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8일 일요일

Man To Man

온 몸을 꿰뚫는 듯한 전류에 파일럿은 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럽고 짜증나는 기상 방법에도 투덜대거나 멍하니 있을 틈은 없었다. 시야 전방, 모니터 전체에 붉은 글자로 ‘WARNING’ 이라는 글자가 점멸하고 있었으니까. 의식이 반응하는 것보다 몸이 반응하는 쪽이 빨랐다. 반사적으로 조종간을 뒤로 당기자, 관성에 의해 파일럿의 몸은 시트에 파묻히듯 뒤로 짓눌렸다. 갑작스러운 기동으로 블랙아웃이 일어났지만, 그 대신 방금 전까지 그의 기체가 있던 자리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피할 수 있었다. 지면에 격돌한 미사일은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고, 불과 몇 초 사이에 꽤 뒤로 물러났음에도 충격파가 기체를 뒤흔들었다. 튀어나온 파편과 돌멩이가 기체를 두드리며 깡, 깡, 하는 짧지만 강렬한 금속음을 연주했다.

“니미...”

씹어 뱉듯 튀어 나온 욕설을 마무리할 틈도 없었다. 여전히 모니터에는 록온 된 상태라는 경고가 점멸하고 있었으니까. 사이렌과 닮은 느낌의 경고음이 반복적으로 콕핏 내에 울려 퍼졌다. 파일럿은 다시금 조종간을 움직이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기체 사방에 달린 수많은 카메라는 사방 360도 전체를 감지하고, 그를 구형 콕핏 내에 설치된 모니터에 비추고 있었다.

전황은 난전 상태였다.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치고, 미사일과 로켓이 날아다니고, 지면에는 폭염이 터져나갔다. 기체를 고속으로 회피기동 하느라 모니터에 표시된 모습들은 마치 날아가듯 흐릿하게 보였다. 그 사이를 파일럿은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진 신경으로 살펴봤다.

지면을 달리는 보병들. 포탄이 폭발하며 생긴 구덩이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들. 아군 전차 한 대가 포탄을 날린 순간, 바로 머리 위에서 내리꽂는 미사일에 꿰뚫렸다. 포탑 상부 장갑판이 충격에 움푹 들어간 것도 잠시, 내부의 폭약이 유폭했는지 포탑은 사방으로 금속 파편을 흩날리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자신의 기체와 마찬가지로 지면을 미끄러지듯 활주하던 다른 기체를 따라가던 예광탄의 줄기가 교차한 순간, 기체는 마치 경련하듯 총탄에 춤을 추며 팔다리를 휘저었다. 활주하던 그 속도 그대로 지면에 고꾸라져, 그 자리를 지나가던 보병들을 덮쳤다. 흙먼지와 피보라가 사방에 피어올랐다. 채 몇 초도 되지 않는 그 광경이 끊어질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파일럿의 신경에는 선명하게 새겨졌다.

울려 퍼지던 경고음이 순간 마치 발광하듯 빨라졌다. 파일럿의 호흡이 순간 멈췄다.

“미사일, 10시 방향.”

기계로 합성한 듯한 목소리가 경고음 사이로 울려 퍼졌다. 멈췄던 숨을 가쁘게 내쉬며 파일럿은 기체의 말을 따라 10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니터로 보이는 하늘에 작은 점이 보였다.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레이더 화면을 보자 급속도로 접근하는 점이 보였다. 파일럿은 방금 전에도 그러다 기절해, 기체가 강제로 기상시켰다는 사실을 잊은 듯 조종간을 격하게 움직였다. 가속도를 무시한 무리한 기동에 기체가 울부짖는 듯한 금속음의 비명을 내지르고, 그 비명과 비슷한 소리를 파일럿은 내지르고 싶었지만 압박감에 폐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만을 낼 수 있었다. 피가 머리로 온통 몰리며 시야가 새빨갛게 변했다. 사라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파일럿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파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기체의 등 위로 새하얀 줄기를 그리며 플레어가 천사의 날개처럼 펼쳐졌다. 어느새 점에 불과했던 미사일은 거대해져 있었다.

눈을 감을 틈은 없었다. 바늘 끝보다 얇아진 시야를 붙잡으려 노력하며 파일럿은 조종간을 여전히 움직였다. 폭발음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플레어를 발사한 보람이 있는지, 열원을 쫓아 빗나간 모양이었다. 조종간을 당기는 손과 페달을 밟던 힘에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자, 붉어졌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짓눌리는 G의 압박에서 벗어난 파일럿의 몸은 부족해진 공기를 들이마시고자 크게 들이셨다. 산소마스크를 통해 산소가 공급되고, 지끈거리는 두통에 신음하며 파일럿은 가빠진 숨을 고르고자 애썼다.

“발사지점 확인, 빨리!”

파일럿은 짧고 강하게 외쳤다. ‘알겠다’ 라든가, ‘라져’ 같은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답보다 모니터에 답변을 띄우는 것이 더 빠르니까. 기체는 파일럿의 요구에 순순히 답했다. 11시 방향, 거리는 1.5클릭. 파일럿이 주시하자 모니터는 바라보는 지점을 빠르게 확대했다. 이쪽을 향한 채 갈지자로 미끄러지는 적의 기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3식 중장엽병. 배치된지 얼마 안 되는 신형이다. 파일럿은 빠르게 상황을 확인했다.

들은 정보에 의하면 무장은 체인건과 6연장 소형 미사일 포트 하나, 대구경 중박격포 한 문, 그리고 근접병기. 대단한 신병기는 없지만 견실한 무장이다. 확대된 모니터로는 미사일 포트의 빈 구멍이 몇 개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파일럿은 방금 전, 흐릿한 의식 사이로 들었던 폭발음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폭발음은 두 번. 아까 쐈던 미사일도 저 녀석이 쐈던 거라면 총 3발을 쐈다. 얼마나 남아있을까.

“씹!”

그런 생각을 하며 기체를 무작위로 움직이던 파일럿은 다시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면을 달리던 적 기체가 상체를 살짝 숙이는 게 보였기에. 그 동작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에. 미사일 포트 반대쪽에 달려있던 긴 뭔가가 움직이더니, 섬광이 보였다. 파일럿은 급하게 왼쪽 페달을 두 번 밟았다. 각부와 등 뒤에 달려있는 긴급 부스터가 고오오, 하며 울었다. 몸이 반쯤 둥실, 하고 떠오르는 느낌은 짧았다. 콰ㅡ앙! 하는 폭음이 한 박자 느리게 들리고, 다시 파편이 기체를 두드렸다. 우측으로 비스듬하게 떠올랐던 기체는 그대로 지면에 착지했다. 충격은 격렬해 파일럿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머리를 지탱하는 목에 힘을 줬다. 충격의 순간 넋을 놓고 있으면 관성으로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

“우측 각부 피로 축적.”

기계음은 냉정하게 기체의 상태를 보고했다. 알고 있다든가, 그럴 것 같았다든가 하는 불평을 입 밖으로 낼 틈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지금까지 계속 혹사해왔다. 이런 식의 회피가 몇 번 더 이어진다면 버티는 건 무리다. 지면에 내려앉은 순간 기체의 발목이 뒤틀려 박살나며 그대로 충돌, 속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십수 톤짜리 쇳덩이가 빠른 속도로 지면에 격돌하는 거다. 온 몸이 박살날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파일럿은 적 기체를 주시한 채 왼손 조종간의 검지 부분 버튼을 눌렀다. 기체의 왼팔이 움직이며, 팔 아래에 장착된 3연장 체인건이 불을 뿜었다. 조준은 파일럿이 주시하는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발사되는 예광탄이 마치 레이저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적 기체는 발포를 확인함과 동시에 갈지자로 다가오던 기체의 방향을 반대로 바꿨다. 예광탄의 줄기가 그걸 따라가 적 기체의 왼편을 두들겼지만, 장갑에 튕겨 예광탄이 사방으로 빗발치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팔 아래 장착된 체인건은 대보병용 소구경포고, 적 기체는 신형 중장엽병이니까. 전면 방호력은 IFV보다는 높을 것이다.

“3식 중장엽병 상대로는 50mm 이상의 화기를 추천.”

무심하게 조언하는 기계음을 향해 쌓여있는 분노와 짜증을 격렬한 욕설로 토해내고 싶었지만, 파일럿은 목구멍에서 숨과 함께 다시 집어넣었다. 그런 영화 같은 일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으니까. 이쪽의 남아있는 무장은 이제 3초도 남아있지 않을 좌완의 체인건과, 손에 들고 있는 60mm 단축형 단포신기관포 정도. 왼쪽 어깨의 로켓발사기는 아까 다 써버린 뒤고, 오른쪽 어깨에는 근접전에 대비한 토마호크를 달아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반동포나 중박격포를 달고 올걸. 후회는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빠르게 담아뒀다. 욕설과 마찬가지로,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이쪽은 좌우 횡기동을 하며 대응할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적 기체는 우직하게, 조준을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을 할 뿐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모니터에 표시된 거리는 이제 700m.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가는 벌집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광경을 둘러봤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소수의 보병과 차량들이 보일 뿐, 이쪽을 도와줄 만한 아군은 보이지 않았다. 위안이라면 적의 공세 역시 한 꺼풀 꺾였는지 접근하는 중장엽병 외에는 그리 치명적인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저기 있는 전차나 IFV가 이쪽을 보고 날리면 그 순간 끝이지만.’

거친 호흡을 계속하며 파일럿은 생각했다. 지금 기도할 것은 제발 다른 적들이 이쪽을 신경 쓰지 않고, 저 중장엽병과 1 대 1의 대결을 주선해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게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눈꼽만큼이라도 있었으니까.

“주의.”

기계음에 주위를 둘러보던 파일럿은 다시 중장엽병에게 집중했다. 거리는 500m. 충분히 좁혀졌다고 생각했는지 적 기체는 체인건을 들어올렸다. 이제 확대된 화면을 통해 적 기체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사일 포트에 남아있는 미사일은 하나. 체인건은 3연장 57mm. 표준형인 이쪽은 포화에 2초만 온전히 노출되어도 산산조각난다. 극도의 집중과 긴장에 심장은 터질 것처럼 격렬하게 두근대고, 호흡 역시 너무 가빠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방금 전이야 데드맨 스위치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이 거리에서는 잠깐 혼절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다.

중구경 체인포인 만큼, 적 중장엽병의 기체는 양 손으로 체인건을 파지했다. 가쁜 호흡으로 타이밍을 쟀다. 적 기체에서 빛이 보인 순간, 파일럿은 기체를 있는 힘껏 좌측으로, 적 기체에게 접근하는 방향으로 밀었다. 빛줄기가 자신을 잘라버릴 듯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호흡은 멈춘지 오래였다. 빠득,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를 악 물고, 미친 듯이 펌프질 해대는 심장이 뿜어대는 핏줄기에 폐에 남아있는 숨만으로 어떻게든 산소를 공급한다. 이쪽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총알보다 빠를 수는 없다. 하지만 가까이 붙어서, 적의 오른쪽으로 파고들면 상대는 조준을 위해 기체를 돌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몸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에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지만, 바깥쪽을 향하는 것에는 신체를 돌려야만 따라잡을 수 있다.

어느새 발포하는 불꽃이 보이는 것과 부우웅ㅡ하는 발포음의 시간차가 사라졌다. 거리는 음속 이하. 적 기체도 바보가 아닌지 수 초간 이어지던 체인건 사격을 그만뒀다. 그 사이 탄약을 많이 소모했기를 바라며, 파일럿은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페달을 꾹 밟아 부스터를 소비하며 기체를 뒤로 힘껏 밀었다. 시트에 파묻히는 신체. 격렬하게 꺾여 헬멧을 썼음에도 통증이 느껴지는 뒤통수. 관성에 의해 발끝으로 혈액이 모이며 시야 전체가 검게 변하는 블랙아웃. 귀에 들리는 이명과, 격렬한 드럼소리 같은 심장 소리. 몸을 뒤흔드는, 이동방향을 예측하고 날아온 중박격포의 폭발음.

붕 떠올랐던 기체가 다시 지면을 밟고, 이번에는 몸이 반대로 앞으로 튕겨나간다. 시트벨트가 갈비뼈를 부술 듯이 흉부를 압박한다. 마지막 남은 의식으로 목을 지탱해, 앞으로 꺾여 목이 부러지는 것을 방지한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피가 몰려 시야는 붉게 변하고, 반고리관 안의 림프액이 출렁이며 깨질 것 같은 두통, 내장 전체를 토해내고 싶어지는 울렁거림을 몰고 온다. 참지 못하고 악 물었던 입을 ‘푸헉’ 하며 열자, 위액과 함께 붉은 액체가 전방 모니터에 튄다. 하지만 통증을 참을 여유는 없다. 침과 콧물, 위에서 뿜어져 나온 위액과 피로 얼굴을 물들인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적 기체를 바라보며 다시금 조종간을 움직인다. 거리는 이제 200m 안쪽. 이명 사이로 다시 사이렌이 울린다. 미사일이 내뿜는 연기가 보이는 거리.

“영격.”

기계음에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으로 미사일을 바라보자, 기체가 멋대로 왼손을 움직인다. 부우우웅, 하는 발포음이 들리며 예광탄이 미사일을 향한다. 시야 절반을 가리는 폭발. 한 순간 적 기체의 모습을 놓쳤지만, 광량 필터가 폭발의 빛을 조절해 모니터에 띄워줘 눈이 멀지는 않았다. 적 기체는 다시 이쪽을 보며 체인건을 들어올렸다. 3연장 총신이 빠르게 원을 그리는 순간, 파일럿은 오른쪽 조종간의 검지를 눌렀다. 이미 적을 조준하고 있던 오른팔의 단포신 기관포가 퉁, 퉁, 하고 폭음을 낸다.

발사속도를 종합하면 화력은 체인건 쪽이 훨씬 우수하지만, 체인건은 초탄을 발사하기 전 총열을 회전시켜야 한다. 반면 이쪽은 방아쇠만 누르면 즉각 반응. 콤마초 이하의 차이로 이쪽의 포탄이 먼저 날아갔다. 단포신이지만 이미 양쪽의 거리는 ‘초’가 붙을 정도의 지근거리다. 발포와 거의 동시에 포탄은 착탄했다.

하지만 파일럿의 기대와는 다르게, 포탄은 중장엽병을 꿰뚫지 못했다. 체인건을 향한 포탄이 폭발하기 직전, 적 기체는 체인건에서 양 손을 놔버렸다. 폭발. 충격에 체인건이 유폭하며 사방으로 빛줄기를 뿜는다. 어째서 빗나갔는가. 파일럿은 찰나와도 같은 순간 깨달았다. 적 기체가 발포하면 회피해야한다는 생각에 총구에 집중하고 있던 것이 실수다. 모니터 내부에서 파일럿의 시선을 감지하던 카메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조준선을 시선 정 가운데ㅡ적 기체의 체인건에 뒀던 거다.

유폭한 총탄이 적 기체를 두들기고, 사방으로 퍼진 총탄 중 일부는 이쪽을 향해 왔다. 적 기체는 크게 비틀거렸지만, 제대로 발사되지 않은 57mm 포탄은 중장엽병의 장갑판을 두들길 뿐, 제대로 관통시키지 못했다. 반면 파일럿 쪽으로 날아온 포탄 한 발은 우완 어깨를 관통해버렸다. 일반형의 장갑판은 57mm 포탄을 제대로 방호할 수 없었다.

“니미...”

적 기체가 비틀거린 사이 다시 거리를 좁히던 파일럿은 모니터에 표시된 피해보고를 보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눈을 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믿는 신도 없지만 버림받은 기분이었으니까. 날아온 포탄은 우측 어깨 관절을 관통, 우완 시스템 전체를 다운시켜버렸다. 이제야 겨우 자세를 바로잡는 중장엽병에게 단포신 기관포를 한 발이라도 꽂으면 끝일 텐데,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반응은 없다.

“씨발!”

파일럿은 악다구를 쓰며 기체의 조종간을 힘껏 밀었다. 발밑의 페달도 있는 힘껏 밟았다. 부스터가 연료통에 남아있던 마지막 연료를 게걸스럽게 탐하며 불꽃을 내뿜었다. 적 기체가 겨우 자세를 잡는 순간, 기체는 그대로 오른쪽 어깨로 그걸 받아버렸다. 충격에 다시 한 번 파일럿의 몸이 사방으로 튕겨나갈 듯 흔들렸다. 이제는 목에 힘을 줄 겨를도 없어 머릿통이 마치 핀볼처럼 제멋대로 흔들렸다. 몸통 박치기에 적 중장엽병은 이번엔 균형을 잃고, 뒤로 밀리며 넘어져버렸다. 부스터를 다 소모한 파일럿의 기체는 그 위를 깔아뭉개듯 짓누르며 멈춰 섰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3초의 정적. 그 사이 흙먼지가 다시금 지면에 내려앉았다.

침묵. 그리고, 찌릿.

“ㅡ씨발!”

온 몸을 꿰뚫는 전류에 파일럿의 의식이 돌아왔다. 입 안 가득한 침, 위액, 피를 토하며, 콧구멍 속에 고여 있던 콧물과 피의 범벅을 내뿜는 호흡과 함께 뿜어내며 파일럿은 있는 힘껏 욕설을 내뱉고는 조종간을 움직였다. 다리로 몸을 짓누르며, 겨우 움직이는 왼팔이 적 중장엽병의 콕핏 바로 위에 체인건을 가져다 댄다.

파일럿이 왼손 조종간의 발포버튼을 누르는 순간, 적 기체가 움찔, 하고 경련했다. 적 파일럿 역시 기체가 전류를 흘려 강제로 일으킨 것이다. 부우우웅ㅡ하고 왼팔 밑의 체인건이 불을 뿜는다. 1초. 용광로와 같은 불꽃이 장갑판에 피어났다. 아무리 소구경이라도, 이 거리에서 체인건의 연사력으로 두들긴다면 장갑판에 손상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일럿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낸 채 약한 웃음을 지었다. 2초.

하지만 그 순간, 적 기체의 오른팔이 왼팔을 움켜줬다. 파일럿은 조종간으로 억누르려 했지만, 적 중장엽병은 힘으로 움켜쥔 왼팔을 밀어버렸다. 튀어 오르는 불꽃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더니, 적 기체 옆의 바닥에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3초. 끼긱, 끼기긱, 하는 금속음과, 위이잉ㅡ... 하고 총열이 공회전을 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중장엽병이 삐걱거리는 왼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향하는 것은 그저 쥔 채, 움직이지 않는 기체의 단포신 기관포. 빼앗아 쥐어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60mm 포탄이 이미 우그러지고 구겨진 장갑판을 뚫고 콕핏 안으로 들어와, 파일럿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파일럿은 충격에 몇 개의 스크린이 깨져 상이 일그러진 화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굳어버린 석상처럼.

“경고.”

무감정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파일럿은 그저 자신의 기관포로 삐걱거리는 손을 움직이는 적 기체의 팔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기 탈취 위험, 경고.”

다시 한 번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느새 적 중장엽병의 손이 굳어버린 오른손을 비틀고 있었다.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귀에 가득한, 차분해진 심박음 사이로 기계음이 다시 들려왔다.

“자체대응.”

그 순간, 기체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왼쪽 다리가 삐걱거리며 금속음을 연주한다. 오른쪽 다리가 비명을 토해낸다. 서보 모터가 굉음을 울리며 타버릴 듯 돌아가며, 토크를 극단으로 올렸다. 적 기체에게 붙잡힌 왼팔이 삐걱거리고, 기체가 부들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애를 쓴다. 콰직, 하는 금속음과 함께 휘청, 하고 기체가 순간 주저앉아, 오른손을 비틀어대던 적 기체의 손이 충격에 빠져버렸다. 타는 냄새가 밀폐된 콕핏 안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끼기긱, 끼긱, 끼기기기긱, 하고 금속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틀린다. 왼쪽 다리가 적 기체 오른팔의 관절을 무릎으로 짓누른다. 삐걱, 삐걱, 삐이걱,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기체의 왼쪽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일그러진 모니터의 피해보고창이 하나씩 둘씩 붉게 물든다. 중장엽병이라는 칭호에 맞게 더욱 출력이 강한 적 기체의 오른손에 끝까지 왼손을 붙잡고 있었지만, 관절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결국 금속부하를 못 이겼는지 까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뜯겨나갔다.

그제야 파일럿은 정신을 차렸다. 마치 온 몸을 전류가 꿰뚫는 것 같은 감각에.

“ㅡ으아아아아아아아!”

왼손의 조종간을 움직인다. 골격 자체가 뒤틀렸는지 잘 움직이지 않는 기체의 왼팔이 삐걱삐걱 거리면서도, 그에 반응해 움직인다. 오른쪽 어깨의 웨폰랙이 철컹, 하고 전면으로 튀어나온다. 삐걱거리는 왼손이 웨폰랙에서 튀어나온 토마호크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 손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뒤늦게 깨달았는지, 정신을 차린 건지, 적 중장엽병의 부스터가 고오오오, 하고 불꽃을 내뿜었다. 거체를 움직이는 부스터가 힘을 더하고, 짓눌린 상태에서 그대로 비스듬히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체의 왼팔이 힘껏 내려쳤다.

잔뜩 우그러진 중장엽병의 전면장갑이 안으로 말려들어가고, 그곳에 토마호크를 박아 넣은 채로 기체는 더 이상 미동도 없었다. 추력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중장엽병이 마치 힘이 빠진 듯, 그 부스터의 불꽃이 사그라진 채 지면으로 떨어져, 쿠웅ㅡ... 하는 무거운 금속음을 냈다.

침묵. 1초, 2초, 3초. 덜컹.

삐그덕, 삐그덕 거리며 기체의 콕핏이 열렸다. 자신의 몸을 밀어 올려야 하기에 유압식 실린더가 덜컹, 덜컹하며 마지막 힘을 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는지, 겨우 사람이 기어나올 정도의 구멍을 열고는 멈춰섰다.

침묵. 1초, 2초, 3초, 4초, 5초. 삐그덕.

그 구멍으로 손이 삐져나왔다. 우그러진 장갑판을 붙잡고 힘을 낸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파일럿은 구멍에서 무거운 몸을 끄집어냈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힘이 빠진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쥐어 짜내며 침묵한 자신의 기체 위에 올라섰다.

모래먼지가 가득한, 누런 시야. 여전히 들리는 총성과 폭발음.

“퉷.”

입에 남은 피와 위액, 침, 그리고 결국 깨진 이 조각을 뱉어내고, 파일럿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눈물이 흐른 자국이 있는 흐린 시선을 돌렸다.

파일럿의 시야 끝에 있는 것은, 이쪽을 향해 포신을 겨눈 적의 전차.

못해먹겠네. 그런 생각으로 파일럿은 가슴팍의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냈다. 역시나 갈비뼈가 부러진 건지 통증이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입에 담배를 문 뒤, 라이터를 찾아 더듬거렸다. 적 전차는 마치 기다려주는 듯 그 광경을 가만히 조준하고 있었다.

지포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이고, 파일럿은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통증에 기침을 하며 침과 피를 토해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제 됐다는 듯 적 전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 전차가 있던 자리에서, 저 하늘 끝에 다다를 것 같은 폭염이 피어올랐다.

펑, 펑, 펑. 폭염이 전장 여기저기에 피어올랐다. 고오오오ㅡ 하고 지면 전체가 울렸다. 겨우 비틀거리는 몸에 중심을 잡은 파일럿은 담배를 입에 다시 물며 하늘을 올려봤다.

구름을 뚫고, 거대한 구조물이 내려오고 있었다.

전함이었다. 우주전함이었다.

사방의 포탑이 지면을 향해 불을 뿜는다. 강습용 캡슐 투하구에서 몇 개의 강하 캡슐이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뭔가가 시야 저편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아군의 전투기가 저 멀리의 적을 향해 포화를 토해내고 있었다.

“씨발.”

파일럿은 턱끈을 풀고 무거운 헬멧을 벗어 툭, 하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통, 통, 하는 소리를 내며 헬멧은 기체에서 떨어져 지면에 두어 번 튕긴 뒤 멈췄다.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고, 파일럿은 중얼거림과 함께 토해냈다.

“이 짓거리도 더는 못해먹겠네.”

하늘을 올려보며 파일럿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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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7일 ‘장르 코드 전력'(https://twitter.com/genrewritingst1) 주제 ‘로봇’에 참가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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