입니다.”
“……저 집에 갈래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보디가드 둘이 잡아 눌렀다.
“기남씨, 당신이 희망입니다.”
“이거 놔주세요! 제가 뭘 어떻게 하라고요!”
내 다급한 외침에 대통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이 나라 최고의 카사노바라고 들었습니다. 저 괴수, 아니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아주십시오.”
“……어, 음, 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서 저 괴수가 나타났습니다. 예고도 없는 출현에 피해가 막대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민간인 피해는 없는 상황입니다. 서울시민 전체가 현재 대피중이고, 대충 90% 정도 대피가 끝마쳐진 상황입니다.”
“…….”
“혼란을 노린 북한군의 도발에 대비한 전방 사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대는 현재 서울 외각에 집결중이고, 유사시에 대비 중입니다. 이미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입니다.”
“…….”
“괴수의 목적은 상세하게는 불명이지만, 아까 일단 의사소통은 성공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괴수는 스스로는 ‘기예수’라고 호칭하고 있으며,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밝혔습니다. 아마 종족번식이 목표로 보입니다.”
“…….”
“현재 괴수와 동급의 다른 동종 생명체는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어렵다는 의사를 표방하자, 괴수는 날뛰며 현재 파괴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종 생명체가 있더라도 저 파괴적인 모습을 보면, 둘을 소개해 번식행위를 하게 해서 동종을 늘리는 것은 인류에 대한 큰 위협입니다.”
“…….”
“미국과 기타 우방국은 군사작전을 요청하고 있고, 주한미군이 대기 중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 각하의 요청으로 현재 대기 중에 머물러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은 결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여자를 잘 사귄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기남씨를 모셔왔습니다. 이상입니다.”
“…….”
“다시 한 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남씨.”
대통령 각하의 말에 겨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내 표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저 괴수의 요청은 현재는 ‘연애를 해보고 싶다’ 입니다. 하지만 동종도 없고, 그에 따른 위험요소도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일단 인간과 같은 생김새를 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고로, 인간에 대해서도 연애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남씨, 당신은 여자 마음에 대해서 전문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 괴수를 당신에게 반하게 해서 파괴행위를 중지하게 해주십시오.”
“……진짜로요?”
“진짜입니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이 양반들이 단체로 약을 했던지, 아니면 원래 이 모양인지. 어느 쪽이든 이 나라를 떠나서 세계의 미녀들을 찾아서 이민을 가든지 해야겠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기남씨에게는 원하는 모든 지원과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또한 저 괴수가 반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면 뭐든지 요청하십시오. 대한민국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뭐든지 협조하겠습니다.”
“……거절할 수는 없…….”
“기한은 오늘 자정까지. 지금이 대충 아침 10시쯤이니……. 14시간 남았군요. 14시간 안에 기남씨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국군과 주한, 주일미군을 중심으로 괴수에 대한 공격이 개시될 것입니다.”
“…….”
과연 정치인이다. 선택지는 하나라 이거지. 고개를 슬쩍 돌려서 내 뒤에서 감시하고 있는 보디가드인지 뭔지를 보자, 둘 다 선글라스로 가릴 수 없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깨갱.
“해주시겠죠?”
이런 식으로 위협을 하고는 나보고 ‘해주시겠죠?’ 라고? 해줄 것 같냐? 저 대충 봐도 키가 50m는 되어 보이는 빌딩을 날리고 한강철교를 때려 부수고 63빌딩을 엎어버리고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리고 결국 지금 남산타워 꼭대기의 안테나로 이빨을 쑤시고 있는 저 괴수를 반하게 만들라고? 무슨 약 하셨기에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할게요. 해볼게요.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목숨은 소중한 거라 서요.
“믿겠습니다.”
대통령 각하와 나는 악수를 나눴다. 굳은 악수였다. 왠지 나도 비장미가 넘쳐야 할 것 같다.
 
 
태어나서 헬기를 타보는 건 처음이다. 왠지 감동까지 느껴졌다.
“지금부터 괴수에게 접근합니다!”
“잠깐만요! 저 괴수는 우리가 가는 걸 알고 있나요?”
“아뇨!”
“…….”
감동을 느낀 채 죽을 지도 모르겠구나.
공격헬기 두 대가 호위로 붙은 채로, 나를 태운 수송헬기는 방향을 선회해 남산 꼭대기에 앉아 이빨을 쑤시던 안테나를 떼어낸 채 부숴버린 남산타워로 비행기 놀이를 하는 괴수에게 다가갔다. 괴수가 이쪽을 눈치 채고, 머리 위로 부웅 거리며 가지고 놀던 남산타워를 내려놓았다. 수많은 여자들과 추억을 나눴던 남산타워가 저렇게 박살난 걸 보니 기분이 오묘하다.
“오지 마세요!”
괴수가 소리쳤다. 하마터면 고막이 터질 뻔 했다. 소리 때문에 생긴 충격파로 헬기가 다 요동친다. 조종사가 비명을 지르며 헬기를 정상으로 돌리려고 조종간을 잡아당기는 게 보였다.
“오지 마!”
괴수는 내려놓은 남산타워를 들어서 붕붕 휘저었다. 다시 충격파가 날아오고, 비틀거리는 헬기가 겨우 휘젓는 남산타워를 피해서 괴수를 한 바퀴 돌아 선회한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군인이 소리쳤다.
“원하던 남자를 데려왔다! 공격하지 마!”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이거 대화 성립 이전에 말을 나누다보면 내 고막이 터질 것 같다. 생각해보면 말이나 나눌 수 있을까? 저 괴수 입장에서는 개미가 떠드는 걸로 들릴 텐데 말이야. 군인은 겨우 생각났는지 헬기에 달린 거대 스피커로 통하는 마이크를 잡아들었다.
“원하던 대로 남자를 데려왔다! 공격을 중지하라!”
“뭐요? 진짜요?!”
아이고 귀야! 헬기 바로 옆에 달린 커다란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리자 귀가 울리고, 괴수의 대답에 다시 귀가 울린다. 아무래도 일단 이 일이 끝나면 보청기부터 받아야 할 것 같다.
다행히 괴수는 말이 통했는지 남산타워를 다시 내려놨다. 휘둘러서 내구도가 떨어졌는지 남산타워는 바닥에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위의 관람대와 밑의 기둥이 분리됐다. 관람대가 남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빌딩과 부딪힌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자연재해구만.
“어, 어어?”
그리고 남산타워를 내려놓은 괴수의 손이 헬기로 다가온다. 손 한 번 정말 크다. 나도 모르게 헬기 저 쪽으로 물러나는 순간, 옆에 타고 있던 군인이 내 등을 강하게 걷어차 밀어낸다.
“행운을 빕니다!”
“행운을 빈다면서 차지 마! 잠깐, 살려주세요! 아아! 떨어진다고! 야! 야 임마! 너, 너 이 새끼 논산 훈련소 몇 기야! 내가 전역한지 지금 몇 년……. 꺄아아악!”
어떻게든 뭐든지 잡으며 버티려고 했지만 등을 걷어차는 발길질에 밀려나 헬기 밖으로 나온 순간, 내 몸을 괴수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끝이야. 꿈도 희망도 없어. 이대로 입으로 옮겨서 잡아먹는 거 아니야? 헬기는 내가 잡히자마자 미련도 없다는 듯 저 멀리 떠나버렸다. 나는 멍한 눈으로 그 쪽을 보다가 괴수에게 얼굴을 돌렸다. 제법 예쁘게 생긴 미소녀의 얼굴이지만, 그 위에서 축구라도 해도 될 것 같은 커다란 크기가 너무나도 무섭다. 괴수는 손에 조심스럽게 쥔 나를 눈앞에 가져다 대고는 요리조리 살펴봤다.
“잘……. 생기셨네요!”
“아악!”
바로 앞에서 말하니 진짜 고막이 날아갈 것 같다.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지르자 괴수는 미안하다는 듯 표정을 바꿨다.
“미, 미안해요!”
“으아악!”
“저, 정말 미안해요! 이,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끄아악!”
제발 부탁이니까 미안하면 말을 하지 마라. 괴수는 팔을 최대한 뻗어 나를 멀리 떨어트려놨다. 그래도 귀가 아프다. 다행히도 목소리는 속삭이듯 줄여줬다. 그래봤자 내 입장에서는 소리 지르는 것과 별다른 차이도 없지만.
“당신이 내 연애 상대인가요?”
“그, 그래! 내가 대통령 각하가 직접 고른 네 연애 상대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괴수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손에 쥐고 있는 나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인간에게 있는 힘껏 외치는 개미의 심정으로 나는 목청껏 외쳤다. 아무래도 고막도 목도 나갈 것 같다.
“그래! 내가 연애 상대라고!”
“그, 그렇구나……. 헤헤헤!”
뭐가 그리 좋은지 괴수는 히히덕거리며 웃었다. 웃음소리도 괴수 급이다.
“얼굴도 잘 생기셨고……. 기뻐요!”
괴수도 일단 얼굴부터 보고 사는 거냐. 외모지상주의란. 뭐 내가 좀 잘 생기긴 했지. 못생기면 이 짓 하고 살겠냐. 괴수는 귀엽다는 듯 찍어 누르면 꽥 하고 터져죽을 것 같은 거대한 손가락으로 내 얼굴이나 몸을 쿡쿡 눌렀다. 아퍼! 힘 조절 좀 해! 그래도 괴수 입장에서는 개미가 터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느낌인 모양이다. 내 목이 떨어져나가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잘 안 들리는데…….”
그래, 일단 의사소통이 문제다. 개미랑 인간이 소통하려면 개미 목소리를 인간에게 들릴 정도로 증폭하는 게 필요하지.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려 괴수에게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괴수는 나를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지금부터 공병대가 네 귀에 스피커를 설치할거야! 앉아서 얌전히 있을 수 있어?”
“네! 기다릴게요!”
“들었죠?”
나는 옷깃에 장치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어차피 내가 말 안해도 다 들었겠지만. 귀에 낀 이어폰으로 상황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습니다. 공병대 출동!”
“지금 올 거야!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
“알겠어요. 그럼 잠깐 이렇게 귀에 대고 이야기해도 되죠?”
눈앞에 가져다 댄 괴수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고개를 돌리자 차 한 대 사람 한 명 없는 남산 밑에서 공병대의 트럭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음, 그럼 뭐부터 이야기할까~ 아, 일단 이름부터 이야기 하는 게 좋겠죠? 제 이름은 ‘기예수’에요. 그쪽은요?”
“내, 내 이름은 인기남! 기남이라고 불러!”
“기남씨라는거죠? 이름부터 멋지네요! 얼굴도 잘 생겼고! 혹시 연예인이세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래, 슬슬 임무에 착수할 시간이다. 임무라고 부르는 건 별로 안 내키지만, 지금 이건 목숨의 위기다.
이 괴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자 앞에서 ‘나는 카사노바고, 여자는 있는 대로 갈아치우고 먹어치워! 연예인은 아니지만 인기는 쩔지! 으헤헤헤!’ 라고 말하는 건 NG다. 뺨맞기 딱 좋다. 이 괴수면 먹어치울 거다. 여기서는 ‘너를 위해 준비된 단 한 명의 순정남’이라고 해두는 게 목숨 유지에 좋다.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아, 아냐. 뭐 그럴 것 같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하하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에요.
어느새 남산 위까지 올라온 공병대가 트럭에서 내린다. 괴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병대 병사들이 옷깃을 잡아 오르고, 크레인이 스피커를 들어올린다. 귓가에 뭔가를 넣는 사실이 간지러운지 괴수가 몸을 비벼서 하마터면 몇 명이 떨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다들 버텼다. 장하다, 군인. 목숨은 소중한 거다. 전역해야하는데.
“아아, 아아, 들려?”
“네! 이제 잘 들려요!”
내 말에 괴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좀 간지러운 느낌이긴 했지만, 이제 대충 의사소통은 될 것 같다.
“그러면 이제…….”
“그러면 이제 어디 놀러라도 가죠! 저 데이트는 처음이에요! 아, 긴장된다!”
제법 기쁜지 괴수는 하이텐션인 모양이었다. 근데 몸을 부비며 손을 휘저으면 내가 좀 어지럽단다. 구체적으로는 멀미나서 토하고 싶을 정도로.
“우윽…….”
“아, 죄송해요! 음……. 아! 가슴 안주머니라도 들어가실래요?”
괴수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나를 가슴에 있는 주머니로 가져다 댔다. 그러고 보니 왜 교복을 입고 있을까. 이 옷감은 어디서 난 걸까.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거대한 주머니에 푹 담겨서 온통 시야가 새카맣게 변하자 나중 일이 됐다.
“아, 너무 크네요……. 음……. 공병, 이라고 하셨죠? 공병 분들! 안주머니에 발판 좀 만들어주실래요?”
“부,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던 공병대는 한숨을 쉬면서 알았다는 듯 양팔로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천이 없어서 트럭 천을 뜯어서 안주머니 안에 내가 상체는 내밀 정도의 속주머니를 만들고 공병대는 철수했다. 괴수는 고개를 내려 내가 머리를 내놓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일어났다. 우, 우와……. 높다……. 갑자기 위로 쑥 올라가는 느낌이 들고 나자, 남산타워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서울 전경을 다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럼 이제 다 됐으니까 데이트 가요, 데이트! 저 예전부터 명동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명동 바로 이 옆이죠? 거기로 가요!”
“잠깐, 네가 가기에는 명동은 너무 작은데…….”
키 50m 괴수가 들어가기에는 명동은 무리가 있지. 이어폰으로 상황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절대 안돼요! 건물 다 무너집니다! 다른 곳으로 유도해요! 다른 곳!”
“에? 명동 못가요? 흥! 못가면 건물 다 부수면서 갈 거예요!”
50m 괴수에게 건물은 툭 치면 억 하고 무너지는 존재지. 하지만 여기서는 어떻게든 내가 리드해야한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그, 그거 말고 해보고 싶은 거 없어? 다른 걸로 말해봐! 다 들어줄게!”
연애는 전투다. 농담이나 비유가 아니라 진짜 전투다.
전투란 무엇인가. 서로 싸우는 것이다. 서로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격돌하기 때문에 전투다. 서로의 것을 점령하려고 하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가 원하는 것이, 예로 들자면 호텔이 있고, 여자는 여자가 원하는 것이, 예로 들면 분위기 죽여주는 레스토랑이 있다. 서로 그 원하는 바를 두고 조율하고 주고받으며 전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투답게, 한 번 주도권이 넘어가면 다시 찾아오기는 매우 어렵다. 여자를 후리려면? 간단하다. 칼자루를 계속 이 쪽이 쥐고, 너무 강하면 전투를 포기하기 때문에 작은 부분에서 칼자루를 넘겨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칼자루를 쥐기 좋았다. 일단 내 외모도 있고, 경험으로 쌓인 여유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논외다. 저 쪽은 원하면 서울 시내를 죄다 엎어버릴 힘이 있다. 아차하면서 칼자루를 놓치면 그대로 휘둘린다. 여기서 내가 꺼낼 수 있는 칼자루는 국가의 지원이다. 세금이 이따위로 나가는 건 슬픈 일일지도 모르지만, 내 돈이냐. 예산 따위!
“진짜요? 다 들어주는 거죠?”
“응! 최대한 들어줄게! 국가예산이야! 국가예산! 조 단위라고! 뭐든 말해!”
“조, 조 단위요?! 백 위의 천 위의 만 위의 억 위의 그 조?!”
이어폰으로 ‘조 단위로 들어가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최대한 줄여요!’ 라고 외치지만, 연애에서는 그런 거 없다. 돈 들어가는 게 연애라고. 거기에 이쪽은 50m 괴수라고. 돈이 한 십만 원 단위로 깨질 줄 아셨어? 박살낸 건물 다시 짓는 데만 억 단위다! 좀 힘 써! 내 목숨이 걸려있다고!
꼬르륵.
그 순간 천지를 울릴 정도의 천둥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자 괴수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윽.”
“……이, 일단 밥이라도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말해봐!”
“그, 그러고 보면 아침도 못 먹었어요…….”
“뭐든지 말해봐! 조 단위야, 조 단위!”
“음~ 저 예전부터 캐비어라는 걸 꼭 먹어보고 싶었어요!”
“그거 빼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50m 괴수가 먹을 캐비어는 한국을 통째로 찾아도 부족할 거다. 아니, 한국을 너무 무시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그건 밥으로 먹는 게 아니라고.
“그럼 스테이크요!”
“들었죠?”
“양식 조리사 자격증 있는 사람 전부 불러! 전국 농장에 전부 전화해! 육류창고나 물류센터에도 다 연락하고!”
50m 괴수가 스테이크로 배를 채우려면 소가 몇 마리나 필요할까.
 
 
수학은 약하다. 하지만 여자를 후리려면 머리 계산은 빨라야하는 법이다. 박학다식한 여자도 많으니까.
간단하게 계산해보자. 일단 외견상은 여자애니까 대충 평범한 여자애의 키는 160cm 잡고, 50m로 뻥튀기 한다면 키만 대충 30배 나온다. 3차원의 입체단위니까 면적은 세제곱. 그럼 부피는 대충 2만 7천배 늘어난다. 생각만 해도 아득해진다.
스테이크 일 인분으로 한 명 배가 차면, 이 괴수의 배를 채우려면 못해도 잠실 운동장을 가득 매우는 사람에게 스테이크를 제공할 정도의 육류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남산 일대는 고기로 가득 찼다.
대피한 시민들 중에서 양식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죄다 부르고, 육류창고와 도살장 전부에 연락해서 모인 고기가 대충 3만 명 분. 스테이크 일 인분을 600g 잡고 계산해도 고기가 1만 8천 톤이다. 도대체 소 몇 마리를 죽인 걸까. 이 괴수를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예산이 억 단위로 빠질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내 알바 아니고. 내 몫으로 제공된 스테이크를 괴수의 어깨에서 먹으며 나는 대충 그 정도로 결론을 내렸다.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식사하는 것도 신선해서 좋구만. 좀 춥지만.
“먹어도 별로 먹는 느낌이 안 나요…….”
괴수는 바닥에 쌓여있는 스테이크 조각을 대충 집어먹으면서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건 그렇겠지. 사람에게야 몇 번이나 썰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스테이크 일 인분도 이 괴수에게는 입으로 털어 넣으면 씹을 필요도 없는 부스러기 사이즈일거다. 처음에는 한 두 개씩 집어먹던 괴수도 어느 순간부터는 한 움큼 집어서 입을 가득 메우고는 질겅질겅 씹었다. 왠지 내 크기감각도 이상해질 것 같다.
“남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연인이랑 스테이크를 먹으면 로맨틱할 줄 알았는데.”
연인, 이란 말이지…….
뿜을 뻔한 고급 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티를 내면서 삼켰다. 이 정도는 기본 스킬이다. 그보다 이 괴수 엄청 순진하구만. 이 정도로 순진한 여자도 요즘 보기 힘든데.
“그래? 창문도 없이 이렇게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온 나라가 지원해주는 식사를 먹는 건 충분히 로맨틱한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연인을 어깨에 앉히고 먹는 경험은 아무도 못해볼걸?”
하지만 그렇다고 반응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 내 말에 괴수는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웃으며 볼을 붉혔다.
“그, 그건 그렇죠? 헤헤헤…….”
이 정도 말에 넘어갈 정도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되지 않아? 스스로도 약간 한심스러움이 느껴져서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와인글라스를 들어서 목을 축였다. 다행히도 괴수는 ‘미성년자니까요’ 같은 되먹지도 않은 논리로 거절해서 비싼 와인이 수백 수천 병씩 깨지는 일은 없었다. 괴수가 미성년자라니.
“기남씨, 괴수의 상태에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까?”
이어폰으로 들려온 상황실의 말이 어딘지 숨기는 기색이라, 나도 괴수 귀의 스피커에 통하는 마이크를 피해 작게 속삭였다.
“아뇨,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1단계 실패!”
뭐가 실패라는 거야. 사령실의 아쉬운 것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괴수의 목소리가 들려와 신경의 집중 점을 순식간에 옮겼다.
“그보다 기남씨! 밥도 다 먹었는데 이제는 뭘 할까요?”
집에 가고 싶은데. 속마음을 완전히 묻어두고 웃으며 대답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들어줄게.”
“이럴 때는 남자가 리드해주는 게 좋은데…….”
수줍어하는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50m짜리 괴수를 뭘 어떻게 하면 리드하란 말이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연애경험은 있지만 너 같은 괴수랑 연애는 처음이라고.
“음, 나도 연애경험은 별로 없어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지 들어줄 수는 있지만.”
일단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해봤다. 괴수는 약간 삐진 듯이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기남씨는 저랑 하고 싶은 일 없어요?”
“…….”
와, 이 질문 어렵다. ‘오빠는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는 쨉도 안 될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50m 괴수랑 하고 싶은 일이라. 글쎄. 같이 아파트 뽑기 놀이라도 하기는 그렇잖아.
“이, 일단 영화라도 볼까?”
말하고도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 ‘영화라도 볼까?’ 라니, 이 무슨 진짜로 연애경험도 없는 숫총각 같은 말을. 이어폰 너머 상황실에서도 ‘그 정도면 차라리 내가 하겠다’ 라는 느낌의 한숨이 울려 퍼진다. 뭘 어떻게 하라고. 댁들 50m짜리 괴수랑 연애해본 적 있어요? 없지? 그럼 어차피 날 부르나 안 부르나 똑같다고.
“영화요……. 좋아요!”
“…….”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하는 괴수를 보니까 왠지 모를 한심스러움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굴할 수는 없다.
“뭐 보고 싶은 영화 있어?”
“있어요! 요즘 개봉한 그 영화 보고 싶어요!”
“들었죠?”
“스크린과 영사기 있는 대로 구해와! 위치는 공간이 넓은 광화문 광장으로!”
“팝콘이랑 콜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팝콘기계도! 콜라 유조차에 통째로 챙겨와!”
 
 
남산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이렇게 가까울 줄 몰랐다. 50m의 커다란 키로 몇 걸음 나아가자 그대로 광화문 광장이었다. 일단 건물은 부수지 않도록 커다란 길로 돌아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작은 건물은 성큼성큼 건너뛰면서 나아갔다. 서울 중심부의 도로고 바닥이고 나발이고 전부 갈려 엎어졌으니 내일 통근시간은 진짜로 지옥일거다.
“우윽…….”
그리고 그 사이 50m짜리 괴수의 가슴팍에 매달려있는 나는 내내 위아래로 요동치는 질나쁜 놀이기구라도 탄 기분이라 진짜로 구토가 몰려 올라왔다. 즐거운 듯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를 콧노래로 부르던 괴수는 내 구역질을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괜찮으세요?”
“아, 아니……. 이건 좀……. 우욱…….”
“아……. 좀 어지러우실 지도 모르겠네요.”
좀? 좀이라고 했냐? 네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위아래로 요동쳤는지 알기는 하냐? 뭐라고 내뱉을 수도 없어서 다만 불편한 표정을 짓자, 미안한 표정의 괴수는 나를 향해 손을 옮겼다. 잠깐, 아니 특별히 불만은 없어요! 죽이지만 마세요!
“최, 최대한 안 흔들리게 갈게요.”
괴수는 나를 집어서 자신의 오른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왠만한 방 하나 크기의 손바닥 위에 내가 털썩 주저앉자, 괴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손 위에 토하지만 말아주세요.”
괴수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최대한 손을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멀미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속도도 줄어들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흔들리지도 않자,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숨이라도 돌릴 겸 주위로 고개를 돌렸다.
빌딩 숲 사이, 땅바닥에서는 보이지 않은 새로운 광경.
나도 모르게 그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괴수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사실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빌딩의 유리창으로 거대한 괴수와, 외견은 소녀인 그 괴수가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얹고 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괴수는 아까까지 TV 뉴스에서 보이듯 건물을 박살내는 대신 바닥의 자동차조차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응차……. 읏차……. 어어, 으으…….”
왕복 4차선 도로조차 괴수에게는 좁았다. 거기에 다급히 피난명령에 도망치느라 차도 곳곳에는 자동차가 그대로 버려진 채였다. 괴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밟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나를 올려둔 손바닥만큼은 그 자리에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괴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바닥을 주의 깊게 보면서 걸어가던 괴수와 눈이 마주쳤다. 괴수는 눈을 깜빡이더니, 수줍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소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아, 다 왔어요!”
건물 코너를 돌자, 넓은 광화문 광장이 눈에 띄었다. 이미 작업반이 거대한 스크린을 세우고 있었다. 빠르구만. 빈 공간에는 유조차가 몇 대씩 서있고, 그 옆에서는 화물트럭을 가득 채운 옥수수 포대가 수십 개의 팝콘기계에서 신나게 튀겨지고 있었다. 나온 팝콘은 차도 위에 덮어진 방수포대 위에 수북이 쌓인다.
“정말 저를 위해 준비해줬어요!”
“하하, 당연하지. 네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지 해준다고 했잖아?”
기뻐하는 소녀를 보면서 여유를 부리며 대답하자, 소녀는 나를 보며 웃었다.
“대단해요! 기남씨, 혹시 뭐 대단한 분이세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소녀, 아무래도 자기가 자연재해라는 점을 까먹은 모양이다. 정부가 자기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다소한의 손실은 감안하기로 했다는 건 생각이 미치지 않는 걸까?
“부탁한 영화 상영이 준비됐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앉아주기 바란다!”
광화문을 가리듯 펼쳐진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자, 밑에서 헬멧을 쓴 군인이 확성기에 대고 외친다. 소녀는 알았다는 듯 귀엽게 경례를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아까보다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높으신 군인 분은 경례에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음, 낮이라 잘 안보이긴 하겠네요…….”
하긴 영화는 보통 어두운 곳에서 틀어주지.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소녀를 달랠 겸 말했다.
“그건 좀 참아줘. 뭐든지 해줄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는 힘들어서.”
“알았어요. 기남씨가 절 위해서 힘내주셨는데요. 그리고 사실 이 영화를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소녀가 고른 영화는 작년 말 개봉했던 로맨스 영화였다. 해외와 국내에서 많은 호평을 받고 인기를 얻은, 감동적인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연애를 다룬 눈물 쏙 빼는 좋은 영화다. 나도 다른 여자들이랑 못해도 5번은 본 것 같다. 그런데 이 소녀, 아니 괴수는 분명 오늘 새벽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던데, 이 영화는 어떻게 알았을까?
채 고민하기도 전에, 소녀는 나를 이번에는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광고도 없이 바로 수십 대의 영사기가 빛을 바라며 50m 소녀와 나만을 위한 상영을 개시한다.
“어?”
영화가 시작하고 몇 분쯤 흐르자,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보니까 애드벌룬과 헬기를 이용해서 거대한 천막을 햇빛을 막도록 친 모양이었다. 소녀는 놀란 듯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어깨 위에 있는 나를 바라봤다.
“이것도 기남씨가?”
“어? 응. 힘들지만 기예수 너를 위해서 힘내봤어.”
아무래도 대화를 듣고 상황실에서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소녀는 내 대답에 크게 기쁜지 웃다가, 문뜩 떠올랐는지 말했다.
“근데 ‘기예수’라니, 누구예요?”
“엉? 네 이름이라면서.”
대답하자마자 하마터면 날아갈 뻔 했다.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 젓자, 그 바람에 천막이 크게 요동친다. 공중의 헬기들이 어떻게든 위치를 고수하려고 애쓰고, 나는 날아가지 않도록 옷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뭐냐! 왜 갑자기 난동이야!
“아니에요! 김, 혜, 수! 제 이름은 김혜수예요!”
“미, 미안! 잘못했어 혜수야!”
이제야 대충 알겠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거대한 머리카락에 몇 번이고 얻어맞은 뺨을 문질렀다. 워낙 크게 외쳐서 잘 안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이름을 혼동한 모양이다. 김혜수→기몌수→기예수→괴수 인건가. 거 참. 헛웃음 밖에 안 나왔다.
“흥!”
소녀, 아니 혜수는 흥흥거리며 바닥에 수북이 쌓인 팝콘을 한 움큼 쥐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콜라가 가득 든 유조차를 들어, 뒷부분을 뜯어 열고 그대로 들이켰다. 사이즈가 저렇데 보니 콜라 캔으로 마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난 것 같은 표정은, 이윽고 영화에 집중한 듯 입을 약간 벌린 채 빠져들듯 눈을 스크린에서 떼지 못했다.
나도 그래서 별 말 없이 6번째 보는 영화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이어갔다.
나름대로 진지한 생각을 하는 사이, 이어폰을 통해 상황실의 무전이 들려왔다.
“기남씨. 지금도 괴수는 그 상태 그대로입니까?”
“네. 영화 잘 보고 있는데요. 왜요?”
바닥을 둘러보자 작업한 인부들도 대충 둘러앉아서 팝콘을 먹고 유조차에서 콜라를 빼먹으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한가하구만. 하지만 그 순간 군인들이 나서서 인부들을 말리고, 이미 먹고 마신 인부들을 재빨리 부축해서 트럭에 태운다.
“알겠습니다. 2단계 작전도 실패!”
“…….”
무슨 일인지 몰라서 끌려가면 나쁜 건가 싶었는지 인파 사이로 숨어들던 인부 하나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진다. 인부들이 깜짝 놀라며 흩어지자, 군인들이 재빨리 달려와서 먹은 걸 게워내게 한 다음 다급히 끌고 간다. 설마하니…….
나는 혜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혜수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오로지 영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꼭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역시 좋은 영화였네요! 같이 봐주셔서 감사해요!”
“어? 응. 고마워.”
“그런데 기남씨는 콜라랑 팝콘 안 드셨네요? 제가 일부로 드렸는데.”
“어, 영화 보는 데 먹고 마시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영화에 집중하는 편이거든.”
“그렇구나…….”
혜수는 대충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포장지를 벗긴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막대기는 어떻게 하려나 싶지만, 저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사이즈가 사이즈니까. 그보다 대담하구나. 얘.
“아,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어? 아니, 괜찮아. 난 여기 있으니 좀 쌀쌀해서.”
“그래요?”
이번에도 대충 납득한 듯 혜수는 고개를 돌렸다. 태양이 슬슬 한강 저 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미안하네. 놀이기구는 역시 탈만한 게 없어서.”
“괜찮아요. 그보다 기남씨는 이젠 뭐 안타세요?”
“혼자 타서 뭐하겠어. 연인은 혼자 내버려두고.”
“그, 그렇구나……. 헤헤헤.”
혜수는 기쁜지 수줍게 웃었다. 나는 롯데월드 외각 섬의 꼭대기 첨탑에 대충 앉아서, 바로 옆에 쭈그려 앉은 혜수와 함께 석양을 바라봤다.
영화를 다 본 다음에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혜수는 이번에는 놀이동산을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에버랜드를 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상황실에서 ‘서울 외각으로는 절대 내보내지 마세요!’ 하고 외쳐서 여기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혜수는 도착하고 나서야 자기가 놀이기구를 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팔푼이구만.
처음에는 일단 나라도 몇 개를 타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는 혜수를 봤지만 사람 하나도 없는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것도 심심해서 지금은 그냥 이렇게 같이 있다.
나는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어?”
“……기남씨, 역시 제 연인이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제 연인이라는 말에는 다시 한 번 뿜을 뻔 했지만, 역시 이겨냈다. 나는 대충 발을 퍼덕거리며 말했다.
“새벽에 갑자기 나타난 괴수면 이름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작년 말에 개봉한 영화를 알 리도 없지. 아, 괴수라고 해서 미안!”
“아니에요. 역시 괴수 맞죠 뭐. 헤헤헤.”
혜수는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어며 웃었다. 잠시 웃던 혜수는 작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
“음, 그래요. 굳이 짐작 가는 구석이라고 하면,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네. 그냥, 짜증나서요. 그런 경험 없으세요?”
혜수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돌아보며 물었다. 그리고는 호수 물을 대충 휘저으며 말했다. 그 행동에 오리배가 갑작스러운 파도에 출렁거린다.
“하하, 이런 이야기 하기는 좀 창피한데…….”
“나라도 괜찮다면 말해봐. 연인이라면서?”
“그럴까요?”
최대한 믿음직스럽게 말하자, 혜수는 역시 단순하게 기뻐하며 말했다. 하지만 다시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우리 집, 별로 잘 사는 집은 아니에요. 엄마……. 아니, 그 여자랑 단 둘이서 살고, 제가 아르바이트 해서 돈 벌어 와서 살고 그랬어요.”
“그 여자……. 라니?”
“별로 엄마 취급하기 싫어요. 죄송해요. 오리배 하나만 부술게요.”
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오리배 하나를 집어 들어서 돌 수제비 하듯이 호수 수면에 던졌다. 영문도 모르고 오리배는 호수 수면을 튕기며 날다 호수 밖으로 날아가 박살이 났다.
“절 낳게 한 남자에게 속았다나 봐요. 그래서인지 좋은 남자 낚아서 호강하겠다고, 그렇게 살더라고요. 나이도 들어서 주름살도 쭈글쭈글하면서 돈 많은 남자 낚아서 어쩌겠다나. 죄송해요. 하나만 더 부술게요.”
다시 오리배는 하늘을 날다 박살난다. 지금까지 부순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 발의 피도 아니겠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래도 전 나름대로 열심히 살겠다고, 그러고 살았는데, 돈 모아두면 그걸로 보석이다 뭐다 사서는 치장하고, 매일매일 탕진하고……. 그러다 어제 말하더라고요. 드디어 돈 많은 부잣집 남자를 후렸다고. 근데 그러고는 저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애써 웃으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애 딸린 여자인거 들통 나면 안 되니까, 앞으로 남남으로 살자나 뭐라나. 편지로 그렇게 적어두고는 모아둔 돈 전부 들고 없어졌더라고요. 보고 싶은 영화도 못 보고, 스테이크나 아이스크림, 콜라, 팝콘, 몸치장, 그런 거 전혀 모르고 모아둔 돈이었는데.”
혜수는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울다 지쳐 잠들 때 생각했어요.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그리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있더라고요.”
“…….”
“그리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남자가 좋은 거면, 어디 한 번 보자고. 그래서 이런 몸이 된 김에 땡깡 좀 부려봤어요.”
땡깡의 규모로는 좀 크긴 하지만, 이것도 모르는 척 했다. 오리배 날다. 콰직.
“솔직히 별로 기대 안했어요. 그런데 기남씨는, 진짜 멋진 남자더라고요. 이런 남자라면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오리배를 던지고, 혜수는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사랑만 있으면 다 포기할 수 있는 걸까요. 아이고 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석하게 나는 오리배를 던지기에는 너무 작다. 그래서 대신 적당히 둘러보다가 첨탑 꼭대기의 떨어져 나온 기와를 하나 잡아 집어던졌다.
여자를 데리고 노는 건 전문이다. 인기가 많다는 건 좋은 거다. 하지만 그러면서 상처 준 사람도 많다.
진심으로 날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 웃으면서 다른 여자에게 갔다.
내 애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지우라면서 다른 여자에게 받은 돈다발을 쥐어줬었다.
그런 내가 또 속이고 있었다. 기와가 없어서 아쉬웠다.
“오리배 하나만 던져봐. 나는 거 보기 좋다.”
“알겠어요.”
혜수는 별 말 없이 오리배를 하나 집어서 다시 날게 했다. 역시나 콰직. 조금은 후련했다. 50m짜리 괴수가 되는 것도 이런 걸 보면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빌딩까지 박살내면 정말 통쾌하겠지.
“기남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
“그렇구나.”
혜수는 이번에는 그냥 호수 물을 휘저으며 말했다.
“사실 기남씨, 인기 좋죠?”
“응.”
“역시나.”
혜수는 뭐가 좋은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하늘이 군청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음은 어디가 좋겠어?”
“글쎄요……. 인기 좋은 기남씨가 리드하는 건 어때요?”
“좋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좋은 일을 하러 가자.”
“조, 좋은 일이요?!”
혜수는 어째서인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걸어가자 혜수는 손바닥을 내밀어 내가 올라타게 했다. 나는 혜수를 보며 말했다.
“너희 집으로 가자.”
 
 
“부숴봐.”
“네?”
“부숴보라니까.”
“아니, 하지만…….”
혜수는 자신의 집을 내려 보면서 망설이는 듯 말했다.
“왜 그래? 한 번 부숴봐. 시원해질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차피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곳이잖아. 들어가서 잘 수 있는 곳도 아니고.”
“…….”
언덕 위 달동네의 낡은 집. 이 덩치로 짓밟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하지만 혜수는 머뭇거리면서 발을 내딛지 못했다. 나는 혜수의 손바닥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발을 굴렀다.
“이렇게, 이렇게. 밟아보라니까.”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저기에는…….”
“뭐. 엄마랑 같이 산 추억이라도 있어?”
“…….”
“널 버리고 갔다면서. 다 부숴버려.”
“기남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혜수는 내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지금까지는 부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으면서 지금은 부숴버리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못 부숴.”
“…….”
“잘 들어. 네가 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돌아갈 수 있을지 어쩔지도 몰라. 하지만 어쩌면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커진 것처럼 내일이 되면 갑자기 돌아갈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부수고 싶어도 못 부순다?”
나는 손가락으로 낡은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가고 싶어? 저 집에? 가면 계속 슬퍼지지 않겠어? 이 일이 끝나고 저 집에 돌아갔을 때 아무 느낌 없이 ‘아, 집에 왔다. 우리 집이다.’ 하고 기뻐할 수 있어? 엄마가 버리고 간 집에?”
“……아뇨.”
“그럼 부숴버려. 부숴버리고 싶어서 커졌다면서.”
“…….”
혜수는 발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서치라이트가 이쪽을 비추고, 확성기에서 나온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하세요, 기남씨!”
깜짝 놀란 혜수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군대가 전차와 포를 가득 펼치고는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을 겁니다. 우리가 기남씨에게 부탁한 건 저 괴수를 말려서 파괴활동을 멈추게 하는 거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부수게 부추기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끄러워!”
나는 옷깃에 달린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상황실로 연결되었어야 할 마이크에 대고 외쳤지만,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멈췄다. 나는 있는 힘껏 외쳤다.
“지금까지 있는 대로 박살냈잖아! 이 애의 낡은 집 한 채 부수는 것 정도로 생색내지 말라고! 겨우 집 한 채 박살내는 것뿐이잖아!”
“한 채고 두 채고, 파괴는 파괴입니다. 약속한 자정이 지났습니다. 지금부터 국군과 주한미군은 연합해서 괴수를 섬멸하는 작전에 돌입합니다. 기남씨는 물러나세요.”
“섬, 멸이요?”
혜수는 혼란스러운 듯 군대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는 그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약속한 자정이 지나기는 개뿔이! 너희들 아까부터 얘를 죽이려고 별 짓을 다 했잖아!”
“……네?”
혜수의 얼굴에 경악이 더욱 커진다. 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스테이크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독을 있는 대로 타놓고는! 높으신 양반들 생각이야 뻔하지! 나랑 같이 있어서 방심하는 사이 죽이려고 별 수를 다 썼던 거잖아!”
“그, 그랬던 거예요?!”
혜수는 다급히 자기 몸을 둘러봤다. 나는 다시 외쳤다.
“안됐네! 계획한 대로 안 풀려서! 독에도 반응 안 하니까 이제는 무기로 죽이려고 하는 것뿐이잖아!”
“괴수는 인류에 대한 위협입니다. 저 거대한 힘으로 건물들을 박살내는 건 봤지 않습니까. 애당초 기남씨는 괴수를 말리려고 투입된 민간인일 뿐입니다. 이 여자 저 여자 잔뜩 사귄 경험을 높게 산 것 뿐입니다. 그 경험으로 저 괴수도 낚아서 파괴행위를 말리게 하려고 했지만, 계속 부추긴다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지금 당장 사격해도 상관은 없지만, 마지막 정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확성기로 들리는 목소리에 혜수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아마 내 정체 때문에 멈춘 거겠지. 하지만 혜수는 손바닥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남씨, 가세요.”
“안 가.”
“왜요?”
혜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처음으로 웃어줬다.
“사랑만 있으면 뭐든지 버릴 수 있는 거라면서?”
“…….”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는 힘껏 외쳤다.
“이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적이라고 죽이려고 들면서!”
“아뇨, 기남씨 덕분에 알았습니다. 괴수는 이쪽을 봐라!”
그 말과 함께 저쪽에서 전등이 점멸한다. 혜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엄, 마…….”
“좋다. 마지막 통섭이다. 만약 파괴행위를 멈추고 우리의 요구에 따른다면, 국군은 주한미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괴수 너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행동에 나서겠다! 원한다면 이 여자를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제공하겠다!”
“……뭐라고?”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확성기에서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민간인 하나의 희생으로 괴수가 아군이 된다면 국군도 다소간의 희생을 감수하겠다! 앞으로 3분주겠다! 우리의 조건에 응할 생각이 있다면, 양 손을 바닥에 내려놓고 투항의사를 밝혀라! 그러면 이 여자를 넘겨주겠다! 마음대로 처리해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
“…….”
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든 손 말고 다른 쪽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혜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야 건물은 있는 대로 부쉈지만, 최소한 아무도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생긴 피해자는 혜수를 죽이려고 탄 독 때문에 피해를 입은 인부들 정도다.
이 애는 소녀다. 여린 소녀다. 꿋꿋이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아온 소녀다. 그런 소녀가 괴수가 되었다. 스트레스를 좀 풀려고. 히스테리 좀 부리려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고 싶어서.
나는 그래서 쥐어 준 장난감이었다. 그래서 억지에 맞춰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 소녀에게, 소녀를 이용하려고 장난감을 쥐어주고, 지금은 아무리 막장이라도 자기 엄마를 죽이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쥐어 준 장난감인 내 말에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이 소녀에게 주는 선물이, 죽이라고 주는 엄마란 말이지.
그리고 내 역할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내 억지다.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안다면, 이 괴수는 나를 죽이려고 들겠지. 이 애의 입장에서 나는 인간쓰레기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억지다. 되도 않는 억지다. 누가 들어도, 봐도,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그러나.
나는 망설이는 혜수를 보고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꺄악!”
그 순간, 폭음과 함께 혜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넘어지는 자리에 있던 건물들이 무너지면서 먼지가 피어오른다.
“누구냐! 누가 사격한 거냐!”
확성기를 통해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전투기의 모습을.
“아야야…….”
혜수는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먼지에 거대한 교복이 더럽혀져있다. 어깨에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저 멀리 선회한 전투기가 다시 기수를 돌리며 미사일을 날린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사격! 주한미군과 연합해서 괴수를 섬멸한다!”
“그만둬!”
내 외침도 무력하게, 포탄이 쏟아진다. 혜수는 비명을 지르며 양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꺄아아악!”
포탄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혜수의 양 팔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이마에 찢어진 상처로 피가 배어나온다. 나는 있는 힘껏 혜수의 귀에 연결된 스피커를 향해 외쳤다.
“괜찮아?!”
“아, 아파요……. 그만두게 해주세요……. 나, 아무 짓도 안할 테니까……. 얌전히 굴 테니까……. 엄마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울음소리에 가까운 중얼거림. 작은 목소리지만, 분명 모두에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포격은 멈추지 않는다. 전투기는 계속해서 기관총과 미사일을 날린다.
“그만해! 항복했잖아! 그만 하라고!”
“섬멸하라!”
작은 내 몸으로는 어쩔 수도 없는 폭력이, 소녀에게 가해진다.
혜수는 이제는 등을 보인 채 엎드려서 그 폭발에 얻어맞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혜수는 웃었다.
“하하, 역시, 괴수는, 괴수인 모양이네요…….”
“…….”
“고마워요. 그래도, 마지막 하루로는, 좋은 경험…….”
“혜수야.”
나는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앞으로 새사람이 될게. 진짜로 네 연인이 될게. 그리고 네가 바라는 거라면 정말로 뭐든지 들어줄게.”
“…….”
“그러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뭔, 데요……?”
나는 고개를 돌려, 포격을 가하는 군대를 바라봤다.
결국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 소녀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아무도. 겉모습에 휘둘려서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랑 정말 어울리지 않는 짓이지만…….
여자애 하나에 코가 꿰여서 이러는 건 수많은 여자를 울린 인간 쓰레기인 나라는 걸 생각해보면, 정말 나답지 않은 짓이지만…….
순진한 소녀의 연인, 괴수의 연인이라면, 이 정도야.
나는 혜수에게 속삭였다.
“다 부숴버려.”
 
 
“그러니까, 몇 번이나 말했잖습니까. 시 단위로 재개발 하는 것 보다는 싸게 들 것 아닙니까. 안 그래도 무너진 건물들이랑 박살난 무기 새로 사는 데 돈 잔뜩 들 텐데, 서울시를 다시 콩밭으로 엎어버리는 것 보다야 싸게 먹힐 것 아니에요. 미국은 예산심의 끝났다는데, 고국이 이러깁니까. 네? 뭐라고요? 괴수? 이것 보세요! 그 괴수 달래는 게 쉬울 줄 알았습니까? 나 몰라요? 자꾸 이러면 다시 한 번 콩밭 재배하라고 하는 수밖에.”
내 능글맞은 목소리에, 혜수는 히히거리며 웃었다. 이마에는 커다란 반창고. 양 팔에도 반창고. 다행히 치명상은 입지 않은 덕분에 대일밴드가 광고효과 내는 대신 특대사이즈로 만든 반창고랑 후원받은 후시딘 3만개 정도로 나을 것 같았으니까.
지금 혜수는, 양 손으로 뽑아낸 건물 하나를 들고 볼링이라도 하려는 듯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이대로 굴러가면 광화문 광장을 지나서 경복궁에 스트라이크 하겠지.
나는 잘 풀려간다는 의미로 혜수에게 윙크를 해주고는, 다시 한 번 핸드폰을 향해 말했다.
“아, 몰라요. 슬슬 혜수 손에 힘 빠진다니까 나랑 볼링시합이나 하렵니다. 결혼식장인 예정인 경복궁이 부숴지는 건 안타깝지만 댁들 때문에 다친 혜수 팔이 아프다는데 뭐 어떻게 해요. 뒷일은 알아서 하세요.”
“잠깐!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전국 은행에 보관한 금괴 전부 포스코로 보내라고 해! 포스코에는 연락해서 용광로 전부 비우라고 그러고! 특대 사이즈 금반지 제작하겠습니다! 할 테니까 제발!”
“결혼식 예산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 하지만 법률적으로 혜수양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그럼 나중에 치뤄주시던지요. 어차피 혜수 몸에 맞는 웨딩드레스 만들려면 시간도 꽤 깨질텐데. 이건 예식반지라고 치고.”
대통령에게 말하며 한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내 모습에, 혜수가 기쁜 듯 웃는다. 나도 핸드폰을 잠깐 귀에서 내리고 혜수에게 말했다.
“봐봐. 내가 뭐든지 다 해준다고 했지?”
“전부 제 덕분이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혜수는 여전히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국가단위로 협박을 하는 커플도 찾기 힘들걸. 하지만 한 일이 있으니까, 이 정도 벌은 애교로 받아들이셔야지. 어디 감히 내 연인을 죽이려고 드셨어. 무슨 깡으로.
나는 손짓으로 혜수에게 빌딩을 내려놓으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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