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5일 목요일

살리에리 컴플렉스 - (전편)

 그 사람은, 제게 태양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
 
언제부터 저, 사기사와 후미카가 책을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언제나 제 손에는 책이 있었고 제 눈동자는 활자를 비추고 있었다는 것만이 기억납니다. 제게는 책을 읽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고, 제 세상은 책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직접 접한 세상보다, 책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접한 것이 몇 배는 넓을 겁니다.
 
책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명확한 시작이 있고, 확실한 끝이 있었습니다. 언제든 원한다면 페이지를 넘기고 되돌아가며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곳이라면 책을 멈추고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한 뒤에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식을 전하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였고, 누군가의 주장을 담아놓은 책도 마찬가지였고, 왕자가 용에게서 용을 구해내는 이야기도 우주비행사가 머나먼 별을 향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책이 좋았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표정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밑에 담겨있는 그 사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 역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파악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틀린 것으로 밝혀졌고, 혹은 정답을 영원히 알 수 없는 채 제 짐작만으로만 존재했습니다. 처음도 명확하지 않으니, 끝 역시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제가 원한다고 멈추거나 돌아가거나 그 너머를 알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 역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더욱 책 안으로 몰입해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저를 따돌리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책을 통해 평생 가본 적 없는 장소로 떠났습니다. 만난 적 없는, 만날 리 없는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또다른 인물들이 제게는 지인이었고 친구였으며 연인이었고 가족이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책을 통해 접했습니다. 그 안에서 살 수만 있다면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동경하는 것. 그들 사이에서 살고 싶다는 것.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는 모든 것이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확실한 세계. 그런 세계에서 살고 싶었기에, 저는 제가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했던 계기와 시기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소망 역시 언제부터인가 제 가슴 속에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글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시도했습니다.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제 앞에 있는 것은 끝없는 목마름일 뿐이었습니다.
 
그저 활자의 뭉치. 단순한 단어의 나열.
 
그 책들처럼, 단어를 읽고 있으면 머릿속에 그림이 떠오르며 이야기 속의 세상에 내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림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검은 글자와 하얀 종이일 뿐. 몇 번을 시도해도, 몇 번을 바라봐도, 제 눈앞에 보이는 것은 멋진 세계가 아닌 종이와 글씨 뿐이었습니다.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체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의 소원으로 남겨두자. 언젠가는. 그때는 반드시.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그 꿈을 묻어뒀습니다.
 
계속 두드리면 언젠가 그 문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러는 사이, 어느새 저는 아이돌이 되어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이제와서 돌아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분명히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이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이해할 수 없는데, 제가 그 한 가운데,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장소에 서다니, 질 나쁜 농담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길이 열린 것만 같았습니다. 새로운 문이 열린 것만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것이 기쁘고 뿌듯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저는 어느새 더 이상 책을 통해 이 세상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이 세상을 보며, 제 두 발로 이 세상을 걸으며, 이 두 손으로 이 세상의 안에서 저로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저 역시 그 멋진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만큼은 사라져주지 않았습니다.
 
맹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가슴 속에 묻어둔 꿈은 가끔씩 요동칠 뿐이었습니다. 그저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제 가슴은 함께 요동쳤습니다. 마치 해결하지 못한 숙제와 같았습니다. 모두와 웃으면서도 가끔씩 제 안의 냉정한 누군가는 이걸로 괜찮냐며 제게 속삭이고는 했습니다. 이대로 그 꿈이 묻혀, 영원히 사라져도 괜찮겠냐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나간 꿈따위, 망각의 사막에 묻혀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부서져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저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마치 '파랑새'처럼, 행복은 제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기억했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해요. 이야기가 새버렸네요.
 
저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욕망은 있었지만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건 바쁜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건 핑계였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책을 읽거나 제 시간을 가질 틈은 있었으니까요. 더 큰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재능 따위 없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읽은 사람의 비웃음을 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저는 공포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 공모전의 모집요강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보기로.
 
제 글을 써서 공모전에 출전해보기로.
 
그렇다면, 그렇게 한다면 이 마음 속의 욕망에게도 변명거리가 생기겠지요. 봐, 안 되잖아, 하고요.
 
누군가 말하더군요. 용기란 두려움을 5분만 참는 것이라고요. 그 말을 기억하며, 가슴에 되뇌이며,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용기는 금방 바닥나버렸습니다. 고작 그 5분이 지나자, 저는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제가 쓰는 글은 그저 활자를 나열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토록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을 터인데. 그토록 많은 아름다운 문장을 보아오고,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고, 가슴이 뛰는 이야기를 보아왔는데. 비교하면 비교할 수록 이런 형편없는 쓰레기를 쓰고 있는 것이 그런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한심함과 무력감에 머리가 어질거리고 속이 쑤시듯 아파왔습니다. 식은 땀이 흐르고 호흡은 거칠어졌습니다. 마치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을 그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원고지를 구겨 찢어내며 견뎌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내 안의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좋을 텐데. 그럼 행복할 텐데.
 
시간이 지날 수록 욕망과 무력감은 강박감과 초조함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새 저는 혼자 뿐인 공간이 아니라 비는 시간이라면 어디든 노트를 펼치고 펜을 쥔 채 끝없는 고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날, 공연을 준비하는 대기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뭘 하고 계신 건가요, 후미카씨!"
 
바로 등 뒤에서 들린 커다란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저는 현실로 돌아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괘,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완전 새파란데요?!"
 
대답 없는 제 안색이 좋지 않았는디, 그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저는 겨우 힘을 쥐어 짜내 대답했습니다.
 
"아... 아카네씨..."
 
히노 아카네.
 
저와는 정 반대 같은 사람.
 
그렇기에 동경하는 사람.
 
언제나 조용하고 방 안에서 홀로 책 안에 파묻히기를 좋아하는 저와는 다르게, 그 사람은 언제나 소란스럽고 밖으로 뛰쳐 나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사람을 거부하듯 구석에 있는 저와는 다르게, 타인에게는 필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저와는 다르게, 그 사람은 언제나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타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다고 바란 적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늘 기운이 넘치고 활발하고 밝은 그녀를 저는 몇 번이고 눈부시다는 듯 바라봤습니다.
 
아카네씨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망설임 없이 자신의 머리와 제 머리에 양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습니다.
 
"열은 없지만, 체온이 엄청 낮아요!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어, 어떻게 하죠? 아, 우선 공연을...!"
 
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카네씨는 몸을 돌렸습니다. 저는 금방 그게 공연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힘을 쥐어 짜내 그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많은 분들이 준비하셨고, 기대하셨는데 그러면 안 돼요. 금방, 괜찮아질 테니까..."
 
"그렇지만 정말 안색이 안 좋아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그건, 무슨 이유였을까요.
 
지금까지 주위 사람에게 제 욕망이라든가, 글을 쓰고 있다든가, 꿈이라든가, 그런 것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약해졌던 걸까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요.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알아줬으면 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아카네씨를 말리고 싶었던 걸까요.
 
명확한 답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저도 모르게 아카네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예전부터 책을 읽으며 저 역시 글을 쓰고 싶어했다는 것. 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해왔던 것. 우연히 공모전이 열리는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보려고 했던 것. 그렇지만 정작 제가 쓴 글은 너무 형편 없어서 용기는 사라지고 두려움과 부끄러움만이 가득한 것.
 
"두려워요... 이런 형편 없는 글 따위를 보냈냐며 저를 욕하는 건 아닐까요. 제게는 그 어떤 재능의 조각도 없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닐까요. 정말 저는 아무 가능성도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러느니, 차라리..."
 
저는 고개를 숙인 채, 사라질 것만 같은 희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털어놓고 보니, 제가 할 선택은 단 하나 뿐이었으니까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내려놓는 것.
 
저 따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창하고 원대한 꿈이었다고 인정하고 더 큰 창피를 당하기 전에 포기하는 것.
 
그렇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도 분해서.
 
저도 모르게 노트를 구기며 주먹을 쥔 손에,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렇군요."
 
아카네씨의 목소리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들려올 대답은, 누가 들어도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제 주먹 쥔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습니다. 그 행동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보인 것은, 각오를 굳힌, 눈부신 미소였습니다.
 
"그러면 저도 같이 쓰도록 하죠!!"
 
아아.
 
그 미소는, 정말로, 진실로 태양과도 같아서.
 
"무슨, 뜻이시죠?"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카네씨는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들며 기운차게 외쳤습니다.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지만! 혼자서 힘을 내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하는 편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응원만 한다고 후미카씨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으니, 저도 같이 쓰도록 하죠!!"
 
"같이, 쓴다고요...?"
 
"네! 후미카씨도 아시다시피 저야 바보라서 책은 별로 안 읽어봤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형편없는 글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미카씨의 글은 절대 후미카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형편없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 오히려 후미카씨는 대단합니다! 동경하는 걸로 끝나지 않고 용기를 내려고 하니까요! 꿈을 향해 노력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겁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면서.
 
"하지만 만약! 후미카씨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보다 형편없을 저를 보면서 기운을 내면 좋겠습니다! 제 형편없을 글을 보면서 힘을 내서,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언제나 같이 할 테니까요!"
 
멍하니 되묻는 저에게, 아카네씨는 일말의 불안도 없는 웃음을 지은 채 그렇게 외쳤습니다.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요.
 
"혼자서 괴로워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후미카씨."
 
아카네씨는 믿음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가슴을 퉁 치며 말했습니다.
 
"같이 괴로워하는게, 동료니까요."
 
그 말에.
 
그 대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이미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추지 않아서, 그걸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고마워요." 라고 대답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것이 고마워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함께 해주겠다고
 
잘 모르는 일이라도, 남들에게 비웃음을 당할지 몰라도, 저를 위해서 함께 해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도 너무나도 고마워서, 저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렇게, 저와 아카네씨는 함께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아카네씨는 정말 글을 쓰려고 한 것조차 처음인지, 제게 많은 것을 물어봤습니다. 그 열정과, 저를 위해 노력해준다는 점이 기뻐 저는 그 상담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동시에 마치 지금까지의 괴로움은 거짓말인 것처럼 제 생각이 고삐를 끊고 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가벼울 줄이야.
 
나를 믿어준다는 사실이 힘을 줄 줄이야.
 
이 순간, 아카네씨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몇 번이고 기운을 낼 수 있었습니다. 제 방에 홀로 앉아 펜을 쥔 채 백지와 싸우는 순간도 더는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처음으로 글을 완성했습니다.
 
그것도, 심지어 만족스러운 글을요.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아름다운 작품들에 비하면 쓰레기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걸로 충분해' 라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 했다고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카네씨의 덕분이야.
 
완성된 원고를 끌어안으며, 저는 속으로 깊은 감사를 보냈습니다.
 
"준비 되셨나요?"
 
"물론이에요, 아카네씨."
 
공모전 마감을 앞두고.
 
즐겁다는 듯 씩 웃는 아카네씨의 질문에, 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 둘, 셋..."
 
"봄바ㅡ!"
 
저희는 품안에 든 서류봉투를 동시에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었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같이 보도록 해요."
 
"네, 후미카씨! 그리고 서로의 글도 읽어보죠!"
 
"그, 그건 좀 부끄러운데요..."
 
"괜찮습니다! 전 후미카씨의 작품이라면 분명 훌륭한 작품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분명 아카네씨도 비웃을..."
 
부끄러움과 걱정에 시선을 살며시 피하는 저에게, 아카네씨는 그때처럼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결코 누군가 진심을 다한 것을 비웃지 않습니다."
 
"...네."
 
저는 다시 한 번 감사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순간, 이미 모든 것은 충분해졌습니다.
 
처음으로 완성한 저만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무슨 일이 있어도 긍정해주겠다고 약속한, 하나 뿐인 그 세계의 공유자.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공모전의 결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설령 제가 걱정했던 것처럼 제게는 그 어떠한 재능도 없고 형편없는 쓰레기라는 평가가 오더라도, 저는 이미 제 세계를 완성한 걸요. 저는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진심으로 이것으로 됐다고 여겼습니다.
 
쭉.
 
계속.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세상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 하나는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 다른 하나는 꿈을 이루는 것." 그렇다면 인간은 꿈을 가진 순간, 이미 비극을 약속받는 걸까요.
 
완성한 원고를 보낸 이후, 저는 공모전에 대한 것은 솔직히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기억하는 것은 아카네씨를 만날 때뿐이었습니다. 그 전부터 아카네씨와는 유닛으로서 공연을 하거나, 여러 일을 함께 하며 친밀한 관계였지만 함께 공모전에 출품한 이후로는 더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진심으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여길 수 있는 상대였습니다. 서로 전화를 하거나, 휴일에는 함께 쇼핑을 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했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제안을 하고, 그런 제안에 응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아카네씨는 제 은인이었습니다.
 
동경과 감사는 존경의 감정으로 발전했습니다. 어쩌면 그건 사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카네씨와 함께 있으면, 이야기를 하면, 이전부터 저는 제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사람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책 속에만 파묻히는 제가 아니라,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타인과 교우를 맺으며 세상을 책이라는 안경이 아닌 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아카네씨에 대한 것을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더더욱 길어졌으면, 잦아졌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때쯤 제가 공모전의 결과발표를 기대한다면, 그저 아카네씨와 서로 작품을 읽어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기다렸던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찾아왔습니다. 공모전을 준비하던 도중 스케쥴 노트에 발표 날짜를 적어놨던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발표 시간은 언제일까 생각하며 오늘 아카네씨를 만날 기회가 있다는 생각만에 두근거렸습니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저는 액정을 확인하고 밝게 웃었습니다. 아카네씨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으니까요.
 
"안녕하세요, 아카네씨."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려 노력하며, 저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했습니다.
 
"후미카씨!! 대사건입니다!!"
 
들려온 것은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외침이었습니다. 아마 만화였다면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는 제 눈은 X로 표시되었을 겁니다.
 
"아... 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그 흥분에 당황하면서도, 저는 핸드폰의 마이크 부분만 입에 가져다 댄 채 물었습니다. 대답은 우렁찼습니다.
 
"아, 넵!! 그게! 방금 저희가 냈던 공모전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요...?"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공모전에서 전화가 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었으니까요.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그런 생각에 다시 물어보려는 순간, 제 머릿속에 언젠가 어떤 작가의 수기에서 봤던 정보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카네씨는 대답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제가 냈던 글이, 대상으로! 뽑혔다고!!"
 
그 대답에.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보세요? 후미카씨?"
 
"아... 아, 네."
 
재촉에 저는 겨우 그렇게 소리를 냈습니다. 아카네씨는 여전히 제가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어갔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인터뷰나 그런 걸 하겠다고 합니다!! 이, 이거 어떻게 하죠? 저, 그런 건 전혀 모르는데... 그보다 책 같은 거 읽은 적도 별로 없어서 뭐라고 하든 바보 취급 당할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후미카 씨는 전화 받으셨나요? 제가 대상이라는 건 후미카씨는 특대상이라든가 금상이라든가 받으신 거겠죠?! 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한 거 아닌가요?! 이게 전부 후미카씨의 덕분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하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정보에, 제 머리는 생각을 그만뒀습니다.
 
뭔가의 착오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조금의 기대를 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저 스스로 만족했으니 됐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기대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과분한 기대라는 것은 알고 있고, 가능성 따위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음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상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글이 상을 받는 상상. 재야에 묻혀있던 천재 소설가의 혜성 같은 등장. 현역 아이돌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시상식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참가해 트로피를 받고,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오랜 꿈의 결실을 맞이하는 상상.
 
하지만 그 상상 속에서 아카네씨의 자리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객석에서 저를 보며 박수를 쳐주는 모습으로.
 
역시 후미카씨는 대단하다며 봄바ㅡ! 하고 소리를 치는 모습. 그런 아카네씨에게 제가 '이게 전부 아카네씨가 제게 용기를 주신 덕분이에요.' 하고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하는 모습.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이상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공모전의 정식 발표는 전화를 끊은 뒤 몇 시간 뒤에야 공지되었습니다. 물론 제 이름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ㅡ대상 : 히노 아카네(17)
 
하지만 그 전화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사무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저와 아카네씨가 참가했던 공모전은 작은 대회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 뿐인 도전이라면 큰 곳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간 신문에서도 지면을 할해해 기사를 실었습니다. 연예계 기사를 주로 다루는 신문들에서는 1면에 게시한 곳도 있었습니다.
 
'현역 아이돌 히노 아카네, 천재 작가로 혜성 같은 데뷔!'
 
저도 모르게, 신문을 넘기던 손끝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ㅡ!!"
 
그리고 문을 활기차게 열며 한 아카네씨의 인사에, 사무소에 모여있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축하해, 아카네!"
 
"대단하네!"
 
이어지는 축하와 박수의 열기. 웃는 얼굴로 들어오던 아카네씨는 그 반응이 부끄러운지 주춤, 하고 물러나고는 "자, 잠깐 바깥 좀 달리고 오겠습니다ㅡ!" 하면서 도망쳐버렸습니다. 그 반응에 모두는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대단하네요, 아카네씨. 그런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어느새 제 곁에 다가온 타치바나 아리스양이 그쪽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솔직히 좀 바보같다고 생각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러네요."
 
저도 모르게, 아리스양의 말에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스스로의 말에 저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에 제 소설에 대한 심사평도 도착했습니다. 결과는 예상하던 대로였습니다. 인물들에 생동감이 없습니다. 문장이 어렵고 기교를 과하게 부린 인상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기타 등등. 재능이 없다는 말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 다음에는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하겠다는 말 외에는 모두 예상하던 대로였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저 웃는 얼굴로 아카네씨를 축하해주면서, 제 상상 속의 아카네씨가 그랬듯 웃으며 박수를 쳐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궁금증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분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작품은 뭐가 어땠기에. 아카네씨의 작품은 얼마나 대단하기에.
 
우리는 서로 약속을 나눴습니다. 서로의 글을 바꿔 읽어보자고. 함께 마주한 자리에서.
 
그렇지만 저는 그 약속을 도저히 지킬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서로 마주해 원고를 교환할 때까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저는 아카네씨의 원고를 가방에서 꺼냈습니다. 관계자라며, 거짓말과 핑계로 프로덕션의 이름을 대어가며 공모전 주최측에게 얻어낸 원고였습니다.
 
ㅡ분명 뭔가 착오가 있는 걸 거야.
 
그런 생각으로,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글씨를 눈으로 쫓던 저는, 저도 모르게 원고를 떨어트렸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글이었습니다.
 
마치 제 눈 앞에, 그녀의 세상이 펼쳐지듯. 그녀의 세상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오랫동안, 언제나.
 
제가 꿈꾸던, 그런 글이었습니다.
 
살아 숨쉬는 것만 같은 인물들. 투박하고 단순한 단어들이지만 미려하게 합쳐져 마치 협주곡을 연주하듯 펼쳐지고 이어지는 문장들. 다음 문장, 다음 문단, 다음 페이지를 게걸스럽게, 마치 탈진한 사람이 물을 애타게 바라듯 탐닉하게 만드는 전개와 이야기. 그 안에 담겨있는, 마치 태양과도 같은 아카네씨의 따듯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감각.
 
아아.
 
하느님.
 
만약 당신이 진실로 계시다면, 어째서 그런 글을 제가 보도록 만든 것입니까.
 
어째서 제가 아니라,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고 기원하고 노력하며 고대해온 제가 아닌, 아카네씨에게 그런 글을 쓰도록 허락하신 겁니까.
 
그런 책도 한 글자 읽지 않고,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밥과 운동 밖에 없는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차버린 것만 같은 멍청이가 이런 아름답고 미려한 글을 쓸 수 있도록 하신 겁니까. 어째서 늘 헤실헤실 웃고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아무 생각도 없는 단세포 같은 녀석에게 재능을 내려주신 겁니까.
 
제가, 저의 태양과도 같은 그 사람을 내려볼 수 있는, 우월감을 느낄 요소 단 하나조차 빼앗아가신 겁니까.
 
어떤 이유로 제가 그녀에게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제공하도록 만드신 겁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재능만을 원했던 제게!
 
제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이 세상에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하느님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가 정녕 인간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어떻게 감히!
 
그때, 제 마음 안에 악마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질투했습니다.
 
저는 시기했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는 제 시야는 어느새 눈물로 가득차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고는 이미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너무나 힘을 줘서 구깃해진지 오래였습니다. 꽉 쥔 왼쪽 주먹에서는 손톱이 손바닥을 찢어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아랫입술은 너무나 힘껏 깨물어 이가 맞닿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입 안에는 피가 고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증오했습니다.
 
저는 자괴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그렇게까지 분노하고 증오하며 질투할 일이냐고요. 그저 그녀, 히노 아카네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제게는 없었던 것뿐이라고요. 히노 아카네가 저, 사기사와 후미카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이냐고요. 저를 비웃기라도 했으며, 저를 무시하기라도 했으며, 저의 것을 빼앗아기라도 했냐고요.
 
저도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분노하고 증오하며 질투할 일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그 생각은, 마침내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듯 요동친 마음에도 다음날 찾아왔습니다. 잠을 설치긴 했지만, 저는 겨우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오히려 나는 아카네씨에게 감사해야해. 아카네씨가 아니었다면, 글을 완성해보는 일 조차 없었을 거야. 아카네씨는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 글은 정말 아름다웠고. 어떠한 착오도 없었어. 오히려 그 글이 대상이 아니었다면, 나는 공모전 자체를 믿을 수 없었을 거야. 다시 만나면, 진심으로 아카네씨를 축하해주자.
 
그렇지만, 아카네씨를 만날 기회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날부터 아카네씨는 바빠졌기 때문입니다.
 
공모전의 인터뷰. 문예지에 실릴 인터뷰. 각종 예능 프로그램은 앞다투어 그녀를 초대했습니다. 광고 제의도 몇 건이나 들어왔습니다. 늘 하던대로 평범한 활동을 계속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아카네씨는 마치 평소에 그녀가 그렇듯 전력으로 달려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전화라도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를 감정에, 늦었지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려던 마음은 몇 번이나 나중이라며 밀려났습니다. 겨우 용기를 내면 부재중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공모전의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후미카."
 
프로듀서는 제게 말했습니다.
 
"다들 가서 축하해주고 싶다고 했지만, 일단은 큰 행사인데다 문예쪽 행사라서 많은 사람이 갈 수는 없다나봐. 뭐, 게다가 딱딱한 분위기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카네가 후미카는 꼭 참가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어. 그쪽에서도 후미카라면 괜찮다고 흔쾌하게 응했고. 후미카 너도 공모전 같이 냈다면서?"
 
"아, 네..."
 
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시상식 장소랑 시간은 여기 적혀있는대로야. 옷은 드레스 종류로 입고 오라고 하던데, 의상팀에 이야기 해놨으니까 찾아가면 될 거야."
 
"그, 저는..."
 
"괜찮아.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아카네도 직접 부탁했고, 후미카가 참가해주면 정말 기뻐할 거야. 어떻게 보면 사무소를 대표해서 축하해줄 사람으로 뽑힌 거니까, 자랑스럽게 다녀와. 아카네에게 다시 한 번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저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프로듀서는 제 어깨를 두드리며 일방적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결국 저는 아카네씨의 부탁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제 상상 속에서의 모습과 위치만이 정반대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저 역시 지금껏 아카네씨에게 축하를 전하고 싶었고, 그런 자리에서 한다면 더 뜻 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욱신거렸습니다.
 
시상식은 무려 고급 호텔의 홀을 빌려서 진행됐습니다. 이름과 얼굴을 이미 알고 있는 유명하고 고명한 작가 선생님들이 몇 분이나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부담감에 하마터면 그대로 돌아 도망칠 뻔 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허락된 장소가 아닌 것만 같았으니까요.
 
"아, 후미카씨!!"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서려던 걸음이 멈췄습니다. 저 편에서 아카네씨가 손을 힘차게 흔들며 제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모양 좋고 단정하게 올려 묶고, 오렌지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였습니다. 저는 머뭇거리며 인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카네씨는 그대로 제 양 손을 맞잡고 올리며 "봄바ㅡ!" 하고는 인사했습니다.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후미카씨!! 이야, 사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저한테 어울리는 장소도 아니고 말입니다! 운동장이라면 몰라도 이런 곳에 있으면 왠지 혼나고 쫓겨날 것 같습니다!!"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들며 아카네씨는 진심이라는 듯 환하게 웃었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큰 편이었지만 모인 사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아카네씨의 말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져 풋, 하고 마치 옛날처럼 웃었습니다.
 
"괜찮아요, 아카네씨. 오늘 이 자리는 아카네씨가 주인공이니까요."
 
"프로듀서도 그렇고 몇 분이나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저는 아직도 안 믿어집니다! 오히려 후미카씨가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움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고 있던 표정이 굳었습니다. 하지만 아카네씨는 그런 제 반응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습니다.
 
"약속은 못 지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착오인 것 같아서 심사위원분에게 부탁드려서 후미카씨의 글을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 글 같은 것보다 훨씬 좋은 작품인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몰래 카메라고 사실은 후미카씨에게 상이 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겁니다!"
 
웃으며 말하는 아카네씨의 표정에, 거짓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아카네씨의 모든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만 웃으며, 그렇지 않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카네씨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카네씨는 돌아보고는 제 손을 잡은 채 그쪽으로 가며 말했습니다.
 
"아, 후미카씨! 예전에 이 분의 책을 좋아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요 근래 몇 번 뵈어서 친해졌는데, 인사라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선생님! 혹시 사인펜 가지고 계신가요? 여기 계시는 분은 사기사와 후미카씨인데, 선생님의..."
 
그렇게.
 
몇 번이고, 아카네씨는 익숙하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저를 작가분들에게 소개해줬습니다. 책으로만 보던 인물들. 동경하던 인물들. 언젠가 만나보고 싶었던 인물들. 그들은 이미 아카네씨와 친밀하다는 듯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한 걸음 물러난 채, 그저 웃으며 그런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ㅡ대상, 히노 아카네!"
 
시상식이 진행되는 사이에도, 저는 그저 웃고 있었습니다.
 
긴장했는지 팔과 다리가 동시에 움직이며 단상 위로 올라가는 아카네씨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아카네씨는 고개를 90도로 꺾으며 상을 받고 인사하고 내려가려다, 소감을 이야기하라는 말에 마치 도망치고 싶은 것을 억누르듯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쭈뼛쭈뼛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아, 그... 아,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상을 받게 된, 히노 아카네입니다!"
 
이어지는 커다란 박수소리. 그 소리에 다시 위축된 것 같았지만, 아카네씨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솔직히, 저는 책 같은 건 전혀 모릅니다! 읽어본 것도 얼마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쓸 생각 같은 건 전혀 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뭔가 오해가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웃음소리들. 하지만 웃음소리는 금방 그쳤습니다.
 
그리고, 아카네씨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마치 태양과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렇지만 저기 계시는 후미카씨, 아차, 사기사와 후미카씨가 공모전에 나간다는 말에 용기를 드리기 위해 함께 써봤습니다! 이 자리에 후미카씨가 아닌 제가 서있어서 죄송하지만, 그렇기에 이 상은 전부 후미카씨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후미카씨!! 다음번에는 꼭 후미카씨가 이 자리에 서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인사.
 
그 행동과 말에, 사람들이 제 쪽을 바라봤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조금씩 숙였습니다.
 
아아. 정말 상상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서고 싶었던 그 자리의 모습과, 그대로.
 
아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만약에 아카네씨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저 자신의 이야기만 했다면.
 
저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그저 수상과 승리의 영광에 취했었다면.
 
아마 저는 견뎌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웃으며 박수를 치고 축하를 보내며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뿌듯해하며, 제가 동경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빛나는 자리에 오른 것을 그저 기뻐하고 축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거 아시나요.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빛이 밝을 수록, 그림자도 더더욱 짙어진다는 것을.
 
히노 아카네라는 태양에, 사기사와 후미카의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생겨났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갓 태어난 악마가 속삭였습니다.
 
저는 악마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아카네씨를 질투했습니다.
 
제가 서고 싶었던, 제가 서야 했을 자리에 서있는 그녀를.
 
저는 아카네씨를 시기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싶었던, 제가 가져야 했을 재능을 지닌 그녀를.
 
저는 아카네씨를 증오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서서, 기어코 저를 끌어내, 제가 얼마나 형편없고, 불쌍하며,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그녀의 행동에. 저를 발가벗긴 채 거리에 드러내는 그녀의 친절에. 저와 그녀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저는 그 어떤 것에서도 그녀를 이길 수 없으며 다가갈 수 없으며 그녀와 대등할 수 없으며 그녀를 영원히 존경하고 동경하기만 해야 한다는 것을 속삭이는 그녀를.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제가 원했던 것은 오직 당신을 찬미하는 것이었는데, 하느님께선 제게 갈망만 주시고 절 벙어리로 만드셨으니 어째서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음악으로 당신을 찬미하길 원치 않으신다면, 왜 그런 갈망을 심어 주셨습니까. 욕망을 심으시곤 왜 재능을 주지 않으십니까." 라고요.
 
하느님의 가장 큰 죄는, 그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욕망을 주며, 재능은 주지 않는 것.
 
그렇기에 저는 재능을 미워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미웠습니다.
 
저는 히노 아카네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웠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그녀가 몰락하는 꼴을 보고 말겠다고.
 
그저 웃는 얼굴로 다른 이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새로운 욕망을 새겨넣었습니다.
 
 
 
---------------------------------이하 후편에서 계속------------------------------------
 
 

댓글 2개:

  1. 좋은 글 보고 갑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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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편이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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