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6일 목요일

Juvenile Mosaic - 나비의 계절 (1)

 학원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미 해가 진 밤중. 가로등 불빛이 사람이 드문 길을 어둑하게 밝히는 그 골목길에서, 그녀는 아무리 봐도 아버지는 아닌 아버지 나이뻘의 남자와 팔짱을 낀 채, 차양막이 내려진 모텔에서 나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건 그저 순간이었다. 그녀의 멍한 표정은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니 아무 일이라는 개념 자체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눈웃음을 치며 팔짱을 낀 남자에게 뭔가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당연하게도 교복이 아니었다. 대학생이라고, 성인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유행하는 옷을 입은 채, 화려한 은빛 귀걸이를 달고, 매혹적인 화장을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 모습과는, 비슷한 듯 달랐다.
 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늘 그녀를 곁눈질로, 먼 발치에서라도 보아왔으니까.
 그녀가 골목길 저편으로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느린 걸음을 다시 옮겼다.
 심장은 아플 정도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결국, 소문은 사실이었다.

 호란, 이라는 이름이었다.
 나비 호(蝴)에 난초 란(蘭)을 써서, 호란. 한자는 어쩌다보니 알게 됐다.
 생일은 4월 12일. 나비와 난초라는 이름을 가질만한 생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이 있었다.
 잘 놀 것 같이 생긴 것을 넘어, 정말 호란이 원조교제를 하며 몸을 판다는 소문.
 질 나쁜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시기해서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좋아하니까.
 서로 말을 주고받은 적도 업긴 했다. 소심한 내게 그녀와 나는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는, 글쎄, 쉽게 표현하면 '노는 애들'과 어울렸다. 어딘지 성숙해보이면서도 헤퍼 보이는 인상도 한몫 했다. 옅게 갈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카락. 규정보다 몰래 줄인 짧은 치마. 배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줄이고 몸에 딱 맞게 고친 교복. 선생님 몰래, 때로는 대놓고 걸고 다니는 눈에 띄는 피어스. 언제나 그녀는 비슷한 차림의 여자애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남자애들과 교실 뒤편에서 책상에 걸터앉은 채 비속어를 섞어가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떠들어대곤 했다. 그래도 언제나 쾌활한 이미지와 성격 때문에 그런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반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럭저럭.
 그리고 나는 언제나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짝사랑, 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답고 활기찬 그녀를 보는 게 좋았다.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곤 했다.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고, 애당초 절벽 위의 꽃 같은 그녀였다. 그녀는 한 번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도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짝사랑이라는 게 대부분 그런 거니까.
 애당초 어울리지도 않는 상대. 나를 돌아볼 리도 없는 상대. 그렇기에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소문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럴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으니까.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상적으로 그리던, 동경하던 호란이 정말 원조교제를 한다고 해도, 배신당했다는 느낌이나 더럽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냥, 충격이었을 뿐이다. 더럽혀진 건 오히려 내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반이 바뀌고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도 가끔 지금을 떠올리며 그녀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가자.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그 자리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긴 수업을 마치고 드디어 집에 돌아간다는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발걸음이 힘없고 무거웠다.
 채 몇 걸음도 걷기 전이었다.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깜짝 놀라 돌아봤다.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호란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몸이 움찔, 하며 경련하고는 잡힌 손목을 빼려 했지만, 꽉 잡힌 손목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믿을 수 없는 현장을 바라봤다.
 "너."
 처음으로 호란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처음으로.
 방금 그런 일을 목격했음에도, 호란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분명 같은 사람일 텐데 갑자기 성숙해진 느낌까지 든다. 옷과 화장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동갑인데도 몇 년 후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호란에게는 꽃향기가 났다. 달콤하지만 어딘지 사람을 안정시키는.
 생각해보면 먼발치가 아니라, 곁눈질이 아니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 알지?"
 호란은 내게서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묘한 박력을 담아 말했다.
 반사적으로 끄덕이려던 고개를 멈췄다. 당연하지만 호란은 나를 기억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이렇게 나를 붙잡은 거겠지.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건, 적어도 호란을 안다는 건, 내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테니까. 모른 척 할까. 묘한 박력이 있는 호란은, 솔직히 두려웠다. 얻어맞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호란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래,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했어."
 부끄럽지만, 그 말에 모른 척 하지 못하게 됐다는 놀라움이나 두려움보다는, 기쁨의 감정이 먼저 찾아왔다. 본 기억이 있다니. 그야 내 쪽에서는 늘 봤지만, 호란의 시선에도 내가 들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야 같은 반이긴 하지만, 그것 뿐이니까.
 "흐음."
 호란은 내 손목을 놓아줬다. 하지만 나는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두어 걸음 물러나 호란을 바라볼 뿐이었다. 호란은 팔짱을 끼고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두려움을 느끼며.
 "아, 아무 것도 못 봤어요."
 겨우 꺼낸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웃길 정도로 비굴했고, 갈라져있었고, 삑사리도 났으며,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었다. 내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호란은 다시 내게 눈을 돌렸다. 턱이 떨렸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이에요. 아무 것도 못 봤어요."
 솔직히 말해서 두근거림 같은 건 사라지고, 어느새 두려움만 남아있었다.
 무서웠다.
 호란에게는 노는 친구들이 많다. 호란이 본인도 반 뒤에서 떠들 때를 생각하면 욕을 하기도 하고, 친구들은 가끔씩 싸운 이야기라든지 누군가를 괴롭힌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기도 했다. 맞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을 불러서 입을 막겠다며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뒷골목에 끌려가서 얻어터지고, 담배로 지져질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마음 이전에, 두려워졌다.
 고개를 푹 숙였다. 호란의 하이힐을 신은 발 끝자락만이 보였다. 턱이 떨리고 있었다. 손끝 발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이라 손을 쥐었다 폈다. 봄이 찾아왔지만 아직 밤은 쌀쌀하다고는 해도 그렇게 추울 리도 없건만."
 "아까 눈 마주쳤잖아?"
 그리고 호란은 그렇게 말했다. 묘하게 놀리는 기색으로.
 "같이 나오는 거, 봤잖아?"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사람이 말을 하면 봐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더더욱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호란은 여유 넘치는, 그리고 묘한 웃음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못 봤어?"
 부드러운,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로 호란은 말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자전거 한 대가 우리 옆을 지나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기."
 호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로 있고 싶었지만, 방금 호란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고개를 들었다. 호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꼬면서, 그걸 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소문이 돌고 있는 것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들키면 곤란하단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열렬하게. 이대로 넘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네가 못 봤다고 하니까 정말 아무 것도 못 봤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넘어가기에는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뭐, 네가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저, 절대로..."
 기어들어가듯 하던 내 말은, 갑자기 내 입술에 손가락을 대는 호란의 행동에 멈췄다. 그곳에서부터 온 몸에 찌릿, 하고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두려움 때문에 아플 정도로 두근대고 있던 가슴이 더욱 울렸다.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호란은 그런 나를 보며, 여전히 여유 있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러니까 입막음을 좀 해야겠는데."
 입막음, 이라는 단어에 등골부터 오싹함이 머리끝까지 타고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맞는 거구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나는 이 길로 하필이면 이 시간에 갔던 걸까. 최악의 날이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정말 원조교제를 하고 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이미 최악인데, 이제는 그것 때문에 좋아하는 애에게 얻어터지게 생겼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훌쩍였다. 눈가를 비볐다. 덜덜 떨었다. 사타구니가 움찔거렸다. 지릴 것처럼. 호란이 당연히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라리 그래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분명 부끄러운 마음은 더 커지고 산산히 찢어지겠지만, 차라리.
 호란은 내 손목을 다시 잡았다. 이제 끌려가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자."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구걸할 생각도 못 하고, 나는 그저 훌쩍이며 호란의 발걸음에 끌려 한 걸음 한 걸음 걱디 시작했다. 호란은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특별히 공짜로 해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완전히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몸뚱이로, 알몸인 상태로, 나는 천장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빠진 얼굴이었다. 하, 하고 메마른 웃음이 나왔다.
 첫 경험에 대해서는 많이 망상하곤 했다.
 사실 들은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는 듣기 싫어도 들리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본 적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남자니까.
 그렇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현실감은 전혀 없었다.
 마치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감각. 모텔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뭐랄까, 나는 내 몸에서 나와 멋대로 움직이는 내 행동을 영화나 드라마로 보는 느낌이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는, 그런 느낌. 마치 꿈만 같은 느낌. 꿈같은 시간이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분면, 이런 것도 망상했었지만. 공상했었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학원을 가려 사복 차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호란 때문인지, 모텔 주인은 우리가 들어오든 말든 문자 그대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치 자기 집이라는 듯 그녀가 들어간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호란은 나를 돌아보며 우선 씻고 오라고 했고, 나는 그저 그대로 따랐다. 가방을 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씻었다. 다시 옷을 입고 나오자, 이미 호란은 알몸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다시 옷을 입은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호란의 알몸을 본 것보다, 알몸인 호란보다, 옷을 입은 내가 더 부끄러웠다.
 아름다웠다.
 새하얀 피부. 가슴부터 엉덩이까지 미려한 곡선을 그리는 몸의 선. 호란의 몸매는 옷 너머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육감적이었다. 내가 망상하고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매력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킬 정도로.
 "옷 벗어."
 나는 그 말을 따랐다. 침대에 누운 호란은 내게 손짓했다.
 "이리 와."
 나는 그 말을 따랐다.
 그리고... 그 뒤에도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명령에 따르는 로봇처럼.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두려움과 수치심과 고양감과 죄책감과 그 외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끓어올라 뒤섞이다, 결국 전부 터져버렸다. 이젠 뭐가 뭐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입막음이라고 생각해."
샤워실에서 나온 호란은 타올 한 장만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물기에 젖은 머리를 털며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온 호란은 그대로 내 옆에 걸터앉았다. 침대 옆에 벗어놓은 자신의 옷을 뒤지더니 담뱃갑을 꺼냈다. 익숙한 손길로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담배 냄새가 싫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피웠으니까. 언제나 집에서는,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그 매캐하고 비릿한, 찌르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대신, 취할 것 같은 꽃향기만이 날 뿐이었다.
 "왜."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천장거울 속에 비친 호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나를 돌아봤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입막음이라니까."
 호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말했다.
 "이제 너도 공범이야. 그리고 설마, 이런 일까지 했는데도 소문을 내지는 않겠지."
 공범, 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납득했다.
 "그게 아니라."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여전히 거울에 비추는, 멍청한 표정으로 침대에 뻗어있는 나의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 안경이 없는 덕분에 내 모습은 뿌옇게 보였다. 현실감 없이.
 "왜 이런 일을 하냐는 거예요."
 "몸 파는 거 말이야?"
 호란은 원조교제, 같은 식으로 돌려 말하지 않았다. 호란은 길게 연기를 내뿜고는 말했다.
 "돈 벌기 좋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렸다. 호란의 등을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 밑으로 뼈의 윤곽까지 드러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매만졌던 그 매끄러운 등을.
 "아르바이트는 돈이 안 돼. 고등학생을 구하는 곳도 별로 없는데다가, 준다고 해도 최저시급이나 주면 다행이지. 술집에서 일하는 건 역시 힘들어. 돈은, 뭐 그럭저럭 번다고 들었지만 떼어 가는 것도 많다고 들었고, 어쨌든 학교는 다녀야 하는데 잠도 못 자고 술 냄새 풍기면서 가면 들킬 테니까. 반면에 이 일은 내가 연락 받아서 하니까 떼일 돈도 없고, 돈도 꽤 받아."
 그렇게 말하며 호란은 나를 돌아봤다.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어린애 같은, 자신의 작은 보물을 자랑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입막음 비용이라 공짜로 해줬지만, 네가 오늘 받은 건 제법 비싸다고? 보통 20만원은 받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금액도 학생인 내게는 충분히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놀리는 듯, 자랑하는 듯 말하는 그 태도가 더 놀라웠다.
 "빚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면 생활이 어렵다든가?"
 말하고 나서야 내가 물어볼 말도 아니라는 것도, 내게 그럴 말을 할 용기도 없다는 것이 생각났지만 이미 말은 나온 뒤였다.
 영화나 TV를 보면서 나는 생각해왔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라고. 불쌍한 처지라고. 하지만 호란에게는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나는 호란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든가, 건방지다든가, 물고 있는 담배로 지진다든가. 뒤늦은 두려움이 찾아왔지만 호란은 그저 담배를 문 채 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평이한 어조로.
 "그런 건 없어.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그저 돈을 벌고 싶을 뿐이야. 많이."
 어느새 꼬고 있던 발끝을 까딱거리며 호란은 노래하듯 리듬을 맞춰 말했다.
 "돈이 있으면, 갖고 싶은 것도 잔뜩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뭐든 할 수 있고, 집을 나가도 살 수 있고. 돈이 많아서 나쁜 일은 없잖아? 난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고 싶거든. 집을 나가서 나 혼자 살고 싶어. 하지만 아르바이트로는 하루 종일 일해도 무리고. 그럼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걸 찾아야 하잖아? 그리고, 솔직히 기분도 좋고."
 그렇게 말하고, 호란은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짓궂은 악동 같은 미소였다.
 "너도 기분 좋았을 거 아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거울에 비친 나를 다시 바라봤다. 이상한 나라에 누워있는 나를.
 왠지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훌쩍였다. 몸을 돌려 새우처럼 허리를 굽힌 채 훌쩍였다. 호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도, 찌질하다고 놀리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씩 후, 후우, 하는 담배연기를 뱉어내는 소리만이 들렸다.
 무엇에 우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울었다.
 "다 울었어?"
 훌쩍임과 히끅거림이 멈출 쯤에야, 호란은 입을 열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럼 이제 나가. 밤도 너무 늦었고, 나도 자야 하니까."
 그 말에 나는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바라봤다. 확실히 늦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진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옷을 벗어둔 쪽에서 들려왔다.
 "너는 모르겠지만 하고 있을 때부터 계속 왔다고. 괜히 너희 부모님이 신고하거나 하면 귀찮아지니까 빨리 받아. 변명은 적당히 생각하고."
 이번에도, 나는 그 말에 따랐다. 어머니였다. 왜 이리 늦냐, 전화도 안 받느냐고 화를 냈다.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지 고민했지만, 결국 무난히 친구들을 만나서 PC방에서 놀다보니 늦었다고 변명했다. 혼나긴 하겠지만, 가장 무난했으니까. 역시나 어머니는 정신이 있냐면서 한참을 뭐라고 하시고는 빨리 들어오라는 말로 전화를 끊으셨다.
 "많이 혼나겠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아니 남의 일이긴 했지만, 호란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옷 입고 빨리 가."
 나는 핸드폰을 만지며, 주저했다.
 하지만 물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자는 거예요?"
 "응."
 내가 얼마나 힘들게 말을 짜냈는지, 호란은 모르겠지. 호란은 순순히 대답했다.
 "아까 그 아저씨가 모텔 값 다 게산했거든. 내일까지는 내가 쓸 거야. 그래서 너도 데려온 거고. 시간이 되면 손님 한 명 더 받아야지."
 무심하고, 성의 없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대답.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입고 가방을 멨다. 문으로 향했다.
 "당연하지만."
 호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알몸인 호란은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학교에서도 모르는 사이고. 알지?"
 더 이상 턱이 떨리지는 않았다. 두려움은 없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만약 또 하고 싶은 거라면 따로 이야기 하고. 그야 다음번에는 공짜가 아니지만."
 호란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마치 놀리는 것처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갔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모텔을 나섰다. 집으로 향했다. 태엽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터벅, 터벅. 힘없는 걸음이 사람 없는 늦은 밤길에 울렸다.
 그리고, 조금씩, 빨라졌다.
 "헉... 헉...!"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숨이 찼다. 하늘을 올려봤다.
 새카만 밤하늘. 도시의 밤에는 별 따위는 없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좌우로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졌다. 가빠진 호흡은 조금씩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렇지만 달렸다. 그럼에도 달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ㅡ!"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폐 속의 공기를 전부 토해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욱...!"
 걸음을 멈췄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까운 전봇대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 도착했ㅡ하고 생각한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닥에 격렬하게 토했다.
 "우, 우웩, 우욱, 우웨엑..."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거의 소화가 끝난 걸죽한 무언가를 게워냈다. 목구멍이 쓰라렸다. 두근거리는 가슴 탓인지 속은 움찔, 움찔하며 남은 것을 전부 쥐어짜내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서 울었다. 훌쩍거리며, 히끅거리며, 움찔거리며.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감정에.
 흐릿하게 희미하게 떠오르는 모습들에.
 제멋대로 점멸하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에.
 동경했다. 닿을 리 없는 저 별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를 짝사랑했다.
 보답받지 못할 짝사랑이라도 충분했다.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았다.
 반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떠드는 그 모습이 좋았다. 곁눈질로 보는 화사한 옆모습이 좋았다. 지루한 듯 수업을 듣는 모습도,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도, 다리를 꼰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좋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상상 속에서로 충분했다.
 내 멋대로의 환상이지만, 나는 호란을 보며 생각했다. 진실로 가까워질리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기에, 내 멋대로의 공상과 이미지로 그녀를 색칠해갔다. 내 안에만 존재하는 그녀를 만들어갔다.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그런 내 멋대로의 이미지는 산산히 부서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물론 그녀는 몰랐겠지만, 짝사랑하는 내가 꿈꾸는 첫 경험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생각했다. 입막음, 단지 그뿐인 일이었다. 사소한 일. 마치 식당에서 실수를 한 대가로 나오는 서비스 같은. 그저 그뿐이었다. 내 모든 공상과 환상과 꿈은, 그녀에게는 그뿐이었다. 단지 그뿐인 사소한 일이었다. 거리낌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얻어맞는 게 나았다. 실컷 쥐어터진 끝에 이렇게 전봇대에 게워내고 피멍이 든 채 다쳐 길거리에 쓰러지는 편이 나았다. 그럼 차라리 이 마음도 사라졌을텐데.
 사라져야 하는데. 그런 심한 일을 당했는데. 내 작은, 자기만족으로 색칠한 짝사랑은 제멋대로 구겨지고 찢어졌는데. 그런데도.
 가장 슬픈 건, 문뜩 떠오른 '아르바이트를 구하자'는 생각이었다.
 어째서인지 내가 토해놓은 토사물에서는, 불쾌한 시큼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 순간에서부터.
 내 코에 맡는 냄새는 하나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났던, 취할 것 같은 난초꽃의 냄새만이 날 뿐이었다.
 나비 한 마리가 전봇대 옆 화단에서 팔랑거리고 있었다.
 나비의 계절이었다.

댓글 1개:

  1. 허어... 재밌당... 이걸로 더 써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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