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7일 목요일

Broken Flower(가제) - (3)

 새삼스럽지만, 나는 가끔 그녀의 꿈을 꾸고는 했다.
 꿈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늘 달랐다. 하지만 기억에 있는 모습들이었다.
 적의 포위망이 좁혀올 때, 참호 안의 탄약은 줄어들고 전우들이 하나 둘 죽어갈 때, 그녀의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슬픔이나 애절함을 느끼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계속해서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소모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달려오던 익숙한 군복과 익숙한 모습. 후방의 진지에서 챙긴 탄약을 잔뜩 짊어진 채 참호로 뛰어들어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는 그녀는, 내게 여신처럼 보였다. 전장의 여신.
 또 다른 모습도 있었다. 그 사건 덕분에 훈장을 받은 그녀는 우리들의 막사에 거하게 취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양 손에는 축하 자리에서 슬쩍 했다는 술을 잔뜩 챙겨서는. 우리는 그녀의 머리에 맥주를 붓고 떠들며 즐겼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내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한 그녀는 내게도 술을 붓고는 잔을 맞부딪히며 웃었다. 술냄새가 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제멋대로인 주정뱅이의 모습이었지만, 내게는 그것도 마치 여신처럼 보였다.
 사열을 할 때의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전날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칼 같은 각이 잡힌 자세로 그녀는 경례를 올리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우리는 그녀를 보며 박수를 쳤고, 그녀는 다시 우리에게도 경례를 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 다른 전우들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해서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온 그녀는 내게 어깨를 기대며 역시 과음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올라올 것 같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막사 뒤에서 그녀의 등을 두들겨주며 나는 이런 모습 역시 여신과 같다고 느꼈다.
 가끔 기억에 있지 않은 모습도 있었다. 아마 내 뇌가 멋대로 상상한 그녀의 이미지. 섹시한 옷을 입고 요염한 자세를 취한 그녀는 침대 옆의 빈 자리를 두드리며 나를 유혹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순간을 꿈꿨다. 그 외의 많은 것도 상상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녀가 내 옆에 누워있었으면, 내게 요리를 해줬으면, 그런 꿈도 꿨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의 여유, 혹은 자유가 생긴 나는 그녀를 찾아다녔다. 사고로 퇴역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퇴역할 정도의 사고라면 분명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가능하면 위로하고 싶었다. 곁에 있고 싶었다.
 어렵게 수소문을 해서, 다소 억지를 부려가며 찾아간 고향집에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행방을 역으로 궁금해하며 같은 부대의 전우였던 내게 눈물을 흘리며 여러 것을 물었다. 이틀 정도 머물면서 나는 그들이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들려줬고, 내가 모르는 그녀의 과거를 엿들었다. 담배를 피우며 그녀가 살아온 어릴 적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의 집을 바라봤다.
 그녀가 전출 갔던 부대는 찾을 수 없었다. 전쟁 중에 해체됐다는 말에 나는 구성원이라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지만, 결과는 없었다.
 5년이라는 세월 사이에, 그녀를 찾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주어진 책임을 다 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기도 했고, 내게도 내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기도 했고, 시간 속에 추억과 그리움과 풋내나던 첫사랑이 열화하기도 했다. 대신 그녀는 가끔씩 여전히 꿈속에서 나를 찾아왔다. 혹은 내가 찾은 걸까.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아아아아아아ㅡㅡㅡㅡ악!"
 찢어지는 것 같은 높은 비명소리에 눈을 떴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것 역시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높고 찌르는 듯한,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찬 비명에는 언제나 몸이 움찔거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더듬거리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비명의 근원지를 찾아갔다. 달빛도 없는 깊은 밤이었다. 새벽일지도 모르겠다. 시계를 볼 여유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사라진 양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그녀의 경악에 찬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불을 키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양 팔을 잡았다. 부서질 물건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하지만 힘을 줘서.
 "진정해. 괜찮아."
 "너야?"
 나는 그녀가 날 볼 수 있도록 얼굴을 가까이 했다. 공포로, 경악으로 일그러진 채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비명을 멈추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야?"
 "그래, 나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팔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그녀는 울먹거리는 채로 내게 몸을 맡겼다. 짧은 양 팔로 나를 안으려는 듯 했다. 나는 그녀를 안아줬다.
 "역시 너였구나. 날 구하러 와줄 줄 알았어. 네가 도와주러 올 줄 알았어."
 "그래, 물론이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하던 목소리였다. 독기 어리지 않고, 늘 비웃거나 놀리는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우면서도 푸근한 목소리. 물론 그 안에는 떨리는 당황함과 불안이 담겨있었지만. 나는 대답했다.
 "대인유탄에 당했어. 괜찮아."
 "팔은? 내 다리는? 발 끝에 감각이 없어."
 "괜찮아."
 나는 그저 그 말을 반복했다. 나 자신에게 들려주듯.
 "왜, 더 빨리 오지 않은 거야? 네가, 네가 있었으면..."
 "미안해. 이젠 괜찮아. 괜찮아."
 잠시 그녀는 거친 호흡을 계속했다. 울먹였다. 훌쩍였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에게 들려주는지, 내게 들려주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거짓말쟁이."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독기가 담긴, 비웃는 것 같은 목소리가.
 "구하러 온 적 따위, 없잖아."
 "그래, 맞아."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녀를 놓아줬다. 그녀가 나를 밀쳐낸다고 느꼈으니까. 그녀는 여전히 눈물이 맺힌 채로 나를 바라봤다. 어쩌면 노려보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악몽인 거다.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악몽인지 모를 정도로 깊은, 악몽.
 가끔씩 그 악몽 속에서, 그녀는 그 순간을 현실로 착각하고 했다. 지금이 그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고,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나였는지, 그 자리에 있을 리도 없는 나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희망을 품고 싶었지만, 대책 없는 희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늘 내 눈 앞에 있는 존재가 가르쳐주곤 했다.
 "진정됐어?"
 나는 물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그녀는 웃었다. 늘 그렇듯, 일그러진.
 "그래, 덕분에 진정됐어. 꿈도 뭐도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도 기억해냈고, 그 사이에 있던 일도 기억해냈고."
 "그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를 악 물었다. 왼팔을 바라봤다.
 "손이 아파."
 "미안, 너무 세게 잡았나보네."
 "손이 아파."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미안해."
 "손목이 아프다고!"
 내 말에 그녀는 고함을 쳤다. 나는 그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왼쪽 손목이, 쑤시듯이 아파!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프다고!"
 그녀는 악을 썼다. 왼팔을 흔들면서.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듯이. 물론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왼쪽 손목은 이미 5년 전에 사라졌으니까. 존재하지 않으니까.
 환지통, 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절단되어 사라진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증상. 없다는 걸 아는데도, 보이지 않는데도, 존재하지 않는데도, 통증은 느껴진다. 환장통, 이라는 속어는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프단 말이야...!"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손목을 움켜쥐듯 몸을 구부리며 말했다. 고함이 되고 싶었지만, 고통 탓에 쥐어짜는 것 같은 목소리가 스며나왔을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뭐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안아줘."
 잠시 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물론 그녀를 안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매단 한쪽 뿐인, 광채 없는 죽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안아달라고!"
 "안 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말하는 '안는다'는 것이, 방금 했던 것처럼 내 품 안에 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내 말에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고자야?"
 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웃음까지 나왔을 거다.
 "어차피 창관까지 왔잖아. 이제와서 동정이니 뭐니 하는 것도 아닐 거 아니야!"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그녀와 알고 지낼 때라면 몰라도 나도 여자를 한 번도 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돈을 내고 여자를 샀다. 몇 번이나 샀다. 내 덤덤한 대답에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그럼 도대체 왜 날 산 거야? 왜 날 찾아온 거야? 애원이라도 해줘?"
 "안 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분하다는 듯,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양 팔로 내 목을 조을 듯 달려들었다. 물론, 그녀의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고통을 주는 양 손으로는 내 목을 조를 수 없었다. 붕대에 감싸인 뭉툭한 팔뚝만이 목에 닿았을 뿐이었다.
 "왜 안 되는데!"
 "왜 내게 안기고 싶은 건데?"
 나는 물었다. 담담하게.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내 말에 다시 하, 하고는 웃었다.
 "너 따위가 아니라도 좋아. 누구라도 좋아. 안기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그걸 네가 빼앗아갔잖아! 날 사버려서!"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그녀는 팔뚝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외쳤다.
 "남에게 안기는 순간만큼은, 이 고통도 잊을 수 있단 말이야! 손목따위, 신경쓰이지 않는단 말이야! 쾌락에 몸을 맡겨버리면, 던져버리면, 그 순간만큼은 다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날 안아!"
 그녀는 명령하듯 내게 외쳤다. 나는 대답했다.
 "안 돼."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침착한 대답에, 그녀는 다시 웃었다. 일그러진 미소를 더욱 일그러트리며.
 "이런 몸이라서?"
 "그런 게 아니야."
 "네가 그리던 내가 아니라서? 네가 기억하던 내 모습이 아니라서? 팔다리도 없는 병신이라? 눈깔 한 짝이 없는 병신이라? 온 몸이 화상과 흉터 투성이에, 밤마다 피고름을 질질 흘리는 괴물이라서? 그딴 여자는 안기 싫다는 거야? 더러우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벌리고 몸을 판 창녀라서, 안을 수 없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고함을 치고 싶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라는 걸 알았기에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최대한 평범함을 가장하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이딴 몸뚱이로 할 수 있던 건 그것 뿐이었어! 이딴 괴물 같은 팔다리로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다고! 그래, 기분도 좋았어! 이 통증도 잊을 수 있었고, 누군가에게 필요가 된다는 것도 좋았고, 어쨌든 쓸모가 있는 것도 좋았어!"
 "물어보지 않았어."
 어금니를 다문 턱에 조금 힘을 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너야 작대기나 흔들면 되겠지! 날 상상하면서, 내 원래 몸뚱이를 상상하면서! 그때처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나는 그럴 수도 없어! 이딴 팔다리로는 그럴 수도 없다고! 혼자서는 기분 좋아질 수도 없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딴 것, 알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딴 팔로 뭘 할 수 있는지 알아? 뭐가 제일 미칠 것 같은지 알아? 그래, 지금처럼 이 손목이 아픈 것도 물론 미칠 것 같지! 손등이 가려운 감각을 알아? 그걸 다른 손으로 긁을 때의 쾌감을 알아? 닿지 않는 등을 어떻게든 손을 움직여 긁는 느낌은? 간지러운 귀를 손가락을 넣어서 후비는 감촉은? 그럼 간지러워 미칠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는데 도저히 닿지 않아서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붕대로 감긴 팔뚝만 허공에서 휘젓고 있는 느낌은?"
 그녀는 계속해서 외쳤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뭐가 그리운 줄 알아? 전쟁터에서, 이 전쟁이 끝나면 뭘 하려고 마음 먹었는지 알아?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산해진미를 먹는 것 따위는 상상도 안 했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싶었지. 손으로 수도꼭지를 돌리고, 선 채로 샤워기에서 흘러내리는 온수를 머리 끝부터 맞으면서 머리를 감고 싶었어. 손톱에 페티큐어도 칠하고 싶었지. 전쟁터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기분전환 삼아서 동네를 산책하는 것도, 조깅하는 것도 좋았어. 책을 읽는 것도 좋지. 책장을 넘기는 것, 그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감촉이 그리웠어. 그리워! 예쁜 구두를 신는 것도 좋지. 그대로 춤을 추는 것도 좋아!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것, 발끝으로 다른 발등을 긁는 것도 좋아!"
 토해내듯, 그녀는 외쳤다. 침이 튀고, 눈물이 흩날렸다. 발목 밑이 없는 양 다리가 버둥거린다. 짧고, 뭉툭하고, 길이가 다른 양 팔이 흔들린다. 마치 버둥거리듯. 웃기다는 생각도, 귀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슬펐다.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부러질 정도로. 온 힘으로.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 말없이, 묵묵히, 최대한 무표정을 가장하며.
 "그러니까, 날 안아! 안으란 말이야 이 고자새끼야! 그 순간만은, 그런 걸 전부 잊을 수 있으니까! 전부 던져버릴 수 있으니까! 그 순간만은 이딴 몸뚱이든 뭐든 신경쓰이지 않으니까! 네가 빼앗았잖아! 그럼 네가 책임을 지란 말이야! 창녀를 샀으면 할 일은 하나 뿐이잖아!"
 표독스럽게 외치던 그녀는 다시 양 팔로 내 목을 움켜쥐려 했다. 그리고 그 대신 내 가슴을 두들겼다.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있는 힘껏 때리고 있을 텐데, 두드리고 있을 텐데, 부러트릴 듯이 두드리고 있을 텐데.
 나는 그때마다 그녀의 붕대가 검게 물드는 것이 더욱 아팠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만두지 않는 것이 아팠다.
 거친, 추위에 떨 때처럼 덜덜거리며 호흡을 내뿜는 턱을 애써 꽉 물었다. 대답했다.
 "안 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덕분에 날 두드리려던 그녀가 앞으로 고꾸러졌다. 나는 하지만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앞으로 넘어진, 침대를 기는 그녀를 그저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내가 첫사랑이라서?"
 왼팔로 상체를 어떻게든 일으켜세우려 하며 그녀는 말했다.
 "그런 내가, 이렇게 변해버려서? 널 유혹해서? 네 동경과는 달라서? 예전의 나와는 완전히 달라져서, 안아버리면 네가 가졌던 그 환상이 전부 깨질 것 같아서? 현실이라고 믿어버릴 것 같아서? 더 이상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완전히 깨달을 것 같아서?"
 떨리듯 내뿜은 호흡이 한 순간 멈췄다. 하지만 나는 애써 남은 호흡을 폐에서 쥐어짜냈다. 텅 비어버린 호흡기는 제멋대로 공기를 보급받는다. 나는 대답하려 입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
 그녀는 웃었다. 몸을 벌렁 뒤집어 천장을 향하며, 나를 보며, 그녀는 웃었다.
 "꿈을 꾸는 건, 내가 아니라 너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꺼져."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물었다.
 "손목은 좀 나아졌어?"
 그녀는 역시나 하, 하고 웃었다.
 "멍청아, 그딴 건 5년 전부터 없었어."
 "그래."
 그렇다면, 아프지도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렸다. 등 뒤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에 고마워하는 걸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통증을 잊도록 그녀의 화를 묵묵히 들어준 것인지, 이곳에 데려와준 건지, 그 모든 것이 그저 나의 희망일 뿐이고 그녀의 말대로 꿈인 건지. 사실은 그저 늘 그렇듯 비꼬는 말일지.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았다. 양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침대까지 걸어갈 힘도 없어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내 양 발은 내 몸을 어렵지 않게 지탱했다. 손으로 느껴지는 얼굴의 감촉이 익숙했다. 얼굴로 느껴지는 손의 감촉이 익숙했다. 무게가 실린 양 발목의 감각이 익숙했다.
 시계는 보지 않았다. 방 안은 여전히 캄캄할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두 발로 걸어, 팔을 뻗어 손으로 더듬어 침대맡에 둔 담뱃갑과 라이터를 쥐었다. 손으로 입에 물고 손으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손으로 담배를 쥐어 입에서 떨어트린 다음, 연기를 내뿜었다. 양쪽 눈으로 어두운 방 안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봤다. 다시 연기를 빨아들였다.
 네 개비 쯤 연속으로 불을 붙이자, 머리가 아팠다. 나는 다른 꽁초들처럼 그것들을 바닥에 대충 비벼 끈 다음, 한숨을 내뱉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이런 일에 울어버리기에는 풋내가 너무 빠진 걸까, 하고 생각했다.
 동이 터오를 무렵까지 문을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짧은 잠을 자던 그녀를 깨우고, 붕대를 갈아주고, 씻은 다음, 아침을 먹여주고 부대를 향했다.
 그녀도 나도, 밤 중의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모두 그저 꿈일 뿐이었으니까.
 이미 그녀도 나도 몇 번이나 꾼 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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